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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나지."
"좋은 선택이야."
공청의 말에 풍운조가 대답했다.
옆에서 돌아가는 꼴을 보고 있던 남궁벽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반드시 막겠다고 눈
을 빛내던 공청이 갑작스럽게 물러간다고 한다. 그것도 아무런 일도 없었음에도 불구
하고 말이다.
"운문세가가 망하던 말던 나하고는 별 상관이 없거든. 난 최선을 다해서 도왔어. 다
만 힘이 모자랐을 뿐이지."
싸우려고 한다면 싸울 수는 있다. 비록 풍운조의 몸에서 짙은 피 냄새가 풍긴다고는
하지만 일 각 정도 버틸 수는 있을 게다. 문제는 그 정도가 되면 이곳에 있는 살수들
은 궤멸 될 거다. 잘못하면 자신조차 목숨이 위험할 지도 모른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도울 이유가 없다.
운문세가와는 계약 때문에 돕는 관계지 정(情)에 의해 움직인 게 아니다. 그들이 망
한다면 돈을 많이 주던 협력자 하나를 잃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너희들이 우릴 그냥 보내준다면 우리도 건드리지 않겠어. 좋은 제안 아닌가?"
"허허, 가주 어떻게 하겠소?"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지금 우리가 제압해야 할 상대는 살령대가 아니니까요."
"후후, 유 가주 고맙소이다."
공청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태연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몸을 돌리고 몇 발자국 정
도 걸은 후 공청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검이 다가온 것은 알았지만 피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피하지 못했다.
주륵.
어느새 스쳐 지나간 검 탓에 볼 쪽에서 피가 흘러 내렸다.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피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검이 자신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엄
청난 쾌검이다.
"이게…… 무슨 검법이지?"
"무상검제의 검법이다."
공청은 목소리를 듣기도 전에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두른 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마
치 땅에 발이 달라붙기라도 한 듯이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공청을 향해 여운휘
가 말했다.
"지금은 보내준다. 하지만 다음에 나를 만난다면…… 살 생각을 버려라."
"후후, 경고인가? 아까 나와 싸울 때 전력을 다하지 않았군. 싸울 때는 이런 쾌검을
본 적이 없으니까."
"너 따위에게 보여 줄 검법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재미있군. 그리고 네 말대로 앞으로 널 만나는 것은 고민해 봐야겠어."
몸을 빙글 돌린 공청의 손에서 두 자루의 비수가 여운휘의 미간과 단전을 노리고 날
아들었다. 그리고 그 공격을 여운휘는 단 일수에 쳐냈다.
떨어지는 비수를 바라보며 공청이 말을 이었다.
"그 검을 피할 자신이 없으니까."
만약 아까 싸움을 하던 도중 이런 쾌검이 터졌다면 몇 번은 피할 수 있을지는 모르
나 결국 저 검에 먹혔을 게다.
두 자루의 비수를 잠시 바라보던 공청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
로 초목(草木) 사이로 몸을 감췄다.
많은 사람이 놀랐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놀란 자를 꼽으라면 남궁벽과 남궁혁련
이다.
'과연 무상검제라는 이름은 허명이 아니었구나!'
남궁벽은 순순하게 여운휘의 무공에 놀랐다. 뒤에서 보고 있던 자신조차도 저 사내
가 다가가는 것은 보았지만 검을 휘두르는 것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약관에 이른 사
내의 실력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과연 남궁진이 헛것을 보고 온 것은 아니로구나.'
남궁벽이 여운휘를 보면서 감탄을 하고 있을 때 남궁혁련은 놀람과 더불어 살의를 불
태우고 있었다. 남궁혁련은 이를 갈면서도 나설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 저 검을 피할 자신이 없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어떻게 피한단 말인가. 남궁혁련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간
신히 누군가의 등에 업혀 있는 자신이 못내 초라해 보였다.
'머, 멋지다……'
무공에 놀란 둘과는 다르게 남궁리는 여운휘의 모습만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외모에
반했고, 그의 무공에 다시 반했다. 그리고 여운휘의 사내다운 모습에 그녀는 아예 넋
을 잃고야 말았다.
여운휘는 남궁리가 꿈에서 그리던 사내다.
"그럼 가도록 할까요?"
"그러도록 합시다, 유 가주."
시간이 길어질수록 귀찮아진다.
"남궁세가에서 온 자들은 여기들 남게. 부상자도 많고 와봤자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네."
남궁혁련은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기껏 이곳까지 와서 짐이 되어버렸다. 평소였다
면 그냥 넘겼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럼 우리 넷이서 가도록 합시다."
남궁세가 쪽에선 남궁벽 혼자였고, 악양유가 쪽에서는 유설린과 풍운조, 여운휘가 움
직였다. 운문세가가 도망친 방향 쪽으로 네 명은 경공을 펼쳤다. 비록 살령대가 쉽
게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지금 서둘러 따라잡지 못한다면 도망칠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무슨 계책이 있는 듯 했다. 살령대 하나만으로 그렇게 자신을 부렸을 리는
없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도망칠 때 그들의 표정은 절망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급하
다는 표정은 있었지만 그들의 얼굴에 절망이라는 단어는 새겨져 있지 않았다.
믿는 게 없었다면…… 그런 표정을 짓지는 못했을 거다.
점점 초목이 주변을 메워 간다. 이런 장소라면 검을 휘두르기도 힘들 거다. 불규칙적
으로 놓여져 있는 나무는 진로를 방해했다.
공간을 잔뜩 채운 가지들이 몸을 스쳐지나갔지만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맨 앞에 서
서 달리는 것은 풍운조였다. 그는 살수답게 흔적을 찾는 데 뛰어났다. 여운휘 또한
사곡에서의 생활 탓에 흔적을 찾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렇지만 살수인 풍운조가 그
런 면에선 여운휘보다 한 수 위다.
앞장서서 달리던 풍운조의 눈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온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운휘가 유설린을 감싸 안 듯이 검을 휘둘렀다.
콰앙!
풍운조의 손에서 피가 솟구쳤다. 더불어 앞쪽에 있던 나무가 터져 나갔다. 순간적으
로 내공을 움직이지 않았다면 아마 손이 뭉개졌을 게다.
벽력탄(霹靂彈)이다.
풍운조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앞을 바라봤다. 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전방을
응시하던 풍운조가 몸을 옆으로 돌렸다. 수십 개의 검이 풍운조를 노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타앗!"
옆에 있던 나무를 밟아 다시 한 번 도약한 풍운조는 자신에게 다가온 검을 모두 밑으
로 흘렸다.
파파팍!
검은 뒤편에 있는 나무에 박혔고, 그 검이 박히는 순간 나무 위에서 가루가 쏟아져
내렸다. 여운휘가 재빨리 유설린의 허리를 손으로 두르며 뒤로 뛰어올랐다. 풍운조
와 남궁벽 또한 양옆으로 갈라지면서 그 가루를 피해냈다.
"아무래도 우리는……"
"함정에 빠진 모양이네요."
풍운조의 말을 유설린이 이었다. 이건 지금 준비 한 것이 아니다. 이토록 정밀하게
준비 시켜 놓는 건 하루 이틀만에 되는 게 아니다.
아마 악양유가와 싸우려고 한 순간부터 준비했을 게다.
악양유가의 정보망을 완벽하게 피해버렸다. 이곳은 사람의 출입이 뜸한 구역이다. 더
군다나 지금 있는 이곳은 더욱더 그랬다. 나무만 가득하고 겨울이라 특별히 구해갈
것도 없다. 사람의 침입이 뜸할 테고 이것을 설치 한 자들도 전문적인 자들일 게다.
소문이 세지 않게 엄청난 주의를 가한 모양이다.
더군다나 악양유가의 정보망은 이토록 작은 곳까지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지 못했다.
만약 악양유가의 정보망이 완벽했더라면 아무리 전문적인 자들이 준비를 했다 해도
몰랐을 리는 없다. 하늘을 속이고, 땅을 속였다 해도 사람은 속이지 못한다.
아무리 은밀히 움직였다 해도 결국은 누군가는 알게 된다.
"그나저나 이곳을 나가야 하는데……"
쉽지 않다. 준비해 둔 것이 꽤나 치밀하다. 그렇지만 돌파하는 것이 불가능 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문세가가 이런 수법을 쓴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아마 이곳에서 악양유가의 수뇌부들이 헤매는 동안 본진이 당할 거라고 생각했을 게
다. 운문세가가 악양유가의 저력을 모르는 탓에 행한 행동이다. 만약 알았더라면 이
런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을 거다.
풍운조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봤다. 다행히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그의 머리가 차갑게 식어버렸다.
"후후, 재미있게 하는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풍운조의 눈이 어느 한 곳에 이르는 순간 그의 손바닥에서 장력이 터
져 나왔다.
퍼엉!
나무가 흔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 근처로 암기들이 쏟아져 내렸다.
"내가 이 진법을 파해하도록 하겠소. 천천히 뒤따르시오."
말을 마친 풍운조는 대답도 듣지 않고 앞으로 내달렸다. 사방에서 암기들이 비처럼 쏟아졌
다. 붉은 빛이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곧 하얀빛이 하늘을 덮었다.
그리고 그러한 혼전 속에서 풍운조가 번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양손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막 날아든 비수가 풍운조의 목을 꿰뚫으려는 순간 그의 몸이 지면에 닿을 듯이
눕혀졌다.
몸을 일으킨 풍운조의 눈은 여전히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직은 쉴 때가 아니다. 언제
이 진법이 깨질지 모른다 해도 풍운조는 멈추지 않을 거다. 손에 난 상처에서 아직도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고 있다.
풍운조는 옷소매를 찢더니 손을 감쌌다. 하얀 색이었던 옷이 순식간에 붉은 색으로 변했
다. 손에서 찜찜한 축축함이 밀려왔지만 풍운조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신형이 하늘을 나는 듯이 나무를 박찼다. 반동으로 옆에 나무로 이동한 풍운조의 양
손바닥이 다시 한 번 바람을 가르며 휘둘렸다.
그의 양손에서 음유한 장법이 뿜어졌다. 풍운조는 앞장서서 모든 기관을 망가트리고 있었
다. 기관이란 무릇 시작점이 있는 거다. 아무런 것도 없이 기관이 되는 건 아니다. 그 시작
점을 파괴한다면 그 기관은 무용지물이 되게 된다.
물론 그 시작점을 아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알아차리는 것이 쉽다면 그 누가 진법을 이용
할 것인가. 진법은 상상 이상의 시간과 돈이 들게 된다. 아마 운문세가와 악양유가가 부닥
치는 것에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기관은 보다 치밀해져 있었을 게다.
운문세가는 기관을 설치하면서 두 가지의 실수를 범했다.
시간이 없었기에 기관이 단조로워졌다. 그것은 곧 기관을 아는 자가 본다면 쉽게 뚫렸을
거라는 거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들은 풍운조의 존재를 몰랐다.
풍운조는 기관의 전문가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살수다. 설치하는 쪽은 문외한이지만 기
관을 보는 눈 정도는 충분하다.
기관이 파해되고 있었다. 애초에 시작하는 점이 부서지면 그 기관은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
지 못한다. 그 탓에 뒤에서 따르고 있는 나머지 셋은 별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서 산책
을 하듯이 걷고 있었다.
"유 가주에게는 대단한 자들이 많구려."
"제가 인복은 있는가 봅니다. 모두 저에겐 과분한 사람들이지요."
"허어, 못난 사람의 밑에는 못난 사람만 모이는 법이요. 유 가주가 그만한 그릇이 되기에
이만한 자들이 모이는 것이 아니겠소."
남궁벽은 진정으로 감탄했다.
가주의 두 측근 모두 엄청난 실력을 지녔다. 젊은 사내야 어느 정도 무림맹에서 이름이 회
자되고 있지만 저 노인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런데 그런 노인의 실력이 남궁벽 또한
놀랄 정도다. 저 정도 수준이라면 자신마저도 승부를 장담할 수는 없다.
남궁벽은 풍운조에 대해 나름대로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피하시오!"
여운휘는 외침을 듣는 순간 다시 한 번 유설린의 허리를 감싸 안고 뒤로 움직였다. 아니,
이번엔 움직였다기 보다는 뒤로 치달렸다고 해야 옳다.
콰앙!
어마어마한 소리와 함께 나무들이 박살났다. 소리가 귀를 때리는 순간 여운휘는 유설린을
감싸안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흙먼지가 하늘을 덮을 정도로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흙먼지
가 가라앉을 때쯤 남궁벽은 혀를 찼다.
'미친…… 아예 산 하나를 날리려고 작정을 한 것인가.'
이백여 장에 달하는 넓은 장소에 있던 나무가 흔적도 없이 박살나 버렸다. 이 정도라면 벽
력탄 몇 개를 퍼부은 것인가. 남궁벽은 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신도 간신히 사정
거리에서 벗어났지만 날아든 나무파편에 온 몸에 상처들이 생겼다. 옷은 찢어져 너덜거렸
고, 얼굴에는 꽤나 깊은 상처가 생겼다.
자신도 이렇거늘 한 여인을 데리고 달린 그 사내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자신과는 다른 방
향으로 달렸던 그 사내를 찾기 위해 남궁벽은 움직였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남궁벽뿐만
이 아니었다. 풍운조 또한 급하게 나무 아래로 뛰어 내려와 여운휘가 달렸던 방향으로 향
했다.
이런 기관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아까도 벽력탄 하나가 날아오긴 했지만 그건
겨우 한 개였다. 그 충격은 반경(半徑) 사, 오장 정도 밖에 이르지 않았을 거다.
풍운조와 남궁벽은 얼마 달리지 않아 그 둘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마치 목석처럼 그대로
굳어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풍운조는 차마 무슨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여운휘의 등이 만신창이로 변해 있었다. 나무파편들이 셀 수도 없이 등에 박혀 있다. 그나
마 다행이라면 머리를 숙였던 탓인지 목 위는 멀쩡하다는 점이었다. 혼자였다면…… 분명
피할 수 있었을 게다.
"괘, 괜찮은가?"
남궁벽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석처럼 굳어 있던 여운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
다. 옷이 검은 색인데도 불구하고 붉은 빛이 보인다. 이 정도라면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
지 알만도 하다.
일어난 여운휘의 말은 남궁벽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괜찮아?"
"응."
남궁벽은 자신의 질문이 먹혔음에도 불구하고 감탄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저토
록 상처를 입어 놓고 상대방의 몸을 먼저 생각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정파의 무인들이 협의(俠義)를 외친다. 그렇지만 정작 자신의 몸을 버리면서 다른 사
람을 구하는 자가 몇이나 될까?
많지 않다.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자가 흔하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거다. 누구나 자신의 목숨이 최우선이다.
"빨리 갑시다. 선물을 준 대가를 받아야겠으니."
"이봐 너는……"
"……"
무리라고 쉬고 있으라 말하려 하던 풍운조는 여운휘의 눈을 보는 순간 말을 멈췄다. 자신
의 말이 통할 상대는 애초부터 아니었다. 결코 물러날 눈이 아니다. 말해봤자 먹혀 들어갈
상대도 아닌데 굳이 시간만 축낼 필요는 없다.
여운휘가 유설린을 일으켜 주면서 말했다.
"앞에 서."
여운휘는 자신의 등을 유설린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상처투성이인 자신의 등을 본다면
분명 그녀가 슬퍼할 것을 알기에.
그렇지만 유설린은 이미 풍운조와 남궁벽이 오자마자 보냈던 시선을 보고 어느 정도 상황
을 파악한 상태였다. 그녀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상처 치료 먼저 하고 가자."
"그러면 도망갈지도 몰라."
"상관없어. 나한테는 휘가 우선이니까."
유설린이 쉽게 물러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느꼈는지 여운휘는 조용히 다시 자리에 앉았
다.
"간단하게 파편만 빼. 그 정도로도 지금은 충분하니까."
여운휘의 뒤에 앉은 유설린이 조심스럽게 파편을 하나씩 빼냈다. 처음엔 풍운조가 하겠다
고 나섰다. 그렇지만 그녀는 풍운조의 말에 고개를 저으면서 자신이 하겠다는 의사를 내비
쳤다.
"아프지?"
"별로."
아프지 않을 리가 없다. 대단한 인내심을 가지 않고서는 이토록 태연할 수는 없을 거다. 남
궁벽은 감탄 할 수밖에 없었다.
'파편을 뽑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 터인데……'
여인으로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거다. 파편을 뽑는 사람이나, 그럼에도 태연한 사람이
나……
파편을 다 뽑자 여운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은 없다.
"내 생각이지만 아마 멀지 않은 곳에 운문세가의 인물들이 있을 듯 하구려. 방금 본 그 벽
력탄은 아마 최후의 발악으로 보이오."
"아무래도 그럴 확률이 높긴 하오."
풍운조의 짐작을 들은 남궁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이토록 큰 일을 벌인 것은 그들의 마지막 보루를 지키기 위함이다.
"그럼 빨리 가도록 하죠. 그들이 도망칠 지도 모르니까요."
도망쳤다 해도 이제는 상관없다. 남궁세가는 이제 운문세가를 공격할 명분을 얻었다. 벽력
탄은 무림에서 사용을 금기시한 물품이다. 그런 물건을 운문세가가 사용했다.
공격할 명분은 충분하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남궁세가가 이 싸움에 끼여 든 것을 밝혀야 한다. 그건…… 그다
지 내키지 않는다. 가능하면 지금 끝내야 한다. 그게 남궁세가나 악양유가에게는 최선의
방법이다.
여운휘는 상처를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는 묵묵히 유설린의 옆을
지키면서 달릴 뿐이다.
경공을 펼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넓은 공터가 눈앞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는 약 삼십여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맨 앞에는 운마연과 서유종, 그리고 운문세가
의 둘째인 운금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잘 왔다!"
운마연은 여유가 있어 보였다.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여유가 있다. 무엇인가 믿는 게 있는
모양이다. 풍운조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주변을 살폈다. 넓은 공터라 특별히 기관
을 설치 할 장소가 없다. 설령 있다 해도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못할 거다.
