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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05, 1999. Written by C. J. Lee
요즘은 그런 일을 볼 수 없지만 80년대 초반 까지만 해도 무교동이나 명동 같은 데에서 군인들끼리 집단 난투극을 벌이는 걸 흔히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싸움이 벌어지면 적당히 안전한 장소로 물러나서 싸움구경을 하곤 했는데 대한민국 군대의 막강 전력을 보면서 가슴 뿌듯했었다. (그럼! 잘 한다! 모든 전쟁의 끝은 백병전이지…백날 폭격만 하면 뭐하냐? 점령하고 깃대 꽂아야 이기는 거지.) 그런 군인들 싸움에는 대개 해병대가 끼어있게 마련이었다. 오죽하면 옛날부터 ‘개병대’라고 했겠나? 듣자니 자기들끼리는 ‘해병 상병은 육군 대령과 같다’고 한단다. 그리고 나가서 싸우고 이기고 오면 상을 내린단다. 묘한 군대다. 용맹성의 근본은 쌈이다.
나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서울과 붙어있는 K 라는 고장에 있다. 친가 쪽은 그곳에서 15대정도 살았다니까 한 4백년정도 살아온 듯 하고, 외가 쪽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꽤 오래 그곳에서 뿌리를 내린 듯하다. 그러다 보니 나의 친가쪽 친척과 외가쪽 친척이 자기끼리도 친척이라고 하기고 하고…
하여간 서울시 경계를 벗어나면 버스가 서는 정류장마다 친척이 없는 곳이 없다. 그 K 라는 고장의 일부는 최전방이기 때문에 해병대가 많이 주둔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개병대’와 관련된 수 많은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돌 한 뿌리, 나무 한 그루마다 ‘개병대’에 얽힌 전설이 어린 유서 깊은 ‘개병 고장’이다. ‘개병 전설의 고향’이라는 프로를 만들면 단연 그 고장이 뜰텐데…그 곳의 군수와 시장은 마켓팅 개념이 없나 보다. K 군이 개병과 더욱 더 끈끈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 곳 사람과, 그 곳을 본적으로 갖고 있는 사람은 자동으로 해병대를 가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영장이 그렇게 나온다.(그런 지방이 몇 군데 더 있었는데, 제주, 포항 등도 그렇다고 한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개병대에 관한 온갖 흉측한 소리를 듣고 자란 그 곳의 청년들 중 심약한 이들은 자원해서 육군을 가는 이상한 일도 일어나곤 했다. 문제는 그 육군들이 휴가를 나올 때인데, 그 K 라는 고장은 검문소가 많았다. (요즘은 거의 없다.) 내가 친척집에 가려고 시외버스를 타고 갈 때면 으레 검문소에서 휴가 맞아 집에 가는 육군 사병들이 해병 헌병에 끌려 내리곤 했다. 기사 아저씨도 이골이 났는지 기다리지 않고 그냥 떠났다. 차비나 돌려 주었는지..나는 늘 그게 궁금했다. 들리는 말로는 그 곳에서 오만가지 수모를 당한 후 풀려난다는데, 보통 그런 검문소를 3개쯤 거쳐야 집에 갈 수 있었단다. 해병이 무서워 육군 간 사람 들이니 버스에서 끌려 내릴 때 그 공포가 오죽 했을까? 신체 일부의 근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오줌도 쌌으리라…그것을 보면서 어린 나는 이렇게 생각하곤 했다. ‘설마 죽이진 않을 텐데 해병대를 가지 왜 육군을 가서 저 고생인가..’ 이 생각은 나이 먹은 뒤 바뀌었다.
이러한 지경이니 내 친척들은 해병대 천지이다. 나는 아버지의 선견지명(?)으로 호적이 옮겨 있어서 육군을 갔지만 내 친, 외가의 아저씨 뻘, 형님 아우 뻘, 조카 뻘 할 것 없이 모두 해병대 출신이고 조금 나이가 들은 친척들은 전부 월남까지 갔다 온 ‘청룡 전우’들이다.
친척이 또 워낙 많다 보니 각종 경조사도 많다. 결혼식은 보통 얼굴만 보이고 오는데 초상이 나면 쉽게 끝나지 않는다.
(지금 TV에서 위성 생중계를 한다. 그 것도 동시에 두 군데에서… 미국인 것 같은데…누가 상을 받나 보다. 국가대표로 받는가 보다. 생중계까지 하는 거 보니까…정말 자랑스럽다. 그런데 SBS는 이런 감격적인 순간에 모델들하고 노닥거려도 되는 건가? 많이 컸다.)
온 집안 가득 친척들이 모이면, 워낙 다양한 연령층과 직업들이 있다 보니 상주는 정말 편하다. 사실 상주가 무슨 일을 하는 법도 아니지만, 누가 상주이던 간에 넘쳐 나는 상주의 ‘조카 뻘’들이 일을 분담해서 신속하게 처리한다. 예술이다. 그리곤 술상을 앞에 놓고 이야기판이 벌어지곤 하는데, 고인에 대한 이야기와 서로의 안부, 안 보이는 일가의 근황 등이 한바탕 쓸고 지나간 후 이제 우리의 ‘해병전우회 K 지부 총회’가 시작된다.
