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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 11,1-4.8ㅁ-9>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여 나의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2 그러나 내가 부를수록 그들은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들은 바알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고 우상들에게 향을 피워 올렸다.
3 내가 에프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내 팔로 안아 주었지만 그들은 내가 자기들의 병을 고쳐 준 줄을 알지 못하였다.
4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
8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9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
✠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0,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1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12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14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서로가 무엇인가를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곧 타자와의 교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는 주기보다는 받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면, 받고 싶은 것은 잘 받아들이고 받기 싫은 것은 받고자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욕이나 모욕, 꾸중이나 비판은 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는 것에 있어서도 사실은 자신을 내어주는 것, 시간과 노고, 마음을 내어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 ‘주고받음’이라는 놀이 속에는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
자기 자신’이 한 가운데 떡 버티어 서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것은 남이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가 먼저 꼭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가 만들거나 획득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선사 받아서 가지게 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존재의 원천적이고 본질적인 깨달음에 해당합니다.
곧 우리가 “거저 주어라.”라는 사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거저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먼저' 하늘나라를 '거저 받아들여야'만이 내 안에 하늘나라를 지니게 되고, 다름 아닌 바로 받은 그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증거하는 일이 비로소 가능해지게 됩니다.
이처럼 하늘나라는 바로 이렇게 하느님의 자애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는 주시는 분이 있기에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먼저', 주신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먼저’, 그분의 사랑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으로 우리도 ‘거저 줄’ 수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저 받은 것, 바로 그것을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결코 ‘받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곧 우리가 만든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이다.
참으로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기에 앞서, 먼저 ‘거저 받은 것’, 그것을 제대로 아는 일입니다.
또한 그것이 ‘거저 받은 것’임을 명확히 아는 일입니다.
이토록 신앙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받아들여지게 되면, 그 어떠한 방식으로든 선포되고 증거됩니다.
그러나 만약 실제로 받아들이지도 않은 것을 선포하고 증거한다면, 그것은 그릇되게 선포되거나 거짓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우리는 이미 이 선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곧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는 예수님의 생명이 흐르고 숨 쉬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흐르는 이 생명을 건너 주어야 하는 일을 사명으로 받았습니다.
거저 받은 것이니 거저 주되, 그분께서 목숨까지 거저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목숨까지도 거저 내어주어야 하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 가져가지 말라.”
(마태 10 9)
주님!
길을 떠나면서 아무 것도 가지고 갈 필요가 없음은
가져야 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더 이상은 제 말로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제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제 무능과 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는>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오늘 호세아서의 주님께서는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겠다고 하시는데, 그 이유가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렇겠지요?
우리가 사람이니까 분노하지 하느님이라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아예 분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이라면 분노하지도 않고 분노대로 행동하지도 않을까요?
그야 분노라는 것이 자기 중심에서 나오는 것인데 하느님은 당신 중심이 아닐 뿐더러 사랑이시기 때문이지요.
자기 중심인 사람은 일이 또는 사람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작은 것일 경우 짜증이 나고 큰 것일 경우 화가 나는 데 비해,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거나 하지 않을 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연민이 생기고 안타까워하지요.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자기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해로 말미암아 괴로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 태우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이렇게도 이야기합니다.
"누가 어떻게 죄를 짓든 하느님의 종이 이 때문에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흥분하거나 분개한다면 스스로 과오를 쌓는 것입니다.
어떤 일로 말미암아 분개하거나 흥분하지 않는 하느님의 종이 진정 소유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요즘 저는 전에 비해 저에 대해서나 남에 대해서나 큰 분노가 없습니다.
특히 요즘 정치인들에 대해서 큰 분노가 없는데 그것은 그들이 분노할 가치도 없고 한심하고 불쌍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요즘 정치인들에 대해 덜 분노한다고 했는데 요즘 정치인들이 전의 정치인보다 낫기 때문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전이나 지금이나 정치인이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권력을 위해 날뛰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 제가 전에 비해 덜 분노하는 것은 요즘 정치인이 전의 정치인보다 낫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대하는 제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수없이 실망하고도 하느님께가 아니라 그들에게 또 기대를 걸고 그래서 분노한다면 그것은 정치인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인이 본래 그런 거라는 것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고 또 기대를 거는 내가 잘못이고 문제인 거지요.
