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펌 금지 , 허락은 작가님께 맡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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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눈 떠보세요."
그가 말한 말에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뜨려 하고 있었다. 오래 감고 있던 채라 그런지, 빛 덕분
에 쉽게 뜰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너무 밖이 보고 싶었던 지라 무리를 해서라도 뜨고 싶었
다. 지금까지 줄곳 볼 수 없던 곳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즐거운 것이였고, 잔치라도
벌이고 싶은 것이였다.
"........뭐가 보이나요?"
"............. 빛........... 이요. 지금까지 뜨겁게 내 눈을 달구어 오던, 그토록 보고 싶었
던 빛이라는 거요......"
지금의 심정을 누구에게 먼저 알릴까, 라는 기쁨과 함께 앉아 있는 곳이줄곳 있던 병원의 침대
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는- 벌써 익숙해져 버린 침대에서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익숙해져 버
린 무언가 보다도 이제 보일 모든 새로운 것들에 기대를 품었던 나는 쉽게 익숙한 것을 잊어버
리고 싶었다.
지금은 보이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남들은 지겨워 할 그런 것들이 나에게는 곧 기쁨으로 다가
왔다.
"............다행입니다. 수술이 성공적인가 보군요."
"네. 그 눈을 주신 분께도 감사를 드리고 싶은데…"
"죄송하지만 만나실수 없습니다."
왜…요..? 라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어버렸다. 나에게 누가 눈을 줬는지 알 수 없다니. 그것은
눈의 뿌리를 알지 못하게 하여 곧 답답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예상되는 인물들은 한명도 없었고, 아니면- 장기를 이식하기로 한 사람이 죽을때 '그다
지 좋은일도 아닌걸요.' 라고 하며 선뜻 내 놓았을수도 있는 일이었다.
난 그다지 그 사람의 정체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지 않으며, 지금 보이는 모든 것이 꿈인지 생
시인지… 생각해 봐야만 했다.
그동안은 보이지 않아 추상적인 것만 생각하며 슬퍼했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되었고 천
상적으로 세계를 볼 수 없어서 빛 또한 뜨거울뿐 모두 검은색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덕분에 뭐 어디서부터 빛의 세계를 상상해야 할지 몰랐고, 덥겠거니…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상상에 빠지지 않아도 될 만큼 세상은 너무나 잘 보였다. 내 시력은 이
제 2.0 … 누군지는 몰라도 참 눈이 좋은 사람이 눈을 무보수로 선뜻- 내주다니, 정말 다시 감
사할 일이었다.
*
병원을 빠져나오며 모든 새로운 것들에 나는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물건을 대할때 손부터 가는 행동은 이미 버릇이 되어 버렸지만,
내 손도 보인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마치 어둠으로 빠졌다가 빛을 만난
내 처지에 있는것처럼 응급실 앞에서 환자들이 고맙다며 의사로 보이는 사람에게
인사를 해 대고 있었다.
"...... 저기도 봄이구나."
나의 말에 옆에 있던 몇몇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나도 지금이 겨울이란 것을 안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시선한번 보내지 않은채 밖을 향해 나갔다.
어디가 나의 집이고 길인지는 잘 구분가지 않았으나,
이렇게 즐거운 날 집으로 먼저 가 버린다는것은 섭섭한 일이었다.
"아. 맞다. 진이가 있었지."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기쁨과 함께, 어느새 잊어버린 친구들에게
미안해 하며 핸드폰을 본 순간 깜짝 놀랄수 밖에 없었다.
핸드폰이 이렇게 생겼었나?
아무튼 작다는것도 알았고, 폴더형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뒷면에 내 주소가 적혀 있던건 몰랐다. 장애인을 위해 필요한 요소는
갖추어 진 상태였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이 핸드폰을 사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던 나는,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채자 마자 기분이 이상해 지기 시작했다.
얼른 폴더를 열자마자 보이는것은 집의 생김새, 그리고 곧 지도가 나오고 있었다.
이건 분명 배려였다.
나는 그 앞에서 시력장애자가 아닌척 행동했는데,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순간 그가 한 연극에 깜빡 속았다는 것을 알고 웃음이 나왔다.
역시 장애라는 것은 숨길수 없는 것이었나 보다.
그런데도, 그는 그런 사실도 모르는척 연극을 해 주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순간 겁이났다.
나에게 집을 제공한 것도 그였고,
나에게 핸드폰을 제공한 것도 그였다.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껀 연락을 하라며 1번에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입력한것도 그였다.
"...................하하..
.....................하하......."
왠지 몰라도 웃음이 나왔다.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데도 허탈하게
웃고 있었다.
어깨가 들썩들썩 하며 호탕한 웃음을 질 수 밖에 없었다.
1번에 그의 핸드폰번호가 있다.
그는 벌써 1년전에 내 곁에서 사라져 버렸다.
1번.......1번............1번.........
*
[........ 네 거야.]
나는 그가 나에게 핸드폰을 줬던 그때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큼 비싼 물건이기도 했지만, 나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그 사람이 준 첫번째
선물이였기 때문이었다.
[.............신혜성.]
[으.....응?]
[받아야지. 뭘 해?]
나는 그때 어디를 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가 친절하게 내 손에 그 핸드폰을 넘겨줬고, 그가 뭐라고 했는지는 잘
기억
이 나지는 않지만, 그는 슬퍼하고 있었다.
분명히... 슬퍼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나에게 한 말 모두를 기억하진 못한다.
그래도, 사람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어하는 말은 있기 마련이였다.
눈을 뜬 순간 보이는 곳은 하얀 천장이였다. 하지만 병원 천장은 아니였다.
아, 나는 드디어 퇴원을 한 상태였다.
끊겼던 필름이 다시 돌아가는 느낌이였다. 그렇게 관자놀이를 지긋이
누르며 오른손으로 무언가를 찾아헤맸다. 그러다 핸드폰이 잡혔고, 곧
눈을 크게뜨고 핸드폰을 봤다.
그러고 보니, 나 눈으로 모든것을 볼수 있었다.
오. 하느님.
어제의 감동을 기억하며 묘하게 웃음을 짓고 있던 나는 낯선 느낌이 드는 집안 구석을
곳곳이 둘러보고 있었다.
여기가 내 집이 맞는지. 정말 실감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내가 주물럭- 주물럭- 모든것을 만졌던 손때가 묻어 있는지, 그다지
낯설지도 않았다. 그저, 음-.. 갑자기 사물들이 새로워진 느낌이랄까.
그렇게 몇년동안을 함께한 집을 새삼스럽게 둘러보며 집이 작다는 느낌을
지워버릴수 없었다.
이런 집 하나도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하다니…
"쨍그랑-----"
갑자기 쨍그랑 하는 소리에 나는 얼른 소리 나는 쪽으로 뛰어나갔다.
분명 그쪽이 부엌인듯 싶었다. 그렇게 달려가보니 낯선 사람이 있었다.
.....누구지?
"............................. 누구......"
그렇게 물어보자 그는 마치 못볼것을 봤다는듯이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누군지 몰라도 참 잘생겼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이, 그는 당장 나에게로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제길. 놀랐다.
".........혜성아! 드디어 눈이 보이나 보구나!! 사실 내가 어제 얼마나 놀랐는지 알어?
간이 다 철렁했다니까! 어제 어떤 행인이 연락을 한 모양이라더라.
그런데, 그 행인이... 1번을 눌렀었는데, 음-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안받아서 2번으로 했대.
그래서 얼른 너를 여기로 옮겼지. 나 잘했지?"
아, 전진이였구나..
나는 안심을 하며 그렇게 1번을 눌러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상한건, 그가 그 전화번호를 아직도 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분명 나라면 받지 않았을 것은 당연한 것이였지만 아직도 그 전화번호를 쓰고 있다니..
남들은 빨리도 바꾸던데, 그는 여전히 그 번호를 쓰고 있었던 모양이였다.
"...............1번이면................."
"......."
진의 말에 조용해 진건 나였다. 그리고 나의 표정이 지금 어떤지는 몰라도,
전진 역시 얼굴을 심하게 찌푸렸다.
"........야, 근데 이건 챙겨서 쓰레기통에 버려야 되지 않겠냐?
좀 많이 깨진거 같은데........."
그러자 전진은 잊었다는듯이 횡성수설하며 깨진것들을 손으로 주어담았다.
저러다 다치지........
".............아얏..."
내 그럴줄 알았다.
나는 한심스럽다는듯이 진을 쳐다보며 거실로 약상자를 찾으러 다녔다.
그러다 문뜩 보이는 것은 사진이였다.
그러고 보니 그가 사진을 준 기억이 났다.
그걸 어디다 놓았나 했더니 여기에다가 놓아둔 모양이였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게, 이렇게 큰 상처로 다가올줄은 몰랐다.
그가 그렇게 충고를 했는데도 그에게 마음대로 다가갔던것이 생각나자
허탈한...웃음이 나왔다.
점점 비판적을 보였다. 내가 눈을 얻게되서 뭘 얻었지?
............정작 내가 원하는건 얻지 못했는데.............
.......
........................
................................................
-3-
미묘한 달빛이 거실까지 비쳐 내려오고 있었다.
그 빛이 내 몸을 타고 눈까지 비추고 나서야 나는 다시 평온감과 함께
몸을 움직일수 있었다.
진은 간 모양이였다. 약상자는 제자리에 갖다 놓은듯 했고, 깨진 접시조각도
전부 자기가 알아서 처리한 모양이였다.
그야말로, 거실은 썰렁하기 그지 없었다.....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누가 깨끗이 치웠는지는 몰라도, 정말 먼지하나 없었다.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고 보기가 뭐 할정도로 정말 깨끗하게만 보였다.
그 사이에서 나는, 자유를 꿈꿀수 없었다.
주위의 시선과 속박에 얽매여 그렇게 자유를 꿈꿀수 없었고, 눈으로 볼수 있으면
자유를 꿈꿀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도 아니였다.
나를 무언가가 조여 오는것만 같았다. 그것이 무엇이든 내 알바 아니였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습관에 의한 것이였는지도 몰랐다.
나는 무심코 어느새 내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핸드폰을 보았다.
쓰러져 있는듯한 포즈의 내 옆에 보이는 핸드폰은 평소보다 엄청나게 큰 것이리라,
그렇게 크게만 보이는 핸드폰이 소리를 내며 진동했고, 그 핸드폰의 진동과 함께
내 눈에서 무언가 차가운 것이 떨어졌다.
눈물이겠지…
*
"활짝 웃어봐."
".......이히히히..."
"억지로 웃지 말고......"
어떻게 웃어야 할지를 몰라 한참을 그렇게 어색하게 이히히히- 를 연발하고 있었다.
