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송하율
오늘도 어김없이 빛나는 해의 따스한 정기를 받으며 잠에서 깨었다. 일어남과 동시에 언제부터인가 차가워진 바람이 창문과 가벼운 접촉을 한 뒤 나에게 안겼다.
여느 때와 같이 신문을 읽고 변함없이 나라에 대해서 욕지거리를 하고 있을 때, 식탁에 올려져 있는 케이크는 몇 년 전 회갑 때 자식이라는 것들이 달랑 모여 식사 한 끼 한 이후로 세지 않았던 나이를 세게끔 만든다.
케이크의 초를 보니 벌써 육십 오년이나 살았나 싶어 냉소적인 미소가 입에 걸린다. 나는 누가 보면 격식 없다고 난리칠 그런 식으로 손으로 케이크를 움켜줘 입에 넣었다.
대충 우적우적 씹은 후 자식들이 대충 남겨 놓은 영상 메시지를 틀어주는 메이드 로봇의 전원을 끄고, 섬세한 케이크의 맛을 즐겼다.
역시 어렸을 때의 동네 빵집과는 비교도 안 될 셰프의 실력이었다. 케이크를 여전히 손으로 집으며 방금 껐던 자식들의 영상 메시지를 다시 틀어 보기 시작했다.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 내가 원하는 건 이딴 성의 없는 영상 따위가 아닌 음성을 느낄 수 있는 전화라는 것을 왜 모를까?
아! 셰프가 도중에 소금을 넣었나, 갑자기 케이크가 짜져 먹기 힘들다. 목에 넘어가질 않는다. 그래, 나는 섭섭하다. 너무너무 섭섭하다.
아마 어렸을 적 할아버지가 느꼈던 그런 감정이 이것이었나?
내가 아마 17살 쯤 되었을 때, 할아버지의 생신임에도 불구하고 고모, 백부, 아빠까지도 전화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비이신 할아버지는 내색치 못하고 오히려 할머니께서 모든 가족에게 불같이 화를 내시고 자식 된 도리를 상기 시켜 주셨다.
아마 그 때 할아버지, 많이 섭섭하셨을 것이다. 지금 딱 내 처지가 그렇다. 나는 왠지 서럽다. 하하……. 그나마 케잌이나 챙겨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케잌이 잔뜩 묻은 손과 얼굴위에 흐르는 무언가를 씻기 위해 욕실로 갔다. 대궐만한 욕실, 아마 동네 대중탕만 가도 이것보단 못 할 것이다.
언제나 뽀드득 소리가 나는 거울에선 낯선 늙은이가 서있다. 그는 대궐만한 욕실과는 역설적인 존재로 보였다. 부조화랄까? 그에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꼿꼿한 허리와 악다문 입술은 무언가 강렬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씁쓸한 기분을 품고 손과 얼굴을 씻었다. 머리를 감고 몸에 비누칠을 했다. 아, 이 닦는 것을 깜빡 할 뻔 했군. 이를 닦으려 칫솔에 치약을 묻히는데 여전히 입에서는 달콤한 케잌의 향기가 풍기고 있다.
주책없이 다시 눈물이 난다. 그러나 그 눈물은 어쩐지 아까와는 다른, 그런 종류였다. 한순간 이지만 입안에선 아마 어렸을 때 먹었던 그 케잌의 맛을 기억한 것 같다. 나이가 드니 향수에 젖을 때가 많았는데 오늘은 생일이다 보니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생각이 난다.
때는 4학년이었다. 3학년이 되기까지는 교사인 엄마의 학교를 따라 학교를 자주 바꾸어 기억도 없고 추억도 없다. 4학년 때의 나는 뚱뚱하고 자존심이 센 녀석이었다. 누구도 통제하기 어려웠고, 때문에 친구도 마음에 드는 친구만 사귀어 사교성도 별로 좋지 못 했던 걸로 기억이 난다.
5학년 때, 나는 4학년 때를 바탕으로 자기관리에 대해 깨달았다. 전화위복이라 했던가, 나는 점점 살이 빠졌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적극적이게 되었다.
