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과(韓菓)는 한국의 전통 과자를 두루 일컫는 말이며 조과(造果)라고도 하며, 과정류(果飣類)로도 부릅니다. 주로 곡물가루나, 과일, 식용 가능한 뿌리나 잎에 꿀, 엿, 설탕 등으로 달콤하게 만들어 후식으로 먹습니다. 유과의 일종도 한과(漢菓)라 부르는데, 원래는 이쪽이 맞는 말이한과(韓菓)는 한국의 전통 과자를 두루 일컫는 말입니다. 조과(造果)라고도 하며, 과정류(果飣類)로도 부르고 주로 곡물가루나, 과일, 식용 가능한 뿌리나 잎에 꿀, 엿, 설탕 등으로 달콤하게 만들어 후식으로 먹고 서울의 예전 말이 한양(漢陽), 한강의 한자가 漢江 인 것과 마찬가지로 한과를 韓菓라 쓰기 시작한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고 합니다 유사 이래 문명의 발달 과정을 보면, 일단 먹을 것이 안정되면 입을 것을 찾고, 입을 것이 안정되면 살 집을 찾기 마련이며 특히 과자류는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인간의 특성상 쌀이나 밀 같이 주식을 만드는 재료와 여러 가지 재료를 이용해서 과자를 만들어 먹게 되었고 사회학적으로도 과자를 만든다는 것은 아직도 그날그날 먹을거리를 찾는 데 여념 없는 다른 이들과 달리, 자신은 남아도는 밥으로 과자도 만들어 먹고 분명한 계급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애초에 과자는 안 먹어도 생활에 지장이 없는 사치재니까 그것도 그럴 것이 어떤 종류의 과자를 만들든 떡을 치는 것 이상으로 쌀이 많이 필요하고, 하다못해 과자에 단맛을 내는 엿과 조청, 그리고 과자를 반죽할 때 흔히 쓰는 술도 죄다 쌀로 만든다고 합니다 가령, 조청 3 kg을 뽑아내기 위해서는 쌀 12 kg(!)으로 지은 고두밥과 보리 싹을 틔워서 숙성시킨 엿기름 1 kg을 섞어 하루 온종일 숙성시키고, 이튿날을 꼬박 불을 때서 졸여야 합니다. 여기에 드는 쌀값과 보리값, 연료비를 차치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일품이 드니 보통 사람들로는 엄두를 못할 지경이라고 합니다. 달달한 거 만들려고 몇 끼 밥을 없애는 기적 특히나 조선시대나 그 이전 시대엔 한 끼 식사량이 현대인들 이틀치 혹은 그 이상으로 많았고,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식사량이 더 많았기에 더욱... 다른 감미료인 꿀과 설탕도 근대 이전에는 아주 값비싼 사치품이었는데 설탕은 사탕무가 전래되지 않았던 데다가 사탕수수는 열대작물이라서 조선에서 재배가 불가능했기에 전량 중국이나 류큐, 일본 등을 비롯한 외국에서 수입해야 했고, 꿀은 자급이 가능했지만 대량생산되기 이전인지라 쌀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기타 잡곡과 견과류, 과일, 기름이 들어가기 때문에 양반들조차도 명절이나 제삿날에만 마음 놓고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왕조시대의 임금은 아침, 점심, 저녁, 밤으로 '다소반과'와 '다별반과'라는 다과상이 나와서 매일 먹었고 수라상의 후식으로 항상 떡과 과자를 올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궁중의 육처소(六處所)에서 생과, 전과(煎果), 다식(茶食), 죽 따위의 별식(別食)을 만드는 생과방(生果房)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들어서 그 해 작황이 좋지 않으면 술과 함께 제일 먼저 제조금지 목록에 올랐습니다. 그만큼 쌀을 많이 잡아먹기도 했고, 백성들이 고통받는데 사치를 경계하는 차원에서 한과의 제조를 금하여 민심을 위로한다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상술했듯 조선시대 및 그 이전 시대엔 한 끼 식사량이 현대인들 기준으로 이틀치 혹은 그 이상으로 많았으며, 특히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식사량이 더욱 많았고 이 때문에 한과는 한국 요리에서도 최고급으로 간주되어 제사나 명절 음식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당시의 