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2일(사순절 세 번째 주일, 서울신학대학교 기념주일)
사무엘상 20:35~42
일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우정의 신학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네 페이지 설교
1페이지(다윗에게는 피할 곳이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보통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골리앗과 같은 큰 대적을 쓰러뜨리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나보다 크고 강한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만약 골리앗과 같은 대적이 쓰러진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와 추측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입니다.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골리앗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잠재된 골리앗들도 얼마든지 있기 마련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했던 골리앗을 향해 물맷돌을 던졌습니다. 골리앗의 이마에 돌이 박혀 땅에 쓰러지자, 다윗은 골리앗에게 다가가 골리앗의 칼로 그의 목을 잘랐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의 목을 잘라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왔을 때, 이스라엘 군사들은 용기를 얻게 되었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다윗은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큰 승리를 거두고 성읍으로 돌아왔을 때, 사울 왕은 길거리의 여인들이 꽃을 뿌리며 노래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이 소리를 들은 사울 왕은 매우 불쾌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화를 냈지요.
마치 어느 날 담임목사가 한 주간 출타한 후에 교회에 들어왔을 때, 성도들이 “목사님, 목사님, 말도 마세요. 목사님이 안 계신 동안 우리 교회 부목사님이 얼마나 멋진 설교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는지 몰라요. 그 분은 최고의 설교자세요.”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담임목사가 느꼈을 섭섭함이나 불쾌감과 비슷할 것입니다.
사울은 백성들의 마음이 다윗에게로 향해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후로는 사울이 다윗을 주목해 보았습니다.
그 이튿날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자, 사울은 곁에서 수금을 타고 있던 다윗을 향해 손에 잡고 있던 창을 힘껏 던졌습니다. 사울은 이전에 하나님의 영을 받았던 적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떠나시고 다윗과 함께 하시는 것을 보고 무척 두려워하였습니다.
결국 사울은 다윗을 왕궁에서 쫓아내고, 블레셋과 국경이 인접해 있는 최전방 부대의 천부장으로 그를 보냈습니다. 사울에게는 혹시 전쟁 중에 다윗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계략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다윗은 지혜롭게 행동했고, 모든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은 다윗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사울 왕이 미움은 점점 커져만 갔고, 다윗은 피할 곳을 찾아 돌아다녀야만 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미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었습니다(18:29).
결국 사울은 신하들을 불러 다윗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사울의 명령을 받았던 군사들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었습니다. 한 번은 군사들이 날이 새면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밤이 새도록 다윗의 집 근처에 매복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다윗의 아내 미갈이 남몰래 창으로 밧줄을 달아 내려서 다윗이 피하여 도망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한 번은 다윗이 군사들을 피해 사무엘이 살고 있던 라마 나욧로 도망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이 때도 사울은 다윗을 잡기 위해 세 번씩이나 군사들을 보냈고, 결국 실패하자 사울이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라마 나욧로 향하였습니다
그러나 길을 가던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사울을 하루 밤낮을 벌거벗은 몸으로 누워서 예언을 하였고, 그 틈을 타서 다윗은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라마 나욧에서 도망쳤던 다윗은 사울의 아들 요나단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하소연하였습니다. “내가 무슨 짓을 했습니까?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단 말입니까? 내가 당신의 아버지께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렇게 나를 죽이려고 하십니까?”(우리말성경, 20:1)
여러분은 이러한 다윗의 하소연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과연 다윗은 언제까지 몸을 피해 도망쳐야 할까요? 과연 다윗이 피할 곳은 어디입니까?
