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하 시인>>
<<이민하 시인의 양력>>
*1967년 전북 전주 출생.
*2000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 『환상수족』『음악처럼 스캔들처럼』『모조 숲』『세상의 모든 비밀』.
* 수상 : 2012. 제13회 현대시작품상
<<이민하 시인의 대표 시>>
엑스트라가 주인공인 영화의 엑스트라들/이민하
우리는 누운 자세로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했다
말을 하면 안 된다
딸꾹질도 안 된다
쓰러지면서 최선을 다해 마주 누웠다
눈빛에 눈빛을 더하면서
한쪽 눈을 찡긋하면 반갑다는 거고
동공이 자꾸 흔들리면 불안과 초조
두 눈을 깊이 감고 있으면, 오늘도 무사히!
이런 것쯤은 정하지 않고도 가능해서
우리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감정보다는 스웨터! 같은 것
영혼보다는 크림빵! 같은 것
결국엔 말에 가까워져서
눈을 오므리면: 너무 춥지 않아?
눈알을 빙빙 돌리면: 잠 못 자서 어지러워
흰자위를 납작 뒤집으면: 나도 배고파
그러나 꼬르륵거리면 들켜버리고
들키고 나면 이 바닥에서도 쫓겨나니까
우리는 누운 자세로 숨을 수 있는 것을 생각했다
잠을 자면 안 된다
하품도 안 된다
반질반질 네 귀퉁이가 닳은 대본처럼
타인의 대사에 죽죽 그은 밑줄처럼
밤이 이어지고
비가 뿌려지고
눈 깜박깜박: 오늘은 시체들이 꾸는 꿈 같아
눈 깜-박: 꼭 진짜 같지 않니?
눈 깜박 깜박 깜박: 그래, 마술 같구나
이렇게 리얼한 날에는 죽음도 속일 수 있어서
침묵을 암기하고
침묵을 재해석하고
침묵이 침묵을 속여가면서
우리는 무사히 퇴장할 때까지
끝내 살아 있었다
죽음에 죽음을 더하면서
밤과 꿈/이민하
몸통에서 목이 쑥 빠져나온 것 같다
얼굴은 육체의 덤인 것 같다 혹인 것 같다 부록인 것 같다
어떤 부록은 본문보다 길고
어깨에서 팔이 쑥 빠져나오고
손목에서 손가락들이 새털처럼 찢어지고
가늘게 떨면서
어둠을 털면서
온몸을 기울여 총채를 들고 있다
팔 하나가 인생보다 길고
긴 팔이 짧은 팔을 끌면서 하루를 빠져나가는
밤 열두 시의 시곗바늘이다
성실한 노동이 연약한 허기를 안고 떠도는
한 쌍의 모녀다
어린 내가 울면 일하던 내가 달려가 흰밥을 짓는다
끊을 수 없는 연대다
옆구리를 찌르며 지나가는 입을 털고
두 귀에 묻으면
한 사람의 비밀은 독재자의 나라보다 길고
아름다운 트로피를 몰래 닦다가 깨뜨린 하녀처럼
어둠의 구석구석 무릎을 꿇을게
네 방을 보여줄래?
반짝반짝 부서진 너를 훔칠 수 있다면
종이비행기처럼 접을 수 있다면
텅 빈 에이프런은 지구보다 길고
바람의 항아리가 깨져서 새들은 흩날리고
검은 하늘에 박힌 것들은 내 눈이 닿기 전에 깨져버린 우주의 파편인데
거기서도 누군가 총채를 들고 있는 것 같다
깊숙이 과거를 털다가
손이 닿지 않아서
손톱을 길렀다 번개처럼
허공을 할퀴며 지나가는 마음을 털었다
차갑고 축축한 모퉁이에 서서
밤의 키스는 죽음보다 길고
원근법/이민하
검은 우산들이 노란 장화를 앞지르고 있었다
차도에는 강물이 흐르고
건너편에는 머리가 지워진 사람과 발목이 잘린 아이들이 떠내려간다
오후에 떠난 사람과 저녁에 떠난 사람이 똑같이
이르지 못한 새벽처럼
한 점을 향해 가는
길고긴 어둠의 외곽 너머
텅 빈 복도에 서서
눈먼 노인과 죽어가는 아이가 함께 내려다보는
마르지 않는 야경 속으로
몇 방울의 별이 떨어졌다
세상의 모든 비밀/이민하
나는 옆집 아이의 태생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 애 아빠의 정치적인 비밀을 알고 있다
왜 그들은 내게 입막음을 안 하나
하루아침에 미용실 여자가 미인이 된 까닭을,
편의점 남자가 시인이 된 까닭을, 그들이 손잡고 구청에 간 까닭을,
석 달 후 남자 혼자 구청에 간 까닭을 나는 알고 있는데
여자의 머리색이 남자의 정치색과 어울려
신발 속에 감춰진 짝짝이 양말처럼 아무도 모르게
호들갑을 피우는 오후
선박처럼 무거운 귀를 잠시 멈추고 잠이 오는 의자에 앉아
문맹인 나는 머리색을 바꾸고
색맹인 애인은 이별의 편지를 바꾸고
내 귀를 타고 밀입국한 사람들은
어떻게 빠져나온 것일까 반대편 귀를 향하여
얼굴을 뒤집고
지하철 남자의 의족이 지상의 물결 위로 떠오를 때
인어공주가 되는 이야기
아름다운 두 다리의 침묵에 대하여
진위 논란으로 시끄러운 세상에 대하여
칼의 입맞춤 대신 물거품이 되어 바다에 녹아버린
성전환자의 슬픈 동화 속에서
목소리를 가로챈 마녀의 기술처럼
목사의 안수기도에 섞이는 어떤 성분들
이를테면, 앞 못 보는 어둠의 눈을 번쩍 후려치는
어떤 선언들
늙은 소녀들은 아직 사랑이 넘치고
