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2010년) 연말. 살고 있는 마을(전남 구례)에서 마을총회를 앞두고 오래간만에 돼지를 잡았다.
정확하게는 한 마리를 시킨 것이다. 작업을 하러 오신 분은 한 시간이 채 못 되어 돼지 한 마리를
정육점 진열장의 고기 상태로 해체했다. 그가 들고 있던 칼은 단도처럼 생긴 작은 칼이었다.
작업이 끝나고 그는 맛있는 부속 부위 몇 가지와 몇 근의 살코기를 챙겨서 유유히 사라졌다.
원래 그것은 작업한 사람의 몫이라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 다음에는 마을사람들이 직접 잡아보자는
소리들이 나왔지만 막상 요즘 같은 세월에 누가 그것이 가능한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만수 성 살았을 때 잘 잡았는데’ 라는 등의 애꿎은 죽은 사람 이름만 몇 나왔을 뿐이다.
사진 찍고 구경하던 내 옆에 섰던 박 목수가 지나가는 소리처럼 내뱉은 말이 귀에 남았다.
“허기사 저런 작업할라믄 남원 칼 같은거로 해야되이.”
남원 칼.
남원 칼이 유명한가? 남원이라면 구례에서 지척 아닌가.
일부러 걸음해서라도 남원 칼 이야기 한번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머릿속 서랍장 한켠에 챙겨두었다.
곽상호 씨와 통화하고 찾아간 ‘형제대장간’은 내비게이션이 없었다면 찾느라 몇 번 차를 세웠을 법한 곳이었다.
길은 명확했지만 몇 대목에서 길이 휘어지는 각도가 명확한 좌우회전이 아니었다.
내비게이션은 좌회전을 명령했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왼쪽으로는 개구멍도 보이지 않았다.
방금 지나친 농로 옆의 함석과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유일했던 그 집이 맞았던 것이다.
한적한 지방도에서의 유턴은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버선코 칼 선의 야릇한 곡선을 닮은 길은 완곡한 아름다움이 있었지만 합리성으로 무장한 내비게이션에서
나오는 소리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남원시 송동면 흑송리 455-1번지 <형제대장간>. 간판은 없었다.
점심 지난 시간이었다. 부자는 외부 작업장에서 불을 피우고 작업 중이었다.
아버지가 화로에서 달구어진 쇠붙이를 모루 위에 올려놓았다. 오른손은 작은 집게를 하나 더 쥐고 있는데
그 집게는 조그만 쇳덩이를 잡고 있다. 아들이 ‘함마’로 내리쳤다.
오후 동안 도매상으로 나갈 예정인 ‘싸구려 칼’에 대장간 이름을 새긴 낙관을 찍는 중이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달구어진 쇠의 표면에 ‘南原兄弟’라는 표식이 새겨졌다.
작업장 마당에는 도매상으로 삼천 원에 나갈, 장차 칼이 될 쇠붙이가 수십 자루 누워있었다.
곽태섭(75세) 옹은 심기가 불편한 듯 했다.
"생활이려니 하고 하는 거이여."
"방송에서는 옛날 모습을 원해싼게…"
앞의 말씀은 싸구려 칼을 잔뜩 만들어 팔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약간의 구차스러움에 대한 것이었고
다음 말씀은 나를 염두에 둔 말씀인 듯했다. 간혹 방송국이나 신문사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은 흙 바른
화로를 원하는 모양이다. 속은 벽돌인데 그런 바람 때문에 겉만 흙을 바른 것이다.
이 또한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장치이니 노인은 편치 않은 것이다.
“크롬몰디브 된 칼로 먹고 삽니다.
그런데 겉보기에 이런 전통적인 방식의 시설이 없으면 대장간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몰디브텐으로 밥 먹고 사는 것이 현실인데 말입니다.”
아들 곽상호(36세) 씨도 오늘 오후의 일감이 그렇게 즐겁지 않은 것은 아버지와 한가지인 듯했다.
약간 멋쩍은 듯 상호 씨가 몇 마디 더 보탠다.
“도매상에 삼천 원에 나갈 칼을 아버님은 칠십 번 정도 두드리십니다. 좀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그러면 안 되거든요. 시간이 인건빈데 칼 값 차이는 쇠 차이도 있지만 단조鍛造를 얼마나 하느냐 차입니다.”
기본 모양을 내는 것을 ‘벼린다’고 한다. 무딘 쇠붙이를 불에 달구어 두드려서 원하는 모양으로 만든다.
자고로 쇠를 만지는 일은 두드리는 일이다.
- 메질을 할 때 무슨 생각을 합니까?
