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3일 부활 제4주일 (성소 주일, 생명주일)
제1독서 : 사도 2,14ㄱ.36-41
제2독서 : 1베드로 2,20ㄴ-25
복 음 : 요한 10,1-1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5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성소 완성의 여정-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 부활 제4주일은 성소주일이자 생명주일입니다.
특히 교회의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의 증진을 위해 기도하는 성소주일이지만
널리 보면 주님께 불림 받은 믿는 이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날로
신자로서 내 고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또 오늘은 생명주일입니다.
참으로 각자 본연의 성소에 충실하고 항구할 때 생명 충만한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언제 들어도 신바람 나는 방금 들은 화답송 후렴입니다.
목자의 원조는 하느님이시며 아드님 예수님 또한 아버지를 그대로 닮은 착한 목자이십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성소의 완성입니다.
참으로 우리 역시 삶의 현장에서 점차 참 좋은 ‘목자’이자 ‘양’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문득 어제 써놓은 짧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수도원 주차장 앞, 붉게 타오르는 영산홍을 배경으로 한 성 요셉상을 묵상하며 쓴 시입니다.
-“얼굴은 평온해도/가슴은 타오르는 불이다
영산홍 배경의 성요셉상/늘 그렇다”-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성요셉상에서도 착한 목자 하느님 모습을 감지합니다.
늘 가슴은 타오르는 사랑의 불로 사셨던 착한 목자 예수님이셨습니다.
아주 예전 언젠가 성요셉상 앞에서 단체피정자들이
성모성월 성모의 밤 행사하는 것을 보며 웃은 일도 생각납니다.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둥글고 후덕하며 고운 얼굴의 성 요셉상을
성모 마리아상으로 착각했던 것이며 그냥 모르는 체 했습니다.
부성과 모성을 그대로 지닌 어버이 하느님을 반영하는 성요셉상으로 생각됐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저에 관해 이런 말을 듣고 정말 착한 목자 어버이 하느님을,
어버이 예수님을 닮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주고받은 덕담입니다.
-“저도 훌륭하신 신부님께 지도받고 사랑받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려요!
좋은 엄마 아빠 두 몫까지도 신부님께 느껴요! 신부님 최고요!”-
“사랑하는 자매님도 익명의 성녀 중 한분이지요!
수도원 예수님 위로와 평화의 축복인사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엄마, 아빠 두 몫까지도 느낀다니 이보다 더 큰 찬사도 없습니다.
착한 목자 하느님은, 예수님은 정말 그런 분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이런 착한 목자 어버이 모습을 봅니다.
지난 3월27일 비 내리는 텅 빈 바티칸 광장을 걸어 제단에 올라 기도하시던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 모습은 얼마나 감동적이었던지요.
개신교 목사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지난 3월27일 저녁 비 내리는 성 베드로 광장에 외롭게 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재난시대 종교의 힘과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보여줬다.
그분은 공포를 강요하지도, 누군가를 비난하지도, 주술을 행하지도 않았다.
오직 겸손한 목소리와 인자한 표정으로 고통 받는 인류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가장 어두운 시간에 들려온 교황님의 말씀이 상한 가슴을 싸매어 준다.
“우리 모두는 한배를 탄 연약하고 방향감각 잃은 사람들이며,
동시에 서로에게 중요하고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함께 노를 저어야 하고 서로 위로해야 합니다.”-
(정경일; 새길기독사회문화원장)
바로 이런 착한 목자의 영성이 재난 속에서 종교가 살아남는 길, 사랑받는 길일 것입니다.
이번 성소주일에 교황님께서 사제들에게 보낸 글에서
네 가지 가르침도 비단 사제들뿐 아니라 성소자들인 우리 모두에게 유익하겠기에 소개합니다.
-“1. 감사; 겸손한 마음에서 시작 주님 은총, 자비 깨달아 열린 마음 가져라
2. 용기; 유혹과 절망 닥쳐도 나약함을 인정하고 기도 통해 물리쳐라
3. 고통; 신비로 받아들여 참회와 정화의 시간 갖고 신자들 고통에 관심 가져라
4. 찬미; 온유의 힘으로 완고한 시선에서 벗어나 성모님을 바라보라”-
착한 목자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온힘을 다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십니다.
1936년생, 85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매일미사에 매일 강론이 놀랍습니다.
