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동안의 힘들었던 무거운 짐 내려놓고 無心으로 상주땅의 길을 걷다
☞ 산행일자: 2013년 12월 28일~29일(무박산행)
☞ 산행날씨: 맑은 날씨(이른 새벽에엔 계속 눈이 내림)
☞ 산행거리: 도상거리 약 23.6km + 어프로치 1.5km / 11시간 35분소요
☞ 참석인원: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 15명과 함께
☞ 산행코스: 갈령-갈령삼거리-(H)-못제-510봉-비재-459봉-봉황산-산불감시초소
25번국도-화령재-청원~상주간 고속도로 위-윤지미산-437.7봉
무지개산 갈림길-무지개산-329.6봉-304봉-신의터재
☞ 소 재 지: 경북 상주시 화북면 화남면, 화서면,화동면
참으로 힘들게 2013년도 계사년의 한 해가 넘어 가는 마지막 대간길에 나선다.
올 한해를 뒤돌아보니 범여가 참으로 힘들게 보내지 않았나 생각을 해보지만
몸에 좋은 약이 쓰듯이 고통속에서도 모든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면 살아야
하지 하는 맘가짐을 다져 보면서 이렇게 건강하게 산에 다닐 수 있다는
그 자체에 감사함을 느끼며 새해맞이에 대한 각오를 다진다.
오늘은 일욜 저녁 산악회 송년회 때문에 30분 일찍 대간길에 나서려니
상당히 바쁘기만 하다... 거기다가 어제 저녁에 친한 지인들과 가는해를
아쉬워 하면서 막걸리 한사발 마시고 스크린 골프를 쳤는데 오랫만에
채를 잡은 탓인지, 술취한 상태에서 뭐가 잘못 되었는지 자고나니 평소에
조금만 신경쓰면 아픈오른쪽 팔목이 너무 아파서 밤에 잠을 한 숨도 못잤다.
바쁜 와중에도 자주 다니는 정형외과에 들려 물리치료를 받고 대간길에 나선다.
양재동 탑승장소에서 동료들과 만나 인사를 나눈 다음에 차에 오르자마자
깊은 잠에 떨어져 버스가 청원~상주간 고속도로 휴게소에 도착한 다음에야
잠에서 깨어난다. 이곳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나오니 하늘에 별이 촘촘하건만
눈이 쏟아지니 괜스렌 걱정스런 마음이 앞서는데 버스는 화서I.C 를 벗어나
조금을 더가서 갈령터널을 지난 다음 우측 구도로로 올라서서 들머리에 도착한다.
오늘 산행구간의 지도
오늘 산행구간의 고도표
갈령(葛嶺:02:30)
경북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와 화북면 상오리를 잇는 고개로
49번 국도가 지나는 곳으로 주변에 칡이 많다하여 ‘칡 갈(葛)’
字를 써서 갈령이라 부르고 있는 곳으로 십승지중의 하니인 상중 우복동이 있다.
울 산방 대간팀의 미녀 4총사
5년전인 대간 북진길과는 참으로 많이 변해있다.
예전에는 차들이 다니던 49번 국도 도로는 이제 이 고개 아래로 터널이
뚫리는 바람에 나처럼 대간 산꾼들이나 다니는 잊혀진 고개가 돼버렸다.
그러나 너무 서러워마소... 이곳만 그런것이 아니니 말이요
인간들이 편리함만 추구하는 간사스런 근성이 문제지...
갈령에서 좌측 내리막인 화남면쪽으로 내려서니 좌측으로 우복동천 가는길이 있다.
이곳은 십승지 중의 하나인 우복동천의 들머리이다... 대간 끝내고 꼭 가고 싶은 곳이다.
십승지(十勝之)는 예언의 땅이다.
전란·굶주림·천재지변으로부터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축복 받은 땅이다.
조선시대 평범한 민초들이 천수(天壽)를 누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흉년과 홍수로 굶어 죽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수많은 백성이 개죽음을 당했다.
전쟁과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구는 자연스럽게 비결(秘訣)을 탄생시켰다.
비결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법을 말하는데, 대표적인 비결서가 <정감록>이다.
십승지는 이러한 비결에서 유래되었다.
<정감록>은 가장 널리 십승지를 알린 비결서다.
역사적 격동기에는 수많은 백성이 십승지에 나타난 예언의 땅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뿌리를 내렸다.
십승지는 ‘무릉도원’으로 대표되는 동양의 전설적인 이상향 의식과 맞물려 한국인의 심층의식의
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우복동(牛腹洞)은 예로부터 영남 일대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승지로
상주 속리산 동편에 숨어 있다고 전해진다.
동네가 마치 소의 배 안처럼 생겨 사람 살기에 더없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 신분제도가 흔들리면서 백성들은 물론
몰락한 양반의 후예들도 우복동을 찾아 떠나기도 했다.
이 사실은 정약용의 <다신시문집> 제18권 ‘증언(贈言)- 다산이 제생(諸生)에게
주는 말’에 기록되어 있다.