내 인생의 첫 전환점인 6학년, 아직도 나는 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 선생님은 내 목표에 대해 고뇌하게 하셨고, 언제나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셨으며, 어떠한 색안경도 끼지 않고 아이들을 바라보시던 분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 눈을 잊을 수 없다.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본 그날, 아마 그 때가 내 삶 중 하늘을 가장 많이 본 때였을 것이다. 나는 항상 뒤돌아서, 눈물 흘렸고 남들 앞에서 눈물 흘릴 수 없었다. 내 가족을 위해서라도, 내 친구를 위해서라도, 내 회사를 위해서라도. 선생님이 돌아가시던 날 나는 참았던 눈물을 모두 쏟아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항상 소리죽여 눈물 흘리던 나를 선생님은 ‘그럴 필요 없다. 언제든 힘들수록 당당해지거라. 우는 것은 창피한게 아냐, 다음을 기약하기 위해 눈물로 모든 것을 떨쳐내는 것이다’라고 말해주신 것 같다.
아무튼,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그런 분이셨다. 장례식 날 찾아온 제자가 모든 가족과 지인을 더한 것의 몇 배인 것을 보면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대충 알 수 있을 것이다.
인성과 지성을 배우고, 그 지식들을 막 실천 하려 했을 때, 나는 실천도 하지 못한 채 지식으로만 그것들을 안고 작은 사회를 경험해야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올라갔을 때의 느낌은 내가 처음 사회에 몸담을 때와 마찬가지로 떨리고, 고독했으며, 힘들었다.
처음으로 경쟁이란 것을 알려주었고, 습득의 개념을 내게 설명해 주었다. 그 과정에서 성취의 기쁨과 사귐의 기쁨도 누릴 수 있었다.
중학교 2년간은 속사포처럼 지나갔다. 하루하루의 수행평과와 시험, 때문에 역시 별 추억은 없다.
단지 초등학교 때 배운 인성과 지식을 아직까지도 체득하지 못해 나와 의견이 맞지 않은 친구와는 대립과 갈등이 있었을 뿐이었다.
중3, 나에게는 잊지 못한 한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인생 중 가장 많이 맞고, 가장 재미있었으며,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대한민국의 공교육을 저주한다. 공교육은 퇴폐되었고, 선생님들은 스스로가 나태해졌으며 단지 국가에서 안정적인 직업을 공급했을 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가진 나로서는 중3때의 특목고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
나는 특목고를 위해 집에서 지낸 시간보다 학원에서 지낸 시간이 많고, 집에서 밥 먹는 시간보다 밖에서 먹는 시간이 많았다. 그리고 스스로가 나태해지지 않도록 주위의 선생님들은 나를 채찍질 하였다. 결국 나는 특목고에 합격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생활은 대체로 만족할 수 있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자 그 때의 대통령인 이명박은 전국 사립 고등학교의 특목고화를 추진하였고, 자연스레 모교는 입지가 높아지게 되었다.
선생님들도 스스로가 나태하지 않고 발전하려는 모습을 학생들에게 보여주었고, 매년 같은 선생님이 아닌 년이 바뀌면 사람도 바뀌듯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처음 내가 고등학교에서 도전한 것은 반장이었다. 반장선거에 후보는 무려 7명이나 나왔다. 그들은 내가 미리 사귀어 놓은 친구들이었고, 처음부터 결과 보다는 과정에 중점을 둔 것임으로 별로 후회치 않은 자신을 하고 선거에 임했다.
하지만 뜻밖에 나는 반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의외로 공부에 치중한 친구들은 나 같은 괴짜 같은 면모를 가진 사람을 선호하나보다 싶었다.
그 후 반장에 대한 책임감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욕심이었는지 나는 모든 분야에 관심을 쏟을 수 있었다. 우선 사교부터 시작해, 교육, 음악 등 내게 약한 부분부터 내 장점적인 면들을 살려 고쳐나갔다.
난 학교의 모든 축제를 나갔고, 학교의 대회는 다 나갔으며, 고1을 끝날 즈음엔 내 이름도 어느 정도 인지도를 갖추게 되었다.
