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찬란한 날들- 찰스 스탠리- 두란노 사랑의 햇살 속으로 들어온 당신을 환영합니다. 선물 주는 이와 만남, 하나님 모든 것을 내 주는 이 / 결코 돌아앉지 않는 이 / 기꺼이 수건과 대야를 선택한 이 /가장 멋진 연인이 되어 주는 이 / 나를 열렬히 사랑하는 이 / 구출 작전을 펼치는 이/ 만남이 늘 신선하고 새로운 이 / 나를 가장 잘 아는 이 / 나의 가치를 결정하는 이/ 놀라운 사랑의 선물, 예수님 옆에 앉아 불평을 들어 주는 벗 /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 목동 / 율법의 올무를 끓은 선생 / 내 영혼을 잡아 주는 닻 / 강하고 무거운 사랑 /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 부르심/ 한여름의 시원한 생수 / 자유롭고 편안한 관계 / 고귀한 희생 / 항상 붙어 다니던 죽마고우 / 대신 치로 준 값 선물 받은 이의 감사, 우리 온 마음을 다해 나아가기 /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찾기 / 알고자 하는 열정 품기 / 사랑이 넘쳐 흘러가게 하기 / 받고 나누는 습관 가지기 / 순수한 마음으로 섬기기 / 필요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 선물 주신 분 자랑하기 / 최고의 친구와 교제하기 / 끊어지지 않는 전선으로 연결하기 선물로 변화시키는 기쁨, 세상 침묵할 수 없는 감격 / 마음을 움직이는 형제애 / 약속을 지키는 아들 / 마음을 치유하는 용서 / 이의가 있을 수 없는 순종 / 사랑을 보여 주는 창 / 나 자신을 내주는 즐거움 / 유혹을 이기고 관계를 지키라 / 기쁨과 고통을 나누는 교제 / 담을 허물기 위한 발걸음 ** 책 뒷표지에 있는 말씀 내 생에 최고의 선물을 당신에게 드립니다. 선물을 펼치는 순간, 당신의 삶은 찬란한 사랑의 빛에 물듭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감동과 기쁨을 주지 못하는 이 시대에 다시 ‘사랑’을 이야기한다. “세상을 앓고 있다. 다들 사랑이 문제라고 말한다. 오늘날 사회에서 겪는 수많은 파탄과 고통은 사랑, 그것도 ‘적절한 양의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사랑이 필요한 존재로 창조되었다.” 선물 주는 이와 만남, 하나님 놀라운 사랑의 선물, 예수님 선물 받은 이의 감사, 우리 선물로 변화시키는 기쁨, 세상. 사랑의 선물을 둘러싼 이 놀라운 사건 속으로, 온 세상에 퍼지는 사랑의 햇살 속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서문 세상이 앓고 있다. 목사나 기독교 상담가 같은, 마음의 상처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어보면 사랑이 문제라고들 말할 것이다, 오늘날 사회에서 겪는 수많은 파탄과 고통은 사랑 즉 ‘적절한 영의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사랑이 필요한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고 또 채워 줄 수 있는 사랑이 있다. 유일한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가 그렇게 간절히 찾고 바라는 그 사랑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가기 전에 우선 자신의 삶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삶 속에 내재된 잠재력을 보신다. 우리의 과거가 아니라 아무리 어둡고 우리의 현제가 아무리 약해 보여도, 하나님은 우리의 뿌리 깊은 죄까지 모두 지워 버리고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8) 이처럼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가?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에도 비할 수 없는 선물이다. 선물 주는 이와 만남, 하나님 ** 모든 것을 내 주는 이 사랑, 자비, 은혜, 용서, 친절, 선하심… 하나님은 참으로 다양한 성품을 가지신 분입니다. 이러한 성품들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분의 ‘내주시는 성품’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비, 은혜 등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가진 모든 좋은 것들을 우리와 나누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움켜쥐고 주시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하나님이 이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임을 드러내는 증인들이 바로 우리 즉 하나님이 구속하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엡 2:7) 모든 것을 주시는 가장 멋진 분의 선물 예수 그리스도, 우리에게 주신 그 구원의 선물은 영원히 울려 퍼질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는 투명한 유리 진열장과 같습니다. 그것은 구원으로 인한 영원한 유익을 누리고 즐기는 것이며, 이러한 유익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내주시는 분이기에 가능합니다. 모든 우주 만물이 이 진리에 영원토록 탄복할 것입니다. ** 날마다 프로포즈하는 이 하나님이 먼저, 우리가 아니라 그분이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요일 4:10) 헨리 티이슨(Henry Thiessen)은 Lectures in Systematic Theology 라는 책에서 “하나님은 화내고 미워하는 이방 신들과도 다르고 냉혹하며 무심한 철학자의 신들과도 다르다”고 썼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고 친밀하게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은, 하나님이 피조물들을 냉정하고 강압적으로 대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잘못된 생각입니다.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자신을 더 많이 알려주기 위해 끊임없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성경 전체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사랑 때문에 이렇게 하십니다. 모든 진실한 관계는 사랑을 기초로 합니다.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마음을 돌이켜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멸하지 않으셨고, 또 사랑 때문에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사랑으로 인해 예수님을 우리를 대신해 갈보리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후에 무덤에서 살아나셨습니다. 사랑은 신선하고 희망적인 모습으로 날마다 우리를 찾아옵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살도록 지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들을 그토록 사랑하실 수 있는지 의아해 하지만, 하나님은 정말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사랑이십니다. 나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 무궁무지한 것을 거저 주시는 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이렇게 시작되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 찬송을 통해서 그려지는 생생한 이미지는 우리의 구원과 성황에 없어서는 안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상기시켜 줍니다. 