“생각을 안해야 합니다. 아버님하고 제 차이는 그러니까…
저는 생각한다고 몸을 마음대로 못 놀려요. 아버님은 몸이 알아서 움직이죠. 몸에 생각이 있는 거죠.”
아마도 몸이 생각을 흡수했을 것이다. 아니면 생각이 몸을 흡수했거나.
오랜 시간 같은 일을 한 사람들의 움직임에는 가락이 있다.
익히려고 한 것은 아닌데 몸이 제 스스로 좀 더 편하기 위해 요령을 리듬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곽태섭 어르신. 물론 남원 토박이다. 본은 경상북도 현풍이다. 올해(2011년)로 75세 되신다.
호號를 ‘靑利청리’라 부르신다. 푸른 날카로움이라고 해석하면 옳을까.
충분히 이름을 새길만한 칼에는 ‘南原靑利作’ 이라는 낙관을 박아 넣는다.
메질을 하시는 곽태섭 옹에게 여쭈었다.
- 옛날에는 몇 사람이 작업을 했습니까?
“지금은 자동 함마가 있어 혼자서도 하지만 옛날에는 집게 잡는 편수 한 명, 메잽이 두 명이 기본인데,
대大자는 세 명이서 메를 잡을 때도 있고. 메잽이는 선메와 후메로 나누는데, 선메가 먼저 두드리고
후메가 따라서 치제.”
- 편수가 오야집니까?
“그렇지. 편수가 오야지제.
편수가 이렇게 -왼손으로 집게를 잡고 오른손으로 작은 망치를 쥐고 모루 위를 가볍게 두드린다-
두드릴 곳을 정해주는 것이지. 그러면 선메와 후메가 번갈아 메질을 하지. 1초에 두 번 정도 메질을 했지.”
- 그렇게 한 팀이네요.
“불무꾼이 있어야제. 글케 네 명이 한 조를 이루지. 불무꾼 역할은 지금은 후앙(팬/FAN)이 하지.”
- 그 시절 하루 작업량은 어느 정돕니까?
“칼을 기준으로 보자면 하루에 오십 개 정도. 괭이로 보자믄 삼십 개, 낫은 오십 개 정도.”
- 언제부터 이 일을 하셨습니까?
“아버님이 좀 배우신 분이신데 배워서 고초를 좀 겪으가꼬…
육이오 때 읍사무소에서 근무를 하셨는데 등기대장에 이름 몇 개 불러줬다고 불려가서 고초를 겪어놔서.
그래서 아버님이 우리를 공부를 시키지 않으셨어. ‘난세에 공부를 많이 하면 명이 짧다’ 하셨지.
그래서 내가 중학교도 옳게 못나왔어.”
손쓰는 일의 출발은 대부분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경우가 많았다. 특히 힘들었던 시절에는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내 나이 일흔 다섯인데 군대 갔다 와 가꼬 스물야덟부터 이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어.
살던 동네가 성냥깐(대장간) 몰려 있는 동네라 어릴 적부터 쇳똥가리 가꼬 놀았슨께. 덕분에 공병대 근무를
해 논께 군대생활은 영판 편하게 했어. 특과휴가도 많이 나오고. 여튼간에 제대해서 나와 본께 어머니 고생도
끝을 내야겠더라고. 내가 군대 간 마당에 어머님이 동상들 돌보고 고생 죽도록 하셨지.
그래 이 일 안 할라꼬 했는데 시작한 것이여. 없는 사람이 가장 빨리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직업이 이거이고
그러다 보믄 낭중에 몸은 정말 만신창이가 되고. 지금은 배울라는 사람도 없지만…”
- 남원 칼이 왜 유명합니까?
“그거 왜 안 묻나 했다.
1922년 일제 시대 때 노암동 살던 한영진 선생님이 오늘날로 보자면 기능경진대회라고 할 수 있는
조선총독부에서 주관하는 ‘조선부업공진대회’에 촉탁을 받아 나간거라. 이 어른이 금상을 받으면서부터
남원 칼 이름이 많이 났지. 사실 그 전부터 남원 칼은 유명했지만.”
- 금상을 받았기 때문에 한영진 선생이 유명세를 탄 것이네요.
“한영진 선생이 유명한 것은 칼이 양골이라(칼등 아래에 양면으로 골이 나 있다) 갈기도 쉽고
가축을 도살해도 칼이 잘 빠진다는 소리들을 해쌋제. 이전에는 남원에 도축시장도 있고 했거든.
수랏간에 납품도 하고 그러면서 유명해진거라.”
- 어떤 연유로 한 선생님께 칼을 배우시게 되었습니까?
"어릴 때 보면, 광한루 앞에 한영진 선생 성냥깐이 있었는데 늘상 풀빵(찐빵)을 사노코 아이들을 부르는거야.