바쁘게 일 년이 지나가고, 2학년이 되었을 때 가장 기억나는 일은 꽤나 이름 있는 대회에서 나를 뽐내었던 것이다. 골든 벨, 퀴즈대한민국부터 시작해 경기도 대표 토론 대회은상 등 자부와 프라이드가 높아진 한 때였다. 그렇게 2학년 말 나는 아직도 투표결과를 기다리다 한숨도 못 자고 학교에 와 전교회장이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기절한 사실을 잊지 못 할 것이다.
고등학교 말인 3학년 때, 이상하게 나는 고등학교입시가 대입보다 더 힘들었다는 기억을 떠올렸고, 바쁜 일상 속에서도 여전한 내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 한 번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자기관리와 피그말리온 효과 같은 자기암시와 관리로 성적과는 문제가 없었다. 물론 지금 생각하니까 그런 것이지 고3때 잔 시간이 하루에 두 시간이나 될지 모르겠다.
결국 악착같은 고집과 노력으로 나는 미국의 정치 외교로 명문이 조지타운대학을 갈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 외국의 문화와 풍습에 깜짝 놀랐고 우리나라의 교육과는 판이하게 다른 외국 명문대를 보며 지금 까지 꿈꿔 왔던 꿈이 한층 향상 되었고, 구체화됨을 느낄 수 있었다.
우물 안 개구리라 했던가, 나는 그곳에서 전 세계의 인재를 만났고 내가 지금까지 해 왔던 자부와 자만을 타인의 공경과 배려로 바꾸었고 그들은 존중하며 친구로 사귀었다. 특히 왠지 미웠던 히라노 마사요시라는 일본인 녀석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본 외교관으로 우리나라에 머물고 있는 절친 중 하나이다.
그는 처음 나와 세계사시간의 ‘한민족의 통일이 세계에 미칠 영향’과 ‘일본의 2차 대전 후 사후처리문제’에 대해 감정적인 싸움을 벌이고 수업이 끝난 후 같이 술을 진탕마시면서 2차 토론을 벌인 기억이 잊히질 않는다.
그는 나와 비슷한 구석이 많았고, 나라에 대해 반감을 품으면서도 나라를 사랑한다는 약간은 역설적인 면도 비슷했다. 무엇보다 아직도 그 친구와 왕래를 하는 이유는 유희를 즐기지만 유희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점이 나와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어제까지만 해도 몰랐던 생일 이라는 명목으로 오늘 그와 술을 나누러 간다.
어쨌든, 조지타운대학에서도 나는 최초의 동양인 학생대표로 선출 되어 세간을 들썩이기도 하였다. 처음 대표 선거에 나섰을 때, 올해도 무난히 흰색친구가 되려니 했지만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것으로 유명한 조지타운은 나로 하여금 역동적인 선거운동과 유세, 공약으로 그들을 매도 했고, 다음 날 각종 신문과 잡지에 내 사진과 이름이 나온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또한 내가 대학시절 중 기억하는 가장 특별한 것은 부전공인 심리학 시간이다. 그 시간엔 두 명이 짝을 맞추어 서로의 심리를 간파하는 일종의 수행평가와 같은 것이었는데, 심리학의 기초적인 시선확인 중, 내 짝이었던 그녀의 하늘빛의 투명한 눈을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바라보고 있다가 처음으로 C를 받았던 기억이다.
수업이 끝났지만 난 조금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그녀의 눈에 매료되었고, 그 후 데이트를 비롯한 여러 이벤트로 그야말로 ‘사랑엔 국경도 없다’를 실천하고야 말았다.
한번 사랑에 빠지니 보이는 것이 없었다. 졸업을 하고 예정에 없던 석사학위까지 받아 총 6년이라는 시간을 미국에서 보내어 이제는 돌아 가야할 시간이 되었지만, 조국으로 돌아가 국방의 의무라는 그녀 없는 1년의 시간은 그 당시 나에겐 마치 수십, 수백년과 마찬가지로 느껴졌다.