그런데 그 은혜가 그렇게 놀라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값으로 따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아무리 많은 돈으로도 살 수 없습니다. 흔히 우리는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일단 의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말 그 어떤 단서도 붙이지 않고 거저 주십니다. 우리 죄의 값을 치러주신 하나님은, 신분이나 지위가 아닌 믿음을 기준으로 하여 누구에게나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는 제한이 없기 때문에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 고갈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크고 흉악한 죄악도 그 은혜로 충분히 덮을 수 있습니다. 그 은혜는 절대 측량할 수 없으며 결코 다함이 없습니다. 또 그 은혜는 어디에나 적용할 수 있기에 놀라운 것입니다. 지혜가 필요한가요?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을 통해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힘과 누군가의 인도가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을 통해 힘을 얻고 나아가십시오. 보호받고 싶은가요? 하나님의 은혜로 전능하신 능력을 통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정말 놀랍습니다.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기에 충분합니다. ** 문제를 알고 해결해 주는 이 직장을 잃었고 아내는 이혼하자고 합니다. 아이는 마약에 손을 대고 있습니다. 게다가 사랑하는 친구는 암으로 6개월 밖에 살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럴 때는 정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심한 충격 속에서 밀려오는 두려움과 염려로 짓눌리게 됩니다. 그러나 다음 세 가지 진리가 이런 고통스런 상황을 견디고 승리하게 도와줄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를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처한 고통스런 상황에 놀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문제를 상세하게 아십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 둘째,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를 돌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셔서 선한 목자처럼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십니다. “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 20:15) 셋째,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를 알고 돌보시는 그분은 자신의 계획대로 지혜롭게 일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 5:6-7) ** 언제나 문 열고 손짓하는 이 해마다 수천 명의 청소년들이 가출을 합니다. 그리고 그 중 많은 아이들이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화해하길 간절히 바라지만 그들의 반항과 분노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 때문에 애통해하는 부모의 쓰라린 마음을 알고 있습니까? 그 마음이 바로 관계를 새롭게 다시 맺기 위해 죄지은 사람들을 열심히 찾으시는 우리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우리는 반역자들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베푸시는 구원과 용서로부터 멀리 달아나 그분과 상관없이 내가 세운 목표와 만족을 추구하는 반역자들입니다. 마치 반항하는 아이들처럼 거룩한 주님 앞에서는 움찔하며 뒷걸음질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사 53:6)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기다리십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돌아올 사람들을 위해 언제나 문을 열어 놓고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그 다음 일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니면 계속 달아나겠습니까? ** 결코 돌아 앉지 않는 이 당신은 하나님과 단 둘이 보내는 시간을 기대하고 바라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꾸중 들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있나요, 아니면 기독교를 그저 짊어지고 가야 할 또 하나의 짐으로 느끼나요?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승리의 기쁨에 젖어 우리 영혼과 입술은 춤을 추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의 고뇌를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가 모호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십니다. 그러나 언제나 은혜와 자비의 틀 속에서 그 의와 거룩을 행사하십니다. 구원받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귀하고 소중한 그분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아버지의 사랑’은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달아날 수도 있고, 그분의 통치를 거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진실한 친구가 되십니다. 우리를 위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부터 우리를 아신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모든 것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도와주고 싶어 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없고 그분을 실망시킬 수도 없습니다. ** 기꺼이 수건과 대야를 선택한 이 앤드류 머레이는 “진정한 우정을 가장 잘 증명해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가장 깊은 비밀까지도 나눌 수 있는 친밀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그분께 구속된 사람들은 스스로 그분의 종이라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종종 제자들을 종이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또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5) 하나님은 태초부터 자신을 인류에게 드러내기 위한 방법들을 찾으셨습니다. 처음에는 에덴동산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선지자들을 통래 나타내셨습니다. 결국에는 아들의 희생을 토해 결코 끊어지지 않을 친밀한 교제를 갖고자 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왕의 옷을 하늘에 벗어두고 대신 수건과 대야를 손에 들 만큼 크고 지극한 것입니다.(요 13:1-17) 하나님이 우리가 아프든지 외롭든지 상관하지 않으신다고 느껴질 때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셨는지를 떠올리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심판하고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려고 오셨습니다. 