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실 에서 나온 이인국 박사는 응접실 쇼파에 파 묻히듯이 깊숫이 기대어 앉았다 그는 백금 무태 안경을 벗어 들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등골에 축축히 밴 땀이 식어 들어감에 따라 피로가 스며 왔다 두시간 이십분 간의 집도(수술) , 위장 속의 균종 적출, 환자는 아직 혼수상태 에서 깨지 못하고 있다 수술을 끝낸 찰나 스처가는 육감, 그것은 성공 여부의 적중률을 암시하는 계시 같은 것이다 그러나 왠일인지 뒷 맛이 꺼림칙 하다 그는 항생질 의약품이 그다지 발달 하지 않았던 일제 시대부터 개복(開腹) 수술에 최단 시간의 기록을 세웠던 것을 회상해 본다 맹장염 이나 포경 수술, 그 정도 것은 약과다 젊은 의사들 에게 맡겨 버리면 그만이다 대 수술의 경우에는 그렇게 방임 할수가 없다 환자측 에서도 대개 원장의 직접 집도를 조건부로 입원 시킨다 그는 그것을 자랑으로 삼아 왔고 스스로 집도하는 쾌감 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의 병원 부근은 거의 한집 걸러 병원 이랄수 있을 정도로 밀집한 지대다 이름 없는 신설 병원 같은 것은 숫제 비 장날 시골 점방 처럼 한산한 속에 찿아오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이인국 박사는 인류 대학 병원에서 까지 손을 쓰지 못하여 밀려오는 급환자들 틈에 끼어 환자의 감별에는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다 그것은 마치 여관 보이가 현관으로 들어서는 손님의 옷 차림을 훍어 보고 그 등급에 맞는 방을 순간적 으로 결정 하거나 즉석 에서 서슴치 않고 손님을 거절하는 경우와 흡사 하다고나 할까 ? 이인국 박사의 병원은 두가지의 전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병원 안에 먼지 하나도 없이 정결 하다는 것과 또 하나는 치료비가 여느 병원의 갑절 이나 비싸다는 점이다 그는 새로운 환자의 초진 에서는 병에 앞서 우선 그 부담 능력을 감정 하는데서 부터 시작한다 신통하지 않다고 느껴 지는 경우에는 무슨 핑개를 대든가 그것도 자기가 직접 나서는게 아니라 간호원 더러 따돌리도록 하는것이다 그렇게 중환자가 아닌한 대부분의 경우, 예진은 젊은 의사들이 했다 원장은 다만 기록된 진찰 카드에 따라 환자의 증세와 아울러 경재 제도를 판정하는 최종 진단을 내리면 된다 상대가 가까운 사람 이거나 거물급이 아닌한 외상 이라는 명목은 있을수가 없었다 설령 있다 해도 이 양면 진단은 한 푼의 미수나 결손도 없게 한 , 그의 인생을 통한 의술 생활의 신조요, 비결 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고객은 왜정 시대는 주로 일본인 이었고 현재는 권력층이 아니면 재벌의 셈속(드러나지 않는 속마음)에 드는 측이어야 했다 그의 일과는 아침에 진찰실에나오자 손가락 끝으로 창틀이나 탁자 위를 훑어 무태 안경속 움푹한 눈으로 응시 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이때 손가락 끝에 먼지만 묻으면 불호령이 터지고 간호원 들은 하루 종일 원장의 신경질에 부대껴야 한다 아무튼 그의 단골 고객들은 그의 정결한 결벽성에 감탄과 경의를 표해 마지 않는다 1 . 