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는 길(롬5장6-11)
성경본문|로마서 5: 6~11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
출 처| 박조준목사
이미 봉독한 말씀 가운데서 9∼10절 말씀을 다시 읽으십시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더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지난 시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놀라운가를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표가 무엇이라고 했어요?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테마는 무한한 것입니다.
영원토록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을 주제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더욱 더라는 말씀을 사용하였습니다.
본문 9절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하였고, 본문 10절에는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은 것이니라”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표현을 5장 15∼17절에서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15절에는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하였고, 17절에는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하였습니다.
매우 논리적인 표현입니다.
아마 바울이기 때문에 이런 편지를 쓸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여러 편지가 있지만 사도 바울의 편지외에 이처럼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표현을 한 곳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총명한 논리학자요, 능숙한 변사요, 예리한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바울이 전도하러 갈때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회당에 들어가서 그 재능을 가지고 성경을 조리있게 풀고 증명하고 진술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더욱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이 바로 바울의 그 방식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감정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실로 진리를 붙잡고 사는 사람이며 그것으로부터 분별 있게 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선생으로부터 그 방법을 배워야겠습니다.
여기 사도 바울의 논증 방법은 큰 것을 말하고 자연히 작은 것은 따라오게 말하는 것입니다.
매우 훌륭하고 건전한 논리입니다.
이제 본문 9절부터 생각해 보십시다.
사도 바울은 여기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처럼 상상하면서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해 왔지요.
그리고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커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했소.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끝날까지 버림을 당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단 말이요?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고 아직도 우리는 매우 약하고 타락할 소질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일 저런 일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날 수 있지 않소?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끝까지 정죄받거나 버림받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단 말이요?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에 대한 안전이 보장되거나 확신이 있다면 우리가 어떤 의심이나 불길한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해도 무방하단 말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해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느낀 바이지만 진노하심에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대목에서 이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아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진노는 장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심판의 날이 있을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미 생각한 바 있는 로마서 2장 5절에서 이 점을 언급하였습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였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 이 죄와 악에 대해 나타나고 선포되는 큰 날이 장차 올 것입니다.
이 날은 성경에서 계속 언급되는 엄청난 날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의 날입니다.
장차 올 진노 바로 그것이 여기에서 의미한 진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장차 올 큰 심판의 날에 안 전할 것인가를 알고 확신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하였습니다.
무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사람에게 한 시간 후에 일이 분명치 않지만 이 두 가지 곧 죽는 다는 것, 그리고 심판이 있다는 것은 너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심판은 공의의 심판입니다.
세상 법정에서 하는 심판과 전적으로 다릅니다.
물론 세상 법정에서도 심판의 공정성을 지키는 것이 법정의 이상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게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종 억울하게 죄 없는 사람이 형을 지고 고생하는 일들이 있고, 큰 죄를 지어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 버젓이 허리 펴고 거리를 활보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삼권이 완전히 분립되어 있어서 제대로 행사하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대통령도 잘못하면 내려 앉히는 일이 있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에서는 행정부의 눈치만 보고 그 압력에 눌려서 본의 아닌 일들을 할 수밖에 없는 고민 또한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세상에서는 완전히 공정한 심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대로 두고 말 것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양심이 절대로 허락지를 않습니다.
선은 상을 받아야 하고 악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이 원리가 완전히 이루어질 때가 바로 하나님의 진노의 날, 심판의 날입니다.
그때는 억울한 것이 다 풀릴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장차 올 큰 심판의 날에 안전할 것입니까?
이 점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말인데, 성경에서 사용될 때 는 세 가지 다른 시상(時狀)과 의미(意味)로 쓰여진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가령, 먼저는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다 (We have been saved. )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지만 요한복음 5장 24절 말씀은 이 진리에 대한 분명한 해답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 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이것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중생(重生) 혹은 거듭남이라는 말로 사용합니다.
중생하는 것은 일회적(一回的)입니다.
매번 거듭 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이 말씀도 그 영혼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 보이지 않는 사람, 속사람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아직도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We are still being saved.입니다.
우리는 말하자면 죄의 오염과 강한 세력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관계는 죄책 하나만이 아닙니다.
불행히도 그 이상의 무엇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 본성 자체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담이 범한 죄는 사람의 본성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이 오염되고 사람은 결국 죄의 세력하에 지배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방면에서도 구원받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억눌러 왔던 이 무서운 죄의 세력에서 구원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구원받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성화(聖化;sanctificatio n)입니다.
현재 우리 가운데서 구원의 역사가 매일매일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갓난아이가 났다고 해서 그 아이가 분명히 인간임에는 틀림없지만 완전한 인간으로 활동하려면 성장의 단계가 필요합니다.