속리산 동편에 항아리 같은 산이 있어
옛날부터 그 속에 우복동이 있단다네
산봉우리 시냇물이 천 겹 백 겹 둘러싸서
출입문은 대롱만큼 작디작은 구멍 하난데
조금 깊이 들어가면 해와 달빛이 나고
기름진 땅 솟는 샘물 농사짓기 알맞아서
- 중략 -
- 정약용 ‘우복동가(牛腹洞歌)’ 중에서
그 곳은 속리산 동편,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일대였다.
갈령 정상에 있는 도로개통 기념비
이곳 정상에는 갈령 표시석과 도로개통 기념비 그리고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2009년 3월 19일 북진길에 이곳으로 내려오다가 산불감시초소 감시원에게 걸려서
곤욕을 치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기만 한 곳이다.
갈령 표시석에서 단체 사진을 찍은 다음에 02시 45분에 산행길을 나선다.
갈령 헬기장(02:50)
산행 5분만에 어둠속에서 헬기장을 만난다.
어둠속에 계속해서 오르막을 치고 오르는데 암릉구간은 계속되는데 바위위에
눈이 녹아서 빙판이 되어 있는 곳에는 상당히 미끄럽다... 조심스럽게 걷는다.
계속해서 오르막 암릉구간이 계속되는데 오늘은 대장을 비롯한 실세(?)들은
산에 오르지 않는 바람에 정예요원들만 산행을 시작하는데 평소에 준비성이
철저한 하늘마음님 앞서 가다가 계속해서 머뭇거린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이유없이 계속해서 코피가 난다고 하는데 이유를 모르겠단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휴지로 코를 막고 응급조치를 한 다음 다시 길을 걷는다.
우측 상오리 쪽의 마을 불빛은 아직도 깊은 밤임을 알려준다.
갈령삼거리(03:20)
어둠속에 암릉구간 1.3km를 오른 다음에 본격적인 대간길에 접어든다.
갈령 삼거리에 도착하니 먼저온 동료 산꾼들이 물한모금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곳 원형 벤치에 베낭을 내려놓고 물 한모금을 마신다.
지난구간 소백산의 혹독한 추위에 대한 학습 효과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늘도 꽤나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다.
잠깐 동안의 꿀맛같은 휴식을 취한 다음에 좌측 비재쪽으로 대간길을 이어간다
암릉구간의 급경사로 어둠속에 내려선다.
이곳은 눈은 그리많지 않지만 낙엽밑이 얼어있어 상당히 미끄럽다.
로프를 잡고 조심스럽게 내려서니 안부가 나온다.
어둠속에 급경사를 만나는데 위험하니 돌아가라는 경고판을 따라
우회하여 조심럽게 계속해서 내려선다. 능선 아래에는 마을 불빛이 보인다.
어둠속에 만난 헬기장(03:55)
헬기장을 지나 조금을 더가니 백두대간상의 유일한 습지라는 못재가 나온다.
못제(04:00)
못제는 백두대간상에 유일하게 존재한다는 작은 습지로서 천지(天池)라고도 하며 사방이
막혀있는 2~300평의 정도에 물이 고여있는 면적은 10여평이라고 하는데 이젠 그것마저
보기가 힘들고 주변에는 참나무가 많고 숲이 우거져 습지라는 걸 느낄 수 없는 실정이다
못제는 방죽을 의미하는데 산꾼들은 고개 이름을 착각하여 못(嶺)재라고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견훤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는데 어둠속에 평평한 곳이 눈만 가득히 쌓여 있다.
후백제를 세운 견휜이 이곳 상주출신이다
못재의 맞은편에 솟은 대궐 터산에 성을 쌓은 견훤이
이 곳 못재에서 목욕을 하여 힘을 얻어 세력을 넓혀 가자,이를 알게 된 신라 장군 황충이 못에
소금 수백포를 풀어 견훤의 힘을 꺽었다는 것이다. 지렁이는 소금을 매우 싫어한다는 데 착안하여,
「삼국유사」에 “견훤은 지렁이의 자식”이 라는 데에서 유래된 듯한 전설이다.
전설에서 눈에띄는 것은 ‘지렁이’ 와 ‘소금 뿌리기’ 이다. 지렁이 이야기는 왠지 혐오감은
주고 있으며, 연못(습지)에 소금을 뿌렸다는 이야기는 유쾌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이런 불유쾌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올까?
어쩌면 자연보호 혹은 생태계 보호를 위한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마루금 상의 습지라면 각종 곤충의 집과 알, 애벌레 그리고 번데기 들이 서식할 것이다.
습지가 잘 보전되면 이들의 활동이 왕성하게 되고 나아가 우리 인간과
공생할 수 있는 보다 나은 터전이 마련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모두가 산림을 훼손하지 않고 아끼고 잘 보전하자는 자연보호 차원에서 나온 속담들일게다.
특히 ‘썩은 나무를 땔감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속담은 다른 생물에 대한 배려가 담겨 있다.
썩은 나무는 다른 생물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못제에서 조금을 지나니 충북 알프스 표지판을 만난다.
