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3학년]
한 별속에 한글학교 이루리
내가 다니는 한글학교는 재밌다.
나는 한글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한국에 역사를 배우고 한글을 바르게 쓰는 것을 배웠다.
나는 학글학교에 선생님들이 좋다.
→ 한글학교의
나는 한글학교가 재밌어졌다.
한글학교를 통해 좋은 것을 배웠다.
나는 한글이 싫었는데 한글학교를 통해 한글이 재밌어졌다.
나는 한글이 정말 소중하다.
나는 학교중에 한글학교가 제일 좋다.
왜냐면 우리나라에 대해서 많이 배우니까.
나는 유치부, 1학년, 2학년, 3학년이 제일 좋다.
나는 한글이 이제 제일 재밌는 놀이 갔다(→ 같다).
나는 졸업할 때까지 한글학교를 다니고 싶다.
나는 꼭 한글을 많이 배우서 절대로 까먹지 않도록 할꺼에요.
→ 배워서 →할 거에요.
한글을 배워서 너무 좋다.
이루리 학생의 시 잘 읽었어요. 한글학교를 좋아하는 모습에서 너무 감동했어요. 한글학교가 좋은 이유가 잘 나타나 있어 좋았어요.
시는 시인이 독자에게 주고 싶은 생각을 독자의 머릿속에 떠올리게 해 주어서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라고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해요. ‘맞아!’라는 말은 감동을 말해요. 시인은 자신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독자에게 감동을 주려면 어떤 이야기가 필요할까요? 누구나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닌 내가 발견한 내용과 느낌이 전달될 때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답니다.
정글속의 월드크럼 김신영
아침 일찍 눈을 뜨면 ㉠또 다른 정글 모험 시작돼네
→ 되네
새들이 아침 일찍 깨워주셔 알람시계 필요 없어
초록 식물들이 많아서 눈이 좋아져!
㉡그럼 내 안경도 필요없겠네
사랑스러운 새들과 고양이들이 나랑 놀아 주어 심심할 틈이 없네
아! 상쾌한 공기, 아름다운 꽃, 푸른 하늘 그리고 수없이 펼쳐진 풀,
딱! 정글속의 월드크럼
월드크럼이 무엇인가요? 누구나 알 수 없는 특별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시어를 선택했다면 시의 내용을 통해 그 의미가 드러나야 해요. 생소한 단어이어서 눈에 띄었는데 아무리 읽어보아도 월드크럼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네요.
앗! 다른 학생들의 글을 읽다보니 ‘월드 클럽’ 이네요. 신영이가 살고 있는 보금자리의 이름인 것 같아요. 맞나요?
㉠: 시구는 모두가 쓸모 있기 때문에 표현한 거잖아요? 지금 내가 아래에 표현된 모험과 다른 것이 있어서 표현한 줄 알아요. 그것이 무엇인지를 시 중에 표현하였으면 ㉠이 분명할 텐데 신영이의 시에서는 나타나 있지 않네요. 조금 아쉽다.
㉡은 시 문맥으로 볼 때 전혀 맞지 않네요. 분명히 신영이 주변에는 초록 식물들로 가득차 있는데도 안경을 쓰고 있잖아요?
㉡이 있으려면 그래서 내가 안경을 벗었다는 말로 들어가야 합니다.
[초등 4학년] 제목 : 내가 다니는 한글 4학년 박신영
내가 다니는 한글학교는 한글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학교입니다. 한국 사람인데 → 이다. (서술어를 통일 시키세요.)
한국말을 못하는 아이들, 한국말은 할 수 있지만 한국에 오래 있지 못한 아이들, 너무 태국에 오래 머물러 있고 한국어 공부를 안 한 아이들에게 한글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학교이다. 한글학교는 국어책을 사용해서 한글에 있는 학교처럼 가르친다.
→ 문맥으로 보면 ‘한국’이 맞아요.
하지만 한국처럼 3시까지 하지 않고 12시 30분까지 하고 또 토요일만 한다. 나는 1학년부터 한글학교에서 한글을 공부했다. 그때는 방과후를 고를 수 있었다. 나는 유치원부터 색종이 접기를 시작했는데 한글학교에서도 김민정 사모님에게 색종이 접기를 배웠다. 하지만 3층에서 게임하는 아이들을 보고 놀고 싶어하는 나를 보고
→ ‘하지만’을 썼으면 뒤에는 놀고 ‘싶어 했다.’ 로 문장을 끝내야 한다. 그리고 이어서 ‘김민정 사모님은 이러한 나를 보고 ~’로 이어야 문장이 자연스러워요. 두 문장으로 써야할 것을 한 문장으로 쓰면 내용이 자연스럽게 전달되지 못한답니다.
김민정 사모님이 놀아도 된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에게 너무 죄송했다. 왜냐하면 나만 색종이 접기를 했는데 나까지 게임하러 가면 선생님이 외로우실 것 같았다. 그래도 어쨌든 나는 게임을 했다.
→ 군더더기 말이에요. 삭제하는 것이 좋겠네요.
(이러한 일화를 쓴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건만 있지 이러한 일이 어떠한 의미를 있는 지가 분명하게 제시되어야 좋은 글이 된답니다.)
3학년 때 나는 우리 엄마가 가르치는 한자를 했다. 우리 엄마는 원래 5학년 선생님이셨다. 그런데 엄마가 한자 선생님이 되고 싶어 하셔서 한자를 가르치시면서 한자를 알면 한글이 쉽다고 하셔서 나는 전에 의라 오빠와 함께 1급까지 공부했다. 엄마는 할머니가 아프셔서 엄마는 한국으로 들어가셔서 지금은 아빠와 함께 있다.
4학년 때 내 선생님은 엄청 상냥하신다. 하지만 그래서 남자 애들이 엄청 시끄럽다.
→ 상냥하셨다. (4학년 때는 과거이니까 시제를 맞춰 주세요.
그래도 즐겁다. 이제는 4학년은 방과 후로 무조건 수학을 해야된다.
→ 왜 그렇지요? 이유가 들어가야 완결된 문장이 된답니다.
나는 이 한글학교가 한글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학교여서 너무 좋다. 앞으로 이 학교에 아이들이 더 와서 한글에 대해 배웠으면 좋겠다.
신영이 글 잘 읽었어요. 글을 완성하는 방법은 3단계를 거친답니다. ‘처음 쓰기-> 고쳐쓰기 -> 완성하기’입니다. 신영이의 글이 잘 못되어서 빨간색을 많이 쓴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이것만 고치면 좋은 글이 될 것 같아 자세히 써 준거에요.
이 편지를 받고 다시한번 고쳐쓰기를 해 보세요. 글솜씨가 많이 늘 거에요.
[초등 5학년]
내가 겪은 세 나라 유다은
내가 세 살 때부터 살던 캄보디아는 아주 더럽다. 길가에 쓰레기, 초록빛 없는 식물들, 바퀴벌레, 모기, 파리, 쥐들이 돌아 다니는 집. 나는 이러한 것들이 보통인줄 알았다. 그래서 한국이나 다른 어떤 나라도 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내가 태국의 치앙마이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예상 했었다.
치앙마이는 캄보디아와는 좀 달랐다. 집안에 곤충도 거의 없고 날씨도 맑다. 사람들은 조용하고 집들은 아담하다. 길가에 쓰레기가 약간 있기는 하지만 식물들이 예쁘게 패턴을 이루어 나란히 줄 서 있다. 이렇게 주변 환경이 비교적 살기 좋은 곳이 이 곳 치앙마이이다. 그리고 캄보디아에는 한글학교가 시설이 너무 안 좋아서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기 치앙마이에는 너무나 좋은 한글학교가 있다. 나는 이 곳이 편안하고 마음에 든다. 치앙마이는 내가 편하게 생활하고 공부할 수 있는 곳인 것 같다.
→ 앞에 이유가 분명히 제시되어 있으니까 ‘공부할 수 있는 곳이다.’라고 단정해서 표현해 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한국에 갔을 때 깜짝 놀랐다. 한국 공항이 너무 커서 내 다리로는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 시적인 문장입니다. 싱그럽네요.)그래서 엄마가 셔틀카를 불러 움직였다. 내 눈에 보이는 한국은 너무 크고 화려하고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우리는 할아버지 댁이 있는 정읍에 갔다. 그런데 나는 거기서 더 깜짝 놀랐다. 정읍은 시골인데도 엄청 깨끗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캄보디아가 정말 더러운 나라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고 치앙마이가 그 다음, 한국이 가장 깨끗하고 살기 편한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재미 있는 점은 내가 가장 가고 싶은 곳이 캄보디아라는 사실이다. 헐~ (→ 여기에서 끝나면 어떻게 해요? 그 이유가 들어가야지 완성된 글이 되잖아요. 헐~)
내가 태국에
김이삭
내가 태국에 처음으로 왔을 때는 식물도 많고 동물도 많고, 자연과 참 친한 곳이라고 생각했었다. 또 택시보다는 빨간색과 노란 송테우가 많이 있는 것이 신기하고 이상했다.
