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길 - 서울 서촌마을(1)
(2023년 10월 21일)
瓦也 정유순
예년 같았으면 시월 하순의 쌀쌀한 날씨에 서울의 나무들이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채색을 했을 법도 한데, 날씨만 차갑고 은행잎은 그저 푸르기만 하다. 오늘은 독립운동 사적지(7코스)를 찾아 서촌마을로 가기 위해 경복궁역 2번 출구로 나와 서촌마을로 향한다. 서촌마을은 경복궁 서쪽에서부터 인왕산 동쪽 아래에 자리한 마을로 통의동·청운동·효자동·통인동·옥인동 등 한양도성 성곽에 안긴 경복궁 서쪽 동네를 ‘서촌마을’이라 한다.
<김가진 집터 표지>
처음 찾아온 곳은 종로구 체부동 37-1에 있는 독립운동가 김가진 집터다. 김가진(金嘉鎭, 1846~1922)은 조선말의 문신이며 정치인이다. 3·1운동 이전까지는 친일색채가 있었으나 3·1 운동 때부터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자는 덕경(德卿), 호는 동농(東農), 본관은 신 안동이다. 병자호란 때 강화성에서 순절한 문충공 선원 김상용의 11대손으로 이조참판 수북 김광현의 직계후손이며 예조판서 김응균의 아들이다.
<김가진 집터>
김가진은 세도가인 안동김씨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서자(庶子)이었기에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1877년 서얼들의 관직이었던 규장각 검서관 (奎章閣檢書官)으로 관직을 시작한다. 1883년 인천항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이 신설되어 유길준과 함께 주사로 임명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고종(高宗)에게 청나라를 배격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쟁취를 역설했고, 1885년 내무부 주사(內務府 主事)에 임명되었다.
<김가진 선생>
갑신정변이후 적서 차별이 철폐되자 1886년 늦은 나이에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이 된다. 1886년 7월, 청나라를 밀어내려 러시아와 밀약을 추진하다가 들켜 청나라 총리교섭통상대신(總理交涉通商大臣) 원세개(袁世凱)의 압력으로 전라도 남원에 유배되었으나,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항의와 고종의 명령으로 8일 만에 석방, 10월 홍문관부수찬으로 복직되었다.
<상해 망명시절의 김가진 선생>
이후 주일공사(駐日公使)를 역임하고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회의원(軍國機務處會議員)이 되어 내정개혁에 참여했다. 독립협회 창설에 참여했고, 대한협회회장으로 한일합방을 주장하는 일진회와 대립했다. 일제강점 후 조선귀족령에 의해 남작작위가 주어졌으나, 이를 뿌리치고 1919년 의친왕 망명기도사건에 가담하였고, 자신 역시 탈출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종로구 청운동 <청운문학도서관> 아래 절벽에 새겨진 ‘白雲洞天(백운동천)’은 김가진의 글씨로 그의 집 백운장이 그곳에 있었다는 표시다.
<백운동천 각자>
김가진은 1922년 7월 8일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는데 망명정부의 어려움 속에서도 엄숙하고 성대했다. 그의 아들과 손자 김의한(1900∼?)은 애국단원으로 광복군총사령부에서 일했고, 김의환의 부인 정정화(1900∼1991)는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활동 했으며, 명실상부한 임시정부의 안주인 역할을 27년간 하여 그녀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손자 김자동(1929∼2022)은 ‘임시정부의 아들’로 불렀다.
<상해에서의 김가진 선생 장례식>
그러나 김가진은 분명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내다 버리고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하였으나 남작작위를 일제에 ‘공식적으로 반납’하지 않았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보훈처는 독립유공자 서훈을 보류했다. 다만 그 아들인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는 독립 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또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도 그의 항일행적을 인정하여 사전에 등재하지 않았다.
<김가진 선생의 아들 부부와 손자>
김가진 집터에서 자하문로를 건너면 통의동 쪽에는 ‘창의궁’터가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의 별궁으로 영조(英祖)가 연잉군(延礽君) 시절 살던 잠저(潛邸)로서 정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화억옹주, 효장세자, 화순옹주가 태어난 집이며, 말년의 숙빈 최씨가 궁에서 나와 살던 곳이다. 원래 이 곳은 효종(孝宗)의 4녀 숙휘공주의 남편 인평위 정제현의 옛 집이었는데, 숙종(肅宗)이 매입해 연잉군(훗날의 영조)에게 준 것이다.