하늘을 떠나기 전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꺼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가장 최근에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씀드린 때는 언제입니까? ** 하나님 묵상 1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2분에 대해 지적으로 아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친구를 알아가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제임스 패커는 그의 저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은 전 인격, 즉 마음과 의지와 느낌이 모두 관련된 문제이다. 그렇지 않으면 전적으로 인격적인 관계가 되지 않는다., 누군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관심을 갖고 행동을 같이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의 관계는 피상적이고 무미건조하게 될 수밖에 없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라고 시편 기자는 말하고 있다. ‘맛을 보는 것’은 그 독특한맛을 음미하면서 ‘먹어 보는’ 것이다. 아무리 요리사가 추천하고 눈으로 보기에 좋은 음식이라 해도 실제로 맛을 보기 전에는 그 맛을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정을 실제로 ‘맛보기’ 전까지는 상대방에 대해 잘 알 수 없다. 말하자면 친구들은 서로에 대한 생각과 공통의 관심사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나누면서 상대에게 각자의 ‘맛’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도 이와 마찬가지다., 앞서 설명한 친구 관계와 같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시 34:1-3) ** 가장 멋진 연인이 되어 주는 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것을 꺼려하시거나 우리가 과거에 저지른 실수들 때문에 염려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정말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물론 그분도 우리의 사랑을 기대하시고, 또 자신의 인격적인 사랑을 우리가 깨닫게 되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을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처럼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받아 주지 않습니다. 사회는 점점 더 뛰어난 능력과 성취와 인품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세상과 달리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우리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일단 그분을 영접하면 우리 삶 가운데서 사랑이 일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성령께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우리를 가르치시고 빚으시며 그리스도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는 최고의 사랑이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나아간 그 자리에서 우리의 소망과 낙심을 귀담아 들으시는 분을 만납니다. 우리의 실망을 아시는 그분은 우리 마음의 고통에서 오히려 선을 끌어내십니다. (롬 8:28)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악을 피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초점을 맞추도록 우리를 가르치고 보호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가장 멋진 연인입니다.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부족함 없는 그 사랑은 결국 그분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놀라운 승리를 줍니다. ** 제일 앞 자리에 앉기 원하는 이 에베소 교회는 몇 가지 좋은 특징들로 칭찬받은 교회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세워 주었습니다. 그들은 해야 할 일을 보면 지치도록 그 일에 매달렸고, 힘든 일이 있어도 변함없이 성실했으며, 필요가 채워질 때까지 끈기있게 일했습니다. 게다가 교리와 신학에 대한 지식과 분별력도 탁월했습니다. 이 얼마나 신실한 교회의 모습입니까? 거의 완벽하죠. 그러나 요한계시록 2장 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열심히 일하느냐 분주해진 이 교회는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잃었던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는데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그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잊어버린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어쩌면 당신이 바로 그런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선한 일이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쁘게 일하다가 잠시 멈출 때, 갑자기 외로움이 밀려오는 것을 느낀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울에는 그분을 위한 ‘일’이 그분과의 ‘친밀함’보다 무거울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일보다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일들을 제거해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싶다고 말씀드리십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을 새롭게 일깨워 주십니다. ** 어려움 가운데 버팀목이 되는 이 한 젊은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를 저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어떤 어려움도 겪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결코 어떤 골칫거리들과 어려운 문제들을 당하지 않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하나님의 지혜로 어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려움 가운데 우리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 10:27-28) 바울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온갖 고난을 겪었습니다. 수차례 목숨을 잃을 정도로 매를 맞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는 그 고난을 견딜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위협하고 두렵게 하는 상황 속에서도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힘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좋아하는 것,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환경에 구애받지 않는 충실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통해 하고자 하시는 일을 거부하고 달아나지 않습니다. 