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역사에 많은 인물을 배출한 마을 - 용포1리 후정
후정은 용포1리에 속하는 마을로 오룡산의 맥을 이어받은 網山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망산은 가뭄 때 기우제를 지냈던 산이었으며 주민들의 야유회 장소이기도 했다. 마을 앞으로는 장항포 들이 있고 그 너머로 일로 당월촌 호암산의 범바위가 마주하고 있다. 주민들은 일로 죽산리의 호랑이가 노루목의 노루를 잡아먹으려고 달려오는데 망산의 그물을 보고 멈춰 있다고 보고 있다. 이 마을은 큰 마을 후정과 작은 마을 노루목으로 이루어졌다.
문헌으로 마을 이름의 변천을 보면 1789년의 자료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의 자료에 무안군 삼향면 后丁리로 나오고 1917년의 자료엔 삼향면 용포리 后丁 그리고 1987년의 자료에는 삼향면 용포리 後汀으로 나온다. 하지만 주민들은 무안군 삼향면 용포1리 后亭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명의 유래를 보면 마을 유래지에서는 두 가지로 기록하고 있다. 하나는 ‘마을에 정자나무가 있었는데 왕과 왕후가 지나가다 이 나무 아래서 쉬어갔다 하여 ‘후정’이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 하나는 ‘입향조인 김해김씨가 분가하여 빛을 발한다’는 뜻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았을 때 오룡산 뒤쪽의 마을이란 의미가, 아니면 장항포를 막은 이후에 마을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장항포 뒷마을이란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처음 마을에 들어온 성씨는 옆 마을인 안동에서 건너 온 김해김씨이다. 이후 제주양씨 금령김씨가 들어와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김해김씨 입향조를 확인하려 했으나 자료가 없어 확인할 수 없었다.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는 제주양씨 입향조는 양우영(자-봉규, 호-일암. 1842 - ?)이다. 양씨들은 장항포 간척지가 조성될 무렵에 일로 등림 마을에서 이 마을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의 역사는 얼마 되지 않지만 주민들이 일치단결하여 정부와 기관의 부당한 시책에 맞서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했던 두 번의 역사를 갖고 있다. 하나는 마을 앞으로 지나가는 서해안 고속도로의 연장선인 L자형 도로공사 노선에서다. 이 도로는 처음엔 일로와 삼향의 경계 지점인 남창천을 기점으로 건설하려 했다.
하지만 같은 마을인 노루목이 걸려서 주민들이 변경을 요청했는데 작은 남산을 가르고 지나가는 현재의 길로 설계가 된 것이다. 주민들은 고속도로가 마을 주민들의 전망권을 가리게 된다는 점을 들어 오랫동안 농성을 하면서 설계 변경을 다시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리상 현재의 길이 아니면 마을 뒤로 길이 나야 하기 때문에 도로공사 측의 선택의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1960년대 중반에 장항포 들에 비행장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토지가 좁았던 용포리 주민들은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결국 주민들의 싸움이 승리하여 비행장은 목포시 용당동으로 옮겨갔다. 당시 이 마을 뿐 아니라 맥포리 사람들까지 나서 얼마나 격렬하게 반대했던지 ‘호미부대’ ‘괭이부대’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짧은 역사의 마을에 많은 인물이 배출돼
통안으로도 불리는 작은 마을인 노루목 마을에는 큰 남산과 작은 남산이 있다. 작은 남산은 남해안 고속도로가 나면서 두 조각이 되었다. 노루목은 포구로서 예전에는 주막도 있었다. 예전에는 10여 가구가 넘게 살았으나 현재는 7가구가 살고 있다. 남악리의 토지들이 그렇듯이 이 마을도 남산을 포함한 대부분의 토지들이 김장성(김성규-김우진의 아버지)의 소유로 되어있었다. 작은 남산 아래에는 지금도 김성규의 아들인 도회의원 법학사 김철진영덕비가 있다. 이 비는 1941년 보은사 소작인이 세운 것으로 남악리 회룡 마을 앞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다. 남산의 소유주도 김성규의 딸인 김소희의 소유로 되어있다. 노루목 마을 앞에는 장항포 간척지에 물을 대는 한국농어촌공사의 삼향배수장이 들어서 있다.
이곳엔 큰 장항포와 작은 장항포가 있다. 조선 왕조 대에는 노루목은 나주에 속하였고 당월촌에 있는 자방포는 무안에 속한 적도 있었다. 노루목과 범바위 사이를 일제초기 1900년대 초에 막은 500m정도의 제방으로 인하여 장항포들이 만들어 졌다. 이 간척을 기념하는 ‘영친왕언장비’가 일로읍 당월촌에 있다. 주민들은 제방의 반대쪽을 ‘자방포’라고 하나 큰 장항포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작은 장항포인 노루목 선창의 위치는 현재 삼향배수장의 하단에 해당한다. 70년대까지 중선배들이 들어 왔으며 주민들은 인근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머리에 이고 다니며 마을에 팔았던 어촌이었다. 현재 노루목 사람들은 부자이다. 예전에는 참으로 어렵게 살았으나 간척의 영향으로 가구당 1정보 이상의 농지를 경작하고 있다. 또한 농지의 시세가 전남도청의 남악리 이전으로 높게 형성되어 상당한 부자들로 인식되어지고 있다.
후정 마을의 역사는 짧지만 작은 마을에서 박사 판사 군수 사업가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봤을 때 척박한 환경인데도 뛰어난 인물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주민들의 높은 교육열 때문이다. 예전에 주민들은 가마니를 짜거나 바다에서 잡은 수산물들을 머리에 이거나 지게에 지고 목포까지 걸어가 팔아서 자녀들 학비에 사용했다.