고기와 해산물도 한과에 비하면 일상 음식으로 봐도 되었을 정도라고 합니다 물론 양반들이나 일개 고을의 사또들중 부정부패를 저지른 경우가 많았고, 그로인해 그들중에는 고작 자기 생일상이나 술안주에 한과를 올리는 엄청난 사치를 부리는 경우도 많았고 심지어 흉년으로 인해 국가로부터 한과 제조 금지령이 내려져도 일단 만들어 먹은뒤 후에 문제가 생기면 금지령에 대한 전달을 늦게 받았다는 식으로 대충 얼버무렸기에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흔히 한과는 튀기고, 지지고, 졸이는 3가지 요리법으로 구분됩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민간인 한정으로 튀김과자를 선호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과에 사용되는 재료는 주로 가을철에 나는 것들로, 서양식 과자나 일본의 화과자에 비해 달지 않은 것이 특징입니다. 사탕수수 재배가 가능한 류큐를 지배하에 두어 상대적으로 설탕을 구하기가 용이했던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기후 때문에 사탕수수의 재배가 불가능했던 데다가 사탕무도 전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설탕이 생산되지 않았고, 꿀 생산도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단맛을 보충하고자 사용한 엿과 조청은 오늘날 흔히 쓰는 물엿보다 싱겁습니다. 단맛에 길든 현대인의 미각으로는 조청의 단맛을 거의 못 느낄 정도로 전통 한과가 잊혀지고 있다고 말이 많지만, 정작 조상들 절대다수는 그나마 길거리 음식으로 어느 정도 대중화 된 엿을 제외한 나머지 한과를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었고 일부 종류는 먹기는커녕 구경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애초에 과자를 만드는 비법이나 요리법도 궁중과 양반가에서 내려오던 것으로 지배계급의 문화였을 뿐, 그것이 평민들에게까지 널리 보급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잊어버리기도 쉬웠다고 합니다 그나마 노비들은 주인을 잘만날경우 명절이나 제사때 주인으로부터 얻어먹을수도 있었지만 평민들은 양반 밑에서 일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그런것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인심좋은 양반들이 고을 주민들한테 나눠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인심좋은 양반들도 분배대상이 자기 밑의 하인, 노비까지가 전부인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더구나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들어가는 재료들 자체도 고급이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엄청난 양의 쌀이 소모됐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될 것이 분명하고 영조 임금 당시 귀한 쌀을 가지고 술 빚는 데 낭비한다며 금주법을 내려 엄중하게 다스렸을 정도인데, 필수식량도 아닌 기호식품에 불과한 한과를 만든다고 쌀을 낭비했다간 그야말로 바로 그자리에서 귀싸대기 맞을 일이라고 합니다. 하다못해 현대에도 엿을 제외하면 유밀과와 유과, 강정만 대중화 되었을뿐 다식이나 숙실과, 과편등은 유밀과나 유과, 강정과 달리 마이너한 편입니다. 심지어 당의 경우도 외국 과자들을 접하기 쉬워지면서 마이너해졌습니다. 그나마 정과의 경우 고급 한과의 대명사에 가까운 위치이긴하며 이는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인도나 유럽, 아랍권에 이르기까지 비슷했습니다. 상당수 과자들이 손으로 하나하나 만들기에는 굉장히 시간이 걸리고 힘이 많이 들기에 무지 비싸서 부자나 귀족층에서나 즐겨 먹곤 했습니다. 티타임 같이 달디단 과자들을 차와 즐기던 영국이나 유럽인의 이미지에 귀족 신사숙녀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것도 이런 이유였습니다. 