그리고 우리가 살게 될 월드 클럽 안으로 들어 왔을 때, 그 크기에 눈이 휘둥그래졌었다.
이전에 살던 중국의 마을은 아주 작았기 때문이다. 내가 월드 클럽에 살 때는 정말 행복했었다. 특히 학교가 엄청 가깝고 친구들이 많이 있어서 숙제만 끝나면 밖에 나가서 놀 수 있는 게 좋았다.
태국은 산도 많고 폭포도 많아서 경험 할 수 있는 것이 많은 것도 큰 장점이다. 그리고 방학에는 송크란이 있다. 송크란은 더우니까 다른 사람에게 물이 뿌리며 노는 것이다. 많이 젖어도 너무 덥기 때문에 시원해서 좋고 빨리 마르기 때문에 괜찮다. 태국에 많은 재미 있는 것들이 있지만 나는 송크란이 제일 재미있다.
그런 태국에도 안 좋은 점이 있다. 그건 벌레다. 모기도 많고 개미가 너무 많아 음식을 밖에 둘 수가 없다. 그래서 엄마는 모든 음식을 냉장고 안에다 넣어 두신다. 그래도 나는 내가 사는 태국 치앙마이가 좋다. 내가 다니는 학교 GIS도 너무 좋다. 배우는 것도 많고 운동도 많이 한다. 축구팀도 있고 다른 팀도 많이 있다. 가끔씩 다른 학교들과 시합도 한다. 나는 태국에서의 이 모든 것이 즐겁고 행복하다. 벌레는 많아도 나는 치앙마이가 좋다.
태국의 좋고, 안좋은 이유가 분명한 글이네요. 수필에 해당하는 글인데 너무 짧게 썼어요. 이 글은 태국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이라는 두 가지의 주제로 썼잖아요? 선생님이 볼 때는 그 중 하나만 정해서 여러 가지 글감을 가지고 글을 썼으면 더 좋았겠어요.
[초등 6학년]
지진
박새땅
내가 살았던 인도 실리구리는 나의 고향같은 곳이다.
우리 동네에서는 날씨가 좋으면 세계에서 두 번 째로 높은 히말라야 산맥의
칸잼준가라는 산이 보인다.
그 산은 항상 하얀 눈에 덮여 있다.
내가 보는 산은 멋있지만 우리 동네는 그 산과는 엄청 다르다.
어디에서나 소똥, 돼지똥, 오리, 물소하고 쓰레가가 쫙 깔려있다.
그런곳에서 나하고 누나는 항상 심심했다.그래서 가끔씩 함께 공주의 남자
라는 드라마를 봤다.
드라마를 보던 어느 날 큰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온 집이 흔들리면서 사람들이 소리지르는 것을 들었다.
나하고 누나는 컴퓨터를 끄지도 않고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밖에는 팬티만 입고 있는 사람도 있고 울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빠는 화장실에서 똥을 싸고 있는 바람에 겨우 팬티만 입고 나오게 되었다.
6.4 도 지진이 끝나고 집은 모든 것이 부서져 있었고 전기도 끊어졌다.
집에 가기 힘들었다. 엄마도 한국에 갔는데 너무 보고 싶었다.
나, 아빠, 형, 누나 다 같이 밥 먹으러 레스토랑에 갔다.
거기에는 막 피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실리구리에서의 삶은 다사다난
했다. 그래서 태국 치앙마이로 이사 가기로 결정했다.
6년 동안 살았던 인도, 친구, 집 그리고 애완동물 다 평생 못 본다.
나는 너무나 슬펐지만 치앙마이에서는 더 좋은 집, 더 좋은 친구하고
귀여운 애완동물들을 다 갖게 되었다.2014년 4월 5일 3년째 시간이 이렇게 흘렀지만 인도 친구들은
아직도 그립다. 인도 지진을 겪으면서 살았던 것도 다 좋은 경험인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 글답게 지진이 일어난 현장을 세밀한 묘사를 통해 표현했네요. 잘 썼어요. 다만 본문에는 인도 친구들과의 추억이 담겨있지 않았는데 글의 마무리에서 인도 친구들이 아직도 그립다는 말이 있네요. 글 내용의 일관성도 좋은 글의 요건이랍니다.
내가 다니던 학교 6학년 이 호 영
내가 사는 태국은 신기하고 재밌는 일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다.
내가 처음에 태국에 왔을때는 그야말로 찜질방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곳 태국 치앙마이에서 충분히 잘 할 수 있을거라고 믿었다.
태국에 처음 왔을 때 월드클럽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내가 살던 집은 밖으로
나와 오른쪽을 보면 아주 예쁜 산이 보인다. 가끔씩 오후 5시마다 집 밖으로
나와 그 산을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Varee라는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시험을 봐야 앴다. 시험을 보는 날 너무 긴장이
되었다. 그러나 시험은 생각보다 쉬웠다. 그래서 나는 쉽게 Varee 학생이
되었다. 시험도 쉬웠으니 학교 생활도 매우 쉬울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나는 그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다. 그 이유는 내가 태국 국제
학교에서 태국 말을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하루하루가 기분이 안 좋은 날들을
보냈다. 그렇게 힘들게 Varee를 다니다가 CMIS 라는 학교로 전학을 갔다.
나는 혹시 그곳에서도 왕따를 당할까봐 걱정했다. 그러나 4학년은 공부도
쉬웠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 친구들도 많고 성적도 좋아서 엄마에게
칭찬도 받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면 흐를수록 나의 공부는 어려워지고 이젠 버티기
가 힘들 정도로 공부가 어려워졌다. 게다가 친구들도 조금씩 없어졌다.
내가 성적이 안 좋기 때문에 친구들은 나를 만만하게 보기까지 했다.
나는 정말 너무 너무 힘든 학교 생활을 그만 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엄마는 나에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라고 말씀하셨다.
가끔씩 아빠가 날 불러 놓고는 혼내시기도 하고 위로해 주시기도 하셨다.
나는 아빠한테 꾸지람을 들어서 슬픈건지 아니면 아빠가 위로해 주셔서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눈물을 많이 흘렸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평소보다 열심히 했다.
그리고선 마침내 성공하였다.
계속 노력하다 보니깐 성공을 한 것 같다. 성적이 갑자기 팍 올랐다.
나는 놀랍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했다.
나는 노력을 하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았다.
그동안 공부가 너무 안되서 공부하기 틀렸구나 생각하며 너무 힘들어서
좌절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될까? 세상에 전혀 필요 없는 존재가 되는걸까?
하면 포기를 하려고 했었다.
그때마다 엄마, 아빠가 위로를 해 줬기 때문에 포기를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제 공부가 조금씩 쉬워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노력하지 않고 포기했으면 지금쯤 어떻게 됬을까?(→됐을까?)
지금도 아직 노력 중이지만 나중에 꼭 성공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도 내가 나쁜 성적을 받다가 갑자기 잘 받으니깐 조금 놀란 듯
싶다. 언제 부터인지 내가 친구들 사이에 껴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이제 친구들도 다시 많이 생겼으니 6학년이 돼서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모범생이 되고 싶다.
나는 힘든 일이 생겨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여 성공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렸을 때에 겪는 왕따의 어려움은 매우 큰 상처로 남잖아요? 잘 해결되었다니 매우 기쁘고 감사하네요. 그러나 성적이 올라가서 왕따 문제가 해결된 것 같지는 않아요. 친구들과 잘 소통되었던 것은 오히려 자신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호영이 덕분에, ‘진짜 성공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어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내가 사는 월드 클럽 6학년 이 채 현
내가 사는 월드 클럽에는 끝없는 푸른 하늘과 널러진 푸른 초원이 있다.
언 듯 보면 느낌은 아프리카의 초원같다. 하지만 있을만한 것들은 다 있다.
카페, 마트, 대형백화점, 병원, 치과, 숨은 맛집, 학교, 놀이터, 등등
월드 크럽은 살기 딱 좋다. 친절한 사람들도 많고 음식도 맛있다.
꽃이 활짝 피는 봄이 오면 학교에 가는게 너무 싫다.
해가 중천에 뜰때까지 늘어지게 자고 나서 봄에 어울리는 상큼한 코디를
하고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면서 수다 떨고 싶다.
하지만 냉정한 학교는 이 자유를 2주만 준다.
봄 방학은 참말로 내 구세주다.
아~~ 이 자유가 영원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월드클럽도 지옥일 때가 있다. 바로 여름이 시작 될 때이다.