'혹시 독질려(毒疾藜)를?'
독질려는 도깨비 풀 형태의 암기다. 날카롭게 되어 있는 침 4개에서 6개 정도를 교차 시켜
서 꼬아 놓은 암기로 땅에 뿌리게 되면 어느 한쪽이 반드시 하늘로 향하게 하는 암기다.
그리고 그 끝에 극독을 묻혀 놓았다면 무서운 살인병기가 된다.
"하하! 넷을 제하고는 모두 죽은 모양이지?"
"운 가주, 미안하지만 아까 그 이후로 단 하나도 죽지 않았소이다."
"분명…… 터지는 소리를 들었는데 무슨 거짓말이냐! 나잇살만 쳐 먹어 가지고는 벌써 정
신이 오락가락하는 거냐?"
옆에 있던 운중행이 나섰다. 그의 이죽거리는 말투에 풍운조가 살며시 손을 움켜쥐었다.
일전에 악양유가에 왔을 때도 흠씻 패고 싶었던 적이 있다. 악양유가에서 꽤 오랜 시간 감
금(監禁)을 당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기가 살아 있다.
그때는 포로였어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운중행을 건드
렸다하여 뒤탈이 날 이유가 없다.
"운 가주.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오."
"너희들은 지금 우리를 쫓느라 한 가지를 잊고 있었어. 지금 우리 두 세가가 부닥치고 나
서 얼마의 시간이 지난 줄 아나? 무려 한 시진이야. 한 시진이면 운문세가의 무인들이 너
희 악양유가의 잔챙이들을 쓸어버리기 충분한 시간이지."
운마연이 자신이 있던 이유는 이거였다. 반 시진이라면 충분할 정도의 상대다. 그런데 벌
써 한 시진 이상이 흐른 상태다. 반 시진이라면 근처까지 다 다르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운 가주님."
"호오, 왜 그러시나 유 가주?"
운마연이 능글맞게 웃었다. 웃음을 터트리자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던 유설린도 마주 웃음
을 흘렸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운마연의 마음에 일순 불안이 몰아닥쳤다.
억지 웃음이 아니다. 자신감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웃음이다. 그리고 저런 웃음을 지은 후
엔 항시 자신들에게 안 좋은 일이 벌어졌다. 불안한 건 옆에 있던 서유종 또한 마찬가지였
다. 그는 가주를 대신해서 열리지 않는 입을 띠었다.
"뭐가 그리 좋은 거지? 너희들은 이미 끝난 거야."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지금 운문세가 쪽에서 한 예상은 틀렸어요. 지금 그들은 이곳으로
오지 못할 테니까요."
"건방진 소리! 무엇을 믿고 그런 허튼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기다려 볼까요? 올지…… 아니면 아무도 오지 않을지."
무슨 말인가를 내뱉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운마연과 운금행, 그리고 서유종 셋
은 머리가 있다. 그런 그들이기에 왠지 뭔가가 꺼림칙했다. 그렇지만 운중행은 이겼다는
생각과 유설린을 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신이 나서 외쳤다.
"이 계집애야! 시끄럽게 주둥이 나불거리지 말고 오늘 밤 걱정이나 해라!"
"오늘밤을 걱정해야 할 것은 제가 아니라 운 소협일 겁니다."
"미친……"
그때 옆쪽에서 약 이십여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등장에 운마연
은 가슴에 얹혔던 걱정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왔는가!"
"가주님!"
맨 앞에 있던 자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던 나머지 무인들도 모두 마찬
가지의 행동을 취했다. 운마연은 당황했다.
"왜, 왜 그러는 가? 다른 자들은 다 어디 있느냐!"
"죄송합니다 가주님!"
더 이상 말이 무엇이 필요하랴. 죄송하다는 말에 운마연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운중행과 큰아들인 운산천만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무엇이 죄송하고 무엇 때문에 자신의 아비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인가.
"아버지 왜 그러시죠? 저 계집년이나 잡아서……"
"닥쳐라!"
찰싹!
운마연의 손이 운중행의 뺨을 올려붙였다.
끝났다, 모든 게.
운중행은 아직도 왜 자신이 뺨을 맞았는지 모르는 얼굴로 자신의 아버지인 운마연을 바라
봤다.
서유종은 주변을 둘러봤다. 이 쪽의 수는 오십에 달한다. 그리고 저쪽은 고작 네 명이다.
그렇지만 승산은 이미 뻔하다. 이쪽에 있는 무인들도 그다지 대단한 자들이 아니다. 그렇
지만 저쪽의 네 명은 정예 중에 정예다. 싸워봤자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운마연이 입을 열었다.
"…… 졌다."
완벽하게 졌다. 아주, 완벽하게.
도약(跳躍)
혼전이 있었다.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운문세가의 일선이 악양유가의 삼
류무사들에게 처참하게 무너졌다. 아니, 정확하게 하면
백중세를 유지했다고 봐도 좋다. 밀리지도, 그렇다고 밀
지도 못했으니까.
그런데 싸움 후 결과는 극을 달리했다.
이런 결과가 있을 거라고 예상한 운문세가의 무인은 아
무도 없었다. 그들은 분명 비슷한 힘으로 격돌했다. 이쪽
에 피해가 많다면 분명 저쪽도 그래야만 한다.
운문세가 쪽에서 죽은 무인의 수는 모두 합하여 백 명에
달한다. 그런데 악양유가에서 죽은 무인의 수는 고작 스
물 셋이다.
갑절도 넘어서는 차이다. 솔직히 말이 되지 않는 수치
다. 이 정도라면 밀렸어야 옳다. 처음부터 끝까지 엇비슷
했다.
사람들은 악양유가의 저력에 놀랐다. 수많은 고수를 영
입한 운문세가를 큰 차이로 눌러 버렸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일을 가지고 내기를 한 사람도 많다. 승률
은 이대 팔.
물론 이 할로 점쳐지던 세력은 악양유가다.
이번 싸움으로 인해 어느 정도 악양유가를 얕보고 있던
주변의 세가들도 모두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호남의 힘
은 운문세가에서 자연스럽게 악양유가로 넘어온 것이다.
싸움이 끝나고 한 달간 악양유가 내부는 상당히 바빴다.
풍운조는 정말 쉴 새도 없이 움직인다는 것이 무엇인지
몸으로 실감했다.
바쁘기는 했지만 그래도 평화로웠다. 한동안 드리워졌
던 먹구름이 걷히자 세가 내에서도 웃음이 많아졌다. 그
렇게 조용한 시간들이 흘렀다.
능려운은 악양유가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침상 신세를 져
야 했다.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무리한 움직임으로 인
해 상처가 덧나 버린 것이다. 약 보름 간 침상에 누워 있
던 그가 일어나자 우문학이 그를 찾아왔다.
막 침상에서 일어나서 나갈 준비를 하던 능려운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우문학을 발견했다.
"이제 몸은 괜찮은가?"
"아, 우문학. 이제는 아주 멀쩡합니다."
"자네도 뼈가 꽤 단단한 모양이야."
피식 웃으며 장난처럼 가슴으로 주먹을 두드린 우문학
이 입을 열었다.
"술 한잔 어떤가?"
"진자자가 아시면 경치실 소리를 하시는군요."
몸이 성치 않은 사람에게 술은 좋지 않다. 그 탓에 진자
자는 능려운에게 약 한달 간 술을 먹지 말라고 말했던 것
이다.
주변을 둘러보던 우문학은 진자자가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말했다.
"그는 여기 없지 않은가."
"하하, 그건 그렇군요. 그럼 갈까요?"
"역시 자네는 화통하단 말이야."
우문학은 능려운을 데리고 세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근처에 자신이 자주 가던 객잔을 찾아 안으로 들어섰다.
점소이는 우문학을 익히 아는 지 고개를 숙였다.
주당으로 유명한 우문학이 단골인 집이다. 점소이가 그
를 모를 턱이 없다.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은 우문학과 능려운은 간단한 요
깃거리와 술을 주문했다. 그렇게 둘은 주거니 받거니 하
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문학과 능려운 모두 적당히 취기가 올랐다. 그때 우문
학이 본격적인 속내를 털어놓았다.
"능 소협."
"음? 왜 그러십니까 우문학."
갑작스럽게 변한 그의 진지한 모습에 시종일관 웃고 있
던 능려운은 웃음을 거두었다. 그의 눈빛이 운문세가와
일전을 겨루기 바로 전처럼 진지하게 변해 버린 것이다.
"능 소협은 내 실력을 어찌 생각하시오?"
"실력을 말입니까?"
말할 필요가 무엇인가. 자신보다 강한 고수를 단 일검에
베어버린 실력이다. 자신이 평가 할 수준이 아니라는 거
다. 자신을 아무리 높게 쳐도 우문학과 겨루게 된다면
몇 초 버티지 못할 게 분명하다.
"제가 뭐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 실력이 부럽습니다."
"그런가?"
우문학은 자신의 잔에 담겨 있던 술을 목구멍 안으로 쏟
아 부었다. 주변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들어오지 않는
다. 우문학의 눈에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한 사내의
모습만 가득 들어왔다.
"난 자네가 맘에 들어."
막 우문학의 잔을 채우고 있는 능려운에게 그가 말했다.
그저 호의라고 생각하며 웃고 있는 능려운은 이어지는
우문학의 말에 술병을 떨어트릴 뻔했다.
"내가 자네에게 무공을 가르쳐줬으면 하는데 어떠한가?"
"…… 그 말이 정녕 진실이십니까?"
여운휘에게 받은 비급으로 무공을 익힐 수는 있다. 그리
고 종종 그와의 비무로 실전 경험도 쌓을 수 있다. 그렇
지만 사부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 한 게 한 두 번이 아니
다. 사부가 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이다.
"내 독문무공의 이름은 혈풍구룡검법(血風九龍劍法)이
라고 하지. 배울 맘이…… 있소?"
두말 할 필요도 없다. 강해지고 싶은 이 마당에 무엇을
망설이랴.
"물론입니다."
"무공을 가르칠 때 엄할 거요. 그래도 괜찮겠소?"
능려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엄한 것이 무슨 상관인가.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길에
한 걸음 더 나가갈 수 있을 터인데. 우문학은 능려운의
결의에 찬 눈빛을 보고 피식 웃으며 다시 한 번 술잔을
기울였다.
내일부터는 바빠질 거다. 태어나서 생전 처음으로 제자
를 받아들여야 할 테니까.
그러니까 오늘만은…… 취해보련다.
늦은 밤이다.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차가운 바람이 방 안을 밝
히고 있던 유등(油燈)을 흔들었다. 불빛이 흔들리니 당
연히 그림자마저 춤을 춘다. 그렇게 적막했던 방문을 누
군가가 두드렸다.
"가주님."
"무슨 일이죠?"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유설린을 밖을 향해 물었다. 당일
이 다시 안을 닫힌 문 건너에 있는 유설린에게 말했다.
"객(客)이 찾아오셨습니다."
"객이요? 이 늦은 밤에 누가 오셨다는 거죠?"
벌써 시각은 축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 누가 이런
늦은 밤에 세가를 찾아와 가주를 찾는단 말인가.
여운휘가 문을 열자 당영이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오며
고개를 숙였다.
"이 늦은 밤에 왔는데도 불구하고 저에게 말해주는 것
을 보니 보통 객은 아닌 듯 한데 맞나요?"
"예. 문을 지키던 무사가 처음엔 그 분을 막았습니다만
정체를 듣고 제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이런 늦은 밤에 세가에 찾아온 사람을 쉽게 안으로 들였
을 리가 없다. 문을 지키던 무사 또한 이 밤에 찾아온 자
가 가주를 만나자고 하자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했
다. 그렇지만 그 무사 또한 그 객의 정체를 아는 순간 그
리 쉽게 행동 할 수가 없었다.
"찾아온 자가 광한검(光寒劍)입니다."
"광한검 누남천?"
"예. 그 분이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당영의 얼굴에 어느 정도 흥분이 보인 것 그 때문이다.
광한검 누남천은 무림맹의 수뇌부 중 하나로 쾌검의 고
수다. 그런 그가 직접 이곳까지 찾아왔다.
"어서 그 분을 운곡당(雲谷堂)으로 모시세요."
유설린이 말하자 당영이 그 말을 알리기 위해 직접 달려
갔다. 그리고 그가 사라지자 유설린은 여운휘를 바라봤
다.
"시작인 것 같군."
"응. 누남천 정도 되는 자가 아무 이유도 없이 찾아올 리
는 없잖아."
"기회다. 절대로 놓쳐서는 안 돼."
"알고 있어. 그럼 우리도 가자."
고개를 끄덕인 여운휘는 검을 허리에 차고 밤을 가르며
걷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몸을 드러냈다. 중년을 넘어서 거
의 노년에 가까워지는 듯한 사내는 방 안에 있던 유설린
과 여운휘를 바라봤다. 그 둘은 서서 그 사내를 받아들였
다.
"누 대협이신가요? 처음 뵙겠습니다. 악양유가의 가주
유소화라고 해요."
"진군휘요."
유설린과 여운휘는 정파 쪽에서 활동하기 위해 만든 이
름을 내뱉었다. 누남천이 여운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
다.
"한 번 보고 싶었지. 자네가 무상검제님의 검을 이어 받
았다고 하더군. 뭐, 내가 온 것 무림맹과는 그다지 관계
가 있지는 않아. 남궁벽이 자네의 검을 보고 난 후 소감
을 말해줬거든. 그 소리를 들으니 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달려왔네. 그 탓에 이런 늦은 밤에 방문하는 결례
를 범하게 됐지."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번 운문세가와의 결전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하네. 그
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차에 악양유가가 이겼다고 하
니 기분이 좋더군."
"먼 길을 오셨는데 차라도 한 잔 하시지요."
유설린이 하녀를 부르려고 하자 누남천은 손을 들어 제
지했다.
"됐네."
차나 마시러 이리 먼 거리를 달려 온 것이 아니다. 누남
천은 보고 싶었다. 무상검제의 검을. 쾌검의 극을 보았다
고 알려진 무상검제의 검을 그는 동경해 왔으며, 항시 어
떨지 고민해 왔다.
누남천 또한 쾌검의 고수였으니 당연한 거다.
그의 눈이 여운휘에게 박혔다.
"자네의 검을 보고 싶군. 정확히 말하자면 무상검제님에
게서 물려받은 그 쾌검을 보고 싶네."
"그럼 밖으로……"
"밖으로 나갈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누남천은 품안에서 작은 침 하나를 꺼내 손을 들었다.
그 침은 무척이나 얇아 눈으로 확인하기도 힘들 정도였
다. 누남천은 여운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침을 베어 봐."
침을 베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록 얇은 침이라고 하나 숙련된 무인에
게는 그다지 힘들지 않다. 그렇지만 베는 게 전부는 아닐 게다. 겨우 그거
하나를 보려고 누남천 정도 되는 인물이 이런 먼 거리를 발걸음 했을 리가
없다.
눈가 근처로 들어올린 침. 검을 확인하려는 거다.
여운휘가 검을 빼들고 누남천에게 다가왔다. 거세게 부는 겨울 바람이 운곡
당의 문을 흔들었다.
덜커덩~
문이 덜컹거리는 순간 여운휘의 검이 출수 됐다.
쉬익!
누남천은 조용히 침을 바라봤다. 길이가 아까에 비해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는 태연하게 침을 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저 정
도 나이에 이 정도 쾌검을 구사할 수 있는 자는 현 무림에 없다.
그렇지만 누남천은 크게 만족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제자였다
면 모를까 이 앞에 있는 남자는 무상검제 진군악의 후손이다. 자신이 동경
하던 인물이었던 탓인지 누남천은 왠지 모를 부족함을 느꼈다.
'음!'
만족을 하면서도 어느 정도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던 누남천은 어떠한 사실
을 깨닫고 급히 고개를 들었다.
소리, 소리를 듣지 못했다.
'…… 침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분명 그 크기가 작았다지만 그 정도도 듣지 못할 누남천이 아니다.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그가 작다고는 하나 침 같이 쇠로 된 것이 떨
어지는 소리를 놓쳤을 리가 없다.
누남천은 침묵했다. 그때 여운휘가 갑작스럽게 검을 들이밀었다. 분명 그
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목을 향해 검을 들이밀었다는 것은 상대
를 도발하는 거나 다름없다. 처음엔 흠칫 했던 누남천은 곧 놀라고야 말았
다.
검날의 위에 작은 침이 올려져 있었다.
"흐음……"
할 말이 생각나지 않자 그는 침묵했다.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긴 듯이 가만히
앉아 있는 그는 돌부처였다. 억겁의 시간도 그대로 흘려 보낼 것 같던 누남
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탄(驚歎) 할 수밖에 없군."
쾌검으로는 현 무림에 자신 보다 뛰어난 자는 다섯도 되지 않을 거라는 자
부심을 가지고 있는 그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이런 쾌검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과연 무상검제님의 검이야. 빠르기만 할 뿐만 아니라 변화가 있어."
누남천은 진정으로 놀랐다. 겉모습은 태연했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심장
이 두근거리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나가 비무를 해보자고 하
고 싶다. 그렇지만 이렇게 찾아와 무턱대고 비무를 하자고 하는 것도 우스
운 게다.
배분의 문제다. 자신이 한참은 어린 사내에게 비무를 신청 할 수는 없는 일
이다. 누남천은 근질거리는 입을 참아내며 슬며시 웃음을 흘렸다.
"무림에 또 하나의 신성(晨星)이 모습을 드러냈군."
누남천은 진실로 흡족했다. 현재 무림맹과 마교는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태다. 당장이라도 싸움이 벌어진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
다. 이런 시기에 이 정도 되는 고수의 등장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문제다.
여운휘를 보면서 웃음을 흘리고 있던 누남천이 속내를 털어놓았다.
"나와 함께 무림맹에 가지 않겠느냐?"
"지금 말이오?"
"지금 당장은 무리고, 날이 밝은 후의 이야기겠지. 어떤가? 무림맹에 나와
같이 갈 마음이 있는가?"
