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비아 통신(웃음과 성찰의 에피소드)>
1. 홍콩 창이공항의 간이 음식점 중에 인기 최고는 일본 라멘집!
아래의 사진에서 처럼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비는 식당은 홍콩반점도 아니고, 차이나 레스토랑도 아닌 일본 레멘집이었습니다. 돼지국밥같은 느끼한 국물에 비계가 섞인 돼지고기(편육을 끓여 놓은 것같음)를 넣은 라면집이 아주 최고 인기였습니다. 비행기 환승을 하기위해 아프리카를 오며 가며 라멘집에 들러서 라면을 먹고 왔습니다.
여러 간이 식당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좌석의 자리 잡기도 힘들고, 한꺼번에 10개를 시켜서 셀프로 가져다가 먹는 것도 고역이었습니다. 번호 순대로 호출 번호가 전광판에 뜨면 가져다가 먹는 방식으로 아주 북적거리고 혼잡하였지만, 배고픈 나그네에게는 라멘이 그런대로 먹을 만했습니다. 우리나라의 한식 비빔밥집이 거기 홍콩 공항에 입점에서 간편하게 먹을 수 있었으면, 대박은 아니어도 소박은 터뜨렸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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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잠비아 입국 수속을 밟는데 1시간 30분 걸려서 인내와 기다림의 고통 체험!
우리나라의 빨리빨리 문화가 졸속과 편법의 행정, 건물을 지을 때 뚝딱 대충 짓는 부실 건물 시공 등 부작용도 있지만, 그와 반대로 장점도 꽤 많은 것같습니다. 우리나라 인천공항의 입국 수속은 아마도 길어야 20분도 걸리지 않았을 것인데, 잠비아는 무려 1시간 30분이나 걸렸습니다. 그냥 줄을 서서 무료하게 기다리는 모습은 인내의 한계를 느끼게 했습니다.
만만디, 나무늘보의 행보, 세월아 내월아, 이청춘 다하도록 느림의 행동을 봤습니다. 그 모습들을 보면서 속터지고 복창 터지는 일이지만 참고 견뎌내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한사람의 여권을 받으면, 이러저리 돌려보고 컴퓨터 자판 두드리다가 전화오면 다시 전화받는 태도를 보면서 이국인의 눈에는 참으로 답답한 마음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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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리의 1960년대, 1970년대 한국 농촌 푸세식 화장실의 옛추억을 되살리는 뭄부와 지역의 화장실 체험!
뭄브와 지역을 방문하면서 대부분은 푸세식 화장실이었습니다.
푸세식 화장실의 암모니아 가스, 발효된 지린내와 대변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막아야하고, 눈이 저절로 감길 정도의 고약한 자극은 정말 참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옛날 어렸을 때, 화장실 냄새를 미화시켜서 우리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른바 '농촌의 향기'라고 포장해서 말했습니다.
뭄부와 지역을 다니면서 화장실의 모습들이 마치 옛날 제가 어렸을 때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과거에 우리의 농촌 동네도 공동화장실(부잣집 대문의 바깥 쪽에 있는 화장실)이 꽤 있었습니다. 구조는 판자 두개로 발판을 만들어 놓고 그 밑에 큰항아리를 묻거나 시멘트로 분변통을 만들어 놓은 화장실이었습니다. 그때 어린 추억으로는 부잣집 사랑방의 대문 밖 화장실은 대변보다 주로 사랑방에 모인 어른들의 소변이 많이 모였던가 봅니다. 어느날 제가 그 화장실에 가서 대변을 보다가 기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대변이 풍덩하고 빠지니까 작용반작용에 의해서 풍성한 오줌과 섞인 묽은 대변이 다시 엉덩이에 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냄새도 아주 고약했습니다. 냄새는 요즘의 여름철 등산길에 있는 간이화장실 냄새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때는 화장지가 없으니까 누런 신문지를 자른 것이 고급 화장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에게 발생한 문제는 신문 조각이 2개밖에 없었습니다. 2장의 신문 조각으로 일을 치르러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화장실의 오물이 엉덩이에 튀어 묻은 난감한 상황에 어찌할 수 없어서 당황하고 곤란했던 처지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뭄브와 방문 시에 어렸을 때의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냄새가 고약한 푸세식 화장실 체험을 제대로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미리 예측했던지, 외국 여행의 경험이 풍부한 서교장선생님은 이에 대한 대비를 단단히 하셨습니다. 함께 동행한 서 교장선생님께서 아주 유용하게 활용했던 휴대용 비데를 보여주셨는데, 아주 신기했습니다. 푸세식 화장실을 사용하는 지역을 방문할 때, 휴대용 비데는 아주 유용함을 깨달았습니다.
어느 비데 회사의 광고 문구가 얼핏 떠올라서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닦지말고 씻으세요!"
여기 인터넷에서 구입이 가능한 휴대용 비데 사진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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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젖을 먹이는 젊은 엄마의 모습에 어릴 적 추억을 반추(되새겨 봄)!
제가 어렸을 때, 막내 아들로 자라서인지 서너살이 되었을 때도 엄마젖을 수시 때때로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언젠가 고향에 갔을 때, 제가 개구장이었다고 동네 어른들이 말씀하신 것을 보면 짖궂은 면이 꽤 많았던 것같습니다.
이번에 뭄브와 오지에 있는 열악한 보건소를 방문했을 때, 젊은 엄마가 아이에게 젖을 물린 채로 보건소 건물 밖에 서 있는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습니다.
