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많은 인파로 거리는 북적인다.
옛 기와지붕이 한가로이 맞닿은 곳에 하얀 눈이 덮여 고향 집 어머니가 따뜻한 저녁을 지어놓고 “밥 먹어라.” 다정하게 부르실 것만 같은 한 장의 사진이 부른다.
수원 화성 행궁 신풍루 정문으로 발길을 부지런히 옮겼다.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 휴양, 능원할 때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로 거처하는 곳이다.
화성행궁은 1789년 (정도 13년) 수원 신읍지 건설 후 팔달산 기슭에 건립하였다. 567칸으로 정궁 형태를 이루며 국내에서 가장 큰 행궁이다.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누문 6칸으로 세우고 "진남루"라 하였다. 신풍이란 이름은 ”땅은 새로운 하나의 고향이다”라는 고사에서 유래하였고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중앙 문 앞에 있는 좌익 문 중앙문은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지키는 내삼문 이다.
1795년 봉수당 진찬례 때 정조, 혜경궁 황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리하였다.
봉수당은 화성행궁의 정전 건물이며 혜경궁 회갑연 거행한 곳이다. 화려한 회갑연을 베푼 자리에 앉아 있는 혜경궁의 모습에서 훌륭한 자제인 정조를 낳았다는 경이로운 여인의 모습에서 같은 여인으로서 존경과 약간의 부러움도 느꼈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되었고 1997년에 복원되었다.
유여택은 평상시에 화성 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 행차 때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이었다. 정조로서는 화성 유수를 임명하여 내려보내는 곳의 의미였다.
경룡관은 당 태종의 궁궐 이름을 차용하여 건물에서 휴식을 취하며 조선의 태평성세를 수련하였던 곳으로 장락당은 1795년 을묘원행중 혜경궁 침전이다.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여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다는 효심 지극함을 볼 수 있었다.
복내당은 “복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의 뜻으로 정조 행차 시 머문 곳이다. 낙남헌 을묘원 행사에 각종 행사가 치러지고 회갑연을 기념하여 군사들이 회식하는 곳이었고 특별 과거 시험을 치른 곳이기도 했다. 사사로이는 어머니의 회갑연을 베푼 가운데서도 국사를 그르치지 않는 모습에서 덕양을 겸비한 왕의 모습이 느껴진다.
노래당은 왕위에서 물러나 노후생활을 꿈꾸며 지었다는 건물이고 득중정에서 치러지는 행사 도중 휴식을 취한 곳이기도 하다.
집사청은 궁궐의 액정서(국왕이 쓰는 붓, 먹, 벼루, 열쇠, 비품 )등을 관리하는 곳이다.
북군영 남군영의 기마명이었던 친군위가 좌·우 100명씩 입직 숙의하는 건물이다.
서리청은 문서기록, 수령, 발급을 하며 비장청은 화성 유수부의 비장들이 사용했다.
미로한정은 행궁 후원에 만든 정자.
“장래에 늙어서 한가하게 쉴 정자”라는 뜻으로 노래당과 함께 1804년 세자에게 양위하고 화성으로 가리라던 정조의 뜻이 담긴 이름이다.
1칸 6각정으로 “육면정(六面停)”이라고도 한다.
내포사는 뒷담 안 기슭에 있어서 직접 가보지는 않았다.
외지정소는 을묘년 펼쳐질 각종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세운 임시 기관이었다. 화령전 사적 115호 1801년 정조의 뜻을 받들어 정조의 초상화 모신 영전이다.
보통 영전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위를 모신 사당과 구별되며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살아있을 때와 같이 추모하던 곳이다.
화성에서의 “화”자와 『시경』의 ‘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리라[歸寧父母]’ “령”자를 땄다.
봉수당 뒤뜰의 긴 담장 옆에 각종 봄꽃이 피었다.
앵두꽃 매화꽃 복숭아꽃.
이 꽃들과 아름다운 노후를 보내고 싶어서 노래당과 미로한정을 명령하여 지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짧은 삶을 마쳐야 했던
정조의 안타까움뿐이겠는가.
쉼 없이 피고 지는 봄꽃을 즐기다 보니 하루 해가 짧기만 하다. 정조대왕의 훌륭한 치정에서 비록 다 누리지 못했어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긴 업적에 크게 감동한 답사였다.
첫댓글 총무님 따라 또 답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