설사 그렇게 한다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그 사랑은 결코 식지 않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 나를 열렬히 사랑하는 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요? 사랑은 마음의 열망입니다. 특정한 대상을 향해 마음에서 우러나는 행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그렇지 않는지 아십니다. 다윗은 죄를 짓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 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겉으로 보이는 것 너머,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잘 아시는 분입니다. 다윗이 마음 깊이 하나님을 살아하고 있음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가 많은 실수를 하고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었습니다. 때문에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셨던 약속은 다 지켜집니다. 다윗은 그의 말년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삼하 23:5) 우리가 세상 유혹을 거부하고, 영원히 그리고 열렬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할 때, 사랑이 우리 마음에 찾아옵니다. 하나님은 겸손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은혜와 자비를 풍성하게 베푸십니다. ** 목자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이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을 어떻게 대하시는 지를 잘 보여 주는 몇 가지 예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목자가 양떼를 돌보듯이 우리를 돌보십니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시 95:6-7) 하나님은 그분의 양떼를 돌보십니다. 우리를 보호하식, 인도하시며, 먹이십니다. 우리가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속히 우리를 구하러 오십니다. 항상 우리를 지켜주시고 늘 두 손 내밀어 우리를 구하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또 아버지가 자녀들을 돌보듯이 우리를 돌보십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3) 하나님은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구원받음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자녀로 입양되었고, 인자하고 자비로운 그 손길이 주시는 복된 유산을 물려 받았습니다. 성경은 사랑과 징계를 함께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르치고 이해시키고 바로 잡아 주어야 하는 자녀로 대하십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렬한 사랑을 방해받지 못하게 하십시오. **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을 알리는 이 하나님은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첫째, 창조물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늘과 땅과 인간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과 공급하심을 증명합니다. 이 창조물들은 우연의 사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교하게 만드신 뛰어난 작품입니다. 둘째, 성경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성경 66권에 들어있는 말씀들은 하나님이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기대를 하시는지 말해 줍니다. 셋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무한하신 하나님이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셔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회복하신 것입니다. 창조, 성경, 예수 그리스도, 이 각각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받은 귀한 선물, 즉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보여줍니다. ** 구출 작전을 펼치는 이 흔히 ‘구출 작전’이라 하면, 불타는 건물 속에 갇힌 사람이나 홍수에 떠내려가는 어린아이, 또는 무너진 갱도에 갇힌 광부와 같이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개울가에서 낚시하고 있는 아이, 매일 어두운 갱도에 들어가 석탄을 캐는 광부를 구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출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부족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아주 위험한 상황도 잘 헤쳐 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구출받아야 하는 절망적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재물이나 지위나 신분이 우리를 구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 지혜나 기술은 무력하고 헛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구원하는 종교입니다. 절망적인 죄에 빠진 인간의 손을 잡고 끌어 올리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성경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죄에 빠져 죽은 사람으로, 사탄의 포로로, 영적 어둠 가운데 거하는 존재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비참한 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내미신 손을 붙잡고 안전한 곳으로 따라가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궁지 속에 우리 혼자 내버려 두지 않고 돌봐 주실 것입니다. ** 하나님 묵상 2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스스로 알리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면 인간은 끊없는 무지와 좌절감 때문에 곤경에 빠지게 됩니다. 존 스토트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서 이러한 하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성경의 이 첫 두 단어에는 창조 기사 혹은 창세기를 시작하는 도입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 단어들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열쇠다. 이 단어들이 성경의 종교가 하나님이 시작하신 종교임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이미 활동하셨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찾으셨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본다. 