그런데 제가 지금 그들의 하는 짓을 한심해하고 그들의 미래를 내다보고 불쌍해하는데. 그러나 제가 사랑이 더 많은 사람이고 하느님의 사랑, 아니 어미의 사랑만 지녀도 한심해하고 불쌍해하는 것을 넘어 안타까워하고 가슴이 까맣게 탈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처럼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던 하느님은 이제 아들과 딸처럼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며 당신에게서 멀어져간 이스라엘에 대한 연민을 드러내십니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사실 내 마음이 분노로 가득 찬 것보다 연민이 가득한 것이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좋지 않을까요?
그래서 이제는 분노가 아니라 연민만 내게 가득하도록 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 10,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의 삶의 기본자세를 철저한 무소유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말단을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들은 돈에 구애받지 않고 일합니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불태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외의 다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의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사도직 행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곳에서 당당하게 자존심을 지키며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철저한 무소유를 통해 가진 자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교회 안에서 돈에 사로잡히고 출세를 노리는 사람은 안 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봉사하는 대신에 출세하려고 안달하고, 돈에 얽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제들과 주교들이 그러고 있는지 보았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슬픕니다.
아닙니까?
복음의 근본, 예수님의 부르심의 근본은 이것입니다.
봉사하는 것, 자기 자신을 잊고 봉사에 몸 바치는 것, 멈추지 않고 언제나 저 너머로 가는 것입니다.
지위의 편의성.
저는 하나의 지위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광장을 지나다니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바리사이들처럼, 정직하지 않게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봉사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를 장사꾼이 되게 합니다."
사실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용해야 할 곳에 제대로 써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물질 때문에 하느님을 소홀히 합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다 뭐냐’ 고 합니다.
그리고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내셨으며 물질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쌓아놓으면 쌓아놓을수록 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야말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잠시 맡겨 주신 것이니만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사용해야 합니다.
남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보통 돈과 물품만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입니다.
금전적인 도움은 즉각적으로 수혜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받은 돈이 떨어지면 또 다른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을 공감해 주고 베풀 수 있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물질보다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요즘은 재능기부도 많이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자기의 경험과 지식, 삶의 경륜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한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주십시오.”
(성 마더데레사)
그렇지만 기왕이면 물고기를 잡아 주지 말고, 물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결코 물질 때문에 하느님께 소홀히 하는 일은 없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것을 거저 받고서는 선심 쓰듯이 주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닌지요?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가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는 이유>
선교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행복입니다.
행복을 주려면 가진 것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앓는 이를 고쳐주고 죽은 이를 일으켜주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마귀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이 능력을 주시며 파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
저도 새로이 본당에 가서 많은 이에게 주님을 전하고 싶습니다.
큰 기적이 한 번만 일어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내가 모든 것을 거저 받는 처지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거저 받는 처지라면 나는 나의 힘에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가진 돈에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는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말고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개는 훌륭하다’에서 ‘폭군 형과 껌딱지 동생’, 망고와 링고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특히 망고는 지나치게 일찍 입양해서 소유욕이 강합니다.
집이 자기 것이라 여기고 문으로 누가 들어오려고 하면 난리를 칩니다.
이것을 말리려고 링고가 달려듭니다.
그래서 둘의 싸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망고에게 주인이 칭찬해 주어야 할까요?
하지만 보호자는 안쓰럽다고 간식과 말로 타이르려 합니다.
그러나 강 훈련사는 이 집이 망고의 것이 아님을 인식시킵니다.
그리고 결국 작은 강아지 집에 들여보냅니다.
자기 위치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 보상을 주면 안 됩니다.
보상은 손님이 왔을 때도 자기 위치에 머물 수 있었을 때 줍니다.
그전에는 결핍을 줍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가 우리 위치를 잘 모르고 내 힘으로 무언가 해보려 할 때는 당신 은총의 힘을 거두십니다.
그러나 나의 무력함을 고백하고 주님께 온전히 위탁할 때 그분은 성령의 힘으로 도우실 것입니다.
이 방법이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것입니다.