그나마 중국에서는 대운하가 확장개통된 이후로 장강 이남으로부터 설탕을 손쉽게 나를수있게 되면서 이런류의 먹거리가 어느정도 퍼지기는 했습니다. 호떡이 대표적인 예로 만두마냥 속을 넣어서 주식으로 먹기도 하지만 안에 시럽을 넣어 간식용으로 먹기도 하는데 이러한 호떡이 구한말에 청나라로부터 전해지면서 지금의 호떡이 된것입니다. 갑오개혁 이후로 반상 구분이 사라지고, 평민들도 양반들 모양대로 제사를 지내면서 한과의 소비량은 늘었지만, 그들에게 한과는 양과자와 달리 평상시에 먹는 과자가 아닌 제사상이나 잔칫상에나 쓰이는 귀한 과자 정도로나 인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입니다. 아무리 서구화된 한국인이라도 외국에 나가있지 않은 한 제사상에 양과자를 올리지는 않고, 반상의 구분이 철폐되었다고 해서 한과의 생산량이 갑자기 늘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사실 한국에서 달콤한 과자류가 크게 발달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고려시대 불교의 융성과 함께 차 문화가 발달하고 차에 곁들여먹는 다과류도 어느 정도 발달하였으나, 조선시대에 숭유억불 정책이 이뤄지며 이런 문화를 사치스럽다고 여겨 기피하게 되었기 때문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차를 대체한 것이 유교의 제사에서 쓰이는 술이었는데 술은 다들 알다시피 이런 달콤한 과자가 아니라 식사류와 주로 마십니다. 그러므로 다과류가 주요 역할을 잃어버린 것이며 실제로 고려시대 기록에 남은 간식류를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도 없어서 이름으로나마 그 형태를 추측해볼 뿐입니다. 일례로 쌍화점에서의 쌍화는 흔히 알려진 만두가 아닌, 이슬람 문화권에서 넘어온 설탕을 사용한 디저트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한자로 '霜花', 서리꽃이라고 표기하기도 합니다. 사실 상술한 전통한과가 잊혀지고 있다는 문제의 경우도 다과의 발달로 전통과자가 잊혀지지 않는 곳들인 서양국가들이나 인도, 터키 등의 경우도 전통과자 보다는 인스턴트 과자를 더 선호하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에 이 국가들에 비해 다과류가 발달하지 않은 한국에선 전통한과가 인기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유럽처럼 빵이 주식인 문화권이거나 혹은 설탕을 생산할수 있는 문화권에서 조차 과거에 전통과자는 지배계층의 문화였는데 밀가루가 주식도 아니고 기후상 설탕을 생산할수 없는 문화권이엇던 고대 한국에서의 한과가 지배계층의 문화인건 당연했다고 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우리나라 전통 과자 한과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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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과
유과 (油菓, 영어: yugwa)는 한국의 전통 과자인 한과의 일종으로, 찹쌀가루를 적당한 모양으로 빚어 말린 후에 식물성 기름에 튀긴 다음 꿀이나 조청을 발라 튀밥, 깨 등을 입혀서 만든다. 유과는 제사에 과일 대신으로 밀가루와 꿀을 반죽하여 과일 모양으로 만들어졌으며, 기름에 지진 가과 (假果: 가짜열매)라 불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과의 모양이 점차 다양해졌다. 유과는 고려시대 이후 불교의 영향으로 널리 보급되었으여, 중국 원나라에서 '고려병' (高麗餠)이라고 불렸다
약과