성경은, 죄에 빠져 어둠 속에서 거하면서 하나님께 돌아가려는 생각조차 못하는 인간과 그들을 찾기 위해 영광을 버리고 보좌에서 일어나 자신을 낮추시는 하나님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우주의 기초ㅓ를 놓기 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을 예비하셨다. 이 엄청난 사실을 잠시 묵상해 보라, 그리고 찬양과 감사를 드려라.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히 1:1-4) ** 사랑을 맘껏 쏟을 수 있는 이 하나님 아버지와 맺은 관계가 일종의 의무처럼 여겨지나요? 아니면 즐거움인가요?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이고 성숙한 사랑으로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자신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아들을 희생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영원히 화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을 맘껏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하셨고, 또 앞으로 하실 일들 또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입니다. 그럼 어떻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사랑한다고 말씀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입을 열어 하나님의 뛰어나심을 높이고 선포하는 것을 듣고 싶어하십니다. 또 그분 뜻에 흔쾌히 순종함으로써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이 깨우쳐 주신 성경의 원리를 따라 행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이해하며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분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하면 할수록 더 열정적으로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속한 복된 사랑의 순환입니다.. ** 참으로 즐거운 교제를 나누는 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과 멀어지고 그분으로부터 격리된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직장이나 학교나 가정에서의 수많은 일들로 분주하게 생활하다 보면,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시간을 점점 잃어 버립니다. 끊지 못하는 나쁜 습관들로 인한 죄책감 때문에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이 부끄러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가 깨진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정말 기쁜 소식이 여기 있습니다. 사랑의 예수님이 두 팔을 벌리고 조건없이 우리를 맞이하려고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지금 멈추어 서서 숨을 깊게 들이쉬고 자신의 우선순위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십시오. 하나님이 나라를 먼저 구하는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친밀감을 회복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분명 즐거운 교제를 다시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죄를 지었다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씻어 낼 수 있습니다. 죄를 고백하고 주님의 무한한 용서를 받아들인 후 그리스도가 당신의 영혼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간구하십시오. 그 어떤 죄도 구원받은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 밖으로 밀어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아침마다 새롭고 그분의 신실하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십시오. 성령님이 당신의 꺼져가는 심지를 다시 타오르게 하실 것입니다. ** 만남이 늘 신선하고 새로운 이 다윗은 시편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키고’, ‘회복시키시고’, ‘새롭게 해 주시기’를 여러 번 부르짖었습니다. 때로는 절망 속에서 눈물로 간청했고, 때로는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싶은 열망으로 호소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신선하게 만나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새로운 영혼의 날개를 타고 날아올라 신선한 영적 생동감을 경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신선한 만남을 우리가 계획하거나 일정으로 잡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묵상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생활 중에 하나님을 신선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실 수도 있고 조금씩 종요하게 다가오실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찾아오실 때 우리는 그분의 임재와 사랑을 새롭게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이 활동을 예민하게 느낄 수가 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갑자기 삶의 문제가 사라지거나 주변 환경이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분명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력한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영원히 신선하고 새로울 수 있습니다. 그분의 충만함은 결코 다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우리 자신의 약함과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더 크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만남은 메마른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 사랑의 물꼬를 트는 이 머리는 지식으로 꽉 차 있지만 감격도 활기도 없이 비생산적인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막고 있는 댐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이런 사람 속에 들어가면 그 안에 갇혀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이 계속 넘쳐 흘러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서도 넘실거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불만족과 절망에 빠지곤 하는 우리의 나쁜 습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막아 다른 이들에게로 흘러가지 못하게 합니다. 또 자기 중심적인 우리의 태도는 종종 영적 침체를 불러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 자신을 세워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개개인이 복을 받고 성장하는 것은, 각 지체들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지 못하게 막는 또 다른 장애는 염려입니다. 