집안은 개미와 모기로 득실거리고, 가끔씩 수돗물을 사용 할 때 시원한 물
대신 뜨거운 물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더위 대탈출 작전이 없는건 아니다. 해가 유난히 쨍쨍 비치는
날에는 친구들과 트립티에서 팥빙수 대자를 시키고 먹방 대결을 한다.
그 후 그레이스 수영장에서 친구들과 물놀이를 하는 것 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는 없는 것 같다.
아무리 더위 탈출 작전이 있어도 여름은 엄청 긴 인내심 테스트 같다.
지옥 같은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학교가 또 시작 된다.
나는 가을도 꽤 알록달록 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가을이
되면 나는 유독 외로움을 더 많이 타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유일하게 월드 클럽 안에 있는 유일한 도토리나무를 알고 있다.
많이 외로운 날들에는 친구와 함께 그 도토리나무 밑에서 수다를 떤다.
그렇게 가을이 가고 봄이 또 오고 여름이 온다.
내 나이도 한 살, 두 살, 세 살 늘어간다.
그리고 월드클럽은 항상 나와 함께 한다.
나는 치앙마이가 한국 보다 더 좋다. 누가 뭐라 해도 치앙마이는 다름 아닌
내 고향과도 똑같으니까, 아니 내 고향보다 더 좋으니까.
글이 매우 좋네요. 태국에 가보지 않은 나도 이 글을 읽노라면 눈 앞에 봄, 여름, 가을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참 좋은 글입니다. 잘 읽었어요.*^^*
[중학교 1학년]
가족 정의라
나는 서로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 나는 엄마 아빠 형 두명 있다. 우리가족은 나에게 주는 특별한 선물이다. 그것의 이유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웃고, 울고, 마음을 이해해준다. 처음으로 우리 아빠는 나를 제일 사랑하신다. 나는(→ 내가)어렸을 때 아빠가(→는) 나를 사랑하시는데 나는 (아빠를 )싫어했다. 그런데 내가 초등학생 때 내가 무었 잘못할 때 아빠가 나한테 혼내주면서 교훈을 가르치셨다. 내가 아빠한테 혼나고 나서 아빠가 나를 사랑해서 혼내준거라고 깨달았다. 그래서 아빠는 나한테 특별한 사람으로 되라고 이렇게 하신거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를 너무 사랑했다. 나는 애기때도 아무사람한테 가지않고 엄마한테만 붙었다. 그래서 엄마가 너무 힘든 인생을 가졌다. 나는 엄마한테 미안한 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엄마하고 서로 웃고 좋운 시간 보내고 있다. 나는 가끔식 엄마 마을을 알때도 있다. 무슨 슬픈 일이면 나도 마음이 아파서 눈물도 흘릴때도 있다. 그리고 우리 형은 나한테 힘든 인생을 가진대 왜 첮재 형은 게임만 빠져서 혼자 놀고, 자고, 그냥 책 읽는다. 그리고 큰 형은 나한테 장난친다. 그리고 내 둘재 형은 너무 심한 형이다. 나한테만 화나고, 오해를 받는다, 내가 안울려고 해도 눈물이 쉽게 나온다. 그리고 내가 혼날 때 욕도 한다. 특히 내 둘재 형은 “죽는다” 말도 꺼낸다. 그래도 우리 둘째 형은 나하고 같이 놀 때도 있다. 그리고 나한테 짜증나는 마음도 많다. 우리 형은 너무 개을러서 나만 심부름을 시킨다. 그래도 나는 우리형한테 고마운 마음있다. 나를 혼낼 때 그건 교훈이었다. 그래서 나는 많은걸 배웠다. 내 가족은 서로 싸우고 소리지르면 내 마음이 아프고 힘들다. 그리고 서로 웃고 사랑하고 좋은 말하면 나는 활짝 웃으면서 마음이 편하고 따뜻하다. 나는 우리 가족이 같이 함께 살고, 웃고, 마음을 통하면서 살고 싶다. 이래야 우리가 더 특별한 사람 될수있다.
가족 구성원 모두에 대한 애정을 짧게나마 표현한 글이네요. 그러다보니 간단한 가족소개에 그쳐 버렸어요. 백일장에서 가족이라는 주제가 나오면, 가족에 대한 전반적인 애정과 함께 가족애를 느낄 수 있었던 하나의 에피소드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내면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답니다.
홈스테이 김은빈
나는 나의 엄마와 아빠가 운영하시는 홈스테이에 대한 좋은 점을 생각해 보았다. 다른 평범한 아이들은 다 숙제만 하고 바로 쉬는데 우린 그렇지 않다. 우리는 공부하는 시간들이 다 정해져있다. 그러다가 보니 숙제말고도 할것들을 찾게 된다. 예를 들면 영어 문제집과 수학을 푼다던지, 영어책을 읽는다던지, 해서 내가 생각하기로는 공부시간이 정해져있는건 나에게 좋은 해택을 준다고 생각한다. 홈스테이를 하다가 보면 편식도 없어지고, 공부안하는 습관도 없어진다. 그리고 언니들같은 경우는 옷을 정리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본인이 스스로 정리정돈을 깨끗이 하게 된다. 물론 나도 엄마가 해주시지만은 않으신다. 그래서 옷장이 더러우면 스스로 청소를 하게되서서 정말 좋은거 같다. 그리고 홈스테이를 통해서 사람들을 많이 경험을 하게된다. 그러니까 여러 성격을 받아들이고, 이해심이 생기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람을 보며 ‘아, 저러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여러 사람의 만남을 통해서 사귐성도 좋아진다. 새로운 사람들이 오면 그 사람과 친해지는 방법도 터득하고해서 좋다. 이런 면들을 보면 사회생활도 잘하게 될거 같다. 서로 배려를 하게 되고 인내심도 생긴다. 한번은 이런적도 있었다. 내가 컴퓨터를 쓰려고 키러 올라갔는데 컴퓨터가 켜져있는것이었다. 그래서 누가쓰지? 했는데 마침 그 주인공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언니한테 내가 “언니, 지금 컴퓨터 써?” 하고 물어보았다. 근데 보통 사람들은 ‘어’ 또는 ‘왜? 나 쓸거야’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언니는 나에게 “아~ 쓸려고 킨건데 은빈이 먼저 쓸래?” 하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역시 홈스테이는 장점이 많다는! 그리고 이해심과 사과를 하는 방법도 생기는 것 같다. 나는 아침에 학교를 가려고 공부방에서 준비를 하고있었는데 나와 친했던 언니가 내가 있는 줄 모르고 불을 끈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언니! 왜 불을꺼!? 다음부턴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고 딱 기분이 나쁜 말투로 말했다. 언니는 나에게 “김은빈 너 학교끝나고 봐.”라고 말을 했다. 근데 학교가 끝나고 보니 언니가 밤까지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언니를 먼저 불렀다. 그리고 공부방에서 나와서 나는 이랬다. “언니, 내가 미안해. 별거 아닌거 가지고 너무 화를 냈던거 같애.” 했더니 언니가 “아니야 은빈아. 내가 미안해. 언니로써 말을 너무 나쁘게 했던거 같아”라고 말을 했다. 그러고는 사과의 뜻으로 우리는 포옹을 하고 그 싸움은 말끔히 지워졌다. 이런 점들을 보면 홈스테이가 너무나도 나에겐 많은 도움이 됬다고 생각한다.
부모님께서 하시는 홈스테이가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는 주제를 가지고 쓴 글이군요. 무엇이 유익이 되는 지가 에피소드를 통해 표현한 것은 매우 훌륭합니다.
잘 읽었어요.
치앙마이 유한별
치앙마이란 나의 집과 마찬가지다. 나는 치앙마이에 2살 때에 와서 나는 여기가 한국보다 더 익숙하고 편하다. 치앙마이에서 많은 일들이 좋고 안좋은 일들도 있다. 나는 치앙마이의 CMIS친구들이 좋다. 내가 CMIS 친구들은 나를 채겨주고 가치 놀아준다. 그리고 친구들이 나랑 같이 농구를 하고 스포츠를 같이 하는게 좋다. 나는 교회 친구들도 많이 좋다. 그런데 CMIS 친구들 만큼은 좋지 않다. 교회 친구들 중에서 CMIS 친구들도 있다. 나는 교회 친구들이랑 7 eleven 갈 때가 제일 재미있따. 왜냐하면 교회 예배가 끝나면 친구들과 7 eleven에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거기서 재미있는 장난도 친다. 치앙마이의 좋은 점을 떠오르면 바로 CMIS 내가 다니는 학교가 떠올른다. CMIS를 떠오르면 스포츠다. CMIS에서 운동을 하는 게 너무 재미있고 같이 한는 사람들도 너무 착하고 좋다. 나는 치앙마이에 CMAC (Chiang Mai Athletic Conference)가 있어서 너무 좋다. CMAC에서 운동 토너먼트를 많들고 게임들을 정해준다. 그리고 나는 CMIS가 공부를 잘 가르키는 학교라저 너무 좋고 뿌뜻하다. 그리고 나는 치앙마이 살아서 나쁜 점도 있다. 그 중에 하나인 나쁜점은 내가 한국에 있는 가족을 못 보고 못 맞나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에 있는 사촌동생들이 불어울때도 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많은 것을 하고 재미있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치앙마이에서 사는 단점은 시설이 한국처럼 좋지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은 좋은 TV, 인터넷, 집 시설, 그리고 다른 것들도. 그런데 나는 좋은 시설이 부럽지만 좋은 시설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나 범죄가 없었으면 좋겟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치앙마이가 더 좋은 점은 한국 학생들 처럼 공부를 빡치게 안해도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사는 학생들은 공부를 너무 미치도록 하고 공부만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한국 학생들처럼 공부에 미치지 않아서 너무 좋다. 그래서 나는 나의 부모님과 하나님에게 감사드린다.