한국전쟁 때는 마을 앞으로 나있는 길이 인민군들의 이동로가 되기도 했다. 마을에서 조금만 가면 영산강 가에 생기미 나루가 있는데 그 나루는 당시에 영암으로 건너가는 큰 나루였기 때문이다. 당시 주민들은 이러한 교통의 요충로였기 때문에 주민들이 조를 짜서 순찰을 돌기도 하였다. 인민군들이 마을에 주둔했는데도 주민들의 피해는 없었다.
마을 뒤에 두 아름이 넘는 구수나무 당목이 있었다. 마을 이름을 짓는데 참고가 되기도 하였는데 당시에는 주민들의 회의장소 겸 놀이터이기도 하였다. 또한 주민들이 당산제를 지내기도 하고 농악놀이도 하였으나 나무가 죽은 이후부터는 당산제가 없어졌다. 마을은 지리적인 영향으로 겨울에는 북풍을 그대로 받아 춥고 눈도 제일 늦게 녹았으며 여름에는 시원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용계 마을과 경계 골짜기인 성적골(서적골이라고도 한다) 샘고랑 섶들이(배를 매었던 곳) 소당골 중성골 가잿등(용계에서 들어오는 마을 입구, 예전에 주막이 있었다) 진주 갯들 건너 지샛논 중촌 등의 이름이 남아있다. 이 마을에서 1987년에 오룡산 일주도로 개막식을 했으며 당시의 표지석이 남아 있다. 여러 성씨들이 모여살고 있지만 협조와 양보로 살기 좋은 마을을 이루고 있다. 특히 주민들의 목소리가 마을 밖으로 벗어난 적이 없음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화목하고 편안함을 주는 마을 - 용포2리 용계
용계는 용포2리에 속하는 마을로 떡재너머와 용계로 이뤄졌다. 원래는 용포6리인 계두 마을과 한 마을이었으나 인구 증가로 1992년에 분리(分里) 되었다.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마을 이름의 유래에 대하여 ‘마을의 뒷산에 있는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으로 ‘앵계’라 불렸으나 그후 한자로 고치면서 오룡산의 ‘龍’을 따 ‘龍溪’로 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앵계’는 전라도 사투리로 ‘알을 품은 어미닭’을 뜻한다고 한다. 실지로 주민들은 ‘일제강점기 때 호남선 철도가 놓여 지면서 마을 앞으로 첫 기차가 지나가는 시간이 새벽이었는데 이때 울리는 기적소리가 마치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 소리 같다 해서 ‘앵계’라 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한자로는 ‘龍溪’라 표기하고 있다. 주민들에게 이유를 물으니 ‘시냇물에 있는 용이 비상을 꿈꾸고 있는 의미’라고 한다. 그러나 용이 시냇물에 있다는 것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시냇물이라 말할 수 있는 냇가도 마을 주변에는 없다. 해서 잘못 쓰여진 한자에 의미를 부여하다 보니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또한 얼마 전까지 한 마을이었던 계두의 한국지명총람에 나오는 한자는 ‘鷄頭’로 나온다. 이런 이유 등으로 봤을 때 마을 이름의 바른 표기는 ‘龍溪’가 아닌 ‘龍鷄’라 해야 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참고로 문헌에 나오는 마을 이름을 보면 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에는 나오지 않고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삼향면 龍界里로 나온다. 이후 1917년 조선면리동 일람에는 삼향면 龍溪리로 나온다. 1987년의 자료에도 삼향면 龍溪리로 나온다.
마을은 연안 차씨, 김해 김씨, 흥덕(흥성) 장씨 등이 다른 성씨들과 어울러 살고 있다. 마을 형성에 대해서 마을유래지는 ‘이 마을은 장항포를 막아 넓은 농지를 경작하기 위하여 정착하였다고 하는데 제보자에 의하면 그전에 이미 김해김씨 김명관이 150여 년 전 영암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 마을의 형성은 1800년대 중엽에 김해김씨와 연안차씨가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용포 마을과 가까이 접하고 있어 용포 마을 형성 시에 같이 형성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연안차씨의 입향조는 차정실(자-정국. 1851-1884)이다.
이 마을에는 해안가나 강가에서 흔히 발견되는 고인돌이나 당산나무 같은 것은 없었다. 기록으로 보면 마을 앞에 넓은 농경지를 만들어 준 장항포 둑은 1903년에 완성되었으며 장항포 들 주변의 인구 변화를 보면 1900년을 전후해서 눈에 띄게 늘어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즉 둑막이 공사를 비롯해서 농경지 경작을 위해 인구의 유입이 늘어난 것이다.
용계마을 뿐 아니라 장항포 들의 일제강점기 때 소유자는 中山三郞과 中山英南 형제의 것이었다. 나까야마 형제는 맥포리 삼향동초등학교 자리에 집을 짓고 농장을 관리하였다. 장항포 들에 농업용수를 대기 위해서 일로에 감돈리 저수지를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덕치 마을 앞에 또 저수지를 조성하였다. 하지만 비가 오지 않을 때는 호미로 땅을 파서 모를 심기도 했다. 당시 상답이라고 하는 논에서 최고의 수확량은 쌀 두 가마니의 소득이었다.
단란하고 평화로운 마을
사실상 영산강이 막히기 전까지는 참으로 어렵게 살았다. 농한기에는 가마니를 짠다거나 미서리 등을 짜서 연명하였고 바다에 가서 갯것들을 잡아다가 먹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벼 품종의 개량과 풍부한 농업용수 덕으로 해마다 풍년을 이루고 살기가 좋아졌다.