대한민국 어딜 가도 있는 조직, ‘해병전우회’. 얼룩무늬 군복에 빨간 명찰, 가슴과 등판에 붙은 주로 노란색인 온갖 비공식 장식들, 팔각 모자(가끔은 빨간 팔각모도 있다. 조교 출신인가 보다)에 선그라스 쓰고 태극기 달린 오토바이타고 시골 읍내를 누비는 우리의 ‘해병전우회’. 조금 사정이 좋은 동네에선 찝차에 온통 뻘건 칠, 노란 칠을 해서 진짜 해병대 헌병차 모양을 해선 다닌다. 그 전우회가 정확히 뭘 하는지는 모르지만 교통정리도 하고 수해현장에 항상 나타나는 걸 보면 그리 불량한 조직은 아닌가 보다. 하긴 92년의 그 참담했던 LA Riot 에서 자경단을 구성해서 총 들고 TV에 나타난 한민족은 바로 그 ‘해병전우회’ 이지 않은가…
나는 어느 모임에서도 최소한 존재한다는 것은 알릴 수 있는 정도의 발언력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여긴 아니다.(물론 대학 4학년 때의 EWMC에서도 그랬지만..) 온통 떠들썩한데 서로 깃수 물어보고(해병대는 깃수가 절대적이다.), 근무지 물어보고 훈련 힘들었던 이야기, 월남 이야기, 술 먹고 땡깡 부린 이야기, 육군 패준 이야기.. 끝이 없이 이어지는데 역시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 자세히 들어보면 잘한 일 은 거의 없었고, 용맹하다기 보다는 흉폭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면면을 보면 자부심이 그득한 표정들인데 점점 술 기운까지 가세해서는 목소리도 커지고… 그 때쯤 되면 나는 불안해 지곤 했다. 이 해병들이 오늘 상가에 와서 기어코 ’귀신을 잡고’ 가는 게 아닌가? 저러다 오버해서 ‘곤조가’라도 부르는 게 아닌가?
(사실 이 ‘곤조가’라는 것도 그렇다. 해병대의 상징적인 노래인데 말이 노래지… 노래라기 보단 악쓴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곡조인걸 보면 창작곡은 아닌 것 같은데 무엇보다도 가사가 문제이다. 가끔 방송에서도 해병들이 그 노래 부르는 걸 봤는데 가사를 완전히 바꿔 부른다. 가사가 완전히 폭력조장, 음란성 짙은 방송불가 수준이니 그대로 방송에는 못 나갈 수 밖에..)
그래도 양식들은 있는지 아직 초상집에서 ‘곤조가’ 합창했다는 소리는 못 들어 보았다. 술들이 조금 더 오르면 이제는 일가의 촌수체계가 무너질 위기가 온다. 깃수빠른 고참 조카 놈이 후배 아저씨에게 은근히 말을 놓는 듯 할 때쯤 되면, 그 때까지 묵묵하게 나의 술을 마시며 국가기밀 투성이인 특수공병의 임무와 동북아 정세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도 기회가 온다. 그래도 남을 배려해 줄 줄 아시는 6촌 형님…‘철주는 군대 어디 다녀왔지?’ (물론 깔보는 투다.)
나는 이 한번의 질문에 선뜻 대답을 못한다. 우리 집안에 ‘철주’가 어디 한둘인가? 나의 행렬은 ‘주’자가 돌림인데 조금 먼 일가까지 모이면 겹치는 이름이 있기 마련이다. 또 ‘맥주’와 ‘막걸리’ 빼놓고는 술 종류는 다 있기 마련이고.. 다시 한번 더 질문이 나오면 그 때는 내가 나선다. 찬스! 최대한 호탕하게… ‘하..하..하..저는 육군을 갔다 왔습니다만, 일반 육군이 아니고 특수…..’ 이 때쯤 되면 벌써 좌중은 다시 소란해진 뒤였다. 또 역시 자기들끼리 남 패준 얘기, 월남서 박박 긴 얘기…. 말만 들으면 고등학교 양아치 모임 같기도 하고… 흰 머리를 보면 ‘조폭 원로회의’ 같은 분위기이다. 그러나 나의 말을 최소한 한 문장은 들어 줘야 할 것 아닌가? 특히 나에게 질문한 형님 만은 들어 줘야 하지 않는가?
역시 용맹함은 무식의 기반 위에서 존재한다.평소에 시제나 벌초 때 회의에서 내가 한 마디하면, 젊은 층을 대변한다고, 신선해서 좋다고 따르던 이 해병 조카 놈 들마저 아저씨를 우습게 보는 눈초리가 역력하다. 심지어 저 놈은 방위 아닌가? 방위가 이 병장을 우습게 보다니… 그러나 그 해병 방위의 눈초리에는 해병의 자부심이 가득하다. ‘해병 방위는 육군 상사와 맞먹는다.’ 아…대한민국..
상을 다 치루고 집에 올 때마다 나는 항상 생각한다. 이 나라는 누가 지키는가?
특수공병이 뭔지 모르는 저 해병 일가들…. 신이여, 이 나라를 저 해병으로부터 구하소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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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웃다가 또 웃었습니다! 그런데 K시 일가가 뭔지 모르는 특수공병이 뭔가요???
ㅋㅋㅋ 참말로 재미나는 옛낳 옛적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