충북 알프스는 충북 보은군과 경북 상주시 사이에 걸쳐있는 산줄기로서 보은군 서원면
서원교를 들머리로 하여 충북에서 가장 경관이 뛰어난 구병산 구간과 속리산 구간의
산줄기를 이어서 보은군 신정리나 또는 보은에서 상주로 넘어가는 고개인 활목고개를
날머리로 하는 산행코스로 충북 보은군에서 1999년 5월 17일 ‘충북 알프스’로 특허청에
등록하였고 이곳에는 신라 진흥왕때 의신조사가 창건한 법주사와 많은 국보와 보물들이
있을 뿐 아니라 원시림이 자연 그대로 잘 보존된 구병산과 그리고 수석 전시장이라
불릴만큼 기암괴석과 속리산을 비롯한 볼거리가 풍부한 곳이다.
주요 산줄기는 백두대간과 충북 알프스와 겹쳐있고 못제에서 문장대까지는 함께한다.
억시기고개 갈림길(04:15)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에 있는 고개로서 못제의 견휜에 대한 전설과 연관된 고개란다.
옛날 견휜이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의 신라 황충과의 전투에서 매번 승리를 거두자
황충장군이 그 비밀을 알아내기 위하여 염탐꾼을 시켜 뒤를 밟은 결과 견휜이
기진맥진 상태에서도 이곳 못재에서 힘이 솟구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황충장군은 견휜이 지렁이 자손임을 알고 지렁이가 소금물에 약하다는 점을
이용하여 이곳 못재에 소금 300석을 풀게 하였다.
소금을 푼 물에 견휜이 목욕을 하고 난 뒤 힘이 빠지자, 견휜을 쳐서 크게 이겼다고 한다
못재를 지나 나즈막한 고개에서 또다시 휴식을 취한다.
오늘은 대장을 비롯한 실세들이 산행에 몽땅 빠지는 바람에
모두들 어둠속에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배려하면서 같이 휴식을 취한다.
막내인 쾌도세무님이 사과를 한봉지 꺼내어 나눠 먹는다
조망바위(04:45)
어둠속에 조망바위 표지판을 만나지만 한밤중이라 그냥 지나친다.
낮에 이곳에 서면 건너편에 있는 건너편 대권터산(청계산)이 잘 보이는 곳인데 말이다
다시 조망바위를 우회하여 엉덩이를 땅바닥에 대고 내려서는데 지난구간에
신었던 신발을 오늘 또다시 신었는데 봉숭아뼈 위에 통증이 시작되는데 미치겠다.
그러는 사이 일행을 놓치는 바람에 빨리 따라 가려다가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스틱이 휘어져 버린다... 그래도 다치지 않은게 천만 다행이지 ㅋㅋㅋ
510봉(05:00)
510봉 정상에 올라서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주렁주렁 달려있고 무명묘지 1기가 있다.
이곳에서 내리막길로 비재로 향하는데 어둠속에 키 큰 갈참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15분정도를 내려서니 비재가 나오는데 예전의 도로는 보이질 않고 터널공사가 한창이다
비재(320m:05:15)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와 장자동 사이에 있는 재로 새가 나는 형국이어서
불리는 이름으로 비조치(飛鳥峙), 비조령(飛鳥嶺)으로 불린다.
예전엔 철계단에 2차선 도로였는데 지금은 터널공사장으로 변해있다.
《‘비스듬하다, 비탈, 벼랑’ 등의 뜻으로 쓰이는 말을 지명에서 한자로
표기할 때는 ‘천(遷), 애(崖), 별(別), 성(星), 비(飛)’로 나타난다.
상주지역에서는 ‘비루, 비알’이라고 한다. ‘비탈’과 ‘비루’를 땅이름에서
한자로 옮길 때 ‘비(比, 飛, 琵)’를 썼는데 특히 ‘비(飛)’가 많이 쓰였다.
고개로 내려 왔다가 다시 좌측 능선으로 올라선다.
비재 (2009년 3월 16일 북진길때의 사진)
어둠속에 비재에서 급하게 오르막을 치고 오르는데 음지라 그런지 눈이 제법
쌓였고 안부 아래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스미니 상당히 춥다.
능선을 치고 올라 좌측으로 꺽어지는 곳 이정표에 누군가 이곳을 ‘비재’라고
메직으로 써놓았는데 이곳은 비재가 아니다... 기록은 정확해야 한다
459봉(05:40)
이곳 정상에도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많이 달려있고 넓은 공터에 묘지 1기가 눈에 파묻혀 있다
이곳부터는 예전 북진길에 보이지 않던 송이버섯 재배구역이 봉황산 아래까지 펼쳐진다
계속 오르막으로 올라다가 다시 내리막을 내려서고를 계속 반복해서 진행하다가
암릉구간을 우회하여 계속 걸어가는데 고도를 계속 높이다 보니 눈이 상당히 많다.