일손이 없다본께 풀무질을 주로 시키려고 아이들을 꼬신 것이지. 우리 집이 한영진 선생 성냥깐 바로 옆이라
내가 자주 가게 된 것이지. 이를테면 이놈 저놈 오느니 한 녀석 정해두면 일도 익고 더 편할성 싶은 것이었겠제.
‘야 이눔아! 직접 갈치는(가르키는) 것 보다 눈쌀미가 있어야제’ 그런 식으로 가르쳤지.
함부로 화로에 손 넣어서 손장난 못하게 했었지. 불장난 치면 여지없이 망칫자루로 때려부러.
그런 스승 밑에서 일을 배웠어. 배우고 군대갔지.“
이른바 남원 식도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한영진의 칼은 명확한 개성이 있는데 세 가지다.
첫째는 이발소 면도칼의 원리를 이용해서 칼을 만들었다고 한다. 날이 얇아 잘 썰어졌던 것이다.
두 번째로는 칼등 아래 양쪽으로 골이 있어 날은 얇은데 쉽게 부러지거나 휘어지지 않았다. 도축장에서는
고기에 찔러 넣은 칼을 뽑기가 수월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디자인의 변형을 통해 기능성을 높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요즘도 전통 칼은 기차 레일 철을 원료로 하는데 레일 철로 처음 칼을 만든 사람이 바로
한영진 선생이라고 한다. 철길의 레일을 가만히 살펴보니 다른 철에 비해 강도와 탄력이 좋고 무엇보다 녹이
잘 쓸지 않더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곽태섭 옹은 그런 한영진 선생의 거의 유일한 수제자인 셈이다.
- 남원에 원래 대장간이 많았습니까?
“그때는 (남원읍에)네 집밖에 없었지. 한영진 선생님하고 박병모, 정정한 씨라고 내 매형인데 그라고…
황금출 씨. 그렇게 네 집. 시골(면 단위)에 한 분, 박 씨라고, 이백(면) 가서 한 명 있고.
그래도 진짜 편수는 네 명이었제.”
군대 제대 후 집에 와보니 곽태섭 옹의 동생분이 형처럼 대장간에 들락거리면서 어깨 너머로 일을 배워
대장간을 시작하고 있었다. 동생과 같이 남원 공설시장에 대장간을 차렸다.
그때부터 대장간 이름을 ‘형제공업사’로 사용해왔다. 처음에는 농기구도 만들고 칼도 만들었다.
점차 칼 위주로 전환해서 ‘형제식도’ 라는 이름이 많이 알려졌다. 현재 이름은 ‘형제대장간’이지만
‘형제식도’가 더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한다.
대장간은 공설시장에 있었는데 지금의 광한루 자리다. 광한루가 확장 공사를 시작하면서 남원 MBC 앞
요천 변으로 대장간을 옮겼다. 대장간을 옮긴 이유는 항상 같았는데 주변의 확장공사, 도로 공사 등으로 인해
자꾸 밀려난 것이다. 요천 변 대장간 자리는 새로운 도로계획 때문에 지금의 송동면 흑송리로 다시 옮겨야 했다.
그 사이에 동생분은 분가를 해서 남원 시내에 다른 대장간을 차렸지만 곽 옹은 여전히 ‘형제대장간’ 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첨부터 그렇게 해 왔어.”
- 지금은 대장간이 몇 집 정돕니까?
“열일곱 집. 실제 장사하는 집은 아홉이나 되나.”
“작은 아버지, 매형, 뭐 우리 집 친척들이 다섯 집입니다.”
곽상호 씨가 말을 보탠다.
- 대를 이어 작업하는 집은 몇 집입니까?
“저까지 해서 둘? 셋… 셋은 아닐 것 같고. 두 집으로 봐야겠네요. 현재로서는.”
지금이 남원 칼의 전성기는 물론 아니지만 그 많던 대장간 일을 이어받을 자식들은 거의 없었다.
쉽고 편한 일이 아니다. 특히 몸 쓰고 손쓰는 일을 대물림하고 싶은 부모들은 거의 없다.
“자식들한테는 이 일 시키지 않으려 했는데… 저 놈은 사법고시 본다고 하다가
- 몇 년 정도 매달렸습니까? - 10년 정도 했지. 저도 하다가 안 되고 장가도 가야겠고,
‘이 나이에 사법고시 되 봐야 변호사밖에 안 되여’ 하면서… 하루 저녁에 무릎을 꿇고 대를 이어서
이 일을 해보겠다는데… 고민을 두 달을 했다.”