4 후퇴때 청진기가 든 손가방 하나를 들고 월남한 이인국 박사다 그는 수복되자 재빨리 샛방 하나를 얻어 병원 하나를 차렸다 그러나 이제는 평당 오십만환을 호가 하는 도심지에 타이루를 바른 이층 양옥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 전문인 외과 이외에 내과, 소아과 산부인과 등 개인 병원을 집결 시켰다 운영은 각자의 호주머니 셈속 이었지만 종합 병원의 원장 자리는 의젓이 자기가 차지 하고 있는 셈이다 이인국 박사는 양복 조끼 호주머니 에서 십팔금 회중 시계를 꺼내 시간을 보았다 두시 사십분 ! 미국 대사관 부라운 씨와 약속 시간은 이십분 밖에 남지 않았다 이 보고 있는 시계에도 몇 가닥의 유서 깊은 사연이 숨어 있다 이인국 박사는 시계를 볼때 마다 참말 기적 임에 틀림 없었던 사태를 연상 하게 된다 왕진 가방과 함께 삼팔선을 넘어온 피난 유물의 하나인 시계, 가방은 미군 의사에게 얻은 새것으로 갈아 매어 흔적도 없게된 지금 시계는 목슴을 걸고 삶의 도피행을 같이 해온 유일품 이요 애써 보면 인생의 반려 이기도 한것 이다 밤에 잘때도 그는 시게를 머리 맡에 풀어 놓거나 호주머니에 넣어둔 채로 버려 두지 않는다 반드시 풀어서 등기서류, 저금통장이 들어있는 비상용 캐비넷 속에 넣고야 잠 자리에 드는것 이었다 거기에는 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 시계는 일본 제국 대학을 졸업할때 받은 영예로운 수상품 이다 뒤쪽에는 자기 이름 까지 새기고 있다 그후 삼십여년, 자기 주변의 모든것이 변하여 갔지만 시계 만은 옛모습 그대로다 주변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은 얼마나 변한 것인가 ! 이십대 홍안 을 자랑하던 젊음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 머리카락도 반백이 넘었고 이마의 주름살도 깊어졌다 일제시대 소련국 점령하의 감옥생활, 6, 25 사변, 삼팔선, 미군부대, 그동안 몇 차례의 아슬 아슬한 죽음의 고비를 넘긴것이다 ' 월삼 17석(1950년대에 유명한 시계 로서 17개의 보석이 있음) 우여 곡절 많은 세월 속에서 아직도 제 시간을 유지 하는것 만도 신기할 따름이다 시간을 보고는 습성 처럼 째깍 째깍 소리에 귀 기우리는 때의 그의 가느다란 눈매 에는 흘러간 인생의 축도(삶의 흔적)가 서리는 것이었다 그 속에서도 각모와 쓰메에리(목을 둘러 바싹 여미게 지은 양복) 학생복을 벗어 버리고 신사복 으로 갈아 입었던 그날의 감회를 더욱 새롭게 해 주는 충동을 금할길 없는 것이었다 이인국 박사는 수술 직전에 서랍에 넣어 두었던 편지에 생각이 미첬다 미국에 가 있는 딸내미, 본래의 이름은 나미코 다 해방후 그것이 거슬린다 하여 나미로 불렀고 새로 기류계(일정 시대 호적)에 올릴 때에는 코를 완전히 떼어 버렸다 나미짱 ! 딸의 모습은 단란하던 지난날의 추억과 더불어 떠 올랐다 온 집안의 재롱동이 였던 나미, 그도 이젠 성숙 했다 그마저 자기 옆에서 떠난 지금 새로운 정 에서 산다고는 하지만 이인국 박사는 가끔 밀려오는 허전감을 금할 길이 없다 아내는 거제도 수용소에 있을때 죽었고 아들의 생사는 지금껏 알 길이 없다 서울 에서 다시 만나 후처로 들어온 혜숙, 이십살 연령 차에서 오는 세대의 거리감을 그는 억지로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혜숙의 피둥 피둥한 탄력에 윤기가 더해 가는 살결에 비해 자기의 주름 잡힌 까칠한 피부는 육체적 위축감 마저 느끼게 하는 때가 없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서 난 돌지난 어린것, 앞날이 