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신앙에 문제가 없는가(2)
빌 3:17-21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
겨 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가지 요구를 하셨습니다. “이 마음을 품으라 이는 곧 예수의 마음이니”, 하나님은 우리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기를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마음에는 3가지 균형 있는 신앙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비움이고 목표이고 역설의 삶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에는 문제가 없습니까? 건강한 믿음을 가지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우리들이 예수 안에 살려면 건강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3가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나를 본받으라
이 말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일차 권면한 말씀(고전 11:1)입니다. 그리고 오늘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두 번째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나를 본받으라.” 이 말씀은 우리 정서로서는 쉽게 말하기 힘든 말이지만 사도바울이 자신의 믿음을 과신해서 한 말이 아니고 자꾸만 흔들리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뜨거운 열심과 확고한 신앙과 그리고 자신의 열정적인 헌신을 본받으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후에 깊은 신앙 체험으로 확고한 믿음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뜨거운 사명감을 가지고 살았고 그 후 사도바울은 여한 없이 죽도록 충성을 다 하였습니다. 그런 마음을 그는 “나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고백하였고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하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확실한 믿음은 두 가지 은혜를 끼치게 됩니다. 하나는 나 자신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지난주일 초점이 분명한 신앙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믿음이 초점이 분명하면 촌치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할까 말까 하는 두 마음이 없습니다. 망설임이나 갈등도 없습니다. 이런 마음은 먼저 나 자신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간증이 좋습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간증하게 되면 책임감이 생깁니다. 더 잘 해야 하겠다는 다짐도 하게 됩니다. 오늘 주일 교회오실 때 전혀 주저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오신 분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오늘은 주일인데 예배드리러 가야해”하고 전혀 주저함 없이 오신 분들은 복 있는 분들입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왜냐하면 목표나 초점이 분명하니까 갈등도 주저함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 100% 다 그런 마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개중에는 억지로 끌려나온 분들도 있다면 “오늘 또 가야 하나” 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오신 것은 잘했는데 매 주일 그렇게 오시면 행복한 마음은 아닐 것입니다. 혹 교회오시며 날씨가 너무 좋으니까 “오늘은 예배드리기에는 아까운 날씨다” 그런 마음이든 분은 없습니까? 그런 분이 있다면 오늘 교회 오는 발걸음이 행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확고한 믿음은 먼저 나 자신에게 행복함을 줍니다. 그리고 ‘너’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 이 시대는 확신자, 소신자를 찾아보기 힘든 시대입니다. 보면 모두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갈등이 있습니다. 초점이 흐려져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중심이 있는 신앙인이었습니다.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초점이 아주 분명했습니다. 그러니까 촌치도 망설임이나 흔들림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이런 신앙 선배가 있다는 것이 복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선배, 이런 신앙인이 있으면 행복합니다. 옆에 있는 분들은 그대로 따르게 됩니다. 일제강점기 때 얼마나 흔들림이 많았습니까? 일제의 유혹이나 회유나 협박 앞에서 많은 분들이 흔들렸습니다. 그때 조만식, 이승훈 같은 신앙인들이 굳건하게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면서 흔들림을 방지하였습니다. 길선주, 주기철 같은 목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명직, 이성봉 같은 신앙인들을 보면서 그 어려운 여건에서도 영적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나 이렇게 든든히 서 있는 위인들을 세워 놓으십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흔들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자신 있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 시대는 신앙인들이 자꾸만 흔들렸고 외부에서 오는 유혹의 도전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옥중에서 그 소식을 들은 사도바울은 옥중에서 “나를 본받으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즉 “내 이 열정과 오로지 복음전파에 매진하는 이 모습을 보라. 너희는 왜 자꾸만 흔들리는가! 왜 유혹을 받는가, 왜 주저하는가!” 하고 외친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든든한 신앙인이 서 있다는 것은 참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좋은 신앙 선배들이 되어주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
행하는 자를 보라
