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을 어떻게 읽고 공부할 것인가?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기록한 목적을 사도 요한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복음서와 구별된다(요 20:30-31).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은 분명히 밝혀져 있다.
또한 요한복음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누가복음과 비교해 볼 때 내용의 독특성이 93%나 된다는 점에서 소위 말하는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와 큰 차이가 있는 복음서이다. 그래서 로버트 카이저는 이 복음서를 ‘별난 복음서’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스텐버그와 같은 학자는 요한복음은 로마서와 더불어 ‘신약 신학의 최고봉’이라고 말했다.1 학자들의 이런 평가가 아니더라도 요한복음은 4복음서 중에서 가장 깊은 영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복음서이다.
1. 요한복음은 어떤 책인가?
1) 저자 : 사도 요한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클레멘트, 오리게네스, 이레네우스 등) 세베대의 아들인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요한복음을 기록했다고 말했다. 비록 본서에는 요한 자신이 저자임을 밝히지 않았으나 그가 본서의 저자임을 뒷받침해주는 내적인 증거는 충분하다. 요한복음 21:20-24에는 본서의 저자가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베드로와 절친한 사이인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전후 문맥상 그 제자는 사도 요한임이 분명하다.2
사도 요한은 예수님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으며(13:23-25), 십자가 곁에 서서 창에 찔려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었다.(19:35). 일부 학자들은 요한복음에 나타난 ‘말씀’(로고스)이란 단어가 헬레니즘(또는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사도 요한의 저작설을 부인하려 한다. 그러나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이라고 언급한 것은 창조 사역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암시하는 것이지 헬레니즘의 철학에서 말하는 의미를 가리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2) 내용 및 구조
요한복음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서론에서는 예수님과 성부 그리고 영원과의 관계로 시작한다. 다른 복음서가 예수님의 출생과 세례 요한의 활동으로 시작하는 것과 비교된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의 일곱 표적과 일곱 명의 증인들(세례요한 1:34; 나다나엘 1:49; 베드로 6:69; 예수님 10:36; 마르다 11:27; 도마 20:28; 사도 요한 21:31)이 등장하지만, 비유는 기록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진리를 가르치시는 분으로서 보혜사 성령님에 대해 강조한다(14:26; 15:26; 16:7). 그리고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을 ‘들린다’(lifted up, 3:14; 8:28; 12:32-34)는 표현을 사용하며, 이 죽음이 영광스러운 승귀임을 강조한다(18:4은 예수님이 죽음을 향해 당당히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요한복음의 자세한 구분은 다음과 같다.3
A. 서론(1:1-51) : 신학적 이야기
B. 표적의 책(2:1-12:50) :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
1) 가나의 물을 포도주로 바꿈(2:1-11)
2) 가나의 신하의 아들을 고침(4:46-54)
3)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침(5:1-9)
4) 5천 명을 먹이심(6:1-14)
5) 물 위를 걸으심(6:16-21)
6) 눈먼 자를 치유하심(9:1-12)
7) 나사로를 살리심(11:1-46)
C. 영광의 책(13-20장) : 예수님의 고난과 새 언약 공동체의 준비4
1) 최후의 만찬(13장)
2) 고별 설교(14-17장)
3)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18-20장)
D. 결론(21장)
2. 공간복음서와 요한복음의 차이 이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보통 ‘공관복음’(共觀福音)이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그리스어의 syn(함께)과 opsi(봄)이 합쳐진 낱말 Synopsis가 합쳐진 단어로서, 그 단어가 풍기듯이 공관복음이란 ‘공통된 관점이 있는 복음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가령, 마태복음에는 마가복음의 내용이 94% 들어있다(그림 참조).5
그런데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 나타나는 내용의 7% 정도 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요한복음은 이런 점에서 아주 독특한 복음서이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보다 이런 표현이 적절한지는 논란이 될 수 있지만 훨씬 철학적이고, 심오한 영적인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말씀, 빛, 진리, 길 등 보다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언어로 묘사하였다.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초기 갈릴리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들을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기록된 내용 가운데 거의 대부분은 공관복음에서 거론되지 아니한 것들이 수록되어 있다. 요한복음에는 귀신 쫓는 이적이 실려 있지 않으며, 비유들도 많이 빠져있다. 단지 일곱 가지 이적(그 가운데 나사로의 소생 사건은 공관 복음에 없음. 11:1-44, 12:9-11)만이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공관복음과 달리 요한복음은 유대에서 일어난 사건을 예수님의 초기 사역 가운데 하나로 취급하였다.(2:23) 더구나 요한복음에는 니고데모와의 대화나(3:1~15)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4:7~30)를 포함하여 공관복음에 수록되지 않은 예수님의 몇 가지 설교가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성령님이 주시는 감동에 더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관점이 있었으며(20:30-31, 21:25) 이와 같은 관점으로 공관복음을 보완하고 예수님의 사역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요한복음을 기록했다.