약과(藥果, 영어: yakgwa)는 유밀과의 대표적인 종류로, 꿀과 밀가루, 물, 식용유, 술을 섞어 반죽하여 약과틀에 넣어 모양을 낸 뒤, 기름에 튀겨 낸 한국의 전통 과자이다중국 전국 시대의 노래인 초혼부(招魂賦)에 “거여(粔籹)와 밀이(蜜餌)에 장황(餦餭)도 있다.”고 하는 구절이 있다. 후한의 왕일(王逸)은 ‘거여’를 쌀가루를 꿀에 섞어 구운 것으로, ‘밀이’는 기장쌀을 꿀에 섞어 구운 것으로, ‘장황’을 엿(餳)으로 보았다. 명나라의 가산(可山) 임홍(林洪)은 ‘거여’를 밀면(蜜麪)을 말린 간로병(間爐餠)으로, ‘밀이’는 밀면보다 윤기가 더 있는 떡으로, ‘장황’은 한식에 먹는 한구(寒具)로 보았다. 이에 대해 이익은《성호사설》에서 ‘거여’는 밀면을 기름에 튀긴 후에 말린 박계(朴桂)와, ‘밀이’는 거여와 같은 방식으로 만든 후에 엿과 꿀을 덧바른 약과와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 약과는 이것의 전래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에는 고기와 생선을 올리지 않는 불교의 제례에서 약과가 그 대체품으로 이용되었으며, 약과를 과일뿐만 아니라 짐승의 모양을 본따 만들기도 하였다. 이에 관하여 정약용은《아언각비》에서 밝히기를, ‘약’은 ‘꿀’을 뜻하고, ‘과’는 과일 모양을 본땄던 원래의 약과는 높이 쌓을 수가 없어 네모꼴[方形]로 바꾸었는데 이름만 남아 전해진 것이라고 하였다. 약과의 다른 이름인 조과(造果)에 대하여《성호사설》에는, 처음에는 약과를 과일 모양을 본따 만들었으나 제사상에 올리기 어려우므로 넓적하게 끊어 자르기 시작하였지만 이름은 그대로 남았다고 적혀 있다. 이수광은《지봉유설》에서 밀과(蜜果)를 약과라고 하는 이유는 밀(麥)은 네 계절의 정기를 모두 받아 익고, 꿀은 모든 약 중 가장 좋으며, 기름은 벌레를 죽일 수 있어 약과 같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고운 체로 거른 밀가루에 참기름을 넣어 반죽한 다음, 생강즙·술·꿀·계핏가루를 넣어 다시 반죽한다. 이것을 약과라고 하는 꽃 모양의 나무틀(약과판)으로 눌러 모양을 낸 뒤 기름에 튀긴다. 약과는 섭씨 165 ~ 170도 기름에서 천천히 튀긴다. 이때 온도가 낮으면 약과의 모양이 흐트러지며, 온도를 너무 높게 하면 태울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겉이 갈색으로 적당히 익으면 꺼낸 뒤 기름을 빼낸다생강즙, 계핏가루, 후춧가루를 섞은 꿀이나 조청에 담가 속까지 배어들도록 한다. 이후에 잣이나 참깨와 같은 다양한 장식이 뿌려진다.
옥춘
옥춘당(玉春糖) 또는 옥춘(玉春) (문화어: 색구슬사탕)은 쌀가루로 만든 한국 전통 사탕이다. 동글납작한 빨간 사탕을 흰색, 노란색, 초록색 등 여러 빛깔로 장식해 만든다.제사상이나 환갑잔치상 등 큰상을 차릴 때 올라가는 음식이다. 한자 그대로 아름다운 구슬과 화사한 봄의 분위기가 모티브로 떠오르는 사탕이다.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탕으로, 현재 나오는 물건은 대개 쌀가루나 엿 대신 물엿에 설탕을 반반 섞어 만든다. 박하향을 넣거나 깨를 넣는 등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존재한다. 돌잔치, 회갑, 전통혼례 등의 큰 잔치나 제사상에 올라가는데, 알록달록한 모양으로 높은 원기둥을 쌓아올리는 과자 중 하나가 장식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다. 때문에 전통 방식의 돌잔치나 혼례식, 제사를 진행하면 옥춘을 나눠먹기도 한다. 서양에서 크리스마스 트리에 다는 빨간 줄무늬의 지팡이 사탕처럼, 어느 정도 장식용 목적이 있는 사탕이다사탕의 색동무늬는 색을 입한 엿가락을 여러가닥 겹쳐 둥글게 밀어낸 후, 지름방향으로 잘라낸 것을 납작하게 눌러 생기는 것이다. 흔히 무늬가 들어간 쿠키를 만들 때의 성형방법과 같다. 때문에 같은 방식으로 만든 색동무늬 떡 등을 옥춘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맛은 재료를 보면 알겠지만, 단맛만 날 뿐 보통 밋밋한 편이다. 2000년대 들어 나오는 옥춘당은 그냥 맨설탕으로 하지 않고 박하향료를 넣어 박하사탕으로 만들어 나오는 것도 있다. 하지만 박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박하가 없는 버전을 더 선호한다. 사탕류가 그러하듯이 그다지 건강엔 좋지 않다. 과거 식품위생에 대한 규제가 희미했을 때는 유해한 색소를 넣는 등의 문제도 있었다. 오늘날에 나오는 옥춘도 식용 색소를 사용해 안전하지만 색소가 꽤 많이 들어가는 편인지라 먹고 나면 입 속이 빨갛게 물드는 경우가 많다. 