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경(劉希慶)-途中憶癸娘(도중억계랑)(도중에 계생을 그리며)(그대 그리워 빗소리도 차마 못 듣겠네)
一別佳人隔楚雲(일별가인격초운) 가인과 아득히 이별한 뒤로
客中心緖轉紛紛(객중심서전분분) 나그네의 그리움은 깊어만 가네
靑鳥不來音信斷(청조불래음신단) 심부름꾼 아니 와서 소식 끊기니
碧梧凉雨不堪聞(벽오량우불감문) 벽오동에 빗소리도 차마 못 듣겠네
*위 시는 “한시 감상 情정, 사람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村隱集촌은집)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양기정님은 “낙엽이 지는 쓸쓸한 가을 분위기에 샹송만큼 어울리는 음악도 없을 것이다. 특히 애절한 음색을 지닌 에디뜨 피아프의 샹송은 그녀의 비극적인 삶이 깃들어 있어 듣는 이의 심금을 더욱더 울린다. 그녀는 거리의 가수였던 어머니와 곡예사였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가난 때문에 영양실조에 걸리고 실명 위기에 처할 정도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유명해진 이후 많은 남성들과 사귀었지만,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은 세계 챔피언 권두 선수였던 마르셀 세르당 뿐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모든 사랑을 걸었으며 그들의 사랑은 신문의 머리기사를 장식할 정도였다. 피아프가 뉴욕에서 공연하는 날, 세르당은 프랑스에서 권투 경기를 했다. 경기를 마치고 피아프를 만나러 가던 세르당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피아프는 세르당을 잃은 슬픔을 참고 무대에 올라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노래로 불렀는데, 그 노래가 바로 ‘사랑의 찬가Hymne l’mamour’이다.
조선에도 그들처럼 애절한 사랑을 했던 남녀가 있었으니 바로 계생과 유희경이다. 계생은 매창梅窓이라는 호로 더 잘 알려진, 부안에 살던 기생이다. 유희경은 서울 출신 천민이었으나 시를 잘 짓고 예론에 밝아 사대부들과 교유하는 명사가 되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날 때의 이야기는 자세하지 않다. 남학명이 지은 유희경의 행록에 따르면 유희경은 평소 기생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는데 계생을 만나면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계생도 매창집이라는 시집을 남길만큼 시를 짓는 재주가 뛰어났기에 서로 마음이 잘 맞았던 것이다. 유희경은 계생을 만나 사랑에 빠져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었다.
曾聞南國癸娘名(증문남국계랑명) 일찍이 남쪽 지방 계생의 명성을 들었으니
詩韻歌詞動洛城(시운가사동락성) 시와 노래가 서울까지 유명하였지
今日相看眞面目(금일상간진면목) 오늘에야 그대의 진면목을 보게 되니
却疑神女下三淸(각의신녀하삼청) 마치 선녀가 천상에서 내려온 듯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서울로 돌아온 유희경이 의병을 일으켜 전쟁터로 나가면서 소식이 끊긴 것이다. 앞의 ‘도중에 계생을 그리며’ 시는 전쟁 중에 유희경이 계생의 소식을 듣지 못해 안타깡워하던 심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한편 서울로 떠난 유희경을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계생도 애틋한 마음을 시조로 표현하였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이렇듯 두 사람은 서로를 간절히 그리워하였으나, 계생이 갑작스러운 병으로 요절하는 바람에 다시는 만나지 못하였다.”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유희경[劉希慶, 1545~1636, 본관은 강화(江華). 자는 응길(應吉), 호는 촌은(村隱). 아버지는 종7품인 계공랑(啓功郎) 유업동(劉業仝)이고 어머니는 배씨(裴氏)]-조선시대 『촌은집』을 저술한 시인. 박순(朴淳)으로부터 당시(唐詩)를 배웠으며 어려서부터 효자로 이름이 났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으로 나가 싸운 공으로 선조(宣祖)로부터 포상과 교지를 받았다. 또 중국 사신들의 잦은 왕래로 호조(戶曹)의 비용을 모두 쓰게 되자 그가 계책을 일러주었다고 한다.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하사받았다. 광해군 때에 이이첨(李爾瞻)이 모후(母后)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내쫓아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키려고 그에게 상소(上疏)를 올리라 협박했으나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인조(仁祖)가 왕위에 오른 뒤에 그 절의를 높이 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를 올려주었고, 80세 때 가의대부(嘉義大夫)를 제수 받았다. 그는 당시 같은 천인신분으로 시에 능하였던 백대붕(白大鵬)과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했다. 이 모임에는 박계강(朴繼姜) · 정치(鄭致) · 최기남(崔奇男) 등 중인 신분을 가진 시인들이 참여했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었던 남언경(南彦經)에게 『문공가례(文公家禮)』를 배워 장례의식에 특히 밝았으므로 나라의 큰 장례나 사대부가의 장례를 예법에 맞게 치르도록 지도하는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시는 한가롭고 담담하여 당시(唐詩)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다. 허균(許筠)의 『성수시화(惺叟詩話)』를 살펴보면, 유희경을 천인으로서 한시에 능통한 사람으로 꼽았다. 천민 출신이나 한시를 잘 지어 당시의 사대부들과 교유했으며 자기 집 뒤의 시냇가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어 ‘침류대(枕流臺)’라고 이름 짓고 그곳에서 유명 문인들과 시로써 화답했다. 그때에 서로 주고받은 시를 모아 『침류대시첩(枕流臺詩帖)』을 만들었다. 문집으로 『촌은집(村隱集)』3권이 전하며 그 밖의 저서로 『상례초(喪禮抄)』가 있다. 아들 유일민(劉逸民)의 원종(原從 : 작은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던 공신)으로 인하여 자헌대부한성판윤(資憲大夫漢城判尹)에 추증됐다.
*靑鳥(청조) : 1.고지새, 2.파랑새, 3.반가운 사자(使者) 또는 편지(便紙). 푸른 새가 온 것을 보고 동방삭이 서왕모의 사자라고 한 한무(漢武)의 고사에서 유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