상주남산근린공원 폭포 앞에서 熱氣를 이기는 聞師會 山客四友....11:38:33
서늘한 바람을 가르며 野草의 愁苦로 상주남산근린공원 駐車場에 到着...08:45:50
신축한 데크 계단을 올라 주차장과 상주중앙초등학교가 바로 앞이다... 08:49:03
주차장 건너 尙州市廳(“저력 있는 역사도시 중흥하는 미래상주”)이 보인다... 08:49:07
신설된 데크 계단의 산뜻함과 멀리 병풍산이 보인다... 08:49:32
그늘이 짙은 상주기상대 축대를 따라 폭신한 우레탄을 밟으며 산책한다...08:52:53
길 위의 수돗가에 野草가 물을 먹고 손을 씻었다... 08:56:01
산책로 방범시설물 현황 입간판에 현위치는 남산-2와 남산-3 사이“명지APT”에서 올라오는 입구...09:03:52
파란 지붕의 명지APT에서 오르는 남산 진입로....09:04:31
쉼터를 찾아서 휴식을 갖고, 산책로에는 시민들이 가끔 지나간다... 09:17:50
산책로 아래 청구타운이 우뚝하게 솟아 있다... 09:36:16
“세영 체시빌 APT”에서 남산에 올라오는 입구의 길이 넓다... 09:40:30
松崗이 먼지털이기의 강력한 바람으로 옷단장을 한다... 09:40:45
묘원 주변의 향나무의 전지가 필요한 “의성김씨 32세 기(基)자 우(佑)자 후손 산소....09:41:36
“세영 체시빌 APT”와 삼거리 상주시 탑(라이온스 제공)이 숲 사이로 보인다... 09:42:34
잘 조성된 산소인 “學生昌寧長公諱志嚇之墓 配孺人扶安林氏福任雙墳”의 묘소...09:42:46
(학생 창녕 장공 휘 지혁 지묘 배 유인 부안 임씨 복임 쌍분)
晩峰 윤수영 米壽 기념비에서 바라 본 쉼터 모습........09:44:53
앞면 더 맑게 더 푸르게
우리의 希望
一. 平安하게 사는 것입니다. 一. 健康하게 사는 것입니다. 一. 明朗하게 사는 것입니다.
뒷면 “우리가 사는 세상”
어버이 살아 신 제 성길 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달프다 어찌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晩峰 윤수영 米壽 기념” 2008.2.22.
여름 잡초가 발을 쳐 놓은 진주 강씨 墓域 ......10:03:05
晉州姜公信倬 1884. 1. 9.~1961.12.22(陰) 配金海金氏連伊 1893. 1. 2.~1968. 1.10(陰) 之墓
晉州姜公憲錫 1914. 8.28.~1992. 6.28.(陰) 配慶州李氏玉熙 1922. 8.25.~1997. 4. 7(陰) 之墓
晉州姜公文煥 1925.10.30.~1996. 4.26 配永川崔氏性學 1922.11.26.~2012. 9.21
配全州李氏桂玉 1931. 3.15 之墓
晉州姜公相求 1948.12.20.~1988.11.25. 之墓
산소 내려가는 길에 멍석 길을 깔고, 막대로 길을 막았다....10:05:29
그늘이 이어져 松崗의 발걸음도 가볍고 산책로가 폭신하여 좋다.... 10:06:43
밭작물이 가뭄에 축 늘어지고, 연녹색 들판은 豐年을 기약한다...10:07:22
運動器具를 새로 設置하고 管理가 잘 되어 利用하기 편리하다... 10:07:57
약 오른 고추 잎이 튼실하게 자라고, 主人丈의 精誠이 한 눈에 보인다...10:08:03
刈草(예초)하는 농부는 그늘에서 휴식을 하며 담소를 즐긴다... 10:08:48
상주고등학교의 외형이 은은하며 깔끔해 보인다....10:09:32
후손들의 정성이 가득한 淸道 金氏 墓園....10:11:54
學生淸道金公諱小龍之墓 配孺人全州李氏 雙墳 酉坐(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향하여 앉음)
學生淸道金公諱月龍之墓 配孺人慶州李氏 合墳 酉坐
尙州高 뒷담 길로 南山散策路와 연결됨. 車輛沮止를 鐵網으로 막아 둠...10:13:00
수돗가에서 물을 먹고, 언덕 위의 "봉대쉼터"가 단정하게 보인다... 10:13:24
동아APT가 보이고, 新築한 깔끔한 住宅 세 채가 나란히 있다...10:14:11
화장실과 지붕이 있는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시민들이 운동하고 있다... 10:14:38
尙山金氏인 松崗이 始祖 墓域을 안내하였다.... 10:15:54
단정한 묘역에 묘소, 문인석, 석물, 제실이 보이며 담벽에 11개 파조를 기록했다.