<1900년대 창의궁 배치도>
1721년(경종 1년) 연잉군이 왕세제가 되어 궁궐에 들어와 살면서 기존의 연잉군 사저는 동궁 소속 궁가가 되었고, 이름도 근처의 '창의문(彰義門)'에서 딴 '창의궁(彰義宮)'으로 바뀌었다. 영조는 즉위 후 창의궁 정당(正堂)에 '건구고궁(乾九古宮)'이란 현판을 걸었다. <건구공궁 소지(小識)>에 따르면 건구(乾九)는 주역에서 온 말로, 승천하지 않고 숨어있는 용으로 잠룡을 뜻한다. 즉 왕이 되기 전의 자신을 투영해 쓴 것이다.
<1946년 창의궁 터에 사택이 표시된 지도와 흔적이 있는 주택들>
영조는 즉위 후 홍석보의 주청에 따라 왕의 잠저 당시 호적을 따로 떼어다 이 곳에 보관했다. 그리고 장보각(藏譜閣)을 짓고 영조의 초상화 2본과 어필 및 서찰 등을 모시기도 했다. 옛 집과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쉽게 잊지 못한 영조는 어머니 사당인 육상궁을 참배한 후 종종 여기서 하룻밤 자고 온 적이 많았고, 1754년(영조 30년)에는 이 곳에 일찍 죽은 아들 효장세자와 손자 의소세손의 사당을 두기도 했다.
<창의궁 터>
정조도 사도세자의 초상화를 이곳에 수용하면서 주기적으로 참배하였고 가끔 머물면서 전교를 내리기도 했다. 순조 때는 일찍 죽은 효명세자의 사당도 두었다. 고종 때까지 존재하다가 1908년(융희 2년) 일제에게 헐려 사라졌다. 그리고 창의궁 자리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사택이 세워졌다. 8·15 광복 이후 적산(敵産)으로 분류된 뒤 재분할되어 주택가가 들어서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창의궁의 함일재를 옮겨 흥복전을 세웠다고 한다.
<1908년 설립된 동양척식주식회사(현 하나은행 본점)>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는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본뜬 식민지 수탈기관으로 1908년 일본이 한국에 설립한 국책회사다. 1917년 <동양척식주식회사법> 개정 이후 사업범위를 만주 및 해외로 확장하였고, 장기 자금을 공급하는 개발금융기관으로 변화되었다. 1930년대 이후부터 식민지 군수공업화에 편승하여 대출업무 이외에 관계회사 설립 및 출자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지주회사(持株會社)의 성격을 강화해 나갔다.
<동척 사원사택이 있던 골목>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조선총독부로부터 토지를 불하 받아 소작인들에게 5할이나 되는 고액의 소작료 요구와 춘궁기에 양곡을 빌려주었다가 2할 이상의 이자를 받는 등 경제 수탈에 앞장섰으며, 수탈한 토지를 기반으로 일본인 농업 이민자들을 한국 각지에 정착시키는 사업을 추진하였다. 1917년까지 매년 1천호, 1926년까지는 매년 360호정도의 이민을 받아 1926년까지 9,096호가 한국에 정착하였다.
<통의동 백송>
이들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지원 아래 직접경작 보다는 지주가 되어 민중을 착취압박한 일제의 주구(走狗)가 되었고, 이들에게 수탈당한 한국인은 소작인이 되었으며, 이에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대규모 해외 이주를 하였다. 1933년까지 일본으로 113만 5852명, 만주와 연해주로 150만여 명이 이주한 것으로 집계된다. 그리고 조선인 빈농 약 30만 명은 토지를 빼앗기고 먹고살기 위해 북간도로 이주했다.
<일제강점기 백송(상) 과 태풍으로 쓰러진 백송(하)>
창의궁이 있었던 통의동 골목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송이 있었는데, 1990년 7월 폭풍으로 나무가 쓰러져 고사하여 천연기념물 지정이 해제되고 그루터기만 남아 있고 그 주변으로 어린 아들 백송이 자라고 있다. 백송(白松)은 중국이 원산지로 우리나라에는 일찍이 도입되었으나, 번식력이 약해 그 수가 매우 적다. 백송 중 살아있는 천연기념물은 재동 헌법재판소나 조계사에 가면 볼 수 있다.
<백송 - 헌법제판소>
통의동 백송은 조선시대에 어떤 집의 정원수로 심어진 것으로 추정되었고, 백송을 품은 집이 누구의 집이었는지를 두고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추사 김정희의 집이라는 설이며, 다른 하나는 영조가 즉위하기 전에 살던 사저인 창의궁(彰義宮)이라는 설인데, 옛 지도 등 여러 자료로 미루어보아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아무튼 이 일대는 조선시대 내내 왕족과 그 친척이 살던 지역이었다.
<통의동 어린 백송>
https://blog.naver.com/waya555/223246719386
첫댓글 모처럼 서울로 오셔서
옛 터 찾아 즐기시나요? ㅎㅎ
휴식도 취하셔야지 않을가요, 참으로 역사에 기록 되실 분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