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꼭 50년 전에 일어난 6·25 전쟁으로 대한민국에서는 230만 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292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북한을 합쳐 500만 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했는데도, 이 전쟁은 기이하게도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처럼 잊혀진 전쟁이 돼 가고 있다. 6·25 전쟁은 전쟁이란 형태를 통해 남북한에서 수많은 리더가 등장해 리더십을 발휘한 치열한 경연장이었다. 이들은 피와 땀과 한숨과 함성을 토해내며 생존 투쟁을 위한 거대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이 리더십이 결국 지금의 남북 문제를 만든 근본 원인이다. 또 이 리더십을 재해석함으로써 우리는 정전체제 해체와 평화체제 구축을 향해 일보를 내디딜 수 있다. 6·25 전쟁은 또 생각밖으로 치열한 기동전이었다. 소설 ‘삼국지’보다 더 빠른 속도전이었다. 50년 전 남북한군과 미군 중국군은 어떻게 싸웠는가. 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제1편 전쟁발발 태풍 ‘엘시’ 댄스파티 선제 타격전략 6월25일 새벽4시 불 뿜는 자주포 임진강 철교 전투 TNT특공대 제2편 서울 함락 “지금 취침 중인데…” 축차투입 지휘부의 서울포기 인민군의 미아리 우회 한강인도교 폭파 춘천 6사단의 후퇴 3편 미군 참전과 참패 김석원 장군의 분투 불쾌한 작은 전쟁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피란민 공포증 작전권 이양 노근리 쌍굴다리의 비극 제4편 낙동강 방어전 데이비슨 라인 다부동 전투의 승리 맥아더의 반격 제5편 38선 돌파와 평양 함락 "38선을 돌파하라" 북진 개시! 국군의 날 불꽃 튀는 북진 경쟁 국군사단의 평양선착 제6편 황량한 청천강 전선 맥아더의 오판 무제한 북진 명령 국군 6사단 7연대 마침내 압록강 "노병은 죽지 않는다" 제1편 전쟁발발 6·25 전쟁이 일어나던 날, 가장 잘 싸운 지휘관으로 꼽히는 임부택(林富澤·당시 31세)은 1950년 6월25일 춘천에 본부를 둔 육군 제6사단 7연대장을 맡고 있었다. 일본군 사병 출신인 그는 한국군의 모태가 된 조선경찰예비대(1946년 1월15일 창설)의 창설 멤버다. 이때 그는 대한민국 사병 군번 제1번인 110001번과 함께 중사 계급을 받고, 한국 육군의 모태가 된 제1연대 제1대대 A중대 선임하사관이 되었다. 그러다 4개월 후인 1946년 5월1일 미 군정청이 조선경찰예비대훈련소(이후 조선경비사관학교로 개칭-육사의 전신)를 만들자 입교해 약 한 달간 훈련을 받고 소위가 되었다. 소위가 된 날부터 만 5년이 지난 1950년 6월25일에는 중령 계급장을 달고 중부 전선 최전방을 방어하는 7연대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6사단장은 29세의 홍안 청년 김종오(金鐘五) 대령. 김대령은 일본 중앙대를 다니다 학병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 광복 후인 1945년 12월5일 미군정청이 군사영어학교를 만들자 입교해 참위(지금의 소위)가 되었다. 김대령 휘하에는 7연대 외에도 2·19연대가 있었다. 함병선(咸炳善·당시 30세) 대령이 이끄는 2연대는 홍천에 본부를 두고 7연대 우측 전방을 방어하고, 민병권(閔炳權·당시 32세) 중령이 지휘하는 19연대는 예비대로 6사단 사령부와 함께 후방인 원주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 태풍 ‘엘시’ 1950년에는 ‘30년 만에 최악’이라는 봄가뭄이 닥쳤다. 농민들은 이제나 저제나 비 소식을 기다리는데 장마철이 시작되는 6월이 와도 큰비가 오지 않았다. 그러던 참에 일본 오키나와 남쪽에서 규모가 작은 태풍 ‘엘시’가 발생해 서북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타는 목마름’으로 비를 기다리던 농민들이 겨우겨우 모심기를 끝낸 그해 6월23일 오후 2시쯤, 태풍 ‘엘시’의 영향으로 춘천 일대에 모처럼 가랑비가 내렸다. 춘천시 신북읍 천전리 샘밭골은 당시는 38선 바로 남쪽이었다. 38선에서 불과 300m 남쪽에 있는 북한강에는 ‘모진교’라는 길이 약 250m의 다리가 걸려 있었다. 이 다리 북쪽인 화천군에는 함흥에 주둔하다 수일간 야간 행군 끝에 6월17일 이곳으로 이동해온 인민군 2사단(사단장 李靑松소장·인민군 소장은 국군 준장과 같다)이 포진해 있었다. 인민군 2사단이 춘천으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이 다리를 건너야 한다. 당시 이 다리 지역을 방어한 것은 박용덕 상사가 이끄는 7연대 수색대였다. 그러나 다리 북쪽 지역에 있는 38선 이남 지역이 너무 좁아 7연대 수색대는 다리 남쪽만 방어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다리 북쪽에는 인민군 초소가 생겨났으니, 사실상 모진교가 38선인 셈이었다. 당시에도 지뢰가 있었다. 국군은 인민군의 침공에 대비해 다리 한복판에 지뢰를 매설해 놓았다. 그리고 원격장치로 다리를 폭파할 수 있게끔 별도의 폭발물을 설치해 두었다. 가랑비를 맞는 모진교 아래 북한강에서 을씨년스럽게 물안개가 피어오르는데, 다리 북쪽에서 홀연히 흰옷 입은 사람이 나타났다. 