정문 입구의 상산김씨 유래비, 제실(鳳儀齋)의 엄숙한 묘역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10:17:11
尙山 金氏 由來 碑
상산김씨의 시조는 휘 需(수)이시다. 시조께서는 新羅王族의 후예로 고려조에 甫尹의 관직에 올라 본관을 상산(尙州의 古名)으로 삼으니 공이 상산을 관향으로 하는 시조이시다. 庚寅譜에 고려의 宰輔이며 벼슬이 侍中이라고 되어 있다. 묘소는 상주에 있었는데 세월의 흐름과 병화를 겪어 실전되었다. 1962년 후손들이 상주시 新鳳洞의 九月山 酉坐原에 설단하였다. 단형은 고려의 분묘제도를 따라 方墳形(네모 무덤)으로 조성하였다. 1967년 단소 곁에 재사를 지어 편액을 鳳儀라 하였고 1987년부터 향사일을 양력 5월5일로 고쳐 정하고 지금에 이른다. 시조께서 尙山으로 본관을 삼은 뒤 후손들이 누대에 걸쳐 상주에 세거하면서 文武將相과 名賢達士가 대를 이으니 華閥名族이라고 불려졌다. 시조 이후로 二世 諱 韜(도)는 甫尹, 三世 諱 湜은 侍中이고 시호가 貞靖(정정)이며, 四世 諱 希逸은 侍中이고 시호가 淸平이다. 五世 諱 文道는 翰林學士, 諱 匪躬은 門下贊成事로 尙山府院君이다. 六世 諱 傑(걸)은 進士, 諱 致和는 大提學, 諱 致遠은 侍中이다. 七世 諱 逌(유)는 藝文館 應敎, 諱 瑀(우)는 明宗 辛丑에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資憲大夫이며, 諱 侶(려)는 門下贊成事로 尙山府院君에 책봉되었다. 八世 諱 之衍(지연)은 翰林學士, 諱 受規는 문과급제, 諱 忠은 中郞將으로 筽城君이다. 九世 諱 玢는 翰林學士, 諱 鎰(일)은 重大匡贊成事大將軍으로 上洛君이며, 諱 鑑은 兵部典書, 諱 惟堯(유요)는 判軍器監事, 諱 子松은 中郞將이다. 十世 諱 築은 大提學, 諱 憪(한)은 禮部尙書, 諱 祿은 左代言이며, 諱 實은 兵部典書, 諱 韙는 進士, 諱 彦은 別將이다. 十一世 諱 仁通은 尙書(정3품)로 尙書公派 파조이다. 諱 元理는 戶曹典書로 典書公派 파조이다. 諱 得培는 문과급제하고 右副代言으로 홍건적을 대파하여 輸忠保節定遠功臣에 책봉되며 政堂文學에 제수되고 知貢擧가 되었으며 2차 홍건란 때 都兵馬使로 大戰功을 세웠으나 간신 金鏞의 거짓 조서로 효수되자. 제자인 圃隱 鄭夢周가 王에게 간청하여 억울한 누명을 조사케하고, 屍身을 수습하고 禮를 갖추어 장사 지내 주셨다. 諡號(시호)는 文忠이고 崇義殿과 王城書院에 배향되니 文忠公派 파조이다. 諱 得齊는 文科에 壯元及第하고 홍건적을 대파하여 圖形壁上錄功一等에 오르고 三司右使 上將軍이 되시어 商山君에 책봉되니 商山君派 파조이다. 諱 先致 역시 兄과 같이 홍건적을 물리치고 惟忠保節贊化功臣 重大匡으로 鷄林府尹에 오르고 洛城君에 책봉되니 洛城君派 파조이다. 세상에서는 得培, 得齊, 先致 삼형제를 金氏三元師라 불렀다. 諱 有和는 典敎提學으로 提學公派 파조이다. 諱 得和는 內苑署令으로 공민왕 폐위 모의서 王의 호군으로 참가해 입공하니 內苑令派 파조이다. 諱(휘)云寶는 中郞將으로 왜적을 토벌하고 조선의 개국을 도와 翊載開國原從功臣 輔國崇祿大夫로 領中樞府事에 오르니 領中樞公派 파조이다. 諱 臣寶는 中郞將으로 왜선을 격퇴한 공으로 奉順大夫에 봉작되고 都統使에 이르니 統使公派 파조이다. 