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리
任城里는 삼향읍소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적산, 전봉산, 오룡산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또한 서쪽으로는 목포시 석현동과 접해 있다. 신기, 대안동, 종월촌, 상용, 과동, 용강 등 6개 마을로 이루어진 이곳은 본래 나주목 삼향면의 지역으로 1895년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이후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후치동, 대안동, 상룡동, 기동, 과동과 용서동, 신기동, 계량동, 용강리의 각 일부를 합하여 임성리라 해서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문헌 중 동국여지승람과 세종실록지리지에 임성부곡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삼향읍사무소와 삼향농협 보건소 우체국 등이 있다.
문헌으로 살펴 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호구총수에 나주목 삼향면 신기촌 분매촌 종월촌 임성촌 창촌 등으로 나온다. 이어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삼향면 신기동 용서동 기동 후치동 과동 대안동 장재동 용강리 등으로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삼향면 임성리 후치동 대안동 상용동 기동 과동 용서동 신기동 임성리 개양동 용강리 장재동 등으로 나온다. 1987년의 자료에는 삼향면 임성리 신기 대안동 상용 과동 후치 로 나온다.
任城이란 지명의 유래는 마을의 지형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동쪽의 오룡산 서쪽의 지족산 남쪽의 부주산 북쪽의 전봉산이 마치 마을을 감싸고 있는 성의 형태를 이루고 있어 성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任城 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文을 찾아 새롭게 터를 잡은 마을 - 임성1리 신기
新基는 임성1리에 속하는 마을로 나주나씨 집성촌이다. 370여년 전 나주나씨 16대손인 羅 성이 터를 잡은 마을이다. 마을 이름도 새로운 터라는 의미의 신기이다. 전해지는 말로는 조선왕조의 국지관이 잡아줬다는 말이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나주목 삼향면 신기촌과 분매동으로 나오고,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이후의 자료에는 전부 무안군 삼향면 신기동으로 나온다. 입향조인 羅 성(1606-1655, 자-여화)은 어모장군과 선전관을 지냈는데 나주 성내에서 세거하다가 1644년 무렵에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곳에 왔다. 처음엔 옆 마을인 종월촌에 들렀는데 그곳에는 食은 있는데 文이 없어 文을 찾아 터를 잡은 곳이 이곳이다. 이 마을에 터를 잡으면서 부자는 나오지 않더라도 문맥은 이어갈 수 있겠다 해서 정착한 것이라 한다.
입향조가 처음 정착했던 뒷등 부근의 금화재에서 당시의 시각으로 보면 마을 앞에는 강이 있고 강 너머에는 문필봉(부주산의 한 지맥)이 자리하고 있어 평범한 사람이 보더라도 좋은 터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산들이 마을을 감싸듯이 나열해 있다. 실지로 주민들 중에는 진사시에 등과한 것을 비롯하여 고시 합격자 등이 끊이지 않아 입향조의 혜안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또한 일제 강점기 때에는 삼향읍 인근에서 이 마을 출신의 학동들이 ‘제일 성적이 좋았다’고 주민들은 자랑한다.
임성1리는 신기 마을을 포함하여 마을 뒤에 있다 해서 부르는 뒷골 마을과 삼향읍사무소 주변의 분매동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지족산의 맥을 이은 뒷재봉이 버티고 있고 앞에는 ‘깃발이’라 불리는 동산이 안산이 되어 바람막이 구실을 하고 있다. 원래 뒷등은 활을 쏘는 사장터였다. 입향조인 나성은 무과에 급제한 무인이었다. 해서 이 마을에 들어와서도 활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안산인 ‘깃발이’는 활터에서 화살이 목표에 적중했을 때 올라가는 깃발의 이름이다.
마을 뒤에 금화재(錦花齋)가 있다. 1920년에 개교한 삼향초등학교의 전신이기도 한 이 재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시멘트 기와의 팔작지붕이다. 건축 당시에는 인근에 널리 알려진 서당으로 학동들이 일로읍 광암리에서도 배우러 왔다. 또한 삼향초등학교가 현재의 자리에서 개교하기 전에 학생들이 2학년까지 이 곳에서 배우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시작하여 광복 이후 완성된 신기저수지는 마을 옆 목포시와 경계 지점에 있는데 둑을 축조할 때 바닥에서 아름드리의 소나무 등이 나와 용처를 궁금해 하기도 하였다. 저수지 밑에는 예전에 배가 드나들 때 이용했던 선창과 주막이 있었다. 마을 앞 들의 논둑에는 선돌로 보이는 돌이 서 있다. 둘레가 160센티미터에 길이가 215센티미터 되는 계선주(繫船柱)이다. 예전에 논 둑 바로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 와 배를 매어두기 위하여 세웠던 돌이다.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펴낸 자료에 의하면 ‘이곳 계선주가 있는 주변의 논에서는 현재에도 많은 조개 껍질과 배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주민은 이 선돌은 계선주가 아니라 마을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비보개념의 선돌이었다는 것이다. 입향조가 마을을 이룰 때 마을의 氣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막아주는 돌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선돌 옆에 샘이 있었다. 이른바 진흥수(眞興水)라 부르는 샘인데 주민들이 즐겨 사용했던 샘이라고 한다. 현재는 없다
초의선사의 흔적이 있어
마을 주변 세 군데에서 고인돌의 흔적이 있었다. 마을 입구 뒷등의 안택거리에는 지금도 고인돌 1기가 있으며 마을 왼쪽에는 덕석 바위라는 커다란 고인돌이 있었다. 또한 마을 앞에는 2기의 고인돌이 있었으나 덕석바위와 함께 오래 전에 없어졌다. 덕석바위는 이 마을 입향조가 후손들을 가르쳤던 곳이기도 하다. 행실이 나쁘거나 부모에게 불효를 저지르는 후손들을 불러서 훈계를 했던 곳이다.