누남천의 말은 여운휘도 예상치 못했던 말이다. 무림맹에서 어느 정도 관심
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토록 자신을 초청할 거라고는 생각한 적 없
다.
솔직히 말해 당장은…… 무리다.
여운휘가 막 거절의 의사를 표명하려는 순간 유설린이 말을 가로챘다.
"내일, 내일 아침에 말씀드릴게요.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 조금 있어서요."
"그러겠는가?"
"예, 그러니 다른 곳에서 잠시 눈이라도 붙이고 계시지요."
"알았네. 그럼 난 먼저 일어나지."
누남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당영의 안내를 받아 새벽을 보낼 거처로 향했
다. 그들이 나가고 얼마간 유설린과 여운휘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침묵이 흐른 후에 여운휘가 입을 열었다.
"지금은 무리다."
"왜?"
"지금 당장은 네가 할 일이 너무 많아."
"초청을 받은 건 내가 아니고 휘야."
"하지만……"
분명 여운휘가 지금 이곳에서 할 것은 없다. 솔직히 말해 지금은 분명 호기
다. 무림맹의 수뇌 중 하나인 누남천이다. 그런 그가 찾아와 같이 무림맹에
들어갔다면 여운휘의 이름은 사람들의 입에 거론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기회라 해도 여운휘는 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난 갈 수 없지만 넌 갈 수 있잖아."
"널 혼자 두고 간다는 게 내키지 않아."
"걱정 마. 모든 일이 끝나면 그때는 내가 무림맹에 찾아갈게. 특별한 일도
없으니까 내 주위를 지키는 건 유가에서 온 무인들과 풍 노야로 충분해.
가, 지금은 기회야. 나 혼자로는 복수를 할 수 없다는 거 잘 알잖아."
언제나 둘이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은 안다. 세가뿐만이 아니라 무림맹에서
알아주는 고수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몫을 해야 하는 건 여운휘다.
해야 할 일이건만 여운휘는 내키지 않았다. 언제나 함께 하는 그림자처럼
지켜준다고 했거늘 이제는 떨어져야 한다. 그것이 여운휘는 내키지 않았던
거다.
그런 여운휘의 마음을 알아차린 유설린이 작지만 또렷한 어투로 말했다.
"내 모든 것을 지켜준다고 했잖아. 지금 휘가 가는 건 나에게서 멀어지는
게 아니야. 나의 꿈을 지키기 위해 가는 거지. 수호령이란 건 그런 게 아닐
까? 그 사람의 꿈까지 지켜주는 그러한 것. 단순히 목숨을 지켜주는 건 호
위무사일 뿐이야."
유설린의 단호한 말을 들은 여운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유설
린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여운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 몸조심해."
"걱정하지 마. 내 몸 하나는 간수 할 수 있는 여자라는 걸 잘 알잖아."
어른인 양 의젓한 모습을 보이는 유설린을 보며 여운휘는 눈을 감았다. 유
설린을 만난 이후로 그녀로부터 떨어져 본 적이 없다. 항시 같이 했으며 이
제는 둘이 하나라고까지 느껴질 정도다.
여운휘는 쓸쓸함을 모른다. 항시 혼자 지내왔고, 그것이 당연스럽다고 생각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여운휘는 아직 헤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를 쓸쓸함을 느꼈다.
"절대 다치지 마. 만약 네가 다친다면 상대가 설령 현 무림 최고 고수인 강
호십일객의 일마라 할 지라도 편하게 죽지 못하게 해 줄 테니."
여운휘의 말에 유설린이 웃었다. 세상 그 누가 저 같은 말을 내뱉을 수 있겠
는가.
술자리에서 장난으로라도 저런 말을 내뱉지 않는다. 그 정도로 일마라는 이
름은 무림에서 지고한 지존(至尊)의 위치에 있다.
하지만 여운휘는 그렇지 않다. 그는 말을 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사내다. 설
령 일마에 의해 유설린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는 싸울 거다. 그리고 자신
이 말한 바대로 결코 편하게 죽지 못하게 만들 거다.
그는, 그런 사내다.
"금방 갈게. 휘도 몸조심해."
그런 그를 알기에 유설린은 모든 걸 맡길 수 있다.
다음날 동이 틀 무렵 여운휘는 유설린과 함께 우문학을 찾아갔다. 우문학
은 잠에 빠져 그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쓰러져 있었다. 몸에서 풍기는
술냄새를 보니 어제 과음을 한 듯 하다.
누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코를 골면서까지 자는 그를 보면서 여운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자가 저랬다면 속으로라도 혀를 찼을 게다.
문제는 지금 코를 골고 있는 사내가 우문학이라는 거다.
결코 방심하지 않는 자다.
"우문학."
유설린의 목소리가 들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코고는 소리가 사라졌다. 우
문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이른 아침에 무슨 일이십니까?"
"오늘 당신에게 용무가 있는 건 나다."
여운휘의 말에 우문학은 고개를 돌렸다. 여태까지 특별히 말도 나눠 본 적
이 없는 사내다. 그런 사내가 자신에게 용무가 있다 하니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흐음, 자네가 무슨 일이지?"
"오늘 난 무림맹으로 갈 거다."
"무림맹?"
갑작스러운 여운휘의 말에 우문학은 반문하듯이 물었다. 우문학을 내려다
보던 여운휘가 입을 열었다.
"내가 이곳에 온 용건은 가주의 안위를 위해서다. 내가 없는 동안 일조가
가주를 보살피라는 말을 하려고 왔다."
"그거야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럴 텐데 뭐하러 이른 아침에 사람 잠을 깨우
는 건가?"
"경고를 하러 왔다."
"경고?"
"가주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첫째로 그 문제를 일으킨 자를 죽일 거다.
그리고 둘째로 가주를 지키지 못한 너희를 죽일 거다."
우문학이 말 없이 여운휘를 노려봤다. 한동안 여운휘를 계속해서 노려보던
우문학이 피식 웃었다.
"알았다. 알았어. 네게 뿐만이 아니라 가주는 내게도 중요한 사람이다. 나
또한 목숨을 걸고 지키지."
우문학의 말을 들은 여운휘는 몸을 돌려 그의 방에서 나가버렸다. 용무는
이제 끝났다는 듯한 그의 태도에 우문학은 둘이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웃음
을 터트렸다.
우문학의 방을 나선 유설린과 여운휘는 누남천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
미 모든 준비를 끝마친 누남천이 여운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누남천이 입을 열었다.
"가겠는가?"
여운휘는 뒤에 서 있는 유설린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
는 순간 여운휘는 고개를 돌렸다.
"가겠소."
장강수로십팔채(長江水路十八寨)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그다지 춥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이 길게 나열되어 있는 구름은 마치 동물들의 장난처럼 보인다.
앙상하지만 나무가 가득한 대지로 젊은 사내와 노인 하나가 걷고 있다.
그 둘은 쉬지도 않고 움직였거늘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뒤에서 따르며 노인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이 곱지 않다. 침묵을 유지 한 채
로 묵묵히 걷던 사내가 마침내 속에 든 마음을 털어놓았다.
"이쪽은 무림맹을 향하는 곳이 아닌 듯 하오만."
"그래, 우린 지금 무림맹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니지."
"설마 날 속인 거요?"
"아니. 무림맹을 나왔을 때는 다 이유가 있어 서지. 할 일이 하나 있어."
"간다는 것이 어디요?"
"장강수로십팔채(長江水路十八寨)의 수적 놈들을 만나보러 가는 게야."
장강수로십팔채라 함은 수적들이 모인 곳이다. 그들은 양자강을 무대로 노
략질을 하던 수적들로 열 여덟 개의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리고 이들
이 모여서 연합하여 만든 거대 방파를 장강수로십팔채라 칭한다.
이들은 어떻게 보자면 녹림에 속하는 자들이다.
누남천은 정파인이다. 그것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을 지
닌 노인이다. 그런 그가 장강수로십팔채를 찾아가고 있다. 정(正)보다는 사
(邪)에 가까운 그들에게 무엇 때문에?
분명 이유가 있을 거다. 누남천 정도 되는 자가 괜한 걸음을 했을 리가 없
다.
여운휘는 묻지 않았다. 어차피 곧 알게 될 일일 테니까.
겨울에 노숙을 한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몸이 굳고 정신까지 혼미해진다. 아무리 건강한 장정이라 해도 한겨울에 한
풍(寒風)을 맞으며 잠일 잔다면 다음날 동사하기 십상이다. 차라리 밤을 새
면서 걸으면 걸었지 그건 미친 짓이다.
그런데 그런 상식을 무시하면서 한 사내와 노인은 불을 피우고 있었다. 노
숙을 하려는 모양이다.
여운휘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서 막 목을 축이던
누남천이 전낭 안에서 건포를 꺼내 던졌다.
"곧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게야."
"장강수로십팔채의 총채주를 찾아가는 거요?"
"그래."
입을 다문 누남천이 건포를 입에 물었다. 나이가 많은 만큼 그는 왜소한 몸
의 노인이다. 어딜 가나 쉽게 볼 수 있는 옆집 할아버지 같은 외모다. 이 추
운 겨울에 이런 곳에서 자고 어떻게 할까하는 걱정이 자연스럽게 일 정도
다.
그렇지만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 할 수는 없다. 비록 왜소한 체구에 그다
지 눈에 뜨이는 외모는 아니지만 그것만으로 누남천을 평가할 수는 없다.
그는 추운 바닥에 아무것도 깔지 않은 채 벌렁 몸을 뉘였다. 양팔로 머리를
받치고 누워 있는 모습이 마치 유람이라도 온 듯 하다.
여운휘는 건포를 다 먹고 조용히 나무에 몸을 기대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
다. 많은 생각이 머리 속을 교차한다.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이건 반드시
잡아야 할 기회다.
나무에 몸을 기대고 있던 여운휘의 양미간이 갑자기 꿈틀거렸다. 그리고 손
은 아래로 눕혀져 있는 검으로 향했다.
검 손잡이를 움켜 쥔 여운휘는 조용히 전방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기척
이 들린다. 누남천 또한 언제 잠들었냐는 듯이 순간 눈을 번쩍 떴다. 허나
그건 한 순간이었고 곧 피식 웃음을 흘린 그는 눈을 감았다.
여운휘 또한 검을 쥐고는 있지만 전방을 향하고 있는 눈은 짜증난 듯 해 보
였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이십여 명에 달하는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중 맨 앞에 있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안녕들 하신가!"
"……"
노인은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 사내는 자신을 바라보는 여운휘를 보면
서 소리쳤다. 그런데 반응이 없다. 자신이 온 것을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된
다. 자신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사내를 보며 그는 순간 움찔했다.
말을 하지 못하는 것 같지는 않다.
말을 못하는 것과 하지 않는 건 다르다. 표정을 보아서는…… 후자다.
"이 새끼가 우리 대장님이 말씀하시는 거 안 들려?"
키는 작고 약삭빠르게 생긴 것이 꼭 쥐를 빼다 박은 관지가 나섰다. 그는 겁
이 많은 자다. 생긴 것과 마찬가지로 조금만 위험해지면 내빼는 것으로 유
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렇게 행세를 할 수 있는 건 단지 글을 아
는 탓이다.
녹림도의 대부분은 글도 제대로 모른다. 그런 녹림도에서 관지 정도 되는
자는 환영할 만한 자다.
이 무리를 이끄는 두목인 청삼이 헛기침을 하더니 나섰다.
"이 근방에 사는 자라면 청삼이라는 이름을 잘 알겠지? 내 성격에 대해서
도……"
"몰라."
청삼은 순간 여운휘가 말을 끊어버리자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단순 무식
한 성격답게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뭐라고 말을 내뱉으려는 순
간 여운휘가 나무에서 등을 때고 일어났다.
"그리고…… 알 생각도 없다."
이십 명에 달하는 흉악하게 생긴 사내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데도 불구
하고 여운휘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들은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자들이다. 돈 벌기가 힘들어 산에 모여
서 규합된 녹림도에 불과하다.
"이, 이 놈이!"
청삼의 강인해 보이는 턱이 부르르 떨렸다.
누남천은 아직도 일어날 생각을 보이지 않는다. 그 또한 이들이 별 볼일 없
는 녹림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는 탓이다.
여운휘가 몇 발자국 더 다가가자 청삼의 뒤에서 갑작스럽게 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을 덮으면서 여운휘를 향해 날아드는 그물은 끝 부분이 날카
롭게 되어 있어 한 번 얽히게 되면 빠져 나오기 힘들다. 더군다나 그물 사이
사이에 달려 있는 날카로운 갈고리는 사람의 피부를 찢어 놓기 충분했다.
하늘을 덮는 그물이 여운휘를 덮었다.
"킬킬! 이 멍청한 놈아, 검 좀 배웠다고 설치려다가 거 죽는 꼴을 봐라."
관지가 웃었다. 뭐가 그리 웃긴지 배까지 잡고 웃던 그의 눈에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그는 사래에 들린 것처럼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켁켁! 뭐, 뭐야 저 놈 멀쩡하잖아?"
그물은 어느새 잘려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 저 놈이 한가락하는 모양인데요?"
관지는 서둘러 뒤쪽으로 움직이면서 청삼에게 말했다.
청삼이 뼈마디를 우드득 꺾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한가락하는 모양인데 어디 한 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청삼의 목이 뚜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비명을 채 지르기도 전에 복부에 발이 틀어 박혔다.
순간 숨이 턱 막힌다. 하늘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분명 밤인데 그에게만
은 하늘이 새하얗다. 굽혀진 턱을 향해 여운휘의 무릎이 움직였다.
입안에서 하얀 색 물체가 몇 개 터져 나왔다.
이빨이 몇 개쯤 박살이 난 모양이다.
털썩 쓰러진 청삼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순간 침묵이 일던 녹림도
의 무리는 곧 소란스럽게 변했다. 도망가야 할지 아니면 두목의 복수를 하
기 위해 달려들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탓이다.
그렇게 망설이고 있을 때 관지가 답을 내렸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던 그가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기 시작한 거다. 그의
행동은 녹림도 무리에게 불을 붙였다. 머뭇거리던 녹림도들도 모두 관지의
뒤를 따라 도망가기 시작한 거다.
그들이 도망을 치자 그제야 누남천이 몸을 일으켰다.
"허어, 아무리 녹림도라 하지만 자신의 동료를 버리고 도망가다니…… 그나
저나 저 자는 어찌 해야 하려나."
누남천의 눈이 이빨 몇 개가 박살 난 채로 쓰러져 있는 청삼에게로 향했다.
그냥 두기에는 찜찜하고 그렇다고 죽일 이유도 없다.
"이 근방의 길 안내가 필요했던 참인데 잘 됐군. 저 자에게 길 안내나 시키
도록 하지."
여운휘는 누남천의 말을 듣고 쓰러져 있는 청삼에게 다가갔다. 혈도 몇 군
데를 쳐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여운휘는 다시 아까 쉬던 나무로
다가가 몸을 기댔다.
그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누워서 여운휘를 바라보던 누남천이 입을 열었
다.
"대단한 공격이었어. 검법뿐만이 아니라 박투에도 능한 모양이야."
"검법이 가장 자신 있기는 하지만 다른 것도 어느 정도는 익혔소."
"허허, 자네가 오면 무림맹에서 반가워 할 자들이 많겠어."
여운휘는 특별한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가 침묵하자 누남천은 아까처럼 다
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여운휘는 조용히 앞에 있는 불을 응시했다.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움직여서 피곤하기도 하련만 잠이 오지 않는다.
자연을 벗삼아 떠돌고 있는데 마음은 오히려 답답하다. 가슴에 매인 게 있
는 탓이다. 나무를 태우고 있는 불을 바라보고 있거늘 그의 눈에 비치는 건
현실이 아니다. 한 여인의 모습이 자꾸 눈에서 어른거린다.
여운휘는 자신의 모습에 순간 피식 웃음을 흘릴 뻔했다.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 감상적으로 변했는가.
언제나 혼자였던 자신이었다. 만난 지 이년도 되지 않은 여인 탓에 흔들리
는 자신을 여운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마음 한편에서 자꾸 이
는 불안감은 어쩔 수가 없다.
헤어진 지 오일도 되지 않았는데 미치도록 걱정된다.
그리고…… 미치도록 보고 싶다.
'아무 일…… 없는 거냐.'
하늘을 바라보며 여운휘가 작게 중얼거렸다.
청삼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건 다 지금 청삼의 뒤를 따르는 호리호리한 사내 탓이다. 녹림도가 된지
어언 이십 여 년 정도가 흘렀다. 그 동안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박살
을 내며 거침 없이 살아왔다.
참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이곳의 왕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화를 내고 싶은 데 그럴 수가 없다. 어느 정도 접
전을 벌이다가 깨졌다면 할 말이라도 있다. 그런데 그 날 일이 제대로 기억
도 나지 않는다.
몇 방 맞지도 않아서 정신을 잃었고, 깨어보니 지금 이 신세다.
그리고 자신을 무엇보다 화나게 하는 건 저 사내가 아니었다.
"이 놈아 왜 이렇게 걸음이 느린 게냐."
막 자신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노인을 청삼은 무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눈빛
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저 노인은 죽었을 게다. 매서운 눈
으로 노려봤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피식 웃으며 머리통을 때리는 노인의
행동에 청삼은 다시 한 번 끓어 오르는 분노를 참아냈다.
저 사내가 있는 이상 함부로 행동 할 수가 없다. 청삼은 이를 갈면서도 묵묵
히 걷기만 했다.
이러한 일은 며칠 전 저 사내에게 깨진 이후부터 계속 되어왔다.
눈이 상당히 무겁다. 차가운 겨울 바람 탓에 정신을 차린 청삼은 팔로 땅을
밀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그게 되지 않는다. 그것 뿐만이 아
니라 손가락 하나 조차 까딱할 수가 없다.
"으으……"
신음소리가 귓가로 들렸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입 안이 엉망진창이다. 그리
고 목과 복부도 마치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다.