諱 礬(반)은 侍郞公派 파조이다. 그러나 근년 侍郞公 후손 중 일부가 錦山金氏라고 일탈하고 있다. 諱 天擎(천경)은 祥原派(상원파) 파조이다. 이상은 시조로부터 十世孫 까지를 약기한 바이며, 十一世 이하로 杜門洞隱士 相臣 判書 大提學 淸白吏 忠臣 烈士와 書院에 配享된 자손들이 綿綿連連하고 자손번연하여 각척에 산재한다. 오호라 시조의 행적은 不能詳考이나 후손은 조상이 남긴 몸이라고 하니 어찌 시조의 功烈과 蔭德을 미루어 짐작하지 못하겠는가. 더구나 우리 商山金氏는 시조이래로 千年古史를 간직한 씨족이며 孝를 행하고 忠을 실천한 가문이니 이를 더욱 계승하여 후손에게 이어가게 함이 진실로 선조를 위함이 아니겠는가. 현존 宗員一同이 선대를 기리는 마음으로 由來碑를 세우니, 부디 후손들은 선대의 영광된 얼을 이어 받아 後世를 더욱 더 빛내도록 期待하는 바입니다.
※ [가문의뿌리 ‘삼원수’김득배·득제·선치3형제명성‘상산김씨’] 이지수 기자 2021.06.01.10:02
상산김씨 시조는 휘 수(需)로 벼슬이 고려 때 보윤이다. 시조는 고려조 때 상산 또는 상주에서 개기하고 자손만대의 터전을 닦았다. 상주는 경주와 더불어 영남의 웅군이며 유서 깊은 사벌국의 고토요, 유구한 역사가 깃든 곳이다. ‘삼원수(三元帥)’ 김득배·득제·선치 3형제가 고려 때 이름을 떨쳤다. 조선시대에는 좌의정 김귀영, 대사헌 김덕함, 판서 김우석·연·동필 등이 배출되었다. 서기1962년 상주시 신봉동 구월산 밑 酉坐之園에 영단을 모셨다. 齋名은 鳳儀齋요, 門戶는 朝陽門이며 祭香日은 매년 양력 5월5일이다.
고려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손이 繁昌해 11派로 分派되었다
尙山金氏 始祖 高麗甫尹商山金公需之壇(고려보윤상산김공수지단)墓園에서 松崗이 始祖를 찾아서..... 10:21:19
단단한 석재로 산소를 단장하고, 수건을 쓴 농부의 땀방울로 작물은 자란다... 10:27:40
고압선 철탑이 솟은 깨끗한 산책로를 일행이 앞서 가고 ......10:28:00
신봉동(상영초등, 동아APT, 충혼탑, 상주향교, 천태종청룡사)에서 오르는 남산근린공원....10:28:37
현위치 남산-16 (남산근린공원 산책로 방범시설물 현황).....10:29:28
안쪽의 베드민트 경기장 울타리를 상주시 슬로건과 홍보 사진으로 조성....10:31:56
一周를 하고 남산 능선 산책로로 올라서 땀을 식히며 물을 먹어 갈증을 풀어준다.... 10:35:25
보육원의 保姆들이 二人用 유모차에 귀한 아이들을 태워서 산책을 한다... 10:42:21
누워 있는 아이들의 표정이 귀엽고 편안해 보여 오늘은 운수대통한 날이다... 10:42:25
西厓 柳成龍 遺愛碑(서애 유성룡 유애비) .....10:47:49
계단 위 좌측의 西厓 柳先生 去思碑
돌에 새겨서 잊지 못하는 분은 바로 우리 목사 서애 유성룡 선생이다. 1580년에 선조 임금이 특별히 공을 상주 목사에 임명하니 이는 국왕이 공의 독실한 효심을 알아주신 것이다. 하직 인사를 올릴 때 임금께서 따뜻한 말씀으로 경상도 전체의 모범이 되라고 하셨다. 공이 부임해 온다고 하자 고을의 백성들이 목을 빼고 기다리며 우리가 이제 다시 살아나겠구나 라고 하였다. 