아득한 이 핏덩어리 만이 지금의 이인국 박사의 곁을 지켜주는 유일한 피 붙이다 이인국 박사는 기대와 호기에 가득찬 심정으로 항공 우편의 피봉을 뜯었다 전번 편지에서 가타 부타 단안을 내리지 않고 잘 생각해서 결정 하라고 한 그후의 경과다 " 결국은 그렇게 되고야 마는 건가 - - - " 그는 편지를 탁자위에 밀처 놓았다 어쩌면 이러한 결말은 딸의 출국 이전 에서부터 이미 싹튼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에서 영문과를 택한 딸, 개인 지도를 해준 외인 교수,스칼라 쉽(장학금)을 얻어준것도 그고 유학 절차와 재정 보증인을 알선해준것도 그가 아닌가 우연한 일은 아니다 그러한 시류에 따라 미국 유학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한 것은 오히려 아버지인 자기가 아닌가 ! 동양학을 연구 하고 있는 외인 교수, 이왕이면 한국 여성과 결혼했으면 좋겠다던 솔직한 고백에 자기의 학문을 위한 탁월한 견해 라고 무심코 동의를 표한 것도 자기가 아니 던가 ! 그것도 지금 생각하면 하나의 암시 였음이 분명 하지 않은가 이인국 박사는 상아로 만든 오존 파이프를 앞니에 힘을 주어 지그시 깨물며 눈을 감았다 꼭 풀쑤어 개 좋은 일을 한것만 같은 분하고도 허황한 심정 이다 ' 코쟁이 사위 ' 생각만 해도 전신의 피가 역류 하는것 같은 몸서리가 느껴졌다 ' 더러운 년 같으니 기어코 - - - ' 그는 큰 기침을 내 뱉었다 그의 생각은 왜정시대 내선일체의 혼인론이 떠돌던 이야기에 꼬리를 물었다 그때는 그것을 비방 하거나 굴욕 처럼 느끼지는 않았다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해석했고 어찌보면 우월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경우는 - - - , 그는 딸의 편지 구절을 곱 씹었다 ' 애정에 국경이 있는가 ? " 이것은 벌써 진부하다 아비도 학창 시절에 그런 풍조는 다 마스터 했다 건방지게, 이게 새삼스레 애비 에게 설교 쪼로 - - - 좀더 솔직하지 못하고 - -, 그러니 외딸인 제가 그런 국제 결혼의 시금석이 되겠단 말인가 " 아무튼 아버지 께서 쉬 한번 오신다니 최종 결정은 아버지와의 의향에 따라 결정할 예정 입니다만 - - -" 그래, 아버지가 안 가면 그대로 정하겠단 말인가? 이인국 박사는 일대 잡종의 유전 법칙이 떠 오르자 머리를 내저었다 ' 흰둥이 손자 ' 생각만 해도 징그럽다 그는 내던졌던 사진을 다시 집어 들었다 대학 캠퍼스 같은 석조전의 거대한 건물 그 앞의 정원 뒤쪽에 짝을 지어 걸어가는 남여 학생 이 배경 속에 딸과 그 외인 교수가 나란히 어깨를 하고 서서 웃음을 짓고 있다 " 흥, 놀기는 잘들 논다 - - "
응, 신음 소리를 치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무튼 미스터 부라운을 만나 이왕 가는 길이면 좀더 서둘러야 겠다 그 가장 대우가 좋다는 국무성 초청 케이스의 확정 여부를 빨리 확인 해야 겠다는 생각이 조바심을 첬다 그는 아내 혜숙이 있는 살림방
