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 시인>>
<<정철훈 시의 양력>>
* 전남 광주 출생.
* 1997년《창작과비평》으로 등단.
* 국민대 경제학과 졸업.
* 러시아 외무성 외교과학원에서 역사학 박사 수료.
*시집 : 『살고 싶은 아침』,『내 졸음에도 사랑은 떠도느냐』,『개 같은 신념』,『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 장편소설 : 『인간의 악보』,『카인의 정원』,『<소설 김알렉산드라』,
* 수필집 및 전기 : 『뒤집어져야 문학이다』,『소련은 살아 있다』,『김알렉산드라 평전』,『옐찐과 21세기 러시아』등이 있음.
<<정철훈 시인의 대표 시>>
자정에 일어나 앉으며/정철훈
폭풍 몰아치는 밤
빼꼼히 열린 문이 꽝 하고 닫힐 때
느낄 수 있다
죽은 사람들도 매일밤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한다는 걸
내 흘러간 사랑도 그러할 것이다
외면/정철훈
집에서 키우던 개가 죽었을 때, 종이상자로 관을 만들고 헝겊 쪼가리를 깔아준 건 딸이었다.
자정 즈음 차를 몰고 나가 찾아낸 공터는 얼어 있었고 인근 공사장에서 곡괭이를 가져온 건 아들이었다.
언 땅이 두 자 남짓 차가운 품을 내어주었을 때 나는 내가 묻힐 구덩이를 본 것처럼 몸서리가 쳐졌다
개털이 날린다느니, 개털이 허파에 박힌다느니, 늘 불만 가득한 나는 누구의 진심에도 가 닿지 못했다 내가 외면했던 것들이 그리워진다
아오키는 사리지고 없는 나라에 가서도 컹컹 짓고 있을 것이다
인간도 누군가를 그리워하면 컹컹 짖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은 세상의 모든 개털이 날릴 것만 같다
생활의 배반/정철훈
아내가 장기라도 팔아야겠다고 말했을 때
내 몸은 수만 볼트 전기에 감전된 듯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게 농담 비슷한 것인 줄 알면서도
내게는 농담이 아니었다
농담이 먹히지 않았다
하긴 쓰린 속을 움켜쥔 지하철 변소간에서
장기 고가구입이라고 쓴 낙서를 읽기도 했었다
인생이 낙서라면 좋았을 것이다
대체 누가 장기를 사고파는지 궁금했는데
파리 한 마리 때려잡지 못하는 아내가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근 사백을 다달이 입금시키고 있는 나는
건실한 샐러리맨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도
그 동안 내가 세상에 판 것은 내 시들어가는 몸이었고
때로 굳게 맹세한 영혼까지도 저당잡혀왔는데
내게 더 팔 것이 있다면 그건 좆일 것이다 하지만
삐죽삐죽 흰 털이 나기 시작한 사십 중반의 힘없는 물건을
대체 누가 살까
내가 이 시대를 살아내기 위해 팔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봐도 팔 만한 것은 역시 장기밖에 없었다
아내의 말이 옳았다
천천히 더듬어보면 아직 팔 만한 장기가 남아 있을 것이다
아내는 더 살아보자고 나를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 집 문서를 은행에 넣고 현금카드빚을 저금리로 돌리고 난 후
내가 생활난을 걱정하고 있을 때
아내는 생존을 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손가락을 하나씩 이빨로 우적우적 씹어댔다
엄지와 검지의 살점이 떼어지고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아무 감각도 없었다
언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내게 남은 것은 좆껍데기도 아니었다
근로자의 날 / 정철훈