강론의 단순성과 평범성, 넓이와 깊이는 타인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착한 목자 예수님을 사랑하여 배워 알아 닮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믿는 이들 모두의 평생소원이자 목표이기도 합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아가는 우리 삶의 여정은 그대로 성소 완성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착한 목자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갈수록 불러 주신
내 고유의 색깔, 모습, 크기, 향기를 지닌 아름다운 성소자로 살 수 있겠습니다.
답은 사랑입니다. 사랑뿐이 길이 없습니다.
착한 목자 주님은 우리 모두가 당신 사랑을 닮기를 바라십니다. 구체적으로 다음 셋입니다.
첫째, 회개悔改의 삶입니다.
사랑의 회개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는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마음을 울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세례의 은총을 늘 새로이 하는 것이며
성체성사, 고백성사에 충실함으로 죄를 용서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얼마 전 선종하신 사제의 묘비석의 묘비명을 보는 순간 저절로 터져 나온,
“아, 성소의 완성이구나, 모두 용서 받았고 모두 구원받았다!” 탄성의 깨달음도 잊지 못합니다.
둘째, ‘열린 문門’의 삶입니다.
미움과 혐오, 증오와 배제의 닫힌 문이, 벽이 아니라 활짝 열린 사랑의 문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문으로 사는 것입니다.
날로 넓어지는 사랑의 문입니까 혹은 날로 좁아지는 문에 점점 커가는 ‘이기利己의 벽壁’입니까?
과연 내 사랑의 문은 어느 정도입니까?
예수님은 벽이 없었던 존재 자체가 사면팔방 활짝 열린 사랑의 문이셨습니다.
흡사 요셉 수도원의 사방이 활짝 열린 쉼터 회심정回心亭, 정자 같은 분이셨습니다.
세상 떠난 고故 정요한 수사가 창안한 회심정 이름입니다.
참으로 착한 양이 되어 착한 목자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충실히 항구히 따를 때
우리 역시 점차 넓어지는 사랑의 문이 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착한 목자 예수님은 밖에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얼마 전 수녀원 고백성사 때 체험이 생각납니다.
제가 이미 일찍 수녀원에 도착한 것을 모르고
담당 수녀님은 밖에서 거의 한 시간 저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 함께 계신 주님을 놔두고
헛되이 밖에서 주님을 기다리며 시간과 정력을 허비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순종의 삶입니다.
사랑의 자발적 순종입니다. 온유와 겸손, 섬김의 사랑이 함축된 순종입니다.
바로 착한 목자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이십니다.
평생 예수님을 따랐던 수제자 베드로가 전하는
이런 예수님을 본보기로 삼아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전하는 주님의 종을 판박이로 닮은 예수님이십니다.
참 아름답고 거룩한 착한 목자 예수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시지 않으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당신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우리의 병은 나았습니다.”
우리가 미사 중 특히 청해야 할 은총은 이런 주님을 닮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었지만,
이 거룩한 미사시간 이제 우리 모두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께 돌아왔습니다.
착한 목자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각자 성소 완성의 여정에 충실함으로
아름답고 거룩한 본연의 ‘참나眞我’의 성소자가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사제는 누구입니까?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은 성소 주일이며, 또한 생명 주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번 코로나 사건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에 대하여,
그 교훈적인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각국이 대처하는 모습에서 그 실상이 드러났습니다.
일본의 얄팍한 민족성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미국은 전혀 뜻밖으로 실상이 그대로 들어 났습니다.
미국의 원래의 그 땅은 원래 땅의 주인이었던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이 주신 자연을 찬미하며 아름다운 삶을 이루면서 평화롭게 살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백인들이 함부로 총을 쏘아대면서 갈취하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저는 이미 백칠십 년 전에 그 유명한 시애틀의 인디언 추장의 편지에서
백인들에게 했던 경고를 떠올리게 됩니다.
제가 그 긴 편지 형식의 연설문 전문을 번역한 바 있는데,
오늘은 그 경고에 해당하는 일부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어머니인 대지와 형제인 하늘을
양이나 빵이나 영롱한 구슬과 같은
사고팔고 빼앗을 수 있는 물건으로 대합니다.
때문에 굶주린 이리들처럼
풍요로운 대지를 게걸스레 삼켜버리고
황무지만 남겨놓습니다.
백인들은
마치 생존을 위해 자기의 꼬리를 잘라먹는 뱀과 같습니다.