2페이지(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피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한 분을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저와 대화하는 동안 몇 차례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겪고 있는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이 분은 가정의 어려움으로 인해 우울증을 겪고 있는데, 사람들과의 만남을 단절하고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다고 고백했습니다. 자녀들의 건강이 모두 좋지 않아서 정상적인 학교생활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분은 자신의 아내마저 수술 후유증으로 직장을 내려놓아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겪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이분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제 마음이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과연 이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을 위해 제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들교회를 담임하고 계신 김양재 목사님은 자신이 겪었던 일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만약 다윗이 이새와 형제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사울의 손에 온 가족이 몰살을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다윗의 입장이 되어 보니 세상에 도망갈 곳이 없습니다. 아내에게도, 친구에게도 갈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도망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 어디에서 내편은 없구나. 내가 갈 데가 없구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갈 곳이 없었습니다. 결혼 5년 만에 패잔병처럼 친정으로 도망을 갔는데, 다음 날 아침에 밥을 도저히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친정아버지가 “저 따위로 하니 쫓겨났지.”하셨습니다. 친정에도 못 있겠기에 기도원에 갔습니다. 호텔 갈 돈도 없었습니다. 5년을 부잣집에서 며느리로 살았는데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출처: 김양재, 「다 이유가 있습니다.」(서울: 두란노, 2021);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23년 3월호), 61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네티즌이 만나고 싶은 사람 1위’, ‘대학생이 존경하는 사람 1위’에 뽑혔던 국제구호전문가 한비야 씨를 아십니까? 이분이 지었던 책 중에 「1그램의 용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한비야 씨가 세계 여러 나라를 방문해서 구호활동을 펼쳤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비야 씨가 2013년도에 서아프리카를 방문했다고 합니다. 서아프리카는 오랫동안 프랑스에 식민지로 있으면서 노예무역이 성행했다고 합니다. 특히 서아프리카 노예무역의 거점이었던 고레 섬에는 지금도 흑인들을 가두었던 노예상 건물들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건물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체중을 기준으로 130킬로그램 이상 남자의 방, 130킬로그램 미만 남자의 방, 여자 방, 어린 여자 방, 아이들 방, 그리고 말썽을 부리는 자를 가두는 방으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한 식구가 노예로 끌려와도 아빠는 남자 방, 엄마는 여자 방, 아이는 아이 방에 갇혀 같은 건물에 있어도 얼굴도 못 보고 각각 다른 방으로 팔려 갔다고 합니다.
서아프리카에서 1440년대에 포르투갈 인이 열 명의 흑인을 잡아간 것을 시작으로, 1848년 프랑스에서 공식적으로 노예제도가 폐지되기까지 400년 동안 포르투갈, 영국, 스페인, 프랑스 등 유럽의 열강 노예상이 대서양 너머로 끌고 간 흑인수가 무려 1,500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두세 달간의 먼 배 여행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흑인수가 무려 600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흑인들은 지금의 쿠바, 아이티 등이 있는 서인도 제도나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살려갔습니다. 그 당시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설탕을 생산하기 위해 서 사탕수수를 베고, 즙을 짜고 끓이는 강도 높은 노동을 해 줄 노예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비야 씨의 말에 의하면, 모리타니에는 아직까지도 인구의 약 10~20퍼센트, 그러니까 많게는 약 60만 명 정도의 노예가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주인 마음대로 사고팔고 죽이거나 살릴 수 있는 소유물 정도로, 평생 돈 한 푼 받지 않고 매를 맞아가며 죽도록 일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한비야 씨는 비스듬히 누어서 차를 마시고 있는 비교적 넉넉하지 않은 주인을 보고, 퉁명스럽게 물었다고 합니다. “아저씨네 형편도 어려운데 저 사람들을 자유인으로 놓아주면 안 되나요?” 그런데 아저씨 대답이 뜻밖이었습니다. “이들이 원하지 않아요. 조상 대대로 노예였기 때문에 그 상태가 편한 거죠.”
순간 한비야 씨는 이 나라 노예제도에 맞서 싸운 공으로 UN 인권 상을 받은 노예 출신 아베이드의 말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노예들은 이렇게 말하곤 하죠.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내가 자유인이 되면 굶어죽을 게 뻔하다고. 그러느니 차라리 노예로 사는 게 낫다고.”
