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계속 바뀐 한국어 교사 윌리엄 베어드의 아내 애니 베어드(Annie L. Adams Baird, 安愛理, 1864-1916)가 서울에서 만난 첫 번째 한국어 교사는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들과 함께 살았던 모펫은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엘린우드 총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선교부는 그들이 부산에 가기 전에 1년 동안 서울말을 배워야 한다고 결정했다.”1라고 하였다. 로스 번역의 평북방언 성서와 이수정 번역의 현토(懸吐) 성서에서 교훈을 얻은 선교부에서는 이들 부부가 부산 방언을 배우기 이전에 표준어 격인 서울말을 가르치기로 한 것이다. 베어드는 1892년 5월 18일에 한국어 교사 서상륜과 함께 경남 지역 선교여행을 떠나며 한국어를 배우고 주민들과 대화를 실습했지만, 애니 베어드는 함께 가지 않았다. 서상륜의 병이 악화되어 베어드가 “편지를 써서 하인 편으로 아내에게 보내 전보를 치게 했다.”라는 일기 내용을 보면, 애니 베어드는 그들과 떨어져 부산에 있었던 듯하다. 서상륜이 5월 15일 부산에 도착했으니, 그에게서는 아마도 사흘밖에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베어드는 5월 23일 일기에 “나는 한국어 진도가 참 늦다. …현재까지 나온 우리가 가진 책들은 초보자가 필요로 하는 배열이나 적합성에 있어서 효과적이지 못하다.”라고 기록하였다. 한국어 진도가 늦어진 이유를 교재가 잘못 편집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1893년 4월에는 서상륜의 동생인 서경조가 베어드 부부를 돕기 위해 부산에 왔으며, 15일부터 선교여행을 시작하였다. 이 여행에도 애니 베어드는 동행하지 않아서, 베어드의 일기에는 혼자 공부한 기록이 자주 보인다. 선교여행에서 돌아온 6월 4일 일기를 보면 “사랑방에서 사역을 시작하다”라는 제목이 보이는데, “어학선생들과 하인들을 제외하고는, 오직 한 사람의 남자가 예배에 참석했다. 어학선생은 서 서방과 고 서방”2이라고 했으니, 부부가 별도의 교사를 둔 것이다. 번역본 각주에 서 서방은 서상륜, 고 서방은 소래교회 출신의 고학윤(高學崙)이라고 했으니, 고학윤이 애니 베어드의 교사였을 것이다. 이 사랑방 예배는 지금의 초량교회로 발전하였다. 이 시기에 선교사들은 한국어 교사와 함께 선교여행을 다니면서 한국어를 배우고 실습하였다. 모펫은 베어드 부부가 자신의 숙소에 와 있는 동안 게일, 서 씨와 함께 3월부터 의주까지 선교여행을 떠났는데, 서울에 돌아와 5월 21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여행은 어학 공부 면에서도 성공적이었으며, 저는 다시 건강 상태가 좋아졌습니다.”3라고 보고하였다. 9월 17일에 보낸 편지에서도 “제가 어느 정도 유창하게 말할 수 있게 될 때까지는 봄과 가을마다 시골에서 몇 달씩 지내려고 합니다.”4라고 하였다. 모펫은 다른 선교사들에게도 많은 시간을 교육과 실습에 전념할 수 있는 선교여행이 한국어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추천했을 것이다. 그러나 베어드는 선교여행에 아내를 데리고 가지 않았는데, 한국에서 시골을 여행하려면 숙박이나 음식, 교통 등 모든 것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또한 베어드 부부의 한국어 교사들은 한국어를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선교 책자도 팔고, 베어드가 쓴 『천로지귀』(天路指歸)의 교정도 도우며 문서선교에 참여했다.