당면한 문제들을 너무 염려하고 고민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뻗어나가지 못합니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개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풍족한 사랑을 확신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새로운 활력과 신선함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게 합니다. ** ‘오직 나만을 사랑하라’ 말하는 이 성경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난 자기 입으로 자기를 사랑하라고 명령하는 사람은 싫어. 하나님이라도 그래. 난 자유롭게 사랑하고 싶거든” 그러나 하나님이 왜 사랑하라는 명령을 다른 모든 명령보다 앞세우셨는지 알게 되면 이런 주장을 더 이상 하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을 성령님께 내어 드릴 때 우리는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늘과 땅과 우리를 포함해 그 안에 있는 만물을 다 지으셨습니다.(창 1:1, 2:7, 22)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멸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빌 4:19)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사랑의 원칙은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그렇게 놀라운 일을 하신 분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 외에 다른 대상을 더 사랑하는 것은 우리에게 해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대상을 더 사랑하게 되면 배신의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면,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다른 우상들을 사랑하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 나를 가장 잘 아는 이 하나님과 친밀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그분께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분 앞에서 긴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순간부터 우리의 모든 것,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알고 계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도우리를 구원하실 때 이미 우리가 과거에 진 모든 죄와 고민거리와 우리가 겪게 될 어려움을 알고 계셨습니다. 영원히 그분의 자녀가 된 우리는 그분 앞에서 숨길 것이 없습니다. 마음의 상처와 분노와 실망, 비밀과 꿈들을 모두 쏟아 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분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히 13:5)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은 다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해 일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여전히 하나님게 매달릴 수 있습니다, 우리를 미혹하는 다른 여러 가지들, 돈, 명예, 권력 등의 유혹을 물리치고 의심과 회의를 떨쳐 버리십시오.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 흠모하는 친구로 두었습니까? 그 정도로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나요? 그렇지 않다면 그런 관계를 원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그분이 벌리신 팔에 안기십시오. ** 죄책감을 거두고 자유를 주는 이 보통 사람들은 사탄의 병기고 안에 들어 있는 각종 무기들, 즉 마약, 부도덕, 전쟁, 포르노, 범죄 등과 같은 것들을 두려워하고 경계합니다. 이런 무기들은 인생을 파멸시키곤 합니다. 그러나 사탄이 그리스도인들을 무너뜨리는 데 사용하는 좀더 간교한 무기는 바로 죄책감입니다. 마치 겨울 안개처럼 우리 마음에 무겁게 드러워지는 죄책감은, 과거에나 현대에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나쁜 영향을 미쳤습니다. 죄책감에 억눌려 있는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가련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오랜 죄책감은 감정을 병들게 하고, 의지를 약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우리의 영적 성장을 멈추게 합니다. 혹시 지금 이런 경험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기억하십시오. 구원받은 이들은 모든 죄를, 미래에 지을 죄까지도 용서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면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 개의치 않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누구도 더 이상 비난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 비난하는 사탄의 속삭임을 듣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사탄의 부당한 거짓 비난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경험하십시오. 마음을 열고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오. ** 나의 가치를 결정하는 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이기적이고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특히 복음주의자들 중에 이런 왜곡된 견해를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아 도취에 빠지지 않고 성경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영적 건강과 균형을 유지하게 해 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시각으로 우리를 본다면, 우리의 '자기사랑'은 균형을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루 다 측량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우리를 위해 아들을 희생 제물로 삼으실 만큼 소중한- 존재로 보십니다. 집이나 옷이나 차나 직업이나 친구들이 우리의 가치를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가치는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기로 결심하실 만큼 우리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 자신을 적절하게 돌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올바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균형 잡힌 영양과 운동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기구와 차는 깨끗이 닦지 않습니까? 우리의 몸은 어떻게 관리합니까? 설마 우리 자신이 그런 것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걸작품인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봐야 합니다. 