간신히 청명은 눈을 떴고, 그런 그의 앞에 한 사내와 노인의 모습이 드러났
다. 건포를 먹으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두 남자를 발견한 청삼은 어제 일이
불연 듯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어제 일이 모두 기억이 나버렸다.
청삼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때 노인이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도망을 치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제야 청삼은 자신이 혈도를 제압당했다
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살고 싶냐?"
당연하다.
고개만 움직일 수 있다면 몇 백 번, 아니 몇 천 번이라도 흔들었을 게다. 그
런 청삼의 마음을 알았는지 노인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럼 너 우리 길 안내 좀 해라."
청삼은 그토록 그 노인의 미소가 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그 후에 사내가 제압되었던 혈도를 풀어 주었고, 그제야 청삼은 제대로 움
직일 수 없었다. 도망이라도 칠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
만 불가능했다. 저 사내의 눈을 피해 도망 칠 수 없다면 애초에 그런 생각
은 버리는 게 낫다.
앞장 서서 길을 안내하던 청삼은 또 이를 갈았다.
'관지 이 개새끼…… 감히 날 버리고 도망을 가?'
자신이 당했다면 으레 덤벼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관지가 비겁한 놈이라
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대장인 자신까지 버리고 도망갈 거라고는 생각지
도 않았다.
이 일행을 안내 해 주고 녹림으로 돌아간다면 당장에 그 놈부터 때려죽이리
라.
'쥐새끼 같은 놈, 네 놈은 곧 제삿날이다!'
그렇지만 그보다 문제는 여기서 살아야 한다는 거다. 살려주겠다고는 했지
만 그 말은 모두 믿을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이들이 향하는 곳은 평범
한 곳이 아니다.
장강수로십팔채의 총채주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다. 이 같은 자들이 그곳
으로 가는 이유라면 수적들과 관계되었다는 건 확실하다.
만약 이들이 수적과 친분 관계를 지닌 자들이라면 근처에서 도적질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거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자존심상 자신을 죽일지
도 모른다.
하지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만약 이들이 그들과 적대 관계라면 더 큰 문제다. 단 둘이서 가고 있으니 공
격해도 찍 소리 못할 거다. 그렇게 되면 자신 또한 같이 죽게 되는 건 뻔하
다.
도대체 저 둘이 누구기에 이토록 당당하게 장강수로십팔채의 총채주를 찾
아가는 것일까?
막 저녁을 먹기 위해 자리에 앉은 그 둘에게 청삼은 용기를 내서 물었다.
"저기…… 왜 그곳을 가시는 겁니까?"
"궁금해? 혹시 죽을까봐 걱정이라도 되는 게냐?"
"네. 목숨은 살려주신다고 했으니 전 그곳까지 안내만 하고 돌아갔으면 하
는데요."
"무슨 소리야. 돌아갈 때 길 안내도 해줘야지."
애초부터 예상했던 답변이 나오자 청삼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장강수로십
팔채에 가서 죽을 바엔 차라리 이들에게 죽는 게 나을 거다. 이들은 최소한
깔끔하게라도 목숨을 끊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약속은 지켜줄 테니까. 네가 죽는 일은 없을 거다."
여운휘의 말에 청삼은 그냥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무 자신도 없이 가는 건
아닐 거다. 약속을 지킬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순간이다.
'제길 요즘 운세가 왜 이렇게 더러운 거야!'
단순히 재수가 없다고 탓하기에는 요즘 너무 악운이 겹친다. 아무래도 액땜
이라도 해야 될 모양이다.
막 건포를 먹고 있던 누남천이 입을 열었다.
"어이, 마을에 도착하려면 얼마나 남았느냐."
"한 시진 정도 걸으면 도착할 겁니다."
건포를 모두 입안으로 집어넣은 누남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여운휘는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청삼은 내심 투덜거렸다. 이 둘은 움
직이기 시작하면 결코 쉬지 않는다. 저 젊은 사내는 그러려니 할 수 있겠지
만 저 노인 또한 만만치 않다.
툭 치면 쓰러질 것만 같은 노인이다. 그렇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체력이 보
통이 넘는 모양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노인의 모습은 본 청삼은 투덜거리면서 걷기 시작했다. 오
늘밤도 객잔을 잡지 못한다면 또 노숙을 해야 할 게다. 그건 무공을 익힌 청
삼이라 해도 거절하고 싶은 일이다.
청삼은 입술을 꽉 깨물고 달리기 시작했다.
한 시진 가량을 달리자 숨이 턱밑까지 치고 올라온다. 간신히 마을에 도착
했지만 사방을 둘러 볼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그는 땅을 바라보며 거친 숨
을 몰아쉬었다.
누남천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한 사내에게 말을 붙였다.
"이보게."
"무슨 일이시오?"
바쁘게 걸어가던 사내는 다소 짜증스러운 어조로 답했다.
"운석객잔이 어디 있는지 아는가?"
"저쪽으로 쭉 가다가 두 번째 골목에서 꺾이면 있수."
뭐가 바쁜지 사내는 간단히 답하고는 가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사내가
가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누남천이 뒤에 있는 여운휘와 청삼을 향해 말
을 걸었다.
"운석객잔으로 가지."
"누구와 만날 약속이라도 있는 거요?"
여운휘의 말에 누남천은 씨익 웃었다. 웃음으로 모든 걸 대신한 누남천은
아까 그 사내가 가르쳐 주었던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약속이 있는 모양이군.'
웃음의 의미를 알아차린 여운휘는 조용히 그 뒤를 따랐고 청삼만 어기적거
리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자 앞장서서 걷던 누
남천이 고개를 돌렸다.
"뭐 하는 거냐. 어서 와라."
'제길 망할 영감쟁이!'
고이 보내주면 어떻다는 말인가. 그냥 자신을 보내줘도 될 터인데 도대체
놓아주지를 않는다. 속으로는 욕지거리를 해댔지만 겉으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예, 예. 갑니다요."
청삼은 어쩔 수 없이 그 둘의 뒤를 따랐다.
객잔은 상당히 컸다.
누남천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구석진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자리를 잡은 그
가 점소이를 손짓해서 불렀다.
"이리 오게!"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던 점소이는 손님이 오자 짜증이 이는 모양이다. 불
만스러운 얼굴로 누남천에게 다가온 점소이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뭘 드실 거요?"
"그 놈을 데리고 와."
"그 놈이라니 갑자기 무슨 말이오?"
누남천이 씨익 웃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점소이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작은
덩치에서 놀라운 괴력이다. 자신보다 세 배는 더 무거움 직한 점소이를 누
남천은 단 한 손으로 들어올린 것이다.
내심 늙은이 주제에 하고 얕보고 있던 청삼은 놀라고 말았다.
"켁켁! 이, 이게 무슨……"
"이곳은 매번 올 때마다 짜증나게 한단 말이야. 꼭 두 번 이야기해야 쓰겠
나? 그 놈이라고 하면 또 누가 있느냐!"
점소이의 눈이 갑자기 변해버렸다. 숨을 못 쉬어 허덕이던 그가 갑작스럽
게 공중에서 몸을 틀며 누남천의 머리를 발로 찍어내렸다.
그 순간 누남천은 다른 손 하나를 들어 그의 발뒤꿈치를 막아냈다. 그리고
발을 막기가 무섭게 점소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악!"
"그러기에 말을 했을 때 들어야지. 아마 발뒤꿈치가 박살이 났을 게다."
점소이는 축 늘어진 채로 누남천을 노려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나타나며 목
청을 높였다.
"그만하시오! 누 대협!"
"호오,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군. 이번에는 주방장인가?"
주방장의 옷을 입고 있는 뚱뚱한 사내를 보면서 누남천이 웃음을 지었다.
이 자는 누남천이 객잔에서 만나려고 했던 사내다.
사내는 심할 정도로 비대한 체구의 소유자였다.
다른 사람에 비해 두 배는 커다란 몸집에 축 쳐진 턱살은 그를 인자하게 보
이도록 만들었다. 웃음을 짓는다면 그 누구보다도 선해 보일 것 같은 사내
이거늘 찌푸려진 그의 얼굴은 마치 나찰(羅刹)과도 같아 보였다.
"이번엔 또 무슨 일 때문에 찾아왔소?"
"왜? 내가 찾아온 것이 반갑지 아니한가?"
"몰라서 묻는 거요?"
말할 필요가 무엇이 있으랴.
사내는 누남천을 꺼려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증오한다고 해야 옳
다. 그가 오면 항시 귀찮은 일이 벌어졌고, 부탁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일전에 자신을 두들겨 팬 적도 있으니 곱게 보일 리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만나기 싫은 상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자신의 앞
에 있는 이 노인을 꼽으리라.
"내가 자네를 찾아왔다면 뻔하지 않은가."
"제길……"
짜증이 치민다. 해 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면서 받아 갈 것만 많다. 자신
은 부탁을 하러 온 것이라 말하지만 이건 엄연한 협박이다. 매번 그랬던 것
처럼 이번에도 누남천이 물어보려고 하는 것을 대답해 줄 수밖에 없을 거
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그는 짜증이 났지만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게 하며 점소이에게 차를 가져
오라고 명했다. 점소이가 주방 안으로 사라지자 누남천은 입을 열었다.
"아, 다른 자들을 소개시켜 주지. 이 자는 진군휘라고 하고, 저기 있는 저
놈은……"
잠시 청삼을 바라보던 누남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더라?"
"청삼입니다!"
여태까지 같이 한 날이 몇 일인데 아직도 자신의 이름을 외우지 못했냐는
듯이 청삼은 목청을 높였다.
사내는 진군휘라는 말에 흠칫했다. 들어 본 적이 있는 이름이다. 무림에 모
습을 드러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사내로 그 실력은 십대후지기수에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자.
신성처럼 떠올라 현재 정파무림에서 주시하는 진군휘라는 사내가 저자임
이 분명했다.
"내 이름은 왕풍묵이라 하오. 만나게 되어 반갑소 진 소협."
"저 또한."
왕풍묵이 포권을 취하자 여운휘 또한 그리 답했다.
간단한 인사가 끝나자 왕풍묵이 입을 열었다.
"그래 이번엔 또 무슨 부탁을 하러 여기까지 온 거요?"
"그다지 어려운 부탁은 아니야. 한 사람을 만나야겠는데 네가 좀 힘 좀 써
줘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상당히 귀찮아 질 것 같아서 말이야."
"도대체 누구기에 그런 부탁을 하려는 거요?"
"아아, 대단한 자는 아니야."
막 날아온 차를 입가에 가져다 댄 누남천은 말을 끊고 맛을 음미했다. 꽤나
순한 맛의 차가 입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리고 그 향기 또한 절색이다. 마
치 난(蘭) 꽃을 코앞에 대고 있는 것과 같은 향이다.
아무 생각 없이 차를 들이켰던 누남천으로서는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
었다.
"좋은 차군."
"용정차요."
"호오, 이것이 용정차로군."
이름은 들어봤지만 직접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신기하다는 듯이 몇 모
금 더 맛을 음미하던 누남천이 마침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은 혁련우(赫連宇)네."
"이이……!"
순간 입에서 썅이라는 소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감정을 간신히 억제한 왕풍묵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옆에서 용
정차를 신기하다는 듯이 마시고 있던 청삼은 그대로 입으로 뿜어낼 뻔했다.
장강수로십팔채를 찾아간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그
일 줄은 몰랐다.
"…… 지금 제 정신으로 묻는 게요?"
"물론. 언제 내가 허언을 하는 걸 본 적이 있는가?"
"별 볼일 없는 자라…… 하지 않았소!"
콰앙!
왕풍묵은 주먹으로 상을 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날카롭게 변한 눈
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그를 향해 누남천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앉아."
"……"
왕풍묵은 부들부들 떨다가 자리에 털썩 앉았다. 가뜩이나 몸이 무거운 사람
이거늘 그토록 움직이자 의자가 삐걱 하는 소리를 뱉어냈다.
"너라면 길을 만들어 줄 수 있을 텐데?"
"그 자는…… 장강수로십팔채의 채주요."
"알고 있어. 설마 모르고 왔을까."
"그럼 그 자의 뒤에 수황(水皇)이 있다는 것도 모르지는 않을 테고."
수황이라는 말에 여운휘는 움찔했다.
수황이라는 자는 여운휘 또한 잘 아는 자다.
백면귀황 풍운조에게 현 무림의 최고 고수인 강호십일객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수황에 대한 이야기 또한 섞여 있었다.
"수황은 상대하기 꽤나 껄끄럽지."
"……"
"하나 말해 주자면 만약 네가 수황과 싸우게 된다면 물가에서는 싸우지 마. 수중전이라면 네가 필패(必敗) 할거다."
"물가가 아니라면?"
"모르지.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물가에서는 절대 그와 싸우지 말라는 거야."
여운휘는 풍운조의 말을 기억했다.
'물가에서 싸우지 말라고?'
피할 생각은 없다.
'재미있겠군. 물가라……'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물가에서 싸워 보고 싶다. 여운휘는 피할 줄을 모르는 사내다.
여운휘가 과거를 잠시 회상하는 동안 누남천은 차를 한 모금 더 들이킨 후
말을 이었다.
"걱정 말게. 나 또한 수황을 건드릴 생각은 없어. 다만 혁련우는 반드시 만
나봐야 해."
"무림맹의 일이요?"
"네가 그것까지 알아야 하나? 넌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그와 만날 수 있게
나 만들어."
"제길!"
왕풍묵은 욕설을 내뱉었다. 여태까지 해 왔던 일들도 어려웠지만 이번 일
은 그 어떠한 것과도 비할 수 없을 정도의 중대한 문제다.
두려운 건 수황뿐만이 아니다. 누남천의 말대로 그냥 아무 일도 없이 넘어
갈 수도 있다. 문제는 혁련우 또한 만만한 자는 아니라는 거다.
장강수로십팔채의 우두머리다. 결코 만만할 리는 없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분명 생명이 오락가락 할 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이
다. 그렇지만 안 할 수도 없다. 다른 자라면 어느 정도 핑계를 대거나 해서
빠져나갈 수 있다.
허나, 이 앞에 있는 노인에게만은 예외다.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아도, 설령 불가능한 일이라 해도 이 노인이 시키면
해야 한다. 추운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왕풍묵은 비에 젖은 것처럼 땀을 흘
리고 있었다.
그의 비대한 몸 탓에 원래 땀이 많은 체질이기는 하지만 이건 단순히 그 탓
이 아니다. 생명을 담보로 해야 하는 일 앞에서 아무리 그라도 이럴 수밖에
없다.
잠시 앉아서 묵묵히 차만 들이키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알겠소. 해 주도록 하지."
"허허, 역시 자네가 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네."
어깨를 두드리며 누남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남는 것 있겠지?"
"물론이오. 몇 개가 필요한 거요?"
"한 개면 충분하네. 나 또한 자네의 장사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거든."
"그럼 저 놈을 따라가시오. 그리고 방에서 좀 쉬고 있으면 내 추후 연락하
리라."
아까 누남천에게 당할 뻔했던 점소이가 쭈뼛거리면서 다가왔다.
왕풍묵은 그에게 간단히 말했다.
"방 하나를 잡아 주고 이 일행이 이곳에 있다는 소문이 새어 나가지 않도
록 해라."
"아, 알겠습니다요 주인님."
점소이가 옆에 서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따, 따라 오십시오."
점소이의 말에 셋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수고하게. 빠른 시일 내에 좋은 소식 있기를 바라네."
"걱정 마시오. 삼일 안에는 어떻게든 결말을 내려 줄 테니."
"훗, 좋은 소식이길 빌겠어."
누남천은 몸을 돌리더니 점소이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응시하던 왕풍묵은 머리를 감싸 안았다.
"망할 자식!"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번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다.
'앞으로 며칠 간 잠자기는 글렀군.'
왕풍묵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뭇거릴 시간은 없다.
청삼은 며칠 동안 죽을 맛이었다. 도망을 치고는 싶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는 얼마 가지 않아 잡힐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게 이들이 만나러 가는 자가 장강수로십팔채
의 채주인 탓이다. 거기다가 수황이라는 이름을 들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가 없다.
이건 청삼이 사는 세계가 아니다. 비록 녹림도도 어떻게 본다면 무인에 속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 해도 그는 수황 같은 자와는 격이 틀리다. 차이가 나
도 너무나 크게 난다. 이토록 거물들이 모이는 데 자신 같은 놈은 그저 갓난
아기 같이 무력하기만 할 뿐이다.
청삼은 왕풍묵이 할 수 없다는 말을 전했으면 했다. 그렇지만 그 꿈도 지금
방에 찾아 들어온 그의 한 마디에 모두 무너져 내렸다.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면 채주를 만나러 갈 수 있을 거요.”
왕풍묵은 약 이틀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
다. 과장을 섞어 얼굴이 반으로 변했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만큼 그의 고
초가 심했다는 것이다.
“허허, 내가 매번 신세만 지는 구나.”
“알면 제발 다시 찾아오지 마시오.”
“이런 섭섭하게 우리 인연을 여기서 끝내자는 소린가? 자네와 내가 어떤 사
인데 그럴 수 있겠는가. 내 종종 찾아옴세.”
누남천의 말에 왕풍묵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하지만 더 이상의 말싸움은
귀찮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왕풍묵의 말대로 밖으로 나오자 그곳에는 두 명의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
다. 험상궂은 얼굴이 말하지 않아도 정체가 뭔지 알 것만 같았다.
“당신이 누남천이오?”
“그래, 내가 누남천이지.”
“경고하겠소. 아무리 당신이라도 채주님 앞에서 함부로 행동한다면 목을
베어버리겠소.”
“허어, 수적놈들이 감히 나를 협박하겠다는 건가?”
“네 놈이……!”
“그만 해라!”
막 누남천에게 검을 뽑으려는 수적을 옆에 있던 사내가 손을 들어 제지했
다. 검을 뽑으려 했던 사내보다 상관이었는지 그는 제지를 하자마자 행동
을 멈췄다.
행동을 제지한 사내는 포권을 취하면서 누남천에게 말했다.