그도 내가 어색해 하고 있다는것을 아는건지, 어휴- 라는 말을 하며 직접
몇번 해 줄뿐, 더이상은 강요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그에게 "미안해-" 라고 하며 웃으며 사과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그 표정이라니까?" 라는 말을 해도 나는 막상 그가 웃으라고 하면
약간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혜성아."
"으응?"
"누가 잡아먹냐. 그만 찡그려라."
".....으응..;"
그렇게 어색한감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나마 제일 정상적인 것을 골라 그가
나에게 보여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보지는 못했으나 제일 나을거라 생각해서
웃음으로 답했다.
그러자, 그는 다행이라는 말을 하며 웃음을 지어줬을것이다. 웃음은 볼수 없는 것이니까.
"...........그런데."
"응?"
언제 연락이 올지 몰라 계속 켜둔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나는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오른쪽에 있었다.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기위해 나는 웃으며 그에게 시선을 돌렸고,
그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이 사진 웃겨- 라고 말하며 가져왔다.
나는 보이지 않아 찡그렸고, 그는 계속 웃다 내 표정을 보고 이상하다는듯이 물어왔다.
물론 나는 이게 뭐냐며- 별로 웃기지도 않네. 라는 말을 넌지시 붙이곤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가 내 옆에 앉아서는 무엇을 하는건지 아무말이 없었다. 게다가 숨소리 조차 나지 않았다.
나는 무슨일인지 영문을 알수 없음에 울부짖었고, 그는 말없이 조용히 일어났다.
".............. 날 외면하지 마."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나 먼저 가 버리면 안돼. 절대로, 그러지 마.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먼저 가 버리며 안돼."
"...........그래. 알았어."
그가 한 말은 이해할수 없었지만, 가슴에 무언가가 찡- 하게 와닿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눈이 보였다면 그라도 잡고 "이게 뭐야! 도대체 무슨 감정이야!"
라며 대놓고 물어봤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마음들을 지긋이 누르고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난처한것은, 나는 이 사진관에 처음 왔다는 것이었다.
방향감각이 아무리 뛰어난다 하여도 다 알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런통에 나는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제길.
답답해.
".................어딜 가니?"
"............................가는거 아니야."
"뭐야, 그럼?"
"외면."
"응?"
"외면하지 말라며? 난 지금 외면하고 있는거야."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곧 그가 내 곁으로 오는 발자국소리를
들을수가 있었고 곧 가까이 다가올수록 커져가는 소리는 곧 바로 내 앞에서
그쳤다.
".............그런 말이 어디있어."
".......왜.......... 왜 없어?"
"그냥 해 본 소리였어. 난 널 믿어."
"그래. 나도 한번 해본소리야. 알잖아, 나 장난 좋아하는거..."
"........장난은, 그렇게 심하게 치는거 아니야."
*
거실은 나뭇바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 허술한건 아니였지만, 그래도 틈은
있었다. 그 사이로 떨어진 눈물들은 곧 사라져 갔다.
그리고 나무에 그대로 떨어진 눈물의 자국은 진한갈색으로써 확인이 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났다.
"..............벌써 밤이 되었구나."
[.............. 날 외면하지 마.]
".............난 . 널 외면하지 않아. 네가 날 외면했잖아.
난.....잘못한게 없어."
[.............. 날 외면하지 마.]
".......................................네가먼저 날 외면했는걸."
하지만 그 소리가 처량하게 들리는건 사실이었다.
어느새 나무에 생겼던 눈물자국은 사라져 있었고, 핸드폰의 진동은 이미 끝났다.
그렇게 정신이 빠지기라도 한듯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던 나는 천천히 일어나
내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내일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내일 일어나면, 저 사진부터 태워버릴꺼야.
그리고.. 마음 정리를 할거야.
그리고 저 핸드폰도 ............. 아니야. 핸드폰은 놔두지 뭐.."
하지만, 달빛은 처량했고 그 밑에서 웅얼 거리고 있는 나도 슬펐다.
슬픔의 독주곡.......
-4-
"으아아아악--------!!"
꿈에서 깬 다음 나는 벌떡 일어났다. 꿈속에서도 그를 봐야만 한다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을
짓이었다. 그렇게 처절하게 날 버리고 간 그를 다시 생각할 필요따윈 없었는데 말이다.
막상 사진을 보고 나니, 그냥 멍- 해져 버렸다. 약상자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사진들을 살며시 꺼낸것은
나였고, 예전의 신혜성도…보이진 않아도 꺼내며 혼자 상상에 빠졌으리라.
그 사진을 보며 아니, 사진을 볼 수 있게 되어 버린 이후
눈물을 흘렸던것이 떠올랐기에 난 더 짜증이 났다.
그래서 털석 주저앉아서는 태우는것을 포기하고 물끄럼히 쳐다보기만 했다. 언젠가 그 사진을 보며
즐거워했던 적이 나에겐 있으니까. 그 기억따위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그나마 행복했던 추억들을 애상하며 사진을 보는 내내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도 감정따위는 있으니까. 어쩌면 당연한건가?
"쿡쿡-"
너무 웃기는 구나.
정말 너무 많이 웃기는 구나.
정말 너무 웃겨서 미칠거 같구나.
쿡쿡- 웃는 입사이에서 나지막한 욕지꺼리가 내뱉어지며 마치 여기가 우리집이 아닌것 같은 환상에 빠져 있었다.
이상하게, 이 곳은 낯선 곳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이 집은 그 누군가가 나에게 선물한 집이였지.
그 누군가가.. 쿡쿡.
아주 웃겨.
너무 웃겨.
너무 웃겨서 정말 배가 미친듯이 아플만큼 너무 웃겨.
그 누군가가 선물해준 이 집에, 내가 살고 있다는 것에 갑자기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마치
그가 내 앞에서 나를 보살펴 주는것 같은 그런 미친 상상이 갑자기 들자마자 나는 발악을 하
기 시작했다. 마치 그가 내 앞에 있는것 처럼 마치 그가 내 앞에 있는것처럼 나는 앞을 노골적
으로 째려보기 시작했다.
"그거, 알아?"
알아?
그거, 알아?
왜, 신혜성이 이민우를 그리워 했는지 알아?
왜, 1년동안 왜 눈물만 흘리고 있었는지 알아?
왜, 신혜성은 남자 답지 못했는지 알아?
"쿡쿡.......이민우 니가 알아? 네가.. 그걸 알기나 해?"
차라리, 나에게 미쳤다고 해줘.
차라리, 나에게 저주를 내려줘.
그래서, 이민우를 잊을수 있다면 나는 잊겠어.
그렇게 해서라도 이민우를 그리워 하지 않을수 있다면 그러고 싶어.
차라리 바보가 되서라도, 아니 죽어서라도 나는 이민우를 기억하지 못하게.. 그러고 싶어.
나는 , 이민우가 싫어.
*
"다시 한번 말해 봐."
"…이제 아는 척 하지 말자고 했어."
"그러니까, 끝내자는 거야?"
"그래."
"하하…하하…이민우. 너 많이 웃기는 놈이구나?"
이민우는 그대로 아무말도 하지 않은채 앞에서 처량하게 울고있는 한 소년을 따뜻함 하나 없
는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냉기조차 없는 무뚝뚝한 얼굴이였다. 이민우는 차가운 사람
도 아니었으며, 따뜻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무뚝뚝한 상태. 그리고 사랑하라면 누구보다도
따뜻해질 눈빛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눈빛이 굳다못해 얼어붙어 보는 사람마저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아니, 소년은 그의 눈동자가 아니라 입술에서 나오는 단어 하나에 충격을 먹고 있었다.
이별.
이별.
이별.
다시 말해보라며, 말도 안된다는 눈길로 바라보는 소년을 애써 무시하는 그의 태도에 소년은
당장이라도 입술을 깨물어 피를 낼듯이 살벌하게 이민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소년은 이민우보다 어려보이는 얼굴의 소유자였으며, 이민우는 그런 소년에게 눈길을 주지 않
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아니, 눈길을 줄 필요조차 없는듯 보였다.
소년은 그런 이민우의 태도에 살기어린 눈으로 마구 이민우의 몸을 흔들어댔고, 이민우는 절대
로 강경한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소년의 울부짖음이 그칠즘에야, 그는 잘 있으라는 한 마디를 건내며 서서히 사라졌다. 그러자
소년은 이대로 안되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있는힘껏 끌어당겼고, 그는 감정없는 태도로 소년의
안겨오는 팔을 치며 황급히 가려다말고 한번 서고는 단 몇마디를 남기고 소년이 잠시 머뭇하
는 사이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다리가 떨어지질 않아.........
.......머리는 가라고 하는데, 다리가 떨어지질 않아.......
..........그리워 하지 않을수는 있는데, 다리는 여기 있길 원해......
...........이별할순 있는데, 몸은 그걸 원치 않아......
..............................심장은 그렇게 반응하질 않아............"
소년은 전혀 뜻을 알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는 그 순간부터
전혀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였고, 소년은 그런 그를 잡을 기력조차 없었다. 이미 충격을 받
은 이후부터 소년은 전혀 인정할수 없었으면서도, 그의 행동에 아무런 제재도 할수 없는 자신
의 무기력함에 더 울부짖고 있음이 틀림 없었다.
소년은, 그가 떠나간 그 발걸음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하필 그는 눈이 내리는 날 헤어지자고
했고, 소년은 천천히 그가 남기고 간 발걸음을 따라 가려는듯 같았다.
하지만, 소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눈을 하나씩 더듬거리며 그의 발자국을 찾았고 그는 그런
소년을 한번 쳐다보고는 더욱 더 빨리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이 빨라질수록 발
자국이 찍혀있는 보폭은 줄어만 갔고, 소년은 이미 그와의 이별은 잊어버린듯한 웃음을 날리
며 재미있다고 생각하는듯 했다. 아니, 그 감정도 얼마 가지 않아 소년은 털썩 주저 앉아버리
더니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여리디 여린 몸으로 달달 떨고 있었고, 그런 소년을 지켜보는 단 한사람만은 그저 옆
에 소년이 신경을 쓰던 말던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소년은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느
낀건지 몸을 흠칫 했고, 옆에 있던 사람은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말없이 걸쳐주었다.
말없이 외투를 받은 소년은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깨달은듯 싶었고, 그를 향해 베시시
웃어주고는 외투의 따뜻함에 '으으으-' 라는 말을 하며 진의 손을 잡았다.
"그거 알어?"
"무슨.. 소리야."
"진이는, 친절해."