공은 고을을 다스릴 때 오직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전들에게 기한을 각박하게 일을 일체 못하게 하였다. 백성들을 엄격한 아버지가 훈계하듯이 가르치고 굶주린 백성들을 자애로운 어머니가 젖을 주듯이 길렀다. 부임해 온지 잠깐 사이에 풍속이 날로 변해서 소송하는 이가 있어도 우리 목사남이 신묘하게 밝으니 어찌 감히 속일 수 있겠는가 라고 하니, 이로 인하여 장부와 문서가 간략해졌다. 학문을 장려하고 선비를 아껴서 매월 초하루에 직접 향교에 나아가서 유생들을 모아 놓고 예절을 시행하였으며, 여러 고을에 각각 스승을 두어 어린 학생을 훈도하였다. 자신의 씀씀이에는 매우 검소하여 털끝만큼도 관청의 재물을 함부로 쓰지 않았기에 고을의 창고가 가득 차게 되었고 끝내는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해 주기도 하였다. 1581년 봄에 홍문관 부제학으로 승진되어 떠날 때도 공평하게 혜택을 베풀지 못했다고 말하였으나 정성스럽게 백성을 보살피는 마음은 視民如傷(시민여상)이란 네 글자에 부끄럼이 없었다. 고을의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去思의 뜻을 길이 전하려 함에 이같이 銘(새길 명)한다.
我伐斯石(아벌사석) 우리가 비석을 세웠으니 于彼嵯峨(우피차아) 아 저리도 우뚝하구나.
石可磨也(석가마야) 빗돌은 마멸될 수 있으나 思不可磨(사불거마) 사모하는 마음이야 마멸될 수 있으랴.
1582년 임오 6월 상주 백성 와사자부 河洛(하락) 지음
西厓 柳先生 去思碑 事蹟記(西厓 柳先生 去思碑 뒷면)
이 거사비는 4백여년 전 상주 백성들이 선정을 베푼 목사 서애유성룡선생을 사모하여 세움으로써 비롯하였다. 경상도의 본보기가 되게 다스리신 왕명을 받들어 어리석은 백성을 가르치되 엄한 아버지가 훈계하듯 하였고 굶주린 백성을 살리되 자애로운 어머니가 젖을 물리듯 하였다. 牧民한지 채 한 해가 못되어 나라에서 홍문관 부제학의 중책으로 부름에 선생은 고루 펴지 못한 혜택을 恨하였으나 백성들은 德化에 감명하여 碑에 새기고자 하였다. 선생이 이임한 이듬해인 1582년에 고을의 백성들이 상주읍 냉림리에 西厓柳先生去思碑를 세움에 王子師傅 (왕자사부) 河洛이 陰記(비석의 뒷면에 새긴 글)를 지어 백성의 思慕念(사모념)을 銘(새길명)에 담았다. 이 뒤 1855년에는 碑身이 부러져 주민들이 같은 자리에 다시 세우며 음기는 없이 故牧伯西厓柳先生遺愛碑(고목백서애유선생유애비)로 改名하였다. 1905년에는 홍수로 碑가 쓰러져 이듬해 만산리 북천변으로 옮겼다가 1949년에는 계산리로 옮기고 1979년에는 상주유림과 유지들이 남산으로 옮겨 이듬해 4월 서애유선생유애비 移建委員會에서 연혁기념비를 세워 오늘에 이르렀다. 중간에 거사비기 유애비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서애선생의 遺德을 기리는 취지는 하나였다. 그러나 이름은 실질을 담는 그릇이기에 이 땅의 선민들이 처음 去思碑로 세운 뜻을 좇아 옛 規模대로 복원하자는 논의가 江史記念事業會에서 일었고 이 뜻으로 본사업회 理事 姜慶模 柳正夏가 尙州市에 諮問하자 恩惠를 은혜인줄 아는 아름다운 마음씨도 4백년을 내린 상주 정신문화의 귀중한 유산이라 여겨 흔쾌히 비건립을 自任하였다. 이에 뜻을 같이한 金周富박사는 비문을 國譯하여 축약문을 짓고 全廣鎭박사는 앞뒷면 題額을 썼다. 不佞(불녕 : 편지 글에 재주가 없는 사람)도 거사비의 지난 자취와 오늘 서애유선생거사비가 상주 남산공원에 다시 서게 된 경위를 사적기로 남겨 揚善(양선)의 미풍을 계승하는 일에 동참하게 된 책임을 덜고자 한다. 2021년 12월 일