한별이가 치앙마이에서 2살 때부터 살았으면 그곳이 고향과 다름이 없네요. 한별이는 이 글에서 치앙마이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표현했어요. 조금 아쉬운 것은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그대로 열거했다는 점이에요. 그 중 하나를 가지고 에피소드를 통해 나의 감정을 이야기로 엮을 수 있었다면 분명히 더 좋은 글이 될 거에요.
[중학교 2학년]
병든 새가 날다
-중2 이다은
지금까지 나의 눈 앞에는
하얀 연기가,
지금까지 밖에 나가면
숨이차고,
지금까지 하고 싶은
일들 못하고,
어깨에 무게가
점점 늘었다.
저 멀리 산을 보려고
눈에 힘을 줬지만
뿌옇게 물들은 하늘 밖에
보이지 않았다
짚아 마당에 하늘을 보며 비를 기다렸다.
‘어!’ 비 냄새가...
오랜만에 맡았지만
이 향기는 분명히 비를 가르키는...
바람이 불었다.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뚝..뚝..
비가 왔다.
집에 돌아와
손을 밖을 향해 들어
오랜만에 느꼈다..
비를..
지금까지 쌓아온 어깨의 무게가
한 순간에
비와함께
휩쓸려 갔다.
오염된 하늘이 다시
맑아졌듯이
더렵혀진 내 자신도 비가 씻어줬다.
표현할 수 없는 자유가 느껴지고
나는 새가되어
숨을 깊게 쉬고
날개를 펴
날았다.
총 3연으로 시를 썼네요. 시에서 연은 산문에서 문단에 해당합니다. 1,2,3연의 길이가 안배가 필요해요. 이 시에서는 1연이 지나치게 긴 느낌이 듭니다. 시는 한 편의 긴 이야기를 함축된 시어로 담아서 내 놓아야 해요. 이 시에서 화자를 병든 새라고 표현했네요. 왜 병이 들었는지가 불분명해요. 이 시에서 굳이 찾는다면 ‘뿌연 연기, 하고 싶었던 일들을 못해서, 하늘이 뿌옇게 물들어서’에요. 2연에서는 ‘더럽혀진 내 자신’ 이라고 했어요. 읽는 독자는 계속 궁금할 거에요. ‘왜 그럴까?’ 하고요. 시는 함축된 시어로 표현되지만 시 안에서 명확히 해석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주어야 해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비’가 갖고 있는 상징적 의미도 명확히 제시되었으면 합니다.
도이 오케스트라(도이 인타논)
눈을 감고 들어봤다
새들의 아름다운 스트링 색션
곤충들의 끽끽거리는 크라리넷 연주
동물들의 우렁찬 트럼펫 연주
바람의 시원한 플롯소리
마른 나뭇잎이 밟히는 드럼 소리
누구의 지휘를 받는 듯
서로 딱딱 맞는
자연의 오케스트라...
그 오케스트라와 함께
나는 연주하고 싶다.
자연에 있는 재료들을 오케스트라에 환치시킨 것은 매우 좋았어요. 자연물의 특성과 어울리는 악기를 잘 골랐네요. 한가지 아쉬운 점은 맨 마지막 시구에요. 자연물을 오케스트라의 소리로 환치할 정도라면 ‘나’와 ‘자연’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인데요. ‘나는 연주하고 싶다’라는 것보다는 그 연주와 하나가 된 나의 모습을 표현하면 더 좋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나라, 대한민국
- 중2, 강지민
나는 태국에 와서 한국이 창피할 때도 있지만 자랑스러울 때가 더 많다. 한국의 K-POP, 드라마, 화장품, 물건 등은 어디를 가든 듣고 보고 쓸 수 있다. 내 친구들은 K-POP을 전부 좋아한다. 그리고 이곳 문구점이나 가게 같은 곳의 물건은 대부분이 한국산이다. 백화점과 대형마트에는 한국드라마 CD와 화장품, 음식은 매우 대중적이고 인기가 많다. 한국의 삼성, 스킨푸드, 에뛰드하우스, 미샤, 탐앤탐스, 농심, 오뚜기, 롯데 등 여러 인기 브랜드로 한국 제품들이어서 가끔씩 괜히 뿌듯해지기도 한다. 게다가 한국 제품들은 성능도 뛰어나고 포장도 예뻐서 가끔씩 내가 한국 물건을 쓰면 친구들이 궁금해 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예전에 한국에서 사온 옷을 입었는데, 그때 친구들이 “와, 지민아 그 옷 어디서 샀어? 진짜 예쁘다.” 라고 해서 정말 뿌듯했다.
한국의 드라마는 태국어 버전으로 태국 티비에 방영될 때가 있다. 또는 한국 예능이나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웹사이트에 올린걸 보는 사람들도 많다. 내 주변의 외국인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방영하는 예능인 ‘런닝맨’을 봤다. 나의 태국어 과외 선생님도 런닝맨을 즐겨보았고 나의 친한 친구들, 우리 엄마의 가게 종업원들, 심지어 우리 동네의 구멍가게 주인분도 매일 한국 드라마를 본다. 드라마와 브랜드만 인기가 많은 건 아니다. 한국의 대중가요, K-pop이라고 불리는 한국 노래는 장르도 다양하고 멜로디, 춤의 종류도 다양해서 중독성이 아주 강하다. 노래 뿐 아니라 아이돌가수, 혹은 댄서도 유명하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싸이와 빅뱅, 소녀시대 같은 아이돌을 많은 외국인이 알고 사랑해 준다. 한 번은 내가 너무 좋아하는 가수의 사진을 소셜네트워크에 올렸는데, 외국인친구들이 누군지 알고 있어서 놀라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특히 한국 음식인 김치나 김밥은 정말 자랑스럽다. 맛있고 영양가 있기로 유명한 김치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먹고 많은 일본식당에서 기무치로 바꿔 내놓을 만큼 맛있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식당에서 한국의 음식을 따라한다고 화를 내지만 나는 오히려 자랑스럽다. 이미 세상이 김치는 한국 음식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일본음식이라고 오해할 이유가 없고 따라한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음식을 인정하고 맛있다고 생각해서 그런거라고 생각하면 나는 김치가 더더욱 자랑스럽다. 한국의 라면은 나의 친구들 집에 기본적으로 있다.
외국인 친구들을 한국인 부모님들이 매우 엄하다고 알고 있다. 매일 친구들이 놀자고 할 때, “미안, 한국 (문맥으로 볼 때에는 ‘집에’가 아닐까요?) 에 가야해서…….”라고 하면 “역시 한국인”, “으휴, 한국인 범생이들” 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도 성적은 한국인들이 꽤 잘 나오는 편이어서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을 공부 괴물로 본다.
한국의 영화 또한 태국의 영화관에서 볼 수 있다. 이렇게 내가 한국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이유는 많다. 하지만 가끔씩은 창피할 때도 있는데, 그럴 때는 딱 두 가지 이유다. 한국인이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떠들때와 욕을 할 때 이다. 내가 봐도, 아니 나도 가끔 친구들과 시끄럽게 떠들어 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항상 미안하고 창피하다. 나의 외국인 친구들은 한국 욕을 매우 잘한다. 학교에서도 외국인들이 한국 욕을 쓰는 걸 들을 때가 많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욕을 많이 한다는 증거이다. 만약 한국인들이 개념있게 행동해서 공공장소에서 조용히 하고 욕을 자제해 준다면 한국의 이미지는 점점 더 좋아지고 더더욱 사랑받는 나라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은 나의 자신감의 근원이자 자랑거리이고 가장 사랑하는 조국이다.
태국에서도 한류문화가 그렇게 크게 영향을 주고 있다니 한국 사람의 한 사람으로 선생님도 매우 기분이 좋네요.