재물은 결국 내가 의지하는 힘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성전에서 앉은뱅이를 고칠 때는 은도 금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기적이 일어나는 힘이었습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사도 3,6)
당시 교회가 유럽에게 큰 권위를 행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바티칸으로 들어오는 돈의 행렬을 보며 교황은 옆에 있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자, 보게. 저 긴 돈 수레 행렬을.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라고 말할 때는 지났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렇게 대답합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이제 ‘일어나 걸으시오’하고 말하던 시대도 끝났습니다.”
‘개는 훌륭하다’에서 외로운 엄마가 리트리버에게 수많은 간식을 시도 때도 없이 주어서 개가 주인을 거의 끌고 다니다시피 하게 된 상황이 나왔습니다.
강 훈련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할리가 잘할 때 간식을 보상으로 주세요. 예쁜 것은 잘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가 잘할 때 주님께서 성령의 힘을 주실 것입니다.
착하디착한 리트리버도 간식을 아무 때나 주면 고집 센 개로 변하듯, 인간도 주님께서 시도 때도 없이 은총을 주시면 인간은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먼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다는 의미로 ‘십일조’를 봉헌합시다.
에덴동산에 머무는 법은 선악과를 바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은총으로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기적은 힘입니다.
돈도 힘입니다.
내가 힘을 빼지 않으면 무법자가 되기 때문에 주님은 기적의 힘을 주실 수 없습니다.
얌전하게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길 수 있는 가난한 목자가 될 때 주님은 기적의 힘을 상으로 주실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를 그저 그런 존재가 아니라 죽고 못사는 연인처럼 대하십니다>
호세아 예언서 내에 표현되고 있는 하느님의 당신 백성을 향한 말투는 마치 죽도록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 주고받는 것 같은 스타일이라 정말 놀랍습니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호세아 예언서 11장 8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 당신만 바라봐 주었으면 좋겠는데,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니 그분의 눈에서는 분노와 실망감으로 불길이 이글거리는 그런 분위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여, 나의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그러나 내가 부를수록, 그들은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들은 바알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고, 우상들에게 향을 피워 올렸다.”
(호세아 예언서 11장 1~2절)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를 그저 그런 존재, 당신과는 별 상관없는 존재, 보잘 것 없는 하나의 생명체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죽고 못사는 연인처럼 대하는 모습에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때로 그릇된 길을 걷고 있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질타가 무시무시할 정도로 공포스런 내용이라 할지라도,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두려워하는 대신 빨리 하느님 경고 말씀의 진의와 핵심을 깨달아야겠습니다.
망설이지 말고 그분께로 돌아서야겠습니다.
호세아는 기원전 8세기 후반에 북왕국, 곧 이스라엘에서 활동하던 예언자였습니다.
호세아 예언자에게 주어진 가장 큰 소명은 이스라엘 왕조의 멸망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조의 멸망에 대한 호세아의 예언은 특이합니다.
그는 주님과 불충실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관계를 자신의 결혼생활을 통해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느끼시는 이스라엘을 향한 감정을 자신이 아내를 향해 느낀 감정을 통해 표출합니다.
호세아 예언서의 주된 강조점은 남편을 떠나 외간 남자 품을 전전하는 아내 이스라엘을 남편이신 주님께서 어떤 모습, 어떤 방식으로 구원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토록 사랑해줬고, 그토록 용서해줬으며, 그토록 기회를 줬고, 그토록 기다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를 떠나 외간 남자들의 품에 안긴 고메르의 모습에서, 주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모습, 주님을 떠나가는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거듭되는 우리들의 배신과 불효, 냉담함과 무응답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십니다.
배은망덕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놀라운 사랑, 바보같은 사랑이 놀랍고도 고맙습니다.
끝도 없는 반역과 불충실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우리의 회개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돌아서는 자들에게는 너무 좋아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정도의 넘치는 선물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호세아 예언서 14장 6~7절)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말은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근처 어딘가에 가까이 와 있다는 뜻도 아니고, 곧 시작된다는 뜻도 아니고,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었을 때,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카 17,21)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선포하는 것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루카 24,47).
병자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살리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등의 기적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선포를 확증해 주는 ‘표징’이 됩니다(마르 16,20).