현재 마을 앞으로는 서해안 도로와 연결되는 국도 2호선 대체도로가 지나가고 있으며 마을 옆으로는 811번 지방도로가 지나가고 있어 여러모로 어수선한 분위기를 풍겨주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편안하고 회목한 분위기에 ‘단란하고 평화로운 마을’ 이라고 마을 자랑이 대단하다. 또한 6,25 등 국가적 변란시에도 다른 마을에 비해 유독 이 마을만은 전혀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특히 작년부터 郡에서 해왔던 ‘어르신 건강 운동’ 사업 때문인지 주민들이 앉아 몸 풀기를 하는데 모두들 보통 솜씨가 넘는다.
마을의 역사는 얼마 되지 않지만 이 마을 주민들이 일치단결하여 정부와 기관의 부당한 시책에 맞서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했던 두 번의 역사를 갖고 있다. 하나는 마을 앞으로 지나가는 서해안 고속도로의 연장선인 L자형 도로공사 노선에서다. 이 도로는 처음엔 일로와 삼향의 경계 지점인 남창천을 기점으로 건설하려 했다. 하지만 후정마을의 노루목이 걸려서 주민들이 변경을 요청했는데 현재의 길로 설계가 된 것이다. 주민들은 고속도로가 마을 주민들의 전망권을 가리게 된다는 점을 들어 오랫동안 농성을 하면서 설계 변경을 다시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리상 현재의 길이 아니면 마을 뒤로 길이 나야 하기 때문에 진행 측의 선택의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1960년대 중반에 장항포 들에 비행장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토지가 좁았던 용포리 주민들은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결국 주민들의 싸움이 승리하여 비행장은 목포시 용당동으로 옮겨갔다. 당시 이 마을 뿐 아니라 맥포리 사람들까지 나서 얼마나 격렬하게 반대했던지 ‘괭이부대’ ‘호미부대’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곳은 자방포 주변의 마을 중에서 가장 지대가 낮은 지역이다. 해서 비가 오면 제일 먼저 물이 차올랐던 지역인 반면에 물이 풍족하고 고기가 많이 잡혔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떡재너머, 지형이 가재형국의 가잿등, 성적굴, 모롱지(용포로 넘어가는 고개), 농바웃재, 비싯골(비에 씻겨서 내려오는 고랑), 한길(큰길), 언목, 초분골, 동굴까끔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여름철이 가장 바쁜 농번기가 되는 마을 - 용포3리 용포
용포 마을은 우데미 아래데미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자료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으나 1912년의 자료부터는 현재의 이름으로 나온다. 마을 이름의 유래는 마을의 주산인 오룡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로서 앞에 포구가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행정구역명으로는 삼향면 용포3리 용포 마을이다. 이 마을의 입향조로 마을유래지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월성 昔씨가 먼저 왔고 그 이후 밀양 박씨, 광산 김씨, 김해 김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무안세적지에는 인조 代에 車季南(호-한안당, 연안인)이 먼저 입향 했고 후에 정조 代 安洸彦(호-해강, 순흥인)이 들어와 정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차계남은 인조대의 사람으로 참봉을 지냈으며 경기도 수원시 봉황동에서 세거하다 병자의 난을 피해 이 마을에 정착하였다. 공은 세상의 덧없음을 익히 알고 의리가 사라졌음을 통탄하여 세상에 나가지 않고 강호에 은거하였다.
또한 안광언은 순조대의 사람으로 나주 영산포 삼영리에서 세거하다가 연이은 흉년으로 이곳 용포로 와서 터를 잡았다. 공은 재성이 초범하고 문장이 높아 주변 사람들이 우러러 보았으나 명리를 탐하지 않고 자연을 벗 삼아 이곳에서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또한 김해김씨의 족보를 보니 김명신(金命新)이 18세기 초 영암 서호에서 이 마을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마을은 여름철이 가장 바쁘고 실속 있는 계절이다. 바로 이 마을의 특산물인 순고구마 때문이다. 보통 고구마는 메꽃과의 여러해살이 덩굴풀의 하나로 대체로 뿌리를 수확하는 식품인데 이 마을의 고구마는 순을 이용해 소득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주민들은 여름 한철에 최고 2,000만원의 소득을 올리기도 한다. 또한 쉬엄쉬엄 해도 500만원은 너끈히 번다고 하니 웬만한 농사보다는 소득이 훨씬 알차다. 예전의 이 시절에는 당산나무 아래서 장기를 두거나 보리 자루를 지고 남창포구로 가 황석어(황실이)와 바꾸기 위해 가는 일이 일상적인 때이기도 했었다.
마을 앞의 들[野]을 ‘만들’이라 한다. 쑥구테 앞의 동산으로서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는 섬이었다. 현재는 농지가 되어있는데 예전에 만들 주변에서 호남선 철도를 놓으면서 둑을 쌓아 조금만 비가 내려도 농경지가 물에 잠기는 일들이 허다했으나 현재는 호남선이 옮겨지고 물 관리가 잘 되어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현재 그 자리에는 서해안 고속도로와 연결되어 광양까지 가는 국도 2호선이 지나가고 있을 뿐 아니라 811번 지방도로도 지나가고 있다.
예전에 이 마을은 숲속의 마을이었다. 뒷정기에서 부터 쑥구테까지 아름드리 당산나무들이 마을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해풍을 막기 위해 심었던 나무는 마을을 흥성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몇 그루가 남아 있어 그때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쑥구터는 포구였을 뿐 아니라 초분골의 역할도 했으며 이곳의 당산나무는 계선주 역할을 했다. 당산나무가 있는 곳은 전부 군유지이다.