얼마 전에 안 거지만 그녀는 나와의 연애를 시작한 후 한국에 대해 알아보고 우리나라가 징병제라는 사실을 알고 나를 잠시만 떠나보내자고 결심했다고 한다. 결국 나는 그녀와 네 번째 손가락에 같은 반지를 끼운 뒤에 나를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군대라는 곳은 과연 술자리에 모였을 때 몇 시간을 떠들어도 소재가 바닥나지 않을 그런 곳이었다. 그 당시 난 괜한 호기심에 특공대 지원을 했고, 나는 얼마 안가 후회를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짓궂은 선임들이 신고식이라는 명목으로 미친 듯이 연병장을 돌렸을 땐, 탈영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신고식이 대충 끝나고 그들은 후임인 우리들에게 안마를 해주었다. 병 주고 약준 그런 꼴이었지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 때 그 인연들도 아직까지 끈끈히 연결되어 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과 같이, 우리 특공대도 사회에 나가서 서로 상부상조하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힘든 군 생활에서도 나를 지탱해 주었던 것은 역시 아내였다. 영어로 쓰인 편지는 하루를 즐겁게 보내게 하였고, 질투에 찬 선임, 후임들을 놀렸던 것 역시 재미있는 추억이다.
내가 군대에 입대한 해가 아마 2017년으로 그때는 군 복무가 15개월 까지 줄어든 상태였다. 때문에 내가 재대한 18년에는 그녀도 절반 정도 박사과정은 마치고 있었다. 내가 재대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내고 있던 그 시절은 정말 무난하고 즐거운 시간의 연속이었다.
내가 막 서른 줄에 입문하였을 때, 나는 내 첫 아이들과 외교에 입문한 기쁨을 동시에 누릴 수 있었다. 첫 아이들인 이유는 이란성 쌍둥이였기 때문이다. 아들은 검은머리인 나를 딸은 백금의 머리인 아내를 닮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내가 차차 외교관의 수석비서등 경력을 쌓아가고 있을 즈음 나는 우리나라의 정계의 썩을 대로 썩은 면모를 보았고 그것에 치를 떨고 뛰쳐나왔다. 아무리 혈연 지연이 판을 치는 나라는 것 까지는 이해했지만 돈으로 신분이 결정되고 승진이 결정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는 누구보다 엘리트 코스를 밟은 관계로 정.제계 여러 곳에서 스카우트를 받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잠시 휴식을 달라 부탁했다. 그 당시 여러 신문엔 무엇 때문에 최연소이자 인재인 외교관이 일을 포기 했는지 알아내려 했지만, 나 역시 내부 고발자가 되긴 싫었기에 휴식을 핑계로 나왔을 뿐이다.
돈이야 훌륭한 집안에 좋은 커리큘럼을 가진 아내가 벌면 되는 것이었고, 나 역시 경영학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주식등의 재택근무를 통해 얼마든지 벌 수 있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 거울을 본 나는 야망과 패기 없는 내가 증오하는 부류의 인간 되어버린 나를 보게 되었다. 그 날, 나는 아내에게 아이들과 잠시만 미국에서 살도록 부탁했다. 아내는 흔쾌히 수락해 주었고, 그들은 한 달 뒤 떠나갔다.
나는 밑바닥부터 시작하기로 하였다. 모든 돈을 미국으로 간 가족에게 넘기고 나에겐 무일푼뿐이었다. 어찌 보면 모험이지만 동시에 미친 짓이었다. 나에게 남은 것은 월세 30만원의 단칸방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모자란 것 없이 자란 나에게는 그야말로 막막한 세계였지만 다시 아내에게 돌아와 달라고 하기에는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하기에 그 때에는 벌어놓은 돈 만으로 향후 10년을 먹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이제 내게 돈이란 없다. 부모가 물려준 그런 재능과 재력이 아닌 내 것의 무언가가 필요했다.
반년이 지난 그 때 나는 30만원이란 돈의 가치를 새삼 느끼게 되었고, 내가 지금까지 사귀어 왔던 교양과 품위 넘치던 그런 류의 사람이 아닌 순박하고 열심히 사는 인간적인 친구들도 많이 보게 되었다.