구걸하는 남자들은 눈물이 넘쳐서
기울지도 침몰하지도 않는
어떤 세계에서
흩어진 나의 비밀들은 어느 귀를 타고 흘러가는가
내가 같은 남자와 백 번째 헤어진 날에 대해
당신은 지금 내 비밀 하나를 보관 중이다
혀처럼 얇게 저며진 물결 하나가 귓속으로 들어
갔다
의도하지 않아도
언젠가 귀를 기울이는 쪽에서
당신도 모르게 식은땀이 흐를 것이다
열두 시를 지나는 자화상/이민하
반쯤 감긴 눈으로 나는 걸었네
자작나무 숲은 얼마나 먼가
당신은 꼭꼭 숨어 해먹 위에서 잠들었네
나는 열두 시에 도착했네
안개를 들추고 숨을 죽였네
이마 위의 그림자를 쓸어 올리며 당신은 실눈을 떴네
낡고 빛바랜 청포장이 지평선까지 흘러내렸네
젓가락처럼 식도를 모아 점심을 나누고
나는 햇잎으로 입을 훔치며 오후의 거리로 내려왔네
숨바꼭질하는 연인들의 미로원을 지나
식칼들의 합주 속에 군무를 추는 불빛 지붕들을 돌아
장마철에도 나는 숲길을 올라갔네
빗줄기가 신발에 갈고리를 걸고 예인선처럼 끌었네
나는 열두 시에 도착했네
눈꺼풀 위의 빗방울을 개미처럼 튕기며 당신은 잠들었네
해먹 위에 우산을 씌워주고 돌아와
어제는 자전거를 타고 갔네
질주하는 트렁크에 히치하이크한 날도 있네
심장에 낀 살얼음을 긁으면서도 갔네
자면서도 나는 우편낭을 챙겼네
뿌옇고 까만 그을음이 끼는 정오와 자정
자면서도 당신은 편지를 쓰고 있었네
공중에서 녹색 머리칼들이 떨어져 글자들 사이에
섞였네
바람의 잔이 떠다니고
발목만 땅에 묻힌 백골들이 빈속을 채우며 앉아
있었네
횃불을 든 마을 사람들이 왁자하게 몰려왔네
당신은 주섬주섬 자작나무 숲을 수레에 실었네
비켜 앉은 내 손 위로 수레바퀴가 지나갔네
밤과 낮이 천천히 뒤집혔네
굴러 떨어진 나무토막을 하나씩 던지며
사람들은 모닥불을 피우다 돌아갔네
아직 뜨거운 잔가지 하나를 뭉개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자작나무 숲은 얼마나 먼가
반쯤 감긴 눈으로 나는 걸었네
야유회/이민하
한 사람이 손수건을 살며시 놓고 갔다
그것이 이별인 줄 알았는데
돌아볼 수 없어서 두 손만 뻗어 뒤를 더듬었다
그런 건 게임인 줄 알았는데
다음 사람이 수건 대신 찢어진 페이지를 돌렸다
이야기가 등 뒤에서 겉도는데
둥글게 둥글게 합창이 흐르고
벼르던 사람이 그물을 던지고 뛰었다
가까스로 자리에서 벗어나
달아나면 사람이 죽은 새를 몰래 흘리고 뛰었다
쫓기던 사람이 쫓는 사람이 되어
몇 바퀴를 헛돌던 사람이 핏덩어리 아기를 두고 뛰었다
발을 뺄 수 없는 한마음이 되어
둥글게 둥글게 눈빛만 흐르고
재빠른 사람이 폭탄이 떨어뜨리고 빈자리에 숨었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누군가의 등 뒤에서 불이 확 타올랐다
죽은 사람이 죽이는 사람이 되어
사람들은 하나둘 육신을 내려놓고 떠돌았다
배가 고파 모니터 밖으로 나오면
둥글게 둥글게 밤하늘은 흐르고
야식 배달 소년이 일용할 먹이를 돌렸다
이것이 결말인 줄 알았는데
한 사람이 일기장을 신발처럼 벗어두고 떠났다
이야기가 입가에서 맴도는데
씹는 사람이 씹히는 사람이 되어
누군가는 꼭 혀를 깨물었다
비어 있는 사람/이민하
창살만 남은 늑골 사이로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지금은 저녁일까 아침일까
십 년 만에 눈을 뜬 것만 같아
끄고 잠든 별빛처럼 지붕도 함께 사라진 것일까
이대로 일어날 수 없다면 의사들이 달려올까 용역들이 달려올까
밤에 지나는 사람은 플래시를 들고 오고
용감한 휘파람으로 제 몸을 끌고 오고
담력 테스트를 하려고 사람들이 몰려올지도 몰라
죽어버린 장소는 죽은 사람보다 무섭고
벽이 헐리기 전까지 깃드는 건
소문과 어둠뿐인지도 몰라
숨어 있기 좋아서
고양이들은 움푹한 옆구리로 파고들고 헐거운 뱃가죽에 눌러앉았다
뼈가 닳고 있는데 모래가 날린다
모래는 어느 구석에 또 쌓여서 불빛을 부르고 휘파람을 부르고
우리가 다시 사랑을 한다면
태양보다 뜨거운
검은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사랑을 한다면
어떤 체위로 가능할까
십 년 만에 몸을 뒤집고 있는 것 같아
텅 빈 입속엔 구르고 있는 돌 하나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혼자 하는 키스처럼
처음부터 물려받은 독백처럼 십 년이 또 지나도
문패가 바뀐 후에도
붉은 스웨터/이민하
한 올만 당기면 풀어질 듯
입을 막고 있어서 우리는 얼굴까지 빨개졌다
몸속에 둔 실마리를 들키지 않을 것처럼
가족과 이웃과 동료들에 엮여서
두껍고 따뜻하고 촘촘한 사람이 되었지만
손가락이 닿으면 파르르 떨리는
스웨터의 물결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손끝에서 맥박이 섞이고