아기장수의 전설이 있어
이 마을에는 바위[岩]로 인해 일로읍과 관련된 전설이 두 개나 있다.
하나는 달바위의 전설이다. 원래 일로읍 월암리 일로초등학교 교정에는 서 있는 바위가 하나 있었다. 지금은 일로초등학교 주변에 건물이 들어서서 시야를 가리고 있지만 예전에는 그 바위를 일로 주변의 사방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용포 마을 솔잔등에서는 직선으로 그 바위를 볼 수 있어 사연들이 많았다. 즉 달이 비치는 날 그 바위를 보면 마치 남자의 성기가 발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마을 처녀들이 바람이 나고 특히 아줌마들은 불륜을 저지르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고 한다. 해서 어느날 저녁에 용포의 남자들이 월암리의 바위를 밀어서 서있지 못하게 만들고 일로 사람들은 바위 주위에 대나무를 심어 볼 수 없게 만들자, 그 이후부터는 마을의 부녀자들이 진정되고 더 이상 나쁜 소문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이 마을 젊은이들은 마을 안에서 결혼한 사람들이 많다. 다른 마을에서 아무리 좋은 결혼 상대가 나타나도 거들 떠 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용포 자갈 하나에 이동 처녀 둘 하고도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는 용포 밭은 자갈이 많아도 곡식이 잘 된다는 말인데 그 정도로 주민들의 마을에 대한 자존감이 컸었다.
두 번째는 일로읍 죽산리 당월촌의 범바위와 이 마을의 용과 관련된 이야기다. 아쉽게도 내용은 있지만 정확히 알고 있는 주민이 없어 채록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마을에서 將相之地와 관련된 월성 석씨 ‘아기장수’의 전설이 채록된 기록이 있어서 아마 그와 연결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마을 앞에 펼쳐져 있는 간척지에는 왕대[王竹]를 묶어 만든 쑤기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자방포 들을 농경지로 만들면서 염분 제거를 위해 바닥에 왕대를 넣고 농지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방 이후에는 그 쑤기를 캐다가 집을 짓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이 마을에는 삼향동초등학교의 전신인 ‘용포간이학교’가 1939년 현재의 마을회관 주변에 세워졌다가 1948년 현재의 맥포리로 옮겼다.
이 마을에 남아있는 지명으로 오룡산 기슭의 구슬고랑[珠洞, 또는 玉洞], 서당고랑[書堂峙], 갱이고랑[更因] 등이 있다. 시누대가 많이 있었다는 대삽고랑과 세수머리 장골 모래실 잔등 떡재 양도대미 등도 있다. 또한 모룡지라는 곳은 오룡산의 맥을 이어받은 곳으로 지형상으로 물을 맞는 형국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슬고랑에는 지금도 밭을 경작하기 위해 땅을 파면 옛날의 기와조각들이 무수하게 나온다고 한다. 들샘 등 세 개의 샘이 있었다.
마을 옆으로 지나가고 있는 815 지방도로의 고개를 물이 넘어가는 고개라는 의미인 무너미재[水越峙]라 부른다. 예전의 이 재는 한양 가는 주요 길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으며 주막도 있었다. 주막 옆에는 장판거리 샘이 있었으나 호남 고속 철로의 지하로가 나면서 수맥이 끊겨 물이 말라 버렸다. 장판거리라는 지명은 샘 옆에 장판만한 넓적한 돌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또한 이 재는 험하고 깊어서 도둑들도 많아 피해를 본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무너미재는 예견지명이기도 하다. 물이 고개를 넘는다는 의미대로 철도가 나고 길이 뚫리면서 물길도 열려 실지로 물이 넘어가고 있다.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보름에 당산제를 지낸다. 예전에는 마을회관 앞 당산나무에서 지냈으나 당산나무가 고사되자 길 건너 당산나무로 옮겨서 지낸다. 그 당산나무에는 상석이 항상 자리하고 있어서 주민들의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전에는 어른들의 교육열 때문에 공무원들을 많이 배출하기도 했다. 마을에 80세 이상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많다. 특히 96세에 해당되는 어른은 지금도 쉬지 않고 일을 하신다.
지난 5월 1일부터 마을에 버스가 다니지 않아 주민들의 고통이 크다. 젊은 사람들한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병원을 가거나 목포에 물건을 팔려고 하는 노인들에게는 생계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마을의 위치상 군에서 지원하는 ‘행복택시’에도 해당되지 않아 불만이 많다. 전에는 마을에 차남진 제각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교회가 있으며 1994년에 세운 조일수공적비가 있다.
덕림산 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 - 용포4리 德峙
덕치는 용포4리에 속하는 마을로 원래는 土雉라 불렸다. 마을 형국이 죽은 꿩의 형국이라 해서 그렇게 불렸는데 주민들이 어감이나 의미가 좋지 않다고 해서 지금의 이름으로 불린 것이다. 덕치는 마을의 뒷산인 덕림산의 고개에 자리 잡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민들은 마을의 주산인 뒷산을 덕림산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 마을을 제외한 삼향읍의 다른 마을에서는 이 산을 전봉산으로 부르고 있다. 마을 앞에는 반월봉이라 부르는 야트막한 야산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앞에 있는 들은 평계들이라고 부르는데 용포들로 불리기도 한다.
이 마을이 형성된 것은 1900년대 초로 보인다. 어느 성씨가 먼저 들어와서 마을을 어떻게 형성하였는지는 모르나 주민들은 김해김씨 김평운, 광산김씨 김영화, 그리고 밀양손씨 손점석 등이 들어와 기반을 닦았다고 알고 있다.