아침엔 신문을 돌리고, 점심엔 시장에서 일했으며 저녁엔 대리운전을 하였다. 그 당시의 하늘은 얼마나 푸르럿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매일 노을이 질 때 30대의 젊은 나이엔 바빠서 보지 못했던 푸른 하늘을 보며 흘렸던 눈물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 나의 조부모가 돌아가시고 그 때의 충격으로 여러 날 일어나지 못했을 때, 나의 선생님, 그분이 돌아가심에 따라 흘렸던 눈물을 접고 미친 듯이 일하기 시작했다.
나의 행동력이 내 신용도가 커지게 하였고 그에 따라 나는 본격적으로 대한민국의 시장에서 움직이게 되었다.
가족들은 일 년에 생일날 화상통화로 만난 것이 전부이지만 그래도 나는 커가는 자식들에게 작은 아버지가 아닌 큰 아버지가 되어 보이고 싶었다. 그들에게 떳떳한, 그런 아버지 말이다.
지반이 어느 정도 쌓이고 나는 많은 분야에 손을 뻗쳤다. 불혹의 나이로 다시 일어선 것이다. 나는 여성의류사업을 초점으로 한국을 지배해 나갔다. 신문엔 ‘용의 부활’이라는 타이틀로 나의 부활을 알렸고, 나는 미국의 부인과 자식을 한국으로 불러들었다.
어느 정도 한국의 의류에 영향력을 미치고, 나는 아내와 함께 미국 시장점령에 나섰다. 미국은 역시 한국과는 차원이 다른 그런 나라였다. 하지만 나의 6년간의 미국생활의 경험과 미국 내 나의 영향력 있는 친구들이 나에게 협조해 주었다. 말 그대로 탄탄대로였다.
42살 무렵 나는 한국의 정계에 다시 한 번 도전장을 내밀었다. 나는 밑바닥부터 시작할 때 가졌던 좌우명 ‘내손에서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 진다.’를 토대로 부패한 정계를 정리하려 노력했고, 3년 후 나는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나는 제2의 이명박 타이틀을 가지고 서울을 계발했으며, 낙후된 우리나라의 지방을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지천명의 나이가 되고, 나는 정계를 떠났고, 아내와 함께 여유를 즐기려 여행을 떠났다. 이제는 커버린 쌍둥이들은 그들의 일을 하라 하였고, 나와 아내 그리고 늦둥이인 여덟 살의 막내딸을 데리고 세계를 떠돌았다.
나의 제 2의 고향 미국을 시작하여 유럽, 아프리카, 오세아니아까지 약 8년간을 외국에서 보냈다. 물론 우리 막내딸은 12살 무렵 멘사에 들어 15살에 고등교육을 끝내서 우리와 여행 하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아이가 나를 닮아 언어를 좋아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6개 국어를 할 때 즈음, 나는 그제서야 한국에 대해 향수가 일어났다.
한국에 돌아와 나는 책을 쓰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 집필한 책이 ‘하늘에서 땅 보기, 땅에서 하늘보기’라는 책이었는데 내가 겪은 일생과 비슷한 내용의 책이었다.
기득권층에서의 비 기득권을 바라보는 자세와 비 기득권에서의 기득권을 바라보는 자세를 주관적으로 바라보고 쓴 글로 최연소 외교관에서 시장 납품업자까지의 파란만장한 나의 일생을 다룬 일종의 자서전과 비슷한 것이었다.
이 책을 쓰는 3년간 수많은 퇴고와 수정을 하여 내가 봐도 만족할 만한 그런 책이 되었을 때, 어느새 나는 환갑잔치를 하고 있었다.
사실 지금 내 세대에 환갑잔치를 한다는 것 자체가 140살 먹은 어른들에게 죄송한 말이므로 가족끼리 모여 조촐히 하였다.
환갑잔치를 하고나서 얼마 후 출판을 하였는데 나도 놀랄 정도로 내 책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듬해 경제학 책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나는 전 세계의 열성적인 작가들에게 죄송했다.