“제 수하가 다혈질이라서 무례를 범했소. 광한검(光寒劍)께서 이해를 해 주
시길 부탁드리오,”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지. 그나저나 급한 일이니 어서 채주
에게 안내했으면 하는 군.”
“좋소. 그럼 날 따라오시오.”
그 사내는 옆에 있는 자신의 부하에게 눈짓을 하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가
볍게 발을 굴렀을 뿐인데 순식간에 몸이 앞으로 튕겨져 나간다.
“호오……”
놀랍다는 듯이 탄성을 내뱉은 누남천은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한참을 달리던 두 사내는 물가에 이르자 준비 시켜 놓은 배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누남천을 비롯한 삼인이 모두 배에 올라서자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
했다.
강은 고요했다.
삐꺼덕거리는 노 젓는 소리만이 가득히 사방을 에워쌌다. 추운 날씨 탓인
지 강의 군대 군대에는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그렇게 배는 천천히 강을 건
너며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오래 걸리는 가?”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소. 하지만 또한 짧지도 않으니 눈을 붙이
는 게 좋을 거요.”
사내의 말에 누남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편하게 늘어지게 만든 그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배는 조용히 강을 거스르며 목적지를 향해 물살을 갈
랐다.
“자네들은 누구인가?”
“아 저, 저는……”
청삼은 순간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이 근방에서 도적질
을 하던 자라고 한다면 이들이 결코 곱게 대할 리가 없다. 이곳과 먼 곳이라
면 전혀 문제 될 일이 없지만 청삼은 근방에서 도적질을 하던 녹림도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진군휘라 하오.”
여운휘는 물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로 짧게 답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두 사내의 얼굴에 일순 놀람의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베일에 싸인 듯이 특별히 알려지지 않은 무인이다. 하지만 요즘 진군휘라
는 이름만큼 매력적인 것도 흔치 않다. 강호의 십대후지기수를 간단하게 꺾
어 버릴 정도의 실력자라면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아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앞에 있는 사내가 진군휘라고 하자 그들의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진군휘라는 이름 들어봤지. 외모가 낯설다 했더니 요즘 무림에서 이름을
날리는 진 소협이셨구려.”
“그렇소?”
무관심하다는 듯이 답한 여운휘는 여전히 강가에서 시선을 때지 않았다.
강은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묵묵히 강을 바라보던 여운휘의 눈이 순간 꿈틀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몸이 배 뒷전으로 움직였다.
파앙!
물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잉어가 먹이를 잡기 위해 뛰어 오르듯 물 안에서
검은 옷으로 온 몸을 가린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덟에 달하는 그들
은 배의 가장자리에 모두 내려서며 재빠르게 검을 뽑았다.
말은 필요 없다는 듯이 그 여덟 명은 재빠르게 살초를 전개했다. 누워 있던
누남천을 향해 여덟개의 검이 이빨을 드러냈다.
파바박!
누워서 잠을 자고 있던 누남천은 순식간에 솟구쳐 오르며 선풍각을 펼쳤다.
수십 번의 발차기는 그 여덟 명의 손이나 어깨를 쳐냈다. 뒤로 한 걸음 물러
서나 했더니 다시 그들이 검을 뽑고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하는 놈들이냐."
"죽을 놈이 알아서 무엇하느냐!"
슈슈슉!
검이 뱀처럼 휘어지면서 누남천에게 다가왔다. 문제는 하나 뿐만이 아니라
는 거다. 사방을 에워싸듯이 다가오는 그들의 검은 아무리 고수라 할 지라
도 흠칫 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누남천은 간단하게 그 모든 공격
을 피해냈다.
그는 몸을 비틀며 공중을 향해 몸을 날렸다. 검은 모두 허공을 갈랐고 그의
몸은 공중에서 수많은 변화를 보이며 떨어져 내렸다.
막 여운휘가 검을 출수하려는 순간 그는 멀리서 다가오는 검은 물체를 발견
했다.
'뭐지?'
그 의문은 곧 해결 되었다.
배가 다가 오고 있었다. 약 십여 척에 달하는 배에는 지금 기습을 해 온 팔
인과 마찬가지의 검은 무복을 한 자들로 가득했다.
여운휘는 급히 자신을 이곳으로 안내 한 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둘은 기습을 당한 상황이에도 불구하고 침착했다. 아니, 오히려 웃고 있
었다.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군."
"무슨 짓인지 모르겠소?
이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지금 이 행동 죽고 싶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죽어 줄 수는 없지!"
사내의 말은 신호가 된 모양이다. 배 위에 있던 그 둘은 뒤를 향해 몸을 날
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뒤에서 다가오던 배가 그쪽으로 다가갔다.
"제, 제길! 이게 무슨……"
"아무래도 함정에 빠진 모양이야."
청삼은 누남천의 말에 머리가 피로 솟구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간다는 것
자체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살려 준다는 말을 믿었기에
따라왔다. 그런데 기습을 당했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장강수로십팔채
의 인물에게서부터.
살 수도 없을 테고, 산다고 해도 평생을 도망다녀야 할 거다.
배 열 척이 여운휘가 있는 배를 감싸 안고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배에 있
던 노 젓는 자 또한 동료였는지 그들이 등장하자마자 그는 강으로 몸을 던
진지 오래다.
한 사내가 높이 손을 들자 배에서 무인들이 활에 화살을 가져다 댔다. 그리
고 활을 하늘로 향하게 했다.
"쏴라!"
수십 개에 달하는 화살이 하늘을 덮었다.
피하고자 하면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다. 그렇지만 문제는 지금 있는 곳이
땅이 아니라는 거다. 배 위다. 피할 공간도 없고, 강으로 몸을 던져서 피한
다면 바로 꼬치가 될 거다.
피했다고 또한 능사는 아니다. 화살은 배에 구멍을 뚫을 것이고, 곧 나무 배
는 물 속으로 잠겨 들어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결론은 바뀌지 않는다.
청삼이 당황한 것과는 다르게 누남천과 여운휘는 태연했다.
"동남(東南)!"
누남천의 외침을 청삼은 알아 듣지 못했다. 하지만 여운휘는 그 말이 무엇
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다.
몸을 틀은 여운휘는 재빠르게 뱃전을 향해 날아드는 화살들을 향해 자신의
검을 뽑아냈다.
채채챙!
화살들을 향해 여운휘의 검에서 검기가 뻗어져 나갔다.
날아들던 화살은 그 힘을 잃고 그대로 물로 떨어져 버렸다. 그건 누남천이
맡은 서쪽과 북쪽도 마찬가지였다.
앞에서 화살을 쏘게 지시했던 사내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다시 한 번 신호
를 보냈다. 그 신호를 본 배들은 천천히 가운데에 있는 그들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근접전인가?"
누남천은 피식 웃었다.
비록 강이라고는 하지만 승산이 없는 싸움이 아니다. 혼자라면 버거웠을지
도 모르지만 지금은 누남천 혼자가 아니다.
"널 데리고 오기를 잘 한것 같군."
"그런 말은 이 싸움이 끝난 후에나 하시오."
배가 천천히 흔들렸다.
여운휘는 이토록 강 위에서 흔들리는 배 위에서 싸워 본 적이 없다. 반면 그
들은 이런 싸움에 이골이 나는 자들이다.
하지만 여운휘는 뽑아든 검을 천천히 아래로 향하게 했다.
물 위에서의 싸움이면 어떻고 뭍에서의 싸움이라면 어떠한가.
기본은 같다. 어차피 물이나 뭍이나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라는 건 변함이
없다.
"오기가 두려운 모양인데, 내가 가마."
상대들의 조심스러운 반응에 여운휘가 옆 쪽에 있는 배를 향해 몸을 날렸
다.
그의 검이 번뜩였다.
다섯 장 이상 떨어져 있는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의 도약으로 여운휘
는 그 배에 착지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복면인들은 여운휘의 움직임에 놀
라버리고야 말았다. 아무런 것도 없이 단순한 도약만으로 다섯 장 이상을
뛴다는 건 쉽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며 휘두른 여운휘의 검을 맨 앞에 있던 사내가 몸을
던지며 막아냈다.
'좋아! 막았……'
빠악!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는 여운휘의 검을 막았다. 그렇지만 검이 막히는 순
간 여운휘의 발이 그자의 얼굴에 정확히 박혔다. 이빨이 깨지면서 그는 게
거품을 물었다.
땅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여운휘의 발이 다시 한 번 움직였다.
수적들은 여운휘가 착지하는 순간 검을 휘두르려고 했다. 허나, 여운휘가
한 발 빨랐다.
그의 발이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어, 어어?"
그 한 번의 움직임은 나무 배를 완벽하게 반 조각을 내버렸다. 균형을 잃은
그들은 모두 물에 빠져 버렸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뱃전으로 몸을 날린 여
운휘는 다시 한 번 도약했다.
"저 놈을 놓치지 마라! 화살을 싸라! 절대 배에 올라타게 하지 마!"
여운휘로 인해 완벽하게 배가 반 조각이 나 버리자 이 무리의 대장으로 보
이는 사내가 고함을 질렀다. 그런 그의 고함을 들은 몇몇의 복면인들은 재
빠르게 활에 화살을 재더니 여운휘를 향해 날렸다.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는 여운휘였기에 피하는 건 상당히 어려워 보였
다.
화살이 그를 고슴도치라도 만들 듯이 매섭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여운휘의 몸이 공중에서 빙글 돌았다. 그 움직임은 마치 물과도 같았다. 공
중에서 몸의 방향을 바꿨다.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화살을 피하며 그대로 떨어진 그의 검이 바로 아래에 있는 배에 박혔다.
촤악!
여운휘는 배에 박힌 검을 앞으로 밀어서 더욱 크게 구멍을 만들어 버렸다.
복면인들이 채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는 뱃전을 밟고 뒤로 몸을 날렸다. 이
배에 있는 자들도 아까의 그들과 마찬가지로 강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여운휘의 모습을 보며 청삼을 놀라버리고야 말았다.
그의 모습은 가히 신출귀몰(神出鬼沒)이었다. 뱃전을 밟으면서 다른 배로
도약하는 그의 모습은 천신(天神)이 강림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강호의 고수라면 다 저런 것일까?
청삼은 내심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비록 산에 처박혀서 지냈지만
자신의 무공 실력으로 무인들과도 어느 정도 손속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
다. 그렇지만 여운휘의 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이 쑥 들어가 버렸다.
빠각!
그때 막 한 대의 배가 여운휘의 검에 의해 강으로 잠겼다.
'내가 미쳤지. 저런 놈의 전낭을 털렸고 했다니……'
다시 한 번 느끼는 거지만 만약 저 자가 죽이려 했다면…… 이미 자신은 이
곳에 없었을 게다. 저 자는 그러고도 남을 충분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분하지만…… 백 번, 아니 천 번을 싸운다 해도 단 한 번도 이길 수 없다.
누남천이 있던 배를 포위하려던 배가 이제는 오히려 뒤로 물러서고 있다.
배 위에서 신호를 보내던 자는 급하게 손을 흔들었다. 누남천을 상대한다
고 생각했기에 이런 일을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자신들의 배를 박살내는 것이 누남천이 아닌 젊은 사내
라는 거다. 누남천과 저 젊은 사내 둘이라면 이 인원의 갑절이 와도 이길
수 없다.
'급해. 서두르지 않는다면 모두 강에 빠져 버리고 말 거다.'
죽고 살고의 문제가 아니다.
총채주는 누남천을 만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든 막아
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대를 저지해야만 하는 거다.
그게 총채주의 명이라면 지켜야 한다.
뒤로는 빠졌지만 도망치려는 게 아니다. 지금 물러서지 않고 욕심을 부린다
면 궤멸할 게 뻔하다.
'정면으로 부닥치면 승산이 없다. 그렇다면……'
정면 대결로 이길 수 없다면 다른 수를 쓸 수밖에 없다. 만약 이곳이 물가
가 아니었다면 실행 할 수도 없었을 일.
하지만 이곳은 그들에게 가장 익숙한 물 위다.
상대하기 껄끄러운 자를 만났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 있는 건 당연하다.
'이것도 실패한다면 더 이상의 방법은 없어.'
파팡!
그는 허리에 달려 있는 긴 철쇄(鐵鎖)를 꺼내들었다. 그의 그러한 행동을
본 다른 복면인은 급하게 그에게 갈고리를 건넸다.
철컥!
철쇄와 갈고리가 하나로 합쳐졌고, 그 모습을 본 다른 배에 있는 자들도 모
두 같은 무기를 꺼냈다.
그 젊은 사내는 다른 배를 박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을 이용해 복면인
의 대장이 손을 흔들었다. 하나가 되어 버린 무기 수십 여 개가 누남천이 있
는 배로 날아들었다.
누남천은 재빠르게 검을 뽑았지만 무기들은 그에게가 아니라 타고 있는 배
를 향해 이빨을 들이댔다.
텅! 터텅!
철쇄의 끝에 걸린 갈고리가 나무 배를 꼼짝도 하지 못하게 옥죄었다. 배는
사방에 걸린 채로 힘을 가하고 있는 갈고리 탓에 당장이라도 사방으로 비산
(飛散) 되며 박살이 날 것만 같았다.
이대로 조금만 힘을 준다면 당장이라도 나무 배는 사방으로 조각 조각이 나
버리고야 말리라.
배를 막 박살내기 위해 힘을 가하던 복면인들의 대장은 여운휘를 보며 피
식 웃음을 흘렸다. 멍청하게 박살을 내려는 배로 다시 올라섰다. 아무리 강
해봤자 물에 빠지게 되면 그때부터는 사냥감에 불과하다.
"허억!"
막 힘을 가하던 그는 놀라서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 사내가 움직였다. 먼 거리라 단 한 번의 도약으로는 불가능 할 거라 생각
했다.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다가오고 있다.
갈고리를 박기 위해 뒤에 달아 놓은 철쇄를 밟으며 그 사내가 달려오고 있
었다.
두 배의 거리는 근 이십여 장에 이를 정도였다. 분명 도약으로는 불가능했
을 거리다. 그런데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철쇄가 오히려 저 자에게 길을 내
줘버렸다.
"피해라!"
재빠르게 갈고리와 철쇄를 분리했지만 이미 공중으로 솟구친 후다.
여운휘의 검에서 검기가 이는 것을 본 그는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물 안
으로 뛰어 들었다.
퍼엉!
물방울이 하늘로 솟구쳤다. 여운휘의 검기가 강에 흐르고 있는 물과 함께
배를 이등분했고, 그 탓에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떨어져 내린 여운휘는 그 나무의 파편 중 하나에 가볍게 올라섰다.
정상적으로는 당장이라도 물 속에 가라앉아야 했다. 하지만 작은 파편 위
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누남천의 눈이 조금 커졌다.
'대단한 경신법(輕身法)이군.'
무력답수(無力踏水)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저 정도로도 충분히 대단
한 거다. 입장이 바뀌어 저기에 서 있는 게 자신이라면 저 정도로 해낼 자신
이 없다.
'역시 무상검제…… 대단한 놈을 길러냈어. 범의 후손다워. 대단해, 아주 많
이.'
한편 물 속에 빠져 버린 복면인들의 대장은 고개를 들자마자 자신의 목에
닿아 버린 검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예의주시 했다."
"……"
"네가 이 무리의 두목이라는 건 아까부터 알았다. 뭐냐? 뭐 때문에 너희 장
강수로십팔채가 우리를 공격하는 거지?"
"…… 총채주님이 너희들을 만나는 걸 원치 않는다. 적당히 혼내서 돌려보
내라는 총채주님의 명(命)이 있었다. 난 그것을 따른 것뿐이고."
여운휘는 고개를 돌려 누남천을 바라봤다. 누남천은 옆에 있던 청삼을 툭
툭 쳤다.
"이봐 노 좀 저어봐. 저기까지 가야지."
이미 주변에 있던 다른 배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장이
당해 버렸다. 움직이게 할 구실점을 잃어버린 거다.
누남천의 말에 청삼은 내심 투덜거리면서 노를 젓기 시작했다. 익숙지 않
은 탓에 움직임이 더뎠지만 반 각 정도 움직이자 여운휘의 옆까지 배가 다
가왔다.
"어떻게 할거요?"
"만나야 해."
"만나기 싫다는 것 같은데 어떻게 만나겠다는 거요?"
"아무렴 어때. 난 반드시 총채주를 만나야 한다."
누남천은 물 위에 떠서 주위를 살피는 사내에게 말했다.
"말해. 총채주가 어디에 있는지."
"웃기지 마. 말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의 입가에 비웃는 듯한 웃음이 걸렸다. 누남천은 웃으면서 그의 잠겨 있
는 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크윽!"
누남천이 손을 들어올리자 그는 얼굴이 붉어지며 들어올려졌다. 얼굴에서
핏줄이 튀어나왔다. 당장이라도 온 몸에 있는 혈관이 터져 죽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말해라."
"우, 웃기지……"
"말해! 네 놈 입에 몇 천명의 목숨이 달렸다!"
항상 웃고 다니던 누남천의 얼굴이 매섭게 변했다. 그리고 평소의 장난기
어린 듯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지금의 그는 진중 했다. 몇 천명의 목숨이 달
렸다는 대목에서 그의 눈은 그토록 진지할 수가 없었다.
"말해……"
이제는 말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목이 잡힌 그는 거의 죽기 직전
이었다. 눈이 뒤집혔고 컥컥 대기 시작했다.
누남천을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던 여운휘는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주먹을 옆으로 내질렀다.
주먹은 누남천의 옆얼굴을 스치며 지나갔다.
여운휘는 조용히 자신의 손을 들어올렸다. 급하게 친 것이라고는 하지만 손
이 까져버렸다. 뼈가 보일 정도는 아니지만 우습게 볼 상처는 결코 아니다.
암기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일반 적인 무공은 아니다. 피와 함께 손에 뭍어
있는 물이 그것을 증명했다.
누남천은 목을 잡고 있던 상대를 배 위에 팽개치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 노인이 서 있었다. 마치 배 위에 탄 것처럼 노인은 물 위에 둥
둥 떠 있었다.