꼬리는 점점 작아질 것입니다.
우리 삶의 방식은 그대들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그대들의 도시에서는 살지 못합니다.
도시는 마치
대지의 표면에 박힌 수많은 검은 혹처럼 보입니다.
그대들 백인의 도시의 모습이 우리의 눈을 아프게 합니다.
백인들의 도시에는
봄에 피어나는 잎새들이 살랑거리는 소리나
곤충들의 날갯짓 퍼렁거리는 소리를 들을 만큼 조용한 곳이 없습니다.
그대들의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항상 앞서 나가려고 합니다.
소음들이 귀청을 뚫습니다.
산새의 외로운 울음소리나
연못에서 개골거리는
개구리들의 합창을 들을 수 없다면
인간의 삶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인디언 추장은 땅을 팔라는 명목으로 빼앗아 가는 백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대들에게 땅을 판다면
그 땅에 한때 이곳에 살며 행복했었던
용감한 젊은이들과
따뜻한 가슴을 지닌 어머니들과
총명한 여인들과
귀여운 아이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라고.
백인들은, 그리고 이 땅을 살고 있는 우리들도 까맣게 잊고 살아 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소 주일을 맞아 우리의 참 목자는 누구이신 가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바른 목자를 따라가고 있는가?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길에서
우리를 이끌며 따라오라고 부추기는 자가 누구인가를 솔직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착한 목자 주일이며 성소주일인 오늘
우리는 우리의 성소, 하느님이 우리를 먼저 인간으로 부르시는 그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성소 하면 우리는 먼저 사제 성소, 수도 성소를 생각합니다.
요즈음 결혼도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이라고 하여 결혼 성소라는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오늘 성소 주일은 수도자와 사제로 부르는 성소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제성소, 수도자로서의 성소, 결혼 성소를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 모두가 인간이 되도록 성소를 받았다는 것을 상기 드리고 싶습니다.
바오로는 갈라디아서에서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기 전에 이미 은총으로 나를 택하셔서 불러주셨습니다.”라고.
이사야서는 말합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사람이다.”
바오로만 은총으로 택하신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만 이름하여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입니까? 사랑입니다.
왜냐고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에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 인간도 사랑인 것입니다.
아니, 사랑이어야 합니다.
현대의 위대한 신학자 칼 라너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느님, 저의 하느님, 저는 오로지 사랑 안에서만 당신을 찾을 수 있나이다.
사랑 안에서
오직 사랑 안에서
저의 영혼의 모든 힘이 당신 사랑을 향해 흘러
다시 제게 돌아오지 않고
온전히 당신 사랑 안에 잠기게 하소서.”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이신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성소인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가?
양떼가 착한 목자의 인도에 따라갈 때만이 양떼 안에, 혹은 양떼의 우리 안에 머물 수 있듯이,
우리도 인간 아담의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끄심을 따라 살 때만이,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이끄심을 알 수 있습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진정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알아듣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분의 목소리는 도둑이며 강도인 자들이 자기를 따라오라고 부르는 소리처럼,
크지도 요란하지도 않기 때문에 자칫 놓치기 쉽습니다.
그분에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라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침잠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고요 가운데서 성령께 마음을 열고 그분의 이끄심을 분별해야 합니다.
양 떼는 그의 음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뒤따라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그 목자의 음성을 알게 되었습니까?
바로 그 목자와 더불어 살기 때문입니다.
함께 잠을 자고, 함께 들로 나가 풀을 뜯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살 때만이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분만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좋은 풀을 먹을 수 있다.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사제는 누구입니까? 바로 그 목자이시며 문이신 주님의 일꾼들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 세상 안에서 계속하도록
당신이 손수 뽑으신 사도들의 사명을 이어 수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부르시어 가르치셨고 당신의 사명을 이어받아
교회를 건설하고 땅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사명을 계속해서 이어갈 사제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소 주일을 맞아 그 사제들을 위해,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의 사명을 계속해 나갈
관대한 마음을 지닌 젊은이들이 많이 나오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그 사제들이 됩니까?
내 아들은 안 되고 다른 가정의 아들이 되어주기를 바라지요.
그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우리 가정에서 사제 성소가 나와야 합니다.
바로 우리 공동체에서 사제 성소가 나와야 합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특별히 우리에게서 사제 성소가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모든 신자들이 이 지향을 지니고 계속해서 기도할 것을,
우리들이 이 지향을 가지고 기도할 것을 촉구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금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이 하는 가장 큰 걱정은 무엇일까요?