눈을 가만히 닫고 있으면
물려 입은 옷처럼 타인의 냄새가 난다
조심조심 숨소리를 헤아리는 호흡이 틀니처럼 박혀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재활용되고 있었던 걸까
깨끗이 빨아 입어도 낡은 슬픔뿐
어둠이 벽에 기대어 앉아 있다
입가에 붙은 미소를 보풀처럼 떼어 주며
스웨터보다 한 뼘 더 기어올라서
가느다란 목을 움켜쥔
검은 손은 내 것이 아닌데
당신은 내게 애원하는 눈빛이다
우리의 실마리를 쥐었다 놓았다
벌거벗은 잠자리까지 파고드는
어둠의 손아귀
바닥에 누워 풀썩거리던
한 사람이 밧줄 더미처럼 풀어지고 있었다
가볍고 뜨거운 핏방울이 한 코 한 코 솟구쳤다
어둠의 매듭이 묶이고 풀릴 때마다
핏물로 짠 스웨터가 몸속에서 뒤척거렸다
입을 닫아 주어도 잠들지 않았다
육체의 비밀/이민하
눈을 감은 사람의 얼굴은 어디에 있나
눈꺼풀의 안쪽과 바깥
한 사람이 옷을 훌훌 벗는다면
부끄러움은 누가 뒤집어쓰나
벗은 몸의 안쪽과 바깥
당신은 깊은 잠에 빠져 있고
나는 당신 안에서 빠져 있는데
서로를 향하여 끝없이 멈추는 움직임 속에서
정지한 사람의 두 발은 어디에 있나
한 뼘과 천 길 사이
굳게 닫힌 눈과 입
실금이 간 얼굴로 시체처럼 누워
당신은 가장 가깝고
나는 가장 먼 곳에서
껍질과 수염을 벗겨내고 옥수수알을 씹는다
천 개의 알갱이를 입안에서 터뜨리며
당신을 자꾸 귀에 대본다 깜깜한 백지처럼
입을 다문 사람의 목소리는 어디에 있나
입술의 안쪽과 바깥
배시시 눈을 비비며 마주보는 당신은
멀리서 불빛을 보고 숙소로 찾아든 이방인 같다
모호한 발음으로 인사를 나눠야 할 것 같다
눈빛을 껐다 켰다
유리문을 열고 닫으며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들 같다
가장 투명한 곳에서
낭송가/이민하
한 사람의 악사가 사라졌네
벽에 기댄 기타는 연주를 멈추었지만
여섯 개의 덩굴손이 지붕 위로 음표를 뻗었네
가수인 나는 입을 벌리고
한 사람의 시인이 사라졌네
뒷골목을 떠돌아다니는
몇 권의 책이 그의 이야기를 훔쳤네
독자인 나는 입을 벌리고
한 사람의 당신이 사라졌네
그가 앉았던 의자는 거울 속에 발이 빠졌네
거울 속엔 빈 의자가 세 개나 있는데
허공에 앉아 식지 않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연인인 나는 입을 벌리고
화산이 폭발하고
붉은 혀가 흘러내리는
극장과 식당과 우체국과 신전에서 그들을 더듬으며
서로의 화석이 된 신도들처럼
구겨진 지붕 속으로
타오르는 뒷골목 속으로
구멍 뚫린 거울 속으로
한 사람의 내가 사라졌네
목격자인 내가 간밤의 표정을 발굴했네
목소리를 복원하자 박수 소리가 터지고
몇 줄의 사람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네
밀고자인 그들은 입을 벌리고
데칼코마니/이민하
물이 뛰쳐나와 꽃병을 엎지른다
여자 몸을 뛰쳐나온 아이가 물방울 눈을 뜨고 두리번거린다
아이가 기르던 프리지아 한 마리가 바닥에서 꿈틀,
여자를 두른 앞치마가 싱크대에서 달려와 바닥을 훔친다
오후를 잘게 다지는 도마 위 칼질 소리
텔레비전 채널이 아이의 손가락을 돌리고
아이가 은하철도를 타고 티비 속으로 들어간다
여자는 브라운관에 머리가 낀 아이를 끌어내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자장가를 부른다
아이는 쿠션처럼 쌕쌕거리며 잠이 든다
여자는 눈이 내리는 마을로 가는 책 속의 마차를 탄다
책 속에서 담배를 태우러 보라색 입술만 나온다
가끔은 담배가 입술을 태우고 책이 담배를 문다
글자들이 연기를 뿜고 연기가 가구들을 태워버리고
탄내 가득한 천장에서 밀랍 같은 숯덩이가 뚝뚝 떨어진다
맞닿아 있던 여자와 아이의 피부가 까맣게 들러붙는다
수십만 킬로를 날아온 흰쥐들이 숯무덤을 파헤치자
아이의 무릎 위에 여자가 잠들어 있다
흐물거리던 살 껍데기가 옷걸이에 걸려 있다
구름표범나무/이민하
나는 너를 개미라고 부를래
버거운 사체를 나르는 너의 팔에 매달려
나는 죽어서도 복에 겨운 지렁이가 될래
봄날 소풍 도시락을 싸는 너의 다리를 부러뜨리며
나는 너를 제비라고 부를래
그러면 너는 짧은 여름날 나무에 목을 매달고
심장처럼 꺼내는 매미의 눈물
그러면 나는 나무
십 량 너의 운구차가 지하에서 불면할 때
커피나무가 되어 펑펑펑 검은 물을 따른다
몸을 펼치면 표범
온몸 가득 까만 불씨를 날리며
너를 삼킬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다
앉으면 구름
깔끔하게 무늬를 접는 날개의 뒷면
성숙한 우리의 인사법
너를 낳은 너의 이름은 오늘도 애지중지
미행을 하네 그가 휘휘 던지는 그물망을 피해
장애물경마 기수처럼 우리 달릴래?