사도바울은 자신만 언급한 것이 아닙니다. 17절을 보면 “나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나뿐 아니라 이 와중 속에서도 나와 같이 든든히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본받을 사람 둘을 천거했습니다. 그 두 사람이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2:25, 29)입니다. 디모데의 이름은 “하나님을 높이는 자“라는 뜻입니다. 디모데는 사도바울이 전도하여 양육한 젊은이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믿음으로 낳은 아들”(딤전 1:2)이라고 불렀습니다. 디모데는 헬라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헬라인 출신 아버지는 디모데에게 장차 헬라적인 사람이 되라고 요구했을 것입니다. 즉 세속적인 성공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유대여인인 어머니는 장차 디모데가 경건한 신앙인이 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디모데는 중간에서 갈등이 많았을 것입니다. 결국 디모데는 어머니를 따라 경건한 신앙인이 됩니다. 그 후 디모데는 사도바울을 따라 동행하며 신뢰를 얻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디모데를 추천하기를 “나와 이 사람을 본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사도바울이 로마 옥중에 있을 동안 빌립보교회 대표로 위로자로 파견한 사람(빌 2:25-30, 4:18)입니다. 이 디도는 사도바울의 옥중생활의 뒷바라지를 책임 있게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던 디도는 마침내 후에 큰 병을 얻어 사경을 헤매게 되어 다시 빌립보로 돌려보내져 회복하게 하였습니다. 디도는 그토록 충직한 전도자였습니다. 후에 바울은 그를 부를 때 5가지 칭호를 부여하였습니다. “내 형제, 동역자, 전우, 너희의 사자, 나의 쓸 것을 공급해 준 일꾼”으로 부른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신앙인이 있다면 참 행복한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보기만 해도 좋습니다. 길을 잃고 방황할 때 그들 모습만 보아도 잃어버린 궤도를 다시 찾게 됩니다. 디도나 디모데는 아주 좋은 중보자였고 섬김자였고 헌신자였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인이고 마음이 따뜻한 섬김자 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좋은 리더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좋은 믿음의 선배들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으로 20년 30년 신앙생활한 분들은 이런 제자로 성장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신자들과 처음 온 사람들, 주변에 믿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줄 수 있습니다. 쑥이 길가에서 자라면 구부러진 채 자랍니다. 그런데 쑥이 삼밭에서 자라면 삼처럼 곧게 자랍니다. 주변 영향 때문입니다. 내 주변에 곧게 살아가는 사람들, 신앙인들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주변이 영향을 받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고 권면합니다.
흔들리는 사람들
자신 있게 외치던 사도바울은 18절에서 갑자기 탄식을 합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고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이 말은 신자들 중에는 실망을 주는 신자들도 있다는 말입니다. 신자 중에는 디모데나 에바브로디도 같은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중심을 잃고 몹시 흔들리는 사람도 있고 그중에는 율법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대적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18절을 보면 “내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지금은 복음시대이고 은혜시대이고 예수 부활이후 모두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때인데 신자들 가운데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이 아직도 율법의 규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며 당시 대적자들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주장은 십자가의 공로를 무시하는 것이고 예수의 구속의 은혜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아주 구태의연한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내 믿음도 흔들리지만 네 믿음도 흔들리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고 탄식한 것입니다. 또 그들은 육신적인 삶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고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19절에서 그들의 삶을 지적하기를 “그들의 신은 배요...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지적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데 그들은 여전히 배만 생각하고 땅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좋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 좋은 믿음이 아닙니다. 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일본 홋카이도 대학의 사카가미 교수가 개미사회를 연구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개미는 부지런하게 일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연구결과 부지런히 일하는 개미는 전체의 20%뿐이었고 나머지는 빈둥거린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한 20%의 개미를 별도로 모아놓고 그 개미들이 천국을 만들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20%의 개미들 속에 또 20%만 부지런히 일하고 나머지 80%의 개미들은 놀고먹더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이 다 신앙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의 주일 출석률도 50% 미만입니다. 천주교는 1/4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예수 안에서 확고하고 분명하고 뜨겁고 열정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울같이,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같이 그렇게 뜨겁고 분명하다면 참 좋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목표도 불분명하고 여전히 배에 관심이 있고 땅의 것에 집착하는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신앙에 회의가 오고 침체기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몹시 흔들리는 것이고 마침내 타락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너의 이야기가 아니고 나의 이야기입니다. 여기 흔들리는 사람은 네가 아니고 나를 가리킵니다. 여러분의 신앙에는 문제가 없습니까?