그 후 간단히 경제와 정치에 대한 나의 노하우와 경험책자를 내 보내고 있을 즈음, 나 역시 할아버지가 되어 손주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렇게 1년, 1년이 지나 년마다 한, 두 번씩 부모님을 찾아뵙고, 자식들이 나를 찾아올 때 ‘나도 이제 늙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곤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또 오늘이 왔고 내가 65살이나 먹은걸 알게 된 것이지.
막내는 17살에 하버드를 들어가 8년이 지난 지금 박사를 따고 내가 세운 패션회사중 미국지사에 입사했다고 들었다.
나는 8년간 막내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요즘 들어서는 섭섭한 마음이 더 커졌는데, 아침에 영상만 달랑 남기고 전화도 안 해서 정말 섭섭했다. 나이가 들어도 삐지고, 섭섭한 걸 보면 아직도 철이 덜 들었나 싶다.
집에 돌아가는 도중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환갑 맞은 그 년도 51의 통일, 비록 평화통일이긴 하였지만 예상대로 남한 쪽에는 어느 정도의 타격이 왔다. 앨빈 토플러의 예상대로 우리나라는 평화통일 유지국이라는 세계 11공동 최강대국에 속했지만, 이 통일로 인해 약 3년 동안은 우리나라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기도 했다.
내가 창사한 회사는 한국보다 세계로 나가는 추세이기 때문에 별 타격은 없었지만, 그 여파로 수많은 실직자들이 회사로 몰려 한국지점의 대표인 아들과 딸이 곤란을 겪기도 하여,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아비보다 나은 자식이 없는 것일까……. 약간 안타까운 느낌도 있었지만, 아직도 녹슬지 않은 내 경영실력을 보고 내 자신이 흐뭇하기도 했다.
기억나는 일이라면 그 때의 한국 대 공황시기에 한국에 투자한 나의 천문학적인 자금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전 세계의 회사에 한국의 실태에 대해 연락하였고, 내 영향력이 아직 미치는 곳이라면 모두 자선금을 내놓기 바빴다. 한국 대 공황이 끝난 54년, 어이없게도 한국 박물관엔 내 동상이 세워지고, 내 위인전까지 나왔다고 한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 여러 곳에서 환영해 주니 아무리 겸손한 나라도 일일이 나가 초대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 일로 인해 작년엔 세계의 애국자중 하나라는 명목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었다.
그냥 조용히 살려 했건만 하는 일마다 여기저기서 불러주니 감개무량할 따름이다. 어쨌든 한국 대 공황이 끝나고 우리나라의 모습은 완벽하게 서구화 되었다. 내가 어릴 적에 IMF가 한국을 강타하여 반쪽서양의 형태를 띄우고 있었는데, 간신히 명맥을 잡고 있던 우리나라의 동양적 면모를 대 공황이 강타했고, 이제는 언제 한국어가 영어로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철저한 개인주의로 찌든 우리나라 사회에서 이제 자기 자신만 잘 살면 된다는 식으로 바뀌었으니 나로서는 침통하지 않을 수 없다. 그야 내가 어렸을 때도 서로가 경쟁하는 식의 사회주의적 풍조가 있었지만 적어도 부모님 생일엔 하다못해 전화라도 했단 말이다!
나는 한참 우리 사회가 통일이냐 전쟁이냐에 불붙이고 있을 때, 이런 사회주의적 풍조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자식들에게 철저히 교육시킨다고 시켰는데, 결국은 내 아이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서구의 사회인들이 되어버린 것 같다.
사십대 이후로 피우지 않았던 담배 한 갑을 사서 입에 물었다. 담배는 내 체질은 아니어서 하루에 한 대 이상을 피우진 않았지만, 피는 순간에는 약간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아서 기분은 좋다.
그러고 보니 안 해본 것이 없구나! 내 본래의 꿈이었던 외교관, 시장판에서 장사도 하고, 물품을 납품하기도 하고, 패션회사를 차렸고, 경영을 하였으며 책도 저술했다. 나라에 대해 환원도 했고, 동양권 최초로 노벨상을 2개나 받은 영웅이 되기도 했다.