(병자들 입장에서는 하느님 나라를 미리 체험하는 일이 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은총은 무상의 선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선교활동은 자기가 이미 거저 받은 그 선물을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는 활동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어떤 대가나 보상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바라시는 것은 당신이 주시는 구원을 사람들이 잘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빈손’으로 가라는 지시는 재물에 대해서 ‘빈 마음’으로 가라는 지시입니다.
그 ‘빈손’과 ‘빈 마음’도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표징이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세속의 재물(물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람이 처음부터 ‘빈손’과 ‘빈 마음’으로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가라는 예수님의 지시에 토를 달지 말고 그냥 실천할 수는 없는가?
여러 가지 그럴듯한 말로 해석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지시를 실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어설픈 합리화가 될 수도 있고, 구차한 변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활동비 없이 어떻게 복음 선포 활동을 할 수 있는가?”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드시 돈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일은 ‘사람의 일’이지 ‘하느님의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체험에서 온 확신입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당연히 먹이신다.” 라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빈손’과 ‘빈 마음’으로 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세속의 재물에만 의지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안 받겠다고 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1티모 6,8) 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대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어디서 오는가?” 라고 물을 수 있는데, 정답은 ‘주님에게서.’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직접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내려오나?” 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로 하늘에서 직접 내려 보내실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천사를 시켜서 보내주실 수도 있고, 마음 착한 사람을 통해서 보내주실 수도 있습니다.
11절의 ‘마땅한 사람’이라는 말은 바로 그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의 일을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라는 말씀은 “누군가가 너희를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한다면”이라는 뜻입니다.
(숙식을 제공해 줄 사람을 찾아다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옮겨 다니지 마라. 주는 대로 먹어라.”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은 예수님의 평화를 선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평화를 받아 누리려면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평화를 전해 주는 사람 자신이 그 평화를 이미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없는 평화를 남에게 전해 줄 수는 없습니다.
재물에 대해서 ‘빈손’과 ‘빈 마음’이 되어서 가라는 지시는 평화를 전해 주는 일에도 연결됩니다.
세속의 재물에 대해서 ‘빈손’과 ‘빈 마음’이 되지 않으면 예수님의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평화를 누리기는커녕 마음속에 ‘돈 걱정’만 가득 차게 됩니다.
복음 선포 활동을 하다 보면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성공했다고 교만해지면 안 되고 실패했다고 좌절해도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사람들에게 전달해 줄 뿐이고, 응답할지 안 할지는 전해들은 그 사람이 선택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책임은 그 사람 자신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언급하신 것은 복음을 모르고 살았던 사람의 죄보다 복음을 전해 듣고서도 거부한
사람의 죄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의 학교 - 주님의 평생 학인學人인 우리들>
예전 학교에 꽤 오래 교사로 근무한 탓인지 어디를 가든 정문에 '(초등, 중, 고등)학교'란 문패만 봐도 반갑습니다.
우리 수도원 정문에는 ‘성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이란 문패가 있습니다.
다른 명칭의 문패를 붙이라면 ‘사랑의 학교’란 문패를 붙이고 싶습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말도 있듯이 사랑도 평생 사랑의 학교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공부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학교’ 참 좋은 명칭입니다.
믿는 이들 누구나 평생 사랑의 학교에 재학중인 학생입니다.
제 즐겨 쓰는 용어가 주님의 전사에 이어 주님의 학인입니다.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이듯이 영원한 학생의 주님의 학인입니다.
매일 강론도 학생이 공부하는 마음으로, 숙제하는 마음으로 씁니다.
죽어야 제대인 평생 주님의 전사이듯 죽어야 졸업인 사랑의 학교에 재학중인 평생 주님의 학인입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뭐든지 알고보면 초보자라는 말은 이미 토마스 머튼이 사용한 말마디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죽는 그날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노력을 다해 사랑을 공부하고 훈련하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아마 제 거의 대부분의 강론도 사랑이 주제일 것입니다.
