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逆) 남파랑길(일곱 번째 - 5)
(여수시∼광양시, 2023년 9월 23일-24일)
瓦也 정유순
흥국사 다음의 행선지는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있는 <순천왜성>이다. 해룡면은 순천시의 남동부 여수반도에 위치한 면이다. 산지가 남쪽 앵무산(鸚鵡山)을 중심으로 여수시 율촌면 경계를 따라 형성되어 있다. 면의 서쪽은 순천만, 동쪽은 광양만에 면해 있었으나 광양만은 율촌산업단지의 매립으로 육지화되었다. 서쪽은 이사천의 하류 지역으로 퇴적평야가 펼쳐져 있다. 하천은 이사천이 서쪽 경계를 따라 흘러 순천만으로 유입한다.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지도>
신성리(新城里)는 옛날에 한유마을과 신성마을의 왜성을 연결하는 다리를 ‘옛다리’라 불렀다. 이 옛달이 또는 옛다리가 한자로 ‘예교(曳橋)’로 표기된 것이다. 옛다리에 일본군이 성을 쌓자 <예교성(曳橋城)>이라 했고, 정유재란 뒤에 신성(新城)이 광양만에 접해 있는 포구란 뜻으로 ‘신성포(新城浦)’라 불렀다. 정유재란 당시 육전에서 퇴진한 왜군이 전라도를 공략하기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이곳 신성리에 왜성(倭城)을 쌓았다.
<순천왜성>
전라남도 기념물(1999년 2월)로 지정된 순천왜성(順天倭城)은 해룡면 신성리에 광양만을 따라 쌓은 성이다. 정유재란(1597年) 당시 육전에서 패퇴한 왜군선봉장 우끼다히데이(宇喜多秀家)와 도도다카토라(藤堂高虎)가 호남을 공략하기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해 3개월간 쌓은 토석성(土石城)으로 왜장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끈 1만 4천여 명의 왜병이 주둔하였던 곳으로 남해안 26곳 왜성 중 남은 유일한 곳이다.
<순천왜성 표지석>
임진왜란 패인(敗因)이 전라도 의병과 수군의 용전(勇戰)에 있었다고 보고 전라도를 철저히 공략하기 위해 전라도 각처에 진지를 구축해 공세를 강화하던 도중에 도요토미히데요시(豐臣秀吉)가 1598년 8월 급사 후 왜성에 주둔해 있던 고니시유키나가의 최정예 왜군과 권율·유정의 육군 3만6천명, 이순신·진린의 수군 1만 5천명의 조명(朝明) 수륙연합군이 왜성과 장도(獐島)를 오가며 왜군을 격멸했고, 이충무공이 27일간 머물면서 전사 하루 전 고니시유키나가를 노량앞바다로 유인하여 대첩을 거둔 곳이다.
<순천왜성 전경>
순천왜성은 수륙요충지로서 성곽 규모가 120,595㎥(36,480평), 외성 2,502m, 내성 1,342m로 외곽성 3개, 본성 3첩, 성문 12개로 축조된 성곽으로 검단산성 쪽의 육지부를 파서 바닷물이 차도록 섬처럼 만들고 연결 다리가 물에 뜬다고 하여 예교, 왜교성이라 했으며, 일인들은 순천성이라 부른다.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결과 문지 2개소, 건물지 1동, 해자 2개소, 천수대 동편 성벽, 본성 북단 평탄면 등을 조사하였다. 이 중 본성과 외성 사이에서 확인된 해자는 최소 너비 23m, 최대 깊이 4.7m다.
<해자 그림>
<옛 해자 자리>
성으로 올라가는 길을 따라가면 첫 번째 문지가 나온다. 이 문지(門址)는 본성과 외성을 연결하는 주출입문이었다. 문지 옆으로 해자를 만들고 만조 때 바닷물을 끌어들여 섬처럼 만들어 방어에 치중하였다. 이 문지의 복원공사는 2007년 이루어 졌으며, 기존에 남아있는 형태를 기본으로 일본식 축조방식을 자문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문지를 쌓는 방식은 비교적 큰 돌을 이용하여 불규칙하게 쌓았다.
<문지1 그림>
<순천왜성 문지1>
두 번째 문지는 천수(天守)에 이르는 주 출입 문이다. 일직선으로 들어가지 않고 ‘ㄱ’자 형태로 꺾어 들어가는 구조다. 성벽의 서쪽으로 해자의 흔적이 있다. 석축 쌓기 방식은 자연석을 불규칙하게 쌓았으며, 문지의 상단부를 큰 돌로 쌓아 위압감을 주는 심리전을 이용하였다.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에 문루와 성벽 위에 여장(女墻) 등이 그려진 그림과 <성호집(星湖集)>과 <예교진병일록(曳橋進兵日錄)>에 “성 위에 여장을 쌓아 포 구멍을 벌집 같이 내었다.”라는 기록과 일치한다.