오늘은 살짝 맛이 가도 좋을 것이다
바람에 뽕끼가 실려 오는 것이다
몇 가닥 남지 않은 무릎 털이 보일 만큼
바지 한쪽을 잘라내
반바지 차림으로 생이 기울어지는 한때를 갖고 싶은 것이다
허수아비로, 허수아비로 서 있고 싶은 것이다
오늘은 근로자의 날
도심이 텅 비어 있는 것만으로도
나의 근로는 자족한다
인간이 지워지고 없는 근로
그러면 공원 화단의 철쭉에 붙어 있던 개미가
발을 타고 기어오를 때
그 다족생물의 움직임이 간지러워
허수아비는 한 번씩 꿈틀대는 것이다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망각
가끔 나비가 앉았다 가는 망각
벌어질 입술 첨 방울이 떨어지는 망각
허수아비의 직립으로 보면
세상은 살짝 기울어져 있다
허수아비의 의지를 분석할 수 없듯
나는 허수아비로 기울어진 때
인간의 들끓음을 짓누른다
나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정철훈-
러시아식 이름에 부칭(父稱)이란 게 있다
누구의 자식이라는 것을 부계질서로 드러내는 작명법
이른바 오뜨쩨스뜨바
나라는 존재가 아버지가 뿌린 한 종지 정액에서 시작되었다는 부계사회의 권위가 이름 위에 얹혀 있다
그 작명법의 유래를 나는 모른다
모른다 했거늘 누런 황색 거죽을 입은 내 이름의 작명법 역시 러시아식 부계질서에서 자유롭지 않다
내 보기에 러시아는 겉으로만 부계사회일 뿐 속알맹이는 모계의 품안에서 자유로웠다
남자들이 모두 전쟁터에 나갔으므로
국토의 정맥이라 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건설한 주역은 여자들이었다
영하 50도 속에서 철도를 고정시키기 위해 침목에 망치질하는 어머니들의 옛 사진을 본 적 있다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죽어갈 때 여자들은 밥하고 빨래하고 철도를 건설했다
그 사이에 아이들은 태어났으니
여자들에게 남편이라는 존재는 그저 씨 뿌리는 기계였던 것이다
전쟁터로 떠나가는 남편을 붙들고 애면글면하는 새댁은
동네 여성 강자(强者)에게 뺨을 맞았다
남자 같은 건 버려라
남자는 쓰레기다
남자는 미완성이다
남자의 아랫도리에 달린 종은 눈속임이다
남자는 그럴듯한 인생이 되지 못한다
인생은 여자들의 음습하게 갈라진 틈새에서 싹트는 범
여자들이 철도를 건설하면 그건 남자를 건설하는 것이다
새댁은 눈물을 훔치며 강자를 따라나선다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는 아이들은 감자처럼 무럭무럭 자라나는 동안
어머니의 귀가 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고도 아이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아야 했다
한 존재의 작명법에 대한 러시아적 모순은 지상의 보편으로 자리잡았고 황색 거죽의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두렵다는 거다
내가 남자라는 게
내가 누구의 아버지라는 게
이름은 모순된 문명이다
내가 이름을 버려야 할 이유가 모성의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가 부정하는 것은 아버지도 부칭도 아니다
나는 나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내가 누구의 자식인 동시에 누구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어색하다
하나이면서 둘인 이 정체성은 두 줄기 철도를 달리는 기차와 같다
암컷과 수컷의 기능이 무수한 차별을 양산하는 구조
나는 그 구조 속에서 태어났기에 그 구조를 부정하는 것
부정하는 게 아니라 부칭에 섞여 있는 모순에 반응하는 것