[중학교 3학년]
죽음의 세상
중3학년 이름 : 김주옥
“쨍그랑”
옆 집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또 시작이었다. 그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살 동생인 남깽이 한 살짜리 남동생 이끼우를 엎고 우리 집에 온 것이었다. 남깽은 간절한 목소리로 우리 집에 있어도 되냐고 물어보았다.
설명을 안 해도 나는 알았다. 남깽의 엄마는 살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분이셨다. 하지만 그의 아빠는 남깽의 엄마가 열심히 번 돈을 갖고 술만 마시고, 낚시 다니면서 도박하러 다니는 분이셨다. 남깽은 한 밤 중에 싸우기만 하는 부모 밑에서 살고 있었다. 부모님이 싸우기만 할 때 나에게 오는 남깽을 보면 너무 안쓰러웠다.
나와 남깽은 어렸을 때부터 아는 사이였다. 방학이 되면 남깽은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자기도 하였다. 같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인형 놀이랑 소꿉장난을 자주하였다. 내가 심심할 때는 담을 넘어서 남깽 집에 놀러 가기도 하였다. 내가 갈 때마다 그의 엄마는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태국 음식도 해 주시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놀러 오라고도 하셨다.
더운 시절이 되면 남깽이랑 나는 마당에서 뒹굴며 깔깔 웃으면서 물놀이하는 걸 좋아했다. 심지어 비가 오는 날에는 재빨리 나와서 같이 그 비속에서 춤추며 뛰어 놀기도 하였다. 엄마랑 싸우면 나는 옆집으로 가서 남깽에게 내 슬픔을 털어놓았다. 고민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서로 고민 상담을 해주었다. 남깽이 자기 아빠 때문에 우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남깽은 내 모든 비밀을 알았고, 나도 남깽의 모든 비밀을 알았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우정은 끊을 수 없을 만큼 강해져 갔다.
내가 6학년 때였다.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내 가방을 던지고 담을 넘었다. 남깽이 마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남깽이 나를 환영하기는커녕 뜨거운 햇볕 아래서 꽃들만 바람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남깽의 집은 은근히 조용하였다. 나는 조심조심 집 앞으로 걸어갔다. 매일 열려있던 창문들이 닫쳐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현관문 앞에 있던 신발들이 없었다. 이곳에 올 때마다 세워져 있었던 오토바이도 없었다. 먼지들만 뒹굴고 있었다. 겁이 나는 마음에 식은 땀이 나기 시작하였다. 나는 문고리를 잡았다. 보통 열리는 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믿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문을 힘껏 흔들었지만 열리지 않았다. 나는 집 주위를 뛰어다니며 창문을 두드렸다. 남깽은 아무 말없이 이 집을 떠난 것이었다. 이렇게 아무 말 없이 나를 떠난 것이었다. 여름 방학 첫날부터 아무도 없는 집 앞에서 울기 시작하였다.
일 년이 흘러갔지만 그 친구에 대한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비가 올 때마다 남깽이 생각이 났고, 물놀이 할 때마다 남깽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옛날에 갖고 놀았던 인형들을 볼 때 남깽이 생각났다. 한 번도 울리지 않는 전화를 보면서 하루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더운 사월이었다. 나는 더위와 싸우며 선풍기 앞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 때 전화가 울렸다. 받는 순간 나는 당황하였다. 자주 듣던 익숙한 목소리, 바로 남깽이었다. 그 다음 날 나는 바로 남깽이 사는 곳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좋은 곳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골목 깊이 들어가 있는 마을로 다 떨어져 나가는 집에서 살고 있었다. 집 안에는 침대도 없고, 싱크대 위에는 더러운 그릇들이 쌓여 있고, 술 냄새가 온 방 안에 가득하였다. “나는 이런 곳에서 일 년을 지냈다.”는 남깽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남깽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으며 내가 너무 많이 보고 싶었다며 꼭 안아 주었다.
그 이후로 나는 매일 남깽에게 놀러 갔다. 우리는 일 년 동안 못했던 이야기들과 추억을 다시 쌓기 시작하였다. 남깽은 돈이 없어서 학교도 그만 두게 되었다고 한다. 남깽의 엄마는 피멍이 든 얼굴에 매일 일하러 나가셨다. 남깽의 아빠는 그의 엄마가 열심히 버는 돈을 마구 쓰는 게 모자란 지 남깽의 엄마를 때리기까지 한다는 말을 들었다. 싸움은 더 심해지고 돈은 계속해서 더 없어지고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서인지 남깽의 모습은 더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어느 날 한 밤중이었다. 전화가 울려서 피곤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남깽이 지금 당장 집으로 오라면서 전화를 끊었다. 나는 황당한 마음으로 엄마를 깨워서 남깽 집으로 향하였다. 남깽 집 앞에는 큰 나무가 있었다. 놀러 올 때마다 그 나무 밑에 누워서 함께 웃으며 놀았던 기억이 생각났다. 하지만 그 나무 가지에는 줄이 바람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왜인지 검은 그림자가 그 나무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의 엄마는 남갱 옆에 누워 있었다. 이키우는 구석에서 자고 있었다. 나는 조심히 다가갔다. 남깽 엄마의 손을 잡았다.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 때 남깽이 말했다.
“우리 엄마가 집 앞에 있는 나무에서 목매달아 죽었다. 아빠는 싸운 뒤에 나가더니 안 돌아 오셨어, 결국 엄마랑 아빠는 나랑 이키우만을 두고 떠났어. 심지어 엄마는 엄마 배 속에 있는 내 동생까지 죽였어. 죽을 거면 혼자 죽지. 왜 죄 없는 내 동생까지 죽였을까? 비겁해! 비겁한 세상이야! 죽고 싶어,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나은가봐”
이것이 바로 태국의 현실이다. 살기 위해 힘들게 살지만 결국 죽음을 택하는 태국의 현실이다.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를 위해 조용히 기도해 본다.
주옥이가 함께한 친한 태국인 친구의 불행한 이야기를 읽고 선생님도 너무 속상했어요.이러한 태국의 현실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요? 거창한 차원이나 방법이 아니라도 주옥이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해 보면 더 좋은 글이 될 거에요.
나를 바꾼 사람
중3학년 이름 : 박선민(다니엘)
나는 1999년 8월 16일, 광주의 한 병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이시고 어머니는 고등학교 선생님이신 부유한 집에서 자랐다. 우리 가족은 2001년 코이카 국제 의료 선교사로 3년 동안 방글라데시에서 있었다. 한국에 있었을 때는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큰 아파트, 차도 여러 대 등, 편한 생활을 항상 누리고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반에서는 반장도 여러 번 하였고, 성적도 좋아 우등생이라고 불렸다. 내가 운동은 못해도 장난감과 게임이 많이 친구들도 많았고, 심지어 초등학교 때에는 여자 친구도 있었다.
어느 날, 초등학교 3학년일 때, 동네에서 새로 생긴 키즈칼리지라는 영어 학원이 있는데, 아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들, 아빠하고 엄마는 방글라데시에 일 주일 동안 갔다 돌아올 것이니까, 너는 할머니랑 잘 지내, 말 잘 듣고!”
그 때 나는 방글라데시가 초등학교 1학년에 갔던 유럽처럼 부자나라로 알았기에 “아빠, 선물 많이 사와!”라고 하고는 일주일을 기다려야만 하였다.
그런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오시지 마자, 의료 선교사로 방글라데시에 가기로 결정되었고, 그 후 훈련 등으로 인해 학교를 총8군데나 옮겨 다니게 되었다.
방글라데시에 가니 할 말을 잃어 버렸다. 거지들이 차를 포위하고 있고, 물이 노란색이었으며, 습도가 90%, 40도인데 전기는 하루에 적어도 3번 정도는 나가 나를 미치게 하였다. 방글라데시에서부터는 검소하게 사시려는 부모님이 너무 못마땅하였고, 나의 정체성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우선 학교를 결정해야 했다. 방글라데시에는 국제 학교가 5개 있는데 그중 3개는 국회의원 아들과 같은 부자들이 다니는 데라서 비용이 많이 들어 나머지 2개를 알아보기로 하였다. 하나는 Grace Internation School(그레이스)로 선교사 자녀 학교이고 또 하나는 에벤에셀 학교였다. 먼저 에벤에셀 학교를 가 보았더니 한 선생님이 나에게 질문 하나를 물어 보았다.
“What‘s your name?”
나는 학교 교과서에서 보았던 것이라서
“My name is Daniel”이라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그 뒤 질문부터는 뭐라고 하는지 못 알아들어 얼굴만 빨개져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인터뷰 시험이 다 끝난 뒤, 교장 선생님께서 3학년을 낮추어 들어가야만 한다고 조언을 해 주셨다. 우리 아버지도 괜찮다고 하였지만, 교장 선생님이 단 월반을 못한다는 말을 듣고, 이 학교는 포기해야만 했다.