부모님들은 자신이 겪은 고초의 원인을 자신의 처지와 조건에서 찾는다.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부침이 많았던 우리나라에서 특히 유난한 듯하다. 그래서 일제시대 이후로 반상제도가 실질적으로 사라진 이후,
손쓰는 분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쎄가 나도록’ 일을 해서 자식들을 공부시켰다.
당신 대에서 이 지긋한 일을 끝내고 싶었던 것이다.
“지가 마음이 떴는데 되것냐, 부모가 강요한다고 되것냐? 3년 전 3월 달에 본격적으로 시작을 했제.
지는 배운 놈이니께 물건을 판매해도 인뜨넷으로 판매한다고 해 싸터만. 나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을 한다고 해.
나는 지 하잔 대로 혀. 저 놈이 주문제작하면 이십에서 삼십만 원도 받거든. 우리는 오만 원 받았는디.
경제가 나아지더라고. 통장에 돈이 쌓이더라고.”
- 아드님 하시는 일은 마음에 드십니까?
“칼 형태는 잘 뜬데, 모리독(모루) 앞에서 하는 거는 아직도 미숙해. 공무원이나 하제…
어딘가 모르게 애비 밑에서 보고 자라 그런가 눈살미가 빠른 편이제. 따지고 보면 저 놈도 망치들고
논 걸로 보자면 삼십 년은 되것제. 허허허. 사법고시 준비하면서도 이곳에 와서 계속 내 일을 같이 봐줬으니
어림잡아 7~8년으로 보면 되것다. 아직은 집게 잡는 손이 익숙하들 못해. 집게, 망치, 정신이 일치해야
제대로 된 편수를 할 수 있거든. 집게, 망치를 자기 몸에 맞게 맨들어 쓰야거든.
지금은 망치 메잽이도 없어. 이 망치도 사십 년 쓴거여.”
아들을 바라보는 곽 옹의 눈에 미련과 아쉬움이 진하다.
그러나 꼭 그런 감정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뭔가 복잡 미묘한 느낌이다.
“옛날식으로 재래식으로 하면 나 공장 못해.
일을 하다가 뭔 생각이 나서 기계를 만들어 놓으면 전부 보고 따라해.
그것도 기술이고 노하운데 말이지. 딸딸이 함마도 다 따라해서 지금은 전부 그걸로 일하잖아.”
일종의 자동 메질을 하는 기계를 고안하셨다. 일손이 없다보니 살아남을 궁리를 하는 것이다.
편수 역할 하는 사람이 기계 앞에서 편편한 쇠붙이를 잡고 초벌 단조를 하는 것이다.
면도칼로 이름 높은 회사를 포함해서 큰 회사들이 스테인리스 칼을 선보이면서부터 전통적인 대장간에서
만드는 무쇠 칼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가볍고 녹이 쓸지 않는데 굳이 옛 것을 고집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세월의 변화에 따라 사라지거나 살아남거나 하는 기로에 섰던 것이 이미 삼사십 년 전이다.
그때 곽태섭 옹은 남원의 다른 대장간보다 앞서 살아남을 방도를 마련하는데 골몰했다.
어머님을 모셨고 육남매를 키웠다. 동생들과 가까운 피붙이까지 하자면 스무 명 식구를 책임져야 했다.
호구지책으로 시작한 일은 인생의 은인이기도 하고 업이기도 하다.
삶의 그 빼곡한 단층 속을 헤집고 밀치며 바람 보다 먼저 걸어갔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대략 마무리해야 할 연대가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모루 앞에서 메질을 하고 있다.
아들 곽상호 씨 때문이다. 어른은 분명히 그렇게 표현했다.
“초등학교서부텀 뭔 일을 했간? 손이 많이 험해졌어. 이거 하지 말라고 공부시켰는데 이거 한다니까…
아들 아니면 나 지금 이거 안 해.”
쇳덩이를 불에 굽지 않고 메질하는 것을 생정질이라고 한다. 차가울 때 때리면 쇠는 팍 깨져버린다.
쇠를 불에 달구고 메질하는 것을 화정이라고 한다. 불에 굽고 원하는 부분만 담금질하고 망치로 내려치면
차가운 쪽이 떨어져 나간다. 원소기호 Fe를 다루는 사람도 자식 앞에서는 끊어지듯 매정하게 돌아서지 못한다.
자신의 인생은 생정질 하더라도 자식 인생은 섬세한 화정과 담금질로 보살핀다.
그토록 자신의 일을 잇지 않기를 바랐지만 말이다. 그렇게 형제식도의 손은 이어지게 된 것이다.
곽상호. 1976년생이다. 우리나이로 서른여섯 살이다. 남원 향교동 외가에서 태어났다.