나는 나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이라고 쓴다
나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로맹 가리를 읽는 밤/정철훈
로맹 가리를 읽는 밤에 비가 내린다
번역본 「그리스 사람」을 읽는 밤
그러니까 밤비가 무언가를 번역하는 몸짓으로 느껴진다
밤비가 번역하는 것이 불귀(不歸)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나는 눈치챈다
내가 오래도록 지병처럼 앓아온 의문이 싹 가시는 것 같다
내 지병은 내 피의 과거와 현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멈칫거리다가
발목을 잡히고 마는 실패한 탈주의 악몽이다
날이 밝으면 큰아버지가 공항에 도착하는 아침이다
그는 오래전 소련으로 망명했으니 그 국가가 패망해 사라졌다 해도 그는 소련에서 온 사람이다
그러니까 로맹 가리를 읽는 밤에
내가 번역하고 있는 건 큰아버지의 귀환이다
로맹 가리는 1914년 모스끄바에서 태어나 빠리로 건너간 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큰아버지는 1923년 광주에서 태어나 모스끄바로 건너갔으며 첫 상봉 이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돌아오고 있다
로맹 가리는 돌아오지 않는 수영법에 대해 쓰고 있다
헤엄을 치다가 너무 멀리 나아가면
다시는 육지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위험한 기분이 드는 때가 있다고
그는 그걸 바다를 너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바다가 장난치는 거라고 썼다
너무 멀리 나아갔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귀환할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그러니까 내가 번역하고픈 것은 귀환하지 않는 삶에 관한 가능성이다
이른바 로맹 가리 식 귀결
나 역시 너무 멀리 나와 있다
내가 소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집은 내가 추구하는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러니까 나는 캄캄한 밤과 광활한 대양에서 별빛만을 믿고 스스로 귀환하지 않을 일에 골몰해 있는 것이다
이때 큰아버지가 귀환하는 것이다
벌써 아홉 번째 귀환
귀환은 진부하다
진부해진다는 건 죽음이다
실제로 그는 죽음을 준비하러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진정 그가 이국땅에서 운명하길 바란다
내 피에도 불귀의 유전자가 흐른다는 걸 그가 증명해주길
이 시대에 고향에 뼈를 묻는 일은 사치에 가깝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낯선 납골묘원에 뿌려진다
겨우 납골당 서랍 하나를 차지하는 게 상식이 된 시대에
귀환의 명분은 퇴색한다
귀환하지 않는 게 최선이다
로맹 가리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실행에 옮겼다
내가 불안한 것은
큰아버지의 귀환이 나의 귀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개연성 때문이다
귀환할 때와 귀환하지 않을 때를 아는 사람은 아름답다
이것이 밤비가 내게 들려주는 번역이다
큰아버지 같은 사람은 세 줌 네 줌씩 되지만
로맹 가리는 오직 한 사람뿐이다
살아 있을 때 대지 그 자체가 되는 것을 로맹 가리 식 실존이라고 부를 만하다