쪽으로 건너갔다 " 여보, 나미가 기어코 결혼을 하겠다는 구려 " " 그래요 - - " 아내의 어조에는 별다른 감동이나 의아도 없음을 이인국 박사는 직감 했다 그는 가능한 한 혜숙이 앞에서 전실 소생의 애들 이야기를 하는것을 삼가왔다 어떻게 보면 나미의 미국 유학을 간접적 으로 자극한 것은 가정 분위기의 소치라는 자격 지심이 없지 않기도 했다 나미는 물론 혜숙을 단 한번도 어머니 라고 불러준 일이 없었다 혜숙이 또한 나미 앞에서 어머니 라고 버젓이 행세한 일도 없었다 지난날의 간호원과 오늘의 어머니, 그 사이에는 따져서 표현 할수 없는 미묘한 감정 들이 복제되어 있다 " 선생님의 일이라면 무엇 이든지 돕겠어요 " 서울에서 이인국 박사를 다시 만났을때 마음속 그대로 털어 놓은 혜숙의 첫미디 였다 처음에는 혜숙이도 부인의 별세를 몰랐고 이인국 박사도 혜숙이의 혼인 여부를 참견 하지 않았다 혜숙은 대학 병원을 그만두고 이리로 옮겨왔다 나미는 옛정이 다시 살아 혜숙을 언니처럼 따랐다 이들의 혼인이 익어갈때 이인국 박사는 목에 걸리는 딸의 의향을 우선 듣기로 했다 딸도 아버지의 외로움을 동정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도 아버지의 시중이 힘에 겨웠고 또 그 사이 실지의 아버지 뒤 치닥 거리를 혜숙이 해 왔으므로 딸은 즉석에서 진심으로 찬의를 표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혜숙과 나미의 사이는 벌어졌고 혜숙은 남편과의 정상적인 가정 생활에서 나미가 장애물이 되는것 같은 느낌을 차츰 가지게 되었다 혜숙 자신도 처음에는 마음 놓고 이인국 박사를 남편 이랍시고 일대일로 부르지는 못했다 나미의 출발, 그후 어린애 해산, 이러한 몇 고비를 넘는 사이에 이제 겨우 아내 답게 떳떳이 남편을 대할수 있고 이인국 박사 또한 제대로 남편의 체모(체면)로 아내에게 농을 걸수 있게끔 되었다 " 기어코 그 외인 교수와 가까워 지는 모양 인데 " 이인국 박사는 아내의 얼굴을 직시 하지는 못하고 마치 독백 하듯 뇌까렸다 " 할수 있어요, 제 좋다는 대로 해야지요 "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것 처럼 이인국 박사에게 들려왔다 " 글쌔, 그렇기는 하지만 - -- " 그는 입맛만 다시며 더이상 말은 하지 못했다 잠에서 깨어 울고 있는 어린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아내의 젊은 육체 에서 자극을 느끼면서 이인국 박사는 자기 자신이 죄를 지은것 같은 나미에 대한 강박관념을 지울수가 없었다 저 어린것이 자라서 아들 원식(元植)이나 또 나미 정도의 말 상대가 될래도 아직 이십 여년의 세월이 흘러야 한다 그때가 되면 자기는 칠십이 넘는 할아버지다 현대 의학이 인간의 평균 수명을 연장 하고, 암 같은 고질이 아닌 한 불의의 죽음은 없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의사 이면서 스스로의 생명 하나를 보장 할수 없다 ' 마누라를 눈 앞에서 날아서 새를 놓치듯 죽이지 않았던가 ! ' 아무리 해도 저놈이 대학 을 나올때 까지는 살아야 한다 아무렴, 때가 때인 만큼 미국 유학 까지는 내 생전에 시켜 주어야지 하기야 그런 의미 에서도 일찌기 미국 혼반(서로 혼인을 맺을 양반의 지체)을 맺어 두는 것도 그리 해로울건 없지 않나 , 아무렴 우리 보다 낫게 사는 사람들 인데, 남이 보는 체면이 안 서서 그렇지 ! 그는 자위 인지 체념인지 모를 푸념을 곱 씹었다 " 여보, 저걸 좀 꾸려요 " 이인국 박사의 말씨는 점잖게 가라 앉았다 " 뭐, 말이에요 ? " 아내는 젖을 물린채 고개를 돌려 되 묻는다 " 저, 병 말이오 " 그는 화장대 위에 놓은 골몽품을 가리켰다 " 어디, 가져 가게요 ? " " 저 미국 대사관 부라운씨 말이야 늘 신세만 젔는데 - - " 아내는 꼼꼼이 쌓아 놓은 포장물을 들고 이인국 박사는 천천히 현관을 나섰다 벌써 석간 신문이 배달 되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분명 