비재를 출발한 지 1시간 50분 가까이 지난 다음에 어둠속에 높은 산이 아련히
보이는데 저 곳이 아마 봉황산인 모양이다... 해뜨기 직전인지 상당히 춥다
이곳은 일반 등산객들은 다니지 않는 곳인데 노끈으로 송이버섯 재배구역
표시를 해놨고 프랑카드를 걸어 놨는데 대간 산꾼을 급박을 한다.
이 사람이! 대간 산꾼들을 도둑으로보나... 기분이 썩 않좋다.
봉황산(鳳凰山:740.8m:07:05)
경북 상주시 화서면과 화남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 표지석엔 '白頭大幹 鳳凰山 740.8m'라 적혀 있고 삼각점과
백두대간 안내 표지판이 보이는데 오늘 산행구간중에 가장 높은 산으로
중화지구 화령(化寧) 북쪽에 우뚝 솟아있는 백두대간상의 산이다.
어르신 올 한해동안 같이한 산행 즐거웠습니다
1300여 년 전 이 산에 봉황새가 찾아들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하여 봉황산이 됐다고 하는데,
산의 생김새가 정상을 봉황새의 머리라 하고, 양쪽으로 뻗은 봉우리들을 날개에 해당된다고
한다면 그런 대로 봉황 같다고 할 수 있어서 그런 전설이 배태된 것이라고 본다.
조선시대 중종(9대 임금)의 태를 묻어서 태봉(胎封)산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이 지방의
진산(鎭山ㆍ그 지역을 진호하는, 제사도 지내는 主山)이며 팔음지맥 분기점이기도 하다
봉황산 정상 삼각점(△관기303 /1980 재설)
오늘 산행의 막내인 쾌도세무님 졸린다고 봉황산에 그냥 퍼져 버린다.
이보게 젊은이! 추운데 잠들면 영원히 잠드는 수가 있으니 조심하시요
봉황산 정상에서 (하늘마음님 촬영)
팔음지맥 분기점
팔음지맥(八音枝脈)이란?
백두대간 봉황산에서 남서방으로 분기하여 천택산(683.9m), 팔음산(771m), 천금산(464.9m),
천관산(445.4m), 철봉산(449.5m)을 만들고 북으로는 보청천, 남으로는 송천(초강천)의
분수령이 되어 금강2교에서 맥을 다하는 산줄기이다
봉황산 정상에 잠깐 서있는 사이에 땀이 식은 탓인지 금새 몸에 오한이 들 정도로
추워지기 시작하는 바람에 서둘러 화령으로 바쁜 발걸음을 옮긴다
능선에서 바라본 대궐터산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봉황산 내리막길에 내려서니 건너편에 있는
속리산 구간 자락인 대궐터산(청계산)과 그 아래 산속에 파묻혀 있는 극락정사가 보인다.
대궐터산은 상주시의 역사지인 상산지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산 아래 마을에서는 두리뭉실하게 생겼다 하여 두루봉이라고도 부르고 또다른 이름은 청계산이다
후백제의 견훤이 이 산에 성을 쌓고 대궐을 지었다 하여 대궐터산이라고도 하며
산기슭에 청계사와 후백제의 견훤이 쌓았다는 성산산성이 있으며 성산산성은
둘레가 3.3km인 토석성으로 산 아래에서 보면 바위산으로 보이는 천혜의 요새라고 한다.
저 너머로 형제봉과 속리산 천왕봉인듯한 봉우리도 아련히 보인다
오늘도 어김없이 일출은 시작되고...
산불감시초소(07:45)
울 산방에서 가장 멋쟁이인 산까치님 (범여의 생각 中에서)
내년 한해는 지금 떠오르는 저 태양처럼 늘 존일만 있기를...
2% 부족한 이정목
비재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서있는 이정목은 이곳이 백두대간임을 표시만 할 뿐
거리나 시간 같은게 표기가 되어있지 않아 불편하기가 그지없다.
등로에서 바라본 상주시 화서면의 모습
화서면은 동으로 내서면과 외서면, 북서쪽으로 화북면, 화남면, 남으로
화동면에 접해있고, 상주시와의 거리는 26km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행정명은 화서면(化西面)이고, 화령(化寧)이라고 부른다.
화서는 중화지구(中和地區)의 중심으로 신라시대에 답달비(答達匕), 답달건비(答達建匕),
또는 답달비현(答達匕縣)으로 불리다가 신라 경덕왕16년에는 화령현(化寧縣) 고쳤다고 하며,
고려시대에는 그대로 따라 썼으며, 조선시대 1413년(태종13년)에 현으로 고쳐서 상주목에 속하였다.
상주지역 산에서 자주 만났던 광고판
상주시에는 18개 읍, 면이 있으며 백두대간이 남북을 가로지르고, 작약지맥, 숭덕지맥이
동쪽 낙동강으로 뻗으며 백두대간 거리만도 67km나 되는 넓은 지역이다.
경상도(慶尙道)라는 이름은 경주(慶州)와 상주(尙州)를 함께 부르면서 유래되었다”
"백두대간과 낙동강이 빚어낸 삼백(三白)의 고을 상주는 흰쌀과 누에고치, 곶감의 고장이다.
쌀, 누에, 곶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하얗다는 것이다.