| 교수법을 몰랐던 한국어 교사의 단점을 보완하다 당시 우리나라에 거주하던 서양 선교사들은 전문적인 한국어 교사를 만나기 어려웠다. 조사(助事)들 가운데 한국어 학습을 도와주는 이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가르치는 일에 훈련되어 있지 않았다. 에비슨은 1893년 6월 16일 부산에 도착하여 베어드 부부의 집에 얹혀 살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애니 베어드가 그에게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며 한국어 교사를 소개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어드 부인이, 내가 한국어 선생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권하였다. 베어드 씨는 내가 그의 선생이며 조사(helper)인 고씨를 이용해도 괜찮다고 하였다. …우리는 8월 말까지 베어드의 집에 머물렀다.5
애니 베어드가 소개한 한국어 교사는 서상륜의 후배이자 자신의 교사인 고학윤이다. 그는 영어를 모르고, 교수법을 배운 적도 없었다. 그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한국어 발음뿐이었다. 에비슨은 애니 베어드의 충고를 따라 한국어 학습 방법을 터득하였다.
나는 한국말을 전혀 모르고 고 씨는 전혀 영어를 몰랐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 것인가? 베어드 부인은 나에게 “한국말 한 마디를 가르쳐주면서 시작해보라”고 하였다. 그것은 바로 “이것은 무엇입니까?”라는 말이었다. 나는 책상 위의 책 한 권을 들고 물었다. 그랬더니 고 씨는 “그것은 책이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book’이란 단어가 ‘책이오’인가 보다 생각했다. 계속 배워감에 따라 모든 낱말이 ‘이오’로 끝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야 베어드 부인은 ‘book’이란 단어는 ‘책’이고 ‘이오’는 동사로서 ‘is’라고 설명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그 복잡한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6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한국인과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서양인이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언어교수법을 배우지 못한 한국인 교사에게서 체계적인 언어 학습을 기대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애니 베어드가 예로 든 문장은 1970년대 중학교 1학년 영어책 첫 장에 나오던 “This is a book.”인데, 그나마 주어와 술어 관계를 설명해주지 않아 “책이오”라는 한 문장을 ‘책’이라는 하나의 명사로 받아들이는 웃지 못할 상황이 일어났다. 교재와 교수법이 개발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이런 일을 겪었을 것이다. 애니 베어드는 스스로 만든 방법으로 한국어를 빨리 터득하고 난 후에 Fifty Helps: for the Beginner in the Use of the Korean Lan-guage(이하 Fifty Helps)라는 책을 써서 학습자가 스스로 한국인 교사에게 체계적으로 질문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리고 교사의 답변을 통하여 학습자 스스로 한국어의 문법체계를 습득해나가라고 조언하였다. 이 책은 문법서라기보다는, 한국인 교사를 어떻게 활용하여야 효과적인 학습이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설명한 지침서이다. 애니 베어드의 친절한 안내는 불모지와 같았던 그 당시 한국어 학습 환경에서 학습자들에게 금과옥조로 다가왔을 것이다.