마을에 초의선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草衣禪師(1786-1866)는 조선 후기의 대선사로서 우리나라 다도를 정립한 선승이다. 그런데 선사의 출생지에 대하여는 현재의 삼향읍의 왕산이라 하기도 하고 목포시 석현동의 신지 마을이라 하는 등 여러 가지 이견이 지금까지도 있다. 이번 탐방에서 선사의 탄생지를 추정할 수 있는 유력한 증언을 채록했다.
초의선사가 출가한 계기는 운흥사 스님과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선사가 어렸을 때 계곡 주변에서 놀다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마침 계곡을 지나가는 나주 운흥사 승려의 구함을 받았는데 그 스님의 권유로 출가하게 되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마을 주민들은 선사가 어렸을 때 마을 옆으로 흐르고 있는 개천에 빠진 사실을 선대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마을 뒤 탑골에서 흐르는 물과 용수재의 용수골에서 흐르는 물이 만나 커다란 개울을 형성하여 새뚝이란 곳으로 흐르는데 선사는 이곳에서 놀다가 물에 빠진 것이다. 이 개울은 여름철 비가 온 뒤에는 제법 물의 양이 많다고 한다. 용수재는 이 마을에서 유교리 석교마을로 넘어갈 때 넘는 고개이다.
새뚝을 경계로 목포시 석현동의 신지 마을이 있다. 해서 이 신지마을은 초의선사의 ‘귀고향’에 나오는 새터 마을로 추정되기도 한다. 특히 신지 마을 앞에 초의선사의 관향인 흥성장씨 비석이 있었다고 주민들이 주장하기도 한다. 탑골이란 지명이 있다. 뒷골 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로서 중샘도 있고 탑도 있었던 사찰이다. 지금도 주변에서 기와 등 여러 유물이 발견되기도 한다. 탑골 앞의 산은 방구등이라 불린다.
마을회관 앞에 회관 건립 표지석과 들독이 있다. 들독은 단 위에 정성스레 놓여져 있는데 이곳에 있게 된 사연이 있다. 오래 전 주민들 중 한 부인이 밭 가운데 있는 이 돌을 보고 아이들의 체력단련용으로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해 치마로 싸 마을로 가져온 것이다. 이것을 주민들이 아이들의 건강을 지켜주는 기구로 여겨 단을 쌓아 놓아 둔 것이다. 마을에는 임성그리스도교회가 있으며 마을회관 옆에는 2009년에 세운 3기의 효열비가 있다. 즉 효열부진주강씨, 효자나종윤, 효열부나주정씨 비이다.
도청이 왔지만 개발에서 소외되고 있는 마을 - 임성2리 대안동
대안동 마을은 아랫마을 윗마을로 이뤄졌으며 아랫마을은 1980년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들어선 마을이다. 대체로 아랫마을은 직장인들이 많으며 윗마을은 원주민으로 농사짓는 사람이 많다. 삼향읍 소재지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구역명으로는 삼향읍 임성2리 대안동이다.
대안동이란 지명은 조선시대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나오지 않으며 1912년의 자료부터 나온다. 지명의 유래에 대하여 마을유래지에서는 ‘마을 이름의 연원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편안한 동네라는 의미에서 ‘大安洞’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은 틀린 지명이라고 한다. 이 마을의 원래 이름은 ‘마을의 형국이 기러기와 같다 해서 기러기 雁(또는 鴈)을 써서 大雁洞이라 했으나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서 현재의 이름인 편안할 安을 써서 大安洞이라 했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 지역은 일본인들에 의해서 마을 이름이 바뀌어진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무안읍 매곡리의 매곡, 일로읍 광암리의 광암, 청계면 구로리의 구로 등 일본인들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바뀌어진 지명이 많이 있다.