"…"
진은 눈을 크게 뜨다가도 다시 평화롭게 잠겼고, 진의 손을 잡은 소년은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또 말이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건 소년은 앞을 볼 수 없는 눈동자로 진은 소년의 마음
을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 거짓이 없는 눈동자가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고, 진은 한
숨을 쉬었다. 덕분에 소년은 갑자기 따뜻한 입김이 자신의 앞에서 뿜어지자 당황한듯 잠시 주
춤했다.
진은 말도 안된다는 듯한 눈길로 소년을 쳐다보고 있었고, 소년은 어느새 표정이 침울하게 되
어서는 그가 남기고 간 발자국의 흔적을 손으로 훑고 있었다. 그런 소년의 행동을 모를리 없
는 진은 인상을 찌푸렸고, 소년은 어느새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런 소년의 행동에 금
새 당황을 하다가도 곧 소년의 손을 이끌더니 진은 무슨 생각이 난건지 그런 소년을 끌고 갔
다.
소년은 당황해서 한 마디도 하지 못한채로 그대로 진을 따라갔고, 진은 소년이 물어보기도 전
에 자신의 차에 태워서는 거칠게 차를 몰았다. 안전벨트도 착용하지 못한 소년은 뭐가 어찌 돌
아가는지도 모른채 불안한 톤으로 진에게 울음섞인 목소리로 외칠 뿐이었다.
".......뭐하는 거야. 혹시 동반자살을 생각하는 거야? 그럼 안돼. 진아. 난 혼자 죽어도 넌..
넌. 절대로 죽으면 안 돼. 넌 돈을 버는 사람이잖니. 인력이 한명 더 준다는 것은
사회에 안좋은 거야. 진아, 마음을 바꾸렴."
"이민우를 찾으려는 거야. 병신아!!"
"……"
소년은 방금전까지만 해도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다 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무표정한
얼굴이 되고야 말았다. 아까부터 생각한건데, 소년은 너무나 당연한듯 받아들이고 있었다.
소년은 어쩌면, 자신의 처지에서는 당연한 일인듯 받아들이고 있는것 처럼 보였고, 아니면 너
무나 충격을 먹어서 그 상황을 제대로 생각지 못하는 지도 몰랐다. 아니면, 남이 자신을 보고
동정을 할까봐 그런지도 몰랐다. 아니, 세번째가 너무나 정확한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경멸을 담은 동정을 받은 소년으로써는 세번째가 너무나 잘 들어먹힐지도 몰랐다. 그
는 평생을 동정을 받고 살았으니까. 그러니까 이민우에게도 동정을 받지 않으려 행동한 것일지
도 몰랐다.
소년의 그런 행동은 진을 오히려 짜증나게 했고, 소년은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대
로 진이 하는 대로 따르기만 했다. 그 와중에도 진은 우악스럽게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
게 해서는 안될 일이라 해도 말이다.
그렇게 몇시간동안 찾아다녀도 찾을수 없는 이민우였고, 진은 모든것을 포기한듯 차를 타고는
한숨만 쉴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진은 소년을 곁눈질로 쳐다봤고, 소년은 그 눈빛이 느껴진건
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또 뭐가 미안하다는 표정이야. 그 이민우 자식이 망할 놈이지."
"아냐. 어쩌면 지금까지 나를 챙겨준게 더 고마운 거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
"신혜성."
"…"
"대답해봐."
"…"
"빌어먹을!!!"
진은 그대로 신경질적으로 차를 몰았고, 소년은 고개를 떨구고는 눈물을 훔칠 뿐이였다. 그런
소년의 행동을 본 진은 답답하다는듯이 창문을 열어 숨을 크게 쉬었고, 소년은 '미안해.' 라
는 말을 할 뿐이었다. 그러자, 진은 또 '뭐가 미안한데?!!' 라는 말을 해댈 뿐이었다.
그렇게 낮고도 슬픈 침묵은 소년의 집이 보이며 끊겼고, 진은 소년을 끌고는 집까지 데려다 주
었다. 그리고, 소년은 그냥 가려는 진의 손을 잡았다. 아니, 두손으로 잡았다. 그리고는 눈물
을 뚝뚝 흘리고는 고개를 가로로 젓는다. 그리고는 약간 쉰 듯한 목소리로 얘기한다.
"그러지 말아."
"…"
"이민우한테 그러지 말아."
"…"
"내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그러지 말아."
그러자 소년이 먼저 진의 손을 놓았고, 진은 그런 소년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소년은 천천히 이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년이 들리지 못할 나지막한 소리로 진
은 천천히 숨을쉬듯 내뱉기 시작했다.
"................................내가 .. 너한테 뭐니."
"................................내가 너한테 어떤 존재일까?"
"......................신혜성. 말해봐. 내가 너한테 어떤 존재일까?"
그런 말을 넌지시 내뱉은 그는 현관문을 열고 다시 한번 이층을 쳐다봤다. 소년이 있을 그곳
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현관문을 천천히 닫고는 쇳소리가 나는것이 느껴지자 더
천천히 문을 닫으며 끝까지 이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문이 닫겼을때는, 낮은
침묵이 계속 되었다.
-5-
[그러지 말아.]
[이민우한테 그러지 말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그러지 말아.]
[.............. 날 외면하지 마.]
[.............나 먼저 가 버리면 안돼. 절대로, 그러지 마.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먼저 가 버리면 안돼.]
"...............이제 그만 해!!!!!!!!!!!"
하이컬한 목소리와 함께, 환청처럼 들려오던 모든 것들이 그대로 정지되었다.
예전보다 많이 성숙한 소년은 이미 소년이 아니였다. 그 소년은 슬픔에 빠진듯한 눈으로 천장
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 이민우."
"............. 이민우."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얼마나 가슴이 아픈 일인지 따위는 알고 있다. 그를 부르는 것이 얼
마나 잘못하고 있는 짓인지 알고 있다. 그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힘든 일인
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의 이름을 절대로 기억하지 않을수 없었다. 아니, 이미 뇌의 일부를 차지해
버린 그 이름을 기억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내 기억의 일부인 그를 잊어버릴수는 없었다. 이
미 내 기억속에서, 추억속에서 끊임없이 조잘대는 낮은 목소리의 그. 그는 그다지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는 한참을 허공에서 떠돌아 다니고 있었다. 기억하지 않으려
고 하면 할수록, 잊어버리려고 하면 할수록 메아리 되서 울려퍼지는 그의 이름을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그러기를 수십번.
결국 무의식속에서도 나는 그를 부르고 있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그의 이름과 함께 수십번 되뇌었는데도 불구하고 돌아
오는 것은 붉어져 버린 내 볼이였다.
그는 어떻게 하면 잊을수 있을까.
그를 잊을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그렇게 되뇌기를 수십번, 또 다른 사랑을 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그것도 포기
하고 말았다. 나는,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 얼핏 떠올랐기 때문이였다.
어쩌면, 그를 잃어버린데에는 그런 영향도 작용한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자, 더 내가 무기
력하게 느껴졌다.
"돌아와 ......... 주세요."
"쿡- .."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거지? 라고 생각하자 방금전에 비굴하게 얘기를 한것과는 다르게 웃
음이 나왔다.
부탁이라.
내가 그런 부탁을 할 입장이 될까?
난, 그가 왜 날 떠났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가 떠나던 그 순간에.. 나는 잡지 못했다. 바보같
이 정말 미련하게도 신혜성은 이민우를 잡지 못했다.
정말 바보같기도 하지. 정말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고 '왜 배신따위를 해!'라고 따질수도 있을
텐데, 그가 있다면 그럴수 있을텐데.
그런데도, 막상 그를 볼 자신이 없어졌다. 그가 주위에 있던 멀리 가 버렸든 그것은 상관있는
것이 아니였다. 나는 자신이 없었다. 그를 볼 자신이 없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이젠 나에게 꿀리는게 없는것도 같았다. 그 치명적인 단점인 눈도 이제는
단점이 아닌 장점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그를 볼수가 없었다. 두려움인가?
나는, 그에게 복수하리라 다짐했었다. 그가 떠난이후부터 나에게는 그리움보다도 증오감이 휘
몰아 치고 있었다. 그런데, 핸드폰을 보자 그 모든 생각이 역전되어 버리고 말았다.
내가 그를 생각한것은 복수를 위한 것이였는데도 막상 나를 지독하게 괴롭혀오던 환상이 지워
지자, 아니 그가 나의 단점을 알면서도 같이 다녀주었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이상하게 복수라
는 것을 싸그리 지워버렸다. 그러면서, 어느새 그리움의 감정이 그 자리를 강하게 채워주고 있
었다.
그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사진을 보면서부터 생겼고, 핸드폰에 아직도 채워져 있는 1번의 자리
였다. 1번의 자리에 아직 그가 숨쉬고 있었고, 그런것을 안 이상 그는 더이상 미움의 상대가
아니였다. 갑자기 휘몰아쳐온 그리움. 그래서, 더 아팠다.
그의 경고는 그리움의 감정과 함께 휘몰아치며 다가왔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아파오기 시작하
는건 가슴이였다.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이상하게 울컥- 하는 감정이 생기는데도 미워하지는
않는 그런 답답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정말 그를 그리워 하고 있는건지. 아니면, 괜히 한번 찔러보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었지만, 내 감정에 솔직해 지기로 한 것은 사실이였다. 요즘따라 부쩍 많이 시린 가슴은 머리
에서 하는 생각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실이라는 것은 알수 있었다.
"내가, 마지막에 그 말을 했어야 했어. 그래야 했어…"
그렇게 스스로를 죄책하는 사이에 초인종소리가 집안의 침묵을 단숨에 깨어버렸고, 초인종을
누른 사람은 바로 전진이였다.
고마웠던 친구, 지금도 고마운 친구. 쭉 고마울 친구.
"지금…뭐하는 거야? 왜-.. 왜 울어?"
"헤헤- 왔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너--.. 나에 대해서 뭐 말하고 있었어? 근데, 왜 울어?"
"……그냥."
"...........................뭐가 또 그냥이야."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지는 잘 모르겠다. 도대체 내가 방금전에 진에게 무슨 말을
한걸까. 이 입으로 도대체 무슨 말을 지껄인걸까. 도대체 어떤 말을 했길래, 또 이럴까.
그렇게 생각할수록 결론을 끌어내리기에는 역부족이였고, 곧 진의 손이 내 이마로 다가왔다.
그때 알았다. 이 녀석은…
"바보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
"…걱정하는 구나."
진의 눈썹이 움찔하더니 곧 손을 내리고 말았다. 또 무슨 말을 하려는듯 입술을 열려다 말았
다. 그러다 또 뭔가를 고민한다.
.....싱거운 녀석.
"진아.."
"응?"
"……바보구나."
"..........................뭐?"
"...........아, 아냐. 장난이였어."
"뭐야. 신혜성."