| 문형을 정해주고 반복 연습하는 교재를 만들다 언더우드는 사전과 문법서를 따로 출판하여, 학습자들이 두 책과 함께 자기 나름대로의 학습법을 개발하여 배우도록 했는데, 애니 베어드가 쓴 Fifty Helps는 한 권으로 단어를 배운 뒤 문형(文型)을 연습하여 여러 문장으로 활용하게 하였다. 이러한 문형 연습은 현대의 한국어 교육 현장에서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다. 애니 베어드는 한국에 들어온 지 6년째인 1896년에 Fifty Helps의 초판(64쪽)을 서울 삼문출판사에서 간행하였다. 4판은 1911년 일본 요코하마 후쿠인출판사에서 출간되었고, 1926년에는 6판이 나왔다. 초판에서 6판까지 책의 외적 구성은 거의 동일하다. B6(4×6판)의 소책자 크기를 유지하면서 초판은 64쪽이던 면수가 4판에서는 100쪽으로, 6판에서는 114쪽으로 늘어났다. 책의 앞부분에서는 한국어의 자음과 모음, 한국어 교사에 대해 알아두어야 할 일, 기본적인 어휘를 품사별로 소개하였다. 문법부에서는 동사 활용형을 표제어로 삼아 목록화하고, 이를 문법적 체계에 따라 연습 활용하게 하였다. 부록으로는 한국어 습득과 문화적 적응에 도움이 되는 참고사항들을 수록하였다. 3판까지는 본문인 문법부에 제시된 동사 활용형 표제어가 42개인데, 4판부터 50개로 늘어나 책 제목에서 밝힌 50개를 채웠다. 6판에서는 동사 활용형이 더 보충되었지만, 본문의 활용형 목록은 50개로 고정한 후에 따로 ‘Additional’이라는 소제목 아래에 활용형을 보충하였다. 이 책의 특징은 각 문법 항목에 대해서 일차적인 설명과 예문 제시에서 그치던 기존 문법서와는 달리, 각 항목의 문법 설명을 순차적으로 확장되고 반복되도록 제시하여 학습자가 자연스럽게 단계적인 연습에 몰입할 수 있도록 구성한 점이다. 에니 베어드는 올바른 발음을 익히기 위해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한국인 교사와 꾸준히 연습하라고 강조하였다. ‘으/외/의’ 등의 모음이라든가 ‘ㅋ/ㄲ’ 등의 격음과 경음 자음을 예로 들면서 “외국인은 모두 어려워하는 발음이니 학습 도중에 좌절하지 말라.”라고 세심한 충고도 곁들였다. 그리고 한국인 교사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와 적절한 인사말을 제시하였다. 수업 진행에 필요한 발화와 문법체계를 꿰뚫을 수 있는 질문들을 소개하여, 학습자들이 교사를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한국인 교사와 학습자의 나이 차이가 많지 않으면 ‘김 서방’, ‘고 서방’, ‘정 서방’ 등으로 부르고, 교사가 연장이면 ‘선생’으로 부르며, 한국인 교사가 직함이 있으면 ‘홍 사과’, ‘서 초시’ 등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또한 한국인 교사의 대답을 유도할 수 있도록 ‘이/이것; 그/그것; 이러케/그러케’ 등을 사용하도록 하되, ‘시제’나 ‘존대등급’ 등의 문법적인 용어를 한국인 교사에게 사용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이처럼 이 책에서는 한국어 학습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문화적 조언과 함께 한국인 교사의 체면을 세워주는 배려도 엿볼 수 있다.
| 가장 오랫 동안 사용된 한국어 교재 Fifty Helps 32세에 간호원으로 전라도에 파견되어 고아와 나환자들을 보살폈던 독일 선교사 서서평(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 1880-1934)은 한국어를 처음 배우던 기억을 이렇게 전하였다.
당시에 저는 한국어를 배우는 3년차 초보 선교사였습니다. 2년까지는 주로 초학언문을 배우면서 평양 선교부의 베어드 부인이 쓴 ‘50가지 도움’이라는 책의 전반부를 배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한자어도 기본적으로 200자를 읽거나 쓸 줄 알아야 했습니다. 『천로지귀』를 마치면서 하오, 한다, 하느냐, 하였다, 하겠다 하겠느냐, 하자, 합세다, 하소서, 이오, 이냐, 있소, 있다, 합니다, 합니까, 이을세다, 하고, 하니까, 하면, 할지라도 하니, 하여, 함, 한, 하는, 하나, 하여도 등등 접속사나 관용어를 선별해서 수도 없이 익혀야 하는 고통이 뒤따랐습니다.7
