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의 사나이 2 "남북한 정치가들을 모조리 쓸어 버리는 겁니다. 농사꾼은 농사 짓고 어부는 고기 잡고 화가는 그림 그리고, 그렇게 살면 되는 거예요." 히데코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손으로 턱을 받쳐 들었다. 두 살이나 아래로 보이는 이 청년은 정말 귀여운 데가 있었다. '순진하긴.' "그럼 정치는 누가 하죠? 외국과의 관계는 어떡하구요." "그건 우리같이 깨끗한 젊은이들이 해야 합니다. 세금 같은 건 안 받아요. 우리도 생산에 참여하면서 정치를 할 거니까요." "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하구말구요. 전세계 정치가들이 협잡하지 않고 일해서 먹을 것 벌어 가며 정치하면 될 거 아닙니까. 바로 우리 젊은이가 그런 일을 해야 합니다." "난 북한 때문에 어려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남한에서는 지금 정부에 의해 쫓겨났구요. 하지만 난 갑니다. 가서 할 일이 있다구요." 히데코에게는 이 엉터리 같은 청년이, 무정부주의자라도 좋고 공산주의자라도 좋았다. 혈압을 올리며 열변을 토하는 이 청년을 바라보며 그녀는 갑자기 성욕을 느끼고 있었다. "정보 하나 줄까요? 물론 대가가 있어야겠지요?" "정보?" "네. 당신이 들으면 깜짝 놀랄 정보!" 히데코는 지난 밤 브라운의 수첩에서 읽은 그 메모를 기억에 떠 올렸다. "내게 필요한 정보라면 대가를 지불하죠, 무슨 정보요?" "먼저 대가를" 그녀가 또 웃었다. 히데코는 이 터무니없는 사내를 바라보며 참으로 순진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말 공산주의자도 자본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녀가 보기에 백수웅이라는 이 젊은 애송이는 틀림없이 낭만주의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정계의 거물, 대사관의 관료, 재계의 실력자들, 이런 사람들에게 몸뚱이를 내맡겨 돈을 뜯어 내고, 때로는 정보까지 훔쳐 팔아왔다. 하지만 한 녀석에게도 애정에 이끌려 보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그들은 한낱 거래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좀 남다른 데가 있었다. 도쿄 거리에서는 정말 보기 드문 순진파였고 정열적인 데가 있었다. 두 살이나 아래라는 것도 그녀에게는 큰 매력이었다. 브라운의 수첩에서 나온 메모가 어쩌면 이 건달 같은 녀석에게는 꼭 필요한 정보가 될지도 모른다. "어떤 대가를 원하시오?" 사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히데코는 그의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직선적으로 대답했다. "뭐 간단한 거예요." "분명히 말하지만, 난 요조음 돈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돈 같은 건 필요 없어요." 히데코는 백수웅을 집으로 유도해 왔다. 물론 가정부는 신주쿠로 영화 구경 보내는 당연한 순서를 밟았다. 히데코의 요구는 몇 시간의 엔조이였다. 두 사람은 침실의 커튼을 닫고 침대 다리가 부러져라 그 짓을 해댔다. 백수웅은 아주 정열적이었다. 히데코가 숨넘어가는 비명을 질러도, 그는 그 짓거리를 멈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한번 집념을 갖기 시작하면 거기에만 몰두하는 괴팍한 성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뜨거운 정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 히데코가 얇은 시트로 몸을 가리며 백수웅 옆으로 다가가 그의 품에 안겼다. 너무나 행복했던 한순간의 쾌락이었다. 같은 민족이라는 것은 더욱 피를 뜨겁게 만드는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누운 채 사내의 등을 어루만졌다. 감촉이 이상했다. "이게 뭐죠?" "상처!" "상처? 이렇게 많이?" 그는 웃었다. 끝내 그 많은 상처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때서야 그는 히데코가 준다던 정보가 생각났다. "나한테 뭐 줄 거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호호 , 별것 아니에요." 그녀는 기억에 남은 대로 말해 주었다. 평양의 제2 부수상 박성철과 서울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서울에서 극비 회담을 여는데, 5월 하순이나 6월 초가 될 것 같다는 것이다. 