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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양 지혜 스크랩 임천서원 이야기
성기숙 추천 0 조회 107 15.03.09 10:43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임천서원(臨川書院)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송현동 740
건 축 주 :  지방 유림
건축시기 :  1607년(선조 40)
중건시기 :  1618년(광해군 10)
이건시기 :  1847년(헌종 13)
사액시기 :  1618년(광해군 10)
훼철시기 :  1868년(고종 5)
소 유 자 :  김시인(관리자 : 김시인)
문 화 재 :  문화재자료 제16호(임천서원 강당), 1985년 8월 5일 지정, 1동


건축 이야기
1607년(선조 40)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성일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임하현 서쪽에 임천향사(臨川鄕社)를 세우고 문충공(文忠公) 학봉(鶴峯) 선생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1618년(광해군 10)에 향사를 중건하고 서원으로 승격시켰다. '임천'이라 사액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620년(광해군 12) 위패를 여강서원에 배향함에 따라 임천서원의 주원(主院)이 폐지되었다.
1847년(헌종 13)에 석문정사 서쪽에 홍교당을 낙성(落成)하였다. 이어 1849년(헌종 15) 동·서재를 완성하였다.
1856년(철종 6) 묘우인 숭정사를 낙성하고 위판을 봉안했으나,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08년(순종 2) 사림의 공의(公議)로 현 안동시 송현동에 복원하고, 1909년(순종 3) 학봉의 위판을 숭정사에 봉안하였다. 1979년 입도문(入道門)·강당(講堂)·묘우(廟宇)를 증축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건축 구성
숭정사는 정면 3칸 건물에 맞배지붕 양식이고, 홍교당은 15칸에 팔작지붕이다. 동재와 서재는 각 4칸이고 팔작지붕이다. 그리고 신문과 전사청은 4칸이며 맞배지붕이다.
사당인 숭정사에는 김성일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인 홍교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 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곳이며, 주소는 서원을 관리하는 고자가 사용하고 있다.
이 서원의 강당인 홍교당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판
숭교당(崇敎堂)
응도재(凝道齋)
홍교당(弘敎堂)
입도문(入道門)
양호재(養浩齋)
『맹자(孟子)』 공손축상(公孫丑上)편의 호연지기를 기른다.[養浩然之氣]에서 따온 말이다.

내력과 기능

관련문집
- 연방세고(聯芳世稿)
이 책은 의성김씨 제산종택에 소장되었던 『연방세고(聯芳世稿)』이다. 김진(金璡, 1500~1580)과 그의 다섯 아들 김극일(金克一, 1522~1585), 김수일(金守一, 1528~1583), 김명일(金明一, 1534~1570), 김성일(金誠一, 1538~1593), 김복일(金復一, 1541~1591)의 시문집을 함께 모아 총 3책으로 1976년에 간행한 것이다.



관련유물
- 연방세고(聯芳世稿)
『연방세고(聯芳世稿)』는 조선 중기의 학자 김진(金璡, 1500~1580)과 그의 다섯 아들 김극일(金克一, 1522~1585), 김수일(金守一, 1528~1583), 김명일(金明一, 1534~1570), 김성일(金誠一, 1538~1593), 김복일(金復一, 1541~1591)의 시문집으로, 5권 3책의 목판본이다.
- 퇴계선생문집구판(退溪先生文集舊版)
원집(原集)은 저자의 수록본을 바탕으로 1573년 손자 이안도(李安道)와 문도 우성전(禹性傳)·조목(趙穆) 등이 흩어져 있는 글을 수집하였고? 1578년 류성룡(柳成龍)을 중심으로 초고본의 교정이 진행되었다. 1584년 이안도가 죽자 조목이 뒤를 이어 편집을 담당하고 류성룡과 김성일(金誠一)은 교정을 담당하여 1588년에 선사본(繕寫本)을 완성하였다

관련인물

주향자
- 김성일(金誠一, 1538~1593)
본관은 의성이고, 자는 사순(士純)이며, 호는 학봉(鶴峯)이다. 아버지는 김진(金璡)이다. 선생은 이황(李滉) 선생의 문인인데 1556년(명종 11)에 아우 김복일(金復一)과 함께 도산의 이황 선생을 찾아 『서경(書經)』, 『역학계몽(易學啓蒙)』, 『심경(心經)』, 『대학의의』 등을 익혔다.

1564년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 다시 도산에 돌아와 이황 선생에게서 수학하고, 그로부터 요순 이래 성현이 전한 심법을 적은 병명(屛銘)을 받았다. 1568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사가 되고, 이듬해 정자가 되었다. 이어서 검열, 대교 등을 거쳐 1572년 봉교가 되어 노산묘(魯山墓)를 노릉(魯陵:단종의 능)으로 봉축하고, 사육신의 관작을 회복시켜 그들의 후손을 녹용토록 진언하였다.