자료에도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나오지 않고 1912년의 자료에 삼향면 덕치동으로 그리고 1917년에 삼향면 용포리 덕치동으로 나온다. 이후부터는 삼향읍 용포리 덕치 마을로 나온다.
마을 옆으로 지나가고 있는 815 지방도로의 고개를 물이 넘어가는 고개라는 의미인 무너미재[水越峙]라 부른다. 예전의 이 재는 한양 가는 주요 길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으며 주막도 있었다. 주막 옆에는 장판거리 샘이 있었으나 호남 고속 철로의 지하로가 나면서 수맥이 끊겨 물이 말라 버렸다. 장판거리라는 지명은 샘 옆에 장판만한 넓적한 돌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또한 이 재는 험하고 깊어서 도둑들도 많아 피해를 본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무너미재는 예견지명이기도 하다. 물이 고개를 넘는다는 의미대로 철도가 나고 길이 뚫리면서 물길도 열려 실지로 물이 넘어가고 있다.
덕림산 기슭에는 문둥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연안차씨 문중 땅 주변인데 60년대까지만 해도 한센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골짜기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주변에는 우리 문학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희곡 문학의 대부인 차범석 선생이 묻혀 있기도 하다.
마을은 윗 덕치와 아랫 덕치로 나뉘어져 있다. 윗 덕치는 용포 7리로 구분된 와동 마을을 말하고 아랫 덕치는 현재의 덕치 마을을 말한다. 마을 앞으로 무안 광양간 남해안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마을 앞에 죽림저수지가 있다. 국사봉에서 내려온 물을 가둬 장항포 간척지에 물을 대기 위한 것인데 일제 강점기 때 조성하기 시작하여 1948년에 완성된 저수지다. 표지판에는 맥포 저수지라 표기되었다. 이렇게 표기된 이유를 주민들에게 물어보아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다. 장항포 들의 간척지에 농업용수를 대기 위해 조성한 저수지가 일로 감돈리의 감돈 저수지인데 수량이 부족에 보충으로 만든 저수지가 바로 죽림저수지이다.
청정환경의 전도사 붉은 박쥐가 있어
얼마 전까지 이 저수지를 둘러싸고 곳곳에 계사 돈사 등 각종 축사가 들어서 있어 저수지 물이 썩어가고 있었다. 마을에 사는 주민을 포함하여 저수지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냄새가 심해 머리가 아프다고 민원을 제기할 지경이다. 가끔씩 저수지에서 죽어가고 있는 오리의 모습들도 있어 오염의 심각성을 느끼게 했었다. 그런데 요즈음은 저수지에서 냄새가 나지 않았다. 물 빛깔도 맑은 모습이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저수지 주변의 축사나 돈사를 상당수 정리했다는 것이다. 저수지 아래에 죽림교라는 다리가 있다.
마을 뒤에 成佛寺라는 절이 있다. 대한불교 법화종 소속인데 30여 년 전에 정각(속명 김용팔)스님이 창건한 것으로 이 절 뒤에 바위굴이 있다. 여러 사람이 앉을 정도의 넓직한 곳인데 이 굴에 붉은 박쥐가 살고 있다. 붉은 박쥐는 황금박쥐라고도 불리는데 청정 지역에서만 사는 종이다. 또한 천연기념물 제452호로 멸종위기 1급 종이다. 우리 무안에서는 해제 지역에서 발견되는데 확인된 개체수가 100여 마리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이 굴 아래에는 각종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는 샘이 있다. 그런데 절세[寺刹勢]가 성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물을 마셨는데 절세가 하락하면서 샘도 가꾸지 않아 잊혀져 가고 있었다.
마을에 3개의 공장이 있다. 물외장아찌 공장과 딸기 재 가공공장 그리고 이불공장이 있다. 딸기 가공공장에는 얼마 전까지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했던 들샘이 있어 수량도 많아 주민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현재는 공장이 들어서면서 메워져 버렸다. 행복교회도 있다.
이 마을에서 일본인들이 간척지 조성에 사용했던 대나무 조각들의 묶음을 말하는 특이한 용어를 확인할 수 있었다(건너 마을인 용포에서도 확인 된다). 이른바 ‘쑤기를 박다(묻는다)’라는 용어다. 쑤기란 간척지 논에서 염분을 제거하기 위해 묻는 대나무 다발을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쪼개진 대 조각을 묶어서 논 깊숙이 묻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농사를 짓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장항포를 막아서 형성된 마을 앞 간척지에 일본인들이 측량을 하여 600 - 900평씩의 농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농지에 세 개의 깊숙한 개웅을 만들어 이 쑤기를 박은 것이다. 이후 세 개의 개웅이 만나는 곳에 조그마한 둠벙을 만들었다. 그러면 논 속의 염분이 대 조각을 따라 흘러서 이 둠벙에 모이게 되는데 나중에 이것을 퍼내어 염분을 제거하였던 것이다.
일본인이 물러간 이후에는 마을사람들이 그 쑤기를 파서 흙집을 지을 때 ‘액대(건축 용어)’로 사용하기도 했으나 지금도 장항포 들의 농지를 깊숙이 파면 이 쑤기를 볼 수 있다.
마을의 지형이 잉어를 닮은 마을 - 용포5리 이동
예로부터 잉어는 영물(靈物)이었다. 孝를 말하고 富貴와 出世를 논할 때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고기이다. 뿐만 아니라 풍수에서 좋은 혈처를 이야기할 때도 ‘잉어 명당’이라는 이름으로 한 자리를 차지한다.