아베이드는 단언했습니다. “이런 생각이 노예제도 척결의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혹시 우리 역시 그 무언가의 노예는 아닐까요? 늘 시간에 쫓기고 정신없이 바쁘고, 항상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면서 스스로 시간의 노예, 일의 노예, 욕심의 노예로 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출처: 한비야, 「1그램의 용기」(파주: 푸른 숲, 2015), 229-235.
3페이지(하나님은 일상에서 우정의 신학을 통해 다윗을 도왔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피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다윗은 지금 사울 왕의 미움을 피해 달아날 그 어딘가가 필요했습니다.
다윗이 라마에 있던 사무엘을 찾아간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특별한 신비체험이 늘 상 지속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특별한 상황에서만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다윗은 놉에 있던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좇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아히멜렉은 떨며 다윗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피곤에 지쳐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 한편에는 불안함이 역력했습니다. 그의 형색은 한 나라의 장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남루해 보였습니다.
다윗은 제사장 앞에서 거짓말을 둘러댔습니다. 다행히 다윗은 그곳에서 거룩한 떡과 골리앗의 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두려움 때문에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국경을 넘어 블레셋 성읍으로 도망하였습니다.
선지자 사무엘과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큰 용기와 도움을 주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누구보다 가장 큰 용기와 위로를 주었던 사람은 요나단이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과 마음이 하나 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였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맺었습니다. 요나단은 그 언약의 증표로 자기가 입던 겉옷과 군복과 칼과 활과 띠를 다윗에게 주었습니다(18:1-4).
요나단은 다윗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은밀히 그를 도와 다윗을 위험에서 건져주었습니다.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요나단 앞에 섰을 때, 요나단은 다윗을 위로하고 그를 돕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이에 다윗은 요나단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습니다. 다윗은 내일이 초하루인데, 관습에 따라 삼일동안 궁중에서 잔치가 벌어질 때 자신은 잔치에 참여하지 않고 들에 숨어 지내겠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이 왕의 뜻을 헤아려 자신에게 알려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에 요나단은 다윗을 이끌고 에셀 바위가 있는 들로 나갔습니다. 요나단은 은밀히 다윗과 암호를 정했습니다.
만약 요나단이 화살을 쏠 때에 “보라 화살이 네 이쪽에 있느니라.”라고 말한다면 다윗의 안위가 안전한 것이고, 다윗은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요나단이 화살을 쏠 때에 “보라 화살이 네 앞쪽에 있다.”라고 말한다면, 다윗의 안위는 안전하지 못한 것이고, 다윗은 도망쳐야 합니다.
그 약조를 맺은 지 삼 일 후에, 요나단은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 왕의 의중을 알아채고는 약속대로 들에 나가 화살을 쏘고 “화살이 네 앞쪽에 있지 아니하냐. 지체 말고 빨리 달음질하라.”고 외쳤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빨리 도망치라는 신호를 보냈던 것입니다.
이후 요나단과 다윗의 작별 인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다윗은 숨어 있던 바위 뒤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요나단에게 절한 후에, 서로 입을 맞추고 같이 울었습니다. 그 때 요나단보다 다윗이 더 많이 울었습니다.
두 사람이 헤어지기 직전에, 요나단은 다윗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42절).”
요나단과 다윗 사이에는 여호와께서 계십니다. 즉,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요나단과 다윗은 권력의 경쟁자였습니다.
요나단이 사울 왕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차기 왕권을 계승할 자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다윗을 도왔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눈으로 다윗을 보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물론 다윗도 하나님의 눈으로 요나단을 보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요나단을 사랑했습니다.
신학자 마틴 부버는 평생 만남과 관계를 연구했습니다. 그의 명저 ‘나와 너’는 우리의 존재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의 의미가 있고, 너는 나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의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만물을 조화롭게 창조하시며,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살도록 하셨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하나님이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맞물림, 아름다운 관계가 됩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하나님이!’ 이것이 다윗과 요나단이 가진 우정의 비결이었습니다.