순수 천연 색소를 사용한다고 해도 사탕의 특성상 혀나 입에 다소 물들 수 밖에 없긴하다전통 방식으로 제조한 옥춘은 매우 단단하다. 일반적으로는 망치로 깨서 작은 조각을 낸 다음 녹여먹거나, 통으로 빨아서 혹은 핥아서 녹여먹는다. 전술했듯이 예쁘장하고 알록달록한 생김새 덕에 단순 장식용으로도 가치가 있다. 사탕 특성상 오래 놔둬도 쉽게 안 상한다는 점도 나름의 장점이다 먹을것 자체가, 특히 과자류는 아주 귀했던 1960~1970년대에는 시골에서 제사나 차례 지내고 나면 어린 아이들의 주 타깃이었다. 일단 고기 종류는 어른들 상에 먼저 올라가니 입만 댈 수 있어도 다행이었지만 옥춘당은 어른들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설탕이 귀해 변변한 사탕도 구하기 어려웠던 시골에서 아이들이 모처럼만에 즐길 수 있는 달달한 기호식품이었다. 현재는 소비하는 사람들 자체가 줄어서 보기는 힘드나 여전히 재래시장이나 인터넷에서 판매되는 등 나름의 수요가 있다. 요새는 박하향 옥춘당 디자인의 사탕을 입에 넣기 쉽도록 더 작은 크기로 만든 제품이 많이 나온다. 이외에 외피를 옥춘당으로 만들고 안에는 깨나 과자 등을 집어넣어 밋밋한 맛을 버리고 과자처럼 먹을 수 있도록 만든 개량판 옥춘당(깨옥춘)도 나온다. 박하맛 말고 그냥 일반 옥춘당 맛을 채용한 옥춘당 젤리(옥춘캔디)도 있다. 맛이야 설탕 맛 그 자체고 오색으로 알록달록하다. 대신 모양은 동그란 옥춘당과 달리 사각지다.
엿
엿은 한국의 전통 과자이다. 곡식에 엿기름을 섞어 당화시켜 졸여서 만든다. 원료는 찹쌀, 멥쌀, 옥수수, 조, 고구마 등이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옛날에는 엿을 반으로 잘라 구명이 몇개인지 세어보고 가장 많은 사람이 이기는 엿치기라는 놀이도 있었다.묽은 엿은 이(飴)라 하고 된 엿을 당(餳)이라 한다. 좀 더 짧게 설명하면, 졸인 식혜. 굳기 전의 상태를 물엿, 조금 졸인 것을 조청이라고 하며, 바로 굳힌 것을 갱엿(= 강엿, 검은엿)이라고 한다. 갱엿을 먹기 좋게 공기를 넣어 뽑아 만든 것이 흔히 먹는 흰엿이다. 엿은 정석대로 만들면 만드는 과정에서 설탕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달한 맛이 나는 이유는 엿기름에 들어있는 아밀레이스가 고두밥의 녹말을 엿당(말토스)으로 가수분해 하기 때문이다. '밥을 삭힌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엿당을 추출해내는 과정이다. 잘 굳은 갱엿은 엄청나게 단단하므로 덩어리라면 둔기로 쓸 수 있을 정도이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단단하다. 지금도 일부 한약방 등에서 약초 등을 우린 것을 섞은 갱엿을 약엿 등의 이름으로 파는데, 씹는 건 엄두도 못낼 정도며, 냉동 보관할 경우 언 갱엿들을 살살 부딪히면 깡깡거리는 쇳소리가 난다. 그래서인지 갱엿은 그대로 먹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대패로 얇게 긁어내어 나무막대에 붙여먹거나, 망치로 깨서 작은 조각을 단단한 사탕을 먹는 것처럼 입안에서 녹여서 먹거나, 갱엿을 굳힐 때 물을 조금 섞어서 무르게 만든 속칭 '불탱이'로 먹는 식. 특히 잘 만든 불탱이는 인절미나 마시멜로를 연상케 할 정도로 부드럽다. 그것도 아니면 사람 팔뚝만하게 굳혀 몽둥이 엿이라는 이름으로 문구점의 뽑기나 오락기의 상품으로 지급되곤 했다. 식용보다는 상징으로 사용된 셈이며 약엿이라는 거도 있는데 사전적인 의미로는 호두, 참깨, 생강, 잣 등을 넣고 잘 편 다음에 대추를 박아 만든 걸 말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구기자, 모과 등의 약효를 가진 식물을 우려내어 그 물로 만드는 엿을 말한다. 그냥 먹으면 시거나 쓴 것도 엿으로 만들면 달게 먹을 수 있어 지금도 한약방 등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약엿은 근래에 창작된 게 아니라 동의보감에도 나오는 오래된 처방법으로, 전문 용어로는 고(膏), 고제(膏劑)라고 한다. 지역에서 유명한 엿은 다음과 같다
담양 창평쌀엿은 엿기름(맥아)를 이용하여 쌀에서 당을 추출하여 만들어지는 흰가락엿이다. 창평쌀엿은 다른 엿과 달리 엿 안에 공기구멍이 있어 바삭하게 씹히며 치아에 달라붙지 않는 특징이 있다.