당시는 인민군이 월남자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할 때였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인민군 초소로부터 전혀 총격을 받지 않고 다리를 건너오기 시작했다. 흰옷은 한 노인이었다. “어! 저 영감이-!” 하며 7연대 수색대원들이 당황해 하는데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지뢰가 터지고, 노인은 다리 한복판에서 꼬꾸라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노인은 장씨였고, 화천으로 출가한 딸집에 살고 있었다. 장씨의 평생소원이 38선 남쪽 춘천에 살고 있는 아들집에 가보는 것이었다. 이청송 인민군 2사단장은 개전을 앞두고 사단 정치장교인 이시혁(李時赫)에게 “요충지인 모진교의 방어 상황을 알아보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이산가족을 찾던 이시혁은 장노인을 찾아내, 설득 반 위협 반으로 “아들집으로 가라”며 모진교로 내몬 것이다. 장씨의 죽음으로 인민군은 모진교에 폭파 시설이 있음을 간파했다. 그로부터 10여 시간 후인 6월23일 24시(6월24일 0시), 육군 본부는 6월11일부터 발령된 전군 비상경계령을 해제했다. 이 경계령은 5월1일 메이데이 시위와 2대 총선인 5·30선거, 그리고 6월7일 북한이 남북한 선거를 제의하고 6월10일에는 북쪽의 조만식(曺晩植))과 남쪽의 이주하(李舟河) 김삼룡(金三龍)을 교환하자고 제의함에 따라 취해진 조처였다. 비상경계령이 해제되자 육본 장교들은 토요일인 6월24일 저녁부터 육군참모학교 구내에 만든 장교구락부 낙성 기념 댄스파티에 들어갔다. 댄스파티 1950년 1월12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아시아에서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전미 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한국은 미국의 대(對)공산권 방어에서 제외된다”고 밝힌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애치슨 선언은 6·25전쟁을 유발한 첫째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1947년 발족한 미 CIA 극동 책임자로 1981년까지 주로 서울에서 비노출요원으로 활동하던 하리마오박 (당시 31세·한국명 朴承德)씨는 미국이 고의로 6·25전쟁을 유도했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그가 기자에게 한 말이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미 극동군 정보참모부 산하 한국인 첩보부대인 KLO부대와 미 극동공군의 첩보부대인 ASIS, 한국 육군의 일선 부대 그리고 미 CIA는 북한군이 남침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1195개 문건을 워싱턴에 보냈다. 그러나 워싱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6월23일 망설이는 채병덕 육군총참모장(蔡秉德·당시 29세)을 설득해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댄스파티를 열게 한 이는 미군 고문단장 대리인 헨리(가명) 대령이었다” 하지만 6사단 7연대만은 모진교 사건 때문에 비상경계령을 풀지 않았다. 7연대는 이미 6월19일 귀순해온 인민군 2사단 포병연대의 박철호 전사에게서 “원산에 주둔하던 포병연대가 대규모 야외훈련을 한다며 1주일간 야간행군을 계속해 철원-김화를 거쳐 6월18일 밤 화천 남쪽 신포리 백사장에 도착했다”는 진술을 받아낸 바 있었다. 7연대로부터 이러한 보고를 받은 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큰 관심을 표시했지만, 육본 정보국의 미군 고문관(대위)은 “인민군은 절대 도발하지 않는다”며 김대령의 보고를 묵살했다. 당시 한국 육군은 8개 사단 1개 독립연대로 편성돼 있었다. 최전방인 38선 방어를 위해 서쪽에서부터 17연대(옹진반도)-1사단(청단∼적성)-7사단(적성∼적목리)-6사단(적목리∼진흑동)-8사단(진흑동∼동해안)을 포진해 놓았다. 후방인 서울에는 수도경비사령부를 두고, 대전에 2사단, 대구에 3사단, 광주에 5사단을 둬 공비 소탕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 부대를 통합 지휘한 것은 육군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이었다. 반면 인민군은 민족보위상(국방부 장관에 해당)에 최용건 부원수를 앉히고, 지금의 한국 육군 야전군사령관에 해당하는 전선사령부를 만들어 김책(金策) 대장(4성장군)을 사령관에, 강건(姜健) 중장(2성장군)을 참모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을 임명했다. 인민군 1군단 휘하에는 6사단-1사단-4사단-3사단-105전차여단이, 2군단에는 2사단-12사단-5사단이 배속되었다(서쪽에서부터). 그리고 예비부대로 13사단은 1군단에, 15사단은 2군단에 배속하고, 10사단은 총예비대로 북한 방어를 위해 평양 지역에 배치해두었다. 인민군과 별도로 북한은 내무성(한국의 내무부에 해당)에 북한 주민의 월남을 막는 부대로 38경비대(한국의 전투경찰대와 흡사) 3개 여단을 편성했다. 이중 3경비여단은 국군 17연대가 포진한 옹진반도 바로 북쪽에 포진해 있었다(지도 참조). 