강론대로만 살았다면 진즉 성인이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오래 전 써놨던 사랑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영원한 사랑없다
영원히지지 않는 꽃이 어디 있는가
결국 한때의 사랑이다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나
다 변한다
변하는 게 생명이요 자연이다
슬퍼할 것도 실망할 것도 없다
그러나 어찌 꽃사랑만 사랑인가
뿌리내림의 숨겨진 사랑도 있고
푸른잎들 열정의 사랑도 있고
익은 열매 성숙한 사랑도 있다
살아 있음 자체가 사랑이다
요구하지도 피하지도 말고
가만히 들여다 보라
환하게 타오르는 사랑 보리라
사랑에서 나와 사랑 안에서 살다가
하느님 사랑 안으로 사라져 가는 인생이다
영원한 사랑이다.”
- 2001.4.28.
무려 21년 전 시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사랑을 갈망하는 마음은 그대로입니다.
사람 사랑에는 식품처럼 유효기간이 있다고 하지만, 하느님 사랑은, 참 사랑에는 유효기간이 없어 무한입니다.
하느님을 닮아갈수록 유효기간 없는 평생 사랑의 학인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예전 토마스 머튼에 관한 피정시 주제가 생각납니다.
'Becoming Love(사랑의 되기)'
존재론적 변화중에 있는 우리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 사랑을 닮아가며 성화聖化되고 신화神化되는 우리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삶의 여정을 하닮의 여정, 예닮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에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배웁니다.
그 하느님 ‘사랑의 대가大家’가 바로 제1독서의 호세아 예언자이며 복음의 우리 예수님입니다.
오늘 호세아 예언자 참 매력적인 호감이 가는 하느님 마음에 정통한 사랑의 예언자입니다.
참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두 성서의 소주제가 재미있습니다.
'배신당한 하느님의 사랑'에 또 하나는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못 버리신다.'
부모의 자녀 사랑과 흡사합니다.
자식이기는 부모없듯이 당신 자녀들 이기는 하느님은 없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떠나도 부모는 자식을 못 떠나듯 하느님도 그러합니다.
배신당한 하느님의 사랑이지만 결코 배신한 당신 자녀들을 떠나지 못해 애착愛着하는 하느님의 구구절절 심금을 울리는 하느님 사랑의 고백입니다.
전체 중 그 일부만 인용합니다.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하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하느님답게 사랑하려고 온갖 힘을 다하는 하느님 마음을 알아챈 호세아입니다.
이런 호세아가 하느님 청춘기의 사랑을 반영한다면, 예수님은 참으로 성숙한 하느님의 사랑을 반영합니다.
호세아가 사랑의 학교에 재학중인 청춘기의 고등학생 같다면, 예수님은 이미 사랑의 학교를 졸업한 성인의 경지에 이른 완숙完熟한 수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하느님 사랑의 사도로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최소한의 소유로, 소유에 소유되지 않는 본질적 ‘존재의 삶’ 중에, 민폐를 최소화하며 순전히 주님 사랑의 도구로, 평화의 도구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받아들이지도 않을 때는 집착함이 없이 미련없이 훌훌 떠나라 말씀하십니다.
역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결과는 당신께 맡기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참으로 추상적이거나 애매모호한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의 사랑입니다.
만병의 근원이 사랑 결핍이요 만병 통치약이 사랑입니다.
모두가 사랑이 필요한 결핍 존재의 병자들이요 죄인들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깊이 잘 들여다 보면 참으로 가련한 연민의 대상인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중 배워야 할 사랑이, 특히 경청의 사랑, 인내의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도 이런 지혜와 사랑을 배웁니다
대가의 반열에 있는 소설가 황석영의 시인 김지하에 관한 내용 중 일부만 인용합니다.
“김지하는 투옥되어 있던 나에게 면회도 왔고, 내가 세상에 나왔을 때는 일산에 살고 있었다.
그의 담론은 어느 부분 번쩍였지만 늘 비약의 연속이었다.
그의 말과 현실은 늘 어긋나고는 했다.
그의 외로움은 깊어만 갔다.
그의 비약적인 담론을 견딜수가 없다고 누군가 불평하면 시인 최민은 간단하게 타일렀다.
”그냥 진지하게 들어주면 되잖아.“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일체의 판단이나 비판의 반응을 유보한채, 잠자코 들어주면 김지하의 격앙된 정서는 가라앉았다.”
때로 무조건 ‘그냥 진지하게 들어주는’ 지극한 인내의 경청의 사랑이 참으로 대단한 실천적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공해로 오염 가득한, 광기狂氣 가득한 혼탁한 세상에서 건강하고 온전한 무공해無公害의 삶을 살기는 하늘에 별따기일 것입니다.