영남지방의 큰 고을이었던 상주(尙州)는 예부터 이 세 가지로 유명해
상주를 흔히 ‘삼백(三白)의 고을’이라고 불렀다.
‘삼백미’로 불리는 상주쌀은 경기미와 어깨를 견줄 정도로 질이 좋았고,
임금의 수랏상에도 오르던 진상품이었다.
게다가 생산량도 많아 한때 상주에서 생산되는 쌀의 양은
강원도 전 지역에서 생산되는 그것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됐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에서 누에치기를 시작한 지는 4,000년쯤 되었는데,
상주 함창읍은 신라시대부터 명주 산지로 이름난 곳이었다.
하지만 한때는 산기슭을 온통 차지했을 뽕밭은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고,
양잠농가도 더불어 사라져 예전 명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
러나 요즘도 함창 장날엔 명주장이 설 정도로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은척면 두곡리에 은척뽕나무로 불리는 350년쯤 된 늙은 토종 뽕나무가 있는 것도
이 고장의 누에치기가 아주 오래됐음을 알려준다
곶감은 분명히 말간 빛이 도는 주황색인데 왜 ‘삼백’에 속할까? 사정은 이렇다.
타래에 그대로 건 곶감에서는 하얀 분가루가 생기지 않고 사람이
손으로 만지작거려야만 분이 생겨난다.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곶감을 걸어놓고 손으로 만지며 모양을 만들었기에
하얀 분이 나와 곶감을 감쌌던 것이다.
드디어 등로에서 내려와 25번과 49번 국도가 교차하는 수청삼거리로 내려선다.
수청거리 삼거리(08:30)
산 위가 너무 추워서 아직까지 아침상을 펼치지 못한 탓인지 배가 너무 고프다.
화령재에 있는 팔각정에서 아침을 먹으려고 가는데 비어있는 비닐하우스가 보인다.
염치 불구하고 비닐하우스에 들어가서 아침상을 펼치는데 이만큼 훌륭한 장소가 없다.
아침상을 펼치려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간다
장소도 최적이지만 오늘은 평소에 호화준족으로 울 산악회에서 가장 빠른
물찬제비님이 우리와 같이 밥상을 펼치는데 순대국을 한 냄비 가져왔고
평소에 20L짜리 베낭에다 물한통과 젓가락하고 입만 가지고 다니면서
먹어주는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면서 큰소릴 치는 배왕초님이
이제 산행의 왕초보를 벗어나려는지 아님 산행의 묘미를 알아서인지
추어탕을 3인분이나 가져오는 바람에 내가 가져온 떡라면을 펼쳐보지도 못했다.
덕분에 1시간동안의 여유로운 아침만찬에 후식으로 커피에다 과일까지
먹은 다음에 화령으로 가기 위해 비닐하우스로 나선다.
비닐하우스 쥔장나리! 고마웠소... 그것도 복짓는 것이요
산꾼들에게 따뜻한 장소를 제공한 그 공덕 세세생생 복 받을기요
식사를 마친 다음 수청삼거리에서 5분정도 걸어서 화령에 도착한다.
화령(化寧:320m:09:40)
경북 상주시와 충북 보은을 잇는 25번 국도가 지나는 고갯마루로
정상엔 '화령재 해발 320m'라 새겨진 표석이 있고, 도로
왼편(북쪽)엔 상당히 넓은 주차장과 화령재 정자가 있다.
도로 건너 산행 들머리엔 '낙동강-금강 분수령' 안내판이 서 있다.
원칙적으로 현재 화령(化寧)이란 행정지명은 없다.
그러나 이 지방 사람들은 화서면 일대를 화령이라 부르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고 한다.
그것은 예전에 그 일대의 화서면, 화동면, 화북면, 화남면을 합쳐서 화령현이라 했고,
그 화령현의 소재지가 지금의 화서면 소재지였기에 지금도 화서면을 화령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근의 모동면과 모서면을 합쳐 옛날엔 중모현이라 했다. 그
리하여 화령현 지역과 중모현 지역을 합쳐서 지금도 상주에서는
중화(中化)지구라 하여 충북에 인접한 특수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다.
49번 국도 상주 화북면과 괴산군, 그리고 문장대관광단지로 이어지는 길이고,
동서로 뻗은 25번 국도의 서쪽 방향은 화서면(화령;化寧), 청주, 보은 등지로 이어지며,
동쪽으로는 화령재와 상주, 선산으로 가는 길이다.
그 삼거리의 상곡1리 마을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25번 국도를 따라
동쪽 상주, 선산 방향으로 300m 정도 완만한 고갯길을 올라가면 화령재이다.
이 지역은 해발 200∼300m의 고원지대로서 일교차가 심하고 일조량이 많아서
질 좋은 포도, 배, 사과 등의 과일을 많이 재배하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고구려, 신라, 백제가 서로 차지하려는 국경지대였고,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할 때에도 이 화령재에서부터 북상했다는 말이 전하고 있으며,
후삼국시대에도 견훤이 중요시했던 고개라고 한다.