‘대학에서 배우는 것이 취업하는 데 도움이 될까?’라고 합니다.
사실 이 걱정은 저 역시 신학교 다니면서 많이 했던 걱정이었습니다.
물론 취업이라는 목적은 아니지만,
‘신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신부 생활에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 결론은 이제야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도움이 된다.”라는 것입니다.
신부가 되면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들이 정리되면서 예전에 공부했던 것들이 더해지면서 지금의 나를 만들어갑니다.
또 당시에 공부했던 습관들도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당시의 공부가 제 삶에 분명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유한 나를 만들어가면서 이 세상 안에서 제 몫을 담당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빠른 결과를 보고 싶은 마음, 또 편하게 좋은 결과를 내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도 이렇지 않을까요?
주님의 말씀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바보 같은 삶이고,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을 것 같은 삶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곧바로 내게 어떤 결과를 보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도움이 됩니다.
목자는 양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양을 인도하며, 양들이 헤매게 두지 않고 그들을 모아들입니다.
즉, 양은 목자를 무조건 따라야만 합니다.
목자만이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성실하게 가르치며, 위험에서 구해주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목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따라서 양인 우리는 무조건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의심과 걱정이 자리 잡습니다.
혹시 잘못된 길로 이끄는 것이 아닌지, 정말로 안전한 길인지를 의심하며 걱정합니다.
그러나 양이 목자를 따르는 것은 무조건적인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양은 자기들 목자의 소리만 들을 뿐 낯선 이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하지요.
목자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목소리만을 듣고 있을까요?
목자이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나요?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구원을 성자의 권능에 맡기셨지요.
따라서 주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할 수 있는 우리 각자의 성소를 기억하는 날인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성소라고 할 수 있는 사제와 수도자의 성소자가 점점 줄어드는 현실에서
우리 모두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그분 목소리를 듣고 올바르게 따르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부활 4 주일인 오늘은 ‘착한 목자 주일’이라 불려 왔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도 이를 잘 보여줍니다.
<제1독서>는 오순절에 베드로가 사도 베드로가 했던 설교의 결론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여기서 베드로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 하는 것이라기보다
하느님께서 우리 죄에 어떻게 처신하셨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십자가에 못 박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이요 “메시아”로 삼으신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회개하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거십니다.”(사도 2,38)
그리고 그는 그의 편지인 <제2독서>에서 고백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1베드 2,2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자와 도둑의 비유”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문’은 드나드는 통로입니다.
곧 ‘문’은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이 “문”은 “드나드는 문”으로 하나의 문이지만 두 방향을 갖고 있습니다.
한 방향은 밖에서 “양 우리”로, 다른 한 방향은 우리 안에서 밖으로 향합니다.
한편, 이 “문”은 안과 밖을 연결하는 수평적 이동의 통로로서의 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늘과 땅이라는 수직적 이동의 통로서의 문이기도 합니다.
곧 이 “문”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인류에게 내려오고, 인류의 사랑이 하느님께 올라갑니다.
그러니 생명과 구원의 문을 나타내줍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는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가는 문으로서 그 문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일치로 들어간다.’고 말하며,
크리소스토무스는 성경이 문이라고 해석하며, ‘말씀의 문’을 통해 생명이 드나듦을 말합니다.
그리고 오는 복음의 비유는 그 드나듦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동행하는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우리가 “드나드는 문”이라 하십니다.
당신을 통해 들어가고, 또한 당신을 통해 나가는 ‘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드나들고 있는가?
혹은 들어가는 문으로만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들어가면, 나갈 필요가 없는 문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문’은 오히려, 다시 문 밖으로 나가기 위해 들어가는 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양 우리’ 안에 머물러 편안이 자기만의 안식을 누리고자 한다면,
목자에게 귀 기울이지도 않고 목자를 따르지도 않는 양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 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요한 10,4)
목자는 양들을 밖으로 이끌어 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주와 편리로부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울타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차단된 울타리가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열려진 울타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세상을 위해 밖으로 나가는 일입니다.
사랑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 곧 생명과 구원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요 먹이는 일입니다.
사실, 당신께서도 그처럼 ‘성문 밖’으로 나가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가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는 이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우리는 분명, “(문을)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면, 주님의 말씀에 따라 문을 드나들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양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교회의 사명을 이런 말씀으로 일깨우셨습니다.