울릉도 호박엿이 있다. 다만 호박엿의 경우 통상의 엿들과는 만드는 방법이 다르고 고소한 맛을 배가시키기 위해 콩가루를 묻혀서 준다. 과거에는 후박나무 진액으로 만드는 후박엿이었으나 외지인들이 이름을 하도 착각해서 호박엿이 되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확신할만한 증거가 없어서 정말 있었는지 그렇다고 완전 허구인지도 모른다. 일단 현대에는 후박나무로 만든 엿은 생산되지 않고 호박엿만 있다고한다.
설악산에서는 된엿을 나무젓가락에 감아 엿과자로 판매한다.
제주도에서는 전통 특산 엿으로 고기가 들어간 고기엿이 있으며 꿩을 고아낸 꿩엿도 있다. 최근에는 귤과 함께 선인장(백년초)을 제주도의 특산품으로 밀면서 선인장 엿도 있다.
북한에서는 개고기나 토끼고기를 엿에 넣는다.
평안도 지방에서는 황사가 심각해 엿에 고기를 자주 첨가해 먹는다고 한다.
충청도 지방에는 불린 쌀과 엿기름, 무채를 넣고 만드는 무엿이 있다. 일반적인 딱딱한 갱엿이 아니라 숟가락으로 떠먹는 부드러운 엿이라고 한다.
정과
정과(正果)는 과일이나 연근, 생강, 도라지, 감초 같은 약초를 설탕에 졸인 다음 그 위에 설탕을 입혀서 완성시킨 한과이다. 한국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설탕을 사용했기 때문에 한과들 중에서도 특히나 제일 귀했다. 특히 인삼을 절인 인삼정과(人蔘正果) 가장 귀한 한과였다. 인삼정과의 재료인 인삼의 경우, 현시대에 반도체가 있다면 조선시대엔 인삼이 있었다고 할정도로 수출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심지어 독립군 지원세력들이나 조선시대의 도적들이 군자금을 버는 방법 중 인삼을 판매하는 것이 있었을 정도로 값이 비쌌다. 큰 판매수익을 낼 수 있는 무역품이었기 때문에 이걸로 한과를 만든다는 건 당연히 왕족이 아니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정과는 사실상 왕족이 아니면 구경도 못해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인삼정과처럼 귀한 식재료로 만들어진게 아니더라도 양반 중에서도 높은 위치인 경우가 아니면 구경도 못하는 귀한 한과였다. 사실 이중에서도 인삼정과는 왕족들도 매일 먹을수는 없었다. 인삼 자체가 무역품으로써는 가장 비중이 컸기때문이다 현재는 옛날과 반대로 설탕이 흔해지고 꿀이 비싸져서 꿀로 절인 것이 더 비싸다. 중국에 탕후루라는 비슷한 요리가 있다.
다식
다식 (茶食)은 한국 요리에서 후식으로 먹는 과자이다. 한과의 일종으로서 대개는 차와 함께 먹는다. 곡물이나 땅콩, 약초 등을 녹말과 함께 반죽해서 만든다. 다식을 조리할 때는 쌀가루와 꿀을 반죽한 다음에 다식판에 찍어서 모양을 낸다. 다식판은 여러 가지 전통 문양을 다식의 면에 찍어내는 도구로서 예쁜 모양을 낼 때 쓴다. 반죽을 할 시에는 설탕물을 첨가하는데 꿀처럼 농도를 달게 해서 반죽시 함께 버무린다
만두과
만두과(饅頭果)는 대추로 소를 넣고 송편 모양으로 빚어 만든 한과이다. 만두과는 약과와 똑같이 반죽하여 빚는 방법과 모양만 달리하는데, 만드는 방법으로는 밀가루에 참기름을 넣고 골고루 비벼서 체에 친 다음 생강즙·꿀·청주를 넣고 반죽한다. 반죽은 약과 반죽보다는 약간 질게 한다. 소로는 대추를 찜통에 쪄서 씨를 발라내고 다져 계핏가루와 꿀을 섞는다. 반죽을 밤톨만큼 떼어내어 골무모양으로 빚고, 준비된 대추 소를 콩알만큼씩 떼어 넣고, 터지지 않게 가장자리를 꼭꼭 눌러 송편모양으로 만든다. 식용유에 토색이 나도록 지져 계핏가루를 넣은 꿀에 담근다. 꿀이 배어들면 그릇에 담고 잣가루를 뿌린다. 만두과는 관혼상제 때 약과를 고배한 위에 웃기로 많이 얹는다.