이듬해 전적과 형조, 예조의 좌랑을 거쳐 정언이 되었고, 이어서 홍문관수찬으로 지제교,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1574년 부수찬을 거쳐 다시 정언이 되어 변장으로부터 초피 덧저고리를 뇌물로 받은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을 탄핵하였다. 그의 강직한 성품은 잘못을 논하는데 이처럼 거침이 없었다. 이를 더욱더 잘 알려주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전해진다.

김성일은 35세이던 1572년(선조 5) 9월에 사간원정언으로 경연에 참여하였다. 이 때 선조 임금이 경연에서 하문하기를, “경들은 나를 전대의 제왕과 비교해볼 때 어떤 임금에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 때 선조는 스스로 성군으로 자처하는 마음이 있었다.
정언 정이주가 먼저 아뢰기를, “요순(堯舜) 임금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성인에 비유된 선조는 기분이 좋았다. 이 때 김성일이 아뢰기를, “요순과 같은 성군도 될 수 있고 걸주(桀紂)와 같은 폭군이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선조는 “요순과 걸주가 같은 반열이라 보는가?”하고 물었다. 김성일은 “잘 생각하면 성인이 되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친 사람이 되는 것이니, 상감께서는 타고난 성품이 고명하시니 요순처럼 되기가 어렵지 않으시나 다만 스스로 어질다 생각하고, 간언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병통이 있사오니 걸주가 간언을 막다가 망한 것이 아니겠습니까.”라 하였다.
임금이 얼굴빛이 바뀌어 자세를 달리하자 경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벌벌 떨었는데, 서애 류성룡이 옆에 앉았다가 아뢰기를, “두 사람의 말이 다 옳습니다. 요순과 같다고 대답한 것은 임금을 인도하는 말이며, 걸주에 비유한 것은 경계의 뜻으로 말한 것이니 모두 주상을 사랑하는 까닭에 아뢰는 말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의 노기가 비로소 풀리면서 술을 내리라고 하명하고 경연을 파하였다. 김성일은 이처럼 임금 앞에서도 경계하라는 직언을 할 정도로 강직한 직간을 올리는 사람이었다.

이듬해 이조, 병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7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宗係辨誣)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돌아와 이듬해 홍문관 교리가 되고, 이어서 장령, 검상, 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80년 함경도 순무어사로 함흥, 삼수, 길주, 종성 등을 살피고 돌아 와, 변장으로서 직무에 충실한 혜산첨사 김수를 당상관에 승품하고, 영건만호, 우응장과 정견용, 김광옥 등을 선전관에 기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선생이 1583년 사간이 되고, 이어서 황해도 순무어사로 다녀와 군기 관리를 소홀히 하고 창곡을 부실하게 한 황주목사 윤인함의 파직을 건의하였다. 이듬해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민원의 처리에 노력하고, 오랫동안 끌어온 이 고을 임씨, 나씨간의 송사를 해결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금성산 기슭에 대곡서원을 세우고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을 제향하는 한편 선비들을 학문에 전념하게 하였다. 1586년 나주 사직단의 화재 에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자성록(自省錄)』, 『퇴계집(退溪集)』 등을 편찬, 간행하였다.

1588년 종부시첨정이 되고, 이어서 봉상시정, 경기추쇄경차관, 예빈시정, 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590년 통신부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복명할 때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 황윤길과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그 해 부호군에 이어 대사성이 되어 부제조를 겸하였고,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592년 형조참의를 거쳐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일의 복명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서울로 소환 중,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류성룡 등의 변호로 직산에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어 다시 경상도로 향하였다. 의병장 곽재우를 도와 의병 활동을 고무하는 한편, 함양, 산음, 단성, 삼가, 거창, 합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규합하는 동시에 각 고을에 소모관을 보내어 의병을 모았다. 또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데 노력하였다.

그 해 8월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도관찰사로 다시 돌아와 의병 규합, 군량미 확보에 전념하였다. 또한 진주목사 김시민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진주성을 보전하게 하였다 1593년 경상우도순찰사를 겸하여 도내 각 고을의 항왜전을 독려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선생은 정치적으로 동인에 가담, 1590년 정여립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한 최영경의 신원을 위해 서인의 영수 정철을 규탄하였으며, 그 후 동인이 남인, 북인으로 갈릴 때 류성룡, 김우옹 등과 입장을 같이하여 남인을 이루었다. 또 학문적으로는 이황의 고제로서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주리론을 계승하여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하였다.