달릴래? 그러면 너는 바람
천공에서! 눈앞에서! 땅 끝에서! 너의 목덜미를 끝없이 잡아타고서
나는 구름! 나는 표범! 나는 나비!
살이 벗겨지도록 일광욕을 하며 기린초의 꿀을 빠는
노란 입술 빨간 종아리
울긋불긋 이름이 많은 나를 부르며 목이 쭉쭉 늘어나는
너를 기린이라 부를래
그러면 너는 흑마술 같은 울음
바늘이 되어 나의 이름에 꾹꾹 文身을 하는
너를 자꾸 통과하며 門身이 되는
나는 죽어서도 구름표범나비
표본실에 묻혀 사각사각 날개를 펴고 접으며
찍을 테면 찍어봐! 포즈를 바꾸며
체육 입문/이민하
한 사람이 공놀이를 한다
공은 공중을 돌아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다
공이 바닥에 닿기 전에 발은 움직인다
다시 머리 위로 솟구칠 때
구부러진 발등과 이마는 키스처럼 가깝고
두 사람이 공놀이를 한다
공은 두 손에서 뻗어 가슴을 향해 파고든다
공중에 박힌 눈은 온몸을 잡아당기고
공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두 사람은 점점 멀어진다
덤불에 처박혀 달걀처럼 깨질 때
공을 주우러 간 그림자는 기차처럼 길고
손을 털고 사람들이 떠난 길 위에
수만 갈래 힘줄을 뻗는
공은 지구보다 넓고
하늘이 한 뼘 더 두꺼워진 다음날
낯선 공이 떠도는 공터에 모여
세 사람이 공놀이를 한다
공은 공중으로 솟구쳐 공중으로 나아간다
바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방향을 잡고
공은 새가 된다
한 사람에게 날아가지만 세 사람의 심장이 뛴다
두 사람이 공을 주고받을 때
망을 보는 한 사람은 비밀처럼 뜨겁고
가족사진/이민하
엄마는 밤새 빨래를 하고
할머니는 빨래를 널고 아버지는 빨래를 걷고
나는 옷들을 접고 펴고
동생은 입는다 덜 마른 교복
날이 새도록 세탁기가 돌아도
벽에 고인 빗물은 탈수되지 않고
멍이 든 두 귀를 검은 유리창에 쿵쿵 박으며
나는 계절의 구구단을 외고
동생은 세 살배기 아들과 기억의 퍼즐을 맞추고
할머니는 그만해라 그만해라 욕실을 들여다보시고
엄마는 죽어서도 빨래를 하고
팔다리가 엉킨 우리들은 마르지도 않는
지하 빨랫줄에 널려
아버지는 나를 걷고
나는 동생을 접고 펴고
동생은 입는다 덜 마른 아버지
전람회 잡담/이민하
나비처럼 날아든 초대장은 누가 보낸 것입니까. 사각으로 펼친 양 날개를 따라 우린 왔습니다. 똑같이 지참한 표정들은
누가 인쇄한 것입니까. 장황하게 늘어선 꽃들의 수다는 누가 요약한 것입니까. 꽃들 사이에 허공을 배치해도 품종은 번복
되지 않습니까. 낯선 꽃술이 마음을 끌어도
군락을 이루지 못하면 돌연변이일 뿐입니까. 우리의 견해를 시험하는 중입니까. 코스요리처럼 이어지는 꽃밭의 순서는
누가 결정한 것입니까. 우린 배가 고프단 말입니다. 당신은 맨 처음의 꽃입니까. 누구의 눈에 띄었는지 어느 라인에 끼었
는지 확신합니까. 얼마나 넓은 잎맥이 당신을 키웠는지 증명해 보세요. 입으로 말고 쉿, 카메라 앵글 안에서도
일거수일투족을 사용해 보세요. 담 밑에 주저앉은 당신은 거동이 불편합니까. 떠도는 행인의 발목이라도 붙잡으세요.
약에 취한 눈빛이라도 섭외하세요. 목발이라도 옆에 차고 흔들리세요. 풍향계는 믿음이 없습니다. 바람의 행렬은 지나갔
어요. 짓밟힌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염료 대신 멍 자국으로 레벨업하세요. 가시를 방치하는 건 의도입니까. 피를 보면 흥
분하는 흡혈귀처럼
우리의 감정이 손끝에 집결되기를 기대합니까. 고개를 숙이고 허리가 휘는 건 퇴장을 알리는 인사입니까, 충분히 죽었
다는 뜻입니까. 문이 닫히면 당신들은 어디로 갑니까. 대기 중인 열두 컷짜리 열차에는 누구의 얼굴이 실립니까. 죽어서
도 대물림되는 전시 목록에서 누구도 뛰어내리지 못합니다. 관람객이 모두 떠나고
우리는 마지막의 꽃들. 발자국처럼 남아 취재에 응합니다. 낮의 혈기는 철거되고 우리의 의식은 수은주처럼 떨어집니
다. 계절의 기승전결처럼 감동을 완결합니다. 입을 모으지 않아도 합의되는 것이 있습니다. 서로에게 우리는 친절한 임종
의 독자들. 밤이면 배포되는 한 줄의 보도자료는 누가 작성한 것입니까.