매잡과
매잡과(梅雜菓)는 한과의 일종이다. 밀가루를 반죽해 만드는 고소한 맛의 후식이며, 술안주로도 쓰인다. 유밀과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매작과(梅雀果), 매자과, '매엽과(梅葉果), 타래과라고도 부른다. 매작과라는 이름은 과자의 모양이 매화나무에 참새가 앉은 모습과 유사하다는데서 나왔다.밀가루에 물과 생강즙, 약간의 소금을 넣어 반죽하여 편 다음, 적당한 크기의 직사각형으로 썬다. 칼집을 세 개 넣어 가운데 칼집 안에 양쪽 끝을 집어넣고 꼬아 모양을 만든 뒤 식물성 기름에 튀긴다. 튀겨진 과자에 꿀이나 조청, 시럽 등을 바른 후 마지막으로 잣가루와 계핏가루를 뿌려 마무리한다.
산자
찹쌀가루 반죽을 납작하게 말려 기름에 튀긴 다음에 튀긴 밥알이나 깨를 꿀과 함께 묻힌 음식으로 연례나 제례에서 필수음식으로 쓰이는 과정류이다 산자의 어의에 대해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쌀알을 튀기면 마치 꽃처럼 부풀어 벌어지므로, 이렇게 만든 고물을 묻힌 유전병류를 산자라 한다.”고 하였다. 즉, 산자는 고물의 모습에서 붙여진 음식명이다. 이것은 가정에서도 만들지만 조선시대 후기는 널리 상품화되었다. 특히, 곡창인 전라남도의 백산자는 예로부터 명물로 알려졌다. 산자 만드는 법은 찹쌀가루를 약주나 탁주로 축이듯이 반죽하여 시루에 찐다. 그런 다음에 방망이로 꽈리가 일도록 저어서 밀판에 밀가루를 바르고 0.7㎝ 정도의 두께로 민다. 이것을 가로 2㎝, 세로 3㎝ 정도로 썰어 겉이 갈라지지 않게 바람이 없는 그늘이나 더운 방바닥에 말린다. 이가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마르면 기름에 두번 튀겨서 속이 바삭하게 만들고, 끓는 물에 흰 엿과 꿀을 섞어 조린 것이나 조청을 발라 고물을 묻힌다. 산자는 고물에 따라서 매화산자·밥풀산자·백산자 등으로 구분되며, 반죽의 재료에 따라서 묘화산자·메밀산자 등으로 불린다. 매화산자는 4, 5일간 밤이슬을 맞혀 습기가 알맞게 밴 찹쌀을 술에 적시고 이를 건져 다시 하룻밤 재웠다가 뜨거운 무쇠솥에서 볶아 매화처럼 튀겨지면 고물을 묻힌 것이다. 붉은색 기름으로 물들여 분홍색 고물을 만들기도 한다. 붉은색 기름은 끓는 기름에 지초를 넣어 우려낸 것이다. 고물을 묻힐 때 백색과 홍색으로 매화문양을 놓기도 한다. 밥풀산자는 찹쌀을 하룻밤 물에 담갔다 시루에 쪄서 그늘에 말린다. 그런 다음에 쌀알이 온전한 것과 부서진 것을 선별하여 술에 10시간 정도 축인 뒤에 각각 낮은 온도의 기름에 넣어 튀겨내어 고물로 삼은 것이다 백산자는 쌀로 만든 백당을 묻혀 눈처럼 희고 소담한 모습으로 만든 것이다. 백당은 곡창지대인 전라도일대의 것이 유명하므로 백산자도 전라도지방의 것이 유명하다. 묘화산자는 밀가루에 꿀을 섞어 만든 반죽을 튀겨 고물을 묻힌 것이다. 메밀산자는 밀가루와 메밀가루를 반반으로 섞어 반죽하여 만든 것이다. 산자 중 분홍색의 고물을 묻힌 것은 흰색의 것과 함께 축하음식으로 쓰이고 제례에서는 흰색만이 쓰인다.