다음, 그레이스로 갔다. 선생님께서 ‘한국에 대한 글’을 쓰라고 하여 김치, 김밥, 몇몇 단어를 쓰고 하얗게 제출했는데 통과하지 못했다. 나는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턱관절 장애 에, 살이 찌고, 성격이 소심해지는 등 여러 증상으로 심각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어쩔 수 없이 영어를 쓰는 현지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선생님은 다 방글라데시 선생님이었고 발음이 아주 좋지 않았다. 학생들은 방글라 언어만 써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하였다. 책은 주었지만 하나도 몰라 영어 시험에서 0점을 받았다. 나는 친구들이 놀랄 정도로 펑펑 많이 울었다.
학교가 끝나고 영어 선생님인 미스 사미나가 나보고 잠시 오라고 하였다. 그리곤 교장 선생님과 이야기를 해서 시험 점수를 A를 주고, 앞으로 시험도 다른 걸로 내주시겠다고 하였다. 매일 학교가 끝난 뒤에 천천히 영어를 설명해주고, 문제집도 만들어 주셨다. 항상 격려와 칭찬을 해 주셨고, 내가 대범해 질 수 있도록 도와 주셨다. 그 선생님은 인도에서 오신 분이셨는데, 기독교인이셨다. 나는 우리 학교에서 학생들 중에는 유일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학교가 끝난 뒤 항상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울어 주셨다. 나는 그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것들을 차근차근 복습하고 외우기 시작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반 전체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써오라고 하셨다. 주제는 ‘곰과 남자 아이’였는데 나는 어떻게 써야 할 줄 몰랐다. 그래서 선생님께 물어보았지만 “이번에는 너 혼자 해보라”고 용기만을 주셨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의 연필이 가는 데로 쓰기 시작하였다. 후에 나의 이야기는 점수가 매겨졌고 나는 100점을 맞았다. 그리고 선생님이 써주신 코멘트를 읽게 되었다.
“다니엘아, 너의 이야기 점수는 C지만 너의 노력 점수는 A+이므로 100점을 주었단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여라!”
이런 격려의 말이 쓰여 있었다.
그 후 나는 더 열심히 공부하였지만 그레이스 입학시험에서는 3번이나 떨어졌고, 마지막이라고 하면서 시험을 본 것이 합격되어 드디어 그레이스 입학시험을 통과하게 되었다. 전학을 가게 된 나는 미스 사미나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가르침에 감사하여 선물을 드리고 그레이스 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런데 그 학교에서는 가자마자 하나님의 은혜와 미스 사미나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전교 1등을 차지하게 되었고, 학생회장까지 되기도 하였다.
지금 나는 안식년으로 치앙마이에 있는 그레이스 국제학교에 다니지만 항상 나는 미스 사미나와 방글라데시 그레이스 학교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나의 서랍에는 내가 썼던 일기와 이야기가 아직도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읽어보면 웹툰보다 10배 더 재미있다. 비뚤비뚤한 글씨로 문법 등을 상관하지 않은 자유로운(?) 글들이 나의 삶에 기쁨과 그리움을 준다. 이 학교에서도 예전에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친구가 있는데, 부족한 나이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방글라데시 그레이스 학교를 다닐 때 한 번은 인도를 갔었는데 거기에서 미스 사미나와 똑같은 아줌마를 보게 되었다. 나는 택시를 타고 있었지만, 양해를 구한 뒤 택시에서 내려 그녀의 얼굴을 한 번 자세히 보았다. 하지만 인도가 얼마나 큰 나라인데 그냥 얼굴이 비슷하게 생긴 아줌마였다. 아줌마가 당황하셔서 속에서는 웃고 큰 소리로 미스 사미나가 나에게 한 것처럼 “나아스테”라고 하였다. 얼마나 그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이 많았으면 그런 경험을 했을까 생각이 되었다.
지금은 비록 사미나 선생님께서 어디 계시는지는 모르지만 나의 마음에는 여전히 그 선생님의 온기와 따뜻함이 존재한다.
중3 학생인데도 글을 짜임새 있게 잘 썼네요. 잘 읽어보았어요. 좋은 글은 글의 내용에 적합한 글의 전개방식을 잘 선택할 때 이루어집니다. 선민이의 글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의 성격에 맞게 인과의 방식이 잘 선택되었네요. Good!!
태국에서 배운 문화
중3학년 이름 : 기우석
2007년 6월 8일, 우리 가족은 한국을 떠났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당황했던 저희 가족은 적응에 힘들겠다고 생각하였지만 곁에 계신 아빠 덕분인지 금방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타지에서 새로운 문화에 대해 배워가면서 차근차근 성장해 가던 우리 가족은 이제 이 나라 태국이 타지가 아닌 나라가 되었고 누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태국 치앙마이라고 할 정도로 이곳에 적응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태국치앙마이에서 7년이라는 세월을 살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면서 살아 왔습니다. 백일장을 쓰는 날이 되면, 그동안은 제가 여기에서 7년 동안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써왔지만 오늘은 그 7년 동안의 느낀 점을 써보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햇빛이 쨍쨍한 날 화창한 날씨에 밖으로 나가서 도로를 두리번거리면 살살 불어오는 바람에 나무들이 살랑살랑 움직이는 모습과 동화책이나 영화에서나 나올듯한 들판에서 축구하는 아이들도 보입니다. 해가 머리 바로 위에 올라왔을 때 그 뜨거운 열기를 이기지 못하여 모두 함께 제일 가까운 집으로 뛰어 들어 갑니다. 몇 명의 아이들은 선풍기 앞에서 바람을 맞으면서 휴식을 취하고 몇 명의 아이들은 냉장고로 뛰어가 물을 마시기 시작합니다. 그 집의 부모님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시면서 간식 등 편한 공간을 만들어 주십니다.
이런 타지의 문화를 보고 느끼면서 문득 한국에서 생활하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한국에서 보기 드문 문화였기 때문에 외국 아이들의 문화 적응하는데 불편함과 힘듦이 좀 있었지만 친구들의 도움으로 문화뿐만 아니라 많은 외국 아이들과 친해 질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 있었으면 부모님의 기대와 다른 아이들과의 비교 때문에 공부에 더 집중하고 이런 자유와 한가함을 느끼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점점 공부만하는 학교생활이 되어가는 한국 학교이기에 이젠 외국 아이들도 한국인하면 공부를 잘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기 태국에서는 다양한 나라에서 온 아이들이 많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를 느끼면서 지낼 수 있습니다. 예전에 핀란드에서 온 아이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아 놀러간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도착하여서 음식들 중에 제 눈을 사로잡은 음식이 있었습니다. 바로 오징어로 만든 크림, 호기심으로 그것을 먹어보고 어려웠던 적이 있었는데 전 아직도 그 비린 맛이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런 식으로 공부가 우선이 아닌 친구들과 문화를 배우면서 저는 점점 한국인 보다 외국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살아왔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외국에서 살면서 한글과는 멀어지고 영어에 집중했던 전 허겁지겁 영어를 배우고 저희 반 아이들과 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은 좋은 친구들이였지만 사고뭉치들과 친해져서 저의 첫 3년은 장난꾸러기란 말 그대로 사고뭉치였습니다. 하는 일마다 문제를 일으키고 선생님께 불려 가기도 하였지만, 외국 문화에 완전 적응한 저는 저의 선생님들과 정말 친한 사이가 되었기에 혼난다 해도 저는 그렇게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채 마치 어른들을 친구인 양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어른들과 친구들과 누나, 형들을 확실하게 나누지만 여기 국제학교에서는 많이 다릅니다. 선생님은 수업할 때는 한국처럼 줄을 긋고 대하시며 선생님과 학생으로 구별을 하지만 일단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들은 우리를 친구처럼 대하시고 말도 편하게 하셔서 친해지기가 쉽습니다. 저의 수학 선생님의 경우 이제 50세이지만 우리를 아들처럼 편하게 대해주시는데 어떤 때는 마치 형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런 외국 문화를 느끼면서 마음에 한가함이 생기고 한국과는 다른 새로운 문화도 배우고, 공부의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나만의 자유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여기 태국 치앙마이에서 계속 공부할 것이고, 여기에서 사귄 친구들과의 우정을 더 쌓아 갈 것입니다. 미래에 우리가 다 흩어져 살게 되어도 지금 이 때처럼 친하게 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태국에서의 햇볕과 날씨, 그리고 다른 문화들을 배우며 만들어진 많은 추억들은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백일장 심사위원으로 있는 선생님은 우석군의 글을 어린 시절 때부터 읽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금 글을 읽으면서 많이 성장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주제에 대한 일관성있는 글과, 글의 짜임새와 적절한 어휘 선택이 매우 좋습니다. Good!!