-출처: 한재욱, “당신과 나 사이에”, 국민일보 2017년 2월 9일자 <겨자씨>
인간은 코이노니아적 존재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인간의 본질이 코이노니아적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삼위일체 코이노니아적 존재양식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눈으로 형제를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필요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선지자 사무엘과 제사장 아히멜렉을 통해 다윗을 도와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특별한 도움이 늘 지속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요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더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일상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6일 동안 세상 한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방식은 요나단과 같이 하나님의 눈을 가진 자들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일상에서 우정의 신학을 통해 다윗을 도왔습니다.
4페이지(하나님은 일상에서 우정의 신학을 통해 우리를 돕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일상에서 우정이 신학을 통해 우리를 돕습니다. 하나님의 눈과 마음을 가진 요나단을 통해서, 하나님을 우리를 도우십니다.
반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눈과 마음을 가진 요나단이라면, 우리는 주변에서 피할 곳을 찾지 못한 오늘날의 다윗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지지하고, 그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해 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저는 설교 초반에 우리들교회를 담임하는 김양재 목사님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분은 결혼 5년 만에 패잔병처럼 친정으로 도망을 갔는데, 도저히 친정에도 있을 수 있는 상황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기도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오늘 교회로, 하나님 앞으로 도망 오신 분이 계십니까? 인생에 최고의 선택을 한 것입니다. 제가 힘들었을 때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때 이런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면 정말 힘을 얻었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 저는 그때 선교사님이던 언니가 저를 위해 옆에서 금식 기도해 주었습니다. 제가 “배고파 못 살겠다”하면 옆에서 “찬송하자, 기도하자, 힘내자”하면서 전혀 금식하는 사람 같지 않게 힘을 주었습니다. 힘들 때마다 나를 도와주는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출처: 김양재, 「다 이유가 있습니다.」(서울: 두란노, 2021);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23년 3월호), 61에서 재인용.
다윗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잘 통과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게 무슨 훈련이 되겠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에 훈련이 되는 것입니다.
배우자가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까? 자녀를 앞세워 보냈습니까? 사업이 부도났습니까? 배우자가 외도를 합니까? 자녀가 문제를 일으키면서 날마다 가출합니까?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가?’ 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 그 일이 괴로워 죽을 것 같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네 인생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지금 나를 만나라” 하십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이 고요한 시간에 외롭지 않으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남편 사랑, 자녀 사랑, 돈으로 충만하면 절대로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출처: 김양재, 「다 이유가 있습니다.」(서울: 두란노, 2021), 195.
여러분은 이 고백이 고된 시집살이를 견디지 못하고 결혼 5년 만에 가출해 기도원에 들어갔다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변화된 여인의 고백이라는 사실이 믿겨집니까? 김양재 목사님의 극적인 변화 뒤에는 사랑하는 동생의 아픔을 끌어안고 금식하며 눈물로 기도했던 그녀의 언니가 있었습니다.
‘제노비스 신드롬’ 일명 ‘방관자 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1964년 뉴욕 퀸스에서 제노비스라는 여성이 밤늦게 괴한에게 살해를 당했는데, 그때 그 일을 목격했던 사람이 40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중 아무도 경찰에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사건을 두고 두 명의 심리학자들이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도와 줄 개인의 책임이 분산되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실험을 했습니다.
지나가는 행인이 한 명 있는 곳에서 한 대학생이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연기를 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간질 발작을 일으킨 연기자는 85%의 구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5명의 행인이 있는 상황에서는 겨우 31%만 구조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는 하겠지”라고 생각하고 무관심하게 되는 제노비스 신드롬을 경계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 고통을 당하고 쓰러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에 대한 책임은 예수님을 믿은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에 우리의 사랑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김병삼, 「살아내는 약속」(서울: 두란노, 2019); 「생명의 삶」(서울: 두란노, 2023년 3월호), 93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일상에서 우정의 신학을 통해 다윗을 도와 주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일상에서 우정의 신학을 통해 여러분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과 마음으로 피할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우리의 이웃을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도왔던 것처럼, 이제 일상에서 우정의 신학을 통해 여러분이 도와야 될 친구는 누구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