삼향읍에는 마을의 형세가 마치 잉어가 누워있는 모습과 같다 해서 잉어와 관련된 마을 이름을 붙인 지역이 있다. 삼향읍 용포5리 鯉洞(이동)마을로 안동네 뒷골 신동 돔밧골 등으로 이뤄졌다. 조선시대와 1912년의 자료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으나 1917년의 조선면리동일람에 처음 鯉洞으로 등장하는 마을이다. 삼향읍 소재지에서 811번 지방도로를 따라 일로 쪽으로 2㎞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의 전체적인 모습이 가임산(또는 관림산이라고도 한다) 기슭에 자리하고 있어 잉어 명당이라는 용어가 생각 날 정도로 꽉 짜여진 형세이다.
맥포리의 극배와 월계 마을 그리고 용포리의 이동 마을은 경주이씨 집성촌이다. 경주이씨가 무안에 들어온 것은 1600년대 李時瑞(자-희중, 호-해동. 1624-1685)가 처음이다. 공은 영암 신북에서 살았다. 그러다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나주 영산포에서 뱃길을 따라 내려오다 맥포리 송산마을 입구의 묵방동 주변 산세의 수려함을 보고 정착했다. 공의 후손들은 무안 지역 곳곳에 퍼졌으나 집성촌을 이룬 것은 삼향읍 용포리의 이동 마을과 맥포리의 극배와 월계마을이다. (원래 경주이씨 무안입향조는 응신 응명 형제로 알려졌으며 묵방동 주변에 터를 잡은 것도 이 형제들이었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이동마을에서는 위와 같이 주장하였다)
1700년대 초에 후손인 이응신(자-자실, 1684 - ?. 현감을 역임했다)이 용포리 이동 마을로 가고 동생인 이응명은 극배 마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월계마을의 입향조도 극배 마을과 같이 이응명이다. 이후 다른 성씨들도 간척지 경작과 철로공사에 참여하면서 큰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이동마을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연안차씨가 들어오고 이어 나주 정씨 정도봉도 나주 기만동에서 이 마을에 들어왔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 뒤에는 김해김씨 문중산과 묘가 있어 경주이씨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김해김씨가 살고 있었지 않나 추정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마을 이름을 마을의 풍수적 지형을 따 鯉似物(이사몰이라고도 함)이라고 했으나 1910년경 마을 주민인 정우룡에 의해서 현재의 이름인 鯉洞으로 바뀌었다. 현재의 마을 모습은 산업화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 예전의 아늑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국사봉의 맥을 이은 가임산이 주산으로 마을 앞으로는 811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마을 뒤로는 철도와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또한 마을 앞 장항포 들에는 광양에서 도청을 지나 서해안 고속도로로 연결되는 4차선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주민들의 말로는 ‘예전에는 마을 앞 해안선을 따라서 소나무가 울창하게 심어져 있어 맞은편 마을인 용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송림에 싸여 있어서 마을이 아늑했었다’고 한다. 이 소나무 숲은 용포 마을에 대한 경계적 의미를 지니기도 했다. 또한 마을에서 용포까지 개웅이 있어 궁게들이라 불렀다.
마을에는 5대 인물이 있어
마을 오른편으로 골짜기가 하나 있는데 영골이라 불렀다. 주민들 사이에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이곳에 장씨 성을 가진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해서 지금도 그 집터가 있었던 부근에서는 기와나 주방기구 등이 나온다고 한다. 또 왼쪽에 나있는 골짜기는 서당께라고 불렀는데 예전에 이곳에 서당이 있어서 불렀던 이름이라고 한다.
예전에 마을 앞에는 당산나무로 알려진 아름드리가 넘는 가죽나무가 있었다. 아이들이 이곳에서 놀기도 하고 여름에는 주민들이 장기를 두고 하는 자리였는데 일제강점기 때에 커다란 태풍의 피해를 입어 말라 죽었다. 그곳에서는 덕치 마을 앞에 있는 돔밧골(동백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 골짜기. 동백골이 변함)에서 살고 있던 나환자들도 자주 머물러 고구마도 구워먹고 고기도 구워먹었던 쉼터였다고 한다.
마을회관에는 마을 현황 및 유래와 마을 5대 인물이라는 글을 각인한 석판이 있었다. 마을현황과 유래에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주민들이 논농사를 짓고 나서 나온 짚으로 가마니 등을 만들어, 당시 마을에서 운영하고 있는 7대의 마차를 이용해 목포에 판매하여 높은 소득을 올렸다. 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자치 역량을 한층 높인 구판장을 삼향읍에서는 유일하게 주민들이 직접 운영함으로써 주민 소득을 극대화 시키기도 하였다. 해서 당시에는 무안군에서 제일 잘 사는 마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마을의 5대 인물을 살펴보면 정우룡(1888-1953)은 마을훈장으로서 이사물이란 지명을 현재의 이동으로 개명한 분이다, 이상규(1912-1975)는 삼향면장과 농지개량조합장을 지냈다. 이양웅(1935-)은 삼향농협조합장과 무안군의원을 지냈다. 이춘웅(1942-)은 정당인으로 목포시의원을 지냈으며 목포문원장을 역임했다. 이윤석(1960-)은 전남도의원과 두 차례 무안신안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 마을에서 일본인들이 간척지 조성에 사용했던 대나무 조각들의 묶음을 말하는 특이한 용어를 확인할 수 있었다(건너 마을인 용포에서도 확인 된다). 이른바 ‘쑤기를 박다(묻는다)’라는 용어다. 쑤기란 간척지 논에서 염분을 제거하기 위해 묻는 대나무 다발을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쪼개진 대 조각을 묶어서 논 깊숙이 묻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농사를 짓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장항포를 막아서 형성된 마을 앞 간척지에 일본인들이 측량을 하여 600 - 900평씩의 농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농지에 세 개의 깊숙한 개웅을 만들어 이 쑤기를 박은 것이다. 이후 세 개의 개웅이 만나는 곳에 조그마한 둠벙을 만들었다. 그러면 논 속의 염분이 대 조각을 따라 흘러서 이 둠벙에 모이게 되는데 나중에 이것을 퍼내어 염분을 제거하였던 것이다.