사실 잘 들여다 보면 영적으로도 넷 중 하나에 속할 것입니다.
‘1. 앓거나, 2. 죽어있거나, 3. 영적 나병환자거나, 4. 마귀들에 사로잡혀 있거나’ 하나일 것입니다.
소비주의, 쾌락주의, 물질만능주의 사조에 온갖 거짓된 이념들로 중독된 사회 역시 일종의 마귀들린 세상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에게 하늘 나라를 선포하며 하느님 사랑을 전하는 복음 선포입니다.
얼마 전 심한 가뭄으로 누렇게 죽어가던 정원 풀밭이 흠뻑 내린 하늘 은총의 비로 초록빛 사랑으로 빛납니다.
바로 하느님 사랑으로 치유되고 구원된 건강한 영혼을 상징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하느님 사랑의 은총이 우리의 영육을 온전히 회복시켜 줍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평화를 주러 오신 주님을 만납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 나는 그를 사랑하여"
(호세 11,1)
제1독서는 주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경로와 과정을 거쳐왔는지 매우 인간적인 표현으로 생생히 전달합니다.
주님은 마치 부모가 제 속으로 낳은 아기에게 하듯 이스라엘에 온 정성과 사랑을 쏟으셨지요.
"그러나 내가 부를수록 그들은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호세 11,2)
슬프게도 이것이 그 지고지순한 주님 사랑의 결과입니다.
이스라엘은 쏟아지는 주님 사랑을 누리면서도 다른 사랑에 탐닉하지요.
그들을 매료시킨 바알들과 우상들은 당장의 풍요와 쾌락, 권력을 약속하며 이스라엘 안에 자리를 잡아갑니다.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
(호세 11,9)
성경은 배반한 이스라엘을 향한 주님 분노의 자취들을 감추지 않고 기록했습니다.
주님은 당신 백성을 달래기도 하시고 호소도 하시다가 분노하여 이웃 나라에 넘기기도 하셨지요.
그런데 지금 주님은 이스라엘이 여전히 당신을 소외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노로 다가가지 않으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주님을 지배하는 연민의 사랑이 분노 대신 다른 길을 찾은 까닭이지요.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마태 10,8)
더 이상 분노를 안고 이스라엘에게 다가가지 않겠다고 하신 하느님께서 이제 당신 아드님을 통해 백성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의 완전한 구현이시지요.
예수님은 치유, 정화, 구마, 되살림, 용서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다가가 사랑과 자비를 쏟아 주십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마태 10,12)
예수님은 보다 많은 이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제자단을 구성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십니다.
열둘로 구성된 최초의 제자단은 그들로 끝나지 않고 대를 이어 전승되고 확장되어 온 세상에 이르기까지, 세상 끝 날까지 이를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도 당신이 하시던 일을 할 수 있도록 권한과 능럭을 주시는 동시에 평화의 전파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누구를 만나든, 어느 집에 들어가든, 평화의 인사를 하는 이야말로 주님의 제자입니다.
분노를 거두신 하느님께서 죄를 묻지 않고 용서를 선언하시는 성자 예수님을 통해 백성에게 다가오셨고, 이제는 제자들을 통해 평화로 다가오시는 겁니다.
사실 주님께 배반하던 이스라엘과 별반 다를 것 없이 불충한 우리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안 변하고 못 변하는 죄스런 실존을 인내와 용서로 받아안으신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까지 도달한 평화의 축복이 되십니다.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태 10,13).
그런데 그 평화는 마땅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다고 하시네요.
빌어주는 평화가 진정한 축복이 되려면 받는 이도 합당하게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겁니다.
평화는 일방적으로 강요되거나 주입될 수 없는 덕이니까요.
과연 어떤 사람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한 존재일지 오늘 말씀 안에서 찾아봅니다.
"그들은 ... 알지 못하였다."
(호세 11,3).
자신이 주님의 사랑받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그 사랑에 응답하는 사람은 평화를 누리기에 합당합니다.
제1독서의 이스라엘이 놓친 부분이지요.