“안락한 성전 안에만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길거리로 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손에 흙을 묻힌 더러워진 교회가 되기를 나는 꿈꾼다.”
-오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9)
주님!
당신께서는 거처할 집을 마련하시고 가슴을 열고 팔을 벌리시고 부르십니다.
저를 받아 주소서!
당신 풀밭에서 생명의 풀을 뜯게 하소서!
당신 기쁨이 차오르고 당신 사랑에 깃들게 하소서!
제 생명이 당신 진리 안에서 거룩해지게 하소서. 아멘.
문이 아닌 목자는 도둑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영화 ‘스틸라이프’(2013)는 고독사를 처리해주는 존이라는 한 구청직원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는 고독사 한 사람들을 그가 원했을 법한 종교예식으로 장례를 치러줍니다.
그런데 워낙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기에 그의 일 처리는 매우 더뎠습니다.
고인의 장례식에 와줄 만한 사람의 단서를 찾아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연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느린 일 처리에 짜증이 난 그의 새로운 상사는 22년간 같은 일을 해온
그를 해고하고 새로운 사람을 고용합니다.
새로운 직원은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고독사 한 사람들을 재빠르게 ‘처리’합니다.
이제 존은 마지막 일만 처리하면 됩니다.
마지막 대상은 빌리라는 자신의 집 앞에 살았던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그가 사랑했던 아내를 힘겹게 찾아냈지만, 그녀는 빌리의 장례식에 오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진첩에 있는 딸을 찾아냈습니다.
딸은 그래도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있었고 그렇게 자신을 찾아와 준 존에게 호감을 느끼게 됩니다.
둘은 아버지 장례 때 만나기로 합니다.
그러나 존은 장례식 전날 교통사고를 당해 말 그대로 고독사를 하게 됩니다.
존은 아무도 와주지 않는 장례식을 끝으로 재빠른 일 처리를 하는 직원에 의해 매장됩니다.
그 옆에는 그 사실도 모른 채 존을 기다리는 빌리의 딸과 몇 명의 사람들이
다행히도 빌리의 장례를 지켜봅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존의 주위로 그동안 그가 장례를 치러주었던 모든 고독사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추도를 해 줍니다.
존은 세상에서 혼자였지만 천국에서는 혼자가 아닐 것입니다.
그를 아는 수많은 사람이 그의 주위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남자는 어떤 양치기가 모든 양을 각각의 이름으로 불러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이것이 사실인지 직접 가서 물었습니다. 양치기는 한 양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다른 양들은 풀을 뜯으며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있는데
한 마리 양이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같은 방식으로 목자는 자기 주위로 12마리를 불러냈습니다.
이를 본 방문자가 말했습니다.
“어떻게 당신은 양들을 분간할 수 있지요? 양들 모두가 다 똑같아 보이는데요.”
목자는 자기 양 중에서 흠 없는 양은 하나도 없어서
각각의 결점으로 자기의 모든 양을 구분했습니다.
목자는 그 남자에게 어떤 낯선 사람도 양을 속일 순 없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 목자의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들고서 양 떼에게 갔습니다.
그는 가장해서 목자의 목소리와 아주 비슷하게 말해 보았으나
양 떼 중 어느 한 마리도 그를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마치 연예인에게 열광하는 아이들처럼, 결점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결점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희생이 필요했음을 말해줍니다.
양들은 목자가 자신들을 위해 그러한 희생을 했기 때문에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목자이십니다.
우리에게 단점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단점을 덮어주셨고
우리는 그 희생을 알기 때문에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처음에는 목자라고 하셨다가 그다음엔 문이라고 하십니다.
목자는 양 우리에 이미 있는 양 중에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당신이 이름을 지어준 양들을 하나하나 불러 아버지께로 인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 안에 있는 양들을 아드님을 통과하여 당신께로 이끄십니다.
이렇게 파견 받은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양들이 아버지께 가는 문이 되십니다.
문은 양들을 보호하고 또 참 목자에게 양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말은 양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뜻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이끄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양들을 봉헌하는 문이 되기도 해야 합니다.
처음에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목자들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통과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목자이지만 문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파견되어 양들을 파견하신 분께 이끌어야 하는 임무를 망각하고
자신들이 양의 주인이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에 목자가 양 우리에 도착하였지만, 문지기들은 목자를 죽였습니다.
