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팔공산(八公山). 통일신라의 심지왕사가 창건한 암자. 돌구멍절.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銀海寺)의 산내암자(山內庵子)이다.
바위 위의 암자다. 하지만 중암암엔 특별한 것이 있다 돌구멍이 일주문이고 돌구멍에 해우소가 있다 .욕심이 많으면 지나지 못하는 극락문도 있다 작은 암자이지만 별천지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스님들의 공부방인 소운당을 지나면 이내 돌기둥 두 개를 통과해야 절에 들어갈수있다.특이한 일주문이다. 겨우 한 사람 들락거릴 좁은 돌구멍을 지나 법당 마당에 접할수 있다.
중암암에서 가장 유명한건 해우소 하지만 중암암의 해우소는 특별하다. 돌구멍 절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해우소 또한 벼랑 위의 바위구멍 속에 있다. 아마도 커다란 바위에 두 개의 구멍을 파낸 모양이다. 현재는 사용하지않아 그 역사적 공간 안을 볼수는 없다. 단지 바위 속에 있는 해우소, 그길이로 유명하다. 위치상 볼일의 결과물이 어떻게 떨어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중암암의 백미는 ‘극락굴’이다. 법당 위쪽에 있는 삼층석탑 위의 극락굴은 그야말로 사후세계를 걸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의 입구로 2∼3m쯤 안으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굴이라기보다는 틈이라고 해야 할 작은 공간이 나온다. 이 틈새로 들어서 몇 걸음 가다보면 좌측으로 꺾어지는 틈새가 나오고, 그 틈새를 따라 다시 꺾어지면 처음의 자리에 서게 된다.미로같은 극락굴
ㅁ자 형태의 굴(틈새)을 지나게 되는 것인데, 그 비좁은 틈새는 혼자 버둥거리며 겨우 빠져나갈 정도로 좁고 길다. 간신히 빠져나올 정도의 좁은 틈새이다.
욕심을 부려 양껏 짐이 든 가방이나 두꺼운 옷을 입고 지난다면 엄두도 낼 수 없는 그런 공간이다. ‘공수레공수거’, 생이 끝 날 때는 모든 것을 버리고 가야함을 몸으로 느낀다.
감춰놓았던 암자를 바위 위에 고이 올려놓은 작은 중암암.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그곳에는 그 어느 곳보다 아기자기한 불심이 깃들여 있다. 꼭 불자가 아니더라도 하늘과 맞닿은 작은 암자의 극락굴에서 한 번쯤 자기의 지난 삶을 한번은 짚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뿌리가 바위를 감고 만년을 살았다는 만년송(萬年松) 암릉 사이에 뿌리를 내려서 백년을 살아온 만년송(萬年松). 소나무의 끈질긴 생명력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연의 이치. 보인다.결국엔 바위가 소나무 뿌리에 의하여 두쪽으로 갈라지겠지만.
중암암 3층 석탑과 극락 굴을 보고 능선에 올라서면 서쪽으로 팔공산 동쪽으로는 은해사 일대가 한눈에 보이는 바위 위 절경과 만년송이라는 소나무가 뿌리를 바위에 휘 감은채 멋진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이 능선상의 경치는 아주 뛰어나다. 정상에서 오른쪽으로 백흥암 1.7KM 은해사 4.25KM의 이정표를 보고 내려오면 약간 경사는 급하지만 곳곳의 소나무 오솔길이 나그네를 맞이하고 한참을 내려오면 옛 모습 그대로의 자태로 천년의 세월을 지켜온 백흥암 일주문이 반가이 맞이 한다.
옛 모습이 그대로 간직된 백흥암 (여기서 은해사까지 1.7KM) 은해사-백흥암-왼쪽 중암암 이정표-산길 등산로- 능선정상-극락굴-3층석탑-중앙암-중앙암 해우소- 중앙암 주차장-콘크리트길-백흥암(다시 만난다)-은해사 코스를 추천한다.
백흥암에서 능선까지, 중앙암 주차장에서 내려오는 길 일부가 조금 경사가 급하지만 천천히 둘러보아도 3시간 남짓이면 모두 둘러볼 수 있다.
834년(흥덕왕 9)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하였다. 그 뒤 꾸준히 수도승들의 수행처로 이용되어 오다가, 1834년(순조 34) 우일(宇一)과 유엽(有曄)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과 요사채·객사(客舍)가 있으며, 문화재로는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332호 은해사중암암삼층석탑과 석등(石燈)이 있다. 이 중 3층 석탑은 창건 당시에 건립된 것이라고 하는데 높이 3.7m이다. 석등은 높이 1.2m의 장방형으로 장식이나 기교를 가하지 않은 특이한 석등이다. 이 밖에도 도괴된 부도 1기가 있다. 절 주변에는 삼인암(三印巖)·건들바위·장군수(將軍水) 등이 있다.
이 중 건들 바위에는 전설이 깃들여 있다. 옛날 한 승려가 참선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나서 밖으로 나가 보니, 큰 바위가 암자로 굴러 떨어지려고 하므로 급히 법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드리자 바위가 떠올라 훨씬 뒤의 안전한 자리로 옮겨 앉았다고 한다. 또, 장군수는 김유신(金庾信)이 17세 때 이곳에서 수련하면서 마셨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물맛이 매우 뛰어난 석간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