남원초등학교 - 용성중학교 - 남원고등학교를 나왔다. 원래는 인천대학교 영문과를 입학했는데
적성에 맞지 않아서 재수를 자청했다. 96학번으로 전북대학교 법학과를 들어갔다.
법대. 이 땅에서 고생한 부모님들이 생각하는 법대의 의미는 확연하다.
어르신은 늦은 점심과 휴식을 위해 집으로 들어가시고 이제 곽상호 씨와 마주했다.
망치로 칼자루를 박아 넣는 일을 하면서 나의 물음에 답을 했다.
- 보통 학부시절부터 고시 준비하죠?
“그렇죠. 학교 적부터 했으니 7년 정도 매달렸나?
- 왜 그만뒀습니까?
“자격증 시험은 몇 점 맞으면 합격이지만 이건 몇 명을 뽑는 시험입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구요.
이를테면 될 때까지 하자는 아닌 것 같더라구요. 아버님이 뇌출혈로 실려 가신 일이 있었습니다.
지원이 뚝 끊겼지요. 학교 다니던 중에도 대장간 일 도우러 남원으로 왔었습니다.
중간에 아버님이 이 짓 지긋지긋해서 그만 두시고 개를 키우신 적도 있습니다.
강아지 팔면 5~6만원 받는데 차라리 그게 낫다고. 그래도 역시 안되더라구요.
아버지는 결국 다시 칼을 잡았습니다.
고시 준비와 남원 대장간을 오가며 저는 사실 마음을 정해두었습니다.”
- 아버님 반응은? 그러니까 성정이 어떠셔요.
“하하, 수틀리시면 뭐가 날아옵니다. 큰 형님 재수할 때 동네 오토바이 타고, 멀리도 안 갔어요.
골목길에서 한 백 미터? 자전거로 맞았잖아요. 불같이 화를 내십니다.”
- 형제가?
“여섯입니다. 큰누나, 그 아래 누나, 큰 형님, 막내 누님, 둘째 형 그리고 접니다. 전부 다 서울에서 삽니다.”
- 왜 대장간입니까? 아버님 말씀대로 공무원을 할 수도 있잖아요.
“쌍둥이 칼이라고, 헹켈Henckels 이라는 칼이 유명하지요. 남원 칼을 그렇게 한번 만들어 볼라구요.
지금도 저희 하이카본식도 사용하신 분들 중에는 헹켈 칼보다 좋다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다시
주문하시구요. 3만 원이거든요. 사람들은 헹켈은 10만 원 받아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만든 하이카본 재질 칼을 헹켈하고 같이 10만 원 받으면 어떻게 될까요? 난리가 납니다.
저는 남원 칼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내가 한다면 10년 후에는 독일 쌍둥이 칼보다 더 우수한
디자인과 성능을 가진 칼을 만들겠다 하는 자신감이 있었지요.”
- 안사람은 언제 만났습니까?
“대학시절에 야학활동하면서 전주에서 만났습니다. 연애만 만 6년했습니다.
사람이 자기하고 맞는 사람이 있어요. 제가 욕심을 냈죠.”
2009년에 결혼을 했다.
- 처가에서 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판검사 사위일 줄 알았는데 칼 만든다고 하니.
“원래 제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줄은 알고 계셨고, 나이만 먹고 자리 못 잡으면 안되니까
돈을 벌랍니다. 그랬지요. 별 문제 없었습니다.”
- 시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데…
"이상할 만큼 전혀 문제없습니다. 고맙지요. 저 보고 도둑놈이라고 합니다. 칼 하나 몇 십만 원에 팔아먹는다고.
다른 직장 요즘 정년이 사십 오센데 육칠십까지 일하는 것이 가능하니 더 좋다고 합니다.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 상호씨가 지금은 전체 운영을 책임지는 것 아닙니까? 책임지고 난 이후로 매출은 늘었습니까?
“매출 신장은 대략 두 배 정돕니다. 원인요? 고부가가치죠. 고급화.
저도 아버님한테 도매로 사서 광한루 상가에 소매로 팝니다. 상가로 나가는 것은 부업이거나 홍보효과를
생각한 것이지 별 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 비해 고가 상품을 만들어 파는 것이 일단은 성공적입니다.”
그는 군대간지 10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현역 입대했지만 기관지천식 판정을 받고 나왔다.
그런데 지금 하는 일은 찬바람 맞고 탄가루 날리고 먼지 많은 일이다.
“석탄불 처음 피울 때 숨이 턱턱 막힙니다. 요령이 생깁디다.