양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누구나 파견 받은 목자들입니다.
자신의 우리에 양들을 잘 모아 파견하신 분께 이끌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칫 양의 주인이 되려고 한다면 도둑이 되고 맙니다.
도둑을 조심하고 또 도둑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도둑이 되지 않으려면 파견 받은 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길이 되어주어야지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있는 양들을 데리고 나를 밟고 아버지께로 가시게 만드는 길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깊은 산속에 거미 한마리가 오랫동안 친구 없이 외롭게 지냈습니다.
어느 날 아침잠에서 깨어나 거미줄을 보니 이슬 한방울이 맺혀 있었습니다.
“넌 누구냐?”
“난 이슬이야!”
거미는 오랫동안 친구가 없던 차에 “우리 친구 하자!”라고 말했습니다.
이슬은 잠시 생각하다가
“응 그래 좋아.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 나를 절대로 만지면 안 돼!”라고 말했습니다.
거미는 약속 지킬 것을 이슬에게 맹세했습니다.
그 후 거미와 이슬은 행복을 만끽하면서 외로울 땐 서로 위로하고 즐거움을 서로 나누었고,
세월은 흘러 거미는 이슬이 없는 생활을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거미는 이슬을 만져보고 싶었지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거미가 용기를 내어 “나 너를 한번 만져보고 싶어 응?”하고 말했습니다.
이슬이 슬픈 표정으로
“너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럼 너 나에게 또 한 가지 약속을 해야해.
만약 내가 없어도 슬퍼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거미는 “응!”하고 말했습니다.
거미가 두 손으로 이슬을 꼬옥 껴안는 순간 이슬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파견되었다는 의식을 갖지 않는 이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 자체로 도둑이기 때문입니다.
파견 받았음을 잊으면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봉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면 도둑이 됩니다.
주님께 봉헌하는 부모라야 참 목자요 주님께서 드나드는 문이 됩니다.
우리는 참 목자에게 닫힌 문입니까, 열린 문입니까?
자신을 죽여 그리스도께서 통과하게 하지 않는 목자는 모두 닫힌 문입니다.
문은 마치 혈관처럼 자신이 커지면 닫힙니다.
우리는 참 목자를 자신이 얼마나 목자에게 열린 문인지를 보며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나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이슬처럼 여기고
다시 하늘로 올려 보내야 하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 7)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부르심이 있습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떠날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부르심의 문이 있습니다.
역사를
바꾸어 놓는
떠남이 있기에
새로워지는
만남이 있습니다.
부르심의 진가는
주님과 함께하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부르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부르심은
우리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입니다.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게 되는
부르심의
참된 여정입니다.
무너짐과 아파함
사이에 피어나는
성소의 꽃이며
불안정과 울음
사이에서 맺혀지는
성소의 열매입니다.
주님께서
이루시는
성소의 여정을
기쁘게 봉헌하는
성소 주일 되십시오.
이 시대의
수도 성소는
가난과 인내임을 믿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백문이 불여일견, 백견이 불여일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문 물어보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백번 보는 것보다 한번 행하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때로는 장황한 말보다는 한 장의 사진이 더 큰 호소력을 주기도 합니다.
여러 사람의 말보다는 한 사람의 행동이 더 큰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코로나19의 현장에서 감동을 주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방호복을 입고 의자에 잠시 기대어 눈을 부치고 있는 의사의 사진입니다.
말은 없었지만 현장이 얼마나 힘든지 알 것 같았습니다.
의료인들의 수고가 정말 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콧등에 밴드를 부친 간호사들의 사진입니다.
마스크를 하루 종일 착용하니 콧등에 상처가 났고, 밴드를 부친 것입니다.
밴드를 부쳐가면서까지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들의 희생과 헌신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진천과 아산의 주민들이 길가에 걸어놓은 현수막이 있었습니다.
현수막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푹 쉬다가 가십시오.’
두려움과 걱정을 안고 버스를 탔던 교민들은 현수막을 보면서 가슴이 따뜻해졌을 겁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던 아버지처럼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위험이 있음에도 주민들은 넉넉한 인심을 보여주었습니다.
2주간의 격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도 주민들은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바이러스는 백신과 치료를 받으면 사라집니다.
두려움과 공포는 위로와 격려를 받으면 사라집니다.
