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20.21
반란군이냐 혁명군이냐
국가의 명운을 건 한판 승부
6월 1일. 명나라를 치기 위하여 평양을 떠난 정벌군이 반란군이 되어 개경에 돌아왔다. 5월 22일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 군대는 안주와 평양을 거쳐 남하하는 동안 저항을 받지 않았다. 무저항 무혈 통과다. 분명코 왕명을 거역한 반란군이 왕도에 이르는 동안 저지하는 군대나 저항하는 세력이 없다는 것이 난세(亂世)임을 말해주고 있다.
반란군은 반란군을 저지할 억지력이 있을 때 자신의 고유의 이름 반란군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하지만 대항세력이 힘이 없을 때 자신의 고유명을 은폐하고 혁명군으로 진화한다. 친위 반란이었을 경우 왕당군으로 둔갑한다. 이렇게 상황에 따라 변화를 잉태하고 있는 것이 반란군이다.
이성계 군대 역시 그렇다. 요동으로 출정할 때는 분명 정벌군이었다. 하지만 돌아올 때는 반란군이다. 왕명을 거역했고 군령을 어겼기 때문이다. 왕성에 진입한 이 시각 현재 이성계군대의 신분은 반란군이다.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지 아무도 모른다.
개경에 도착한 반란군은 왕궁으로 진격하지 않고 개경 외곽에 진을 쳤다. 선임 지휘관 조민수는 벽란도(碧瀾渡)를 거쳐 평양과 의주로 통하는 길목 선의문 밖에 진을 쳤다. 이성계는 임진강과 한양으로 통하는 길목 숭인문 밖 산대암(山臺巖)에 군영을 마련했다. 개경을 포위한 셈이다.
개경은 송악산을 주산으로 장풍득수(藏風得水)형 천하의 명당이다. 하지만 그것은 태평성대에 통하는 길지론(論)일 뿐, 위난 시에는 동대문(숭인문)과 서대문(선의문)을 봉쇄하면 꼼작 없이 갇히는 형국이다.
왕성을 포위한 반란군, 최후통첩을 보내다
개경을 포위한 반란군은 환관 김완을 궁성으로 들여보냈다. 위화도에 주둔하던 정벌군이 4대불가론을 내세워 회군하도록 윤허를 내려달라고 장계를 올렸을 때 "장수들의 주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 진군하라"는 왕명을 가지고 진중을 찾았던 왕의 측근이다.
반란군은 김완을 개경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계속 부대에 억류하다가 그의 손에 최후통첩을 들려 대궐로 들여보낸 것이다.
'회군의 진정성을 알아주고 최영을 내치라'는 반란군의 통첩을 받아든 우왕은 망연자실했다. 노구를 이끌고 분투하던 문하시중 최영은 격노했다. 고려 조정의 지주 최영 장군의 입장에서 군령을 어긴 정벌군은 반란군이었고, 왕명을 거역한 이성계 군대는 역적도당이었다.
"폐하. 심려를 놓으소서. 역적 이성계를 처단하여 나라와 왕실을 편안케 하겠사옵니다."
결연한 의지를 불태웠다. 꺼져가는 조국의 불꽃을 이 한 몸 던져 구할 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었다. 최영은 반란군과 협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단연코 배격했다. 이성계를 궁성으로 유인하여 사로잡을 방책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꼼수를 부리고 싶지 않았다. 정도를 가고 싶었다. 쓰러져가는 조국을 일으켜 세우려다 마지막으로 꺾인 충신으로 남고 싶었다.
최영이 누구인가? 역전의 노장 최영장군이 아닌가. '반란군 수괴, 이성계는 꼭 내 손으로 처치하리라' 전의를 불태웠다. 싹을 미리 잘라버리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왕성수비대를 동원하여 요소요소에 배치하고 반란군의 진격로로 예상되는 길목은 수레를 징발하여 길을 막았다. 500년 도읍지가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았다.
탐색전을 끝낸 반란군, "궁성으로 진군하라"
우왕에게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을 확인한 반란군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척후병을 보내 궁성수비대의 전력을 정탐한 결과 의외로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성계는 휘하장수 유만수 장군에게 군사를 주어 선의문으로 진격하게 했다. 탐색전이다. 결과는 참담했다. 최영 장군 군대에 격파당하여 많은 군사를 잃고 돌아온 것이다.
이성계는 깊은 장고에 들어갔다. 자신도 무용을 자랑하는 장수이지만 상대 최영도 수많은 전장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백전노장이 아닌가. 노회한 최영에게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호랑이 입속에 들어가는 꼴이다. 어느 장수가 전투에서 패배를 상정하랴 마는 이제부터 벌어지는 싸움은 사나이 한 목숨과 국가의 명운을 건 한판 승부가 아닌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 이성계는 말에 올랐다. 휘하 장졸들이 도열했다. 전동(箭筒)에서 화살을 뽑아든 이성계는 시위를 당겼다. 50보 전방에 있는 작은 소나무 가지를 겨냥했다. 가지가 부러지면 출병할 것이고 빗나가면 때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튕겨 나갔다. 명중이었다. 소나무 가지가 힘없이 부러졌다.