너도 알고 있지? 내가 사랑했던 그 한 사람. 바로 네 친구지? 그런데 왜… 넌 있고, 그는 내 곁에 없을까?
왜, 그럴까? 왜 그런걸까, 진아?
왜… 넌 있는데, 왜… 그는 없을까?
진아. 나는 그게 슬퍼.
너무 슬퍼.
그가, 날 떠난건.. 슬픈데, 네가 있어서 더 슬퍼.
널 볼때마다, 그가 생각나거든. 그래서 슬퍼.
"또 뭘 생각하는거야. 신혜성."
네 마음을 ..... 알아버려서..... 또 슬퍼.
우린, 이럴수 밖에 없는걸까? 그런걸까, 진아?
그렇다면, 난 너무 슬플텐데. 넌 … 너도 어떨까?
우리, 예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어떨까?
예전의 나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이딴 일로 아프지 않을꺼야.
절대로, 아프지 않아.
-6-
지금의 내가 있는 곳은 바로 연극을 연습하던 장소였다. 그 장소에 이미 그와의 추억이 배여
있음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그때의 추억을 생각하며 벽을 하나 하나 정성스럽게 집는
데, 안에서 연극준비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도 지금도 연극장소로 쓰이는구나…
나의 후배들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뿌듯해 지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지금 그들은 연극중
에 싸우고 있지만 말이다. 그와 내가 가끔씩 이곳에서 연극을 하다가 이상한 말로 흘러나갈때
마다 웃음이 나오던 일이 생각나며 갑자기 가슴에 물이고인듯 출렁이고 있었다. 그런 느낌이
나자마나 나는 인상을 험악하게 찡그렸지만, 그들이 나오는 것을 보니 갑자기 기분이 또 좋아졌다.
"어? 혜.. 혜성형 아니세요?!"
"어? 여기, 너네가 쓰고 있었니?"
"왠일이세요, 형?"
"그냥 와 봤어. 난 역시 낭만주의자라니까."
"아무튼, 못말려요. 형은.. 참. 그럼 우리 연극연습하는거 보고 가실래요?!"
"엉? 엉? 그건.."
그냥 들린것 뿐인데, 이 녀석들의 연극을 봐줘야 하는 이유따윈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재미있을것 같기도 했다. 어린 이녀석들이 얼마나 잘 하는지 봐주겠다는 생각으로 웃으며 맞아
들였고, 이 녀석들은 뭐가 좋은지 헤- 벌린 입을 다물지도 않고 일제히 '고마워요, 형!' 이라는 말을 한다.
혹시, 날 기다리고 있었던거 아냐?
그런 생각을 한 나는 곧 피식- 웃어버렸고, 이 녀석들은 얼른 대본을 보며 외우기 시작한다.
곧 내가 그와의 추억이 생각하려는 타이밍에 맞게 조명이 켜진다. 이, 얼마나 고마운 녀석들인가.
그렇게 연극은 시작됐고, 녀석들이 갑자기 진지해지니 나도 진지해 졌다.
- [ 오, 줄리엣. 그대는 나의 천사. 당신의 얼굴은 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 보다도 더 아름답고 곱소. ]
- [ 오, 로미오. 그대는 나의 왕자님. 어딜 갔다 이제야 돌아오신 것이옵니까. ]
- [ 줄리엣. 그대는 나를 믿소? ]
- [ 당연하옵니다. 제가 로미오를 믿지 않으면, 누가 믿는단 말이옵니까. ]
- [ 오, 줄리엣. ]
- [ 오, 로미오. ]
저 장황한 이름들. 이제는 지겹다 못해 역겨운 이름이었다. 녀석들의 연극은 창작연극이였다.
뭐, 누가 창작이라고 생각하겠냐만은, 대부분 약간씩 바꾼 것들이었다. 설마 정말로 저런 '옵
니까' '나를 믿소?' 했을리가 만무했다.
그렇게 창작실력을 마음껏 발휘한 그들은 즐겁게 웃고 있었다. 그래, 나도 웃고 그도 웃었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많이 유치하기도 했다.
- 오, 로미오. 오, 줄리엣.
정말 유치찬란하지 않는가?
- [ 포기하라. ]
- [ 포기를 하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
- [ 줄리엣은, 너와는 어울리지 않는 귀한 자제집 따님이다. 더불어 원수지간이기도 하고. ]
- [ 싫소. ]
- [ 포기 하라고 했다. ]
- [ 어떻게 포기를 한단 말이오. 항상 무엇을 하든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그녀의 이름이거늘 어찌 포기를 한단 말이오. ]
- [ 참으로, 미련하기도 하구나. ]
*
"........ 당신이 말한 ... 세상에서 제일 슬픈 일이 뭔가요?"
조심스레 묻는 소년의 어조속에는 깊은 슬픔이 배여 있었다. 소년은 이런 연극따위는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심정이였지만, 어쩔수 없이 그의 청을 허락할수 밖에 없었다.
이별후 .... 처음 만나는 날. 그리고, 그를 마지막을 보는 날.
그렇게 말하고 나니, 조금은 후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대사의 일부분일 뿐이었지만,
.. 아니, 대사대로라면 그는 슬퍼하고 있다. 줄리엣인지 뭔지 때문에 슬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좋아서, 어쩌면 이렇게 받아들여 줬는지도 몰랐다. 다른 부탁이라면 애초에 무를 단칼에 배듯 했을 것이다.
그런데, 소년의 목소리는 계속 떨리고만 있었다. 대사에 의해서 속이 후련해 짐에도 불구하고
속에는 지독시리도 시린 분노의 감정을 숨기고 있었다. 그런 소년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전혀 소년을 주시하지 않았다.
곧, 그의 메마른 목소리가 소년의 청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을 하는 거죠."
건조한듯 하면서도 건조하지 않은 음성이 그의 입에서 나지막히 흘러나왔고, 그런 중저음의 목소리에 소년은 부르르 떨었다.
소년은 자신도 왜 자기가 흠칫했는지 알지 못한채 대사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어짜피 소년의 손에 들은 연극대본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는, 소년이 어떤 노력으로 그 대사를 외웠는지 모를 것이 분명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로미오님?"
"그거야, 줄리엣을 놓고 다른 여인네를 눈에 두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소년은 이미 목이 메여 오고 있었다. 자신의 가슴을 후려파는 그의 소리가 나지막히 자신의 귀로 들어올때면,
정말 자살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살을 하는 사람들을 손가락질 하면서도 말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듯 싶자, 소년은 어서 다른 말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내뱉은 대사를 생각하며 다음 대사가 뭔지 알수 있었다. 소년은 얼른 대본을 보는척 하며
희미하게 웃음지었다.
다음 대사는 알지만, 그 다음 대사는 전혀 알지 못하는 소년이였다. 소년은 안그래도 암흑인 시야가 더 검어지는듯한 느낌을 받으며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훗, 그렇군요. 줄리엣을 많이 사랑한다는 말씀이로군요, 하지만 잊지 말아요.
우리는, 줄리엣 가문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소년은 이 말을 다른때보다도 천천히 꺼냈고, 얼굴에는 불안함이 역력했다. 그런 소년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던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었고, 검으면서도 깊은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대본으로 눈을 가져가면서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는 대본을 집어 던졌다.
"그게아냐"
"?"
소년은 뜻밖의 상황에 놀라 눈을 껌뻑였고, 그는 천천히 소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살며시
소년의 볼에 손을 댔다. 소년은 안심인지, 불안일지 모를 눈동자에서 묘한 빛이 흘러 나왔다.
그는 살며시 소년에게서 손을 땠고, 무엇보다도 위험하고 짧은 말을 꺼내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어떤 이를 사랑해서 슬프다는 거야, 신혜성."
하지만 소년은 그 말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가 없어졌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기색을 보이며
무릅을 꿇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소년의 얼굴에는 끝없이 눈물이 흘러내렸고, 머리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무슨 의미일지 모를 소년의 행동은 곧 소년의 귀로 향해졌고, 소년은 귀에 있는 링귀걸이를 단숨에 빼 버렸다.
따가움과 함께 귀에서는 피가 흘러나왔고, 소년은 전혀 주저 하지 않고 링귀걸이를 먼데까지 던져 버리고 있었다.
소년은 또 무슨 회상을 하는건지 눈동자를 끊임없이 꿈뻑이고 있었고, 오랜시간 회상을 끝내 돌아온 소년은 울부짓고 있었다.
"아니, 아냐. 그는, 날 사랑하지 않았어. 그는.....이민우는...... 날 사랑하지 않았어."
소년의 눈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라는 액체가 피와 함께 적절히 섞여 지독한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소년는 더이상 고통을 느낄수가 없었다.
소년은 방금 한 말을 미친듯이 지껄이고 있었고, 눈에는 어느새 분노로 가득차 있었다.
분노에 찬 눈물이 드디어 멈추자 소년의 얼굴은 쉴세없이 굳어갔고, 천진난만하던 소년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소년은 마지막말을 하고 강당을 벗어났다.
"내가 .. 복수해 줄테다. 철저하게 이민우를 짓밟고 말테다."
.....
.............
...............................
상사화는, 이룰수 없는 사랑을 뜻한데.....
........그래서, 말부터가 구슬프게 들려오는 걸까…?
[아니, 아냐. 그는, 날 사랑하지 않았어. 그는.....이민우는...... 날 사랑하지 않았어.]
집으로 오는 내내 소년은 눈물을 그칠줄 몰랐다. 그들의 연극을 본 후로 소년은 다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회상에 있는 철저한 모습의 그가 생각나 소년은 눈물을 그칠수가 없었다.
눈물은 , 그때 끝인줄 알았는데.. 증오감이 사라질수록 찾아드는 그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속에서 끊임없이 들끓고 있었다.
그런 중에서도, 소년은 그를 지워버릴수 없었고, 밖에서 있는 동안에도 내내 답답하기만 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내가 어떻게 하면, 그를 그리워 하지 않을수 있을까?"
어느새 소년의 손에 쥐어져 있는 핸드폰이 구슬프게 진동하고 있었고, 소년은 멍하니 핸드폰을 보다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살색의 핸드폰이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었고, 소년은 폴더형인 핸드폰을 열었다 닫았다.
진동은 곧 끝났지만, 소년은 그것으로 핸드폰에서 눈을 떼는게 아니였다. 소년은 결심을 했는지 천천히 핸드폰을 열었고,
1번을 꾹------- 눌렀다.
그리고 신호음이 가는 핸드폰을 두 손으로 잡고 있었고, 눈에는 비장함 마저 감돌았다. 그렇게 몇차례 신호음이 가다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소년은 깜짝놀라 폴더를 닫아버렸다. 소년은 설마 애인일까 싶어,
다시 전화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전화는 그 여자에게서 오고 있었다.