3. 요한복음을 읽고 공부하는 핵심 키포인트
1) 표적(signs)
요한복음에서 ‘표적’(signs, semeia)은 요한복음의 골격을 이루는 중요한 주제이다. 표적이란 기적(miracle, dynamis)과는 구분되는 표현으로 “어떠한 사람이나 사물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가시적인 표시”를 의미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이 단어는 “신학적 해석을 위한 열쇠가 되는 말”로 일종의 계시를 구성하는 표현이다.6 요한복음에서 이 ‘표적’이라는 단어는 18번 사용되었는데, 그 중 11번이 예수님의 이적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비록 이 단어가 공간복음서에서도 언급이 되고는 있지만,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그것은 표적이 기적 사건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기적을 통하여 암시하고 지시하는 어떤 것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것이다. 그것은 곧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 분의 구속 사역이 어떠한지를 심도 깊게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표적은 그것이 가리키는 신학적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면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없다.
가령 요한복음 2장 11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리라”라고 말씀한다. 이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메시아적 영광을 나타내셨고, 제자들을 주님을 믿게 되었다. 첫 표적을 통해 예수님은 유대교에서 ‘생명의 도’인 기독교로의 전환을 알리신 것이다. 물로 상징되는 구약의 결례가 이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으로 인해 새로운 언약의 시대가 개시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항아리가 여섯이 놓여 있었다는 것도 유대주의의 불완전함을 상징한다.7 고신대학교 송영목 교수는 이 표적은 궁극적으로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내다본다고 주장한다.8
2) “나는...이다”
요한복음의 독특한 구조 중 하나가 “나는...이다”(?γο ?ιμι)라는 구조이다.9 사실 이 표현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선지자들을 통해 당신 자신을 계시하실 때 사용된 표현과 유사하다(신 32:39; 사 46:4). 특별히 출애굽기 3장 14-15절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출애굽을 위해서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이 출애굽기 3장 15절에는 여호와(Yahweh)로 나타난다. 그런데 출애굽기 3장 15절의 여호와는 14절의 ‘스스로 있는 자’와 연결된다. ‘스스로 있는 자’의 영어 표현은 “I am who I am”(나는 나이다, 참고. 바른성경)이다. 창세기에 나타난 이름들과 달리 출애굽기 3장 14-15절의 하나님이 명칭은 하나님의 본성을 구체적인 특성으로 제한시키지 않는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언제나 그분 자신이다. 하나님은 과거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으로서 이전 세대뿐만 아니라 현재와 다가올 세대로부터 영원히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표현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자이며, 구원자이며, 또한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1:1), 창조주이시고(1:3, 10), 하나님의 어린양이며(1:29), 메시아요 그리스도이며(1:41; 4:25-26), 세상의 구주이시며(4:42),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14:6). 또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이시며(4:14), 영원히 주리지 않는 생명의 떡이시다(6:33-35).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후 로마의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을 때 “내가 그니라”(NASB, I am He)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여호와의 권위를 선포하시는 예수님 앞에 엎드러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18:5).10
3) 생명과 빛, 물
사도 요한이 사용하는 생명과 빛은 강한 신학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들로 이스라엘 구원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류의 타락과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생명을 잃고, 어두움 가운데 거하며, 물로 멸망을 당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백성을 죄의 세력에서 해방하여 죽음과 흑암, 그리고 물에서 구원을 얻어 생명의 삶, 빛의 삶, 그리고 생수를 먹고 마시는 삶,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풍성한 삶(7:38; 10:10)을 경험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사역이다.11
그런데 이 세 가지 요소는 또한 이스라엘의 제의적인 것들과 연관되어 있는데, 성막(성전)과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물은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구약의 제의적인 일의 중심에 서 있는 요소였다. 물로 세례를 주었으며(1:25-34),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했으며(2:1-11), 사마리아 여인과의 생수논쟁(4장), 장막절에 물 깃는 일과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일(7:37-39),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시면서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온 것(19:34) 등은 예수님의 구원사역과 관련된 신학적인 의미를 지닌다.