그리고 6·25 때도 이 지역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었다고 하는데,
이런 배경을 가진 고개였기에 싸움이 잦아서 화령(火嶺), 곧 '불붙는 고개'라는 별칭이 있다.
상주와 보은을 잇는 25번 국도가 지나는 화령재는 한때 제법 번잡하던 고개였다고 한다.
고갯마루 서쪽의 화서면 신봉리 장터에선 매월 끝자리가 3, 8일인 날에 화령장이 선다.
고려 때부터 화서•화동•모동•모서•화북•화남 등 상주 서부인 중화지역의 중심시장으로
역할을 해온 화령장은 1965년부터 현대식 정기시장이 개설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70~80년대엔“다른 지방에서는 화서는 몰라도 화령장은 안다”고 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화령장으로 유명했던 화령은 6•25전쟁 때 낙동강 방어선 전투 중 칠곡군
가산면의 다부동전투 다음으로 치열했던 화령장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한국전쟁사’는 1950년 7월17일부터 25일 사이 화령장 주변에서
처절하게 벌어졌던 전투를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북한의 인민군 제15사단은 괴산에서 보은에 이르기까지 국군 제1사단을 공격하는 한편,
증강된 1개 연대로 일거에 화령장을 돌파하고 상주를 점령하려 했다.
국군 제6사단의 병참선을 차단해 이를 격파한 다음 북한군 제1사단과
협공하여 대구를 점령하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화령 주변은 백두대간을 따라 나있는 산간도로인 보은~화령장~상주에 이르는 도로와,
괴산~갈령~화령장~상주 도로의 합류지점으로 백두대간을 통과하여 상주로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그러나 국군은 이곳의 중요성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고, 따라서 병력도 배치하지 않았다.
이 점을 간파한 인민군은 이곳에 제15사단을 투입하여 집요한 공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화령장 주변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인민군 전령을 생포한 국군 제17연대가
적의 작전을 미리 파악하고, 화령 동쪽의 상곡리와 갈령 주변의 동관리에서
각각 매복작전을 펼친 끝에 남진하는 인민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이로써 백두대간 분수령을 넘어 상주 지역에서 국군 제2군단의 퇴로를
차단코자 했던 인민군의 의도는 저지되었고 결국 개전 이후 계속 밀리기만 하던
국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최후의 낙동강 전선 구축에 6일이라는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되었다.
(자료 인용 - 민병준님의 향토기행 상주 4 에서)
화령에서의 인증샷
19세기 말에는 화령재 서쪽 충북 보은군 장안면 장내리에서 동학교도들의 모임이 있었다.
이른바 보은집회, 지리산 북쪽 대간길 남원땅에는 동학농민전쟁기념비가 있지만
이곳 보은은 그 중요한 마디(結節)였다. 1860년 서학에 대비되는 동학을 창시한
교조는 최제우. 몇 년 뒤 잡혀서 처형을 당했다. 이후 동학은 꾸준히 조직을 갖췄고
1893년 교조(敎祖)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명목으로 교조신원운동 모임을 가졌으니
그것이 보은집회다.
한양땅에서 적당한 거리에 있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기 좋은 중심지이며
속리산의 험한 산맥을 끼고 있는 지형이라 선정됐을 듯하다.
일본군에 의해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끝나지만 그 역사적 의의는 뚜렷하다
동료산꾼들과의 인증샷
10분을 넘게 화령의 이곳저곳을 두루 살핀 다음에 길건너 능선으로 오른다
화령(化寧)의 이름처럼 평온한 이 고갯길에서 이제 우리는 속세를 떠나 윤지미산으로 향해 갈 것이다.
비록 영원한 떠남은 아닐지라도 대간의 발걸음을 옮기는 날 만큼은 속세의 진토들을
털어버리고 싶은 것일게다.
화령에서 능선으로 올라 조그만 봉우리에 올라선 다음 다시 내려서니 묘지1기가 있다.
청원 상주간 고속도로 터널 위(10:00)
내 고향가는 길에 자주 이용하는 청원~상주간 고속도로의 모습
목장도로(10:05)
청원, 상주간 고속도로를 지나니 5년전에 없었던 상당히 넓은 도로가 보인다.
예전엔 이곳 길이 북진이라 자세히 기억이 나는데 능선을 타고 내려왔는데
동료산꾼들은 모두 도로로 가버리고 정통을 고집하는 범여와 노루님이
건너편 능선으로 오르니 범여를 철석같이 믿는 시화님과 쾌도세무님이 내 뒤를 따른다.
능선으로 오르자마자 봉우리에서 좌측으로 꺽어져야 하는데 좌측은 아예 길이없어
뚜렷한 직진으로 조금 더 가버린 것이 결과적으로 알바라는 불명예를 남긴다
20분간의 알바를 하고 논밭을 지나 다시 대간길로 복귀를 하는데 나를 따라온
동료산꾼들에게 미안하기만 하다... 미안합니데이 ㅋㅋㅋ
임도 갈림길(10:25)
임도 갈림길로 되돌아와서 다시 대간길로 복귀를 한다.