신앙의 회의
신앙생활에서 무서운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회의가 찾아오는 일입니다. 결혼하면 신혼기가 있습니다. 그 때는 신나는 때입니다. 재미가 있는 때입니다. 같이 있으면 좋은 때입니다. 그런데 그런 때가 계속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의 기간이 지나면 권태기가 찾아옵니다. 이 권태기를 잘 극복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세계에도 권태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신앙의 회의기”라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에도 힘든 회의기가 찾아옵니다. “회의”라는 말은 영어로 “다웃”(doubt)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라틴어의 “두비타르”(dubitare)에서 온 말인데 이 말은 “둘”이라는 뜻입니다. 즉 “한마음이 두마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불신, 갈등, 의심, 회의는 한마음이 두마음으로 나뉘는 현상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졌다는 말은 한마음이라는 뜻이고 그 한마음이 그대로 있어야 하는데 두마음으로 나누이기 때문에 갈등이 오고 회의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신앙의 회의는 두 가지 조건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하나는 대부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실망할 때 찾아오게 됩니다. 주변사람들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고 실망하게 되고 믿음이 흔들리게 되고 신앙에 회의를 느끼고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먼저 믿은 사람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초점이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지 않고 사람에게 맞추어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믿음의 주체이신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어야 그런 시험이나 회의기를 피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생활에 변화가 없을 때 회의기가 찾아옵니다. 신앙생활이 구태의연하고 나태하고 노력을 하지 않을 때 침체나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오스 가니스라는 분이 “회의하는 용기”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그는 회의의 요인 몇 가지를 제시하였습니다. 첫째는 초점 잃은 믿음이나 목적을 상실한 믿음을 꼽았습니다. 그러니까 흔들리는 것입니다. 초점을 잃어버리면 길을 잃게 됩니다. 둘째는 빈약한 기초입니다. 신앙은 뜨거운데 기초가 부실한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내가 왜 믿어야 하는지 이성적으로 기초가 부족합니다. 초등생 같은 믿음에 어느 날 대학생 수준의 고난을 만나면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기초가 빈약하니까 무너지는 것입니다. 전도를 하면 잘 믿어지지 않는다는 반응이 옵니다. 그때 덮어 놓고 믿으라고 말해줍니다. 기초가 빈약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설명을 못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헌신의 부족입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행함이 부족합니다. 한 번도 헌신을 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감동이 없는 것입니다. 뜨거운 고백이 없는 것입니다. 넷째는 감정입니다. 이성과 믿음이 감정에 짓눌린 상태입니다. 감정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이 오래가지 않는 감정이 이성을 짓누릅니다. 엘리야가 바알선지자들과 싸워서 승리한 후 실패한 경우입니다. 이세벨의 협박에 감정이 휘말려 실패자가 된 것입니다. 다섯째는 조급증입니다. 좋은 일이 발생하면 반색하고 큰 시험이 발생하면 곧 바로 낙심천만입니다. 기도 며칠하고 응답이 없다고 방방 뜁니다. 그러니까 회의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에는 문제가 없습니까? 사도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외칩니다. 얼마나 자신만만한 고백입니까? 부럽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시대에 예수 안에서 살아가려면 이 좋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지식입니까? 체험이고 경험입니까? 믿음은 삶입니다. 실제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절박한 때가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믿음은 가설도 아닙니다. 개념도 아닌 삶 그 자체입니다. 한 선비가 강을 건너기 위해서 배를 탔습니다. 사공은 무식하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으스대면서 물었습니다. “자네 글을 지을 줄 아는가?”, “모릅니다.”, “그러면 사는 맛을 모르겠구먼”, “자네 공자의 도를 아는가?”, “모릅니다.”, “자네는 인간의 도리를 모르겠구먼”, “자네 글을 읽을 줄 아는가?”, “모릅니다.”, “자네는 세상을 무엇 때문에 사는가?” 그때 배가 암초에 부딪쳐 침몰하게 되었습니다. 물이 배에 차오르고 있습니다. 그때 무식한 사공이 선비에게 물었습니다. “선비님 헤엄칠 줄 아십니까?”, “모르네”, “그동안 무엇을 배우셨습니까, 그러면 이제는 죽을 수밖에 없겠군요.” 그리고 자신은 유유히 헤엄쳐 나아갔습니다. 살아가는데 지식도 좋습니다. 품위도 좋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지식도 품위도 필요하지 않을 때가옵니다. 살아가다 보면 반드시 배가 암초에 부딪쳐 가라앉게 되는 때를 만나게 됩니다. 그 때는 살아남는 지혜를 터득하여야 합니다. 그 지혜가 예수에 대한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괜히 좀 안다고 폼 잡지 말고 헤엄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지식이나 품위는 기왕이면 좋은 것입니다. 개념이나 가설은 평상시에는 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다가 삶이 암초에 부딪치게 되면 그런 것들은 아무 힘이 되어주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에 대한 믿음, 그것만이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치는 것이 가장 유익하듯 힘이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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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