이 마을의 입향조로는 마을유래지에는 1883년 무렵 들어온 나주 오씨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훨씬 이전에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주민들은 처음에 나주 오씨가 아니고 동복오씨가 들어왔으며 뒤이어 김해김씨 그리고 남원양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남원 양씨의 입향조는 양춘수(자-대곤. 1800-1855)이다. 공은 함평 고막원에서 살다가 옥암으로 해서 이 마을에 들어왔다. 그렇다고 보면 이 마을의 형성 시기는 1700년대나 또는 1800년대 중반에 해당된다. 이처럼 마을의 역사는 마을유래지의 기록보다 훨씬 앞선다고 볼 수 있다. 현재는 김해김씨, 남원양씨 등이 주축을 이루며 살고 있다.
마을의 地形이 소쿠리 형이다. 대체로 이런 형국을 풍수 용어로 臥牛形이라 하는데, 이런 지형에서는 주민들이 오랫동안 머물지 못하고 큰 재물을 얻지 못하는 형국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마을로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그런대로 살 수 있으나 큰 부자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소쿠리는 차면 넘치고 비워야 하기 때문이다.
마을이 국사봉의 맥을 이은 전봉산을 진산으로 하고 오룡산과 부주산 그리고 지적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 예전에는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城이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지명총람을 보면 임성리에 ‘성터’라는 지명이 나온다. 예전에 성이 있어서 전해 내려오는 이름이라 한다. 또한 임성리의 한자명이 任城里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무너미재를 잘라 철도를 놓으면서 마을의 분위기는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철도를 놀 때 무너미재를 절개하지 않고 굴을 뚫어서 놓기를 희망했으나 일본인들은 기술력의 부족과 인재의 출현을 막기 위해 혈맥을 자른다는 복합적인 의미로 절개를 했던 것이다.
2000년대 초 전남 도청이 마을 너머 남악리로 들어오면서 이 마을 주민들은 개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오랫동안 닫혀있었던 마을이 도청 이전을 계기로 역세권개발의 형식을 빌어 발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도청 이전이 10년이 넘은 현재는 실망과 좌절만 남아있었다. 발전은커녕 규제만 늘었다는 것이다. 마을 발전의 가장 기본적인 도로망이 확보돼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도청으로 가는 길이 편도 1차선을 조금 넓힌 것뿐이었다. 주민들이 줄기차게 요구했던 목포법원에서 삼향농협까지 4차선의 도로 개설은 수년째 도청 실무자의 서랍에서 잠자고 있기 때문이다.
가뭄이 들면 인심이 사나워져
지형적인 특성으로 마을에는 농지가 별로 없다. 찾아보면 811번 도로를 따라 마을 앞에 조금 있는데 경지정리도 되지 않아 기계농업이 어려운 소규모 농지들이다. 주민들은 그래도 그 농지나마 경작을 하여 소득을 올리고 있는데 아쉽게도 모두 천수답이다. 농업용수로 사용할 수 있는 방죽이나 저수지가 없어 하늘만 쳐다보는 형국이다. 해서 평소에는 오순도순 화합과 협조가 잘 되던 주민들도 모내기철이 되면 신경을 곤두세운다. 특히 비가 내리지 않는 해에는 주민들의 인심이 말할 수 없이 각박해진다. 또한 개발이 제한된 농림지역으로 묶여져 있기 때문에 주민들의 불만이 많다.
원래 삼향읍은 나주목 관할로 유교리의 群山部曲, 맥포리의 極浦部曲, 임성리의 任城部曲이 합쳐서 이루어진 마을이다. 여기서 部曲은 천민 집단이 거주하는 곳이 아니라 신라 때부터 고려 말(末)까지 있었던 특수한 말단 지방 행정구역을 말한다. 또한 삼국 통일 뒤 지방 행정구역을 정비할 때 인구가 적어서 현에 미치지 못한 지역을 '향' 또는 '부곡'이라 하여 현에 딸리게 했다고 했는데, 이를 특수 천민 집단으로 단정하기도 했으나 씨족이나 부족의 집단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봤을 때 城과 관련된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해서 주민들에게 물어보았으나 확인할 길이 없었다.
1차 조사 때 마을 뒤에는 두 군데에 10여기의 지석묘가 놓여 있었다. 당시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고인돌들이 있었으나 집을 지을 때나 길을 보수할 때 갖다 사용해 현재는 이것밖에 남아있지 않았다고 했다. 실지로 고인돌 주변에는 많은 돌들이 깨져서 널려 있었다. 하지만 이번 조사 때는 남아있던 10여기의 고인돌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유를 물어보니까 도로를 개설하면서 또는 필요에 의해서 전부 가져가 버렸다는 것이다.