기억의 밥/이민하
절벽 위에 두 사람이 있다
얼굴을 마주 보는 유일한 시간
의자는 늘 세 개
풀들이 일렁이자
바닷바람에 떠밀려 온 아이가
얼굴이 빠져나간 뒤통수로 앉아 있다
검은 머리풀이 자라는
해변의 목초지
밥알을 흘리듯 눈물을 흘린 날도 있었지
수저를 들다가 식탁을 걷어차고
다리가 부러져 세 발로 서 있는 식탁 아래
봄볕이 재활용하는 꽃들처럼
피를 토하듯 국물을 엎지른 날도 있었지
진수성찬을 차려도 한쪽으로만 기우는 세계
식탁의 다리를 마저 부러뜨리고
두 사람은 무릎을 꿇고 앉는다
끝나지 않는 두 손을 모으고 입을 꼭 닫고도
이빨에 끼는 썩지 않는 풀들 사이로
꽃들은 불길처럼 지나가고
하얀 머리풀이 섞이는
해변의 목초지
공복의 탯줄에 묶여
그림자는 늘 세 개
잠이 오는 사람이 먼저 일어났다
나무 시절/이민하
햇빛에 타오르는 나무 하나가 거대한 성냥불처럼 이마를 덮쳤네 거리는 나무들로 넘쳤고 밤에도 햇빛을 개발했네 타오
르는 잎들이 차례로 얼굴을 핥았네 두 뺨에 불이 붙었네 혀를 꺼낼 때마다 불덩이였네 피부를 타고 불이 흘렀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바닥에서 불이 났네 스치는 사람들이 화들짝 옷깃을 털었네 타오르는 가방을 메고 학교엘 갔네 솜털이 뽀얀 선생이
출석부로 가로막았네 타오르는 주먹을 쥐고 공장엘 갔네 백발의 작업반장이 거리로 돌려보냈네 타오르는 군침을 흘리며
식당엘 갔네 전화를 받던 여자가 길 건너를 가리켰네 타오르는 머리를 감싸고 소방서로 갔네 졸고 있던 소방수가 옆 건
물을 가리켰네 타오르는 계단을 밟고 병원으로 갔네 껄껄 웃던 의사가 처방전을 써주었네 타오르는 기차를 타고
해변으로 갔네 모래밭에는 옷들이 뒹구는데 헤엄치는 연인은 어디에 있나 타오르는 옷들을 깔고 앉아 물의 온도를 바
라봤네 절벽 아래 익사체를 뜯어먹던 파도가 떼 지어 달려왔네 타오르는 뒤통수를 끌고
집으로 가 초인종을 눌렀네 이제 막 짐을 풀던 사람이 아래층을 가리켰네 아래층 여자는 골목을 가리켰네 타오르는 어
둠을 안고 여관엘 갔네 목을 매던 투숙객이 옆방을 가리켰네 그를 바닥에 때려눕히고 함께 잠들었네 타오르는 꿈에 실려
예식장으로 갔네 하객들의 박수 소리가 커튼콜처럼 터졌네 처음 따낸 주인공답게 깍듯이 답례하듯 뱃속의 태아를 꺼내
부케처럼 던졌네 피 묻은 손으로 음식을 돌렸네 토사물만 남기고 사람들은 어디로 갔나 타오르는 자책에 빠져
성당엘 갔네 유니폼을 입은 성가대와 입을 맞췄네 노래가 끝나면 관객들은 사라졌네 노래를 옮기려고 낡은 문에 기대
어 편지를 썼네 타오르는 고백을 품고 우체국으로 갔네 닫혀 있는 입구에 늘어선 나무들 사이에 서서
어느 날 밤 우뚝 걸음을 멈추었네 끝없는 폭포수처럼 몸이 쏟아졌네 거리는 사람들로 넘쳤고 자면서도 마음을 개발했
네 울렁이는 입들이 차례로 당신을 기다렸네 뺨에서 물이 튀었네 허공을 깨물 때마다 눈물바다였네 뼈를 타고 물이 흘렀네
모조 숲/이민하
날씨는 뒤에서 다가왔고
우리는 걸으면서도 목을 자꾸 돌렸다.
전염병을 막기 위해 털을 키웠다.
꼬리뼈에 나무를 심은 녀석도 있다.
빌딩들 사이에 강물이 있고 버려진 숲이 있다.
날개가 걷힌 새의 얼굴과
구름의 건축.
밤과 낮에는 색깔이 다른 공기가 필요하다.
고양이가 필요하다. 당신과 내가 반반씩 필요하다.
검은고양이소셜클럽.
표정이 없는 당신과 말이 없는 내가
수염처럼 멤버가 된다.
아침마다 새로운 음악이 분다.
물결치듯 드럼을 치는 호흡과
바람의 애드리브.
눈을 감고 빗줄기를 튕기는 어둠은 우리의 선생.
그는 텐트를 치고 나는 기타를 치고.
눈을 감으려면 부릅뜨는 연습을 하세요.
사라지세요. 줄을 서세요.
줄을 서서 우리는 눈을 맞췄다.
연주를 모르는 당신과 악보를 모르는 내가
거울처럼 주고받는 립싱크.
줄을 튕기며 우리는 입을 맞췄다.
간밤에 떠내려 온 사람들을 싣고
마부인 나는 숲 속의 오후를 달린다.
그들 중 절반은 익사체다.
발목이 잘린 소년들은 주저앉아 더는 자라지 않았다.
소년들이 성장을 멈춰도 계단을 끝없이 오르며
지뢰가 대물림되는 건물들 사이
숲을 지나고 숲을 지나고 숲을 지나는 13월의 산책.
햇빛은 빠르게 돌아가고
녹색과 검정 스크린 위로 펼쳐지는
나무의 왕국 송충이의 왕국 구름의 왕국.