한국행 티켓
중3학년 이름 : 이수정
태국에 온 지 3년, 3년 밖에 안 되는 시간이지만 그 짧고도 긴 시간동안 나의 생활 방식부터 먹성, 생각 모든 것이 한국에서와 다르게 변하였다. 처음 태국에 왔을 때에는 그 사소한 냄새까지 어색하고 낯을 가리기도 하고 모든 것에 불만 가득했던 나였지만,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맞았다.
태국의 화끈화끈한 날씨에 익숙해진 나는 20도만 되어도 부들부들 떨며 두꺼운 이불 2겹이나 덥고 자기도 하고, 신호등보다는 무단횡단이 자유로워서 그런지 쌩쌩 달리던 차가 저 앞을 지나가도 오금이 저리던 나였지만 이젠 신호등 보다는 무단횡단을 더 선호하고 오히려 당당하게 앞장서서 길을 건너가기도 한다.
또, 토요일 아침부터의 한글 학교행과 일요일 아침부터의 교회행은 주말에도 나를 꽤 아침형 인간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 3년이라는 시간동안 바뀌지 않고 항상 품고 원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여름방학 동안의 한국행이다. 태국에 오고 처음으로 맞이한 여름 방학 때에는 온지 별로 안 돼서 가지 않았고, 두 번째로 맞이한 때에는 한국행의 필요성을 못 느낀 엄마의 의견으로 한국행은 무산되고 말았다.
반년 전인 작년 6월, 세 번째로 맞이한 여름 방학이었다. 방학이 오기 6개월 전부터 나는 한국행을 기대했고 노래를 불렀다. 두 번째 여름방학 때 부모님께서 약속해 주셔서 그런지 나의 기대감은 컸고 혼자 김치국을 마셨다. 그런데 혼자 기대하고 김칫국을 마신 탓인지 그것을 보신 부모님은 내가 너무 속상해 하고 상심할까봐 세 번째 여름 방학 때에는 한국행 티켓을 사주신 것이다.
한국가기 2달 전부터 노트에는 코리아 또는 내가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들의 이름으로 꽉 차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집안에 있는 달력들, 핸드폰 달력에도 별표까지 쳐놓으며 적어 놓았다. 그리고 그 대망의 날이 되었다.
한 손에는 옷들과 가족 친구들에게 줄 말린 과일 봉지가 한 가득인 캐리어를 들고 한국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먼저 한국에 들어가셨던 엄마와 작은 삼촌이 나를 데리러 와 주셨다. 태국에 나, 아빠, 엄마, 이렇게 세 식구가 함께 사는 탓인지 한국에서 있는 동안 외할머니댁에서 생활해야 되었다. 할머니댁에 도착하니 항상 “우리 똥강아지 왔어?” 하고 마중나와 주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누나~!”하고 안아주는 7살 짜리 사촌 동생이 있었다. 나를 반겨주던 말은 똑같았지만 할아버지는 백발이 되셨고, 할머니는 살이 빠지셨고, 사촌 동생 민석이는 4살이었던 귀여운 동생에서 키가 커지고 조금 더 성숙해 진 7살 유치원 형님이 되어 있었다. 나만 3년 동안 바뀐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것이 나를 놀라게 하였고, 도 나중에 왔을 때 더 변해 있을 것들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비록 한 달이었지만 불편한 점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한국인들은 급하다’라는 인식이 있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그것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치앙마이에 와서 느린 태국 사람들을 보고 답답해 가슴을 치곤 하였다. 하지만 점점 ‘태국화’되며 태국 사람들 속도로 변하였다. 느림보의 단점을 한국에서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신호등을 건널 때였다. 한국 사람들의 발걸음이 어찌나 빠르던지 신호등의 초록불이 반도 안 되었는데 다 건너곤 하였다. 반면 나는 초록불이 거의 끝나갈 때 즈음 반 정도 왔다. 그래서 항상 마지막 반은 땀과 함께 뛰어야 했다.
한국에서 엄마와 나는 시간을 내서 해운대로 1박 2일을 여행을 다녀왔다. 한국에서는 부모님과 방학마다, 주말에도 가끔 놀러갔던 곳이 해운대다. 그래서 태국에 있을 때, 부산에서 불꽃놀이를 크게 열었던 적이 있었는데, 우리 가족 모두 아쉬워하며 한국 갈까 생각도 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 정도로 해운대를, 부산을 사랑한 나와 엄마, 아빠, 비록 아빠는 같이 오시지 못 했지만 둘이 온 것만으로 행복했고 감사하고 그리고 감회가 남달랐다. 밤바다를 보고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유명한 시장에서 호떡, 마약김밥, 전 등등 그동안 먹고 싶었던 것 모두 살쪄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마구 먹었다. 이것이 제일 기억이 많이 나고, 제일 행복했던 기억이 아닌가 싶다. 나에게 이런 한국행 티켓이 또 언제 주어지게 될까?
태국에서의 삶이 이제는 적응되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태어나고 자랐던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잘 드러나 있는 글입니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밑줄 친 부분이 내용 전달에는 조금 어색한 문장입니다.
[고등부]
어린 외교관 이윤기
나는 외국에 살면서 다른 한국 친구들하고는 달리, 서양 기숙사에서 4년 넘게 살았다. 한살 때 조국을 떠나 중국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6학년까지 가족이랑 지내면서 국제학교를 다녔다. 항상 집에서 한국어로 대화하고, 부모님의 한국적인 영향력 안에 자라 나는 당연히 정상적인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다 착각이었다, 만 12살이 되던 해, 부모님이 나를 치앙마이, 태국에 있는 국제학교에 보냈다. 나는 서양 기숙사 생활을 어린나이에 해야했다. 처음에는 많이 힘들고 어려웠다. 문화가 완전히 다른 서양인들과 살다보니 부딪치는 것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한국인은 나밖에 없었다. 한국인을 거희 접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나의 정체성과 한국어 능력을 유지할지 고민이 되기 시작됬다. 중학교를 가고 이제 고등학생이 되니, 차이가 확실히 나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 한국 친구들에 비해 말도 더 서툴고, 한국어 능력도 많이 떨어졌다. 절망감과 두려움이 나를 휩싸기 시작했다. 나는 자꾸 비교를 하게되었고, 자신감이 떨어졌다. 불편과 짜증이 많이 났다. 인생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과현 나의 정체성은 어디에 찾을 수 있는가?
하지만 이 혼란하고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던 상황 가운데에서 웃음과 뚜렷한 목적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다 나는 다른 한국애들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에 처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좌절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긍정적이게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나에게는 남들이 접할리 없는 특별한 기회들이 있었다. 기숙사에 있는 호주, 미국, 스위스, 뉴질렌드, 인도, 영국, 과 스코트렌드 사람들과 지내면서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가 있었고 세계를 보니 씨아가 넓어졌다. 나의 꿈은 국제 관계를 앞으로 전공하는 것이다. 나는 세계의 흐름에 관심이 많고, 이 복잡한 국제 사회속에서 대한민국이 어떻게 외교를 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관심이 있다. 오히려 서양/국제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한국인으로서 그들에게 한국 문화, 음식, 음악과 역사까지 말해줄 수 있었다. 현재 우리 기숙사에서 신라면, 김, 카레, 와 불고기가 인가가 많다. 한국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아낌없이 한국음식을 맛보게 했다. 이제, 모두가 한국 음식에 열광하고 있고, 더 달라고 할 정도이다. 나는 한국에 대한 좋운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가 있었다.
비록 다른 한국 친구들과는 다른 환경과 상황에 처있지만, 나는 이 속에서 긍정적이고 좋운 기회들을 많이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벌써 우리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를 보는 씨아와 관점이 확실히 넓어졌고, 다양한 문화들을 깊게 접하고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감사하고 하루하루가 기대된다. 왜냐하면 나는 매일 어린 외교관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윤기군이 꼭 외교관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할게요. 어른들 말씀에 외국에 나가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고 합니다. 고국에 있을 때에는 잘 모르다가 밖에 나가면 같은 민족끼리 한 땅에서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 수 있거든요.
아주 어려서 우리나라를 떠나서 인지 글의 구성이나 어법에서 많은 오류가 발견됩니다. 그러나 한 살 때 떠난 것을 고려한다면 어느 누구보다도 생각을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파이팅~!!!
두 가지의 세상 이은비
치앙마이의 낮에 숨을 들여 마신다
내위에 있는 더 태양은
눈을 밑으로 내리며 나를 깔보듯이 쳐다본다
오늘 따라 유난히 폭력적인 태양은
내 살갖을 델 정도의 햇볕을 뽐낸다
태양아 태양아, 참 미운 태양아
넌 뭐가 그렇게 싫어서
뭐가 그렇게 언짢아서
너의 불타는 빛 줄기로 나를 힘들게 하니?