원칙을 고수하는 노루님은 베낭을 벗어놓고 임도에서 다시 걸어온다.
역쉬 정통파다운 멋진 산꾼에게 박수를 보낸다.
2009년 4월 5일 북진길때의 이곳 모습
반가운 시그널
갈림길에서 만난 이정목
길은 편하나 음지에는 눈이 쌓여 조금은 미끄럽지만 신발 때문에 발목이
계속 아파오기에 아예 아이젠을 벗어 베낭에 넣고 길을 간다.
조그만 능선에 올랐다가 내려서니 북진길에 없었던 묘지 1기가 새로 보이고
묘지 좌측으로 내려서는데 물찬 제비님 혼자서 우릴 기다리고 있다.
맨날 우리보다 2시간이상 먼저 도착하여 계시던 분이...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졸지에 오늘 대간길에 10명이 종주를 시작하는데 5명이 후미에 있으니...
방화선 임도길을 계속 걸어간다
방화선 등로를 지나니 우측으로 밭이 나오고 다시 좌측 능선으로 접어든다
밭 가장자리 이정표에서 다시 오르막을 치고 오르는데 윤지미산 오름길은 힘이든다.
곳곳에 로프를 설치하긴 해놨지만 급경사에다가 땅이 얼어있어 힘이든다.
윤지미산 오름길의 로프
윤지미산(538m:11:15)
경북 상주시 내서면과 화서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이름이 좀 특이하여
인터넷을 검색해봐도 알수 없었는데 어느 대간꾼의 산행기를 보니
윤지미산의 정확한 시기와 유래는 알수 없으나 언제 부터인가 윤지미산으로
불려지게 되었으며, 일부 설에 의하면 윤집걸중(允執乞中)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로써 "인생전반을 다 안다, 세상을 포용한다,
세상을 두루 알아 맞힌다"라는 의미를 가진 산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왕년의 유명가수와 둘이서 목욕을 하다가 누구 발이냐고
물었다는 유머를 제공해준 최고 여배우 이름이 생각난다.
힘들게 정상에 올라 휴식을 취하는데 대구 K2산악회 북진팀이
많이 올라온다. 물찬제비님이 소주한잔 하고 싶다고 팩소주를
꺼내는데 컵이없어 먹지를 못하고 과일만 먹고 꽤나 많은 시간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에 내리막길을 향한다.
윤지마산 정상에서 바라본 능선 우측의 판곡저수지
숭덕지맥 갈림길(11:35)
숭덕지맥(崇德枝脈)
백두대간 신의터재에서 북으로 7.6km, 화령재 남쪽 3.6km 지점에 437.7로 표기된 삼각점봉이 있다.
지형도 표기명칭은 아니지만 윤지미산에서 남쪽 0.6km 거리다.
이 삼각점봉에서 동쪽으로 분기하여 이안천의 남쪽 울타리가 되어 이안천을 영강에 보탠 다음,
영강이 낙동강에 합수하는 상주시 사벌면 퇴강리까지 이어지는 1백리(44.3km) 산줄기다.
희한하게 생긴 물건
같이가는 노루님과 시화님이 이상하게 생긴 바위를 보고 웃음을 터트린다.
뭣처럼 생긴 물건이냐고...? 모든걸 상상에 맡기고.
이곳이 백두대간 중화지구라 그런지 길은 편하지만 새 신발때문에 계속해서
통증은 심해지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다... 고통을 참고 걷는수밖에...
특히 내리막길에는 더욱 더 심하다... 정말 미치겠다.
등로에서 우측으로 꺽어져 낙엽이 수북한 길로 내려서니 조그만 봉우리가 나오고
좌측 옆 사면길이 나오지만 능선으로 올라서니 묘지 3기만 있다
편안길을 따라 고도차가 별로없는 대간길을 이어간다
엉터리 이정표
조금전 500m 를 지나온 지점에 신의터재 →7.5km라고 써있는 이정표가
넘어져 있었는데 10분을 더 지나온 지점이 8.1km라니... 참으로 개념이 없다.
서원마 갈림길(12:00)
우측 화서면의 서원마와 좌측 내서면의 산데기못 내려가는 길이 어렷풋이 보인다
좌측으로 내서면의 산데기못과 골티마을이 보이고...
숭덕지맥 갈림길에서부터 계속해서 혼자 걷는다.
쾌도세무님과 물찬제비님은 뒤로 처지고 노루님과 시화님은
앞에 간 모양이다... 남들한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걸어야 하는데 발목통증은 심하지만 그래도 걷는 수 밖에...
준족인 노루님이야 잡을수는 없겠지만 시화님은 따라 잡을 수 있을것
같은데 도무지 보이질 않는다
이정표(12:25)
지나온 윤지미산이 보이고 좌측 등로 나뭇가지 사이로 무지개산이
보이는데 오르막이 나타나는데 우측엔 잣나무 조림지가 보인다
또다른 이정표를 따라서 반원형으로 돌아서 올라선다
대간길에서 200m 정도 떨어진 무지개산을 바라보면서 걷는데 뒷쪽에서
사람소리가 들린다... 앞에 간 줄 알았던 노루님과 시화님이다.
