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은 1546년 전라북도 전주 부에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는 정극호(鄭克豪)이고, 할아버지는 정세완(鄭世玩)이다. 아버지는 첨정과 익산 군수를 지낸 정희증(鄭希曾)이며 어머니는 박찬(朴纘)의 딸이다. 대호군을 지낸 양헌공(良獻公) 정인(鄭絪)의 8대손으로 전주의 명문가 출신이다.
정여립이 어린 시절에 살았던 지역에 관하여 몇 가지 설이 있다. 현재의 전주시 인후동 근방에서 살았다는 설, 그의 처가인 김제시 금구면 지역에 살았다는 설, 그리고 진안군 죽도의 입구인 현재의 진안읍 가막리 근처에 살았다는 설 등이 있다.
기축옥사 이후 그에 관한 기록이 인멸되어 그런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어린 시절 정여립은 상당히 똑똑했다.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제자들이 그에 대하여 다음가 같이 평가했다.
「넓게 배우고 많이 기억하여 경전을 통달하였으며, 의논이 과격하고 드높아 바람처럼 발하였다.」
스승 이이도 정여립의 재주를 총애하였으나, 그의 과격성에 대하여는 경계했다.
정여립의 과격성이 세간에 알려진 시기는 그의 아버지 정희증이 현감으로 나갔을 때이다. 16세의 어린 나이였음에도 고을의 일을 자기 마음대로 처단했다. 아전들은 이런 그에게 ‘악장군(惡將軍)’이란 별명을 붙여주고, 그의 말만 따랐다고 한다.
정여립은 뛰어난 자질을 증명이라도 하듯 스물다섯 살에 문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그의 과격성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했다. 스승 이이가 배척하였고, 선조도 배척하였으며, 그 축신(逐臣) 즉 선조에 쫓겨 귀양 간 신하들조차도 배척했다.
정여립의 과격한 성품이 그의 인생에 미치는 폐해가 얼마나 큰지 실감하게 한다.
훗날 정여립이 이이의 문하를 찾아갔을 때 서인계 인사들이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서인당을 찾아온 까닭을 비꼬듯 물었다. 정여립의 대답은 이랬다.
“저는 서인당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율곡 선생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스승 이이는 죽기 석 달 전에 올린 이조판서직 사퇴 상소에 그의 과격한 성품을 다음과 같은 말로 염려하고 있다.
“정여립은 박학하고 재주는 있으나 의논이 과격하여 다듬어지지 못한 병폐가 있다.”
이 상소 때문이었는지 정여립은 스승 이이를 향하여 ‘나라를 그르치는 소인’이라고 헐뜯고 말았다. 이것이 그의 장래에 치명타가 되었다.
선조 17년(1584), 노수신이 정여립을 천거했다. 그러나 선조의 대답은 참담했다.
“그런 사람을 어찌 쓸 수 있겠는가? 사람을 쓸 때는 그 이름만 취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시험을 해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당시는 동인과 서인 사이에 대립이 양극화되기 시작한 때였고, 선조는 그것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는 상황에 있었다. 이런 때에 과격한 성품을 지닌 정여립은 자칫 분란의 소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했던 모양이다.
정여립은 그 같은 분위기를 감지한 것인지 관직을 마다하고, 서인계 인사 성혼 등과 학문 토론하는 일도 뒤로하고 낙향했다. 그는 고향 금구(金溝)에서 학문에 전념하여 ‘죽도선생(竹島先生)’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재능이 출중한 정여립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대동계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무사, 공사, 천노들로 구성된 대동계원들에게 개혁 사상과 애국심을 심어주고, 말타기, 활쏘기, 칼 쓰기 등의 무술도 연마시켰다. 대동계는 호남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 갔다.
이 조직은 왜구를 퇴치하는 일로 빛나는 전공을 세운다. 1587년, 녹도에 왜선 18척이 들어와 행패를 부린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당시 전주 부윤 남언경의 요청을 받은 정여립은 대동계원들을 데리고 녹도와 손죽도(損竹島)에서 왜구를 물리쳤다. 이후 왜구들은 대동계 토벌대가 온다는 소식만 듣고도 풍비박산 달아날 정도로 그 위세가 당당하였다.
“그의 재주는 홀로 유술(儒術)뿐이 아니라 실로 못 하는 일이 없구나.”
전주 부윤 남언경은 이런 말로 감탄했다.
유술(儒術)이란 오늘날 유도(儒道)를 말한다. 이로써 정여립은 문과 무를 겸비한 선비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 뒤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 박연령(朴延齡), 해주(海州)의 지함두(池涵斗), 운봉(雲峰)의 승려 의연(義衍) 등과 왕래하면서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1589년 기어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정여립을 비롯하여 변숭복, 박연령, 지함두, 승려 의연 등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하여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입경(入京)하여 대장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했다는 고변이 들어온 것이다.
정여립은 자신의 재능을 더 이상 펼칠 수 없었다. 그의 과격한 성품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3년 후 일어난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위해 크게 활약했을 것이라 예상하면 그의 죽음이 너무도 아깝다.
‘지식(知識)이 겸손(謙遜)을 모르면 무식(無識)만 못하다.’
카톡으로 날아온 지인의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