마을에는 예전에 洞契가 잘 이루어져 왔으나 언제부터인가 契冊을 잃어버린 뒤에는 흐지부지 지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전봉산 아래 전배라는 곳에 요양원이 들어서고 있다. 전봉산 아래에 있는 오씨 집에서는 사법 행정 양과를 패스한 아들과 서울대학교의과대학 박사인 아들을 배출하였다. 임성제일교회가 있다.
통발망을 만들어 소득을 올리고 있는 마을 - 임성3리 종월촌
종월촌은 임성3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종월촌 매자리 동산 등으로 이루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후치라 불렸으나 주민들이 원래의 이름이었던 종월촌으로 바꿨다. 마을 이름의 변천과정을 보면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나주목 삼향면 終月村으로 나온다. 이후 1912년에 무안군 삼향면 후치로, 1917년에는 무안군 삼향면 임성리 후치동으로 나온다. 1987년에도 임성리 後峙로 나온다.
주민들은 마을 이름을 鍾月村으로 알고 있었지만 문헌에는 終月村으로 나온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終月村 또는 鍾月村으로 사용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단지 마을의 형국이 초생달 형국이어서 추정컨대 마을이름에 ‘月’자가 들어가지 않았나 추정할 수 있다. 또한 ‘終’의 의미가 마땅치 않아 ‘鐘’으로 바꾸지 않았는가 여겨진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後峙라 했다. 마을 뒤에 있었던 뒷재를 한자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마을유래지에는 ‘처음엔 鍾月村이라 불렀고 마을터는 종터라고 했다. 일제강점기 때 마을이 폐촌이 되었는데 후일 폐촌의 이유를 마을 이름인 終月村 때문에 그랬다 여기고 後峙로 바꿨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에 종터라고 부르는 곳에는 천주교 임성리 공소가 있기도 했다. 현재는 상용마을로 옮겼으나 당시에는 지명과 어울리는 자리라고 여겼다. 현재 그 자리에는 두 그루의 팽나무가 자라고 있다. 지금은 개발로 인해서 뒷산이 없어졌지만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삼향읍 파출소 뒤에서부터 전봉산까지 뒷재라 부르는 능선이 마을을 둥그렇게 감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뿐만 아니라 뒷재봉에선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 마을 입향조는 밀양박씨 朴貴男(자-景休, 호-南隱, 1576 - ?)이다, 공은 경북 풍기 대동에서 세거하다 임진왜란을 피하여 이 마을에 들어왔다. 자료에 따르면 공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자질을 갖추었으며 학문에 몰두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또한 부귀나 명예를 추구하지도 않았다. 마을유래지에는 1780년에 만들어진 동계가 있었다고 하나 주민들은 모르고 있었다.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면사무소와 주재소가 있어 삼향면의 중심지역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면사무소를 확장할 때 부지를 확보하지 못해 현재의 자리인 분매동으로 옮겼다. 또한 옆 마을인 남악리에 도청이 들어서면서 역세권 개발의 기대에 차 기도 했으나 도로망 개설과 정책적인 뒷받침이 되지 않아 마을 발전이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
마을에 두 개의 바위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마을 안에 있는데 팽나무와 함께 있었다. 예전에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 닻줄을 맸던 계선주 역할을 했던 바위다. 바다가 막히고 나서는 마을의 중심나무로 마을의 안녕과 액운을 막기 위한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다른 마을의 사람까지 찾아와서 나무와 바위 앞에 제물을 진설하고 굿과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땅 주인이 베어버렸다.
또 하나는 811번 삼일로에서 들어오는 입구에 서 있었다. 바위의 형상이 두꺼비 모양이어서 두꺼비 바위라고 했다. 두꺼비 바위는 맞은편 박조시라 부르는 곳의 사두혈과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즉 뱀이 두꺼비를 잡기 위해서 머리를 쳐들고 있는 모습이다. 그 혈자리에 나주나씨들이 묘를 썼는데 상석과 망주석 등 석물을 해 뱀의 머리를 누르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해서 주민들은 명당자리인데 석물을 해서 발복을 누르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실지로 나주나씨 집안이 이곳에 무덤을 쓴 이후부터 안 좋은 현상들이 많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 두꺼비 바위는 길이 확장되면서 사라졌다.
주민들이 의무적으로 심었던 비보 방풍림
마을회관 옆에 팽나무가 있다. 주민들이 소중하게 가꾸고 있는데 한때는 이곳에 금줄을 치고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또한 들독도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마을 앞 새뚝이라 부르는 곳에는 수십 그루의 소나무 방풍림이 늘어서 있다. 이것은 마을의 지리적 형국에서 오는 약점을 극복하고자 1920년대부터 조성한 마을 주민들의 성과물이다.