누워 있던 백수웅이 자지러질 듯 놀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정말이오?" "모르죠. 하지만 정보는 거의 확실할 거예요. 미국 대사관 녀석에게서 얻어 낸 것이니까 왜, 군침이 돌아요?" 그러나 백수웅은 실망한 얼굴로 다시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만일 다음 날 히데코가 목뼈가 부러진 시채로 발견되지 않았다면, 백수웅은 끝까지 농담으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히데코의 죽음은 백수웅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그가 히데코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했을 때, 그녀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녀 자신도 처음에는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고 했다. 그리고 대사관의 그 노란털 녀석을 통해 더 알아보겠다고 한 것이다. 백수웅이 알고 있는 것은 고작, 박성철과 이후락이 서울의 모 지점에서 5월 말이나 6월 초 극비의 회담을 열기로 했다는 것뿐이다. 노범호란 이름도 떠올랐지만, 그는 모든 의전 절차의 총책일 뿐이라는 것이 정보의 전부였다. 아무튼, 더 이상의 정보를 얻지 못한 채 히데코는 죽어 버렸고, 그로부터 이틀 동안 도쿄 번화가의 빠찡꼬가 다섯 군데나 습격을 당해 돈을 털렸다. 백수웅은 꿈을 꾸고 있었다. 그 꿈은, 도쿄서 있었던 그녀와의 마지막 정사 장면 같았다. 두 사람은 알몸으로 엉겨붙어 맹수처럼 서로를 탐닉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극적인 손놀림과 교묘한 허리운동으로 백수웅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갑자기 그녀가 눈을 허옇게 뒤집어쓰고 늘어졌다. 깜짝 놀라 고함을 질렸다. "으 , 으 으 ". 눈을 떴다. 방 안은 아직도 캄캄했다. 낮인지 밤인지 도무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오늘 기필코 어디가서 시계부터 훔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마도에서 돈을 주고 빌린 4톤짜리 어선에 오를 때 방수 시계로 바꿔 차야 한다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 , 이런 델 다 오시고 , 웬일이에요? 별꼴이네, 한번 해 줄까?" 여인들의 떠드는 소리가 방 안까지 들려 왔다. 백수웅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몸에 힘이 솟구치고 있었다. 체력의 회복 강도로 보아 10시간 이상 충분히 잠을 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지금은 저녁 시간이다. 그는 문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아니 , 저 녀석들이 " 정복 순경 하나와 곤봉을 옆구리에 찬 방범대원이 손에 서류 같은 것을 들고 있고, 새벽에 자신을 끌고 온 뚱뚱한 여자가 손짓을 해 가며 무어라고 떠들어 대고 있었다. 순경을 둘러싼 창녀들이 낄낄거리며, 그의 견장이며 모자를 만져 보고 있었다. 백수웅은 마른침을 삼켰다. 부산 일대에 비상이 내린 것이다. 창녀촌까지 뒤지고 있다면, 지금 부산 전역은 거미줄 같은 경계에 돌입했을 것이다. 발목에 매어 둔 칼은 그냥 있었다. 순경과 방범대원 하나쯤 해치우는 건 문제도 아니지만, 여기서 시끄럽게 만들 필요는 없다. 아직도 자신이 지난 밤 바다를 건너온 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순경이 쪽방 문을 두 개나 열어 보았고, 저녁 장사 준비를 하던 창녀들의 자지러질 듯한 비명이 그 때마다 들려 왔다. "왜 이래? 여자 옷 벗은 거 처음 봤어?" "어머머 , 별꼴이야. 경찰이면 단가?" "들어와. 2천 원만 내면 기분 좋게 해 줄게. 왜 생각 있어?" 순경과 방범대원은 못 들은 척하며 방을 뒤져 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백수웅이 들어 있는 방 문 앞에서 그들은 멈추어 섰다. 순경이 손을 내밀어 문고리를 잡았고, 백수웅은 다리를 이불속에 감춘 채 칼을 움켜잡았다. 그 때다. 순경 뒤에서 찢어질 듯한 여인의 발악 소리가 들려왔다. 순경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젊은 창녀 하나가 고함을 질러 대고 있었다. "이 새끼야, 네가 남편이면 남편 구실을 해야지, 이 지랄 해서 돈 벌어 놓으면 전부 핥아 가 버리니 난 어떻게 살라는 거야! 