"진군하라!"
활을 돌려 멘 이성계가 환도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힘차게 내려그었다. 허공을 갈랐지만 하늘을 베고 역사를 가르는 순간이다. 이성계의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최영 군대를 무너뜨리려면 단발성 공격보다도 양동작전이 필요했다. 조민수 장군에게 전령을 보냈다. 자신은 황(黃)색기를 앞세우고 숭인문으로 진격 할 테니 조민수 장군은 흑(黑)색기를 앞세우고 선의문으로 동시에 공격하라는 작전명령이었다. 정벌군으로 출정할 때는 좌군 도통사 조민수가 선임 지휘관이었지만 반란군은 이성계가 지휘한 꼴이다.
목숨 걸고 싸웠지만 시가전에서 밀린 왕성 수비대
선의문으로 진격한 조민수 군대가 흑색대기를 앞세우고 영의서교(永義署橋)에 이르렀을 때 최영이 이끄는 왕성 수비대와 맞부딪쳤다. 피 튀기는 격전이 벌어졌다. 평화롭던 고려의 도읍지 개경에 시가전이 벌어진 것이다. 옥쇄를 각오한 수비대에 조민수 군대가 밀렸다. 강력한 반격에 희생자만 늘어날 뿐 조민수 부대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한편, 숭인문으로 진격한 이성계 군대는 황색기를 앞세우고 개경의 또 하나의 거점 남산을 장악하기 위하여 진군했다. 선죽교를 통과하는데 저지하는 군사는 없었다. 남산에 이르렀을 때 최영 휘하의 장수 안소(安沼)가 지휘하는 정예병과 조우했다. 불꽃 튀는 접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수적으로 열세를 면치 못하는 안소의 군대가 물러나기 시작했다.
여세를 몰아 암방사(巖房寺) 북쪽 고개를 점거한 이성계 부대는 큰 소라(大螺)를 한 번 불었다. 조민수 부대와 최영 진영에 동시에 보내는 승리의 신호였다. 이 신호를 깃 점으로 왕성수비대는 패주하기 시작했다. 개경의 양대 출입문과 중요거점 남산을 장악한 반란군은 궁성으로 물밀듯이 밀고 들어갔다.
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21
구파 군벌의 종말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두 장군
개경은 외곽에 용수산과 부흥산을 연결하는 라성(羅城), 자남산과 지네산을 축으로 하는 내성(內城), 그리고 중심가에 황성(皇城), 임금의 처소 궁궐을 품고 있는 궁성(宮城)으로 4중 방어망을 갖춘 요새다. 평화시에는 선의문과 장패문에 백성들의 발길이 붐비지만 전란시에는 동서를 축으로 하는 부흥산 아래 숭인문과 지네산 기슭에 있는 선의문이 군사요충이다.
동대문(숭인문)과 서대문(선의문)을 선점한 반란군은 남산을 장악한 다음 궁성을 공략했다. 병력을 여유롭게 운용하는 반란군의 우월적 전술이다. 수적 열세를 면치 못하는 최영의 궁성수비대는 희생자를 내며 궁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반란군이 왕당군을 추격하는 길목 흥원방에는 왕성수비대 군사들의 시신이 즐비했다.
자남산과 용수산 사이를 흐르는 오천(烏川)에도 붉게 물든 핏물이 흘렀다. 오뉴월 삼복더위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전쟁터로 내준 백성들은 공포감에 떨었다. 산으로 피난가거나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군대가 의로운 군대이고 어떤 부대가 불의의 부대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평화롭던 500년 도읍지가 전쟁터로 변했다. 같은 나라 같은 민족끼리 죽고 죽이는 살육의 피바람이 불었다. 죽이는 자도 왜 죽여야 하는지 몰랐다. 그저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하여 상대를 죽였다. 죽어가는 사람도 무엇 때문에 죽어야 하는지 모르고 죽어갔다. 황색기와 흑색기 그리고 붉은색으로 갈려서 피 터지게 싸웠을 뿐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국정을 돌보지 않고 황음에 빠져있는 우왕과 백성을 수탈하는 권문세족을 몰아내기 위한 회군은 천명이라는 반란군의 대의는 황색 깃발을 치켜든 자의 명분일 뿐, 그 깃발 아래 살육의 칼춤을 추는 군졸들은 위화도에서 무엇 때문에 군사를 돌렸는지? 왜 왕당군을 죽여야 하는지 몰랐다. 이들에게 이념과 명분은 사치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