선하고 아름답게 지어진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을 인정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분을 더 경외하고 다른 사람들을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 하나님 묵상 3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일상생활 속에서 늘 느끼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아름다운 순종을 통해 하나님 은혜를 경험하고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그의 책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서 은혜와 순종의 결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자연적으로나 초자연적으로나 탁월한 인격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인격은 만들어 가야 한다. 습관 역시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두신 새로운 생명을 기초로 습관도 만들어 가야 한다. 우리는 이미 채색된 사본이 아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드러내도록 지어진 존재다. 내가 순종하는 가장 작은 일들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전능한 능력이 있다. 단지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상황을 주장하신다고 믿기 때문에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수행한다면, 하나님이 은혜로 베푸시는 모든 최상의 것들이 그리스도이 속죄를 통해 나의 것이 된다. 은혜는 무척 피곤하지만 설거지를 하는 일, 야구 중계를 보고 싶지만 아이들과 같이 놀아주는 일, 혼자 잇고 싶지만 외로운 이웃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일들을 할 수 있게 한다. 은혜는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기꺼이 순종할 때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놀라운 사랑의 선물, 예수님 ** 기댈 수 있는 넓은 어깨 외로움은 가장 약한 감정 중의 하나입니다. 아파서 누웠을 때, 새로운 직책을 맡게 될 때, 심지어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도 우리는 외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관심을 보이거나 함께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느낌은 무시무시한 기분마저 들게 합니다. 우리의 정서에 치명적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중 가장 큰 위로를 주는 이름이 바로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과 영원히 함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 얼마나 용기를 주고, 위로가 되며, 확신을 주는 일입니까? 우리에게는 언제나 기댈 수 있는 임마누엘의 넓은 어깨가 있습니다. 우리와 동행하며 언제라도 우리의 고민을 들어 줄 친구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신들에 대해 멀리 떨어진 곳에 냉정한 얼굴로 앉아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창조주와 구세주는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우리 안에 거하시면 결코 우리를 떠나거나 버리거나 잊지 않으십니다. 그 어떤 적이나 원수도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과 평안을 빼앗아 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어떤 죄나, 행동이나, 시련도 그리스도의 충만한 임재를 우리에게서 떠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마음을 하나님의 임재로 채우시도록 비워 놓으십시오. ** 강하고 무거운 사랑 사랑의 교훈을 따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어느 날 바위로 덮힌 언덕에서 제자들은 그때까지 익숙하게 들어 온 내용들과는 너무 다른, 아주 생소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이 주님의 사역에 일어날 변화를 암시하고 있음을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 가까이 나아오는 사람들의 마음에 평안과 화합을 주는 말씀을 주로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사랑의 다른 모습을 드러낼 때가 된 것입니다. 십자가가 주님 앞에 서 있었고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십자가를 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목적을 완수할 임무를 맡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에는 최종적인 희생이 포함되어 있었고 사탄의 그 어떤 계략도 그 희생을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맛본 사람들은 다시 과거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책임도 요구하지 않는, 그야말로 말랑말랑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그 사랑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시험을 당하고 고난을 받은 그분의 사랑은, 그 어떤 도전 앞에서도 변함없고 강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 내 마음 상태 체크하기 병원에 가면 의사는 먼저 혈압, 맥박, 호흡, 체온 등 기본적인 사항을 검사합니다. 이런 것들이 건강의 전반적인 상태를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뭔가 이상이 발견되면 어떤 치료가 필요한지 결정하기 위해 추가적인 검사를 더 합니다. 우리도 마음의 영적 상태, 예를 들면 주님과 교제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기 위해 몇 가지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기본 지침서로 삼고 다음 몇 가지를 체크해 보면서, 주님과의 교제를 위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스스로 평가해 보십시오. 첫째, 우리가 주님과의 교제를 간절히 원하고 있으면 믿음이 강해집니다. 심각했던 문제가 더 이상 이겨 내기 어려운 것으로 보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을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확신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 42:1). 이 말씀은 끊이지 않는 우리의 기도가 됩니다. 둘째, 그분의 진리를 끊임없이 추구하게 만듭니다. 우리 관심의 촛점은 가능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에 맞춰집니다. 시련과 역경은 자기 연민과 염려 대신 기쁨과 찬양을 불러 일으키는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일시적인 상처를 딛고 약속된 승리를 내다 볼 수 있게 됩니다. 확인된 내 마음 상태를 통해 그분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간구하십시오. 매일 하나님을 구할 때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