일본인이 물러간 이후에는 마을사람들이 그 쑤기를 파서 흙집을 지을 때 ‘액대(건축 용어)’로 사용하기도 했으나 지금도 장항포 들의 농지를 깊숙이 파면 이 쑤기를 볼 수 있다.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마을 - 용포6리 계두
계두는 용포6리에 속하는 마을로 원래는 용포2리인 용계 마을과 한 마을이었으나 인구 증가로 1992년에 分里 되었다. 이 마을은 국사봉에서 학림산과 가임산을 거쳐 장항포 들을 향해 돌출되어 나온 반도형 마을로 1914년 호남선 철도가 마을을 가로지르며 지나가 섬 형태로 보이기도 하는 마을이다. 처음에는 배들이 정착할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뗏머리라 불렀으나 마을의 지형이 닭머리를 닮았다 하여 鷄頭(자료에는 溪頭라고 기록했으나 틀린 표기이다)라 부른다.
한때 같은 행정구역이었던 용계마을의 지명유래도 ‘마을의 뒷산에 있는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으로 ‘앵계’라 불렸으나 그 후 한자로 고치면서 ‘龍溪’로 변했다’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앵계’는 전라도 사투리로 ‘알을 품은 어미닭’을 뜻한다고 한다. 마을이 닭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면에서 이 마을과 닮은 점이 있다.
기록으로 보면 마을 앞에 넓은 농경지를 만들어 준 장항포 둑은 19세기 말에 시작하여 1903년에 완성되었으며 장항포 들 주변의 인구 변화를 보면 1900년을 전후해서 눈에 띄게 늘어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즉 둑막이 공사를 비롯해서 농경지 경작을 위해 인구의 유입이 늘어난 것이다.
이 마을도 맥포에서 살던 함평이씨 후손이 120여년 전에 이 마을로 내려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입향조를 알 수 있는 함평이씨 족보를 볼 수 없어 확인할 수 없었지만 주민들 모두가 함평이씨가 먼저 들어왔다는 데는 이의가 없었다. 마을유래지 기록에는 ‘1880년 경 함풍이씨 이환제가 나주에서 영산강 하류를 따라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장항포 농장을 위주로 농사를 지어 부강한 마을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바로 뒤이어 들어온 성씨가 해주오씨다. 해주오씨 입향조는 오춘혁(자-운석, 1866 - ?)으로 남악에서 살다 일로읍 용산리 인동 마을을 거쳐 이 마을로 들어온 것이다. 문헌을 통해서 본 마을의 역사도 호구총수나 1912년 1917년의 자료에는 지명이 나오지 않는다. 1987년에 가서야 용포2리로 나온다.
마을 뒤 철로가 지나던 길은 목포에서 일로로 이어지는 4차선 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마을 옆으로는 남해안고속도로와 서해안 고속도로를 잇는 도로가 지나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맥포리와 용포리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였던 공동묘지가 있고 마을 중앙의 뒷산에는 과수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과수원 소유자가 동산의 흙을 팔아 현재는 예전의 마을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마을 곳곳에 축사도 있으나 대체로 가옥들이 장항포 들을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마을 앞으로 죽림저수지와 감돈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농업용수가 지나는 수로가 있었으나 현재는 복개하여 길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 앞에 펼쳐져 있는 장항포 들은 일제강점기 때 식민지 수탈기구였던 동양척식회사와 일본인 中山三郞과 中山英南 등 나까야마 형제가 양분하여 소유했던 농장이었다. 나까야마 형제는 현재 맥포리의 일로동초등학교가 있는 곳에 집을 짓고 농장을 관리하였다. 주민들은 장항포 간척지의 간수가 빠지기까지는 쪽박 타작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논두렁 농사가 많은 부자 마을
해서 일제강점기에는 먹을 것이 신통치 않아 주민들이 많은 고통을 겪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짚을 이용한 제품을 만들어 연명하였는데 가마니 짜기는 기본이고 새끼와 마람 등을 엮어 목포까지 지고 가서 팔았다. 하지만 지금은 삼향읍에서도 부자 마을로 자리 잡았으며 곡물출하량도 삼향에서 두 번째로 많다. 농지가 많아 컴바인 등 농기계도 마을 단위로는 제일 많이 있다. 주 소득원이 벼농사이다 보니 밭곡식이 없다. 해서 이 마을은 논두렁농사가 많이 있다. 논두렁을 이용한 콩이나 깨를 심어 상당한 소득을 올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마을 앞 농장을 향해 많은 길이 나있지만 예전에는 811번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계두길 한 곳뿐이었다. 마을에 들어왔다 나가는 길도 이 길이었다. 또한 이 길을 이용해 죽림이나 이동 마을 사람들이 장항포 농사를 짓기 위해 다니는 길이기도 하였다. 길이 좁아서 다니기에 불편해 마을길이면서도 이동 마을사람들과 함께 길을 확대 포장하기도 했다.
당시 이동 마을과 이 마을에서는 하루 8번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즉 이동마을 일꾼이 이 길을 이용하여 농장까지 8번 정도 왔다갔다 하면 하루해가 저문다는 것이다. 해서 8번 이상을 다녔다 하면 주인이 돈을 더 주었다고 한다.