즉 마을 앞 새뚝 너머에 박조시라 부르는 사두혈의 지형이 있다. 이 형국이 주민들에게 그대로 노출되면 남자들은 일찍 죽고 과부만 남을 뿐 아니라 마을에 재물이 모이지 않고 피폐해져 간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왔다. 해서 주민들은 의무적으로 가구당 1그루 이상씩 소나무를 심기로 했다. 예전에는 새뚝을 따라서 아름드리의 소나무들이 죽 심어져 있었는데 현재는 군데군데 나무들이 죽고 얼마 남아있지 않다. 특히 주민들은 뱀 형국의 지형을 없애고자 두 군데나 길을 내기도 했다. 일명 ‘다리방거리’ 또는 ‘새뚝다리’로 부르는 이 다리는 상여가 지나갈 때 반드시 넘어야 하는 다리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이 마을도 주민들이 피해를 보았다. 마을에 좌익운동을 했던 사람이 있어 그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또한 일부 젊은이들은 전쟁 중에 월북한 사람들도 있었다. 마을에 김광수 일가의 천석꾼이 살고 있었다. 일로에서 대장간을 하다 이 마을에 들어와서 부자가 된 사람인데 이 집에서 모내기나 벼베기 등 농사일을 할 때면 주변의 5개 마을 주민까지 일손을 놓고 이 집의 일을 거들었다. 왜냐하면 이때만큼은 푸짐하게 음식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웬만한 가정에서는 모든 식구들이 나서서 함께 했던 것이다. 하지만 주인이 죽고 나서는 그 많던 재산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현재는 집터만 남아있다.
농한기와 농번기를 가리지 않고 주민들은 통발망 만들기에 겨를이 없다. 마을에 전답이 별로 없어 부업으로 시작했던 것이 지금은 본업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통발망 만들기도 국가 안보에 민감한 사항이 발생하면 그에 영향을 받는다. 실지로 몇 년 전에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이 터지면서 한동안 일감이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런 기간이 오래가지 않아 지금은 활발히 부업활동을 하고 있다.
마을회관 뒤에 큰샘이라는 샘이 있다. 수량이 많고 물맛이 좋아 예전에는 삼향막걸리의 原水가 되기도 했다. 당시에는 목포시의 일부 사람들이 이 물을 길어다 식수로 사용하기도 했다.
선삼들이라는 지명이 있다. 큰길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주변을 말하는데 예전에 그곳에 섬처럼 몇 가구가 살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창거리 걸치기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공공기관으로는 삼향농협과 왕국회관 그리고 화이트빌라가 들어서 있다.
오룡산 주변의 마을 중에서 가장 크고 살기 좋은 마을 - 임성4리 상용
상용은 임성4리에 속한 마을로 삼향읍사무소에서 도청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이 마을은 화살 촉을 만들었던 기술자들이 살았던 마을이다. 해서 조선시대 마을 이름이 창촌이었다. 지금도 마을 주변 곳곳에 시누대가 자라고 있을 뿐 아니라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예전에는 오룡산 군데군데에 화살촉을 만들었던 시설로 짐작되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김해김씨 金明元이다. 그는 창지기로 화살재료인 대나무가 무성한 이 마을에 터를 잡았다고 하나 김해김씨나 주민들에게선 확인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김해김씨 족보에는 金明元이 나오나 이 마을과 관련된 김씨임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문헌으로 마을 이름의 변화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나주목 삼향면 倉村으로 나온다. 이후 1912년 1917년의 자료부터는 무안군 삼향면 上龍으로 쓰이고 있다. 上龍이란 지명은 이 마을의 지형과 관련이 있다.
이 마을은 국사봉의 맥을 이은 오룡산을 주산으로 가맷봉을 종산으로 하고 있으며 쑥갓재를 지나 흘러내린 맥이 마을을 감싸고 뻗어 내리다 마을 앞에 있는 동산에서 멈췄다. 마치 마을이 용의 중심부에 위치한 것처럼 보인다. 또한 오룡산을 감싸고 있는 마을 중에서 龍자가 붙은 마을(회룡 오룡 용계 용포 상용. 용강은 상용에 포함되었던 마을)이 다섯 곳이 있는데 그 중에서 이 마을이 가장 크고 좋은 마을이라는 의미로 상용이라 한 것이다. 주민들은 일제강점기 때 동산의 기슭에 살고 있던 윤참판에 의해서 상용이라 붙여진 이름으로 알고 있다.