선교사들은 3년 동안 한국어를 배우고 시험에 합격해야 투표권을 얻었는데, 한국어 학습 과정은 현재 1891년, 1901년, 1911년의 세 가지가 확인된다. 1891년에는 당연히 언더우드의 『한영문법』과 스콧의 『언문말책』 중심이었으며, 이후 1901년 학습과정 1년차에 Fifty Helps가 추가되고, 1911년에는 베어드의 『천로지귀』가 1년차 3학기에 추가되었다. 서서평이 괴로워했던 한자 200자와 ‘하다’ 동사의 종결어미와 연결어미 숙달하기도 1년차 3학기 과정이다.8 박새암의 조사에 의하면 1945년까지 우리나라에 파견된 기독교 선교사는 모두 1,526명이다.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계기로 기독교인과 선교사 숫자가 팽창하면서 북장로회에서 1908년에 새로 파견한 선교사만 해도 22명이어서 체계적인 커리큘럼과 교재가 필요했다. 서서평이 배운 Fifty Helps는 1911년에 간행된 4판인데, 이 책이 한국어 학습 교재로서 서양인들에게 60년 동안이나 사용되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 때문이다. 첫째,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이 책의 문법 항목의 수가 그 이전에 나온 문법서보다 상대적으로 적다. 초급 수준에 필요한 문법 항목 50개만 간추려 학습자의 부담감을 완화시켰다. 둘째, 교수법을 배운 한국어 교사가 없던 시절에 학습자 주도의 학습법을 적용했다. 셋째, 초급 학습자용 어휘 목록을 간추려주었다. 넷째, 연습과 생산의 과정이 포함되었다. 당시 기존 문법서는 문법 설명과 예문 제시에 지나지 않아 학습자가 일방적으로 수용해야 했으나, 이 책에는 학습자가 문법체계에 따라 주도적으로 연습하고 문장을 생산하는 과정이 포함되었다. 마지막으로 언어 습득 발달에 문화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즉 당시 선교사의 문화와 한국 문화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를 정확히 인지하고, 문화적 소통 방식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였다. 또한 호칭어와 존대법의 사용, 인사말의 쓰임, 남녀유별 문화에 대한 행동 양식을 자세히 조언하며, 언어 학습에서 문화적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다. 1910년에 대한제국이 국권을 늑탈당하며 조선총독부가 들어서자, 선교사들도 일본어를 배워야 할 필요가 생겼다. 그러자 1914년에 선교사 윈(George H. Winn)은 Fifty helps for the beginner in the use of the Japanese language being an adaptation of Mrs. Baird’s fifty helps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애니 베어드의 Fifty Helps 방식대로 일본어를 배우는 책인데, 한국어를 이미 배운 선교사들이 일본 글자를 쓰지 않고 영어로 배우는 일본어 회화책이다. 애니 베어드의 한국어 교수법이 가장 효율적임이 다시 한 번 입증된 셈이다.
| 찬송가 가사를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짓고 번역하다 애니 베어드는 찬송 <멀리 멀리 갔더니>와 <나는 갈 길 모르니>의 작사자이기도 하다. 교회에서 많이 부르는 이 두 찬송은 『새찬송가』 387장과 375장에 수록되어 있으며, 악보 상단 작사자 이름 항목에 ‘배위량 부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멀리 멀리 갔더니>는 를 번역한 것이지만, 원문보다 더 심금을 울리는 가사가 되어 창작처럼 여겨진다. 1880년대에 선교사들이 처음 찬송가를 편집할 때에는 언더우드의 번역이 가장 많았지만, 장로교와 감리교가 합동으로 편찬한 『찬숑가』(1908)에는 애니 베어드의 번역과 창작이 56편이나 실려 가장 많았다. 애니 베어드가 영어와 한국어의 율격 차이를 인식하고 서양 곡조에 맞춰서 한국어로 번역했기 때문에 편집위원들에게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언더우드는 서양 곡조에 한국어 번역을 맞출 수 있는 음절의 수가 한정되어 있고, 한국어 자음은 고하청탁이 있어 이를 번역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탄식하였다.9 그러나 애니 베어드는 이러한 영어와 한국어 율격의 차이를 인식하고, 찬송가 가사를 번역할 때 가사의 율격과 곡조의 율격을 맞추면 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한국어 리듬에서는 강약격(trochaic)이나 악센트가 있는 음절로 시작하는 것이 약강격(iambic)이나 악센트가 없는 음절로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는 사실을 알아내고,10 교인들이 부르기 쉽게 번역하였다. 두 사람의 번역 가사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한눈에 들어온다.