기적임에 틀림 없었다 간헐적 으로 반복 되어 공포와 감격을 함께 휘몰아 치는 착잡한 추억, 늘 어제 일 마냥 생생 하기만 하다 1945년 팔월 하순 아직 해방의 감격이 온 누리를 뒤 덮어 소용돌이 칠 무렵 이었다 말복도 지난 날씨 이건만 여전히 무더웠다 이인국 박사는 이 몇일 동안 불안과 초조함에 잠도 제대로 잘수 없었다 무언가 닥처올 사태를 오돌 오돌 떨면서 대기 하는 상태 였다 그렇게 붐비던 환자도 얼씬 하지 않고 쉴사이 없던 전화도 오지 않아 병원의 입원실 에는 복막염 환자 였던 도청의 일본인 과장이 끌려 간후 텅 비었다 조수와 약제사는 궁금증이 나서 고향에 다녀 오겠다고 떠났고 서울 태생인 혜숙이만 남아 빈집 같은 병원을 지키고 있었다 이층 십조 다다미 방에 훈도시(일본식 팬티)와 유카다 (일본식두루마기 같은 겉옷) 바람에 뒹굴고 있던 이인국 박사는 견디다 못해 부채를 내 던지고 일어섰다 그리고 목욕탕 으로 갔다 찬 물을 퍼서 대야째로 머리에서 부터 몇번 이고 내려 부었다 등 줄기가 시리고 몸이 가벼워 졌다 그러나 수건으로 몸을 닦으면서도 무언가 짖눌려 있는 것 같은 가슴속의 가갑증을 가셔 낼수는 없었다 그는 창문으로 기웃이 한길 가를 내려다 보았다 우글 거리는 군중들은 아직도 소음 속으로 밀려가고 밀려 오고 있었다 굳게 닫혀 있는 은행 철문에 붙은 벽보가 한길을 건너 하얀 윤각만이 두드려저 보인다 아니, 그곳에 씌여있는 글씨 ! 친일파, 민족 반역자 를 타도 하자 옆에 붙은 동그라미를 두겹으로 친 글자가 그대로 눈 앞에 간명하게 보이는 것만 같다 어제 저녘에 그것을 처음 보았 보았을 때의 전율이 되 살아 났다 순간 이인국 박사는 방 쪽으로 머리를 훽 돌렸다 " 나야, 괜찮겠지 - - - " 혼자 뇌까리면서 그는 다시 부채를 들었다 그러나 벽보를 바라 보다 자기의 눈이 마주 치는 순간 일그러지는 얼굴에 경멸인지 통쾌함 인지 모를 웃음이 비죽 거리면서 아래 위를 훑어보던 그 춘석이 녀석의 모습이 자꾸만 머리 속으로 엄습하여 어두운 밤에 거미줄을 뒤집어 쓴것 처럼 꺼림 텁텁 하기만 햇다 그깐놈 ! 하고 머리에서 지워 버려도 거머리 처럼 자꾸만 감아 붙는것 같았다 벌써 육개월 전의 일이다 형무소 에서 병 보석으로 가출옥 되었다는 중환자가 업혀저 왔다 휑뎅 그레한 눈에 앙상 하게 뼈만 남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환자, 그는 간호원의 부축으로 겨우 진찰을 받았다 청진기의 상아 꼭지를 환자의 가슴에서 등으로 옮겨 두 줄기의 고무줄 에서 감득 되는 숨 소리를 감별 하면서도 이인국박사의 머리 속은 최후 판정의 분기점이 방황하고 있었다 입원 시킬건가 ! 거절할 것인가 ? 환자의 몰골이나 업고온 사람의 옻 매무새로로 보아 경제 정도는 뻔한 일이라 생각 되었다 그러나 그것 보다도 더 마음에 껭기는 것은 일본인 간부급 들이 지기 집처럼 들락 거리는 이 병원에 이런 사상범을 입원 시킨다는 것은 간선(간접선거) 시의원 이라는 체면 에서도 떳떳치 못할 뿐더러 자타가 공인하는 모범적인 황국신민의 공든 탑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결과를 가저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그는 이런 경우의 가부 결정에 일도 양단하는 자기 식으로 찰나적인 단안을 내렸다 그래서 응급 치료만 해주고 입원실이 없다는 가장 떳떳 하고도 정당한 구실로 애걸하는 환자를 돌려 보냈다 환자의 집이 병원에서 얼마 멀지 않은 건너편 골목 안에 있다는걸 그후에 간호원을 통해 들었다 그러나 그쯤은 예사로운 