빌어먹을 자식, 노름에, 제 계집 사창굴에서 썩는 거 모르고 또 계집질이야? 이 죽일 놈아!" 여인이 냄비며 세숫대야 등을 마구 던져 댔다. 그런 살림들이 백수웅 있는 방을 향해 날아들었다. 순경과 방범대원이 날아오는 살림을 팔뚝으로 막으며 옆으로 피했다. "잡아가라구요. 저런 자식 안 잡아가구 누굴 잡으러 다니는 거예요." 여인의 고함 소리가 점점 높아 갔고, 살림이 난폭하게 날아들었다. 순경과 방범대원이 혀를 차며 튀어나갔다. "원, 재수가 없으려니 " 낡은 한옥을 한번 돌아본 후 다른 집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하하하 , 아하하 " 갑작스러운 발작에 모두들 놀란 얼굴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순경이 돌아간 후 여인은 갑자기 배를 움켜쥐며 낄낄대기 시작했다. "아, 아이구, 우스워 죽겠네 나와 봐요, 순경이 갔으니까." 여인이 백수웅을 향해 소리질렀다. "모처럼 남의 자식 계집 노릇 한번 잘 해 봤네. 아, 뭐해요? 나와 보라니까." 백수웅이 돈만 지불하고 그냥 돌려보냈던 그 여자였다. 파출소에 끌려간 경험이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경찰 제복만 보면 알래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여자다. 그녀는 이렇게 해서라도 아랫도리 빚을 갚은 셈이며, 모처럼만에 스트레스를 해소시켰다. 그런데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사내 녀석은 방구석에서 나오지않았다. "아따, 겁은 되게 많네." 그녀가 쫓아가 방문을 활짝 열었다. "어럽쇼? 벌써 튀었잖아." 창문이 입을 활짝 벌리고 있었고, 사내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새끼, 간첩 아냐?" 이번에는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그리고 칫솔을 찾아 이빨을 벅벅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 시간, 백수웅은 부산 역전의 한 포장 마차에서 국수를 말아먹고 있었다. 그는 이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밤 자정이 넘어 통행 금지 시간이 되면 또다시 검문이 시작될 것이다. 호텔이나 여관은 위험하다. 그렇다고 거리에서 노숙 할 수도 없다. 지금 서울을 간다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미 부산역은 정복 경찰, 헌병들이 무장을 한 채 잔뜩 깔려 있었다. 그의 기막힌 코는 사복을 입은 몇몇 형사들까지 냄새 맡고 있었다. 국수를 두 그릇이나 해치웠다. 소주까지 한잔 하고 싶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도쿄서처럼 함부로 돈을 털 입장도 아니었다. 8년 동안 그는 국내를 떠나 있어서, 이 곳 생활에 익숙지 않았 던 것이다. 백수웅이 쫓기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물론 동백섬에서 순찰 순경을 살해한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도쿄서 만들어 온 가짜 주민등록증만으로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순찰 순경에게서 탈취한 경찰 공무원증도 아직 사진을 갈아 붙여야 하고, 나이를 바꿀 작업이 남아 있다. 가락국수 두 그릇을 비우고도 선뜻 일어나지 못한 이유는, 당장 오늘 밤 숙소가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낮잠을 너무나 오랫동안 자 두었기 때문에 잠도 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오늘은 고통스러운 밤이 될 것이다. 부산역의 전자 시계가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역전을 세 번이나 돌았다. 때로는 무장 헌병과 부딪치기도 했고, 때로는 정복 경찰과 맞닥뜨리기도 했다. 그는 고개를 피하지 않았다. 자신의 얼굴을 목격하고 수상한 사람이라며 소리칠 사람은, 동백섬에서 만났던 그 오토바이 순경뿐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 입을 열지 못하고 있다. 죽었기 때문이다. 손가방을 든 채 터덜터덜 걷던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8년 전 한 상선에 실려 일본으로 끌려가던 기억이 머리에 떠 올랐다. 그 때 그는 어떻게 끌려갔던가. 