여러 가지 닥쳐오는 병마를 물리쳐야 하고 싸워 이겨야 할 뿐더러 좋은 영양을 섭취하고 적당한 운동을 해서 자라나야 합니다.
거룩한 자리로 한 걸음 한 걸음 날마다 날마다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곧 신앙 생활입니다.
날마다 구원받는 생활, 성화되는 생활입니다.
1.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내
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기도합니다내
후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 곳에 서게 합소서
그 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2. 괴롬과 죄가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 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3. 의심의 안개 걷히고 근심의 구름 없는 곳
기쁘고 참된 평화가 거기만 있사옵니다
4.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
다시금 기도하오니 내 주여 인도하소서
5. 내 주를 따라 올라가 저 높은 곳에 우뚝 서
영원한 복락 누리며 즐거운 노래 부르리
우리는 이렇게 날마다 구원받고 있습니다.
빌립보 2장 12절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하였습니다.
천로역정의 기독도의 가는 길이 그랬습니다.
히브리서 3장 12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하였습니다.
속해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하였습니다.
히브리서 4장 1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 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그리고 구원받는 일에 한 가지 다른 의미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미래에 받을 구원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미래의 시상(時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최종적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을 날이 오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얻었고 날마다 죄의 세력과 싸워가며 구원을 얻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육체는 아직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모릅니다.
이제 나중에 생각하게 될 로마서 7장에서 바울 자신의 고민과 갈등을 피력하겠습니다만 누구나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는 종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하면서 탄식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민이요 모순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우리가 완전히 구원을 받게 되면 이 세상 죄의 세력과 모든 위험으로부터 벗어 날 뿐 아니라 우리의 이 몸 자체도 죄로부터 벗어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0절 이하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화(榮化;Glorification)입니다.
우리가 다시 생각하게 되겠지만 로마서 8장 23절에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의 최종적인 국면입니다.
최종적인 국면에서 우리는 모든 방면에서 죄로 부터, 그리고 그의 쇠사슬에서부터 완벽하고 철저하게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완벽한 구원을 받게 될 것을 확신할 수 있단 말입니까?
진노의 날, 심판 날에 우리의 구원을 잃지 않을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 을 얻을 것이니 그는 우리가 이미 그의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이상의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심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로 여긴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선언하신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고 우리의 것으로 계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히고 그리스도의 예복을 입혀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존전에 서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가지고 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에게 의롭다 인정을 받는 것은 단순히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는 칭의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의 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옵니다.
그래서 결국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무엇이 우리에게 의를 제공하였습니까?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특별히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그의 피흘리심과 쏟아부은 그의 생명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하였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말씀하시기를 “선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느니라”고 하신 그대로입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실 수 있는 길이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그 방법을 생각해 내시고 계획하셔서 그것을 수행하도록 주님을 보내셨습니다.
그의 은혜는 믿음을 방편으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그의 피요, 그의 죽으심이요, 그의 의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의 기초는 우리 주님 자신과 우리를 위하신 그의 구속 사역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십니다.
불경건한 자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의롭다는 선언을 받은 것은 우리가 경건치 않은 때입니다.
실상 중생은 의롭다 함을 얻는 순간 동시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었은즉”이 말씀이 바로 그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결정은 예수 믿는 사람 모두를 의롭다 하시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그의 피를 흘리는 것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의를 행하시기로 작정하셨을 뿐 아니라 행하셨습니다.
만일 그가 그것을 행하셨다면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를 위해서 못하실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주장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하도 완벽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았다면,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있으면 그로 말미암아 완벽하게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믿는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말씀 하신대로 사망의 세계에서부터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미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다시 정죄를 받지 아니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그를 정죄하리오”
바울은 로마서 8장 23절과 34절에 그와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데 누가 정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누가 감히 송사할 수 있겠습니까?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칭의의 뜻하는 바를 깨달았을 때 감동되었던 이유가 바로 이 진리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 깨달음이 종교 개혁을 주도하게 했던 것입니다.
더 이상 무슨 행위나 고해성사나 신부에게 참회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구원은 이제 더 이상 불확실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연옥이 있기 때문에 죽은 다음에라도 교회가 필요할 거라고 하는 그런 이론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죽은 다음에 사람들 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는 일은 필요가 없게 되었고, 촛불을 켜들고 우리를 위해서 연옥에 있는 시간을 짧게 해 달라고 성자들에게 기도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왜요? 오직 믿음으로만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이 교리를 인식함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닫고 오늘 본문 11절에 있는 말씀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 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생활”을 해야겠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은 구원 의 확신입니다. 이 확신을 위해서 기도하십시다
|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