전화를 받았을때,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소년은 머리에 현기증이 남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나 먼저 가 버리면 안돼. 절대로, 그러지 마.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먼저 가 버리면 안돼.]
[내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그러지 말아.]
[ 어떤 이를 사랑해서 슬프다는 거야, 신혜성. ]
[................................내가 너한테 어떤 존재일까?]
[민우가 죽었지. 벌써 오래된 일이라구.]
모든걸 잊고 싶었다. 그와의 모든일을 다 잊고 싶었다. 하나도 빠짐없이…그와 관련된 일은 전부다 잊고 싶었다.
그렇게 모든걸 잊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모든걸 잊고 새 삶을 살면, 가슴의 상처가 나아 질것 같았다.
그렇게 모든걸 잊고 싶다는 생각이 살고 싶다는 생각보다 크게 작용하자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의 생명 조차, 그 덕분에 아픈 가슴보다 하찮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듯 발을 천천히 떼기 시작했다. 그렇게 걸으며
나는 자신 혼자는 한번도 가지 못한 곳으로 발을 돌리기 시작했다.
폐허의 끝으로 서서히 걸어가던 나는 이윽고 도착지점에서 섰다. 그렇게 발걸음을 떼려니 아까까지만 해도 발목을 잡고 있던
사람들이 전부 기억나지 않았다. 지금 만약 옆에 평소에는 잘 알던 사람도 지금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머리속의 회로가 정지함을 느끼며 서서히 발을 떼었고, 발부터 시작한 차가움의 통증이 가해지고 있었다.
첨벙
첨벙
그러고 보니, 예전에 물장난 했던 기억이 난다. 바다에서 헤엄을 못치던 나는 가까운 해변에서만 놀았었지.
그래서 바다는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는데, 차가움이 엄습하는 바다앞에서도 나는 땅에서 걷듯 걸을 뿐이었다.
약간 걷기 힘들었을뿐, 오히려 편안하게까지 느껴졌다. 그렇게 차가움의 기운은 벌써 목까지 채워져 있었고, 이상하게 호흡은 가빠오고 있었다.
차가움의 기운이 턱에 미치자 끝이라는 생각에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두려워…
차가움의 기운을 느끼자 차마 더이상 걸어나갈수 없었다. 아니, 밀려오는 파도가 마치 나가라는듯 떠들석 거리고 있었다.
거대한 파도에 의해 자꾸 밀려만 갈때, 나는 발을 헛딛었고 호흡이 곤란해 지고 말았다.
내가 수영을 배운적이 있던가.
아니, 나는 수영을 배운적이 결코 없다. 하다못해 깊은 바다에 들어가본적도 없다.
바다에서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떠오르자 내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알수 있었다.
눈물이 났다. 바닥도 보이지 않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나는 겁이 났다. 이제서야 살고 싶은 것인가.
아무도 없는, 아니 온 몸을 덮어버린 차가운 바다안에서 나는 나 혼자 허우적 거리고 있었다.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본건 정말 이번이 처음이였다.
엄습해 오는 두려움앞에 이미 영혼은 손을 들어 버린 것이었다.
한참 허우적 거리고 있는데, 환상인지 모를 어디에선가 그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보고싶은데, 볼수 없었다. 뜨고 있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
환각이야.
환각이라는 것을 만드는 나도 우스웠지만, 보이지 않는 눈에서 그가 보인다는게 더 이상했다.
난 분명히 그의 얼굴을 모른다. 단지 안다면 약간 만져봤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의 얼굴이 보이는듯 했다. 나도 나를 볼수 없는데, 나는 그가 보였다.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것 같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내 상황이 어떤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이제는 신경쓰여지지 않았다.
기절상태인가…
기절상태에서도 나는 그를 보고 있었다. 아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그의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그의 얼굴이 너무 또렷이 보였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으며 나는 바닷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내 기억은 그것이 끝.
-8-
"... 환자는 괜찮습니다. 영양실조에 약간 쇼크를 받아 기절한 것 뿐입니다. 약간 휴식만 취해준다면, 아무 걱정할것도 없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렇게 병원에 불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밝기만 했고, 소년은 잠이 오지 않자 눈을 굴리며 두리번 두리번 보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의사선생님, 친구, 링겔, 이불등등 이였다. 확실히 느낀것은 병원이라는 것 뿐이었다.
어느새 뿌려진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사람의 형태를 한 무엇인가였다. 그렇게 약간 아픈 팔을 들어올려 그 형체를 확인하려 하는데,
링겔이 꽃혀 있는 팔이였는지 고통을 느껴야 했고, 그 형체는 한숨을 푸욱 쉬는게 낯설었다.
전진인가…?
벌써 얘기를 끝낸 모양이였다. 그렇게, 소년은 진을 보며 눈만 꿈뻑꿈뻑 거리고 있었고
진은 피식 웃으며 소년의 머리를 헝클어주고는 의사와 하던 얘기를 마저 하기 시작했다.
"... 혹시, 혜성이의 병을 고칠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그냥 집에 돌아가셔서 휴식만 취해줘도 될만큼…환자는 건강합니다."
소년의 상태는 전혀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얼굴은 어느때보다도 창백했고, 가끔씩 허공을 보는 눈이 너무나 슬퍼보였다.
팔에 꽃혀있는 링겔이 소년을 잡아먹기라도 하듯 냉렬히 꽃혀있었고, 소년덕분인지 링겔은 흉기로까지 보였다.
그런 소년의 상태를 보고 건강하다니…애초부터 말도 안되는 말이였다.
아무래도 그 말 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뭐같이 쓰는 진의 앞에서 의사는 진의 뒤에 가려진 소년을 보자
그제서야 자신이 잘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소년은 눈물을 한방울 뚝 흘리며 앞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것인지는 몰라도 같은 글자를 계속 반복하는듯 보였는데,
그게 너무 처량해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몸 상태는 괜찮은데, 역시 휴식이 많이 필요…"
"필요없어요. 마음병이니까요."
"........예?"
"그럼 가보시죠. 저는, 이 녀석과 할 말이 있거든요."
"그럼."
그러는 도중 소년의 뒤척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진은 잽싸게 옆으로 돌아보고는 소년이 일어나려는듯 하자 얼른 부축해 준다.
"나 어떻대? 건강하다고 하지? 봐, 나 건강하다니까."
"건강해? 네 얼굴을 봐라. 그게 건강한 얼굴이야? 그럼 건강한 사람들 다 죽었냐?!"
"이 방에는 거울이 없어서. 내 모습을 볼수가 없는걸."
소년은 방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다 손거울이 보이자, 진에게 손가락으로 가르킨다. 그러자 진은 얼른 일어나 그런 손거울을 가져왔고,
소년은 손거울로 자신을 보다 깜짝 놀란다.
"왠 병자가 앉아있어?!"
"너다, 임마."
"으앙 - 내 잘생긴 얼굴 !!!"
진은 또 시작이라는 얼굴로 소년을 흘기며 '쯧쯧'이라며 혀를 찼고, 소년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투로 '젠장'이란 말을 내뱉으며
손거울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진짜 나 맞아?' 라는 말과 함께 울상 지었다.
그리고 볼을 쓸어내리며 더 울상을 짓고 있었다.
"내 피부 돌려줘. 빌어먹을. 이게 나란 말이야? 으악. 이 거울이 저주에 걸렸나 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모습을 보여줄리가 없어.
다른 거울 없어? 다른 거울 없냐고!! 이건 완전 폐인이잖아아. 엉엉!!"
"넌 니 상태를 보고 농담이 나오냐? 나와?"
그래도 소년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볼을 쓱쓱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소년은 진을 쳐다봤고, 진은 불안한 눈으로 소년을 쳐다봤다.
소년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진의 볼을 쓱- 쓸어내렸고, 진은 기겁을 하며 얼른 옆으로 도망가 버렸다.
소년은 신경질이 났는지 손거울을 던져버렸고, 이불사이로 추락한 손거울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았다.
소년은 이제 더이상 공중부양하던 거울을 신경쓰지 않았고, 옆으로 간 진을 흘기고 있었다.
"이봐. 난 그냥 좀 놀랐을 뿐이라고오."
"이봐. 난 그냥 좀 건드린것 뿐이라고."
진은 소년이 자신의 말투를 그대로 따라하며 응수해 주자 말이 막혀버렸고, 소년은 어서 오라는듯 손가락으로 손짓하고 있었다.
왜 저렇게 집착하는지 모르겠다는듯 진은 자신의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옆에 누가 있어야 안추워. 그러니까 난 괜히 부른게 아니야."
소년은 누가 물어보기라도 한듯 진이 옆에 바짝 붙자 그런 말을 했고, 진은 '그래그래-'라는 말을 하며 옆에 있던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물이 목구멍으로 들어가자 차가워짐과 함께 가슴속이 뻥 뚤리는 느낌에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정신 차리게 해 줘서 고마워…"
"무슨 소리야?"
"네가 의사와 말하지 않았다면, 또 생각했을꺼야. 지나친 망상 말이야. 내가 바다로…"
"그 얘긴 하지 마. 안할때도 됐잖아."
"……하지만 무서웠는걸."
그 이후로 소년은 차가움이 무서웠다. 그 바다로 들어갔던 사건이후 소년은 지나치게 따뜻함을 좋아하게 되었고,
겨울을 좋아하던 소년은 어느새 여름을 좋아하게 되었다. 무더운 여름이 차가운 바닷물 보다 좋다는 말을 넌지시 꺼내며.
그렇게 소년은 점점 진에게 기대었고, 진도 허공을 바라보며 어깨를 빌려줄 뿐이었다.
"무슨 생각해..?"
"글쎄, 너는 무슨 생각 하는데?"
"나는, 어린 꼬마를 생각해."
"어린 꼬마?"
"응."
소년은 멍하게 앞을 바라보며 어린꼬마가 누구일까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은 전혀 진지하게 있지 않았고 멀뚱멀뚱 소년을 쳐다보며 웃음을 참느라 바쁜 모양이였다.
소년은 진을 보며 '힌트를 줘-' '누군데?' 라는 눈짓을 했지만, 진은 앞만 볼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누군데!!"
"어떤 이를 좋아하는 이상한 녀석."
"여자야?"
"남자야."
"내가 아는 사람이야?"
"네가 아는 사람이니까 말하고 있지."
"그럼.......... 음- 몇살인데?"
"살만큼 살았어."
"...젠장. 그런거 말고 말이야."
소년은 화가 난다는듯이 진을 열심히 째려봤고, 진은 가볍게 응수해 주었다. 그러자, 소년이 뭐라고 따질 기세가 보이자 입을 연 진은.
"내 옆에 있는 녀석이, 그 꼬마녀석이야."