바로 뒤에 물찬제비님과 쾌도세무님이 오고... 이어 무지개산 갈림길이 나온다.
무지개산 갈림길(12:40)
이곳에는 바람이 참으로 차갑다... 이곳에서 베낭을 벗어놓고 무지개산으로 향한다.
무지개산(441.4m:12:45)
경북 상주시 내서면 어산리와 화동면 선교리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2등 삼각점이 있다... 그런데 높이는 지도마다 달라 혼란스럽다.
상주시청 자료에 의하면 산 근처에 무지개폭포가 있어서 붙혀진 지명이란다.
무지개산 정상 삼각점(△ 상주 24 / 1981재설)
다시 무지개산 갈림길로 되돌아오니 상당히 춥다
지금부터는 말그대로 非山非野 구간인 대간길이기에 5명이서
마지막 베낭털이를 한다... 물찬제비님이 북진하던 대간꾼에게
소주를 주는 바람에 소주가 없어서 술생각이 간절했는데 생각지도
않은 쾌도세무님 베낭에서 4홉들이 참이슬 한병이 나오는데 감동 그 자체다.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4홉들이 한병을 게눈 감추듯이 깔끔하게 비우고
과일과 빵으로 원기로 보충한 다음에 신의터재로 향한다.
노간주 나무 군락지를 지나...
조그만 봉우리에서 급하게 우측으로 꺽어진다
공터 과수원(13:38)
2009년 북진길에는 감나무밭이더니만 지금은 포도밭으로 변해있다
점점 신의터재는 가까워지고...
서어나무 군락지를 지나니 등로 가운데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가득하다.
시인 류시화님을 너무 좋아해서 닉이 “시화”란다... 詩的 감정이 풍부한 분이다
영안동 갈림길(14:05)
304봉(14:10)
오늘 산행의 마지막 구간인 304봉에 오른 다음에 내려서니 여러기의 묘지가
나타나고 이윽고 신의티재가 보이고 우리를 태우고 온 愛馬가 보인다
이윽고 마지막 이정표가 보이면서 신의티재 도로로 내려선다.
신의터재(280m:14:20)
상주시 화동면과 내서면을 잇는 2차선 도로이고, 작은 공원으로 꾸며진 곳에 커다란
표시석 전면엔 '신의터재 해발 280m'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임란 이전에는
신은현(新恩峴)이라 불렀고, 임란 때 의사 김준신(金俊臣)이 이 재에서 의병을 모아
최초의 의병장으로 상주진에서 많은 왜병을 도륙하고 임진 四월 二五일 장령하게
순절한 사실이 있은 후부터 '신의터재'라 불리었으나 일제 때 민족정기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어산재'라 불리게 되었고, 문민정부 수립 후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민족정기를 되찾고 후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옛 이름인 '신의터재'로 다시 고치다"라고 새겨져 있다.
그리고 한쪽에 '義士 節谷 金俊臣 遺蹟碑'가 세워져 있고, 쉬었다가 갈 수 있는
나무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義士 節谷 金俊臣 遺蹟碑
신의터재는 임진왜란 초기 의병 김준신이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해서 이름 끝자를 따서
신의터재인 듯하며, 이번 구간 중간쯤의 화령재에는 화령장전적비가 있다.
신의터재는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왜군을 처음 꺾은 곳이고 화령장에서는
6ㆍ25 때 이곳 전투로 낙동강전선을 구축하는 데 시간을 벌었다는 얘기가 있다
신의티재 정상에는 다른 곳에서는 하나도 보기 힘든 표시석이 3개나 보인다
신의티재 정상에 마지막으로 내려서니 먼저온 동료산꾼들이 대장이 가져온
과메기에다 소맥을 마시고 있다... 연거푸 3잔을 마시고 나니 기분이 쿨하다
맛있게 먹은 다음에 장비를 정리하고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화서면소재지에
있는 목욕탕에서 목욕재계하고 점심은 버스에서 빵과 두유로 해결하고
양재동에 있는 외교센터에서 열리는 송년행사를 하러 서울로 향한다.
피곤한 탓인지 차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니 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
10개월 동안 20회에 걸쳐 고운정 미운정이 다 들은 대간동료들
님들과의 함께한 산행 너무너무 즐거웠습니다
내년 한 해에는 늘 존일만 있기를 기원하면서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첫댓글 후기 잘 읽었습니다. 새해도 복 많이 받으세요
범여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음구간도 그 다음구간도 범여님이 들려주시는 대간얘기에 귀 기울이며
즐겁게 걷고 싶습니다~~
후기 잘 보았어요~~
함게한 산행 즐거워습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오
대목리가 눈에 많이 보던 곳이네.. 여러번 야영을 했거든. 금북 걸으때나 오래전 걸었던 서원리에서 활목고개까지 걸었던 충북알프스길도 생각이 나고... 수고했수.
대간길은 범여님이 계셔서 훈훈 합니다~~~넉넉한 입담이 대간길에 꽃입니다.
부대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