일 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 보냈다 그런데 몇일전 시민대회 끝에 있은 해방 경축 시가 행진을 자기도 흥분에 차서 구경 하느라고 헤숙이와 함께 대문 앞에 나갔다가 자위대 완장을 두르고 대열에 끼인 젊은이와 눈이 마주첬다 이쪽을 노려 보는 청년의 눈에서 불똥이 튀는 것같은 살기를 느꼈다 무슨 영문 인지 모르고 어리 벙벙 하던 이인국박사는 그것이 언젠가 입원을 거절당한 사상범 환자 춘석 이라는 것을 혜숙에게서 듣고 슬금 슬금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집으로 기어 들어 왔다 그후 그는 될수 있는대로 거리로 나서는 것을 피했지만 공교롭게도 어제 저녁에 그 벽보 앞에서 마주첬다 갑자기 밖이 왁자 지껄 소란이 일었다 머리에 깍지를 끼고 비스듬히 누워서 갈피를 잡을수 없는 생각에 골몰하던 이인국 박사는 일어나 앉아 한길 쪽에 귀를 기우렸다 들끓는 소리는 더 커저 갔다 궁금증을 견디다 못해 그는 엉거주춤 꾸부린 자세로 밖을 내다 보았다 포장 도로 위에 뒤꿇는 사람들은 손에 손에 태극기와 赤旂를 들고 환성을 지르고 있었다 "무엇 일까 ? " 그는 고개를 기웃 하며 다시 자리에 주저 앉았다 계단을 구르며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혜숙이다 " 아마 소련군이 들어오나 봐요 모두들 야단 법석 이에요 - - " 숨을 헐떡이며 이야기 하는 혜숙의 말에 이인국 박사는 아무 대꾸도 없이 눈만 껌뻑이며 도로 앉아 버렸다 여러 날째 라디오 에서 '오늘 입성' 이라고 했으니 이제 오는가 보다 생각 했다 혜숙이 내려간 뒤에도 이인국 박사는 한참 동안 아무 거동도 못하고 바깥 쪽을 내다 보고만 있었다 무엇을 생각 했는지 그는 움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벽장 문을 열었다 안쪽에 손을 뻗어 액자들을 끄집어 내었다 "國語常用家 " 해방되던 날 떼어서 집어 넣어둔 것을 그동안 깜빡 잊어버렸다 그는 액자의 뒤를 열어 음식점 면허장 같은 두터운 모조지를 빼내어 글자 한자도 제대로 남지 않게 손 끝에 힘을 주어 꼼꼼히 찢었다 이 종이장 하나만 해도 일본인 과의 교제에 있어서 얼마나 떳떳한 구실을 할수 있었던 것인가 , 야릇한 미련 같은것이 섬광 처럼 머릿 속을 스처 갔다 환자도 일본말 모르는 측은 거의 오는 일이 없었지만 , 대외 관계는 물론 집안 에서도 일체 일본 말만을 써왔다 해방뒤 부득이 써오는 제 나라 말이 오히려 의사 표현에 어색함을 느낄 만큼 그에게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마누라의 솔선 수범 하는 내조 지공도 컷지만 애들 까지도 곧잘 지켜 주었기에 이 종잇장을 탄것 아니던가 ! 그것을 탄 날은 온 집안이 무슨 경사가 난것 처럼 기뻐들 하였다 " 잠꼬대 까지 국어로 할 정도가 아니면 이 영예로운 기회야 얻을수 있겠소 ? " 하던 국민 총력 연맹 지부장의 웃음 띤 치하 소리가 떠 올랐다 그순간 자기 자신은 아이들을 소학교 부터 일본 학교에 보낸것을 얼마나 다행으로 여겼던 것인가 ! 