그러자, 멱살을 쥐려던 손이 살며시 내려갔고, 진은 그냥 멀뚱히 앞만 쳐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갈등하던 소년이 입을 떼었다.
"그럼, 내 생각은 왜 났는데?"
"꼬마 생각이 났다고 했어."
"그래, 그럼 그 꼬마 생각은 왜 났는데?!"
"그냥."
"그.. 그냥이라니 그런 말이 어디있어!"
소년이 침대에 누워서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버렸고, 진은 피식 웃어버리고는 같이 누웠다.
그러자 소년은 '뭐야, 내 침대야!' 라는 말을 했고, 진은 '내 마음이지.' 라는 말로 가볍게 응수했다.
그러자 불만이 많은지 소년은 궁시렁궁시렁 거렸고, 진은 누워서는 '아아, 침대가 참 폭신하고 좋네' 라는 말을 넌지시 꺼냈다.
"신혜성. 넌 무슨 생각 했는데?"
"나…?"
"그래. 넌 무슨 생각 했는데?"
"나는…'그자식'을 생각했어."
"그래?"
"응."
한동안의 침묵이 이어진건 왜 일까. 그렇게 생각하던 소년에게 곧 나른한 졸음이 밀려들어왔고 곧 소년은 잠에 들었다.
진이 뭐라고 하려는 찰나에 소년이 피곤해 코까지 골고있자 웃어버리며 천천히 일어서서는 이불을 바로 했다.
[나는…'그자식'을 생각했어.]
진은 퍽도 웃기다는 듯한 눈으로 소년을 주시하다 뭔가가 울컥했는지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문을 닫고 나와버렸고, 그 와중에도 소년은 잘만 자고 있었다.
진은 밖으로 나온후 바닥에 주저앉아버렸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열이 있는게 분명했다.
[그러지 말아.]
[이민우한테 그러지 말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그러지 말아.]
뭘 그러지 말라는거지?
내가 설마 '너의 그' 에게 손을 대기라도 한다는 건가?
[................................내가 .. 너한테 뭐니.]
[................................내가 너한테 어떤 존재일까?]
[......................신혜성. 말해봐. 내가 너한테 어떤 존재일까?]
너는 그때, 분명히 들었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들었던 거야. 올라가서 조용히 있을때, 그 말이 넌지시 들렸겠지.
선천적으로 눈이 나쁜 사람은, 선천적으로 대신 귀가 좋게 되어있어.
넌 분명히 들었을테지
[나는, 민우도 좋고 진이 너도 좋아!]
[그런데 이상하게도, 민우와 함께 있으면 가슴이 아파.]
[그건 내가 어쩔수 없는거잖아.]
[근데, 갑자기 눈을 받고 싶은 이유가 뭐야? 필요없다고 했었잖아.]
[............그냥, 눈으로 볼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
[다른 이유는 없고?]
[................... 그냥, 볼수 있으면 이민우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상상을 해.]
..............................신혜성. '너의 그' 는 돌아올수 없어.
-9-
'너의 그' 는 돌아올수 없어.
*
눈물이 한방울 한방울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무 의미 없는 눈물도 아니고, 하품해서 흘리는 눈물도 아닌데,
한쪽가슴이 어는듯한 느낌이 든다. 도대체 이 눈물은 어떤 눈물인가…?
........ 내가 그를 이제는, 보내야만 했다. 내 마음속에서 그를 지우는 일만 남음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가슴은...
"......................... 찾고 싶어."
뭘 찾고 싶니........?
"나의 소중한 보물을 ....... 찾고싶어."
보물?
"이민우라는 보물……. 가지고 있기에는, 너무 멀리 있는 값진 보물....... "
.. 너무 사물화 하는거 아니야?
"그렇게 해서라도 갖고 싶어................."
*
소년이 입원해 있는 곳은, 온통 하얀 빛이 들어오는 좋은 지리에 있는 곳이였다.
옆을 보면 빛이 먼저 보이고, 앞을 봐도 하얀색의 빛을 다시 보는듯한 느낌이 드는 곳이였다.
다만 하얗지 않은게 있다면, 침대와 소년 뿐이었다.
하지만, 침대를 제외한 지금은 모두 하얬다. ......
밖에는 어느새 진이 와 있었고, 진이 문을 두드렸을때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여긴 진은 다시 한번 문을 똑똑 두드렸고, 다시 한번 두드렸다.
"........ 자니..?"
대충 자는것이라 여기던 진은 살며시 문을 열었고, 온통 하얀것 뿐이었다.
그렇다. 소년이 없었다.
"........................... 씨발."
낮은 욕지꺼리를 한 진은 몸을 앞으로 당겨 침대위에 있는 편지지를 들었고, 편지를 읽는내내 미간에는 주름이 잡혔다.
진이 다 읽었을때, 더이상 그는 여기에 남아 있지 않았고 얼른 발을 돌려 밖으로 나오고는
약속이라도 된듯이 뛰기 시작했다.
. -[........... 나, 찾았어. 이민우를.]- .
*
"...... 후우."
바다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리고 돌아보며 낮게 웃어버렸다.
이곳은 바로 자신이 1년전에 자살을 하러 온 곳이였으니까 말이다.
다시 예전의 기억이 떠오르자 소년은 웃음이 나오는지 자꾸 낮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곧 눈물이 되어 떨어지고 있었고
눈뜬뒤에 본 바다가 많이 생소한지 두리번 두리번 보고 있었다.
"눈 뜬 다음에 온건 처음이네."
그렇다. 그때에는 보이지 않는 바닷속이라 그다지 무섭지도 않았었는데, 지금보니 꽤 깊어 보였다.
어떻게 천천히 내려갔는지 정말 감도 못잡게되자 정말 웃음이 나왔다.
내가 정말 그때 제정신이 아니였던가?
하지만, 지금 이렇게 예전을 회상하며 여유를 부리고 싶었다. 이번에는, 정말 죽고싶었으니 말이다.
그때는, 헤어져서 죽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가 죽고나니 따라가고 싶다.
그럼 그때 내가 바닷가에서 본건 뭘까.?
벌써 그때 죽어서 영혼이 된건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때 그는 확실히 날 막고 있었다.
차라리 그가 날 떠나지 않고 내 곁에서 죽었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럼...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랬더라면, 난 죽을 생각을 안했을지도 몰랐다. 그가 날 좋아한다는 증거였으니.
혼자 남은게 슬프긴 했겠지만, 어떻게 해서든 잊었겠지.
하지만, 그는 잘못했다. 날 증오심을 키우게 해서 나중에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을때의 그리움은 더했으면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차라리, 정말 그가 내 앞에서 죽었더라면… 술로 찌들어 살든 담배로 찌들어 살든 당장은 그렇게 살다가도,
결국 잊고 다른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을수도 있었다. 이번에는 여자를 사랑해보던가…하는 마음 말이다.
"......빌어먹을 놈이다. 너무너무 싫고 이기적인 놈이라서, 그 놈이 좋은지도 몰라."
이것은, 바다에 대고 하는 말이다.
바다는 넓고 깊어서, 내 마음을 이해해줄것만 같았다. 이상하게 그래줄것만 같았다.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갑자기 파도가 가라앉았고, 곧 이상하게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죽으려면.. 천천히 내 발로 가서 죽고 싶다.
이렇게 유언이라도 날리고 올걸 그랬나보다. ..
삶의 회의가 느껴진다. 막상 죽는다 하니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아니, 난 이미 차분히 가라앉을데로 가라앉아 있는 때였다. 이제는 내 몸을 바다에 떠내려 보내야 할 시간.
전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후회할지도 몰랐다. 발을 담그는 순간 차갑다는 느낌이 들어서 후회할지도 몰랐다.
어떻게든 후회는 할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게 언제든지 말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이가 나에게 한 일을 용서해 주기로 했다.
나한테 빚진녀석, 마음의 상처를 준 녀석, 날 무시한 녀석, 연락도 안하는 매정한 녀석,
뜯어먹을건 뜯어먹으면서 오리발 내미는 후배녀석들..... 등. 다 용서하기로 마음 먹었다.
용서를 해야만, 다리가 떨어질것 같았다. 그래서, 미련없이 그녀석들을 용서했다.
그리고............
"............ 피식-. 이민우도 용서해 주지."
그래. 그도 용서해야만 바다로 들어갈수 있을것 같았다. 나는 지금 내가 호흡을 할수 있음에 감사한다.
바다속에서 호흡을 하면, 폐로 들어와 바로 익사 해서 고통이 덜할것 아닌가.
그렇게 모든이들을 깨끗이 용서하며, 천천히 해변가로 향했다. 물이 차가워 보이긴 했으나, 안은 따뜻할것만 같았다.
1년전의 바다도 따뜻했다. 밖은 차웠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마치 날 보호하기라도 할듯 따뜻해져가고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밖은 차가워도, 안으로 들어가면 보호할듯 따뜻해 질것이다.
그렇게 믿으니 다시 기분이 홀가분해지는것 같았다.
"모두 안녕 -. 나는, 떠난다. 그가 있는 곳으로. 빌어먹을 그 놈이 있는 곳으로."
그렇게 천천히 발을 떼는데, 이상하리만치 마음은 가벼운데 .. 발은 왜 이리 무거운지 모르겠다.
철이 들은게 아닐 정도로 무겁기만 했다. 그렇게 천근인듯한 발을 떼며 유난히도 식은땀이 많이 흘렀다.
두려워하지마. 제발. 두려워하지 말라고.
발에 바닷물이 닿을쯤이 되자 팔에는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하지만, 멈추고 싶지는 않았기에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감으며 발을 떼니 아까보다 가벼워져 있었다. 아니, 1년전에도 이런 경험이 있었으니 그다지 긴장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죽지 못하면 .. 어떻하지.?
그것이 제일 문제였다. 왜 정작 죽으려 하면 쉽게 죽을수가 없는건지 ..
그렇게 물이 종아리에까지 차자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전까지만해도 바다의 냄새가 났는데 말이다.
귀가 따끔해 지는 느낌이 들었다. 심리적 영향인가.
그렇게 점점 아파오는 귀를 잡아봤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아물은 귀는 멀쩡했고, 전혀 문제될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피비린내가 나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허리까지 차자 다리가 따듯해 지는 느낌이였다. 역시 1년전과 지금은 변화가 없는걸까?
기뻐하는 가슴을 느끼며 조금은 빠르게 발을 떼었다.
이제는 조금만 더 있으면............
"야---------!!!!!!!!!!!!!"
.......................................전진?
"야 -----!!!!!!!! 빨랑 나와. 빨랑 나오라고 !!!"
너무 내가 지체했던 모양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빨리도 와 버린다.