그 사이로 팝콘처럼 떨어지는 새들.
치마가 찢긴 맨발 소녀들이 쓸려 내려왔다.
물속에 누워 상처가 아무는데
꼬리를 물고 꼬리를 물고 꼬리를 무는 소문들.
유람선을 끌고 다니며
잠든 소녀들을 낚시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
백마 탄 왕자는 그만 보내세요.
차라리 손목을 끊으세요. 절필하세요.
눈을 맞추고 입을 맞추고
그다음엔 무엇이 필요한가.
베이비가 필요한가.
우리는 모두 서로의 베이비.
입맞춤과 시치미의 논란 속에서,
나는 숲을 캐스팅한다.
대본이 필요한 사람들은 강 건너로 돌아갔다.
숲을 나오면 숲은 사라진다.
나는 바닥에 목을 내려놓고 누워 있다.
말 한 마리가 숲 속을 달린다.
말굽 소리가 내 목을 끌고 간다.
지퍼-관계에 대한 고집/이민하-
초인종이 울린다.
여기 앉아 스웨터를 뜨던 남자를 찾으러 왔소
(남자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서 노란 소파는 우물거리며 지퍼를 열었다.)
그는 이미 여기 없어요 그런데 오른손에 든 건 뭐죠?
그를 찾으면 넣을 상자요 볕 잘 드는 곳으로 데려갈 거요
스웨터를 다 들 때까지 이곳에 머물 거라 했는데... 여기 앉아 비디오를 너무 많이 봤어요
잠시 들어가 살펴봐도 될까요
좋을 대로 하세요 어차피 당신은 노루를 좇는 사냥꾼인걸요
(남자는 소파에 앉아 팔걸이의 얼룩을 가리킨다.)
이 핏자국은 무언가요?
그는 아침마다 앵두알 같은 코피를 쏟았어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와서 잘 몰랐는데 당신의 창문은 낭더러지 같군요
그는 창박을 자꾸 내다보곤 했지만 창문을 열진 않았어요 고소공포증이 심한 소파는 창가엔 얼씬도
하지 않았구요
지퍼로 말을 하는 당신은 침묵에도 유능하겠죠?
지퍼는 은폐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에게 추억할 자유를 주기 위한 틈새이지요
사실 난 그의 인상착의를 잊었어요 그를 추억하러 온 게 아니라 이 집에서 꺼내주러 왔지요 지난겨울
복도를 지나다 비명 소릴 들었거든요
이 집에 남아 있는 건 없어요 당신이 들은 건 그의 비명도 소파의 울음도 아니고 당신의 독백일 뿐이
죠 당신은 그를 오래 지켜보아서 잘 알기도 하지만 너무 모르기도 해요
초인종이 울린다.
이곳에 상자를 들고 온 사람을 찾으러 왔소
(남자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서 노란 소파는 우물거리며 지퍼를 열었다.)
그는 이미 여기 없어요 그런데 왼손에 든 건 뭐죠?
그를 찾으면 씌워줄 우비요 밖엔 폭우가 퍼붓고 있지요
무슨 흔적을 찾을 때까진 이곳에 머물 거라 했는데... 여기 앉아 너무 많은 질문을 했어요
잠시 들어가 쉬어도 될까요
좋을 대로 하세요 어차피 당신은 덫에 걸린 노루인걸요
(남자는 소파에 앉아 팔걸이의 얼룩을 가리킨다.)
이 핏자국은 무언가요?
그는 입을 열 때마다 찢어지도록 혀가 꼬였어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와서 잘 몰랐는데 당신의 창문은 낭떠러지 같군요
그는 창밖을 보며 어지러워했지만 창문을 활짝 열곤 했어요 우리공포증이 심한 소파는 창가엔 얼씬
도 하지 않았구요
지퍼로 말을 하는 당신은 침묵에도 유능하겠죠?
지퍼는 정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에게 망각할 자유를 주기 위한 틈새이지요
사실 난 그의 인상착의를 몰라요 그를 망각하러 온 게 아니라 이 집에서 꺼내주러 왔지요 간밤에 복
도를 지나다 신음 소릴 들었거든요
이 집에 남아 있는 건 없어요 당신이 들은 건 그의 신음도 소파의 한숨도 아니고 당신의 독백일 뿐이
죠 매일 밤 복도를 지나는 고집스런 변장술사 이 긴 이야기는 3인칭들의 끝말잇기놀이 지난겨울에 끝
난 것일 수도 있고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죠 지퍼는 톤을 바꾸어가며 왜 말들을 반복하는 걸
까요 소파는 왜 자신을 나라고 부르지 않고 소파라고 부르는 걸까요 침묵의 음역에 도달할 때까지 우
리의 노이즈는 계속됩니다
초인종이 울린다
누드/이민하
물의 입술에 대고 말을 건다. 내 배꼽까지 샅샅이 만지던 입술. 동그런 배꼽에서 문드러지는 자줏
빛 그대의 혀. 아가미 너덜대는 축축한 라디오.
주파수를 잃은 칠월의 계단은 겨드랑이마다 치직거리는 피어싱을 하고 지하에서 바다까지 달렸다.
나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계단을 몸속에 접어 넣으며 숨을 고르고 있다. 서걱거리는 모래살점들을
풀어 말리는 해변.
그대의 입술에는 그대가 아직 못 만진 내가 있다. 내가 아직 못 만난 내가 있다. 나는 그것의 행방
이 궁금하여 떠나지 못한 내 마을의 이방인. 숲과 언덕이 내 몸을 꾹꾹 누르며 다 지날 때까지 똬리
를 틀고 천식을 앓는 우물 속의 뱀.
갈라진 두 개의 혀로 어둠의 속옷을 훔치고 더 많은 관음증이 쌓일 때까지 얼굴을 바닥에 문댄다.