그는 후 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 지금 통장의 잔액을 깡그리 내 주던 은행 지점장의 호의에 새삼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것 마저 없었더라면 - - - 등골에 오싹하는 한기가 느껴 왔다 무슨 정치가 오든 그것만 있으면 시내 사람의 절반 이상이 굶어 죽기 전에야 우리집 차례는 아니겠지 그는 손 금고가 들어 있는 안방 단스를 생각 하면서 혼자 중얼 거렸다 이인국 박사는 무슨 일이 일아나도 꼭 자기 만은 살아 남을것 같은 막연한 기대를 곱 씹고 있었다 주위가 어두워 왔다 지축이 흔들리는 것같은 동요와 소음이 가까워 진다 군중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만세 소리가 연방 게속 되었다 세상 형편을 알아 보려고 거리에 나갔던 아내가 돌아왔다 " 여보, 탱크 군인들이 들어 왔어요 거리는 온통 사람들 사태가 났는데 집안에 처 박혀 뭘하고 있어요 ? " " 뭘 하기는 ? " " 나가 보아요 마우제가 들어 왔어요 " 어둠 속에서 아내의 음성은 격 했으니 감격 인지 당황 인지 알 길이 없었다 ' 계집 이란 저렇게 우둔 하고도 대담한 것 일까 - - ' 이인국 박사는 엷은 어둠 속에서 마누라 쪽을 주시 하면서 입맛을 다셨다 " 불두 여태 안 켜고 " 마누라가 전등 스위치를 틀었다 이인국 박사는 백촉 전등 불빛이 너무 환하여 못 마땅 하였다 " 불은 왜 켜는 거요 ? " " 그럼, 켜지 않구, 캄캄 한데 - - - 자, 어서 나가 봅시다 " 마누라가 이끄는 데로 따라 이인국 박사는 마지 못해 시침을 떼고 따라 나섰다 헤드라이트의 눈부신 광선, 탱크 부대의 진주는 끝을 알수 없이 계속 이어져 있었다 이인국 박사는 부신 불빛을 피하여 가로수에 기대어 섰다 박수와 환호성, 만세 소리가 그칠줄 모르는 양안(兩岸)을 끼고 탱크는 물 밀듯 서서히 흘러간다 위 뚜껑을 열고 반신을 내민 중대가리의 병사는 간간히 ' 우라 - ' 하면서 손을 내 흔들고 있다 이인국 박사는 자기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이방 부대 라는 환각을 느끼면서 박수도 환호성도 안 들어 있는 멋쩍은 속에서 멍하니 처다보고 만 있다 그는 자기의 거동을 주시 하지나 않나 해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는일 없이 탱크를 향하여 목청이 터지도록 거듭 만세만 부르고 있지 않은가 " 어떻게 되겠지 - - " 그는 밑도 끝도 없는 한 마디를 되뇌 이면서 유유히 집으로 되돌아 왔다 민요 뒤에 계속되는 행진곡이 그치고 주둔군 사령관의 포고문이 방송 되고 있었다 이인국 박사는 라디오 앞에 앉아 귀를 기우렸다 시민의 생명 재산은 절대 보장 한다, 각자는 안심하고 자기의 직장을 수호 하라, 총기, 일본도 등 일체의 무기 소지는 금하니 즉시 반납 하라는 등의 요지 였다 그는 문득 단스 속에 넣아둔 엽총 생각에 미치었다 그러면 그 총도 바처야 하나 ? 영국제 쌍발, 손때 묻은 애완물같이 느껴져 누구에게 단 한번 빌려 주지 않았던 최신형 신제품 이었다 이인국 박사는 다이얼을 돌렸다 대채 서울 에서는 어떻게들 하고 있는것 일까 ? 거기도 마찮가지다 민요가 아니면 행진곡 이 나오고 그러다가는 건국 준비 위원회의 누구 인가의 연설이 이어졌다 대채 앞으로 어떻게 될것 인가 궁금증을 해소할 방법이 없다 해방후 이삼일 동안은 자기도 태연 하였지만 뻔지르르 하게 드나들던 몇몇 친구들도 소련군 입성이 보도된 이후 부터는 거의 나타나질 않는다 그렇다고 자기 자신이 뛰어 다니며 물어볼 경황은 더욱 없다 밤이 이슥 해서야 중학교와 국민 학교를 다니는 아들 딸이 굉장한 구경 이나 한 것처럼 탱크와 로스케 이야기를 늘어 놓으며 들어 왔다 그들은 아버지의 심중은 아랑곳 없다는 듯 어머니, 혜숙이와 함께 저희들 이야기만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이인국 박사는 슬그머니 일어나 