.......나오란 말에 나는 심하게 동요하고 잇었지만, 바다속으로도 바다밖으로도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가 심하게 후들후들 거리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쓰러질것만 같았다.
그렇게 진이 빠르게 달려오기 시작했고, 곧 첨벙첨벙 물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거친호흡을 하고 있는 놈의 손이 내 어깨에 닿았을때,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할수 없었다.
"뭐하는거야, 신혜성!!!"
"..............."
"당장 나와."
".............."
진이 그렇게 팔을 잡아 당기는데,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내가 서있겠다는 의사도 이제 없었고
앞은 이미 흐릿해져 있었다. 단지, 아픔이 있다면 귀에서 나는 그런 아픔이랄까.
나는 서 있어도 서 있는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앉아 있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환청인지 모를 쇳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니, 뭔가에 부딪히는 소린가?
[아니, 아냐. 그는, 날 사랑하지 않았어. 그는.....이민우는...... 날 사랑하지 않았어.]
뭐가, 그렇게 슬퍼서 울어?
그 사람이 .. 도대체 왜 슬픈걸까?
들려오는 환청소리가 내 귀를 쩌렁쩌렁 울리면서 내가 아닌 나의 흐느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난, 그때........... 바로 바다로 갔었지.
"이민우는, .. 불치병에 걸려서
죽었어. 그리고, 눈은 고스란히 너에게 남겼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
"........"
"불치병이란걸 알았을때, 네가 슬퍼할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거야."
"........."
[................그런데, 다리가 떨어지질 않아.........
.......머리는 가라고 하는데, 다리가 떨어지질 않아.......
..........그리워 하지 않을수는 있는데, 다리는 여기 있길 원해......
...........이별할순 있는데, 몸은 그걸 원치 않아......
..............................심장은 그렇게 반응하질 않아............]
거짓말.
거짓말이야.
거짓말!! 거짓말!!!!!!!!
"마지막으로 너네둘이 만났을때, .. 그 날 나에게 전화하나가 걸려왔다."
듣지 않을거야.
절대로.
듣지 않을거야. 들을 필요조차 없는것일 뿐이야.
"잘 부탁한단다. 차라리 자신을 미워하게 해 달라고. 평생을 저주하게 해 달라고."
"싫어!!!!!!!! 젠장. 그만해!!!!!!!!!!!!"
"나 역시, 그것을 원했다. 네가 슬퍼하는건 나도 보기 힘들기에 말이야."
"그만하라고........빌어먹을. 전진!"
"..............난…네 친구잖냐. ...... "
".......그만해."
"난...................... 네 친구니까."
[................................내가 .. 너한테 뭐니.]
"내가 .. 너한테 친구고, 네가 나한테 친구니까."
[................................내가 너한테 어떤 존재일까?]
"대답조차, 아니 다를 이유조차 없잖아? 난 네 친구니까. 넌 네 친구니까. 그리고, 이민우도 내 친구니까."
"......."
"난, 이민우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 네가 힘들어 해도 , 난 친구로써의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부탁을 들어주었다."
"......."
[..... 소원이 뭐야?]
[소원이라니,? 그런것 없어.]
[그냥 말해봐. 들어줄수 있는거라면, 들어주고 싶어서 그래. 생일선물.. 이라고 하면 될려나?]
[시력을 갖고 싶어.]
[시력..?]
[아, 응. 나 시력.....이 많이 나빠서 그런거야 . 정말 시력이 많이 나빠서 그러는거야.]
[근데, 왜 안경 안껴?]
'.........볼 수 없으니까.'
"너는, 아직도 이민우를 좋아하고 있는거지?"
".................당연하잖아."
"그럼, 이민우를 슬프게 하지 말아. .. 그 자식은 널 위해서 그런거였으니까."
".........그런 바보같은 말이 어딨어?!"
"그리고, 나도 ...... 널 위해서 그런거였으니까.
............친구니까.
그래, 친구니까. "
-10-
시야가 하얘짐을 느꼈다. 다시 아침이 온건가?
아침? 아침이 온거야?
난, 어제 그렇게 바다에 갔는데, 이렇게 말짱하게 된거야?
머리를 울리는 이상한 느낌에 나는 관자놀이를 지긋이 눌렀다. 하지만,
머리를 울리던 느낌은 끝나지 않고
가끔씩 오른쪽머리에 칼을 찌르는듯한 느낌이 한번씩 들었다.
"씨발."
나는 잘 쓰지도 않는 욕을 하며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왜 그런가 봤더니 허리가 심하게 아파왔다.
어제 어떻게어떻게 기절을 하다가, 잘못 부딪히기라도 한건지 몸에 성한곳이 없었다.
그렇게 관자놀이를 누르던것을 멈추고 몇몇 보이는 생채기들을 보며 한숨을 쉬는데, 문뜩 내 방과 비슷해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똑똑 -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고,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누군가가 걸어오는것이 느껴졌다.
"뭐 하십니까?"
".................엉? 왠 존댓말이야?"
"몸을 움직이시면 안됩니다."
"....... 전진? 너 전진 아냐? 갑...자기 왜그래?"
"후우. 저는 당신이 말한 그 분이 아닌데요?"
"에에?"
나는 넋을 놓고 전진을 아니, 전진이 아니라는 한 놈을 쳐다보고 있을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돼. 네가 전진이 아니면 누구야?!
나는 다시 관자놀이를 눌렀고 곧 다시 오른쪽을 찌르는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으윽."
"앗. 신혜성 괜찮아?!"
"헤에. 전진. 네가 연극을 했겠다?"
"쳇. 한번 골려주려고 그랬다. 왜?"
"우하하하하하하하 아아악. 아프다."
"왜 아픈데?"
너는 네가 아픈 이유도 아냐?
나는 그렇게 속으로 궁시렁궁시렁 거리며 아픈듯한 쪽을 손가락으로 쿡쿡 누르고 있었다.
왜그러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지금 이 고통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찌르는 느낌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쑤시는거 같기도 하고 부딪히는 느낌인거 같기도 하고 알쏭달송한 채로
그렇게 아파왔기 때문이었다.
"병원이라도 갈까?"
"필요없어. 병원따위. 거길 또 가란 말이야?"
"하긴. 지겹겠다."
"잘 알았으면 됐다. 아아악, 또 오른쪽이 은근히 아프군."
"...............정말 병원 안가봐도 되겠냐?"
나는 정말 괜찮다는 듯이 세게 두세번 고개를 끄덕였고, 진은 미심쩍은 눈길로 쳐다봤지만 곧 고개만 끄덕여줬다.
하긴, 내가 안가겠다는데 지가 어쩌겠어.
병원에 안간다는 사실이 은근히 좋아 나는 베시시 웃어댔고 (어린아이가 주사를 싫어하는것 처럼 말이다.)
진은 '입이나 다무시지' 라고 하는 바람에 얼른 입을 막았다.
"뭐냐, 너 나한테 은근히 불만있었지? 그래서 내 몸을 이렇게 만든거지? 내 몸이 왜 이러냐?"
"흥. 웃기지 말라구. 네가 무거워서 끌고 오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
"끄....... 끌고 와?!"
"응. 끌고왔다."
"으악, 너 어떻게 나한테 그럴수 있냐? 너 나에대한 애정이 식었구나!!"
"애정은 개풀. 난 애정따윈 처음부터 없었어."
"젠장."
내가 욕을 내뱉는게 뭐가 좋은지 진은 실~실 웃었고, 나는 째려주며 다시 관자놀이를 지긋이 눌렀다.
머리와 허리가 많이 아플뿐이지 다른 부분은 꽤 멀쩡한듯 보였다. 하지만, 끌고왔다니 너무하잖아!
당장에라도 따지고 싶었지만, 내가 무겁다는건 인정하는 바였기에 눈물을 머금을수 밖에 없었다.
"역시 여자애가 데리고 오는게 좋단 말이야. 60kg이상 나가는 사람은 별로 없잖아? 역시 다이어트란 좋은것이여."
"난 날씬한 편에 속해!!"
"흥. 난 키작고 날씬한 사람이 좋다는 것을 느끼고야 말았다."
"으씨!!"
그러다 피식 웃어버렸다. 왜 그런지 몰라도 기운이 빠져나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거울을 보면 분명 파리한 모습이 눈에 띄게 되겠지.
그런 생각에까지 가게되자 거울을 보는것이 두려워졌다. 자신은 자기가 변해가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며칠 거울을 보지
않다가 보게되면 충격을 심하게 받게된다. 물론, 나도 지금 거울을 본다면 쇼크로 다시 쓰러지겠지.
그래서 난 거울을 볼 수가 없었다. 다시 1년전의 모습처럼 그렇게 새파랗게 질려 있다면 두려워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밥 줄래? 배 고프다."
"먹을수 있겠냐?"
그래. 예전에는 그렇게 기절하고 나서 밥을 먹지 않았지. 아니, 먹을수가 없었다.
밥과 국 그리고 반찬을 보는것 조차도 이민우 생각이 나서…
"그럼, 내가 솜씨를 뽐내주지! 기다려."
"응. 맛있게 해 와."
그렇게 천천히 누워서 진을 기다리려 했다. 뭐, 안나온다는 것을 알면 가지고 들어오겠지. 그렇게 하얀 천장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난 이미 오래전에 하얀색을 저주해왔다. 그래도 우리집의 벽지도 하얗고 병원의 벽지도 하얗고 진의 집의 벽지도 하얗다.
하얀색을 저주하게 된 이유는 그였고, 그도 하얀색을 좋아했다.
이거, 너무 병적인게 아닐까?
[......... 하얀색을 좋아하니?]
[물론이야. 만약 하얀색이 없다면 난 못살지도 몰라.]
[검은색이 있다면 하얀색은 있기 마련이지.]
[이민우는 검은색이고, 신혜성은 하얀색이면 얼마나 좋을까?]
"아악!!!!!!!"
다시 아련한 그의 말이 들려오자 소리를 지를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그래도 그런 생각들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는데 오른쪽뇌의 고통과 함께
그의 목소리, 그의 행동, 그의 얼굴이 너무 선명하게 생각났기에 저주하고 싶어졌다.
관자놀이를 지긋이 눌러도 흥분된 내 표정을 지울수는 없고, 이미 얼굴까지 빨개져버린 나는 이상한 호흡을 시작했다.
호흡은 빠른데, 산소는 그만큼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숨이 막힌다거나 하지 않는다.
정말 의식속으로는 죽을만큼 괴로운데 숨이 막히지는 않는다.
나만 겪는 감정이 아닐까 라는 생각과 함께 천천히 눈을 감았고 환청처럼 들려오는 진의 목소리에 안정감이 느껴져왔다.