누남천과 마찬가지로 여운휘 또한 그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너 같은 애송이가 내 공격을 막은 거냐?"
여운휘는 자신을 애송이라 칭하는 노인을 보면서 살짝 이마를 찌푸렸다. 감
정 표현이 지극히 적은 여운휘에게 그건 화가 났다는 표시다. 평소였다면
함부로 자신에게 공격을 했다며 길길이 날뛰었을 누남천이 조용 하자 여운
휘는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그런 여운휘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누남천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수황이야."
누남천의 말을 들은 여운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노인을 바라봤다.
누남천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현 무림의 최고 고수 중 하나인 수황이다. 그 이름을 가벼이 볼 사람은 현
무림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은 나의 영역이야. 함부로 설친다는 건 곧 나를 우습게 봤다는 소리
지."
수황이 물 위를 천천히 걸으면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누남천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여운휘가 검을 들었다. 그
리고 박살이 난 파편을 이용해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수황은 움직임을 멈췄다.
"설마 네 놈 나와 싸우겠다는 소리냐?"
"상대에게 죽여달라고 목을 내밀고 있을 바보는 아니라서 말이오."
여운휘는 검을 가슴 근처로 들어올렸다.
수황은 상대가 결코 허언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눈, 눈을 보면 안다. 진심이 담긴 눈과 그렇지 않은 눈은 판이하게 다르다.
지금 저 눈은…… 한다면 하는 자의 눈빛이다.
'장난이 아니군. 정말 날 베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수황은 우스웠다. 저런 새파란 애송이에게 당할 자신이 아니다. 그런데 우
스우면서도 대단하다. 자신을 향해 최근 검을 들은 무인이 그 누가 있단 말
인가. 대부분의 무인은 자신의 이름만 들어도 내빼기 일수다.
그에 반해 저 자는 용기가 있다.
'멍청한 놈이지만, 용기가 있는 놈이군.'
출수를 하려던 수황은 손을 내리더니 얼굴 가득 웃음을 지어보였다.
"난 용기 있는 놈이 좋아."
"?"
"내가 안내해 주지."
수황의 말에 누남천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누남천은 수황을 안다.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만나본 적도 있다.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를 들
었다. 결코 남에게 쉽게 마음을 여는 자는 아니다.
그가 하는 말이라면 결코 거짓이 아닐 거다. 무엇이 무서워 수황이 거짓말
을 하겠는가.
수황이 등장하자 배에 있던 자들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분명 자
신의 상관은 장강수로십팔채의 총채주인 혁련우(赫連宇)다. 그렇지만 상대
는 그보다 강하면 강했지 결코 약하지 않은 자다. 더불어 수황은 자신들의
상관인 혁련우마저 스승으로 모시는 자다.
그가 나섰다면 자신들은 죽은 듯이 처박혀야 한다.
그들은 급히 강을 돌면서 사람들을 건져내기 시작했다. 이미 누남천에 관
한 일은 자신들의 손을 떠났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수황의 몸이 물을 박차면서 솟구쳤다.
공중에서 한 번 빙글 돈 그는 누남천이 있는 배에 착지했다.
옆에서 수황이 배에 발을 딛는 순간 누남천의 입가가 살짝 씰룩였다. 그 먼
거리에서 도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미동도 없다.
'과연 수황.'
강호십일객이라는 이름은 결코 누가 가져다 준 것이 아니다.
수황이 배에 올라서자 멀리 있던 여운휘도 마찬가지로 몸을 날렸다. 이번에
는 수황이 반응을 보였다.
단순한 애송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 그 사내의 움직임을 보니 결
코 그렇게 치부할 수가 없다. 십대후기지수 중 하나인가 하고 생각도 해봤
지만 저런 자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다.
뱃전에 내려서 천천히 다가오는 여운휘를 향해 수황이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진군휘요."
"진군휘?"
들어봤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다. 그런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진군휘? 진군휘라……'
무엇인가 알 듯도 한데 그게 장막에 가려진 것처럼 애매하게 생각이 나지
않는다. 수황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자신도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모
양이다. 그런 것 하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니.
실제로 수황은 거의 백수에 들어선 노인이다.
그렇지만 겉으로 보기에 그는 갓 육십 대 정도로 보인다. 백수에 들어선 노
인과는 어울리지 않은 주름살 없는 얼굴, 쭉 펴진 등과 어깨는 그를 육십 대
로 보이게 만들었다.
"분명 들어는 봤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 군."
"특별히 무림에서 움직인 적은 없소."
"분명 들어본 이름이거늘……"
중얼거리듯이 말하는 수황을 보고 누남천이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오, 수황."
"나를 아는가?"
"누남천이오."
"허! 그 젊었던 사내가 벌써 이토록 늙었단 말인가?"
수황은 그제야 누남천을 알아봤다. 약 이십 년 전 수황은 누남천을 만난 적
이 있다. 그 당시 누남천은 수황을 향해 자신의 검을 뽑았었다. 자신이 수황
이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한 수 가르침을 청하며 검을 뽑았던 사내다.
결코 잊었을 리가 없다.
이런 패기를 지녔던 사내는 흔치 않았으니까.
"그럼 저 아이는 네 제자냐?"
"아니오, 저 사내는 무상검제(無常劍帝) 진군악의 후손이요."
"지, 진군악의 후손?"
수황은 지금과는 다른 눈으로 여운휘를 바라봤다. 진군악이라는 이름은 그
정도의 힘을 가질 자격이 있다.
"진군악의 후손이라면 지금쯤 무림에서 널리 알려졌어야 할 터인데……"
"저 사내는 악양유가라는 곳에서 지냈소. 그리고 이름도 어느 정도 알려진
편이오. 다만 진군악의 후손이라는 것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수황은 누남천의 입에서 나온 악양유가라는 이름을 듣자 여운휘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분명 들어봤다. 이길 수 없을 거라고 했던 악양유가와 운문세
가의 일전에서 승리는 예상과 다른 쪽으로 가 버렸다.
그곳의 가주를 지켜주는 절정의 무사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봤다.
그 사내의 이름을 사람들은…… 진군휘라 칭했다.
"너로구나! 엄청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한 여인만을 지킨다던 무사. 들어봤
다, 그리고 꼭 한 번 보고 싶었지."
누남천은 청삼에게 살짝 눈짓했다. 맨 처음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청삼은 곧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다.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
으며 그는 노를 젓기 시작했다.
"저쪽으로 가라."
수황은 간단하게 손으로 한 곳을 가리킨 후에 배 위에 주저앉았다. 그가 앉
자 그 앞에 있던 여운휘와 누남천 또한 자리에 앉았다.
"실력을 보아하니 십대후기지수들에 비해 나았으면 나았지 부족함은 없어
보이는 군."
"솔직히 말해 십대후기지수들은 이 자에 비하면 한참은 모자라오. 하북팽
가의 팽산위 또한 일장에 날렸던 전적이 있는 사내니."
"요즘 십대후기지수라는 자 중에서 쓸만한 자는 몇 없지."
그때 굳게 닫혀있던 여운휘의 입이 열렸다.
"남궁진."
"음?"
"남궁진 그 자는 꽤 강하오."
"남궁세가의 남궁진을 이야기하는 건가? 그 사내는 분명 대단한 무골이지.
만나 본 적이 있는 모양이군?"
여운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까지 십대후기지수라고 불리는 자를 몇 만나봤다. 그러나 개중에 남궁
진 만한 자는 없었다.
실력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눈빛이 다르다. 후기지수라는 이름에 취
해 해롱거리던 다른 자들과는 다르게 눈빛이 살아 있다.
남궁진이 자신에게 대연십구식(大衍十九式)에 이어 날렸던 천뢰삼장(天雷
三掌)은 내색은 안 했지만 상당한 내상을 줬다. 그리 큰 부상은 아니었지
만 내공이 심후(深厚)했다면 분명 낭패를 봤을 거다.
"이봐. 저 쪽으로 배를 틀어."
수황이 청삼을 향해 말했다. 배를 처음 저어보는 청삼은 갑작스럽게 방향
을 틀라는 말에 허둥지둥 댔다. 그 모습을 본 수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청삼을 밀치고는 노를 건네 받았다.
"이거야 원 사내새끼가 영 시원치 않아……"
수황은 익숙하게 노를 저어 옆에 있는 땅으로 배를 가져다 댔다.
"내리게."
노를 배 위에 던져 놓은 후 수황이 밖으로 몸을 날렸다. 수황이 발을 딛기
가 무섭게 주변에서 수많은 사내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을 향해 수황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들은 수황의 정체를 알았는지 순식간에 모두 무릎을 꿇었다.
수황은 고개를 돌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후는 나도 책임을 지지 않을 거다. 한 마디로 죽을 지도 모른다는 거
지."
"이곳으로 데려와 준 것으로도 충분히 감사하오."
누남천은 가볍게 목례를 하며 말했다.
"넌 두렵지 않나? 아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곳으로 오는 것도 몰랐다고 하
던데."
"두렵지 않소."
"죽을지도 몰라."
"난 죽지 않소. 아니, 죽을 수 없소. 지켜야 할 사람이 있거든."
수황은 피식 웃었다. 이 사내가 말하는 그녀가 누군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
도 알 수 있다. 이 사내가 지킨다는 악양유가의 가주다. 어떻게 이런 사내
를 얻었을까?
이런 사내는 쉽게 만날 수 없다. 입에 발린 사탕발림이 아니다. 마음 속에
서 우러 나오는 진심이다. 거짓으로는 너를 위해 얼마든지 죽어 줄 수 있다
고 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리 하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여운휘는 이미 멀리 떨어져 버린 강 건너편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기다려. 곧 돌아갈테니까.'
시선을 돌린 여운휘는 천천히 누남천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수황은 조용히 걸었다. 그의 뒤를 따라 걸으니 수적으로 보이는 사내들도
다가서지 않았다.
수적들의 눈이 누남천과 여운휘, 그리고 청삼에게 박혔다. 다가오지는 않지
만 분명 그 셋을 경계하고 있는 거다.
여차하면 당장이라도 옆에 있는 자신들의 무기를 꺼내들고 달려들리라.
수황이 멈춘 곳은 동굴의 입구 앞에서였다. 막 앞에 있던 두 명의 수적들이
자신들의 검을 들어 올렸지만 수황이 손을 들어올리자 그들은 다시 무기를
내렸다.
그 둘 중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내가 다가와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
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 둘이 총채주를 만나야 한다는 군."
"…… 전혀 본 적이 없는 자들입니다."
"당연하지. 이 둘은 외부인이니까."
"예? 하지만……"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수황이 그 둘을 제치고는 안으로 들어가
라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누남천은 전혀 거리낄 게 없다는 듯이 앞으로 걸었다. 그에게는 주저할 이
유가 없었다. 어차피 하고자 했던 바다.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다.
동굴은 그다지 깊지 않았다. 셋은 들어서서 얼마 가지 않아 한 사내의 모습
을 발견했다. 호피(虎皮)를 덮은 의자에 앉아 앞을 쏘아보고 있는 사내의
눈이 여운휘와 마주쳤다.
"오지 말라 했을 터인데."
막 잠에서 깬 듯한 갈라진 음성이 사내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장강수로십팔채의 총채주라기에 꽤나 우락부락한 사내
일 줄 알았거늘 실제로 보니 상상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얼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긴 검상만 없다면 그 누가 봐도 무인으로 보이
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렇게 유약하게 생긴 자가 현재 장강수로십팔채
의 총채주인 혁련우라는 사실을 이 안에 들어온 셋 모두 알고 있다.
의자에서 일어나 어느 정도 다가온 혁련우를 향해 누남천이 입을 열었다.
"누남천이오."
"광한검이 무슨 일로 온 거지? 난 당신과 전혀 인연이 없는데."
"아아,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공적인 일로 왔소."
"난 분명 만나기 싫다는 내 뜻을 보였지.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당장 꺼
져. 죽고 싶지 않다면."
혁련우는 대단한 자다.
그는 삼십 정도 되는 나이에 장강수로십팔채의 총채주로 올라섰다. 그리고
이십 여 년 동안 그 누구도 그에게 반기를 들지 못했다. 초반에는 그의 유약
한 외모 탓에 많은 자들이 반발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무공과 수완으로 인해 이년 안에 장강수로십팔채는 완벽하게
혁련우의 손에 들어와 버렸다.
무공뿐만이 아니다. 머리도 있는 자다.
무공만 뛰어나다고 능사(能事)는 아니다. 아무리 대단한 무공을 지닌 자라
도 머리가 받쳐주지 않는다면 상대하는 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머리까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출중한 무공 실력에 빼어난 머리. 그 두 가지를 모두 갖추는 것은 쉽지 않
다. 그렇지만 그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사내가 지금 앞에 있다.
"그 일 때문에 그러는 모양이군."
누남천의 말에 혁련우의 눈이 꿈틀했다.
혁련우가 누남천의 방문을 거절한 것은 예전 일 때문이다.
일전에 그는 장강수로십팔채에 모욕을 준 일이 있다.
누남천이 장강수로십팔채 중 하나를 찾아가 그곳의 채주의 손 하나를 잘라
낸 일이 바로 그것이다. 잘못이 이쪽에 있었기에 혁련우는 끓어오르는 화
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자가 찾아와서 할 이야기가 있다는 데 반갑게 받아들일 리가 없다.
"그건 분명 그 자의 잘못이라는 걸 알고 있지 않소."
"알고 있다. 그래서 널 살려두고 있는 것이고. 하지만 내 마음은 변한 게 없
다. 너와 할 이야기는 없다."
"들으시오."
"들을 마음이 없다고 했다!"
콰앙!
그의 장포가 펄럭이는 순간 옆면의 동굴에 움푹한 자국이 생기며 돌가루 떨
어져 내렸다. 혁련우의 일장에 의해 생긴 구멍은 어른의 머리통 하나 만했
다. 그 모습에 청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토록 단단한 바위를 저렇게 만들 정도라면 사람이라면 물어 보나마나다.
평범한 자라면 저 일장에 온 몸이 터져 버릴 게다.
놀라버린 청삼과는 다르게 누남천은 오히려 목청을 높였다.
"들으시오!"
"듣지 않는다 하지……"
"수천, 아니 수만의 목숨이 달린 일이오!"
"……"
누남천을 향해 소리를 지르려던 혁련우는 그의 마지막 말에 입을 다물었
다. 수천 수만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는 말에 혁련우조차 순간 할 말을 찾지
못한 거다.
"이제 들을 마음이 생기셨소?"
"수천 수만의 목숨?"
"그렇소. 그리고 그 안에는 장강수로십팔채의 피도 있을 게요."
듣지 않으려 했다.
장강수로십팔채에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준 자와는 한 마디의 대화도 나눌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만 듣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많은 목숨이 달린 일이라
는 데, 그것도 자신의 수하들의 목숨도 달려 있다는 일인데 그냥 넘길 수가
없다.
"…… 무슨 말이냐."
"마교가 움직일 거요."
"마교가?"
그 말에 놀란 건 혁련우뿐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조용히 서 있던 여운휘도
그 말에 순간 움찔했다.
'마교가…… 움직였다고?'
마교가 요즘 조금씩 꿈틀거린다는 사실은 여운휘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누남천이 이곳에 온 것이 마교와 관련 된 일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
했다.
"마교의 힘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거라 믿소."
"…… 알지 아주 지독하게."
장강수로십팔채는 분명 수적들의 모임이다. 정파가 아닌 사파라고 봐야 옳
다.
그렇지만 그들은 마교와는 그 길을 달리한다. 그 탓에 잦은 충돌이 있고, 웬
만한 일이면 장강수로십팔채 쪽이 한 걸음 물러서야 했다.
마교와 정면격돌은 미친 짓이다. 장강수로십팔채의 힘은 마교의 이 할도 되
지 못한다.
그나마 마교와 일전을 겨룰 수 있는 세력은 무림맹뿐이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군. 마교가 움직였다고 날 찾아온 이유는 뭐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정과 사의 싸움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거요. 무
림맹 대 마교로도 충분히 힘든 상황이라는 것은 알고 있을 거요."
잘 알고 있다. 마교의 힘이 분산되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아직까지 마교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런 싸움에 마교뿐만이 아니라 녹림까지 끼어 든다
면 무림맹으로서는 버틸 힘을 잃게 될 거다.
"지금 내게 마교와 손을 잡지 말라고 부탁하러 온 건가?"
"그렇소. 그런 이유로 내가 무림맹을 대표하여 온 것이오."
혁련우 또한 마교와 손을 잡을 마음이 없다. 그렇지만 단번에 그렇게 하겠
다고 약조도 할 수 없다. 마교 쪽에서 힘을 합치자는 전령이 온다면 쉽게 뿌
리칠 수 없다.
단순히 세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라는 것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말은 부탁
으로 보이는 명령이다. 명령 불복종은 말할 필요도 없다. 장강수로십팔채
의 힘이 다 모이기도 전에 마교의 세력 일부가 득달 같이 밀려오리라.
막을 수는 있을 거다. 그렇지만 그 피해는 녹록치 않으리라.
"…… 대답을 당장 주지 못하겠군."
"그렇소?"
그리고 그런 혁련우의 마음을 누남천 또한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한 무리를 대표하는 자는 쉽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행동 하나 하나
가 수하들의 목숨에 귀결된다. 결코 쉽사리 대답할 수 없다.
지금 같은 상황에 쉽게 대답하는 자는 믿을 수 없는 자다.
"언제쯤 대답을 줄 수 있소?"
"언제일지는 나도 모르겠군."
"최대한 빨리 의사를 말해줬으면 하오. 지금 무림은 일촉즉발의 상황이라
서둘러 무림맹으로 돌아가야 하는 터라……"
그 말에 혁련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누남천
이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답을 듣고 갔으면 하는데."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해. 밖에 있는 사내 둘 중 하나에게 말한다면 임시로
머물 거처로 데려가 줄 거다."
