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사진관과 8월의 크리스마스( Christmas in August )
여행자를 위한 도시 인문학 <군산, 익산>의 사진 촬영을 위해
군산에 가면서 근대 군산역사박물관 김중규 관장에게 전화를 했고,
둘째 아들 지원과 함께 오랜만에 지난 시절들을 풀어놓을 수가 있었다.
지나간 것들은 세월 속에 아름다움으로 채색되어
가끔씩 눈물샘을 자극하는데,
군산에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있다. 초원 사진관이다.
”한때는 그렇게도 밝았던 광채가
이제 영원히 사라진다 해도,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초원의 빛> 첫 부분이다.
“이봐, 내겐 꽃 시절이 없었어, 꽃 없이 열매 맞는 게 무화과 아닌가.” 김지하 시인의 <무화과>라는 시의 몇 소절을 두고 문학평론가 김현은 아주 아름다운 평론을 남겼는데, 나 역시 꽃 시절이 없이 청춘의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지난 세월이 그리 아름다운 추억으로 마음속 깊이 남아있지를 못하고 그저 아스라하기만 하다.
지인이 좋은 영화라고 추천한 <팔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면서 지난 추억들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처럼 떠올랐던 것은 그런 연유 탓이리라.
군산 구 도심에 있는 초원사진관은 배우 한석규와 심은하가 주연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의 주무대가 되면서 알려진 곳이다. 아버지를 모시고 살면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진사 정원(한석규)과 어느 날 그의 앞에 나타난 주차 단속요원 다림(심은하)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사랑을 그려낸 영화가 <팔월의 크리스마스>다.
1998년 우노필름이 제작한 이 영화는 허진호가 감독을 맡고, 촬영감독의은 유영길이었는데, 그의 유작으로, 상연시간은 97분이다.
불치병에 걸린 삼십대 중반의 정원(한석규)이 서울의 변두리에서 작은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다. 치유될 수 없는 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순응하면서 일상을 살아가던 정원에게 어느 날 우연처럼 필연처럼 한 여자가 나타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에 가지 못하고 주차단속원으로 일하고 있는 다림(심은하)이 매일 같은 시간에 단속차량을 촬영한 필름을 맡기려고 사진관을 찾아온 것이다.
사랑은 느릿느릿 오기도 하고 순식간에 오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사랑이 간다. 자천거를 타고 가는 한석규의 그림자처럼,
아는 듯 모르는 듯 두 사람이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쯤, 정원은 병원으로 실려간다. 그러한 모르는 다림이 문이 굳게 닫힌 사진관에 편지 한 통을 남겨놓았다. 병원에서 잠시 퇴원했던 정원은 숨어서 다림이 주차단속원으로 일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잠시 뒤, 사진관으로 돌아온 정원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영정 사진을 찍은 뒤 이 세상을 하직한다.
‘아저씨, 아저씨, 왜 나만 보면 웃어요?“
”아이, 뭐, 남자가 여자 좋아하는 게 잘못 됐나요? 뭐?“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대사 들이 추억처럼 남아 있는 영화가 <팔월의 크리스마스>다.
요즘에야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들이 많이 있지만, 잔잔하면서도 스프고 아름다운 서정적인 이 영화를 서울시 개봉관에서 44만 명이 관람했다. 이 영화가 제19회 청룡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 등 총 6개 부문을 수상하고, 칸·시카고·토론토·밴쿠버 영화제에 초청받았다.
영화 <팔월의 크리스마스>의 대부분이 촬영된 곳이 군산시 월명동의 초원사진관이다. 이 영화를 제작할 제작진은 세트 촬영을 하지 않기로 하고 전국의 수많은 사진관을 찾아다녔지만 합당한 장소를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잠시 쉬러 들어간 카페 창밖으로 여름날의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진 차고를 발견하고서 주인에게 허락을 받은 뒤, 사진관으로 개조했다.
이 영화가 촬영된 '초원사진관'이란 이름은 주연 배우인 한석규가 지었는데, 한석규가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의 사진관 이름이 “초원사진관”이었다고 한다. 영화 촬영이 끝난 뒤 주인과의 약속대로 철거됐던 초원사진관을 군산시가 다시 복원해서 군산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지난 시절을 회상하게 하고 있다.
“우리가 안지 오래된 곳들은 단지 공간의 세계에 속하는 것만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편의상 공간의 세계에 배치할 따름이다.
그런 곳들은 그 당시의 우리의 삶을 구성하던 잇달린 인상 한가운데 있는
얇은 한 조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형상에 대한 회상이란, 어떤 한 순간에 대한 그리움에 지나지 않는다.
가옥들도, 길도, 큰 거리도, 덧없는 것,
아아! 세월처럼. 슬프게도 덧없는 것이로구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스완네 집 쪽으로’ 2권 마지막 부분에 실린 글과 같이 덧없이 곧 스러져 버리고 마는 추억의 파편들이 고스란히 떠오르는 것 같은 영화가 <팔월의 크리스마스>다.
그 시절을 다시 돌이킬 수 없다 해도,
우리 슬퍼하기보다, 차라리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으리.
인간의 고통에서 솟아나오는
마음에 위안을 주는 생각과
사색을 가져오는 세월에서.
워즈워스의 <초원의 빛> 마지막 구절처럼, 지나간 추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가 팔월의 크리스마스이고, 군산의 초원사진관이라면 과찬일까?
2023년 11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