그 날을 생각하면 오늘 밤의 처지는 오히려 행복하지. 그 때는 패배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지금 상황은 결코 패배가 아니다. "그래, 난 패배한 게 아냐. 단지 코너에 몰려 있을 뿐이지." 이제 1시간 30분 남았다. 그 시간만 지나면 거리는 쥐죽은 듯 조용해질 것이다. 그 빌어먹을 놈의 통금이 시작된다. 그는 그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무던히 고생했다. 도쿄에는 통금이란 것이 없었다. 이제 막판에 몰렸다. 내일 새벽 5시까지만 버티면 된다. 새벽 4시에 통금이 해제되니, 5시만 되면 자유롭게 행동해도 의심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서울행 첫 차까지 검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오던 길로 되돌아가 부산역 역사 옆의 자그마한 콘크리트 건물로 들어섰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켜고는, 문을열고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 눈깜짝할 사이에 그의 행동은 끝이 났다. 부산 역전을 배회하는 많은 사람들도, 이 손가방을 든 낯선 사내가 역사의 부속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화장실은 악취로 가득했다. 그는 먼저 가방으로 변기 구멍을 막았다. 그리고 창문을 활짝 열어 공기를 환기시켰다. 가방 안에는 그가 꼭 필요로 하는 전자 제품 몇 개가 들어 있었지만, 그 가 깔고 앉는다고 해도 파손될 위험은 전혀 없었다. 플라스틱 신형 가방은 종이만큼이나 가벼웠고, 강철만큼이나 단단했다. 가방을 깔고 앉은 채 화장실의 벽에 등을 기댔다. 새벽 바람이 작업복 옷깃으로 스며들어 한기를 느끼게 했다. 그는 손을 작업복 가슴 속에 집어 넣었다. 딱딱한 물체가 손에잡혀 왔다. 웃으며 그걸 꺼냈다. 포장 마차에서 국수 값을 치르며 슬쩍 훔쳐 넣었던 소주병이다. 조금 전 그는 그 소주가 마시고 싶어 환장할 지경이었었다. 8년 동안 일본에서 정종과 맥주만 들이켰기 때문이다. "뻥--." 뚜껑을 이빨로 열고 냉수처럼 벌꺽거리며 마셔 댔다. 해운대 동백섬에서 발생된 순찰대원의 피살 사건으로, 부산 시경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발칵 뒤집혔다. 전문 수사관을 현장으로 급파했고, 부산 시내 전역에 비상령을 내려 부산을 출입하는 요소요소를 차단시키는 한편, 호텔.여관 등 전 숙박업소를 이잡듯 뒤져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순찰대 요원을 잃었다는 흥분 때문에, 보다 사고 적이고 지능적인 수사 방향을 잃고 있었다. 그들은 왜 순찰대원이 그런 희한한 장소에서 피살되었을까 하는 의문보다는, 도대체 어떤 녀석이 감히 정복의 순찰대원을 살해했느냐 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웠고, 또 살인 목적이 무엇이냐 보다도, 한시바삐 범인을 체포하여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복수심이 앞서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게 마련이고, 감정이 앞서면 실수하게 마련이었다. 부산 시경의 가장 큰 실수는 이 잔인한 암살자를 추리하는 데 있었다. 거구의, 그것도 잘 훈련된 순찰대원을 단칼에 살해할 정도라면, 살인자도 보통 사람보다는 크고 힘이 셀 것이다. 독침이나 군용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무장 간첩 침투로 보기는 힘들다. 그리고 살인자는 아직 부산에 있을 것이며, 피살된 순찰대원에게 원한이 있는 자의 소행일 수도 있다. 시경 산하의 각 경찰서와 파출소에까지 내린 훈령에는 '살인자는 부산 시내 거주자일지도 모른다. 사창굴 같은 우범지대까지 뒤져라. 그리고 평소 블랙 리스트에 올라 있는 모든 전과자들을 수색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들은 각 버스 터미널과 부산역을 봉쇄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시경국장의 특명에 따라 모든 경찰관은 민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철저한 공조(共助) 수사에 돌입했다. 이 과정까지만도 12시간이나 소비되었다. 이런 수사 덕분에 쫓기던 몇몇 범죄자들이 잡혀들었고, 마음 잡고 새 생활을 시작하려던 전과자들이 불안한 모습으로 다시 끌려가기도 했다. 부산역에는 시경의 강력계 형사가 직접 파견되어 모든 젊은 남자들을 일일이 채크하고 있었다. 