처음 불 피울 때 일부러 탄불을 조금 태워버립니다. 완전한 재래식 방법으로 대장간을 운영하면 제가 하기
힘들 겁니다. 합금으로 변화하고 하이카본 제품이라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남원시는 2007년에 ‘80여년 역사를 지닌 식도(식칼)의 옛 명성회복을 위해' 공동 브랜드
'남향일도(南香逸刀)'를 발표했다. 식도업체들로 구성된 '춘향골 남원식도협의회'도 구성되었다.
대표는 곽태섭 옹이었다. 남원 시는 ‘남향일도’가 명품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을 할 계획이라는
발표를 했다.
- 남향일도라는 공동브랜드는?
“전 남원시장님이, 남원 목기에 대한 지원은 많았는데 남원 칼에 지원이 전혀 없었다고 하면서
시작된 일이지요. 그래서 만든 것이 ‘남향일도’라는 남원 칼 공동 브랜듭니다.”
- 그러니까 브랜드 개발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냐구요.
“이천만 원인가 지원해서 박스 만든 것이 전붑니다.
실질적으로 공동브랜드로 뭔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없다고 봐도 됩니다.”
- 뭐가 문젭니까?
“제 각각 품질이 다릅니다. 대장간마다 같은 질일 수는 없습니다. 단조 열 번 두드린 칼하고
백 번 두드린 칼하고 같은 포장재에 넣어서 판매하는 것이 애초부터 말이 안되지요.
오히려 남원 칼 욕만 듣게 됩니다.”
엄격한 제작 기준, 공동선별과 검수 없는 남원 칼 공동브랜드 사업은 태생적으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저희도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저가의 하이카본식도를 만들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저가 상품을 고가에 사시지 않도록 형제식도(곽)이라고 도장을 칼에 찍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모든 칼에 ‘남원’ 이라고만 찍었습니다. 싼 것을 구분하기 위한 고육지책입니다.
아까 보셨던 작업들도 그런 칼들입니다.”
유통에 대한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혼자 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 그런 칼 못 만든다’는 선언은
독자적인 시장을 가진 경우에나 가능한 소리다. 도매상에서 싼 것을 요구하고 대장간은 응한다.
도매상으로 삼천 원에 팔려 나가는 칼을 만드는데 한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다. 질곡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다른 식도를 선보이려면 수십 년을 이어 온 거래 선들과 작별할 수는 없다.
물건을 어디에 내어 놓을 것인가? 우선은 생계다. 예술이 아니다.
손으로 무엇을 만들어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가질 수 있는 오해 또는 기대의 하나다.
결국 변화해야 한다. 상황을 판단하고 변화를 주도하기에 곽태섭 옹의 시간은 이제 충분하지 않다.
아들은 그것이 바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버님은 초기 기계화 이후 안주를 하셨습니다. 잘 나갔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종업원이 아주 많을 땐
열세 명까지 있었습니다. 광주사태 이후 외상거래 돈을 한꺼번에 받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한 달에 한 번씩 수금하는 형식이었는데, 요즘으로 보자면 몇 억대의 돈이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한때 개도 키웠다는 시절이 그땝니다.
제가 이 일을 하는데 30년 뒤에도 아버님과 같은 방법으로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옛날 방식만 지키고 유지한다고 앞으로도 누가 남원 칼을 인정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먹고 살려고 별 짓을 다 해요.”
- 형제대장간 사이트가 있던데 독자적인 유통 계획이 있습니까?
“지금은 유통보다 품질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자본력과 기계설비 등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전통적인 대장장이를 보는 관점으로 살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곽상호 씨는 쇠만 두드리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슬며시 인터뷰의 본질이 흐려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감이 생긴다.
- 그러면 남원 칼의 미래 지향점은 뭡니까? 기계홥니까?
“아니지요. 당연히 생존 전략은 수작업입니다. 단조가 없는 칼은 대기업도 아니고 경쟁력이 없습니다.
악세사리(액세서리/accessory) 같은 것은 사출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전통 칼 다 좋은데 손잡이 쪽으로
물이 들어가면 나무가 썩는다, 그런 거는 개선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단조가 칼의 생명력입니다.
좋은 쇠를 사용한다고 꼭 좋은 칼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핵심은 두드리는 것입니다.
가야시대를 철기문화라고 하는데 꼭 철이 좋아서 흥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두드리는 기술력이 이웃 나라
보다 좋았을 것입니다. 일본은 접식단조라고 하는데 여러 장의 쇠를 두드려서 폅니다.
그렇게 편 쇠를 다시 접습니다. 수십 겹, 수백 겹을 반복합니다. 이것이 접식단존데 이렇게 만든 칼이
이른바 그 유명한 닛뽄돕니다. 그래서 비싼겁니다. 우리도 그렇게 가야합니다.”