로맹 가리를 읽으면서 날이 샌다
스탠드등을 끄는데 로맹 가리의 마지막 숨결이 미명 속으로 툭 떨어진다
사랑 너머까지 사랑을 끌고 갔던 로맹 가리의 마지막 총소리가 이 새벽을 화약냄새로 흥건히 적신다
까자끼 자장가를 들으며/정철훈
자장가는 왜 이리 슬플까
그건 꿈에서 왔기 때문이지
이루지 못한 꿈
바유시키 바유 바유시키 바유
자장가는 전생에서 오는 것
세상이란 슬픈 곳이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되지
태어나기 전부터 알기 때문이지
바유시키 바유 바유시키 바유
자장가는 태반에서부터 빙글빙글 돌아가는 음반
바늘이 운명의 표면을 긁을 때 나는 소리
하늘의 별도 그렇게 태어나고 그렇게 소멸한다지
바유시키 바유 바유시키 바유
자장가는 아기의 귀에 수면의 묘약을 흘려보내며 말하지
세상 같은 거 잊으라 잊으라
지구는 회전하고
세상의 모든 자장가는 그 회전축을 따라 돌고 있지
바유시키 바유 바유시키 바유
시인 죽이기/정철훈
내 애인은 시인이다
요즘 들어 아내는 부쩍
나를 의심하는 눈치다
뻑하면 집에 들어오지 않거나
밤샘 폭음의 아스라한 흔적 뒤에는
늘 애인이 있기 마련이라며 입에 거품을 문다
애인을 버리지 않으면 갈라설 수밖에 없다
마지막 경고다
아내가 내 목에 비수를 들이밀 때
나는 애인을 부정한다
그런 게 어디 있겠느냐
내 주제에 애인은 어불성설이다
나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애인을 모른다고 잡아떼고
그러면 아내는 내 등을 토닥이며 위로한다
애인 따위는 잊으라
난 평범한 남편을 원할 뿐이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라지만
내가 애인을 사랑하기에
원고지 칸칸을 메우듯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아내는 알지 못한다
내가 알고 있는 건 단 하나
애인을 사랑할수록
아내를 철저히 속여야 한다
내가 애인을 사랑할수록
내게 애인은 없다
어젯밤도 애인의 귓볼을 물고 뜯으며
길고도 깊은 사랑을 나누었지만
아내와는 갈라설 수 없다
요즘 들어 부쩍 생각건대
내가 살 길은 시를 죽이는 쪽이다
나를 죽이는 쪽이다
개 같은 신념/정철훈
밖에는 비가 오고 아내는 지금 샤워를 하고 있다
모든 것이 젖어드는 칠월 장마철
비애의 강이 안팎으로 흘러가는데도
나는 내가 젖지 않는 이유를 모른다
빗줄기와 샤워 물줄기 사이에 서 있으면서도
물 한 방울 묻지 않는 내가 죽이고 싶도록 밉다 하지만
아내는 죽기도 쉽지 않다는 것을 내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어젯밤 아내는 늦도록 귀가하지 않는 나를 기다리다
화장실 문고리에 넥타이를 걸어놓고 목매는 시늉을 했더랬다
그러니까 아내는 자살 미수 후 긴 잠에서 깨어나
비 오는 아침에 뜨거운 샤워를 하고 있는 것인데 아내는
내가 늦바람이 나서 뻔뻔하게도 어떤 낯선 분냄새를
버젓이 묻혀왔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나 아내여, 죽음은 리허설이 없다
딸년도 아들놈도 조금은 슬프게 웃지 않았던가
혼절한 듯 쓰러진 엄마를 일으키던 아이들이
우리가 벌이는 애정행각에 시큰둥하지 않았던가
녀석들은 아마도 유행가로 배웠을 테지만
사랑이야말로 쓰라린 배반임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비와 샤워는 의심의 음악인 셈이지만
나는 그 의심에 젖지 않기로 한 것이다
한번 삿갓을 눌러쓰면 하늘이 보이지 않듯
아무리 비가 와도 나는 젖지 않는다
그래도 어젯밤은 너무 아슬아슬해
하마터면 모든 걸 실토할 뻔했다
아내의 신파적 자살 시늉이 두려운 게 아니라
내가 비애의 강에 풍덩 빠져버렸을 때