<문지2 그림>
<순천왜성 문지2>
왜성의 북쪽 깊숙한 곳에는 천수기단(天守基壇)이 있다. 천수(天守)는 일본의 성 내에서 볼 수 있는 상징적인 건물로 성을 대표하는 권위와 상징이다. <정왜기공도권>에는 3층 팔작지붕의 천수대가 그려져 있으나, 천수각 1층 아래에 오층망해루(五層望海樓)라고 쓰여 있어 오층 건물로도 추정할 수 있다. 천수기단은 오랜 세월동안 석축이 흐트러지고 일부가 무너져 2007년 보수하였다. 천수기단 상부에는 남아있던 초석을 이용하고, 그 위에 새로운 초석을 놓아 건물의 규모를 알 수 있게 하였다.
<천수기단과 천수각 그림>
<천수기단>
왜성에서 약 1.5㎞ 떨어진 충무사로 가기 위해 신성리마을로 들어서면 ‘정채봉 길’이 있다. 정채봉(丁埰琫, 1946∼2001)은 이곳에서 출생한 후 광양에서 성장하였다.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꽃다발>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으며, 1983년 동화 <물에서 나온 새>로 대한민국문학상 우수상, 1986년 동화집 <오세암>으로 제14회 새싹 문화상을 각각 수상하였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정채봉은 샘터 편집국장으로 오랫동안 근무했으며, 간암으로 투병하다 별세했다.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충무사(忠武祠)는 이순신, 정운, 송희립을 모시는 사우(祠宇)로 제향(祭享)은 이순신의 탄생일과 귀천일(歸天日)에 모신다.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1579년(선조 12)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한산도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정유재란 때 명량(鳴梁)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순절하였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충무사 입구>
정운(鄭運, 1543∼1592)은 1570년(선조 3)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옥포·당포·한산도 등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1592년 9월 부산포해전에서 우부장으로 선봉에서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시호는 충장이다. 송희립(宋希立, 1553∼1623)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운 장군의 군관으로서 영남 지역에 원병파견을 주장하였고, 이순신의 휘하에서 노량해전 등에서 활약하였다. 전라좌도수군절도사를 지냈다.
<충무사 외삼문(충무사)>
신성리에 충무사와 왜성대가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은데, 이에 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서씨(徐氏), 이씨(李氏), 김씨(金氏) 등 세 사람이 신성포에 집을 짓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밤이 되면 왜귀(倭鬼)가 자주 출몰하여 왜성대 주변에서 말발굽 소리가 진동하고 도깨비불이 날아다니는가 하면, 군사들의 함성이 그치지 않아 주민들은 무서워서 바깥출입을 할 수가 없었다.
<충무사 내의 팽나무>
어느 날 이곳에 찾아 온 도승(道僧)이 마을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마을 뒤에 이순신 장군의 영당(影堂)을 지어 모시고 공경하라 일러주었다. 이에 사람들은 돈을 모아 조그마한 사당을 짓고,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초상화를 모시고 팽나무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냈다. 이때부터 왜성의 밤도깨비 소동은 없어졌으며, 마을에서 고기가 많이 잡혀 큰 마을이 되었다.
(충무사 내삼문(동광문)>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다시 발을 들여놓고 이곳을 찾게 되면서 일본인 수가 늘어났다. 이에 따라 신성포를 순천 외항으로 개발하려 했으나 사업을 벌이려던 일본인들은 모두 병들거나 사업에 실패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여수항을 외항으로 개발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일본인들이 이충무공 영당 위에다 간척지 현장 사무소를 지었는데, 기술자들이 들어오기도 전에 집이 바다로 날아가는 등 재앙이 계속되어 포기했다고도 한다.
<충무사>
그걸 빌미로 일본인들은 1944년 이충무공 영당에 불을 질렀다. 이후 하루는 이곳 주민의 꿈에 장군이 나타나 “내 터 돌을 손대는 자가 있으니 가서 지켜라.”라고 현몽을 했다. 그래서 가서 보니, 주민들이 불탄 영당 주춧돌을 뜯고 있어 꿈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가 손대지 않기로 맹세했다. 해방 후 즉시 주민들은 그 터에서 다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으며, 1947년 순천, 승주, 광양 등지 주민들의 성금으로 충무사(忠武祠)를 지었다.
<충무사 영정>
충무사에 관한 이러한 영험담은 해룡면 신성리 일대에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충무사 경내에 들어왔던 매가 날지 못해 잡히고, 곰도 뛰지 못해 잡혔으며, 포구에서 밤에 고기를 훔쳐 달아나던 도둑이 밤새 달린 것이 충무사 주위를 맴돌다가 잡혔다는 것이다. 매번 좋은 일만 생겨 충무사는 지금도 주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 덕분에 마을에는 도둑이 없고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충무사에 치성을 드린 뒤에 사업에 착수한다고 한다.
<이충무공 초상화>
https://blog.naver.com/waya555/223238586516
첫댓글 아직도 거기 계시는 군요
워낙, 볼거리가 넓은 지역이라서, ㅎ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