선제 타격전략 국군에는 4사단이 없지만 인민군에는 4사단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군 사단은 연대를 시발로 생겨났다. 1연대가 1여단이 됐다가 1사단이 되는 식이다(그 후 각 연대는 계속 배속 사단이 변경돼, 1사단에 꼭 1연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 국군이 연대로만 구성돼 있을 때인 1948년 여순반란사건이 터졌다. 이에 따라 군내 좌익분자를 색출하기 위해 대규모 숙군 작업이 펼쳐졌는데 유독 4연대(연대장은 6·25전쟁 당시 8사단장인 李成佳 대령)에 좌익이 많았다. 여순반란 사건은 4연대 예하 대대를 모태로 창설한 14연대(연대장 박승훈)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1949년 5월 4여단(여단장 金白一 대령) 예하 8연대에서 표무원(表武源) 강태무(姜太武) 소령이 자기 대대원을 이끌고 월북했다. 그렇지 않아도 4자는 ‘죽을 사(死)’자를 연상시켜 개운치 않은데다 자꾸 좌익 관련 사건이 일어나자, 국군은 24~34~40 등 4자가 든 부대 명칭은 아예 쓰지 않게 되었다. 요컨대 국군은 죽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빨갱이’가 싫어서 4자를 쓰지 않은 것이다. 10과 18도 욕설을 연상시켜 사용하지 않는 숫자가 되었다. 이른바 ‘선제 타격 전략’으로 불리는 인민군의 전쟁 개시 작전계획은 3경비여단과 6사단 소속의 14연대를 동원해 옹진반도에 배치된 국군 17연대를 공격하고, 6사단과 1사단은 국군 1사단을, 4사단과 3사단은 국군 7사단을, 2사단과 12사단은 국군 6사단을, 5사단은 12사이드카연대를 배속받아 국군 8사단을 밀어붙인다는 것이었다. 공자(攻者)는 방자(防者)보다 3배 이상 강해야 이길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인민군은 2 대 1로 우세한 상황에 국군을 밀어붙이기로 한 것이다. 1950년 2월부터 인민군 각 사단은 북한 중앙은행에서 돈을 인출해 전쟁 소모물자를 대량 확보해놓았다. 더구나 국군은 1대도 없는 전차를 무려 242대, 한국 공군은 연락기 10대뿐인 데 비해 인민군 공군은 211대의 각종 공군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선제 타격만 하면 공자와 방자 비율에 관계없이 이긴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군은 지금처럼 미군에 작전권을 넘긴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작전권을 갖고 있었다. 인민군의 이러한 부대 배치에 대비해 지금의 합참본부와 같은 구실을 한 육군본부는 ‘육본작전계획 제38호’를 작성해 인민군의 선제타격전략에 대비하고 있었다. 육본작전계획 38호는 인민군이 주공을 철원-의정부-서울 축선에 집중할 것으로 보고 의정부 지구에 방어지대를 형성한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6월23일 밤 12시부로 비상경계령을 해제하면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6월25일 새벽4시 장교구락부 댄스파티에서 술을 마신 채병덕 총참모장 일행이 명동의 카바레로 나가 2차를 즐기고 귀가한 것은 6월25일 새벽 2시쯤이었다. 이 무렵 춘천 일대에는 7년 대한에 단비 오듯 ‘쫙쫙’ 폭우가 쏟아졌다. 이 폭우 속에 두 눈을 부릅뜨고 손목시계를 노려보는 사내가 있었다. 인민군 2사단 참모장 이학구(李學九) 총좌(대령에 해당)였다. 폭우가 걷히는 기세를 보인 정각 4시, 이학구 총좌는 김광협 중장에게 지시받은 대로 전화기를 집어들고 짧게 외쳤다. “폭풍!” 그 순간 화천 일대에 포진한 인민군 포병연대 소속 122㎜포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국군 7연대 2대대 6중대장 정영삼(鄭永三) 중위는 포성에 놀라 후닥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일을 당했을 때는 그 어떤 지휘관도 제대로 대처하기 어려울 터. 상급 부대에 보고한 후 일단은 살고 봐야 한다. 이 바람에 국군 각 중대는 진지에서 고립되기 시작했다. 계속된 인민군의 포격으로 통신시설이 고장나 상급부대와 연락이 두절되는 부대도 늘어났다. 전통적인 지상전은 먼저 화력을 퍼부은 후 기동부대를 앞세워 돌파하고, 이어 보병부대가 쏟아져 들어오는 순서로 진행된다. 날이 밝자 국군 부대가 고립된 틈을 타 SU76 자주포를 앞세운 인민군 2사단이 38선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인민군이 T34 전차가 아니라 SU76 자주포를 앞세운 것은 주목할 점이다. 인민군은 모진교가 T34 전차 무게를 견디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모진교에 설치된 폭발물 때문에 전차가 파괴될까 두려워 SU76 자주포를 앞세운 것이다. 임부택 중령은 인민군 기계화부대가 건너기 전에 모진교를 폭파했어야 한다. 그러나 예하 중대가 인민군의 포격으로 고립돼 있을 뿐, 아직 전부대가 후방 방어선으로 후퇴할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한 그는 다리를 조기에 폭파하면 차후 국군의 진격 작전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오래지 않아 이런 생각이 착각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모진교를 건너온 인민군 기계화부대가 삽시간에 소양강까지 진격해버렸기 때문이다. 