나 역시 자살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이 두려웠다
아내여, 내가 젖는다고 세상이 바뀔까
사랑도 죽음만큼이나 간단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미수 사건 후 집에서 키우는 요크셔테리어 두 마리가
아내의 품속을 번갈아 들락거리며 킁킁 냄새를 맡는다
내가 불러도 녀석들은 오지 않는다
개들이 진실의 냄새에 더 민감한 것이다
꼬박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코와 입에서
연기를 내뿜던 나를 녀석들은 차갑게 외면했다
그건 개들의 신념이다 본능이다
사랑의 기압골이 맞부딪쳐 오늘은 새벽부터 비가 내리고
아내는 지금 뜨거운 샤워를 하고 있다
아내여, 지금 맞고 있는 물줄기가 사랑임을 왜 모르는가
물 위에 쓰는 것이 사랑인 것을
내가 젖지 않는 이유는 이미 내가 젖어 있기 때문임을
개들의 신념보다 나의 신념이 때로는 진보일 수 있는 게다
그러므로 나는 뉘우치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실토하지 않을 참이다
이들도 못난 아버지를 이해할 날이 오겠지
사랑도 죽음과 같아서 리허설이 없다는 것을
빗줄기가 아무리 거세게 나를 의심한다 해도
나는 참말 고백할 게 없다
아내여, 물기가 마르거든 말을 붙여다오
고백하지 않는 당신의 신념이 뭐냐고
물 위에 쓰는 사랑이 대체 뭐냐고
선거에 대하여/정철훈
누런 아교풀이 그들의 얼굴 밑에서
벽을 타고 흐르다 굳어 있다
얼굴과 기호들은 떨어지지도
벗겨지지도 않는 종이의 질과
오프셋 인쇄기술의 개가일까
초등학교의 낮은 담벼락을 따라
머리가 벗겨진 남자가 금붕어 봉지를 들고
지ㅏ간다 붕어는 느리게 지느러미를 움직이고
확대경 같은 비닐에 큰 입을 대고 뻐끔거린다
금붕어는 산소가 모자라 빨갛다
남자의 기호는 비닐일까 굼붕어일까 漁頭일까
남자의 얼굴도 산소가 없다
침을 뱉는다 담벼락 밑으로 흐르다 만 누런 아교풀과
그 아래 들러붙은 침은 느낌이다
남자는 기호 1번에서 기호 7번 밑을 느리게 걷는다
붕어처럼 기호로 작동되는 정치벽보처럼
그의 이름과 기호는 비닐 안의 정치처럼
산소가 없다
일곱 장의 벽보들은 한결같이 눈이 없다
누군가 그들의 눈을 짖어버렸다
벽보는 얼굴이 아니라 하얀 백상자임이 밝혀졌다
이젠 기호만이 온전할 뿐이다
1에서 7까지 그들은 모두 아마추어처럼 웃는다
남자가 선택한 기호의 역대 전적이
그의 민주주의와 그의 산소량을 결정한다
그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의 금붕어가 질식하고 있다
이번에도 1에서 7까지가 그의 산소량을 담보한다
합동연설회 연단에 올라온 일곱 난쟁이들의 성대도
산소 부족으로 빨갛게 부어올랐다
아버지의 등/정철훈
만취한 바버지가 자정 너머
휘적휘적 들어서던 소리
마루바닥에 쿵, 하고
고목 쓰러지던 소리
숨을 죽이다
한참만에 나가보았다
거기 세상을 등지듯 모로 눕힌
아버지의 검은 등짝
아버지는 왜 모든 꿈을 꺼버렸을까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검은 등작은 말이 없고
삽십 년이나 지난 어느 날
아버지처럼 휘적휘적 귀가한 나 또한
다 큰 자식들에게
내 서러운 등짝을 들키고 말았다
슬며시 홑청이불을 덮어주고 가는
딸년 땜에 일부러 코를 고는데
바로 그 손길로 내가 아버지를 묻고
나 또한 그렇게 묻힐 것이니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서러운 등짝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검은 등짝은 말이 없다
학교에 갑시다/정철훈
당신은 물었지
어젯밤 왜 변기에 귤을 내던지고 손으로 주무르고 했는지
변명 따윈 안 하겠소
쓰러져도 결국 나 자신에게 쓰러지고 만 거요
모독을 느꼈다면 용서하시오