하나의 칼이 만들어지기까지 과정은 복잡하고 지난하다. 단단한 쇠를 다루는데 쉬울 까닭이 없다.
남원 칼을 만드는 첫 번째 과정은 덩어리 쇠에서 만들고자 하는 칼에 소용될 만큼의 쇠를 절단해 내는
작업이다. 절단망치와 메를 이용해서 때리면 절단된다고 한다.
그 다음은 화정질이다. 옛날에는 불에 달구어 절단망치와 메로 잘랐지만 요즘은 쇠톱이나 산소 절단기로
다섯 치 정도 간격으로 자른다. 그렇게 자른 쇠를 불에 달구어 메질해서 쇠를 늘린다.
그리고 틀잡기에 들어간다. 늘린 쇠를 반으로 잘라서 칼의 틀을 잡는 것이다.
다음으로 슴베를 뽑는다. 슴베는 칼이나 호미의 날을 자루에 박아 넣기 위한 뾰족한 부분이다.
달군 쇠의 끝부분만 모양을 잡는다. 춘향전에서 보면 남루한 행색의 이 도령이 남원 땅에 당도해서
곤욕을 당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때 ‘혀를 슴베째 뽑아버리겠다’는 좀 과격한 표현이 나온다.
그리고 남원 칼의 특징인 칼등 아래에 양골을 낸다. 칼의 볼을 넓히면서 메질로 칼 모양을 만든다.
여기까지 끝이 난 칼은 잔 망치질로 날을 만든다. 이때는 식은 망치질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생정질인데 생정질을 많이 할수록 좋은 칼이 된다고 한다. 식은 쇠를 두드리는 것이니 그만큼 더
힘들 것이다. 식은 망치질을 많이 할수록 좋은 칼이 된다.
다음으로 초벌갈이를 한다. 작두에서 날을 자르고 적당한 두께가 될 때까지 간다. 여기까지 끝이 난 칼은
막바지 담금질을 한다. 날만 불에 달구고 물에 담그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재벌갈이를 하고 마무리한다.
담금질 과정에서 뒤틀린 칼을 망치질로 바로 잡고 예리하게 날을 세우는 것이다. 마지막 날을 세울 때는
반듯이 숫돌에 갈아야한다. 그라인더 등에 칼을 갈면 칼의 수명이 줄어든다. 칼은 만들 때를 제외하고는
그라인더를 쓰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리고 자루를 박으면 하나의 칼이 완성되는 것이다.
남원 칼의 얇지만 등이 두터워 쉽게 휘지 않는다. 등이 있어 날이 닿는 면이 적다.
그러나 그만큼 손이 많이 간다. 얇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두드렸다는 소리다.
남원 칼을 시작으로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작하는 식도에 소용되는 쇠는 주로 레일 철이다.
단단하고 탄력 있고 다른 쇠에 비해 녹이 잘 쓸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나무자루와 가벼운 쇠로 된
이음새 부분은 물과 소금에 부식된다. 잘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 녹이 쓸고 자루에서 칼이 빠진다.
우리의 할머니들은 그때마다 혼잣말로 대장장이를 욕했을 것이다.
쇠의 가장 큰 단점은 바로 부식이다. 이른바 ‘스뎅 칼’이라 부른 스테인리스강(stainless steel) 재질의
칼이 등장하자 주방은 환호했다. 칼은 더 이상 관리하지 않아도 되는 물건이 되었다.
스테인리스 하이카본 스틸(stainless hicarbon steel)은 거의 녹슬지 않는 고탄소강이다.
녹이 나지 않게 합금을 했으니 강도가 강하다. 강도가 강해지면 당연히 잘 갈아지지 않는다.
물론 전통적인 쇠칼처럼 자주 갈지 않아도 된다. 스뎅 칼이 무쇠 칼을 변방으로 밀어낸 즈음부터
우리는 골목길을 날아다니던 ‘카~알 갈아요’ 라는 소리를 잃어버렸다.
일품은 사라지고 대량생산된 ‘합리적인’ 제품이 우리사회의 모든 영역을 잠식해 들어왔다.
우리는 열광했다. 싸고 튼튼하니까. 결국 전통적인 식도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월과 시장의 추세를
무시할 수 없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예술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기술로 먹고살자’는 일이다.
버선코 칼을 만져보았다. 아름다운 칼이다. 드라마 영향이겠지만 대령숙수 칼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주문제작으로 만드는 칼이다. 디자인과 사이즈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이십만 원 정도의 가격이다.
요즘 잘 나가는 헹켈 5스타 프로 6종 세트는 공식사이트에서 331,000원이다. 사은품도 있다.