①하지만 계속 되는 태양의 햇빛이 비치면
나의 솜털은 뽀얗게 빛이 나고
②데인 살에서는 땀이 뚝뚝 쏟아진다
→ 9행까지는 나를 힘들게 하는 작열하는 태양을 얘기했다면 ①에서 ‘하지만’ 이라는
시어 선택의 의미에는 10행~12행은 태양으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은 것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11행에서는 다시 힘든 상황으로 표현했잖아요.
치앙마이의 밤에 숨을 늘여 마신다
또 몇 번째인 지겹고 또 지겨운 장마
주홍빛 등불을 품은 저 푸른 빛 검은 하늘에서
내 마음처럼 짠 눈물이 쏟아진다
하늘아 하늘아, 밤 하늘아
너는 뭐가 그렇게 싫어서 뭐가 그렇게 슬퍼서
계속 눈물을 흘리는거니?
→ 시에서 물어 보았다면 이에 대한 답을 시 내용 전체에서 유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빗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곤충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아 저놈의 벌레들은 쉬지도 않나
계속되는 오열과 제곡 안에
뜨끈뜨끈했던 공기와 내 몸이 식어간다
못난 태양의 손길이 다시 나를 유혹해오면
나는 다시 나가 이를 맞이하려고
또 이별을 해 슬픔에 잠긴 밤 하늘과 만나면
함께 태양을 욕하며 눈물을 흘려준다
이 두가지의 세상의 중심에 서있는 나
양쪽에서 팔을 당겨 나를 가지려고 한다
하지만 오늘이나 내일,
혹은 내일을 넘는 미래에서도
나는 이 두가지의 세상에 같이 존재한다
은비가 쓴 시 잘 읽어 보았어요. 시는 짧게 표현하는 글이지만 긴 이야기를 담고 있어야 합니다. 그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려는 의도가 있어야 해요. 이 시에서는 태국의 낮과 밤사이서 내가 겪는 갈등을 표현해 주고 있어요.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을 안고 가야하는 나의 마음이 잘 담겨있지만 낮의 해에 비해서 밤은 묘사나 설명이 지나치게 적은 것이 좀 아쉽네요.
너는 어디서 왔니?
이은비
어떤 한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서 왔니?’
나는 당당하게 답했다
‘한국에서요’
그리고 나는 떠났다,
유치원에서 초딩으로
뽀로로에서 포켓몬으로,
한국에서 중동으로.
어떤 한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서 왔니?’
나는 당당하게 답했다
‘Korea.’
그리고 나는 떠났다
초딩에서 중딩으로
포켓몬에서 연예인으로
중동에서 태국으로
어떤 한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서 왔니?’
나는 대답했다
‘음 그게요…’
그리고 나는 떠났다
중딩에서 고딩으로
꿈속에서 현실로
빛속에서 어둠으로
하지만 나는 돌아간다
빛속으로
꿈속으로
포켓몬, 그리고 뽀로로로
나는 돌아간다, 한국으로
어떤 한 사람이 나에게 묻는다
‘너는 어디서 왔니?’
나는 당당하게 답한다
①‘한국에서요’
이 시는 운율(=리듬)이 살아있고 내용도 잘 전달이 되네요. 다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맨 마지막 연이에요. 여러 곳을 거쳐 태국에 와서는 ‘나는 돌아간다’ 하고 화자가 최종 지향하는 곳이 제시되었잖아요? 이것을 강조하려면 맨 마지막 행은 ‘태국에서요’하고 얘기하면 현재 내가 있는 곳과 함께 최종 목적지로 제시된 ‘한국’이 강조되어진답니다.
내가 다니는 치앙마이 한글학교 장지민
오늘 이번 교내 백일장 대회를 통해 제가 다니는 한글학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많은 주제중에 한글학교로 주제를 정한 것은 아마 제 마음 속에 좋은 추억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 한글학교를 다녔을때는 한글학교에 대해 불만만을 표현했었습니다. 내 늦잠을 빼앗고, 시간을 빼앗고, 지루한 토요 오전이었었습니다. 하지만 2년이라는 꾀 오랜시간을 지내면서 생각해보니 받은 것도 많고, 장점도 셀 수 없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중 한가지 이유는, 좋은 선생님들과 좋은 학생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외국 생활이 한국 생활보다 몸에 베인 사람도 많을 테지만, 외국에 사는 같은 국적을 가진 한국사람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더 이해하고, 또 그러다보니 더 친근하고, 더 빨리 친해질 수 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선생님들도 자기 시간을 희생하며, 열정과 사랑으로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들 때문에 한글학교가 더 빛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한글학교에 또 다른 장점은 여러가지 활동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기 대회, 토론 대회, 독서 기록장, 역사캠프, 백일장 등 수많은 활동을 통해 글쓰기를 배우며, 말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예를 들면, 평소에 글쓰기를 싫어하던 제가 운이 좋게 치앙마이 한글학교에서 열린 말하기 대회의 대상과, 평소 말하는 것에 대해 자신 없어 하던 제가 또 운이 좋게 토론 대회에서 우승 하는 것을 보며, 자신감을 가지게 되고, 관심을 가지며 다니게 된 것 같습니다. 준비과정을 통해, 또 한글학교를 통해, 말하는 법을 배우고, 쓰는 법, 역사 또한 여러가지 필요한 지식들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은 외국에 사는 한국 친구들에게 애국심을 심어주며, 한국어의 중요성을 깨우치는 곳에 중요한 중심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한글학교를 통해 더 멀리 바라보고, 더 넓게 바라보는 나를 만들었습니다.
글 잘 읽었어요. 지민이 덕분에 한글학교가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알게 되었어요. 대개는 어떤 것에 대해 쓸 때에 장점과 단점을 균형있게 써야 된다는 생각을 갖기 쉬어요. 글은 하나의 주제에 대한 나의 태도를 하나 정해서 구체적으로, 때로는 다양한 관점과 방법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 제일 좋아요. 이런 면에서 보면 지민이의 글이 매우 좋습니다.
깁고 깁게 알아가는곳 (깊고 깊게 알아가는 곳)
김혜미
많은 학교가 그러다 싶이 학년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수업은 어느 한 과목은 더 깁이 깁이 알아가고 배우게 되 우리들의 지식이 더 싸여간다. 한글학교도 그런 학교들 중 하나다. 주중에 다니는 국제학교 그리고 토요일 아침에 다니는 한글학교. 두 학교는 다니면 다닐수록 더 많은 지식이 싸여가고 더 많은 것을 알아간다. 하지만 한글학교는 국제학교랑 다른 것이 있다면 한글학교에서는 한.국.어.로 공부를 한다. 태국 치앙마이에 살고 있는 우리, 그래서 어디를 가던 태국어로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해야하고 또 학교가 국제 학교이기 때문에 아무리 한국친구들이 많고 한국학생들이 많아도 영어로 공부를 하고 영어로 많은 과목을 공부한다. 그래서 한글학교가 많은 변화를 준다. 국제학교에서도 많은 것을 배우고 깁게깁게 알아가지만 한글학교에서는 한국말로 많은 것을 배워간다. 한국에서 공부한 적이 많이 없던 나는 한글학교에서 국어나 역사를 배우고 알아가는 것도 새롭고 좋지만 이것들은 한국말로 배운다는 것이 새롭고 좋다. 한글학교에서 배우는 국어는 거이 영어로 배우는 것과 주제는 똑았다. 하지만 한국어로 배우고 영어로 알던 단어들은 한국 단어로 배우는 것을 알아서 좋았다. 또 한국어를 더더욱 알아가고 깁이 알아가는 것이 정말 새롭고 좋았다. 음운을 배우고, 품사를 배우고 많은 것은 배우면서 나의 조국의 말과 단어를, 국어를 배워 나갈 때 참 좋다. 또 역사를 배울때도 많은 것을 배우고 한국의 역사를 배울 때 내가 모르고 있는 작은 역사와 배우지 않으면 모르는 역사를 배워나가는 것이 좋았다.
토요일에 오는 한글학교는 다른 학교에 비해 많이 짧고 과목들도 많이 없지만 한글학교에서는 한국어로 배우기 때문에 주중에 다니는 학교랑 똑같은 것을 배운다 할 수 없다. 주중에 배우는 학교는 미래를 위한 준비 이지만 한글학교는 내가 지금 살고 있지 않은 나의 조국에 대해서 한글에 대해서 더더욱 알아가는 곳이다. 한국에 대해서 더 깁이깁이 알아가는 한글학교.
혜미의 문장실력이 놀랍군요. 글을 읽어보니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니 말입니다. 몇 몇 단어가 어법에 맡지 않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정말 최고의 수준입니다. 한글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분명히 한글만이 아닐거에요. 같은 민족끼리의 만남도 있을 테고, 한국 문화에 대해서 배울 것이고, ... 또 무엇이 있을까요? 그 무엇을 가지고 써 보면 더 길고 의미있는 시간이 될 거에요. 너무 너무 수고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