나는 나를 모독했을 뿐
몇 번을 고쳐 내어나도 이런 게 인간이라면
난 인간 아니고 싶소
가장 순수한 귤을
가장 더러운 변기에 넣고 주무르는 변태가
나라는 괴물 맞소
미와 추가 함께 있는 모순 자체를
변기에 넣고 싶었던 거요
돌이킬 수 없는 존재의 이중성 말이오
나란 괴물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요
흑흑
당신 없이 어찌 살지
당신의 다섯 몇이 나에게 감겨오고
당신의 한 명이 날 끌고 가서 변기에 머리통을 처넣고
당신의 또 다른 한 명은 나를 비웃고
당신은 구석에서 울고 있고
숨을 못 쉬어 입술이 파래진 채로
당신의 목을 조르고 있소
학교에 갑시다
정신병을 고치는 학교라는 간판을 단
정신병이 저절로 도지는 학교에 갑시다
누에의 꿈/정철훈
어느 날부터 나는 커피향이 스멀거리는 마포의
옥외 커피점에 앉아 있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실내와 실외를 구분 짓는
그 어중간한 경계에는 아무 선도 없지만
내 몸이 그 선에 얹혀 있다는 게
커피 향과 더불어 자유를 떠올리게 한다
기차 레일을 밟고 한없이 걸어 보던 어린 날의 발자국들이
그 보이지 않는 선에서 저벅거리고
기차가 달려와 나를 냅다 치받아도
아무 생채기 없이 다시 살아나는 그런 선이다
그 선에 걸려 푸드득거리다가 겨우 빠져나온
저 허공의 새떼들이나 알까
그렇다고 안과 밖을 통합하자는 야욕이 있어서가 아니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하나의 점으로서
오가는 행인들의 이동을 내 몸에 묶어 본다
그들의 슬픔과 기쁨, 만남과 헤어짐, 열정과 냉정 같은 것들
그러면 내 몸을 당기는 무한한 선들이 생겨나
나는 그 선을 당겼다 늦췄다, 묶었다 풀었다 하면서
하루 같지 않은 하루를 그냥 보내는 것이다
나는 그 무수한 선을 뽑는 한 마리 누에가 되어
꿈틀대면서 환희의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무심코 선 하나를 내 쪽으로 당겨 보기도 한다
선이 선을 달고 딸려 오다가 뒤엉킨다
선들이 엉키면 엉키는 대로
아침은 아침대로 좋지만 오후의 때가 되면
커피 향의 질감이 조금은 무거워지고
내 몸에 묶인 선들도 조금은 낭창낭창 헐거워져 좋은
오후의 한때를 즐겨 보는 것이다
영혼 같은 게 있다면
영혼은 밝으면 별반 쓸모없는 게 되고 말 것이기에
나는 영혼이란 놈이 좀 어두컴컴하게 숙성되기를
그 옥외 커피점에 앉아 기다려 보는 것이다
콩자반/정철훈
아침상에 동그마니 놓인
콩자반 종지
물끄러미 바라보다
숟가락을 슬며시 내려놓는다
간장에 달달 볶아
반질반질 윤기 나는
까만 눈동자들
한 콩 한 콩이
내 식솔들의 눈동자였다
콩아, 너 살았니
콩은 나를 빤히 쳐다보고
나는 말똥말똥 까만 눈빛을
슬그머니 피한다
콩깍지를 쓰고
눈먼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은 것이 엊그젠데
아이들은 벌써 상사춘의 나이
눈 맑은 청년이 돼라
한 콩 한 콩이
내가 먹은 나이였다
밤상을 밀다/정철훈
입 안의 밥알을 세어보았다
늦은 저녁상 앞에서
첫 숟갈을 떠넣다 말고
혀로 밥알을 돌돌 굴리고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에 비가 내렸다
자카르타 빈민촌
아르헨티나 집시 마을 어디쯤
하루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네 식구
물살을 가르는 자동차를 향해
소년이 조막손을 내밀 때
다리를 절며 건너편 차도를 걸어가던 사내
틀림없는 나였다
찬비를 맞으며
머리에 훈김이 피어오르도록
도시 뒷골목을 헤매던 절름발이
달팽이 한 마리가
빗물 흥건한 브라운관에 붙어
까만 촉수를 연신 흔들었다
소년아, 너와 함께 철이 든다