부산 헌병대 사령관의 협조를 받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들은 혹 탈영병의 살인 행위' 일지도 모른다고 계산한 것이다. '서울행 통일호 첫 열차부터 철저히 수색하라.'는 지시에 따라 수사대원과 헌병들은 무장을 한 채 개찰구를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부릅뜨며 거구에 힘이 세어 보이는 수상한 사내를 찾는 데 핏발을 세우고 있었다. 백수웅은 자동차의 엔진 소리와 클랙슨 소리, 그리고 웅성이는 사람들 소리에 눈을 떴다. 그는 무심코 손목을 들여다 보았으나, 아직 시계를 구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날의 밝기로 보아 5시가 가까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먹다 남긴 소주병에는 아직도 술이 삼분 의 일 정도가 담겨 있었다. 그는 그 술을 옷 여기저기에 들어부었고, 또 입 안에도 냄새가 날 정도로 들이켰다가는 내뱉었다. 그리고 어슬렁대며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어느 새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며 서울행 열차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고, 사내가 지나갈 때마다 행인들은 악취에 코를 틀어막았다. 부산역 대합실로 들어섰을 때 그는 지난 밤의 계산이 얼마나 빗나가 있었는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통일호 새벽 첫 차까지는 검문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어이없이 빗나가 버린 것이다. 개찰구는, 역무원 외에도 완전 무장한 두 명의 헌병과 한 명의 경찰, 그리고 사복은 입었으나 번뜩이는 눈으로 보아 형사임에 틀림없는 건장한 사내가 완전 봉쇄하고 있었다. 개찰 시간은 5시 30분이었고, 현재 시간은 5시 5분이었다. 백수웅은 대합실 구석에 서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두운 개찰구에서 가짜 주민등록증이 쉽사리 발견되리라고는 믿지 않았으나, 일본에서도 최신형으로 알려진 플라스틱 가방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작업복에 고급 가방은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당장 가방을 버리거나 바꿀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가방에는 시한 폭탄을 제조하는 뇌관 이외에도 어려움을 헤쳐나갈 소도구들이 가득 들어 있었던 것이다. 폭탄 전문가들도 쉽사리 알아보기 힘든 신형 뇌관이기 때문에 검문자들이 가방을 열어 보아도 의심은 하지 않겠지만, 문제는 내용물보다 가방 그 자체에 있었다. "굳이 위험을 부를 필요는 없다." 그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계속 한 사내의 등을 쫓고 있었다. 백수웅은 먼저 열차 티켓을 구입한 다음, 가방을 열어 작은 단도(短刀) 하나를 꺼냈다. 발목에 묶은 잭 나이프를 잃어버렸을 때 사용하려던 여분의 칼이었다. 작은 단도는 가죽으로된 칼집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그 칼을 주머니에 넣고, 인상이 고약해 보이는 그 큰 덩지의 사내 뒤를 따라갔다. 그 사내는 담배를 사려는지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구내 매점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백수웅이 그 사내 뒤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앞뒤 발이 엇갈리는 순간, 발목을 걸었다. 사내는 몸의 중심을 잃고 옆으로 비틀거렸다. 백수웅이 잽싸게 팔을 붙잡았다. "어떤 개자식이야!" 사내가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작고 초라해 보이는 녀석이 팔을 잡고 있는데, 입에서 소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미, 미안합니다 나, 일부러 그런 거 아닙니다." 백수웅이 비틀거리며 사과했다. 사내는 이 술주정뱅이를 한 방 갈겨 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꺼져, 뒈지기 전에." "아, 알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백수웅은 머리를 긁적이며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대합실을 빠져 나왔다. 