죄가 재가 되도록 재가 새가 되도록
너덜너덜해진 얼굴을 기워 두레박 짠다. 불어터지는 자줏빛 나의 혀. 언니들이 도망간 축축한 인형
가게.
나는 바람에 대고 말을 건다. 가만가만 비켜설 뿐인 공터의 탄력.
불타는 모래 위를 뛰어다니는
검은 발바닥의 오후.
개랑 프라이/이민하
당신이 툭, 깨뜨리기 전에
난 이미 깨질 만큼 깨졌다.
껍데기 안에 멍든 살이 고여 있지만
난 감각이 빠르다.
당신이 나를 지목하기 전에
내가 이미 당신의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번들번들 때에 찌든 미끄럼틀.
당신이 이리저리 퍼뜨리기 전에
난 이미 퍼질 만큼 퍼졌다.
껍데기를 빼앗기고 바닥에 감염되었지만
난 용서가 빠르다.
허기진 새벽 프라이팬을 꺼내놓고 부산을 떨더니
기념품 가게를 지나 드라마 촬영장을 기웃, 새로 산 접시에 눈물을 촛
농처럼 쏟고
계절의 네거리에 겨우 당도하지만
아래로 굳은 손가락,
너는 포크로 진화하지 못한 시간의 갈팡질팡.
휴지통에 버려진 상반신과 하반신을 용접하고
난 변신이 빠르다.
진짜 내 몸은 껍.데.기. 털갈이를 하듯
비어낸 내장을 새로 끼우기 위해
당신이 잘근잘근 씹기 전에
난 이미 씹을 만큼 씹었다.
땡볕에 익은 반숙의 살덩이를
개랑 사이좋게 나누어 먹는 두 개의 혀.
당신이 지글지글 지지기 전에
내가 먼저 지질 만큼 지졌다. 짖을 만큼 짖었다.
빈 상자/이민하
팔색조 한 마리를 상자에 담아 그에게 보낸다. 상자를 열자 새는 공기를 휘젓고 사라지고 그는 상
자를 버린다. 꽃나무를 담아 상자를 보낸다. 그는 꽃나무를 정원에 옮겨놓고 상자를 버린다. 책을 담
아 상자를 보낸다. 그는 책을 책꽂이에 꽂아두고 상자는 버린다. 책을 읽던 그는 짓무른 눈알을 따서
정원에 버린다. 팔색조가 돌아와 눈알을 쪼아대자 키가 자란 꽃나무가 두 팔을 공중에 매달고 몸을
푼다. 나는 벽시계를 담아 상자를 보낸다. 그는 시계를 벽에 기대놓고 계절이 흐르기 시작한 정원에
상자를 버린다. 그가 벽시계를 꽝꽝 벽에 박아 넣는 동안 그림 연습을 하던 나는 실물보다 더 진짜
같은 무지개를 그려 상자에 담아 보낸다. 무지개는 벽에 걸려 코가 자라고 상자는 버려진다. 그는 장
마철에도 우산 대신 무지개를 펼친다. 벽에서 넘친 무지개가 뒷마당까지 덮는다. 통조림처럼 꽃나무
와 새들이 썩지 않는다.
나는 빈 상자를 그에게 보낸다. 뚜껑을 열고 닫고 이리저리 살피다 그는 잠든다. 나는 빈 상자를 자
꾸 만든다. 그가 저녁마하는 공원에도 가지 않는다. 내 방은 빈 상자로 꽉 찬다. 수소문한 그가 전화
를 걸어온다. 나는 대답 대신 빈 상자를 자꾸 보낸다. 빈 상자를 넣을 빈 상자를 만든다. 상자 속에
상자 속에 상자를 넣어 작은 상자 큰 상자 자꾸 보낸다. 뚜껑을 열며 뚜껑을 열며 상자 속으로 들어
가는 그는 그 속에서 잠을 잔다. 상자 모서리에 매달려 커다란 상자를 두르던 나도 잠을 잔다. 어김
없이 찾아온 트럭이 커다란 상자를 운반한다. 흔들림에 잠을 깬 내가 그에게 도착한다. 상자 속에 상
자 속에 잠든 그는 내가 온 줄 모른다. 나는 상자를 뚫으려 두 팔을 휘두른다. 상자를 빠져나오자 낯
익은 이불이 납작하게 접혀진다. 낯익은 벽들이 각을 세우고 천장을 덮는다. 기다리고 있던 거대한
트럭이 내 방을 싣는다.
전망 좋은 창/이민하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버지가 달력을 들추더니
저금통을 털어 시장(時場)에 다녀오신다
뭐하려고요, 아직 가느다란 혀들을 가누지 못하는
내가 검은 포대기에 싸인 채 묻는다
아버지는 찰랑찰랑 웃음을 처마 끝에 달아두고
맑은 아침을 골라 화단의 흙을 손톱으로 팠다
고등어를 손질하던 엄마의 엉덩이가 햇덩이처럼
달아올라 비린내를 풍겼다
고추가루 같은 땡볕이따끔거려 나는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꺼낸 꽃씨를 가득
화단에 묻고 집을 돌아보며 의기양양했다
갑작스런 소낙비가 처마를 흔들고 지나가자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버지는 다시 흙을 파기 시작했다
포대기에서 나를 꺼내 엉덩이를 탁탁 털더니
거꾸로 세워 허리까지 흙에 묻고는 시간의 포장리본을 풀었다
광택이 흐르는 연둣빛 신발들을
핏기 없는 발가락마다 신겨주고는 두 손을 탁탁
그러고는 생일상 위에 초를 꽂는 엄마가 있는
사각 창문 안으로 들어가 화단을 바라봤다
무성(茂盛)한 입들이 땅 속으로 뻗었고
무성(無聲)한 잎들이 바람의 계단을 밟고 창문을 뜯어먹었다
벽 속의 누가累家/이민하
나무들이 한삽씩 빗물을 퍼붓고 있다. 벌어진 창틈 사이로
골목의 아이들이 웃음의 뼛가루를 뿌리고 사라진다.