마을에는 철둑너머 샘이라 부르는 샘이 하나 있었다. 지금도 상수원 시설이 되지 않아 지하수를 사용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이 샘 하나로 주민들이 식수를 해결했다. 물이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이 물을 이용해 주조장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때 이 마을은 피해가 없었다. 주민들 스스로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마을이라 자랑할 정도로 주민 서로간의 불신이 없다. 마을 뒤에는 7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삼향교회가 있으며 대부분의 주민들이 이 교회에 다니고 있다. 이 교회는 청계 대곡에서 분가하여 설립된 교회이다. 당시 대곡마을에서 열렬한 신자였던 남평문씨 들이 이 마을로 이사 오면서 교회를 지어 왔던 것이다. 대곡에 있었던 교회는 무안읍으로 옮겨서 무안교회가 되었다.
참고로 안식일교회는 무안에 세군데 있다.
이 마을은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가고 있다. 즉 70세와 80세 그리고 90세가 된 노인들은 장수축하금으로 마을에 일정 금액을 희사하는 것이다. 이 희사금은 마을 자금이 되어 주민들이 여행을 간다거나 주민들의 복지와 삶의 질을 위해서 공동으로 쓰는 자금이 되는 것이다.
윗 덕치 마을 - 용포7리 臥洞
龍浦里는 삼향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2㎞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일로의 당항촌과 용포리를 잇는 간척사업으로 마을 앞엔 넓은 농경지가 펼쳐있다. 그 사이로 흐르고 있는 남창천이 일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811번 지방도로와 호남선 철도가 지나고 있다. 본래 나주군 삼향면의 지역으로서 오룡산 밑에 포구가 형성 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1895년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고 1910년에는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후정리, 용계리, 평전리, 덕치리, 추치리, 신동리, 와동리와 장항리 극배동, 이동, 용강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용포리라 해서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후정, 용계, 용포, 덕치, 이동, 계두, 와동 등 7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문헌을 통해 지명의 변화를 살펴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용포리에 관련된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1912년의 자료에는 삼향면 후정리 장항리 용계리 덕치동 와동 추치동 등이 나온다. 1917년의 자료에는 삼향면 용포리 후정리 용계리 용포동 평전리 덕치동 추치동 신동 와동 장항리 극배동 鯉동 용강리 일부 등이다. 1987년의 자료에는 삼향면 용포리 후정 용계 계두 용포 덕치 와동 리동 등으로 나온다.
와동은 용포 7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마을유래지에 따르면 ‘승달산의 선녀 옥녀가 마을 뒷산에 내려와 잠을 자고 갔다하여 그 산을 옥녀봉이라 하고 이 옥녀봉을 뒤로 하여 자리 잡은 마을이 바로 臥洞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지명 유래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노인회장은 개구리 蛙 자를 써서 蛙洞이라 하며 마을 아래에 있는 저수지의 개구리가 우는 마을이라고까지 한다. 또한 입향조로는 영양천씨 천흥서가 해남에서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 마을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주민들은 잘 모르고 있었다.
원래 이 마을은 윗 덕치와 아랫 덕치로 구분되어 있었다. 윗 덕치는 와동 마을을 말하고 아랫 덕치는 용포4리의 덕치 마을을 말한다. 두 마을 다 덕림산 아래에 자리 잡은 마을로 반월봉을 바라보며 죽림 저수지 가에 있다.
마을이 삭막하고 어수선하다. 마을 옆으로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도로 가에 방음벽이 설치되지 않아 차의 소음이 마을로 그대로 들어온다. 옆 사람하고 이야기 하기도 곤란할 지경이다. 주민들의 정서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염려된다.
마을 앞으로는 삼향중앙길이 지나고 있다. 덕치마을에서 이 마을을 거쳐 유교리까지 가는 길이다. 그런데 유독 이 마을 앞에서만 1차선 길이다. 다른 길은 전부 2차선으로 오다가 이 마을 앞에서만 1차선으로 간신히 지나가게 되었다. 주민들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길 옆의 농지 소유자가 양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이주여성들이 많아
마을 위에 특이한 비석이 서있다. 이른바 ‘재목청산향우공령단’이라는 비석으로 1978년에 세워졌다. 비문에는 ‘이 비는 완도군 청산면 출신 목포 거주자들이 세운비다. 1977년에 회원들이 죽었을 경우 공동으로 묻힐 것이 필요하다는 요구를 받아들여 회원 각자의 모금을 통해 이곳에 2,000여평의 임야를 구입하고 그 밑에 비를 세운다’라고 쓰여졌다.
20여 가구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데 그중에서 베트남과 필리핀에서 온 이주 여성이 8명이나 살고 있다. 마을에 버스가 다니지 않아 행복택시가 다니고 있다. 마을에 농지가 부족해 주민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마을 옆으로 지나가고 있는 815 지방도로의 고개를 물이 넘어가는 고개라는 의미인 무너미재[水越峙]라 부른다. 예전의 이 재는 한양 가는 주요 길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으며 주막도 있었다. 주막 옆에는 장판거리 샘이 있었으나 호남 고속 철로의 지하로가 나면서 수맥이 끊겨 물이 말라 버렸다. 장판거리라는 지명은 샘 옆에 장판만한 넓적한 돌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또한 이 재는 험하고 깊어서 도둑들도 많아 피해를 본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무너미재는 예견지명이기도 하다. 물이 고개를 넘는다는 의미대로 철도가 나고 길이 뚫리면서 물길도 열려 실지로 물이 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