혁련우는 그 말을 마치고 의자로 돌아가 다시 주저앉았다.
머리가 복잡하다. 무림에 이상한 조짐이 보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
지만 여유를 가지고 전망을 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일이 돌아간다
면 멍하니 두고 볼 수는 없다.
그때 혁련우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를 봤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 사내는
몸을 돌리더니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 눈빛은 왠지 모르게 혁련우에게 싸한 전율을 전해 주었다.
마치 심장까지 파고드는 느낌이다.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낀 혁련우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모두 밖으로 나간 후였다.
'저 사내는…… 누구지?'
본 적이 없는 자다. 누남천과 다닐 정도라면 어느 정도 무림에 알려진 자일
텐데 저런 사내에 대해선 들어 본 적이 없다.
궁금증이 치밀었지만 뛰어 나가서 묻기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청삼은 마주 잡은 두 손을 자신도 모르게 비비고 있었다. 몸 속 가득히 긴장
이 묻어 난다. 창문을 통해 본 풍경은 그를 소름 돋게 만들었다.
험상 굳게 생긴 자들이 주변에 가득하다. 그들의 손에 들린 병장기(兵仗器)
들은 당장이라도 육신을 갈가리 찢어버릴 듯만 하다. 험상 굳은 거라면 청
삼 또한 부족한 편은 아니다.
외모에서는 밀리지 않지만 실력은 그렇지 않다. 자신과 저자들은 다르다.
거기다가 이곳은 장강수로십팔채의 총채주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 있는 자
들 하나 하나가 자신과 비슷하거나 높은 실력자들일 거다.
도망을 치고 싶어도 도망을 갈 수가 없다.
어제 이야기를 들어 보니 결과는 두 개 중 하나다. 저들과 손을 잡게 되거
나, 아니면 적이 될 거다. 적이 된다면 이번은 절호의 기회가 된다. 광한검
누남천을 이토록 쉽게 죽일 기회는 다시없을 거다.
청삼이 불안한 눈으로 창가를 바라보고 있을 때 누남천이 침상에 몸을 기대
고 앉아 있는 여운휘에게 물었다.
"혁련우가 어떤 대답을 할 것 같으냐."
"…… 내가 그가 아닌 이상 확답은 드릴 수 없는 것 아니겠소. 다만 내가 그
라면 싸우겠다고 말할 거요."
"큭큭, 네 대답을 그 사내에게서도 들었으면 하는 군. 그렇지 않으면……"
누남천의 눈이 창 밖으로 향했다.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진중(鎭重)해 보였
다. 그로서는 혁련우의 말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였으면 하고 있
다.
목숨이 두려운 건 아니다. 단순히 이곳에서 살아나가기 위해 그렇게 간절
한 마음을 가질 리는 없다. 이번 일은 누남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수천,
수만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경시 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다.
"저, 저기 그런데 어르신의 뜻과 총채주의 뜻이 다르다면 위험하겠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청삼은 누남천에게 물었다.
당장 목숨이 위급한 마당에 무림의 안전이고 뭐고 귀에 들어올 턱이 없다.
그의 머릿속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만 가득했다.
할 게 많다. 살아서 나가 자신을 버리고 간 수하들에게 벌을 내려 줘야 하
고, 술도 마시고 싶다. 그렇지만 지금 이곳에서 죽게 된다면 모든 게 끝이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함부로 죽일 수는 없겠지. 하지만 뜻이 달라진다면 쉽게 나
가지도 못할 게야."
분명 지금은 누남천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거다. 사방이 적이고 도
망칠 곳도 변변치 않다. 죽이려 든다면 지금 만한 기회는 흔치 않을 거다.
그렇지만 그냥 죽일 수도 없을 거다. 그는 무림맹을 대표해서 온 자다. 그
를 감금한다고 해도 문제가 될 터인데 죽이지는 않을 거다. 만약 죽이게 된
다면 마교가 아닌 무림맹과 정면 격돌을 벌려야 할 테니까.
방안에 있는 삼 인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 셋은 모두 다른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했다.
살고자 하는 청삼, 무림의 앞날을 위해 걱정하는 누남천, 그리고 움직이는
마교에 대해 고민하는 여운휘.
여운휘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마교의 움직임이다. 다른 쪽의 움직임
은 풍운조와 유가의 힘으로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마교에 대해
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봐도 무방하다.
유가의 정보망은 마교에도 뻗쳐 있다.
근본적인 뿌리가 마교이니 당연한 거다. 그렇지만 아직 여운휘는 그 정보망
을 가동시키지 않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 탓이다. 지금은 마교 교
주인 엄백린이 내부를 정리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덜미를 잡힐 지도 모른다.
마교는 곧 밖으로 힘을 뻗기 시작할 거다. 외부에 신경을 쓰게 되면 그만큼
내부에 관해서는 빈틈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유가는 마교에 심
어 놓은 정보망을 이용해 활발하게 정보를 물어다 줄 거다.
덜컹.
"식사요."
문이 열리더니 식사를 가져다 주는 사내가 간단하게 먹을 것을 던져 놓고
밖으로 나갔다. 자잘한 것들 몇 개에 물이 식단의 전부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것을 가지고 분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청삼은 불안한 눈으로 음식을 입안에 넣었고, 여운휘는 여전히 침상에 기
댄 채로 밖을 응시했다.
날씨가 무척이나 쌀쌀해 보인다.
달이 중천에 걸렸다.
하늘 중천에 걸린 달은 약하지만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밑에 한 사
내가 서 있었다. 기다란 장검을 하나 들고 있던 사내의 몸이 천천히 움직이
기 시작했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천천히 그 움직임은 거세졌다. 부드러운 여인의 손길처
럼, 강인한 폭풍의 울부짖음처럼 사내의 몸은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사내의 요동치던 검이 나무를 향했다. 그리고 그 검은 나무에 박혀 잠시 부
르르 떨었다. 그는 검을 뽑지 않고 이번에는 맨 손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까보다 사뭇 움직임이 부드럽다. 더군다나 그의 양손에서 터져 나
오는 장력이 주변에 있는 나무와 바위들을 박살냈다.
퍼억!
바위에 놀랍게도 사람의 육장의 생김새가 그대로 찍혀 버렸다.
힘겹게 춤사위를 맞춘 사내는 호흡을 길게 늘어트렸다.
"후우……"
그토록 격하게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땀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다. 사내
는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바탕 움직이면 개운할 거라 생각했거늘 착각이었나 보다. 계속 이어지는
고민이 지금도 머릿속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바위에 몸을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내는 혁련우였다.
'마교, 그리고 무림맹.'
양쪽 중 어느 쪽과 손을 잡느냐는 혁련우가 정할 문제다. 기본 적으로 장강
수로십팔채는 사파에 가까운 단체다. 그렇지만 단순히 그러한 이유 때문에
마교와 손을 잡을 수는 없다.
현 마교 교주인 추혼객 엄백린은 영특한 자다. 그리고 간악한 자이기도 하
다.
그는 자신들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도를 시도할 자
다. 그 안에 자신의 세력인 장강수로십팔채가 없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
다.
하늘로 향했던 눈이 이제는 혁련우 자신의 손으로 내려왔다. 이 손, 자신의
손 하나에 수천의 목숨이 오고갈 거다. 겨우 이 작은 손 하나가 그토록 큰
일을 만들고, 방지하게 할거다.
'하늘은 움직일 수 없지. 하지만 내 손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나다.'
결국 답을 내려야 할 것은 자신이라는 소리다.
머리는 잘 알고 있다. 답은 결국 자신이 내야 할거라는 것을.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달리 쉽게 정할 수는 없다. 답을 내리는 것도 자신이지만 그 뒤에
올 일을 책임져야 하는 것 또한 그다.
'내 손이 이토록 커다랬단 말인가. 수천의 목숨을 좌지우지 할 정도로.'
수라혈수(修羅血手) 혁련우.
무림에서 그를 칭하는 이름이다. 그토록 장법이 빼어난 그이지만 오늘처럼
자신의 손이 커다랗게 보이기는 처음이다.
막 한숨을 몰아쉬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혁련
우는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한 사내를 발견했다.
'저자는……'
며칠 전 누남천과 함께 온 사내다. 그 당시에는 누구인지 몰랐지만 추후에
알아보니 현재 무림에 신성처럼 등장한 진군휘라는 자다. 그 날의 대면 후
만난 적이 없는 사내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이런 늦은 밤 이런 곳에서 만나
버렸다.
"진군휘. 맞지?"
"그렇소."
"대단한 우연이군. 이 늦은 밤에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미안하지만 우연은 아닐 거요. 당신이 동굴에서 나온 뒤부터 계속 쫓았으
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혁련우의 입 꼬리가 꿈틀했다. 여태까지 누군가가 자신
의 뒤를 쫓는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다.
동굴에서 나와 이곳까지 와 무공을 펼쳤다. 그것은 반 시진 정도 동안 벌어
진 일이다. 그 긴 시간 동안 몰랐다. 자신의 뒤에 누군가가 붙어 있다는 사
실을.
"조용히 내 뒤를 쫓았다? 건방진 놈! 내가 누구로 보이느냐. 나 장강수로십
팔채의 총채주인 수라혈수 혁련우를 네가 아주 개차반으로 본 모양이구
나."
혁련우의 양손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의 독문 무공인 수라장(修羅掌)이 막 펼쳐지려는 순간이었다.
"나와 싸우겠다면 언제라도 상관없소. 하지만 지금 총채주는 나와 싸울 때
가 아닐 텐데."
"……"
여운휘의 말에 혁련우는 들어 올렸던 손을 내렸다. 그의 말대로 지금 싸워
서 무엇하겠는가. 혁련우가 손을 내리자 여운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난 총채주가 우리의 부탁을 들어줬으면 해서
온 거요."
"…… 그리 쉽게 대답할 문제가 아니다."
"나도 알고 있는 문제요. 당신의 손에 달린 목숨을 생각하면 쉽게 대답을
내릴 수 없겠지. 하지만 나 또한 지키는 사람이 있소. 당신의 떠 안고 있는
수천의 목숨에 비하면 우스울지 몰라도 나에겐 그 수천의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이오."
혁련우 또한 알고 있다.
이 사내가 대단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한 여인을 지켜주는 자라는 것을.
"너에게 묻겠다. 내가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
"무림맹의 말을 듣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오."
"어째서?"
"싸움에 낀다면 장강수로십팔채는 피해를 면하기 힘들 거요."
"끼지 않는다 해도 피해를 보는 건 변함이 없을 거다."
싸움에 낀다면 무림맹에게 타격을 받게 될 테고, 그렇지 않으면 마교로부
터 압력을 받게 될 거다.
"마교가 무림맹과 붙게 된다면 제대로 장강수로십팔채 쪽으로 손을 뻗지
는 못할 거요. 싸움이 붙기 전까지는 힘들긴 하겠지만 그 후로는 안전할 거
요."
"좋아, 그건 그렇다고 치지.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내게 돌아오는 건 뭐지?
나보고 손해만 보고 물러서라는 건가?"
"모르는 군. 가장 큰 것이 돌아오지 않소."
"…… 큰 것?"
혁련우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나는 게 없다. 이번
싸움에서 무림맹의 말처럼 마교와 붙지 않아서 그들에게 돌아올 이득이 무
엇이 있단 말인가.
"당신 수하들의 목숨."
순간 혁련우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한 무리의 대장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바로 수하들의 목숨이다. 여태까지 어떻게 하면 최대한으
로 피해를 줄일까 생각했다.
알고 있었다. 수하들의 목숨을 위해서는 무림맹의 말을 듣는 편이 나을 거
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의 자존심과, 장강수로십팔채라는 명예가 그에게 쉽
사리 답을 내리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서 있던 혁련우가 입을 열었다.
"넌 왜 싸우는 거지?"
"한 여인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거요."
"겨우 그게 다인 건가?"
"나에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여인이니까. 다른 사람에게 하찮게 보일지
라도 그게 나에겐 전부요."
혁련우는 피식 웃으며 돌 위에 다시 몸을 걸쳐 앉았다. 그리고는 반대편 돌
을 가리켰다. 여운휘는 그가 가리킨 돌 위로 천천히 앉았다.
"아쉽게 술이 없군. 술이라도 한 잔 있다면 참으로 멋진 밤일 터인데."
혁련우는 술을 좋아하는 사내다. 그렇지만 누남천과 만난 이후로는 단 한
잔의 술도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했다.
"한 여인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라……"
무림인들은 바보 같다 손짓할지 모르겠지만 혁련우는 오히려 여운휘의 그
런 모습이 사내다워 보였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자신은 저 사내가 쫓아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저 사내가 어느 정도 되는 인물인지는 알 수 있다. 그 여
인에게 얽매이지 않고 움직인다면 현 무림에서 가장 각광(脚光) 받는 후기
지수가 되는 것도 어렵지는 않을 거다.
저 사내는 모든 걸 버린 거다. 부, 명예, 그 외에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그것도 단 한 명의 여인을 위해서.
"자네가 나였다면 지금 내게 해 준 말처럼 했겠나?"
"말할 필요도 없소. 난 상황이 바뀐다 해도 그리 생각했을 거요."
"…… 대단한 사내구나."
쉬운 듯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이 가질 수 있는 모
든 걸 버릴 수 있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혁련우는 다시 한 번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도 마음을 정해야겠구나.'
혁련우는 다음날 자신의 거처에 있는 채주들을 불렀다. 그리고 그 안에는
혁련우의 스승이자 장강수로십팔채의 최고고수인 수황도 있었다. 그 수는
채주 넷과 수황, 이렇게 해서 총 다섯이다.
모두가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동굴 안으로 혁련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안에 있던 모두가 기립(起立)했다.
맨 앞으로 간 혁련우가 자리에 앉았다.
"모두 앉으시오."
혁련우의 말이 끝난 후에야 그 다섯은 자리에 앉았다. 그건 수황에게도 예
외는 아니었다.
"오늘은 중대한 일이 있소. 그래서 내 모두를 부른 것이고. 비록 이곳에 있
던 채주들 밖에 부르지 못했으나 이 일은 그 어느 때보다 중대한 문제요. 시
간이 없어 다른 채주들을 소집하지 못한 거지 결코 이 일이 가벼워서가 아
니란 말이오."
수황뿐만이 아니라 채주들 또한 현재 상황에 대해 전해들은 상태다.
총채주의 말대로 결코 경시할 수 없는 문제다. 크게는 장강수로십팔채의 사
활(死活)이 걸릴 정도로.
"뜻을 정한 듯 하군."
"물론입니다."
수황은 혁련우의 표정을 보고 마음을 정한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수황
의 예상은 적중했다. 혁련우는 살짝 미소짓더니 채주들의 얼굴을 하나씩 바
라보았다. 하나 하나를 모두 머리 속에 박아 넣으려는 듯이 뚫어지게 바라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내 오늘 도박을 해야겠네. 상당히 큰 도박일 게야. 목숨이 걸린……"
혁련우는 회의를 할 때는 항상 반 정도 경어를 사용하는 자다. 그런 그가 술
자리에서처럼 편안하게 말을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주들은 흐트러
짐이 없이 혁련우의 입을 응시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따라 목숨이 오고 갈 거다. 자신들은 채주다. 그리
고 저 앞에 있는 혁련우는 총채주다. 자신들이 믿었기에 총채주를 맡겼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화가 없다.
"총채주! 어서 말하십시오! 저희는 총채주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평소에 호탕하기로 유명한 혁산(赫山)이 가슴을 치면서 말했다. 그의 모습
을 보며 다시 한 번 웃음을 지은 혁련우가 입을 열었다.
"난, 무림맹의 말을 따르려 한다."
"무림맹?"
그의 말에 수황은 다소 이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림맹과 장강수로십팔채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랬기에 수황은 혁련
우가 마교와 손을 잡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쪽이 천하를 도모하는
데에도 나을 거라고 판단했었다. 그런데 혁련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자신
의 추측과 어긋나버렸다.
그러한 생각을 한 것은 수황뿐만이 아니었다.
혁련우의 말이 끝나자 아무도 무슨 말을 꺼내지 못했다. 순식간에 분위기
가 가라앉자 일어서서 주변을 둘러보던 혁산이 가슴을 쾅쾅 치며 말했다.
"무엇들 하는 가! 총채주님께서 정하셨다지 않은가. 누가 죽었는가! 그리
도 표정들이……"
그때 수황이 입을 열었다.
"총채주."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혁산마저도 그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 조용히 자리
에 앉았다. 혁련우의 눈이 수황에게로 향했다. 말해보라는 듯한 그의 눈빛
에 수황은 천천히 일어났다.
"솔직히 이해가 안 가는 군."
"그러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당연한 거다. 장강수로십팔채는 그 누가 봐도 정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
고 가장 중요한 이유로 무림맹과 손을 잡아서 볼 수 있는 이득이 보이지 않
는다. 이득도 없는 싸움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하물며 그게 장강수로십팔채라는 거대한 세력을 이끄는 우두머리라면 두말
할 나위도 없다.
"무림맹의 말대로 마교에게 힘을 빌려주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이
득도 없을 거다. 오히려 마교의 공격에 인해 많은 피해를 보겠지. 영특한 네
가 이것도 생각하지 않았을 리는 없을 테고…… 이유가 뭐냐?"
"한 무인에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가 말했지요. 자신은 한 여인을 지키
기 위해 싸운다고."
"그자로구나."
수황은 혁련우의 말에 그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무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렸
다. 한 여인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하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무인은 단 하
나밖에 없었다.
'진군휘, 그 자로군.'
혁련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전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그리고 답이 나왔습니
다."
"답? 그래 네가 얻은 답이 무엇이냐."
"전 장강수로십팔채를 위해 싸웁니다."
"좋은 답이군. 한데 그것이 무림맹과 손을 잡는 것과 어떠한 관계가 있다
는 거냐."
동굴 안에 있던 모두가 혁련우를 바라봤다. 수황 또한 대답을 원하는 얼굴
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던 혁련우가 입을
열었다.