불 뿜는 자주포 당시 국군 병사들은 전차와 자주포를 구별할 줄 몰랐다. 그래서 SU76 자주포를 전차로 오인하고, “인민군이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한다”는 말을 퍼뜨렸다. ‘인민군 전차 공포증’이 시작된 것이다. 치열한 전투의지는 책임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7연대 대(對)전차포 중대 2소대장 심일(沈溢) 소위가 그런 경우다. 적 기갑부대의 진격을 막는 것이 주임무인 심소위 소대는 57㎜ 대전차포를 쏘아 SU76 자주포를 명중시켰다. 하지만 자주포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포 사격을 하며 전진해왔다. 이러한 기세에 눌려 심소위 부대는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숨어서 적 자주포가 더 가까이(30m 앞까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57㎜ 대전차포를 쏘았다. 선두로 달려오던 SU76 자주포는 대전차포를 맞더니 ‘끼룩 끼룩’ 하며 멈춰 섰다. 그 바람에 2번 자주포도 기동을 멈췄다. 그 사이 심소위를 비롯한 특공대가 두 대의 자주포에 뛰어올라가 해치를 열고 수류탄과 화염병을 던져넣었다. 화염병 투척은 의외로 효과가 높았다. 화염병의 불꽃은 SU76 자주포 안에 있던 포탄 추진제를 점화시켜 삽시간에 자주포를 폭발시켰다. 이 일은 아마 대한민국 역사(일제 시대는 제외된다)에서 최초로 화염병이 등장한 사건일 것이다. 심소위 특공대의 쾌거는 삽시간에 입에서 입으로 “적 전차를 잡았다”는 오보(誤報)로 전달됐는데, 이 오보가 전차 공포증에 시달리던 국군의 사기를 올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인민군 2사단은 임부택 중령의 국군 6사단 7연대가 지키는 춘천으로 진입하고, 12사단은 홍천에 본부를 둔 함병선 대령의 국군 6사단 2연대 지역을 돌파하려 했다. 하지만 7연대를 필두로 한 국군 6사단의 결사항전은 눈부셨다. 이로써 인민군 2사단은 38선에 근접한 춘천을 전쟁 시작 3일(6월27일)만에 겨우 점령했다. 이 공격에서 인민군 2사단은 40%의 전투력을 상실하고 SU76 자주포 7문과 45㎜ 대전차포 2문이 파괴되는 피해를 보았다. 193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김일성(金日成 6·25 당시 38세)은 중국 공산당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서 활동하며 중대장급 지휘자로 성장했다. 이 부대는 그 후 동북항일연군으로 재편된다. 1941년부터 일본군이 공산 유격대를 꺾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이자, 동북항일연군은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 땅으로 도주했다. 당시 소련군은 일본과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극동지역에 포진한 소련 극동군으로 하여금 소련 땅으로 도주해온 중국 공산군들을 모아 ‘88특별저격여단’(여단장은 중국인 周保中)을 편성케 했다. 이때 김일성은 대위 계급장을 달고 이 부대의 제7대대장을 맡았다. 이런 이유로 김일성은 중공군과 소련군에 몸담고 있던 조선인 장병들을 두루 알게 되었다. 임진강 철교 전투 훗날 김일성은 춘천 전투에서 진격이 늦어진 것이 6·25 전쟁 전체를 망친 원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로 인해 머리끝까지 화가 난 김일성은 그와 함께 동북항일연군에 있던 2군단장 김광협 중장과, 소련군 출신인 2사단장 이청송 소장, 그리고 12사단장 최춘국(崔春國) 소장을 전격 교체해버렸다. 이러는 사이 38선에 배치된 여타 국군 부대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6·25전쟁에서 가장 잘 싸운 지휘관으로 꼽히는 백선엽(白善燁·당시 30세)은 당시 대령 계급장을 달고 1사단장을 맡고 있었다. 한국 육군의 ‘선봉’ 사단인 1사단은 황해도 청단에서 경기도 개성을 거쳐 적성에 이르는 90㎞ 전선을 커버한다. 1사단 예하에는 개성에 본부를 둔 12연대(연대장 全盛鎬 대령)와 문산에 본부를 둔 13연대(연대장 金益烈 대령)가 전방에 나가 있고, 11연대(연대장 崔慶祿 대령)는 사단 사령부와 함께 수색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 백선엽 대령은 시흥에 있는 보병학교에서 ‘고급간부훈련’을 받기 위해 서울에 와 있다가 전쟁 발발 소식을 들었다. 이때 이미 1사단 병력은 비상경계령 해제에 따라 절반 정도가 토요일인 6월24일부터 외출·외박을 나가 있었다. 25일 오전 사단 사령부로 달려온 백대령은 파주초등학교 앞산에 올라 전황을 관측했다. 파주초등학교 전방에는 임진강이 있고 12연대는 이 강 북쪽인 개성 일대에서 싸웠다. 개성 지역으로 돌진해 들어온 것은 인민군 105전차여단 소속 206기계화연대고, 그 뒤로는 중국 공산군에서 이미 사단장 대우를 받던 방호산(方虎山) 소장이 이끄는 인민군 6사단이 따라오고 있었다. 문산에 위치한 13연대 쪽으로는 역시 105전차여단 소속의 203전차연대를 선두로 동북항일연군 출신의 최광(崔光) 소장이 지휘하는 인민군 1사단이 진격해 온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임진강을 등진 ‘배수진’ 형태로 인민군과 싸운 것은 개성의 12연대였다. 문산 쪽의 13연대는 큰 강이 없어 절체절명의 위기로는 치닫지 않을 것이다. 