상주박물관특별연구원 문학박사 金周富 국역 축약문 짓고
성균관대학겨명예교수 문학박사 全廣鎭 앞뒷면 제액 쓰고
경북대학교명예교수 문학박사 權泰乙 사적기 지음
상주시장 강영석 비 세우고 서애선생기념사업회· 강사기념사업회 후원
계단 위 우측 비석 左議政 豐産 柳公
등나무 쉼터에서 시원한 토마토 간식을 즐기며 수돗가에서 땀을 씻고 휴식...10:48:28
단정하게 가꾼 너른 잔디밭과 국궁장 과녁판이 보인다... 11:07:02
상주지역기상서비스센터..... 11:27:53
주차장 폭포수에서 聞師會 山客三友....11:38:59
첫댓글 더위를 피하여 상주남산근린공원을 찾아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아랫부분으로 일주하는 산책로를 택하여 새로 단장된 폭신한 우레탄 길은 매우 만족스럽고, 수도시설, 운동기구설치, 쉼터를 차례로 지나며 3개의 큰 진입도로가 있었고, 주변의 아파트단지와 남쪽으로는 산소들이 많이 조성되어 있고, 상산김씨시조 묘원을 찾게되어 후손들의 정성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어 매우 감사하고, 주차시설과 제실과 너른 묘역이 잘 조성되어 은혜를 실천하는 산 교육장으로 널리 홍보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유모차에 누워서 산책하는 원아들을 보니 천사가 눈 앞에 있어 고맙고, 西厓 柳成龍 遺愛碑, 西厓 柳先生 去思碑, 西厓 柳先生 去思碑 事蹟記를 읽으며 배움을 얻게되어 고맙습니다.
기다리는 비는 오늘도 無心히 그냥 지나치니 小暑답게 午前부터 炎天같은 날씨이다.記憶을 더듬어 梅岳山 다녀오던날 尙州 南山 探訪이 생각나서 市廳 블로그 探索으로 資料를 찾아 이곳을 찾았다.車輛 當番이었으나 老朽車輛 컨디션 亂調로 野草의 수고를 빌렸다.人工巖漿 施設위로 올라서니 駐車場,中央初等學校,商希學校,市廳 등 과거 農蠶學校 一帶의 廣闊한 區域이 한 눈에 든다.氣象觀測所지나 삼거리에서 길게 걷기위해 右側 우래탄 散策路를 택하여 進入하니 깔끔하게 整頓된 散策路,豊富한 그늘길,호젓한 둘레길이 우리에겐 安城맞춤이다.이따금씩 여유로운 婦女子들이 우릴 追越하지만 모퉁이마다 休息處가 있어서 市民들의 쉼터로는 最高이다.문득 右側으로 눈을 돌려보니 3番國道이다.20여년전 저 길로 出勤하느라 바빴던 그때를 回想한다.返還點을 돌아 오는 길은 私有地와 겹쳐서 그늘이 부족하다.尙州高等學校와 尙山金氏 墓域이 전개되고 元點에 도착하여 中央路를 통하여 頂点에 도착하니 西厓 柳成龍 遺愛碑가 한눈에 든다.海山님의 恪別하신 情으로 尙山金氏, 西厓 柳成龍 來歷을 자세히 소개하여 感謝를 드린다.正午도 덜 되었지만 一周를 마쳤기에 平壤麵屋에 모처럼 들려서 갈비탕으로 초여름 補身하며 終了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