상용 마을은 남악리에 도청이 들어서면서 고향을 잃은 이주민들이 많이 들어와 살고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대단히 가난했던 마을이었다. 삼향읍에서도 가장 가난한 마을로 인식 될 정도이다. 마을 주변에 전답이 없어 오랫동안 남의 집에 품을 팔거나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팔아 연명해왔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이러한 가난이 마을 뒤에 저수지가 들어서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마을의 지세가 물이 고이지 않고 흘러내리는 형세이기 때문에 富가 모이지 않는다고 믿었던 주민들은 1960년대 旱害 때 마을 뒤에 저수지를 막고 마을 입구에 방앗간이 들어서면서 지세가 안정돼 마을에 재물이 모이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민들에게 富를 안겨준 저수지는 현재 관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농지가 없어 물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오룡산을 뚫고 고속철이 지나가면서 물길이 변해 물이 흐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지만 한 마을에 웃당산과 아랫당산이 있을 정도로 한때는 당산제를 크게 지냈었다. 웃당산은 마을 회관 주변인데 그곳에는 은행나무, 구수나무, 버드나무, 참나무, 팽나무 등 5그루의 당목이 있었다. 당산제는 다섯 그루 나무 중 은행나무 아래서 지낸 것이다. 은행나무가 없어지면서 당산제도 지내지 않게 되었는데 현재는 팽나무 한 그루만 남아있다. 팽나무의 수령은 200여년이 넘을 정도의 연륜을 가지고 있으며 둘레는 4미터 80이 넘는다.
아랫당산은 현재 마을 입구에 있는 은행나무를 말한데 도청으로의 길이 확장되어 나가면서 훼손돼 볼품이 없다. 아랫당산의 은행나무는 예전에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 배를 매었던 계선주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동학접주가 살았다
마을에 동학접주가 살았다고 한다. 자세한 활동사항 등은 모르지만 주민들 상당수가 동학군으로 활동했던 김병수의 아버지 김내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동학 접주로 활동하면서 죽창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더 이상의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삼향에서는 처음으로 동학참여자를 확인하였다.
남아있는 지명이 많다. 우선 마을 뒤쪽에 있는 골짜기로 사두혈의 형국인 구렁목이 있으며 옆에 구렁목샘이 있다. 또한 저수지 옆에 있는 골짜기를 삼밧골이라 하며 소반등이 있다. 마을 뒤 우뚝 선 봉우리를 가맷봉이라 하며 가맷봉 너머에 방구등이라는 넓은 터가 있다. 이곳에서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둥둥 북소리가 났다고도 한다.
주민들이 어렵게 살았던 시절에 나무를 지고 내려오다 쉬었던 땅고당이란 쉼터가 있었으며 그곳에 있는 벼락바위는 무당들이 기도처로 삼기도 하는 신령스러운 곳이기도 하다. 또한 마을의 능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용강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쑥갓재가 있으며 주민들은 이 고개를 성스럽게 여긴다. 해서 잡스러운 일체의 것은 넘어 다니지 못하게 했다. 일제강점기 때 삼향면장을 지냈던 이가 이곳에 묘를 썼다가 뒤끝이 안 좋기도 했다.
주민들이 대부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마을에는 크게 확장 신축한 영산교회와 종월촌에서 옮겨 온 천주교 임성리 공소가 있었다. 현재도 주민들은 남악리의 도청 이전으로 땅값이 오른 외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이 가난하고 검소하게 생활하고 있다. 종월촌 마을과 같이 노동력이 있는 집은 통발망을 만들고 있으며 여기서 들어오는 수입이 가정경제의 주축이 되고 있다.
마을 입구에 2007년에 세운 표병환 공적비가 있다.
주민들의 심성이 곱고 착한 마을 - 임성5리 과동 마을
과동은 새터와 함께 임성5리에 속하는 마을이다. 새터는 과동저수지 위에 새롭게 형성되는 마을로 해년마다 새로운 집들이 들어서고 있다. 예전에는 마을 주변의 산에 약초가 많이 자라고 있으며 과수원 등 과일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해서 마을을 구성하고 있던 대표적인 성씨들인 남원양씨, 무안박씨, 김해김씨 등 세 성씨가 협의하여 마을 이름을 과실촌을 나타내는 ‘果洞’이라 명명하였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 감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이후부터 과동이라 나온다.
주민들의 말을 통해 마을이 형성된 시기를 보면 ‘1800년대 초반에 남원양씨가 먼저 들어와 자리를 잡은 뒤에 무안박씨와 김해김씨들이 들어왔다’고 한다. 주민들도 마을의 형성이 오래되지는 않았을 것이라 보고 있다. 마을유래지는 “400년 전인 남원양씨인 양경환, 밀양박씨, 그리고 김해김씨인 김경현이 함께 정착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다. 현재 남원양씨는 마을에 살지 않고 무안박씨와 김해김씨를 포함하여 복합성씨들이 살고 있다.