빛과 생명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두운 성막 안을 밝힌 금 등잔대의 모양이 하나의 줄기에서 일곱 개의 가지가 나와 그 위에 등잔이 하나씩 달린 모양의 등대였다. 이 가지들은 두 개씩 서로 연결되어서 꽃받침이 있었다. 가지는 좌우 대칭으로 이쪽으로 세 가지 저편으로 세 가지로 구성되었고, 중간에 하나로 되어 있었다(그림 참조). 그렇다면 성막에 있는 금 등잔대의 상징적 중요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생명과 빛이 있다는 것이다.12 예수님은 이제 구약 시대의 건물 성전이 아닌 참 성전인 당신이 오셔서, 당신이 빛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빛과 물과 생명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근간인데, 이러한 사역이 ‘성육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통한 재창조를 이루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4) 로마식 시간
요한복음의 시간적 언급은 요한복음 1장 39절(열시쯤), 4장 6절(여섯 시쯤), 4장 52절(일곱 시), 그리고 19장 14절(제 육 시쯤)에 나온다. 카슨(D. A. Carson 등 다수의 학자들은 이 시간을 유대인의 시각으로 보지만, 웨스트코트(E. F. Westcott) 등은 로마인의 시간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한복음 11장 9절의 ‘낮이 열두 시간’이라는 말은 유대인 예수님이 유대 제자들에게 말한 것이기에 유대인의 시간 개념으로 볼 수도 있으나, 반대로 에베소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요한복음의 1차 독자들을 고려한 로마의 시간일 가능성도 있다. 요한복음이 기록될 AD 80-85년에는 로마식 시간법이 유대와 로마 제국 전체에 적용되고 있었다. 고신대학교 송영목 교수는 요한복음의 독자들은 유대인의 관습을 잘 이해하지 못한 흔적이 발견된다고 주장한다.13
그래서 요한은 유대 관습을 설명할 때 그것이 구체적으로 유대인의 것임을 밝히는 등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2:6, 13; 4:9; 6:4; 7:2; 10:22;11:15; 18:25).
이런 점을 고려해 본다면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시간은 우리가 아는 전통적인 정오 시간이 아니라, 오후 6시일 가능성이 높다. 많은 학자들은 사마리아 여인이 부도덕했기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뜨거운 정오(요 4:6에 나타나는 여섯 시를 유대인 시간으로 본다면 6시간을 더해야 하므로 정오가 된다)에 물을 길으러 왔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우리 역시 그렇게 많이 알고 있다(참고 창 29:7).14
하지만 이 사마리아 여인은 수가 성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며 모종의 교제를 나누었던 사이였다(4:28-29, 42).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사마리아 여인이 주민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정오에 물을 길러 왔을 것이라는 주장은 신빙성이 별로 없다.
4. 맺음말
이 세상에 수많은 책들이 있지만 세계사를 통틀어 인류에게 요한복음처럼 영향을 끼친 책도 드물다. 요한복음은 교회를 포함하여 인류 사회를 근본부터 변화시켰고, 사람들을 죄와 온갖 퇴행적인 관습으로부터 해방시킨 엄청난 영적인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고 묵상하면 2000년 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근본부터 변화시켰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영광, 그리고 은혜를 체험할 수 있으며, 보혜사 성령님이 주시는 위로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바라기는 이번 강의를 통해 요한복음에 대해 더욱 친근해지고, 이 성경을 깊게 묵상하고, 부지런히 연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평강이 넘치기를 원한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