강정
강정(취음: 羗釘 또는 強情)은 찹쌀가루등 반죽하여 말린 한국의 과자이다. 박상이라고도 부른다. 그 유래는 자그마치 중국 전한 시대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나라에서는 아침식사 전 일종의 애피타이저 개념으로 먹던 간식의 일종인 한구(寒具)라는 음식이 있었다. 이는 찹쌀가루에 밀가루를 혼합하여 반죽한 다음 일정한 모양새로 만들어 튀겨서 꿀이나 물엿에 찍어먹는 음식으로, 이것이 고려시대에 '유밀과'라는 이름으로 널리 퍼진게 강정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삼국시대, 그것도 가야에서 '과(餜)라고 하여 강정으로 추측되는 물건이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아니면 옛날부터 있었는데 고려시대에 널리 퍼진것이던가 말이다. 한국에서의 강정은 한구처럼 '양념을 찍어먹는' 방식이 아닌, '미리 양념을 입혀놓은' 상태로 나온다. 강정 자체의 재료도 다양해서 일종의 고물로 쓰는 재료에 따라 흑임자 강정, 깨강정, 계피 강정, 잣 강정 등으로 불리운다. 오늘날로 치면 과자류에 속하며 실제 취급도 그렇지만 강정은 만드는 과정이 오래 걸리고 복잡한데다가 재료들이 하나같이 어마어마한 것들 뿐이여서 양반층의 전유물로 오랫동안 군림해왔다. 서민들이 강정을 구경하는 건 양반이 인심이 좋아서 나누어주거나 아니면 마을 경사가 나서 잔칫상을 만들 때 정도. 물론 이런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강정은 역시 양반층 이상의 전유물이였다. 게다가 상술한 인심좋은 양반도 대부분은 자기 밑의 하인이나 노비까지가 분배대상인 경우가 많았으며 양반 밑에서 일하는 경우를 제외한 평민들이 강정을 구경하는건 주인을 잘만난 노비가 명절이나 제사때 얻어먹을수 있는 경우보다 드물었다.
숙실과
숙실과(熟實果)는 밤이나 여러 과일을 엿이나 꿀과 함께 약한 불에 졸인 다음 그 과일 본래의 모양으로 다시 만들어놓은 과자를 총칭한다. 과실을 그대로 꿀이나 설탕에 졸인 것을 초(炒)라고 하고, 과육을 다지거나 으깬 것을 란(卵)이라고 한다. 유명한 찐 밤을 꿀과 함께 졸인 율란(栗卵)과 대추를 꿀이나 설탕에 졸인 다음 사탕처럼 만들어 굳힌 대추초(대추炒)가 잘 알려져 있다
과편
과편 (果-) 또는 과실편(果實-)은 한과의 일종으로서 과일과 녹말, 설탕 등으로 만드는 후식이다. 한데 과자처럼 만드는데 이때 설탕과 녹말 따위가 액체처럼 부드러운 형질을 띤다. 과일로는 살구나 모과, 오미자 등을 쓴다. 대개는 질감이 부드럽고 단 맛을 낸다. 사과나 배, 복숭아는 열을 가하면 색감이 좋지 못하고 과편에 적합치 못해서 쓰지 않는다. 녹말은 과편을 만들 때 과일과 다른 재료를 붙이는 자연 접착제 같은 기능을 한다. 궁중에서 즐겼던 한과로서 과편은 각국 정상의 만찬 때 오르는 대한민국의 전통 과자이며 꼭 과일 뿐만 아니라 호박으로도 만든다. 과편을 만들 때는 꽃 모양이나 예쁜 모양으로 모양을 내서 올려놓는 것이 보통이다. 서양의 젤리나 푸딩 류와 유사하다.
율란
율란(栗卵)은 대한민국의 전통 과자의 하나로 밤가루에 계핏가루와 꿀을 넣고 밤 모양으로 빚어 꿀과 잣가루를 묻혀 만든다. 원래 이 음식은 황해도 안악 지방의 향토 음식이다
첫댓글 오늘은 한과를 소개해봤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서 어린시절때 먹었던 한과 맛 또는 한과에 대한 기억이 있으신 분은 댓글로 써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시간에는 한국의 전통 음료를 소개하겠습니다
유과,약과.옥춘은 어렸을적 많이 먹었던 한과입니다
약과는 지금도 즐겨 먹고 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