진의 집을 떠나며 소년은 멍하니 하늘만 주시하고 있었다. 하늘의 구름은 유난히도 잠잠하면서 편안해 보였고 층운형의 구름이
마치 생선의 회를 뜨듯 알맞은 빗금칠이 되어 있었다.
그런 구름을 한참 바라보던 소년은 누군가가 자신을 치고 가는 바람에 결국 구름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렇게 죄송하다고 꾸벅 인사를 하며 다리를 돌리던 소년은 결심한듯 비장한 얼굴을 그려냈다.
햇볕은 따사롭기만 했는데, 바람은 세었고 층운형의 구름은 서서히 바람에 밀려나가고 있었다.
"이민우씨의 사망신고기록을 알고 싶은데요."
.
..
......................
...............................
"후우.."
소년은 터질듯한 울음을 억지로 집어삼키며 천천히 발걸음을 하고 있었다. 걸어가는 내내 소년은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았고
가슴은 터질듯 뜨겁게 뛰고만 있었다.
정말, 그가 눈을 자신에게 줬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버젓이 준 기록이 되어 있으니 소년은 황당해 하다가도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 내 눈이..... 그의 눈이래...... 하하......"
"....... 내....... 눈이....................이 시력하나 끝내주게 좋은 눈이......"
".........이, 좋은........... ......... 이 좋은.............."
소년은 별로 뛴거 같지도 않았지만 심장은 어떤때보다도 심한 심박질을 하고 있었고 그런 가슴을 부여잡고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가는
소년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이런 눈따위...... 이런 눈따위...... 받지 말았어야 했는데.
젠장. 받지 말았어야..... 빌어먹을."
소년은 횡설수설 욕설과 말을 같이 뱉으며 심하게 고동치는 가슴을 부여잡고 급기야는 길바닥에 누워서는 구름을 보며
안정을 받으려는듯 아무생각도 하지 않았다.
무념의 세계로 들어간 것일까.
소년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고, 아무것도 떠올릴수가 없었다.
그렇게 천천히 소년이 무념의 상태로 일어나려 하자 어디인지 모르는 지역만이 있었고, 소년은 주위를 둘러보며
이곳이 어디인지를 한참 생각하고 있었다.
잡고 일어서던 표지판을 쓰다듬다 불현듯 이곳이 어디인지 알수가 있었고 급기야는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수전증이 아닌데 자꾸 손이 떨리고만 있었다.
계속 회상되는 무언가의 소리가 소년의 귀에 환청으로 들리고 있었다.
"........ 이....... 이민우가 살고 있는.....아니, 살았었던...... 곳............"
소년은 천천히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하늘을 바라보았고, 하늘의 뜻이라는 생각에서인지 천천히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집을 찾을수가 있었다.
-12-
똑똑 ㅡ
집을 두드리는 내 손은 흥분인지 모를 감정으로 이 곳이 이민우의 집이라는 것을 알 때의 감정과 같듯
쉴세없이 떨고 있었다. 겨우 진정을 한 후 한숨을 쉬고 설마 싶어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돌리니
열리는 것이었다.
나는 약간 황당해서 피식- 웃었고, 문을 연 순간…
"우욱 -... "
이상한 느낌과 함께 위 속에 있던 것을 내뱉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한참 배 속의 것을 다 토해낸
나는 힘이 없어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하아......."
마치, 사장이 부도나서 채무권자들에게 넘어가고 난 후의 폐허를 보는 것만 같았다.
소파도, tv도, 침대도, 싱크대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집의 구조만 있는… 그런데도 익숙한 곳.
"..... 아?"
나는 둘러보던 중 집에 사진이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사할 때 놓고 간 것이리라.
어쩌면 이민우 것일지도 모를 그 것은 뒤집어져 있었고, 그것을 반대로 돌려 보려는 내 손은 아까마냥
떨려왔다.
아까처럼 그렇게 심하게 떨린것은 아니지만, 묘한 긴장감으로 이 집안에 나는 이질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렇게 이질적인 나라는 존재가 처음으로 이 공간에 익숙한 것에 손을 대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차마 볼 엄두는 못 내고 눈을 감고 반대로 돌린 나는 감았던 눈을 슬슬 떴고,
그 사진 안에는 어떤 꼬마 녀석이 있었다.
난 그제서야 눈을 제대로 떴고, 사진을 내 눈높이까지 올려서 그 아이를 보고만 있었다.
"이야, 귀여운걸."
확실히 볼살이 제대로 꽉찬 녀석은 상당히 귀여운 외모였다. 6~7살 정도 되었을까?
축구공을 오른쪽 옆구리에 끼고 왼쪽 손으로는 브이자를 그리며 김치~ 하며 웃는 녀석의 모습은
정말 우스웠다.
누구의 사진일까…….
"……이민우일까?"
곰곰히 생각해보던 나는 말도 안된다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그 차갑기 그지없는 그가 이렇게 장난기 있는 아이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기도 했지만, 특히
그와는 많이 달라보였기 때문이었다. 턱선도 다르고, 태권도 복을 입은데다가 골격도 많이 달라 보였다.
오히려 나랑 비슷하게 생겼다.
"히야, 의외의 것을 건지는 구만~"
나는 그래도 기념일듯 싶어서 사진을 지갑속에 넣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다 다시 안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래도, 그가 있었던 곳인데… 그의 자취를 느낄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 무리였던걸까.
하긴. 시간이 많이 흘렀어.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지갑을 꺼내 사진을 쳐다보았고 그 사진을 볼에 부비적 거려보았다.
……너무 괴롭다.
……눈이 있어서 너무 편한데, 이 눈이 그의 눈이라는 것 또한 괴롭다.
……그가 외면한게 아니라, 그의 병이 그를 외면하게 만든것이 괴롭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를 외면하게 했던가.
그럼..... 내가 외면한 걸까.
.....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나를 배려해 준걸까.
"이민우......"
이 곳에서 이야기를 하면, 그가 어디선가 들어줄것만 같았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해?
너는 ..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는 바로…책임의 차이라고 했지.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책임감이 있어야 된다고 했지.
그래서, 경제적으로도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그랬었지."
"그런데 말이야. 그때 난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 할 수가 없어."
난 왜 그가 하는 말은 기억하면서 왜 내가 하는 말은 기억하지 못하는지 모른다.
아니, 그에게 했던 모든 만행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했던 말을 생각하려면
한참을 고민만 하다 머리에 몇대 꿀밤을 때린후 일어나는게 대수였다.
물론, 기억을 하지 못하는 부분이 좀 적긴 하지만.. 그래도 왠지 내가 실없는 발언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언제 알게 되었을까?"
[나를 외면하지마.]
"그 전에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그런 얘기를 한 걸까?"
[......... 하얀색을 좋아하니?]
"그래. 난 미칠듯이 하얀색이 보고 싶었다. 온통 검어서. 됐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신경질을 부리고 난 후 난 문을 발로 퍽- 치며 밖을 나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발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마치 누가 날 잡기라도 하듯...
자..... 잡기라도 하듯?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고 다시 발을 떼려고 하는데 또 다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계속 이 과정만을 반복 하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을 감은 나는 두려운 마음이 흠칫 들었다.
"............ 이민우........"
그의 기운이었다. 몸을 휘감아 오는 이상한 기운. 나는 두려움도 없어진 채 그렇게 이상한 기운에
내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러다 차가워져서 내가 흠칫 하자 기운은 사라져 버렸고, 지갑에서 언제 빠져나왔을지 모를 사진이
펄럭이고 있었다.
"............... 이민우? 이민우?!"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주위를 두리번 거렸고, 바람에 휘날리는 사진을 움켜잡고는 미친듯이
그를 불렀다.
"이민우!!!!!!!!!!!!!"
*
"왜 울고 있어?"
나는 울고 있던 폼이 얼마나 추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추해 보였던지
킥킥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까 말을 건넨 그는 나에게 손수건 같은 것을 주며 닦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어린애 취급 받은게 기분 나빠서 손수건으로 코까지 풀었는데, 그러자 킥킥 웃던 소리가
모두 없어져 정적이 되어 있었다.
그나 주위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득의양양 해 있을 것이다.
역시 난 어린애일까…
나는 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주위 사람들 중 한명이겠거니 하고 손수건을 건넸고 그 사람은 받고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솔직히 울던것을 보여서 쪽팔렸기에 뛰어나갔고, 곧 문으로 추정되는 곳에 부딪칠 수 밖에 없었다.
"으아악!!"
정말 많이 아파서 이마를 문지르고 있는데, 아까전까지만 해도 조용하기만 하던 연극실이 다시
그들의 웃음에 의해서 시끄러워졌고 나는 버럭 화를 내며 외쳤다.
"뭐야, 조용히 안 해!!!!! 요? 여기가 어디라고 떠들어.....요? 여기는 신성한 곳이야! 요."
내가 어색하게 높임말을 붙이는게 어색해 보이던 것인지 그들은 또 다시 푸하하 -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고 나는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전에 손수건을 준 사람으로 추정되어 보이는 사람이 말을 걸었다.
-목소리가 똑같으니까 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네네. 연극부에 들려고 왔는데요. 여기에 총 책임자 좀 볼수 있을까요?"
"..... 왜 찾는데요?"
"연극부에 들려구요."
"혹시 다요?"
"아니요. 저 혼자인데요?"
나는 그나마 나은 사람이 들어온다는 말에 기쁨을 느낄 수 있었고, 꼭 내가 총책임자라는 말을
꺼낼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
사실, 총 책임자가 울고 있다가 - 손수건 받아서 코 풀고- 문짝에 부딪히는 만행을 보인다면…
어디, 들어오고 싶어 지겠는가?
"네. 나이는 어떻게 되시지요?"
"....."
갑자기 조용해 진 주위때문에 나는 의미모를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고, 그는 약간 황당하다는 듯한
말을 걸어왔다.
"..... 이름표 있잖아요?"
"그냥 물어보는거예요. 복학생일수도 있고, 또 - 원래 여기 들어오던 사람들은 이름표 달고도
다 대답했다고요."
나는 그제서야 그가 내가 앞을 못 보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앞 못본다는 것은
유명한데…
나는 약간 황당했지만, 뭐.. 그다지 알리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기에 그에게 그런 말을 해대며
그에게 이름을 물었다.
"이민우라고 해요."
그 때, 문이 열려져 있었다면… 인연이 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13-
집에 꼭꼭 붙어 있던 나는 할일이 없어 잠만잤다.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렸지만
그걸 무시했고, 문을 따고 들어오는 사람이 전진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뭐냐, 왜 문을 안열어?!"
"그냥."
그러자, 그는 결국 '내가 졌어-' 라는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흔들더니 내 앞에
안에 무슨 내용물이 들은 검은봉지를 올려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