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30여 년 만에 신곡음반을 발표하는 원로가수 김광남씨. 그가 부르는 옛 노래는 언제나 멋스럽다. 목소리에 담긴 세월의 무게, 그리고 노래 속에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 우리가 잊고 지냈던 빛바랜 향수를 한 순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기타소야곡’, ‘경부선 야간열차’, ‘바다의 로맨스’ 등으로 가요팬들에겐 매우 친숙한 목소리의 주인공 김광남씨는 31년 충북 옥천 출생. 어느덧 생존해있는 우리나라 최고 원로급 가수 중 한 분이다.
여전히 맑고 힘 있는 보이스 컬러는 무대에서의 삶 50여 년, 무대 밖에서의 인생 70여 년이라는 세월을 가늠해내기가 한편 쉽지 않다. 관록이 무색하리만치 다시금 신곡과 함께 출발하는 ‘제2의 노래인생’, 그 설렘을 노래 속에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리라.
김광남씨는 전성기 시절 레코드 취입보다는 무대 공연 위주로 활동한 가수. 그가 처음 무대에 선 것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군예대원으로 참전하면서부터다. 전 국민을 전장으로, 그리고 피난민으로 내몰았던 이 비극의 한국전쟁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많은 희생을 강요했다. ‘총 안든 용사’로 전쟁터를 누빈 김광남씨, 그러나 그에게는 동시에 제2의 인생이 펼쳐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바로 무대에서의 삶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중부전선 9사단 백마부대를 거쳐 동부전선인 KLO 8240부대 군예대원으로 전투 상황에 따라 군인들과 함께 전선을 누비며 활동했던 이 때 함께 군예대에 몸담고 있던 ‘노들강변’의 작곡가, 문호월 선생으로부터 받은 예명이 김광남(金光男). 본명 김정희(金正熙).
무명이었던 그가 이때부터 무대에서 부른 노래들은 당시 최고의 가수, 남인수 선생의 레퍼토리들이었다. 평소 흠모의 대상이었던 ‘남인수 레퍼토리’였던지라 창법과 테크닉을 제대로 구사해야했고 노래 또한 제대로 표현해야 했다. 이미 타고난 노래 실력 탓일까, 눈감고 들으면 거의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음색과 창법을 거의 흡사하게 구사, 가는 곳마다 인기를 누렸다. 점차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었지만 정작 다른 한편으로는 본인의 개성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를 찾지 못한, 안타까운 전쟁 시절이기도 했다.
그만큼 그의 음악성은 이미 정평이 나있었고 이어 휴전 후인 55년, 유니버샬레코드를 통해 ‘귀향병(유노완 작사, 전오승 작곡)’을 취입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아울러 악극단에 정식으로 입단, 천안의 ‘혁신극회’를 거쳐 ‘태평원’, ‘새나라 쇼’ 등에 전속되어 누구보다 바쁘게 활동했다. 무대 경력만도 52년째. 이후 많은 노래 또한 취입했다. 그러나 공연을 위해 전국 무대를 바쁘게 다녀야 했기 때문에 정작 자신이 취입한 노래가사를 다 못 외울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한편 무대에서 자신의 노래를 알리고 부르는데 주력했다면 또 다른 이름으로 기억됐을지도 모를, 아쉬움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마이크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시절부터 주로 무대가수로 활동했던 그는 가창력이 증명하듯 호흡이 매우 길다. 객석 끝에 앉은 관객에까지 또렷이 들릴 정도로 발성법 또한 남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그의 음량은 예전 시민회관 무대에서 마이크 없이 노래를 불렀던 일화로도 유명할 정도로 음량이 커서 심지어 레코딩에는 오히려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가까지 받기도 했다.
그와 호흡을 맞추지 않은 악단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최고의 무대가수로 인기를 누리던 그는 특히 문턱이 높다는 일본으로 진출, 6년간의 전국 순회공연을 비롯해 사우디, 쿠웨이트, 요르단, 바레인 등 해외교포들을 위한 공연무대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노래 실력이 너무 뛰어나서 오히려 실력만큼 주목받지 못했던 가수, 김광남. 실제로 많은 작곡가들이 목소리를 탐내 신곡을 주려 했으나 이미 ‘남인수식 창법’으로 굳어진 터라 오히려 장애가 되기도 했다.
때문에 뛰어난 테크닉과 가창력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 맞는 대표곡이 없다는 아이러니컬한 현실을 늘 곁에서 안타까워하던 작사가 반야월 선생의 격려가 함께 담긴 노랫말 ‘인생무대’에 작곡가 임정호씨가 곡을 붙이고 주인공 김광남씨가 열정을 뿜어낸 이 음반은, 그 때문에 더욱 화제가 되기에 충분하다.
반야월 선생은 어느덧 91세이시지만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는 ‘현역’. 그의 최신작 ‘인생무대’의 그 ‘무대’가 바로 가수 김광남씨에게는 '세상보다 더 큰 세상'이었다. 그에게 있어 무대는 곧 ‘제2의 고향’이자 ‘삶의 현장’이었던 탓이다.
세월의 깊이를 더하는 가창력을 느낄 수 있는 ‘명사십리’, 황혼 부부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등받이 돼준 사람’, 그리고 영원한 마음의 고향을 담은 ‘내 고향 무주’까지, 특히 김광남씨가 그동안의 창법에서 탈피한 자신감 넘치는 의지와 만날 수 있다.
사람의 신체 중 가장 늦게 늙는 것이 ‘목소리’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이 70대 원로가수의 음반은 꾸준히 회자되고 있는 우리나라 가수들의 가창력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할 것이다.
외곬인생 김광남씨의 지난 52년간 혼자 헤쳐 나온 '손때' 잔뜩 묻은 무대가 그러하듯 노래 마디마디에 '땀내'와 '눈물‘이 함께 배어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