그의 학풍은 효제충신을 근본으로 본심을 따라서 착실한 하학공부(下學工夫)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볍게 원리적인 성명(性命)을 논하지 않았다. 또한 이욕(利欲)을 억제하고 마음공부를 착실히 하도록 하였다. 그의 학문 내용은 이황에게 올린 서간들과 이황의 언행록(言行錄)·사전(史傳)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그가 이황에게 질의한 것은 예(禮)에 관한 것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이황에게 인심도심(人心道心)의 구분을 질의하여 이황이 손수 써준 심법(心法)의 병명(屛銘)을 늘 옆에 두고 정진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황의 학문은 주경(主敬)과 궁리(窮理) 공부를 철저히 갖춤으로써 참으로 알고 얻는 경지에 도달하였다고 칭송하였다.

이기(理氣)에 대해서는 이(理)를 중시하여, 이가 필연성(必然性)이면서 당연성(當然性)이고, 천리(天理)가 곧 인륜(人倫)이라는 이황의 이에 관한 견해를 계승하였다. 또 기질(氣質)에 관하여 이황에게 질문하였는데, 그때 인간은 모두 일원(一元)의 기(氣)를 타고나지만, 그 일원의 기도 스스로 고르지 않기 때문에 사람마다 기질이 다른 것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심(心)에서도, 이와 기가 합하여 심이 되며, 이 심 가운데 이가 주동하여 기를 통수(統帥)해야 한다는 이황의 주장에 따랐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학문은 호파(虎派)를 이루게 되었으며, 그것은 장흥효(張興孝)를 거쳐 이현일(李玄逸)에게 전해졌다. 또한 예학에도 밝아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모든 예절에 따라 행하였으며 『두씨통전(杜氏通典)』, 『구씨의절(丘氏儀節)』, 『향교예집(鄕校禮輯)』 등을 참고하여 『상례고증(喪禮考證)』을 지었다.

1614년에 신도비가 세워지고, 안동의 호계서원, 사빈서원, 영양의 영산서원, 의성의 빙계서원, 하동의 영계서원, 청송의 송학서원, 나주의 경현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해사록』, 『상례고증』 등이 있으며, 1649년(인조 27)에 문집으로 『학봉집(鶴峯集)』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선생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마을이야기

안동 > 시내권 > 송현동
- 안동부 서쪽에 위치한 솔티마을
안동부로 들어오는 서쪽에는 소나무가 많은 고개라는 뜻을 가진 솔티마을(솔티로 이루어진 마을)이 있는데, 한자로는 송현동이라 한다.

송현동은 200여 년 동안 자리를 지켜온 느티나무가 있는 느티나무골과 수고내미골로 나뉘어져 있다.
정부 수립 후 지금까지 이 마을은 군대가 주둔하는 지역이 되어 안동 시내에 있어도 인구가 증가되지 않았으나 최근에는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서 거대한 아파트촌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군이 송자(松字)가 든 곳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이 마을은 안전했다는 전설이 있다.

송현동에는 후백제 견훤과 고려 태조가 거느리는 군사가 회전(會戰)한 합전(合戰)이라는 곳이 있는데, 태조가 병산(甁山)에 진을 치고 견훤은 석산(石山)에 진을 쳐서 격전 끝에 태조가 이곳에서 견훤을 파하고 고창군(古昌郡:옛 안동의 이름)을 평정하였다고 한다. 현재 50사단 서쪽 경계선과 접하며 옥동에서 이어지는 도로에 합전교(복개로 없어짐)가 있었음을 보면 합전이 어디에서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 당시 견훤군과 왕건군이 싸워 견훤 군사가 몰살당했다는 개펄 모래가 있었던 몰개골[沙谷]이라는 곳도 있다.

솔티의 서남쪽 아래 낙동강(洛東江)과 접하는 호암마을도 송현동에 속한다. 호암은 범이 누워 있는 형상을 가진 산에 의지하였다 하여 호암(虎岩)이라 하기도 하고, 강변에 호걸바위가 있어서 호암(豪岩)이라 하기도 한다. 호암으로 인하여 호암마을은 낙동강에 홍수가 나도 피해를 입지 않는다고 한다. 이 바위는 원래 한 개였으나 어떤 장군이 은거해 있다가 막곡동의 석문정으로 간 뒤 갈라졌다고 하며, 그 윗바위는 흔들면 흔들리는 채로 얹혀 있다고 한다.
호암마을에는 박씨들이 살고 있고,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을 배향하는 임천서원이 있다.

호암마을과 국도를 마주하는 건너편 지역은 솔밤이라 하는데, 1351년(충정왕 3)에 권씨(權氏) 성을 가진 선비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천등산(天燈山) 줄기에 있는 솔이 밤에 유난히 빛난다 하여 솔밤이라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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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5.03.09 10:43

    첫댓글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 15.03.09 13:58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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