나는 언제부터 깨어 있었던 걸까. 백년 전부터 눈을 뜬 것 같은데
희미한 것을 보면 왜 잠만 올까.
벽 속에 누가 있다. 외로운 누가.
걸음마보다 숨바꼭질을 먼저 배운 언니는
뙤약볕이 싫었는지 벽 속으로 기어들어가 꼭꼭 숨었다.
언니의 뒤통수도 보지 못한 나는
엄마가 고함을 지를 때까지 자궁벽 안에 웅크려 잠만 자고 있었다.
잠보다 놀이를 먼저 배웠더라면 술래가 되어 언니를 찾아낼 수 있었을까.
축축한 것을 보면 왜 잠만 올까.
벽 속에 누가 있다. 벽에 물집이 번지던 여름날.
스무해 동안 갈아주지 못한 기저귀가 생각난 듯 갑자기
엄마는 하얀 시트를 둘둘 만 채 벽 속으로 들어갔다.
앰뷸런스도 배웅하지 못한 나는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
문법보다 마법을 배웠더라면 두 손으로 벽을 비집고 엄마를 꺼낼 수 있었을까.
딱딱한 것을 보면 왜 잠만 올까.
벽 속에 누가 있다. 가구가 늘어도 한쪽 벽엔 늘 네모난 빈자리가 놓여 있는 이유.
나는 벽과 나란히 누워 있다.
벽에 박힌 사진 속에서 늙지도 않는 엄마를 마주 보다가
잡초 무성한 벽지를 움켜쥔 채 외할머니도 지난 여름 뒤따라갔다.
뺨을 타고 장맛비가 흘렀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흔들면서 가세요.
뒤늦게 입이 트인 나는 엄마의 손수건을 할머니 손에 쥐여주었다.
울음보다 음악을 먼저 배웠더라면 아름다운 곡소리를 낭송할 수 있었을까.
서늘한 것을 보면 왜 잠만 올까.
벽 속에 누가 있다. 손끝으로 벽을 쓸어보면 생생하게 묻어나는 마지막 체온.
여름에 떠난 사람들은 영원히 추위를 모르고
비라도 내린다면 천근만근 살 껍질을 귤껍질처럼 벗을 텐데.
내가 잠들면 벽에 걸린 옷들은 어떤 기분일까.
구겨진 몸을 늘어뜨리며 없는 목을 매다는 연습은 왜 하나.
바닥에 납작 깔려 있는 나는 어제보다 얇아져 편지지처럼 고백이 늘었는데
말을 실어나르는 바람의 부피는 늘지 않는다.
눈앞에 마주 보이는 천장이 지난밤보다 낮아진 것일까.
무심한 것을 보면 왜 잠만 올까.
빗줄기가 날리면 덜컹거리는 액자들을 창문처럼 열어젖히고
눈이 텅 빈 얼굴들이 뚫어지게 바라본다.
벽 속에 집이 있다. 오래된 누가.
벽을 똑똑 두드리면 그녀들이 천장으로 올라가 두 발로 꾹꾹 밟으며 화답한다.
보름 전에 죽은 길고양이는 소리 높여 곡을 하고
빗소리가 함께 달구질한다.
목이 쉬도록 후렴구는 잠들 줄을 모르는데 나는 왜 잠만 올까.
벽 속에 누가 있다. 잠에서 깨어 거울을 보면 나도 모르게 뒷걸음치는 이유. 손을 내밀면
잡아당길 거 같아 뒤로 감추는 이유.
간밤에 죽은 내가 거울을 열고 벽 속에서 빤히 내다본다.
사이의 관극/ 이민하
<관계에 대한 고집>
앞자락에서 떨어진 소년을 화분에 묻고 지루한 겨울 일기를 쓰는 사이,
소녀가 세트에서 치워졌습니다
관객이 소녀의 행방과 소년의 행동에 몰두하는 사이,
우리는 무대를 광이 나게 닦고 조명을 둘러보고 새로운 소품들을 주문하였습니다
소년이 테라스에 띄엄띄엄 배치되는 사이,
관객은 눈을 비비고 소녀가 눈곱처럼 날아갔습니다
우연처럼 혹은 각본처럼 우리가 살풋 잠이 든 사이,
무대 밖으로 수거된 소년과 소녀의
미끈한 오토바이와 희미한 발자국 사이
소품들을 실은 계절이 행렬처럼 지나갔습니다
소독차 꽁무니를 따르듯 나비 떼를 나르는 트럭을 좇는 꼬마들과 돋보
기안경을 쓰고 난롯가에서 책을 읽는 노인들 사이
우리는 훔친 소년의 나침반과 소녀의 풀린 스웨터 한 올을 잡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나무토막 뼈마디와 뼈마디 사이
끝이 없는 실들이 우리의 손목에서 실패를 풀었습니다
간혹 관객으로 변장을 하고 객석을 빠져나온 마리오네트가 광장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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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파에 절여놓은 소년과 소녀를 손질하였습니다
배달된 나비 떼가 가루비누처럼 날리는 사이,
잠에서 깬 우리가 기다리는 무대와 텅 빈 객석 사이
뒤죽박죽 엉킨 세탁물처럼 사람들이 돌아왔습니다
우연처럼 혹은 각본처럼 우리는 조용히 불을 껐고 무대가 어두워지는 사이,
막이 오르자 웅성거리는 관객들 사이
팝콘처럼 조명이 켜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