대충 내 생각이 정리되자 자식들이 떠올랐는데, 사실 나는 아이들에게 해준 것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세월은 나만 살짝 빗겨갈 줄 알았는데, 역시 나도 세월의 흐름에 몸을 뉠 수 밖에 없었다.
내 자식들은 내가 어떤 눈으로 비쳤을까? 어쩌면 매일매일 가족시간이라며 앉혀 놓은 것이 그들에겐 독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엄마, 아빠라 부르며 하루에 있었던 일을 전화로 다 털어놓는데, 세월이 흐르고 그것마저 내 자식들에겐 어색한가 보다.
나는 우리 5명이 다 모여 같이 TV나 보면서 떠드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그것이 지루함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이 미치자 나는 맏이인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즘엔 3D로 상대방을 비추며 대화하는 전화기도 많이 있지만 나는 아직도 목소리만 듣는 그런 전화를 고집했다. 영상은 영상일 뿐 실제는 아니라는 생각에서 이다.
딸과의 대화는 짧게 끝났다. 불편하지 않았고 그런 대화가 있어서 자신은 좋았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전화 못해서 미안하다고, 못 올 것 같다고 한다.
매년 이 맘 때쯤이면 나와 생일이 비슷하신 두 장인님의 기일을 위해 아내도 미국에 갔기 때문에 나는 마사요시와 점심을 먹고 저녁에 집에 들어가는 그런 일이 벌써 한 10년 째 지난 것 같다.
가족이 다 모여 본지는 아이들이 독립해서 자리를 잡을 때 축하 해 준 것이 전부였고, 그 이후로는 막내딸의 입학 때 모인 그 때가 전부였다. 그 이후로는 대 공황과 여러 문제가 겹쳐 설날과 추석에도 자식들을 못 보았다. 그렇게 십여 년이 흐른 것이다. 물론 다들 바쁘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정세도 안정되고 졸업도 했으면 아비를 찾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점심에 자식의 생일을 잊지 않으신 부모님의 전화를 받고 왈칵 목이 메여 가족에 대한 사랑의 필요성을 갑자기 느낀 뒤라 오늘따라 내 인생살이와 자식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어느새 저녁놀이 져 어둑어둑한 하늘을 보며, 내 마음도 조금씩 우울해짐을 느껴 일부러 허리를 꼿꼿이 세워 당당히 걸었다.
집 앞에 도착하고 문을 여니, 거실의 거대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노을의 빛이 나를 강타했다. 아름다운 노을을 보니 절로 마음이 노곤해져 집에 들어가니 자동 센서가 집안의 형광등을 모두 켜 노을의 아름다움을 훼손하니 나는 다시 그 인조적인 불들을 모두 꺼 노을을 즐기러 부엌에서 와인 한 병과 유리잔을 들고 거실로 나섰다.
거실로 향하던 중 2층의 전망에서 바라보면 더 아름답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층 계단을 통해 이층의 테라스로 향했다.
테라스에서 한참 노을을 바라보던 내 눈에선 태양과 같이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외로움의 눈물이었고, 후회롭지 않은 삶에 대한 눈물이었고, 사랑하는 자식을 보지 못한 후회였다.
어느새 한 병의 와인을 다 비웠다. 자식들은 매 년 내가 이런 주책을 부리며 청승떤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전화가 울렸다. 막내딸인 듯싶다. 아이는 이미 들었던 자신의 입사소식을 알렸고 나는 들은 적 없다는 식으로 축하해 주었다.
막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노을은 어느새 지평선 저 너머로 고개를 숙였고, 나는 아직도 이상하게도 밝은 주위의 풍경에 의아해 하며 고개를 돌렸다.
가족들이다. 내 가족들이다. 10년 만이다. 아내에 손엔 케잌이 들려있고, 막내는 첫 월급으로 샀다며 빨간 내복을 주었다.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 못 온다는 쌍둥이들도, 미국에 갔다던 아내도, 입사해서 바쁘다던 막내도. 지금 내 눈앞에 가족이 있다.
힘들 때도, 기쁠 때도 내 옆을 지켜주던 가족이었다.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났다. 달디 단 눈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