백대령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수색에 위치한 11연대가 외출·외박 나간 병사를 모아 임진강변에 방어선을 칠 때까지, 12연대로 하여금 버티게 하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문산에 있는 13연대는 인민군 1사단이 우회하지 못하게 결사 항전해야 한다. 당시 임진강에는 유일한 다리인 임진강 철교가 걸려 있었다. 지금 임진각 앞에 가면 시커멓게 교각만 남은 다리가 바로 그것이다. ‘임진강 철교로 12연대를 빼냄과 동시에 철교를 폭파하고 11연대 병력으로 임진강변에서 방어선을 친다.’ 이런 생각을 하며 백대령은 임진강 철교에 폭파시설을 설치하라고 명령했다. 낮 12시가 조금 지나자 사단 공병대장 장치은(張治殷) 소령이 달려와 “폭파 준비가 다 됐다”고 보고했다. 그로부터 3시간 후, 얼굴에 큰 부상을 입은 12연대장 전성호 대령이 일행과 함께 스리쿼터를 타고 임진강 철교를 건너왔다. 12연대 병사들은 대부분 철교를 건넌 것 같았다. 잠시 후 전방에 나가 있는 척후대로부터 “인민군이 몰려온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백대령은 짧게 “철교를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굉음은 울리지 않았다. 잠시 후 사색이 된 장소령이 달려와 “도화선이 끊어진 것 같습니다. 폭파에 실패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공병대가 도화선을 재점검할 틈도 없이 임진강 철교를 사이에 두고 남북한군이 총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천만다행으로 인민군 전차는 이 다리로 진격해오지 않았다. 인민군은 당연히 국군이 임진강 철교를 폭파할 것으로 계산하고 전차를 13연대가 방어하는 문산 쪽으로 돌린 것이다. 13연대의 57㎜ 대전차포는 인민군 T34전차를 세우지 못했다. 이로 인해 병사들은 개전 첫날부터 ‘부나비’처럼 수류탄을 지고 인민군 전차로 뛰어올랐으나, 전차는 파괴되지 않았다. 13연대의 분전으로 6월26일 저녁에야 인민군 1사단은 문산을 장악할 수 있었다. 부슬비가 뿌리는 이날 저녁 국군 1사단은 현재의 파주시 금촌동과 조리면에 있는 작은 하천 봉일천(奉日川)을 잇는 방어선으로 철수했다. TNT특공대 무서운 투혼은 종종 책임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개전 첫날 임진강 철교 폭파 실패라는 치욕적인 실수를 범한 1사단 공병대 부대대장 김영석(金永錫) 소령이 21명의 지원자와 함께 백대령 앞에 나타났다. 김소령 일행은 “특공대 전원이 유서를 작성했다”며 “죽음을 맹세코 야간 기습하는 적 전차를 격멸하겠다”고 보고했다. 이들은 수류탄을 가운데 넣고 TNT로 묶은 ‘묶음’을 들고 뛰어나갔다. 수류탄의 안전핀만 뽑으면 TNT가 폭발할 테니 육신과 함께 적 전차를 폭파하겠다는 투지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이날 밤 인민군 전차는 기동하지 않았다. 특공대는 인민군 척후병만 저격하고 날이 밝자 소화기 10여 점을 노획해 귀대했다. 다음날(6월27일) 저녁 백대령은 채병덕 총참모장으로부터 ‘현 진지를 사수하라’는 내용의 작전명령서를 받았다. 하지만 백대령의 마음은 후퇴로 기울고 있었다.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 것은 다음날(6월28일) 새벽 3시였다. 이어 육본이 수원으로 이동했으며, 인민군이 서울에 진입했다는 소식이 1사단으로 전해졌다. 인민군 6사단이 기차를 타고 파괴되지 않은 임진강 철교를 통해 남하한다는 소식도 있었다. 사람은 단 하루만 못 자고 단 하루만 굶어도 파김치가 된다. 벌써 1사단 병사들은 3일째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사단 포병대장 노재현(盧載鉉·1979년 12·12사건 때 국방장관) 소령은 “포탄이 떨어졌다”고 보고했다. 마침내 백대령은 육본의 사수 명령을 어기고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인민군의 서울 점령으로 퇴로가 막혔으니 사단 지휘부는 행주산성 부근에서 뗏목을 타고 한강을 건너기로 했다. 백대령은 인민군 방어를 위해 남아 후순위 도강자(渡江者)가 된 장병들에게는 “알아서 도강해 전투사령부가 설치된 시흥으로 집결하라”고 지시했다. 20세기 들어 한국인이 겪은 가장 길고 긴 날은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제2편 서울 함락 38선에서 서울에 이르는 최단거리는 개성-문산 축선(국도 1호선)이지만, 이곳에는 임진강이라는 자연 방어선이 있다. 하지만 38선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길은 큰 강이 없는데다, 동두천 축선(국도 3호선)과 포천 축선(국도 43호선) 두 개가 있다. 이런 이유로 육본은 인민군 주공(主攻)이 의정부 축선에 투입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육본은 ‘작전명령 38호’에서 ‘동두천과 포천에서 적을 막다 여의치 않으면 동두천과 포천 축선이 합쳐지는 의정부에서 최후 결전을 벌인다’는 결정을 내려 놓았다. 이곳 방어는 전방 사단장 중 유일한 장성인 유재흥(劉載興·당시 29세) 준장이 이끄는 7사단이 맡았는데, 7사단 예하에는 한국군 최선봉이자 최정예인 1연대(동두천)를 필두로 3연대(예비)와 9연대(포천)가 배속돼 있었다. 