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 한바퀴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이다.
서양말로는 Easter Day라고 한다.
성당 마당에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명동성당 마당에 오늘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것은 처음 보는 모습이다.
성당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신자들과 외국인들로 긴줄을 이루고
있었고, 성당옆 교육관 쪽으로는 무료 급식을 제공하는<명동밥집>을 향한
노인네들의 행렬이 또한 길다. 그들은 어둡고 지쳐있는 모습이었다.
신자들은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 줄을 섰고, 노인들은 한끼 식사를 위해 줄을 섰다.
오늘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는 덩치가 컸고 얼굴 모습도 마치 레슬링 선수처럼 우람해
보였다. 미사 중간쯤에는 항상 신자들의 기도가 들어있다.
발음도 정확하지 않고, 말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는 장애인 신자의 기도였다.
내용은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라는 마지막 귀절은
또렸하게 발음을 한 것 같다.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그 우람한 신부는 장애인 신앙교육 담당 신부라고한다. 옆자리 젊은이가 준 정보이다.
그 신부의 강론은 철학적이고도 쉬워서 많은이들이 귀를 기울인다고 한다.
오늘은 교구장의 부활 메시지를 읽기만 했다. 그래서 아쉬움이 컸다.
옆자리 젊은아가씨에게 주보 있는 곳을 물었다. 긴줄을 서서 들어오는 바람에 미쳐 챙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잠시 묵상을 하다가 옆자리를 보니 그 아가씨가 자리를 비우고 없다.
얼마후 돌아온 그녀는 내 손에 주보를 쥐어준다. "천사같네요..." 내 말에 그녀는 입을 가리고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작은 친절로 천사 하나가 생겨났고, 나는 하느님 전결로 천사를 임명한
셈이 되었다.
우리부부는 1973년 12월15일 오후 5시 이곳 명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이래 51년이라는
끈질긴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제1차 유류 파동으로 경제는 얼어붙었고 음울하기만 한 분위기였다.
신혼여행지인 제주도 성산포에서, 부대시설도 별로 없는 그 곳에서,
젊은 신혼 부부가 즐길거리는 별로 없었다. 우리는 신혼여행 사진이 한장도 없다.
공식적인 결혼식 사진외에는 결혼식 사진도 없다.
사진기가 귀한 시절 일본 제품 "아사이펜탁스"로 이폼 저폼으로 제주의 풍광을 눌러댔으나
남은게 없다..
결혼식 사진도 이 카메라로 찍었다. 고장난 사진기로 인한 해프닝으로 그 친구는 애지중지하던
카메라를 빌려주고 나에게 뒤통수를 꽤나 맞았다. 그도 이제는 가고 없다.
성당으로 올라가는 넓은 길은 동산처럼 꾸며져 있고 오솔길은 정감이 있다.
한때는 민주화의 성지로 텐트를 치고 구호를 외치던 곳이다.
천주교 정의 구현 사제단의 함세웅신부는 <한겨레신문>과 인터뷰에서 "명동성당에 오면 솔직히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원형을 지키기는 커녕 집회와 시위를 막으려고 넓은 길을 좁혀서 구불구불하게
만들고 화단까지 조성해 놓고..... 너무 꼴보기 싫다. 자본주의의 때가 껴도 너무 끼었다"
대통령에게 저주를 퍼부어도 아무 탈이 없는 이 시대에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편향된 시각으로 보게
했을까.
감히, 한마디 한다면 ,이들에게 더 이상 배우거나 기대할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들에게서는 가르치려는 오만한 모습이 보일 뿐이다.
섬기는 자세를 가진 성직자, 지도자가 그립다.
예수는 정말 부활했을까?
우리도 죽으면 정말 부활할까?
죽은사람이 정말로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우리는 부활에 대한 습관적 질문을 벗어나 근원적으로 다시 물어야 한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며, 거기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천국에도 꽃이 필까? 송아지도 울고 인간에게 귀찮게 달라붙는 모기도 있을까?
<부활과 천국>에 대하여 좀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예수님의 폭소/최원영>와 <예수는 정말 부활했을까?/
이제민> 두권의 책을 권한다.
두권의 책은 읽기도 쉽고 책이 두껍지도 않다.
<부활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이 죽은 다음 소생하느냐 않느냐의 생물학적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부활(의 삶)은 제대로 살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당신의 의식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속 깊이 숨어 있는 신의 명령이다.>
우리는 수시로 천국과 지옥을 오고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그 어느 곳에도 없는 유토피아를 찾아 길을 나설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다.
그리스도교는 시체의 행복을 보장하는 종교가 아니다.
살아 있을 때 잘하고 살면 된다는 현실적인 문제로 해석하고 싶다.
부활은 있다. 부활은 십자가에 핀 꽃이다.
유명한 제화점과 음악 다방 그리고 호떡을 팔던 중국집들이 있던 명동거리,
젊은이들의 옛 명동거리는 먹거리 손수례와 넘치는 관광객들이 차고 넘치는 거리로 다시 부활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가장 비싸게 팔린 그림은 같은 화가의
<구세주>, 세계최고의 그림은 무엇일까?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부활>이라고 에둘러 말한다.
공식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한 영국 작가의 말이다.
이 성화에는 근육질의 부활한 예수의 모습이 힘차고 당당하다.
그 아래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은 모두 잠들어 있다. 왼쪽에 눈을 감고 잠자는 인물에 작가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부활대축일 새벽 6시경, 산위에는 순백옥색의 반달이 걸려 있었다.
고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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