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조금 더웠으면 포기했을 것이다. 며칠 동안 갈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비가 온다길래 편한(될 대로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KTX에 올랐다. 여름밤 비가 내리면 더위를 식혀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울트라대회를 참가하다보면 사연 있는 주자들을 만나게 된다. 경주에 사는 김준형 씨는 이번 여름 622km 종단을 완주했다. 10km 근처까지는 그와 함께 온 동료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발을 맞췄다.
1cp에서 시계가 1km 이상 차이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출발할 때 GPS가 튄 것인지 거리에 오차가 컸다. 회동호 둘레길을 달리는 동안 두 차례 비가 뿌렸다. 임도반환점에서 파워젤을 하나 얻었지만 더 챙기지 못한 게 후회가 되었다. 보급터에 내 입맛에 맞는 먹거리가 없어 허기를 견딜 수밖에 없었다.
나의 경우 100km 대회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은 20~30km이다. 여기저기 통증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어깨에는 누가 걸터앉은 것처럼 묵직하다. 어느 대회든 그러한데, 유독 이번 대회에 그런 느낌이 강했다. 지난 5월 풀코스 대회를 마지막으로 거의 달리지를 못했고, 기생충 폐렴으로 두 달 동안 기침을 달고 살았으니 몸이 예전과 많이 달랐다. 역전 노장 그룹을 만나 함께 걷다 뛰다를 반복했다. 70세가 훨씬 넘으신 것으로 보이는 분이 좌장격이다. 걷고 뛰는 것을 그분이 정했다. 나도 저 연배가 되었을 때 과연 100km를 뛸 수 있을까?
민락교 앞 인증대(37km 지점)에서 급수하면서 물통에 식염포도당 세알을 함께 넣었다. 땀이 많이 흐르기 때문에 이를 대처하기 위한 방법으로 썩 괜찮았다. 광안리 해수욕장을 지나는데 늦은 시간임에도 통행이 어려울 정도로 인파가 붐볐다. 사람을 피해 미로찾듯이 헤쳐나가야 했다. 이기대 오르막길은 경사가 심해 걸을 수밖에 없다. 걷다 보면 잠이 쏟아진다. 큰 고개 쉼터 반환점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으면 좋겠지만 콜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울트라 대회 참가할 때는 봉지커피 두세 개는 들고 다녀야겠다.
50km를 지나자 몸은 제 컨디션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다시 59km 지점 요트경기장으로 들어와 식사를 하고 기장으로 향했다. 동백섬을 한바퀴 돌고 나와 해수욕장을 따라가자 미포삼거리에서 달맞이길로 안내했다. 가파르게 올라간 다음 이젠 숲 속 산길로 가야 하는 상황인데 뒤따르는 주자가 랜턴은 고사하고 휴대폰도 두고 왔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희미한 랜턴불을 그 주자와 함께 나누면서 천천히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2.1km 산길을 빠져나오는데 거의 1시간이 소요되었다. 이 구간 30분 이상을 허비한 것이 무척 아까웠다. 남을 도와준 것에 위안 삼아야겠지만.
송정철길이 폭우로 일부 구간 유실되어 주로를 우회할 수밖에 없는 주최 측의 고뇌를 이해해야 했다. 철로 옆 데크로 내려서자마자 송정역 앞 CP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동백섬을 함께 달렸던 일행들(지해운 님 등)이 수박화채를 다 먹고 일어서고 있었다. 앉은자리에서 수박화채 두 그릇을 비웠다. 선두 그룹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기록을 크게 염두에 두지는 않았지만 자칫 15시간을 넘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일행들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82.9km 수산물체험센터를 반환하자 날이 밝아왔다. 제발 햇살이 비추지 말았으면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햇볕이 내리쬐었다. 불가피하게 나뭇가지를 꺾어 조금이라도 얼굴이 타지 않도록 가렸다. 송정해수욕장에서 송정역 앞 CP를 지나치고 말았다. 2년 전처럼 똑같은 실수를 했다. 수박화채를 양껏 먹을 수 있겠다는 기대는 물 건너갔다. 산책하는 분께 양해를 구하니 선뜻 물 한 병을 건넸다. 그분 덕에 급수는 해결할 수 있었다.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다시 공사구간이다. 산길을 빡싸게 오른 다음 달맞이길 내리막을 내려섰는데, 올라올 때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길을 잘못 든게 확실했다. 휴대폰을 꺼내 방향을 확인한 다음 해운대 해수욕장을 찾아들어가자 요트경기장까지는 2.4km 남았다고 안내한다. 14시간 26분으로 골인했다. 100km 대회인데 공사구간 우회 때문에 95km 경기가 되었다. 작년 100km 옥스팜트레일워커 기록(14:08:52)보다 못하고, 최악이라 생각했던 2년 전 같은 대회기록(13:41:14)보다 못하지만, 그래도 막판에 걷지 않고 뛰었다는 점이라도 위안 삼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