그만큼 7사단이 육군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그런데 전쟁은, 육본의 부대 이동 명령에 따라 7사단이 3연대를 수도경비사령부(사령관 李鍾贊 대령) 예하로 보내놓고, 온양에 있는 2사단 25연대가 배속돼 오기를 기다리는 사이에 터졌다. 당시 7사단도 비상경계령 해제에 따라 상당수의 장병을 외출·외박 보낸 상태였다. 7사단 사(師團史)에서 가장 치욕적인 일로 기록될 ‘서울함락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6월25일 새벽 4시 국군 7사단 1연대 지역에 인민군이 쏜 포탄이 작렬하기 시작했다. 5시30분이 되자 인민군 105전차여단 예하 107연대 소속 전차 40대가 동두천 축선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이권무(李權武) 소장이 이끄는 인민군 4사단이 따라 들어왔다. 비슷한 시각 국군 9연대가 포진한 포천 축선으로는 105전차여단 예하 107연대가 진격해오고, 그 뒤로 이영호(李英鎬) 소장이 이끄는 인민군 3사단이 진격해왔다. 이때 인민군이 구사한 것이 소위 말하는 ‘일점양면(一點兩面) 전술’과 ‘양익포위(兩翼包圍) 전술’이다. 일점양면 전술은 인민군 1개 연대가 정면에 있는 국군 1개 연대를 향해 ‘스트레이트’를 날리는 사이, 다른 연대는 인접 도로로 우회해 같은 시간에 국군 연대 옆구리로 ‘훅’을 날리는 연대 단위 전술이다. 양익포위 전술은 2개 사단이 협동해서 국군 1개 사단을 섬멸하는 것. 인민군 6·1사단이 국군 1사단을, 인민군 3·4사단이 국군 7사단을 포위해 각각 섬멸한 후 서울을 점령하고, 인민군 2·12사단이 국군 6사단을 공격해 춘천과 홍천을 점령한 것이 양익포위 전술이다. 이러한 포위전술 덕분에 개전 첫날 인민군은 동두천과 포천을 각각 장악할 수 있었다. “지금 취침 중인데…” 이날 술에 취해 잠든 채병덕 총참모장을 깨운 것은 6사단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이었다. 새벽 5시20분쯤 임중령이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 있는 총참모장 관사로 전화를 걸자, 전속부관인 나(羅)모 중위가 전화를 받았다. “총참모장 각하를 대주시오.” “지금 취침중이신데 급한 일입니까?” “그렇소. 우리 7연대 전방에 포탄이 낙하하고, 인민군이 대거 남침중이오.” 이 전화는 나중위가 거세게 혀끝을 차는 소리를 끝으로 잡음을 내다 끊어지고 말았다. 작취미성(昨醉未醒)의 채병덕 총참모장이 110㎏의 거구(巨軀)를 흔들며 의정부에 있는 7사단 사령부로 달려온 것은 이날 새벽이었다. 인민군의 전면 남침임을 확인한 채총참모장은 수도경비사로 배속한 3연대를 다시 7사단으로 재배속시켜, 포천 방면을 방어하는 9연대를 지원케 했다. 육본의 배속 변경 명령에 따라 서울에 와 있던 2사단 예하 5연대와 수경사 예하 18연대도 7사단에 배속시켰다. 이날 전쟁 발발 소식을 들은 2사단장 이형근(李亨根·당시 30세) 준장이 대전에서 서울 육본으로 올라왔다. 이때 매우 당황한 채총참모장이 이준장을 보고 “잘 왔소. 곧 의정부로 가서 반격을 해주시오”라고 청했다. 채총참모장은 경황이 없는 듯 광주에 있는 5사단(사단장 李應俊 소장·당시 60세)과 대구의 3사단(사단장 劉升烈 대령·당시 60세)에 대해서도 총출동 명령을 내렸다. 외출·외박을 간 병력이 모이는 대로 달아오른 전장에 투입하는 것을 ‘축차(逐次)투입’이라고 하는데, 축차투입은 ‘선두를 따라 계속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 들쥐 떼’와 같은 결과를 낳기 때문에 군사학에서 첫번째 금기 사항으로 꼽힌다. 채총참모장의 지시가 축차투입이라고 판단한 2사단장 이형근 준장은 “날이 저무는데 적정과 지형도 모르는 후방 부대를 축차투입해서는 안 된다. 후방에서 올라오는 3개 사단은 영등포에 집결시켜 한강 방어선을 펼치고 이어 질서 있는 반격작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범석·김홍일·이응준·김석원 등 50∼60대 원로 장군들도 후방에 새로 방어선을 만들자는 이준장 의견에 동의했으나, 채총참모장은 “대통령 명령이다. 2사단은 당장 의정부로 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이형근 준장과 채병덕 총참모장은 군사영어학교 동기로 이준장은 대한민국 군번 제1번인 10001번이고, 채총참모장은 10002번이다. 두 사람은 모두 일본 육사 출신인데 채총참모장은 49기, 이준장은 56기였다. 일본군에서 최종 계급은 이준장은 대위, 채총참모장은 소좌였다. 채총참모장은 일본군에서 후배인 이준장이 한국군에서 선임 군번을 받은 것을 매우 못마땅해했다. 따라서 채총참모장은 먼저 진급했음에도 사사건건 이준장과 부딪쳤다. 6·25전쟁 개전 첫날 두 사람의 다툼도 거의 싸움으로 변질되다시피 했다. 축차투입 채총참모장이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며 성을 낸 데다가, ‘계급 끝발’에 이준장은 밀려 의정부 7사단으로 갔다. 이때 7사단 9연대를 지원하러 달려간 7사단 3연대의 연대장은 이준장의 동생인 이상근 대령이었다. 유재흥 7사단장은 이준장을 붙잡고 “동생을 봐서라도 역습해달라”고 부탁했다. 군 지휘관은 언제나 냉정해야 하는데 여기서 이준장은 흔들렸다. 동생을 생각한 그가 축차투입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접고 2사단 예하 부대를 축차투입해버린 것이다. 채총참모장의 일관된 주장은 “역습하라”는 것이었다. 다음날(6월26일) 7사단은 동두천으로 진격하고, 2사단은 포천 쪽으로 진격하게 되었다. 7사단은 순조로이 동두천을 탈환했다. 