마을의 분위기는 차분 했다. 한때는 길 건너 남악리에 도청이 이전해 오면서 임성역을 중심으로 한 역세권 개발의 발전 가능성에 들떠 있기도 하였으나 정책적으로 어렵다는 당국자의 말을 듣고는 안타까움만 안고 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이 남악신도시 개발을 위한 기반사업에 이용될 때 주민들은 10여년이 넘게 소음과 먼지에 시달렸지만 곧 마을의 발전이 올 것이란 희망을 가지고 살았었다. 하지만 마을 발전을 위한 최소한의 기반시설인 도로망 개설과 확충이 이뤄지지 않아 주민들의 실망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예전엔 마을에 농지가 없고 주변에 나무가 많아서 주민들이 나무를 해다가 목포에 팔아서 식량을 해결할 정도로 가난했다. 나무만 아니라 가마니 짜기 새끼고기 등을 해서 기정경제를 이어갔다. 당시에는 하루 종일 일해서 받은 품삯이 쌀도 아닌 보리 1되였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 품삯이 쌀 두 가마니를 받으니 격세지감이 든다. 당시 임성리의 주민들은 대부분 가난하게 살았다.
과동 마을 주민들의 심성은 곱고 착했다. 마을도 깊은 골짜기에 있어서 한국전쟁 때는 목포시의 주민들이 이 마을로 피난을 올 정도였으며 외지 사람들이 들어와도 주민들의 텃새가 없어 적응하기도 쉬웠다. 당시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난 왔던지 한 집이 5-6가구를 수용해야 했었다. 그래도 불만이나 불평이 없이 무사히 환난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마을에서 한약방을 운영해 주위에 명의로 이름을 날린 한의사가 있었다. 현재 ‘무안 박병원’을 운영하는 사람의 先代인데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의술을 베풀었다고 한다. 새터 마을은 과동 저수지 위에 있다. 예전에 그곳에는 감나무와 밤나무 등이 심어져 있던 과수원이 있었던 곳이다.
동계책이 있다
주민들의 자랑도 많았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때 묻지 않았다는 것을 제일 먼저 자랑으로 꼽았다. 또한 마을길이 없어 어려움을 겪을 때 주민들 스스로 나서 세대 당 모금을 해 상용에서 들어오는 길을 스스로 만들기도 하였다. 비록 길이 논길 따라 밭길 따라 곡선길이 되었어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주민들 스스로 해냈다는 것에 강한 긍지를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객지에 있는 젊은 향우들이 매월 일정액을 걷어 명절 때 주민 위안잔치를 벌이기도 하고 지역발전기금으로 사용하기도하는 것에도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마을에 외지인들이 들어오면서 화목했던 지난날들의 모습을 발견하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이 마을 뿐 아니라 어느 마을이나 겪는 현상인데 주민들간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은 기본이고 매년 가는 관광여행도 주민들의 동의가 이뤄지지 않아 힘들다는 마을 지도자의 하소연들이다.
마을이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주민들의 단합과 화합이 잘 되어 오래전부터 동계를 해왔다. 동계는 매년 12월 말에 치르는데 1958년부터 작성해 온 동계책이 지금도 남아 있다. 마을에서 대안동으로 넘어가는 잔등에 선돌처럼 생긴 돌과 고인돌이 많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고인돌만 남아있다. 또한 마을 앞에 계선주(배를 매기 위해 세워놓은 돌)가 선돌처럼 우뚝 서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과동 저수지 위를 떡작골로 부르고, 마을에서 삼향초등학교로 넘어가는 등성이를 우슬재라 한다. 불당골로 부르는 곳은 절터가 있었던 자리이고 지금도 기와조각이 나오고 있으며 앞에는 녹차나무가 많이 있다. 또한 채전골, 추재, 작은골, 가재밭골, 큰골, 밤나무골, 서당골, 무등뫼 등이 있다.
불당골 부근에 굴이 하나 있는데 그 굴 아래를 주민들은 ‘굴밑에’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아녀자들이 와서 치성을 드리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 와 지금도 아녀자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류상 영세민이 없는 마을 - 임성6리 용강
任城里는 삼향읍소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적산, 전봉산, 오룡산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또한 서쪽으로는 목포시 석현동과 접해 있다. 신기, 대안동, 종월촌, 상용, 과동, 용강 등 6개 마을로 이루어진 이곳은 본래 나주목 삼향면의 지역으로 1895년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이후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후치동, 대안동, 상룡동, 기동, 과동과 용서동, 신기동, 계량동, 용강리의 각 일부를 합하여 임성리라 해서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문헌 중 동국여지승람과 세종실록지리지에 임성부곡이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향읍사무소와 삼향농협 등이 있다.
용강은 임성6리에 속하는 마을로 2008년 1월에 임성4리인 상용 마을에서 분리되었다. 자료를 통해서 지명의 변천을 보면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이후 1912년의 자료에 무안군 삼향면 龍岡里로, 1917년의 자료엔 무안군 삼향면 임성리 용강으로 나오고 근래의 자료인 1987년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지명의 유래에 대해선 모르고 있으나 현재 주민들은 龍江이라 표기하고 있다. 경주김씨 족보에는 龍洞으로 나온다.