손에 잡힐 듯 아스라한 양철지붕 아래
소년의 눈망울이 반짝이고
나는 슬며시 밥상을 밀었다
저물녘 논두렁/정철훈
하루도 이틀도 심심한 비가 내리네
장성 갈재를 넘어서면
갈맷빛 부동산 아래
고물거리는 사람들
순한 얼굴에 웬 슬픔은 일렁여
지난밤에 모두 안녕하신가
깊은 속내는 가슴에 묻은 채
꽁초를 빨고 소주를 들이켜고
실없이 코를 벌름이는가
오늘 넋두리 같은 가랑비는
울어도 울어도 가난했던 농촌을 적셔
온통 고향 생각뿐
용케 빗줄기가 굵구나
저물녘 논두렁을 지나면
무엇이 세상을 견디는지
지금은 돌아간 사람처럼
풀잎 하나에도 머뭇머뭇
하루도 이틀도 심심한 비가 내리네
병사들은 왜 어머니의 심장을 쏘는가/정철훈
죽은 병사들이 학이 되어 날아갔다는 러시아 가요 「주라블리」의 가사는 진부하다
죽은 자는 죽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는다
주라블리의 하얀 날개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전선에서 불똥이 튈 때 어머니는 군화를 신듯 두꺼운 양말을 조여신고 일어선다
어머니의 일생은 이미 패배한 것이어서 자식을 찾아오기 전에는 다시는 앉지도 눕지도 않을 것이다
흔히 죽은 자의 영혼은 날아오른다고 하지만 문제는 대지에 남은 육신이다
뼈와 살과 흥건한 핏물……
자작나무는 영혼이 빠져나간 시신을 뿌리로 휘감으며 자란다
자작나무 숲에 들어가보면 안다
잘박이는 낙엽을 밟는 순간 물컹하게 풍기는 피비린내
하늘은 어둡고 자작나무 껍질은 은박지처럼 반짝이는데 거기 맺혀 있는 건 어머니의 눈물
체첸에 파병된 아들을 찾아나선 병사들의 어머니회원들이 모스끄바에서 그로즈니까지 도보시위를 벌일 때 그들의 손에는 흰 깃발이 들려 있었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자작나무 밑에 시체가 썩고 있다고
가슴의 붉은 리본은 아들의 전사통지
산 아들이 아니라 죽은 아들을 찾으러 가는 어머니들의 걸음은 이미 총알 빗발치는 전장을 밟는다
아들의 시체를 찾아 헤매는 동안 어머니의 얼굴엔 수염이 자란다
그리하여 모든 병사들은 적군이 아니라 어머니의 심장을 쏘는 것이다
적군은 앳된 얼굴의 체첸 전사가 아니라 그 병사의 어머니며 어머니의 심장이다
언 땅으로 눈발은 흩날리는데 거기 반쯤 묻혀 무엇인가를 움켜쥐려고 내뻗친 시신의 손목
어머니들은 얼어붙은 손목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든다
우리는 알고 있다
주라블리들이 떼지어 겨울 하늘을 날아가는 저 진부한 노래가
왜 어머니의 심장 속에서 흘러나오는지를
비비안나에게 / 정철훈
난 가끔 손재주 많은 꼽추 친구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평생을 집시 무리에 끼어 세상을 유랑하다
폭삭 늙어버린 그런 꼽추 말이에요
바이올린도 켤 줄 알고 계집 맛도 좀 알아서
황혼녘이면 무리들 가운데서 혼자 떨어져
달을 쳐다보며 남몰래 눈물도 흘릴 줄 아는 그런 꼽추
유랑극단에서 피에로로 잔뼈가 굵고
어깨엔 우리를 빠져나온 사자에게 물린 상처가
훈장처럼 새겨진 그런 꼽추 말이에요
우리는 어느 날 한눈에 상대방을 알아보고
친구가 되는데 그 기념으로
서로의 비밀 주머니에서 빛나는 단도를 꺼내
손바닥에 십자가를 긋고 피를 섞어
의형제가 된 것을 축하하는 그런 꼽추
그렇더라도 우리가 오래 붙어 있을 운명은 아닐 테니
내 소원은 꼽추보다 먼저 숨을 거두는 것
어느 날 내가 누군가에게 칼을 맞고 죽어가고 있을 때
우리의 빛나는 단도를 꺼내 아예 목숨을 끊어놓기를
그리고 축 늘어진 내 시체를 질질 끌고 가서
문밖 급류 속에 내동댕이쳐주길
시체가 뜨지 않도록 아예 내장까지 도려내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요
그렇지 않나요. 비비안나!