버선코 칼은 헹켈 칼보다 가볍고 잘 썰어진다. 관리는 아무래도 좀 더 까다롭다. 6종이 아닌 1종이고
사은품은 없다.
“이십만 원 주고 이 칼 사시겠습니까?”
곽상호 씨는 웃고 있었다. 그의 웃음은 현재로 인한 씁쓸함만 묻어나는 웃음은 아니었다.
그 웃음은 과거와 미래 사이 어디쯤을 염두에 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표현하자면
‘지금은 이렇습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라는 진행형의 웃음이었다.
버선 코 칼을 주문한 어떤 사람은 개인 낙관까지 칼날에 찍어 줄 것을 부탁하고 더 많은 돈을 지불했다고 한다.
아마 실생활에서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 고르라면 어떤 칼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는 몇 개의 칼을 내어 놓고 가격과 재질에 대한 설명을 했다.
만 원짜리. 아버님이 메질 수십 번해서 인건비도 나오지 않는다고 탓했던 저가의 칼이다.
‘남원형제’라고 인을 박았다. 칼과 자루의 이음새 부분 가락지도 녹 안 나는 강화 플라스틱으로 바꾸었다.
삼만 원짜리. 합금 단조한 칼이고 전면에 광을 내었다. 하이카본 스틸(stainless hicarbon steel) 재질이라
보기에도 우리들이 흔히 보는 칼과 흡사하다. 그러나 더 가볍고 잘 썰어진다. 이 칼은 옥갈았다. 날 끝만
살짝 갈아서 집에서 갈기도 편하다. 이 칼부터는 ‘남원청리작’이라고 인을 박았다. 부끄럽지 않다는 의미다.
오만 원짜리. 전통적인 레일 칼 단조 칼이다. 칼등을 두텁게 했고 양골을 팠다. 관리를 소홀히 하면
약간에 녹이 스는 단점이 있지만 물기만 잘 닦아서 보관하면 괜찮다. 메질을 이백 번 이상 한 칼이다.
“음… 저라면 오만 원짜리를 고르고 싶은데요.”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이 오만 원짜리를 고른단다. 그러나 그가 권한 칼은 삼만 원짜리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칼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란 판단을 하고 있었다. 녹이 쓸면 결국 전화가 오고
이미지가 추락한다. 사람들은 ‘남원 칼’이라는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보기에 완전하게 매끈한 칼보다는
조금 묵직하고 ‘전통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오만 원짜리를 고르지만 설명하면 대부분 삼만 원짜리로
마음을 바꾼다고 한다.
실용성을 떠나 만든 이의 마음은 낙관으로 판가름하는데 완전한 단조는 ‘남원청리작’
그 다음은 ‘남원형제’ 마지막으로 ‘남원’ 순이다.
“이렇게 얇게 만든 칼이 시중에 거의 없습니다. 기계로는 이렇게 얇게 만들기 힘듭니다.
기계가 아닌 수작업으로 갈기 때문에 이렇게 얇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작업한 칼을 표준화하고
조금 더 다양한 모양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레일 철로 만든 칼만으로는 버틸 수 없습니다.
틈새시장 정도 공략하는 것이지요.”
대장간은 쇠를 다루는 곳이다. 농경사회에서는 꼭 있어야 하는 시설물이자 기술이었다.
칼과 창으로 전쟁을 하던 시절에는 쇠를 잘 다루는 대장장이를 가진 세력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른바 제철과 제련은 대기업의 몫이 되었고 칼과 창은 문화재가 되었다.
남은 칼은 부엌칼이거나 조폭 형님들이 가끔 휘두르는 ‘연장’으로 존재한다.
“사양 산업이라구요? 음식 만들어 먹는데 앞으로도 칼 사라질 일 없습니다.”
아직도 손으로 칼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아들 곽상호 씨 뒤에는 아버지 곽태섭 옹이 화로를 지키고 있다.
“저 때문에 하기 싫은 일 하시는 거 압니다. 어쩝니까. 그냥 불효자식이 효자라 생각하면서 삽니다.
아버님이 계시니까 제가 있는 겁니다. 그것도 물론 알고 계시구요. 일 하신 날은 진지도 더 잘 드십니다. ㅎ”
아들, 계속 칼을 만들 모양이다.
그렇게 손은 이어질 모양이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퍼온 내용입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경기도에서 태어나서 자랐습니다 ^^ 저도 재미있게 읽고 퍼온 내용입니다
ㅎㅎ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남원에서 몇 달 산적 있는데..그 땐 몰랐네요.
ㅎㅎ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남원에서 몇 달 산적 있는데..그 땐 몰랐네요.
진정 장인 정신으로 혼을 담아 물품을 만드시는 분들이 잘되는 이 사회가 되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좋은정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