그때 아이의 순수하고 선한 눈빛, 엄마의 밝은 미소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어쩌면 모자의 그모습을 보면서 어릴 때의 모친과 제모습을 투영해보았습니다. 젖을 물린 모성과 사랑스런 아들의 젖을 먹는 모습이 부끄러움이나 민망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정겹고 너무나 행복한 모습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때 돌아가신 저의 모친에 대한 그리움과 아들 사랑의 헌신적 모습을 다시보는 듯해서 코끝이 시큰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요, 엄마품은 오대양육대주보다 넓고 포근한 안식처임을 어린 아이가 눈빛으로 말하는 것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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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삼색 볼펜을 너무 좋아하는 뭄브와 지역, 오지에 위치한 중등학교의 남녀 학생들!
제가 학생들과 함께 찍은 아래의 사진을 보면, 맨 오른쪽 학생이 삼색 볼펜을 4개나 윗주머니에 꽂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곳 학생들이 삼색볼펜을 구경하지 못했는지 너무 좋아했습니다. 제가 미리 가져간 80개와 서 교장선생님께서 가져간 것 중에서 40개를 30여명의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학교에 우리 일행이 처음 도착했을 때, 환영의 합창을 불러준 학생들에게 전달했습니다. 학생들에게 한명마다 2자루씩만 전달해도 80개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학생들에게 일일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동행했던 일행 중 여럿이 함께 나누어주다 보니까, 받은 학생이 또 받았습니다. 처음에 두자루를 받고 잽싸게 얼른 감추고서, 시치미떼고 다른 분에게 다시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 일행은 각자 한움큼 들고 있는 것을 모두 선물하다보니까, 4자루의 볼펜을 받고 좋아하는 학생들도 많았던 것입니다.
이런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서 교장선생님께서는 학생들과 사진을 찍은 후에 자켓 윗주머니의 메모용 볼펜을 꽂아 두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한 남학생이 "기브 미 볼펜!"이라고 간절하게 제스처를 하면서 애걸하기에 그냥 빼서 주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많이 가져가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될 정도로 의미있는 선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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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열악한 보건소 환경과 개인별 차트, 그리고 고물상도 가져갈 것같지 않은 휠체어!
뭄브와 오지의 마을에서 환자들은 몇십리를 걸어서 이곳 보건소에 오는 열악한 보건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보건소에는 개인별 차트가 빼곡히 꽂아 있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었습니다.
동행한 서 교장선생님과 함께 그 차트의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공감하였습니다.
"아, 이런 시골의 열악한 보건 환경 속에서도 빼곡히 꽂힌 개인별 차트를 보면서 우리가 많이 반성해야겠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교육현장에서 선생님들이 자기 수업과 자기 교과교육을 하면서 이 보건소의 개인별 차트처럼, '수업카드나 교과지도 교사카드를 매년 보관하거나 자료를 만드는 교사가 과연 얼마나 될까?'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앞으로 그런 선생님들이 많이 나오기를 희망하는 마음에서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자기수업 성찰과 수업방법 개선을 위해서 교사별 '수업카드', '교과지도 카드'를 만들어서 매년 차곡차곡 보관하는 선생님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수업차트를 작성하고 피드백을 통해 지속적으로 자신의 수업을 발전시킨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교사들이 1년에 한번 정도는 동영상을 찍어서 전사도 해보고, 다시 자기수업을 되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해마다 최소한 1회 정도는 자기 수업을 직접 동영상으로 찍어서 수업혁신의 중요한 기록으로 삼고 자료로 보관한다면 그것 만큼 보람있고 의미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는데, 서교장선생님과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보건소 내부를 한바퀴 둘러보면서, 고물상도 가져갈 것같지 않은 낡은 휠체어를 보고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잠비아가 앞으로 빠른 미래에, 우리나라의 의료 수준까지 의학이 발달하기를 기원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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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월드비전의 지원과 교육을 통해 제분소를 운영하는 젊은 농부, 자립 기반을 다져서 부농이 된 청년의 모습!
어린 시절, 시골 농촌에서 가장 부잣집은 방앗간을 운영하는 집과 막걸리를 제조하는 양조장집(술도가집)이었습니다. 방앗간은 쌀 한가마를 빌려주면, 1년 후에 장리(이자)가 거의 쌀 한가마니 가까이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부자가 안될 수가 없는 당시 시대 상황의 모습이었습니다.
뭄브와 지역의 드물지만 성공한 젊은 농부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여기 뭄브와 지역의 농촌 청년 한명이 월드비전에서 지원한 영농교육 프로그램과 자금 지원으로 성공한 케이스였습니다.
이곳 뭄브와 지역은 농산품 중에서 옥수수가 주요 생산품입니다. 그 청년은 우리의 정미소에 해당하는 옥수수를 분쇄하는 제분소를 운영하였습니다. 그의 집에 있는 마당 한가운데, 지붕없는 옥수수 보관용 창고에는 말린 옥수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농촌에서 자립 기반을 위한 영농교육과 자금 지원을 통해 더 많은 청년들이 부자가 될 수 있는 좋은 선례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 젊은 농부의 집을 방문해서 밝은 표정의 미소,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보고 저절로 흐뭇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지 마을의 제분소에서 옥수수 방아를 찧는 모습(이웃마을의 젊은 여성이 옥수수를 가져와서 방아를 찧어주는 모습)과 옥수수 저장 창고의 모습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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