"장강수로십팔채를 지킨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
고 장강수로십팔채를 지킨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도. 그리고 전 제가 지켜
야 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건 제 수하들의 목숨입니다."
"허어!"
"제 수하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마교가 아닌 무림맹의 의견을
따라야 합니다. 마교는 우리를 선봉으로 내세울 것이 분명합니다. 분명 많
은 피해가 있겠지요. 전 그래서 무림맹과 손을 잡으려고 합니다."
수황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수황이 비록 강호십일객의 일인이고, 혁련우의 스승이긴 하나 그게 다다.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건 총채주인 혁련우의 몫이다. 그것
에 관해 수황은 왈가왈부 할 수 없다.
장강수로십팔채를 책임지는 건 수황이 아닌 혁련우다.
"그래, 네가 결정한 문제다. 이 결정이 네가 원했던 대로 좋게 돌아갔으면
하는 구나."
"감사합니다."
모두가 아무런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혁련우는 자리에서 일어났
다. 아무도 의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결정은 났다.
'장강수로십팔채는 무림맹을 따른다.'
더 할 말이 없다. 이미 답은 내려졌다.
누남천은 한 장의 종이를 받아 들고 웃음을 흘렸다.
힘들 거라고 생각하고 한 발걸음이었다. 그런데 좋은 결과를 건네 받았다.
"찾아오지는 마시랍니다. 보고 싶지 않다고."
종이를 건네 준 사내가 누남천에게 말했다. 비록 좋은 결과는 줬지만 그와
는 만나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남천은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연신 웃음만 흘렸다.
"알겠네. 좋은 답변 고맙다고 전해드리고 우린 이만 가겠다고 전해주게."
"알겠습니다. 그리하도록 하지요. 그리고 진 소협에게 다시 만날 날을 고대
하겠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말을 마친 사내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청삼은 그 사내가 나가기가 무섭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좋게 해결 된 모양이다. 이곳에 있는 칠일은 정
말 사람의 피를 말리는 나날들이었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 탓에 더욱 두려웠다. 폭풍이 일기 전에
그 조용함을 연상케 할 정도로 분위기는 냉랭했다.
당장이라도 목이 떨어져 나가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두려움
에 떨고 있었는데 이 한 장의 종이로 인해 모든 긴장이 풀려버렸다.
'제길, 드디어 산채로 돌아가게 되었구나.'
산채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청삼은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 쥐새끼
같은 관지가 떠오르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만나게 되면 당장 머리통을
부숴 놓으리라.
"다시 만날 날은 고대하겠다니? 특별히 그와 만난 적이 없는 걸로 아는데?"
"일전에 밤에 만난 적이 있소. 그리고 대화를 조금 나누었었소."
"그런가? 어쨌든 재미있는 인연이었던 듯 싶군."
누남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강수로십팔채 총채주의 마음을 안 이상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
다. 이곳에서 보낸 일주일이라는 시간도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그다. 서둘
러 무림맹 쪽에 이 사실을 알리고 또 마교와의 있을지도 모르는 일전에 대
비를 해야 한다.
"가져온 짐들 모두 챙겨. 서둘러 가야 할 테니까."
여운휘는 검을 쥔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초에 이곳에 올 때 가져온 짐
은 없다. 그건 청삼 또한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개처럼 끌려왔거늘 가지고
온 것이 무엇이 있을까?
누남천은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 밖에 있
던 수적들이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누남천은 망설이지 않고 걷기 시
작했다.
배가 있는 곳에 도착한 그는 사공(沙工)에게 말을 걸었다.
"저 밖으로 나가야 하네. 급하니 서둘러 주게."
사공은 잠시 그들을 바라봤지만 그 뒤에 따라온 수적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
제야 배 위로 올라섰다.
사공이 배 위에 올라서자 셋 또한 그 뒤를 이었다. 배가 천천히 강을 가르
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가운 강 위를 배는 조용히 가르고 있었다.
삐걱 삐걱.
사공의 손은 쉴새 없이 움직였다. 강이 얼은 탓인지 아래에서는 차가운 한
기가 밀려 올라왔다.
뱃전에 몸을 기대고 스쳐 가는 강을 바라보던 여운휘는 순간 손이 움찔했
다. 순식간에 스쳐지나갔지만 여운휘는 분명 느꼈다.
'살기다.'
태연하게 앉아 있었지만 몸의 모든 신경을 최상의 상태로 끌어 올렸다. 무
엇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뭔가가 있다. 누남천은 아직 느끼지 못했는지 여전
히 강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만히 전방을 응시하던 여운휘가 뒤를 향해 손을 뻗었다.
파악!
여운휘의 손이 누군가의 팔목을 잡아챘다.
물 속에서 막 솟구쳐 오른 손이 뒷덜미를 잡으려 했지만 여운휘가 더 빨랐
다.
팔목을 채기가 무섭게 여운휘는 물 안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렇지만
여운휘의 주먹이 채 물에 닿기도 전에 배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크윽!"
여운휘는 상대방을 잡고 있던 손을 놓쳐버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일격으
로 인해 잠에 빠져 있던 청삼도 벌떡 일어나 버렸다.
"뭐, 뭐야?"
파앙!
공중으로 솟구쳤던 배가 물 위에 떨어졌다. 여운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지 잠잠해졌다. 그렇지만 여운휘의 눈
은 매섭게 변한 상태 그대로였다. 누남천 또한 이 갑작스러운 일에 자리에
서 일어나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
"온다!"
그 순간 물살이 공중으로 터져 오르면서 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
에게 다가오는 손을 향해 여운휘 또한 자신의 좌수(左手)를 움직였다.
두 손바닥이 만나는 순간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물이 터져 올랐다. 물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솟구쳤고, 그 안에서 한 노인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
냈다.
"네 놈…… 뭐 하는 놈이냐?"
노인의 정체를 확인한 누남천은 목소리를 높였다.
"이게 무슨 짓이오! 수황!"
모습을 드러낸 노인은 강호십일객의 하나인 수황이었다. 자신들이 떠나고
난 후 이곳까지 따라온 모양이다.
"물었다. 넌 뭐 하는 놈이냐? 네 놈의 좌수에 내가 밀렸어. 말이 된다고 생
각해?"
"말이 안될 것은 뭐요?"
"허…… 궁금해서 묻는 겐가?"
강호십일객인 자신이 이제 갓 무림에 출두한 사내에게 밀렸다. 자신이 당
한 일이 아니었다면 결코 믿지 못했을 거다. 거기다가 자신인 것을 알았음
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뒤로 물러설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잘 됐군. 솔직히 당신과 싸워보고 싶었으니까."
"겁없는 놈!"
두말할 필요도 없다. 수황의 우수가 여운휘의 백해혈(白海穴)을 노리고 날
아들었다.
무한한 꿈을 가진 이들의 모임… 사신(四神)
그들의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의 끝을 보기 위한
그 위대한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이 이야기는 그들 중 남주작 요도의 이야기 이다.
dreams come true 사신(四神)
오늘 좀 늦었습니다.
지금도 집이 아닙니다. 아마 오늘은 집에
들어갈 수 없을 듯 하군요. 피시방에서
서둘러 썼습니다. 그 탓에 상당히 내용이
늘어만 지는 기분입니다;
이 점은 정말 독자 분들에게 사과 드립니다;;
항시 바쁘다 보니 정말 글이 엉망인 날이 너무
많군요.
하지만 수정을 해서 책을 낼 때는 정말 남의 갑절 이상의
노력을 하겠습니다
양해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skawo@hanmail.net
사탕을 빨면서 요도가
***그리고 백해혈을 견정혈으로 바꿉니다. 백해혈을 순간
헛갈렸습니다. 백해혈은 넓적 다리 쪽입니다^^;; 죄송****
수황의 우수가 견정혈을 노리고 다가오자 여운휘는 손을 낚아채기 위해 움
직였다. 어깨를 향하던 우수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물 위임에도 불구하고 수황의 몸은 땅에서와 마찬가지로 거침이 없었다.
물이 튀어 오르며 순간 여운휘의 균형을 무너트렸고, 틈을 놓치지 않은 수
황의 손바닥이 여운휘의 가슴을 향해 움직였다.
'체엣!'
여운휘는 뱃전을 발로 밀면서 뒤로 뛰어올랐다. 손의 거리를 벗어났다고 생
각하는 순간 수황의 뒤에서 빠른 속도로 무엇인가가 터져 나왔다.
퍼엉!
양손을 가슴 부분을 교차시키며 충격을 완화시켰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다.
공중에서 가까스로 균형을 잡은 여운휘는 배의 끝에 간신히 착지했다. 특별
한 무기나 장력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옷을 바라봤다. 살을 에는 듯한 차
가움이 물씬 풍겼다. 그리고 옷은 잔뜩 젖어서 하얀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물이다. 방금 자신을 공격한 것은 분명 물이었다.
"왜 이러는 거요!"
누남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가려고 하자 수황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죽는다."
"수황!"
"죽이진 않을 거다. 하지만 들어야 할 것이 있다."
무엇이 혁련우를 움직였는가. 저 사내의 무엇 때문에 그가 마음을 열었을
까. 사파는 사파여야 한다. 개인적으로 수황은 마교와 손을 잡았으면 했다.
자신의 제자인 혁련우의 선택도 옳다는 것은 알고 있다. 어떻게 본다면 자
신의 생각보다 그의 생각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정이 내려진 지금 총채주의 뜻에 반발할 생각도 없다. 결정은 그
가 내리는 거니까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는 거다.
수황은 듣고 싶었다.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가 아닌 저 사내의 입으로 직
접.
그렇지만 일이 어떻게 되다 보니 지금처럼 손을 겨누게 됐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따라오기는 했지만 이처럼 겨룰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
의 은밀한 움직임을 젊은 놈이 알아차렸다는 것을 느끼자 갑자기 자존심이
상했다.
일전에 자신과 만났을 때 검을 치켜들었던 일도 생각났다. 순간 가슴 한편
에서 울컥 하는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무인 대 무인으로서 겨뤄 보고 싶은
마음이 인 거다.
수황은 강호십일객이라는 위명에 어울리게 호승지벽(好勝之癖)이 강한 자
다. 어느 정도 한다고 하는 무인들과 싸워서 이기는 것을 즐기는 자라는 말
이다. 그런 그이거늘 최근 들어 누구와 손을 맞대 본 적이 없다.
그 누가 강호십일객이라는 위명 앞에 자신의 이름을 내던지겠는가?
그래서 손을 맞댔다. 꽤나 실력이 있는 자라는 것은 일전에도 알았지만 손
을 맞대니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알아차리고는 있다고 하나 자신이 밀렸다. 젊은 사내의 좌수에 자신이 밀
려 버렸다.
그 순간 대충하고 끝내자던 마음은 깨끗하게 사라졌다. 확실하게 보여주기
전까지는 멈출 수 없다.
수황은 눈을 감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배 밖에 쪽에 있던 물방울들
이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물방울은 수황을 보호하려는 듯이 그를 가운데 두고 공간을 메우기 시작했
다.
여운휘는 지금 이런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이런 상대와
는 싸워 본 적이 없다. 저 물방울들이 어떤 식으로 공격을 들어올지도 모르
겠다.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치명상을 입을 게다.
그렇게 망설이는 동안 물방울은 작은 침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그리고 침처
럼 변한 물방울들은 여운휘를 향해 쇄도했다.
보통의 물방울이 날아드는 거라면 얼마든지 맞아 줄 수 있다. 그렇지만 저
무공을 사용한 자가 수황인 이상 저건 결코 그냥 물방울이 될 수 없다.
물방울은 정면으로 다가왔지만 어떻게 피할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뭍이었
다면 옆으로 움직여 피하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여기는 물 위다. 그만큼 행
동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거다.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여운휘는 검을 뽑아냈다. 물방울이 여운
휘에게까지 날아드는 시간은 눈 깜짝 할 찰나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그 짧
은 순간에 여운휘는 검을 뽑았다.
쒜엑!
검은 물방울을 갈랐다. 그리고 더불어 앞을 향하며 수황의 옷깃을 벴다. 멀
리 몸을 날려 얼음 위에 몸을 세운 수황은 새삼 놀랍다는 듯이 여운휘를 바
라봤다.
여운휘의 옷은 이미 걸레처럼 너덜너덜하게 변해 있었다. 단 한 번의 휘두
름으로 모든 물방울을 잘라 낸다는 건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여운휘는
단 일격으로 최대한 많은 물방울을 베면서 수황의 옷깃마저 자른 거다.
물론 문제가 생긴 건 옷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침처럼 몸을 관통한 물방울
들과 부닥친 부분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온 몸
이 피로 젖어 버렸다.
여운휘는 신기하다는 듯이 손을 들어 상태를 살폈다. 너무나 색다른 공격이
었기에 순간 대응 법을 찾지 못했다.
'왜 풍운조가 수황과 물가에서 싸우지 말라고 했는 지 알 것 같군."
풍운조로서는 당연한 말을 했던 거다. 수황은 이 강물을 마치 날카로운 무
기처럼 사용했다. 어떻게 본다면 이 강에 있는 모든 물이 무기인 셈이다. 방
심한다면 사방에 있는 물방울들이 날카로운 검이 되어 온 몸을 꿰뚫을 거
다.
여운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수황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면 이 일격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
을 거다. 그렇지만 수황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여운휘
에게 도움이 되었다.
'한 번 당했다. 하지만 두 번 당하지는 않는다.'
수황이 적이었다면 이번 싸움은 여운휘의 패배다. 하지만 이번 싸움에서 여
운휘는 수황을 알았다.
"허, 대단해. 정말 대단한 놈이야. 내 제자인 혁련우와 겨룬다 해도 손색이
없겠어."
수황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상대의 무위에 감탄을 보였다. 혁련우는 수황이
말년에 발견한 대단한 무골이었다. 그 무골에 감탄해 무공을 가르쳤다. 그
런데 지금 이 앞에 있는 사내는 자신이 무골로 인정한 혁련우 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떨어지는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의 양손에 음유한 기운이 피어 올랐다.
"너도 물 위로 오는 게 어떠냐."
수황의 말에 여운휘는 배 위에 만약을 위해 구비해 놓은 나무 판자들을 물
위로 던졌다. 그리고 그 곳을 향해 자신의 신형을 날렸다.
툭.
거대한 파문이 일었어야 정상이다. 아니 그 전에 사람이 나무 판자 위에 선
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땅이라면 모를까 그곳이 물 위라면……
'언제봐도 대단한 경신법이야. 조금만 더 수련한다면 무력답수(無力踏水)
의 경지에 오를 수 있겠어.'
키워보고 싶은 무인이다. 저런 근골을 보면 왠지 모르게 몸이 근질 거린다.
허나, 결코 자신의 수하로 만들 수 있는 자가 아니다. 목구멍까지 과연 진군
악이라는 소리가 올라왔다. 그의 쾌검을 이은 것 답게 대단한 실력자다.
여운휘는 판자에 서서 조용히 검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수황은 내공이 집
중 된 양손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기기 버거운 상대다.'
여운휘는 알고 있다. 상대가 이기기 버거운 상대라는 것을. 상대는 강호십
일객 중 하나인 수황이다. 더군다나 지금 격전지는 그에게 가장 유리한 장
소다. 더불어 여운휘는 오행검법을 쓸 수도 없다. 사용할 수 있는 건 무상검
제의 검. 제약이 너무 많다. 허나 그것에 투덜거릴 시간이 없다.
'벤다.'
여운휘는 앞에 있는 나무 조각을 밟으며 공중으로 도약했다. 공중에서 여운
휘의 검에 하얀 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빛이 모인다 싶은 순간 여운
휘의 몸이 갑작스럽게 돌기 시작했다. 회선(回旋)하는 여운휘를 향해 수황
은 자신의 양 손을 뻗었다.
좌수와 우수에 맺혀 있던 음유한 기운이 여운휘를 향해 이빨을 들이 밀었
다.
그 음유한 장력과 여운휘의 검이 부닥쳤다.
'베었다!'
벴다, 분명히 손을 타고 흐르는 이 전율은 성공했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런
데 뭔가 이상했다. 여운휘는 그 직감을 무시하지 않고 공중에서 몸의 방향
을 비틀며 뒤를 살폈다. 자신이 베어버린 두 개의 기운을 대신해 번뜩이는
무엇인가가 바짝 등 뒤로 다가왔다.
'륜이다!'
동그란 모양에 빙글 빙글 돌면서 그 날카로운 이를 들이밀고 있는 건 분명
륜이다.
'막지 못한다면……'
등이 엉망이 될 거다. 버티기 힘들 정도의 고통이 몸을 엄습할 거다.
죽이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수황은 여운휘에게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좋지. 막아주마.'
여운휘는 공중에서 몸을 비틀며 륜의 사이로 검을 비집어 넣었다. 그와 더
불어 여운휘는 아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일종의 도박이었다. 상대가 던
진 륜을 이용해서 공격을 하려고 한 거다.
그런데 손에 이는 충격이 보통을 넘어섰다. 검을 휘둘렀거늘 륜은 아래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연신 위로 올라서려고만 한다.
여운휘는 이를 악 물었다.
검을 잡지 않은 왼손을 지켜든 여운휘는 수도로 륜의 윗부분을 강하게 내려
쳤다. 수도로 내려침과 동시에 여운휘는 검을 위로 잡아 당겼다. 륜과 검날
이 마찰을 하며 순간 불꽃을 만들었다.
치이익!
마침내 륜은 그 방향을 잃어버리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나무 판자가 아닌 배 위로 몸을 착지하는 순간 몸에 난 상처에서 피가 터졌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운휘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물 위에 떠 있는 판자
를 밟으며 움직였다.
"헛!"
수황은 헛바람을 들이키며 서둘러 손을 휘둘렀다. 다시 한 번 공중으로 떠
오른 물방울들이 침의 형태로 변해 여운휘를 향해 날아들었다. 판자를 밟
으며 움직이던 여운휘의 몸이 갑자기 멈췄다.
그의 검이 물방울로 만들어진 침이 아닌 아래에 있는 강물을 향해 움직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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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