단지 몇 시간 만에 승리를 얻었는데, 이것이 언론에 ‘마치 국군이 북진에 성공한 것’으로 과장 보도되었다. 이날 방송은 “국군의 총반격으로 인민군은 퇴각하고 있다. 우리 국군은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것이다”라고 떠들었다. 하지만 포천으로 진격한 2사단은 중과부적으로 인민군 3사단에 밀려, 의정부 방향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2사단이 대오도 없이 흩어져 의정부로 도주해오자 인민군 3사단의 선두가 2사단 꼬리를 물고 6월26일 저녁 의정부로 진입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동두천까지 진격한 국군 7사단은 퇴로가 차단됐다고 판단하고 일부는 의정부를 뚫고 창동으로 철수하고, 나머지는 삼송리 쪽으로 후퇴해버렸다. 도미노처럼 2사단의 붕괴가 7사단 붕괴로 이어진 것이다. 이로써 인민군 4사단과 3사단, 105전차여단은 의정부를 장악했다. 전쟁은 결코 감정싸움이 아닌데, 여기서 국군은 또 한 번 만용을 부렸다. 청주에 주둔하다 급히 창동으로 올라온 2사단 25연대에 날이 밝자(6월27일) 의정부 탈환 명령을 내린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실패는 실패의 어머니’인데, 또다시 축차 투입을 범한 것이다. 이미 집단으로 ‘전차 공포증’에 감염된 국군 병사들은 맥없이 무너져, 미아리고개 쪽으로 철수했다. 미아리고개마저 무너지면 서울은 인민군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육군에서 보병-포병-기갑-공병 등 전투에 투입되는 병과를 전투병과라 하고, 병참이나 경리-병기처럼 비전투병과는 지원병과라고 한다. 전투병과 장병들이 연이은 패전으로 산지사방으로 흩어지자, 육본은 지원병과 장병을 미아리고개로 총출동시켰다. 그리하여 3000여 병력이 모이자, 고개 좌측에 포진한 부대는 5사단 이응준 소장이, 고개 우측에 모인 부대는 7사단장 유재흥 준장이 지휘를 맡았다. 생도 1기로 불리는 육사 10기 교육생도와 일부 패잔병은 육사교장 이준식(李俊植) 소장 지휘하에 불암산 일대로 배치시키고 경찰대대까지 출동시켰다. 지휘부의 서울포기 이렇게 국군 패잔병들이 최후 결전을 준비하기 훨씬 전인 이날(6월27일) 새벽 2시 이승만(李承晩·당시 75세) 대통령은 특별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떠나버렸다. 한 시간 후 열린 심야의 비상국무회의는 ‘수도를 수원으로 옮기기’로 결의했다.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는 정말로 식언(食言)이었던 것이다. 1950년만 해도 상당수 국민은 대통령을 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된 데는 그가 조선 왕조와 같은 전주 이씨라는 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국난에 처해 임금이 거처를 옮기는 것을 ‘몽진(蒙塵)’, 수도를 옮기는 것은 ‘천도(遷都)’라고 한다. 병자호란 이후 까맣게 잊고 있던 몽진과 천도를 한국인들은 대명천지인 20세기 중반에 경험한 것이다. 그러나 6월28일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은 “정부가 수원으로 이동하더라도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결의하고 이를 서울 시민에게 공포했다. 이 발표는 훗날 “점심은 평양에서”란 방송과 더불어 국민을 기만한 정부의 대명사로 꼽히게 된다. 한편 신성모 국방장관의 결정과는 별도로 채병덕 총참모장은 이날 오전 인민군이 창동으로 진입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서울 방어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만용을 부리는 사람일수록 겁이 많은 법일까? 이날 채총참모장은 공병감인 최창식(崔昌植) 대령을 불러 “인민군이 서울 시내로 들어오기 2시간 전에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이날 오후 3시쯤 최창식 공병감이 “한강 다리 폭파 준비를 완료했다”고 보고하자, 채총참모장은 “육본을 시흥에 있는 보병학교로 이동시켜라”라고 지시했다. 이날 이동을 앞두고 육본은 상당량의 비밀문서를 소각했다. 박정희(朴正熙·당시 33세)는 남로당원을 하다 여순반란 사건 후 군내에서 대규모 숙군작업을 벌일 때 검거되었다(계급은 소령). 당시 군법대로라면 박정희는 사형을 당해야 했다. 그런데 박정희를 좋게 보고 있던 국방부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이 구명운동을 벌여 퇴역시키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그 후 박정희는 문관으로 육본 정보국에 근무하다 전쟁을 맞았다. 당시 육본에는 박정희를 비롯한 군내 좌익사범에 대한 방대한 수사 및 재판 기록이 있었다. 그런데 시흥으로 육본을 옮기면서 이를 태워버렸다. 이 일을 계기로 박정희는 좌익 족쇄에서 자유로워지고, 곧 현역 소령으로 복귀함으로써 장차 5·16을 거쳐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기회를 잡는다. 전쟁이 없었으면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도 없었을 것이다. 김구(金九) 선생을 암살할 당시 안두희(安斗熙)는 육군 중위였다. 6·25전쟁 때 안두희는 육군 형무소에 수감돼 있었는데, 전쟁이 일어나 육본은 안두희를 석방하고 중위로 재임관했다. 