영산강 하류에 위치한 삼향면은 지명에 ‘ - 龍 ’자 붙은 마을이 많이 있다. 1917년의 자료인 조선면리동일람을 보면 남악리의 오룡동, 회룡동, 용포리의 용계리, 용포동, 맥포리는 없고 임성리의 상룡동 용서동 용강리가 나오며 유교리의 청룡동 왕산리에는 없으며 지산리에 복룡동으로 9개 마을이나 된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경주김씨 김치영(자-명기, ? - 1752)이다. 삼향면에서는 경주김씨가 이 마을에만 거주하고 있지만 경주김씨 족보를 보면 여러 마을에서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와동 종월촌 등 삼향면 군데군데에 경주김씨의 선산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문중의 관리 소홀로 기록만 남아 있을 뿐 실지 소유는 없다고 한다.
마을의 좌향은 북서 쪽이며 오룡산을 뒤로 하고 앞에는 전봉산을 길 건너에 두고 있다. 마을을 중심으로 오룡산의 정상에서 가맷봉으로 흘러내린 맥이 굴레고랑으로 이어져 청용을 형성하고 있으며 오른쪽의 백호는 무너미재로 흘러내리며 마을의 훌륭한 바람막이 구실을 하고 있다. 마을 앞에는 마늘 가공공장, 김 가공공장 2개, 제재소 등 4개의 생산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서류상 영세민이 없는 마을
예전의 오룡산은 아름드리의 소나무가 많이 있었으나 병충해의 피해로 다 베어버리고 지금은 잡목과 시누대가 우거져 있다. 오룡산 전체에 걸쳐 자라고 있는 시누대는 조선시대 이 일대가 화살촉을 만들었던 곳이었으며 왜 상용 마을이 倉村으로 불렸는지를 설명해준다. 실지로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예전에는 오룡산 군데군데에 화살촉을 만들었던 시설로 짐작되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17세대의 작은 마을이지만 임성리 1번지가 시작되는 곳으로 마을 앞길은 조선시대에 목포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이었으며 일제강점기 때부터 얼마 전까지는 호남선 철도가 지나는 길이었다. 이제는 마을의 발전을 가로막았던 철도가 없어지고 811번 지방도로 확장공사로 큰 길이 나 있어 이 길의 개통으로 주민들은 마을의 변화를 기대하고 있다. 주민들은 당시 한양 가는 길인 마을 앞길을 한질가(큰길 가)라 불렀다.
마을이 한양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무너미재에는 주막이 있었다. 이 주막에는 일로 함평으로 가는 길손이나 한양 가는 길손들이 쉬어가는 곳이었다. 마을에는 장판거리 샘이라는 옹달샘이 있었는데 물의 수량이 얼마나 많던지 이 물을 이용하여 마을 앞의 논농사를 전부 지었다. 현재는 마을 뒤로 호남 고속 철로의 지하로가 나면서 수맥이 끊겨 물이 말라 버렸다. 장판거리라는 지명은 샘 옆에 장판만한 넓적한 돌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마을 지적도를 보면 예전에는 오룡산 8부 능선까지 집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생각할 수도 없지만 예전에는 마을 앞까지 물이 들어서 농사 지을 터가 조금만 있어도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오룡산 정상 주변에는 벼락바위가 있다. 주변을 땅고당이라고도 하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바위의 영험함이 널리 알려져 무당들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기도를 드렸던 곳이다. 지금은 잡목이 우거져 찾아 갈 수도 없다. 또한 마을 뒤 중턱에서 오룡산 정상 부근까지 100여미터에 걸쳐서 1미터 높이의 석축이 있었다. 성도 아니고 그렇다고 방어시설도 아닌 정체불명의 시설로 80년대 중반까지 존재했으나 현재는 없다.
이 마을은 서류상 영세민이 없는 마을이다. 예전에는 무척이나 가난했던 마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민들이 쉬는 날이 없을 정도로 검소하고 근면해서 주변의 다른 마을에 비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마을이 되었다. 마을의 지리적인 영향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늦게 작물이 익어간다. 응달지역이기 때문이다.
남아있는 지명이 있다. 마을 뒤쪽에 있는 골짜기로 사두혈의 형국인 구렁목이 있으며 옆에 구렁목샘이 있다. 또한 상용 마을 저수지 옆에 있는 골짜기를 삼밧골이라 하며 소반등이 있다. 또한 마을 뒤 우뚝 선 중봉우리를 가맷봉이라 하고 가맷봉 넘어에 방구등이라는 넓은 터가 있다. 이곳에서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둥둥 북소리가 났다고도 한다. 또한 마을의 능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상용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게동굴잔등(상용에서는 쑥갓재라고 부른다)이 있다. 모텔 앞 삼거리를 싯돌밑에 라고 했다. 지형이 마치 싯돌 모양이라 붙여진 이름인데 초분골 역할도 했다. 마을에 장판거리샘과 들샘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