자기에게 쏟아지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 은총과 돌봄을 알고 감사하는 이는 자기 삶을 계획하고 이끄시는 주님의 주도권과 섭리에 자신을 맡기기에 평화롭습니다.
아니, 그 자신이 이미 평화의 사람이고 평화일지도 모르지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의 소중한 이웃들이 빌어 주는 평화가 이미 우리 집 문간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평화는 예수님을 통해, 제자들을 통해, 제자의 제자를 통해 우리에게까지 오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렇게 매일 말씀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며 의탁의 삶을 살아가는 벗님은 그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한 사람이지요.
그 평화를 한껏 누리는 하루 되시길 축원합니다.
평화를 빕니다. 평화를 빕니다. 평화를...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궁하면 통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교님을 공항에 모셔다 드렸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놓고 짐을 부치러 갔습니다.
주교님은 2일 전에 코비드 검사를 받았습니다.
짐을 부치는 직원이 신속항원 검사는 24시간 전에 받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순간 당황했습니다.
주교님을 모시고 코비드 검사 받는 곳으로 갔습니다.
일하는 직원이 ‘QR’에 정보를 입력하라고 하였습니다.
순간 당황했습니다.
주교님께서도 그런 것은 해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는 스마트폰 카메라를 큐알코드에 놓고 입력정보를 다운 받았습니다.
인적사항을 다 입력하고, 계산을 하니 코비드 검사 서류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서류를 가지고 검사를 받고, 20분 후에 결과는 음성으로 나왔습니다.
드디어 주교님은 짐을 부칠 수 있었고, 무사히 출국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주교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안 해서 그렇지 하니까 저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주변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볼리비아로 의료 선교를 다녀오신 분들을 보았습니다.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을 치료해 주고, 약을 주었습니다.
헌혈증을 가져오면 국밥을 무료로 주고 헌혈증을 모아서 아픈 아이들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형제님도 보았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무료로 법률상담을 해 주는 분도 보았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는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라는 지면이 있습니다.
매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전해집니다.
저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사연을 접한 많은 분들이 신문사로 성금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충분히 할 수 있지만 기다려 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뜻을 어겼습니다.
우상을 섬겼습니다.
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
예수님께서도 용서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야 했던 여인을 용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하느님나라에서는 우리 안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도 좋아하지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돌아오면 더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자비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에게 형제의 잘못이 있다면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노에는 더디시고, 자비는 넘치신다고 하셨습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들이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용서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선행이 있다면 아주 작은 것이라도 실천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전에 본당신부로 있을 때 본당의 청년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솔직히 영화를 즐겨 보지 않습니다.
영화만 보면 왜 이렇게 졸린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도 전과 마찬가지로 졸다 나올 것 같아서 청년들만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또 여럿이 함께 보면 절대로 졸 수 없다고 하더군요.
결과는 전과 마찬가지로 시작과 동시에 잠들었다가 끝날 때쯤에 깨고 말았습니다.
내용을 전혀 알 수가 없었지요.
극장에 나와서 카페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영화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영화 보는 관점이 모두 다른 것입니다.
재미있었다는 사람, 약간 지루했다는 사람, 영화를 분석하며 의미를 찾는 사람, 배우의 연기에 집중하는 사람….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르게 보는 것을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영화 보는 눈이 모두 다른 것일 뿐, 나와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는 맞고 남을 틀렸다고 단정 지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정작 나만 틀리고 남들이 맞을 수도 있는데 말이지요.
늘 내가 기준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믿지 않고 반대하는 자들과는 타협의 여지가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라고 하십니다.
유다인들은 이교도 지방에서 돌아올 때 발에 묻은 이방의 흙을 털어 버리고 자기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우상 숭배로 더럽혀진 모든 것을 거룩한 땅에 묻히지 않으려는 행위입니다.
이처럼 복음을 거절하며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은 우상 숭배의 이방인과 같이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그들의 악행으로 가혹한 천벌을 받은 상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이 도시의 벌보다도 더 엄중한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왜 주님의 기쁜 소식을 거절했을까요?
자기만 옳고 남은 틀렸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이십니다.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구원할 수 없음에 얼마나 안타까우실까요?
호세아 예언자의 말이 마치 지금 우리를 바라보며 하시는 주님의 슬픔 가득한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호세 11,8)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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