럼주 세 통을 따서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의 잔을 채워요
빛나는 단도가 아직 잠자고 있을 때 실컷 마셔보자고요
모독/정철훈
54년 말띠 사내의 얼굴 살이 내리고 있다
며칠 안 본 사이 눈은 퀭하고 피부는 축 처져 있다
IMF 위기 때 환율 폭탄을 맞아 사업은 망하고
아파트를 급매로 내놓은 지 십여 년
요즘 강남에선 강북을 북한이라고 부른다고 분통을 터트리는 사내
재정부장관의 사진을 칼로 그어버리고 싶다는 사내
국가의 그늘이 사람을 잡아먹는 걸 빤히 바라보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의 제1열에서 죽을 둥 살 둥 앞만 보고 달려온 사내
윤기 자르르한 경주마에서 하루아침에 수레도 끌지 못하는 비루먹은 신세
밤마다 치가 떨려 아침이면 아구가 뻐근하다는 사내
가을은 가을이어서 막걸리집 앞 노랑은행잎이 아름답지 않냐고 했더니
썩은 오줌 냄새만 나는 헛것이라고 독기를 뿜어대는 사내
지난 대선 때 찍은 투표용지를 돈이라도 주고 되칮아오고 싶다며 울분을 삭히느라 살이 내리고 있다
뼈가 녹고 형체 없는 마음도 녹아내린다는 사내의 말에 티끌만큼의 과장도 섞여 있지 않았다
며칠 전 찾아간 직업소개소에서 완도 어디쯤 가두리 양식장 잡부밖에 써줄 데가 없다는 말을 듣고 키가 한 뼘이나 줄어든 사내
행나무 위로 눈이라도 쏟아질 듯 하늘은 잔뜩 흐려져 있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지루하게 흘러가는 4분의 4박자 애국가를 바꿔서라도 이 슬픈 사내를 춤추게 할 곡조는 없는가
걸을 때마다 말굽 모양의 증오를 찍어대는 사내의 울분을 삭힐 노래는 없는가
이용악의 하늘은 새하얀 눈송이를 낳은 뒤 은어의 향수처럼 푸르렀다는데
애초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어쩌고 하는 애국가의 첫 소절에서부터 무슨 전조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라고 시비를 걸어보고 싶은 날이다
내 쪽으로 당긴다는 말/ 정철훈
새벽이 차다
내가 자고 나온 방을 질질 끌고 나온 것 같은
새벽이다
동아줄을 어깨에 감고 무언가를 끌고 있는 느낌
일리야 레삔의 그림에서 배를 끄는 노예들 가운데
내가 끼어 있는 것 같다
실은 아무것도 끌지 않는데
내 쪽으로 끌어당겨지는 무언가가 있다
내 쪽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
인간의 이기심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끌어당긴다는 것은 내 쪽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내 쪽으로 끌어당기는 포옹
내 쪽으로 흡착하는 입맞춤
내 쪽으로 힘껏 끌어당기고 있는 사랑한다는 말
말이 당겨진다는 것
당겨져 어깨에 얹힌다는 것
평생 노예가 되어 끌어당겨도 좋을 사랑한다는 말
동아줄이 자꾸만 짧아지고 있다
허공의 안쪽/정철훈
사십구제를 마치고 하룻밤 묵으러 들어온 산방(山房)
파리 한 마리가 방안을 휘돌아치며 붕붕거린다
천장이며 벽이며 창문에 몸을 찧기 여러 차례
허공이 있었는지도 깜박했는데
파리 한 마리가 허공에도 길이 있다며
갈지자로 휘적거린다
허공안에 또 한 겹의 허공이 있다는 듯
머리가 깨져라고 부딪치는 날파리
망자는 어디로 간 걸까
화장터에서 곱게 빻아온 유골 단지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영정 속에
망자가 없는 건 분명한데
파리가 그려놓은 허공이 내 안에 가라앉고 있다
나는 마당에 나가 달 구경을 하고
날벌레들은 방안에 들어와 형광등 구경을 하고
내가 망자에 대한 생각으로 골똘해 있을 때
파리며 하루살이며 나방이며 질겁한 날벌레들은
망자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영혼의 벽에
쉴새없이 부딪치고 있다
파리가 그려놓은 허공의 안쪽
붕붕과 휘적휘적 사이
여치 소리/정철훈
여치 소리는 찌릿찌릿 연애사
저기 여치양, 저기 여치군
미세전기로 오는 찌릿찌릿
손끝으로, 손가락 끝 지문으로 오는 찌릿찌릿
심장에 번지는 찌릿찌릿
지문으로 와서 지문을 섞어놓는 소리
저기 두 마리 초록 여치
더듬이를 길게 세워 눈망울부터 더듬거리는 초록 곤충
수풀을 지나 잎새를 건너 가지 위에서 껑충
아무리 멀리 있어도 마침내 닿고 마는 초록
두 초록이 하나의 초록으로 찌릿찌릿
전기가 올라 있는 초록
수풀 전체가 감전된 듯 찌릿찌릿
한 존재가 한 존재를 관통하는
한 존재가 한 존재로 인해 다른 존재가 되는 찌릿찌릿
저기 여치 여사, 저기 여치 신사
태초에 여치 소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