그는 주머니에서 수첩 하나를 꺼냈다. 그 인상 고약하고 덩지 큰 사내의 주머니에서 훔쳐 낸 것이다. 5천 원권이 열 장이나 들어 있고, 주민등록증, 명함 따위들이 보였다. 돈만 꺼내고, 주민등록증은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이윽고 개찰 시간이 되었다. 여행객들이 개찰구를 향해 뱀처럼 늘어서기 시작했다. 헌병과 형사들의 눈이 한결 더 빛나기 시작했고, 백수웅은 지갑을 잃어버린 덩지 큰 사내의 두 사람 뒤로 파고들었다. 마침내 개찰이 시작되었다. 검문 때문인지 개찰은 무척 더디게 진행되고 있었다. 길게 늘어섰던 줄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고, 덩지 큰 사내는 주머니에서 표를 꺼내 역무원에게 내밀었다. 형사의 눈이 사내의 아래위를 훑으며 지나갔다. 키는 자그마치 180센티는 되어 보였고, 얼굴에는 커다란 칼자국까지 나 있었다. 어슬렁대는 폼이 보통 건달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폼에 안 어울리게 말쑥한 양복을 입고 있었다. "주민 등록증 좀 봅시다." 사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검문이 있을때 마다 빠져 본 일이 없었는데, 그건 그 고약한 인상 때문이었고, 얼굴의 상처는 군에서 운전병으로 근무할 때 생긴 안전 사고의 상처 자국이었다. '제기랄, 오늘은 재수 옴 붙은 날이구만.' 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 투덜거림은 생각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백수웅은 뒤에서 숨 죽이며 이 검문 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다. "어, 지갑이 , 지갑이 없어졌네." 그는 당황한 얼굴로 속주머니를 뒤지더니, 다시 커다란 옆구리 바지 주머니로 손이 옮겨졌다. 짧고 얇은 쇠붙이가 손에 잡혀 왔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꺼내 들었다. 칼이었다. 짧지만 손잡이에 가죽이 감겨져 있는 일본식 단도였다. 순간, 헌병의 손에 들려져 있던 칼빈 소총의 개머리판이 사내의 얼굴을 갈겼고, 형사의 무쇠 같은 주먹이 그 사내의 명치 끝으로 날아들었다. 개찰구는 비명과 소란으로 떠들썩했고, 그들은 얼굴을 감싸고 엎어진 사내의 등을 마구 밟아 대고 있었다. 젊은 여자 하나가 너무 놀라 엉겁결에 옆 사내의 품에 얼굴을 묻었고, 남자는 웬 떡이냐는 듯 여자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손으로 커다란 보자기를 소중한 듯 끌어안고 있던 할머니가 깜짝 놀라 떨어뜨렸는데, 병 깨지는 소리와 함께 참기름이 쏟아져 내렸고, 호기심 많은 사내들이 수갑 차는 사내의 모습을 보려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어린 여학생 하나는 손으로 계속 가슴을 쓸어내렸고, 매점의 젊은 주인이 무슨 일이냐며 쫓아 나왔다. 매점 주인이 자리를 비우자, 열댓 살 먹은 사내아이 하나가 매점 위의 과자들을 훔쳐 대기실 밖으로 튀어나갔다. 과자 훔치는 것을 본 청소원 하나가 빗자루를 들고 소년을 뒤쫓다가, 사람들 발에 걸려 대합실 한복판에서 나뒹굴었다. 역무원은 아우성치는 여행객들의 티켓을 검표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대합실은 소란하기 짝이 없었다. 백수웅은 손을 내밀어 표를 역무원에게 보여 주었고, 역무원은 표의 한구석을 잘라 겨우 겨우 백수웅에게 넘겨 주었다. 시간이 지체되어 사람들이 열차에 오르기도 전에 출발 시간이 되었다. 시간이 되자, 열차가 꿈틀대며 '삑 -- 삑 --' 기적을 울려대고 있었다. 백수웅은 열차 앞칸의 차창 가에 앉았는데, 옆에 앉으려던 빨간 반바지의 여인이 코를 막으며 빈 자리를 찾아 어디론가 가 버렸다. 아직도 열차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발을 동동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고, ' 덜컹, 한번 몸을 흔든 열차는 천천히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다. 백수웅은 다시 차창을 바라보았는데, 멀리 한 사무실에서 사내가 구둣발에 짓밟히는 것이 보였다.
첫댓글 잘읽었 읍니다!
대체 백수웅이 무엇하는 인물일까 궁금타 ㅎㅎㅎㅎㅎ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요 ~~~
잘 읽고갑니다~~
감솨요~~
범죄
추리??
감사
좋아요.
감사합니다.
ㅈㄷ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