이처럼 나라의 존망이 걸린 전쟁시에는 한 순간에 사람의 운명이 뒤바뀌기도 한다. 인민군의 미아리 우회 육본이 시흥으로 막 철수한 이날 저녁 맥아더 원수가 이끄는 미 극동군 사령부로부터 6·25선에 전방지휘연락단을 설치할 것이라는 연락이 왔다. 이로 인해 날이 어두워진 후 채총참모장은 다시 육본을 서울 용산으로 복귀시켰다. 맥아더 원수의 통보는 미아리고개에 포진한 국군에도 ‘미군 참전’으로 과장 전파돼 국군 사기를 크게 올려주었다. 이날 밤 미아리고개에서는 동네 부녀자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국군에 제공하는 등 열띤 분위기였다. 하지만 인민군은 바보가 아니었다. 6월27일 자정을 넘기고 28일 새벽 2시가 되자 인민군은 국군이 포진한 미아리고개를 피해 전차 2대를 홍릉 방향으로 침투시킨 것이다. 뜻밖의 방향에서 적 전차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리자, 서울 시민들은 겁을 먹고 당황해했다. 이미 패배에 익숙해진, 미아리고개에 포진한 국군 병사들은 ‘퇴로가 차단됐다’고 오판하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같은 내용을 보고받은 ‘겁쟁이’ 채병덕 총참모장은 서둘러 강남으로 이동하면서 최창식 공병감에게 한강 다리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한강 인도교와 철교가 거대한 굉음을 울리며 무너진 것은 6월28일 새벽 2시30분쯤이었다. 이때 인도교 위를 걷고 있던 민간인과 군인, 차량들도 교각과 함께 한강으로 떨어졌다. 아비규환. 한강다리 폭파는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미아리고개에 포진해 있던 국군 병사와 서울 시민들을 패닉(panic) 상태로 몰아넣었다. 이날 국군 공병대는 인도교와 철교는 폭파했으나 두 다리 사이에 있던 단선철교 폭파에는 실패했다. 공병대가 단선철교를 폭파하기 위해 재차 폭약을 장전하는데 멀리서 인민군 포격이 날아왔다. 이때 인민군 포격은 매우 엉성했는데도 ‘겁을 먹은’ 공병대는 재폭파를 포기하고 강남으로 철수했다. 한강인도교 폭파 인민군 주력이 서울 시내에 진입한 것은 6월28일 오후 3시쯤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한다면 한강 다리 폭파는 6∼8시간 정도 연기했어야 한다. 그 6시간 동안 아군 3개 사단이 장비와 함께 더 도강할 수가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중요한 것이 병력이다. 장비야 공장에서 재생산하고 급하면 외국에서 도입할 수도 있지만, 병력은 한번 죽으면 20여 년이 지나야 재생산된다. 때문에 적의 공세가 거셀수록 병력을 안전하게 빼내 훗날의 반격에 대비해야 하는데, 채총참모장은 이를 외면한 것이다. 한강 다리 폭파로 인해 서울에 남게 된 국군은 군인이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지켜야 하는 무리가 되었다. 이 무리는 산지사방으로 흩어져(주로 한강 상류 쪽으로 올라가 한강을 도하했다) 밥을 얻어먹으며 남쪽으로 내려간 자기 부대를 찾아야 했다. 이런 와중에도 중대 규모의 국군 결사대가 자생적으로 구성돼, 남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인민군과 최후 결전을 벌이다 전원 사살되었다. 마지막까지 목숨을 바쳐 싸운 것은 별자리들이 아니라 이름 없는 농군 출신의 장병들이었다. 한강 다리 폭파는 다른 국군 부대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춘천 사수”를 외치던 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이 소식을 듣고 이날 저녁 6시쯤 춘천시민에게는 “피난하라”는 말 한마디하지 않고 춘천의 소양교를 폭파하고 원주로 후퇴했다. 봉일천 일대에서 인민군 6사단과 1사단을 악착같이 막아내던 백선엽 대령의 1사단도 사수를 포기하고 한강을 건넜다. 한편 동해안에 포진한 이성가(李成佳·당시 28세) 대령의 국군 8사단은 전창덕(全昌德) 소장이 이끄는 인민군 5사단으로부터 수륙 양쪽에서 공격받았다. 즉 인민군 5사단은 2개 연대를 정면으로 침투시켜 국군 8사단을 압박하고 동시에 1개 연대를 태백산맥 쪽으로 우회침투시켰다. 또 게릴라부대인 766부대와 549부대를 함정에 태워 동해안 곳곳에 상륙시켜 동해안 전체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인민군은 기동전을 펼칠 수 있는 서부전선에서 일점양면 전술과 양익포위 전술을 구사하고, 동부전선에서는 정규전과 비정규전을 배합하는 전술을 구사한 것이다. 이 바람에 8사단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강릉-대관령-평창을 거쳐 제천으로 철수했다. 하지만 8사단 병력은 흩어지지 않았다. 6·25전쟁을 통해 끝까지 사단 편제가 유지된 것은 1·6·8사단뿐이다. 사실 섬이나 다름없는 옹진반도에는 백선엽 1사단장의 동생인 백인엽(白仁燁·당시 27세) 대령이 지휘하는 국군 17연대가 포진해 있었다. 17연대는 연대급 부대인데도 사단 작전 규모(당시에는 80∼90㎞)와 맞먹는 64㎞의 전선을 담당했다. 때문에 ‘육본 작전명령 38호’는 ‘전쟁이 일어나면 17연대는 지연전을 펼치다 해상으로 철수한다’로 돼 있었다. 17연대는 북한 내무성 산하 제3경비여단과 인민군 6사단 예하 14연대의 공격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