(첨부 그림파일 참조)
이 찬송은 교회학교 예배에서 가장 많이 불린 찬송 <예수 사랑하심을>이다. 『새찬송가』 563장에 소개된 작사자는 워너(A. B. Warner, 1860)이다. 언더우드와 애니 베어드가 비슷한 시기에 이 찬송가를 번역했는데, 애니 베어드는 브래드버리(W. B. Bradbury, 1862)의 작곡을 살려 일곱 개의 음표에 맞게 7음보 4구로 정확하고도 쉽게 번역하였다. 애니 베어드는 후렴도 5음보를 세 번 반복하게 번역했는데, 언더우드는 7음보로 번역했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이 곡조에 맞춰 부르기 힘들었다. 찬송가가 통합될 때에는 당연히 애니 베어드의 번역 가사가 실렸으며, 『통일찬송가』(1983)에 언더우드의 가사는 444장 <예수가 거느리시니> 1편 만 남았지만 애니 베어드의 가사는 30편이나 남아 있다.11 『새찬송가』에도 2-3번째 구절을 “거룩하신말일세 어린거시약하나”에서 “성경에서 배웠네 우리들은 약하나”로 고쳤을뿐, 120년이 넘어도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살아 남아 있다.
| 동물학과 식물학 교재를 처음 번역하며 한국어 이름을 정리하다 애니 베어드는 1900년에 식물학, 천문학, 화학, 물리학, 지리학을 가르쳤고, 1901년에는 지리학과 수학을, 1904년에는 천문학, 식물학, 화학, 미술, 작문을 가르쳤다.12 근대식 학교의 교재는 대한제국에서 편찬한 몇 가지와 세브란스의학교에서 편찬한 책들이 있었지만, 식물학이나 동물학 교재는 없었다. 애니 베어드는 미국의 개론적인 책들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교재로 사용하였다. 『동물학』(1906), 『식물도셜』(1908), 『식물학』(1913) 등의 교재들은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이 분야 최초의 단행본들이다. 이 책에는 수많은 동물과 식물의 이름이 영어와 한글로 소개되었는데, 한글 이름은 숭실학교 졸업생들이 도와주었다. 『식물도셜』을 예로 들면 “국문에 닉숙지 못거 특별히 평양즁학교 졸업 챠리셕씨의게 만히 교졍을 밧아시니 매우 감샤네다 안애니”라고 사사 표기를 하였다. 숭실학교를 졸업한 차리석은 뒤에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서울과 경상도에서 한국어를 처음 배운 애니 베어드는 평양 사투리에 익숙해져, 자연스럽게 “감샤네다”라고 인사하였다. 한국에서 일본 학자들보다 먼저 동물학과 식물학 책을 내면서 수많은 동식물들의 이름이 처음으로 한글로 기록되거나 새로 번역된 것도 한국어를 사랑한 애니 베어드의 특별한 업적이다.
1 김인수 옮김, 『마포삼열 목사의 선교편지』(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0), 80. 2 이상규 옮김, 『윌리엄 베어드의 선교일기』(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2013), 2-13, 53. 3 이상규 옮김, 위의 책, 94. 4 이상규 옮김, 위의 책, 99. 5 리처드 베어드 지음, 김인수 옮김, 『배위량 박사의 한국 선교』(쿰란출판사, 2004), 52. 6 A. D. Clark, 『Avison of Korean, 에비슨전기』(연세대학교출판부, 1979), 237.(『대한성서공회사』 1권 192쪽) 7 양국주 편저 『그대 행복한가요?: 행복을 잃고 살아가는 바보들에게 주는 서서평의 편지』(서빙더피플, 2016), 126. 8 박새암, “개신교 선교사 한국어교육의 형성과 전개에 대한 사적 연구”(한성대학교 대학원 한국어문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8), 66-72. 9 언더우드 『찬양가』(1844) 서문. 10 Annie, L. A. Baird, “The Coming Song Book”, The Korea Mission Field 10/3(1914), 80. 11 조숙자, “초기 한국찬송가 번역자 작사자 연구”, 「장신논단」 3집(1987), 282-287. 12 숭실백년사편찬위원회, 『숭실대학교 100년사 Ⅰ-평양숭실편』(숭실대학교출판부, 1997), 81-82.
이 숙 | 연세대학교를 졸업하였고, 하버드대학교 언어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한국어학당 강사와 하버드대 동아시아학과 전임강사로 일했다. 저서로 『한국어 이해교육론』(공저), Practical Korean(공저) 등이 있다. 현재 전주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