이층 으로 올라와 다다미 방에서 혼자 뒹굴었다 앞 일이 어떻게 전개 될것인지 뛰어 넘을수가 없는 큰 바다가 가로 놓인것만 같았다 풀어낼수 있는 실마리가 전혀 다듬어 지지 않는 뒤 헝크러진 상념 속에서 그래도 이인국 박사는 꺼지려는 짚불을 살려 일으키는 심정 으로 막연한 한 가닥의 기대 만을 끝내 포기 하지 않은채 천장을 멍하니 처다 보고만 있었다 지난 일의 뉘우침 이나 가책 같은건 전혀 있을수 없었다 자동차 속에서 이인국 박사는 들고 나온 석간을 펼첬다 일면의 기사를 대충 훑고 난 그는 신문을 뒤집어 꺽어 삼면으로 눈을 옮겼다 ' 북한 소련 유학생 서독으로 탈출 ' 바둑돌 같은 굵은 활자의 제목, 왼편 전단을 차지한 외신 기사, 손바닥 만한 사진 까지 겯들여 있다 그는 코 허리에 내려온 안경을 올리면서 눈을 부릅 떴다 그의 시각은 활자 속을 헤치고 머릿 속에는 아들의 환상이 뒤엉켜 들어차 왔다 아들을 모스크바로 유학 시킨건 자기의 의지 에서 였던것 같다 출신 계급, 성분, 어디 하나나 부합될 조건이 있었단 말인가 고급 중학을 졸업하고 의과 대학에 입학한 바로 그 해다 이인국 박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자기의 처세 방법에 대해 절대적인 자신을 다지고 있었다 " 예, 그 노어 공부를 열심히 해라 " " 왜요 ? " 아들은 갑자기 튀어 나오는 아버지의 말에 의아를 느끼면서 반문 했다 " 야, 원식아 별수 없다 왜정 때는 그래도 일본 말이 출세를 하게 했고 이제는 노어가 또 판을 치고 있지 않니 !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수 없는 바에야 그 물속에서 살 방도를 궁리 해야지 아무튼 그 노서아 말 꾸준히해라 " 아들은 아버지 말에 새삼 스러이 자극을 받느것 같진 않았다 " 내 나이로도 인제 이만큼 뜨내기 회화쯤은 할수 있는데 새파란 너의 낫세 (나이 의 속된말) 로야 그걸 못 하겠니 ? " " 염려 마세요 아버지 - - " 아들의 대답이 그에게는 믿음직 스럽게 여겨졌다 이인국 박사는 심각한 표정 으로 말을 이었다 " 어디 코 큰놈 이라고 별것 있겠니 말 잘해서 진정이 통하기만 하면 그것 들도 다 그렇지 - - "
이인국 박사는 끝내 스텐코프 소좌의 배경으로 요직에 있는 당 간부의 추천을 받아 아들의 소련 유학을 결정 짓고 말았다
" 여보, 보통 으로 삽시다 거저 표 나지 않게 사는 것이 이런 세상 에선 가장 편할것 같아요 이제 겨우 죽을 고비를 면 했는데 또 쟤까지 그 ' 높이 드는 ' 복판에 휘몰아 넣으면 어쩔 려구 - - " " 가만 있어요 호랑이도 굴에 가야 잡는 법이오 무슨 세상이 되든 할 대로 해봅시다 " " 그래도 저 어린것을 어떻게 로서야 까지 보낸단 말이오 " " 아니, 중학교 애들도 가지 못해 골들을 싸매는데 대학생이 못가 견딜라구 ! " " 그래도 어디 앞일을 알겠소 - - " " 괜한 소리 , 제가 쏘련 바람을 쏘이구 와야 내게 허튼 소리 하는 놈 들도 짹 소리를 못할거요 어디 보란듯이 다시 한번 살아 봅시다 아들의 출발을 앞두고 걱정 하는 마누라를 우격다짐 으로 무마 시키고 그는 아들의 유학을 관철 시켰다 ' 흥, 혁명 유가족도 가기 힘든 구멍을 이인국의 아들이 뚫었으니 어디 두고 보자 - - ' 그는 만장의 기염을 토하며 혼자 중얼 거리고는 희망에 찬 미소를 풍겼다 그 다음 해에 사변이 터졌다 잘 있노라는 서신이 계속하여 왔지만 동란후 후퇴 할때 까지 소식은 두절 되었다 마누라의 죽음은 외 아들을 사지로 보낸 것 같은 수심 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