길가의 현수막을 보면서 코로나19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열대를 가득채운 물건을 보았습니다. 코로나19의 위기가 있었지만 한국은 사재기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정부의 정책을 신뢰하고 있으며, 질병관리본부의 대응을 믿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제가 있는 뉴욕에서는 텅 빈 진열대를 보았습니다.
휴지를 살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두려움이 컸기 때문입니다.
3월 27일입니다.
텅 빈 바티칸 광장에 비가 내리고 있었고, 교황님 홀로 제단으로 올라가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고령의 교황님이 홀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듯이 교황님은 기도하였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수고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풍랑에 흔들리는 배 안에서 두려워했던 제자들처럼 교황님도 예수님께 두렵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 말고, 믿으라고 말씀하셨듯이
그렇게 믿고 싶지만 솔직히 아직은 두렵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광장은 텅 비었지만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은 교황님과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교황님은 우리가 자연과 생태계를 함부로 대했음을 반성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았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사제는 신자들을 더욱 그리워하는 시간이 되었고,
신자들은 사제와 함께 하는 미사의 소중함을 느끼는 시간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성모님의 전구하심으로 이번 위기를 극복할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 신앙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늘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이 ‘회개’입니다.
욕심과 교만함으로 나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겸손과 희생으로 타인을 위해서 살도록 마음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어진 능력이 다르고, 하는 일도 다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능력과 재능으로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회개’했는지 우리의 뜻대로 살아가는지를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음성을 잘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잘 듣기 위해서는 먼저 함께 사는 가족들의 음성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이웃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억울한 이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
병든 이들을 치료해 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희생과 봉사를 하고 내가 원하는 만큼 타인에게 해 주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소주일을 지내면서, 예전에 신학생 때 읽었던 글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이것이 하느님의 음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침묵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제
힘없고 약한 자의 고통을 나누며, 사회정의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사제
사리에 맞지 않는 독선을 피우지 않으며, 평신도와 함께 본당을 이끌어 가는 사제
겸손하며,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며,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사제
죽기까지 사제 성직에 충실한 사제
평신도들에게 적절한 강론을 준비하는 사제
검소하게 물질에 마음 쓰지 않으며, 공금에 명확한 사제
웃어른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말과 행동에 예의를 지킬 줄 아는 사제
청소년과 친하게 대화를 나누며, 교리교육에 힘쓰는 사제
성사 집행을 경건하고 예절답게 하는 사제
교구장과 장상에게 순명하며, 동료 사제들과 원만한 사제
가까운 친척이나 친한 교우에게 매이지 않는, 양쪽 귀를 모두 여는 사제”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신앙의 길, 회개의 길입니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마리소피아 수녀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요한 10,3)
“그는 앞장 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요한 10,4)
성소주일에 들려지는 주님의 말씀은
목자와 양들의 관계를 통해 예수님과 우리가 어떠한 관계인지 깨닫게 하신다.
양들은 목자의 소리를 알아듣고 그를 따른다. (요한 10,3절.4절 참조)
알아들음은 단 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함께함을 통해 직접 표현되는 말만이 아니라
작은 몸짓에도, 표정 안에서도, 목소리의 음색 안에서도
상대의 감정과 상태를 느끼고 알며 공감하게 된다.
이처럼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려나갈 때
양들은 함께한 시간을 통해 쌓아온 신뢰로
비록 양 우리 밖이 위험한 곳일 지라도
늘 그래왔던 것처럼
목자가 그들을 보호해주며 푸른 목초지로 안전하게 인도할 것임을 신뢰하기에 따라 나선다.
로마서의 말씀처럼(로마 8,28)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께서도 날마다 우리 모두의 이름을 사랑담아 하나하나 부르시며
하루의 날들을 시작하게 하신다.
비록 완전한 안전이 보장되지 않고 유혹과 위험의 순간들이 있을 지라도
삯꾼이 아닌 목자와 함께이기에 믿고 신뢰하며 그분 인도하심을 따라 나서기를 바라신다.
이러할 때 우리는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된다. (요한 10,10)
그러나 다른 것에 몰두 해 있을 때,
분심 중에 있을 때,
자기 생각 속에 빠져 있을 때는
모든 것이 그냥 지나쳐간다. 불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한 경험들이 우리는 있다.
주님은 늘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우리가 마주하는 자연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상황들 안에서
매 순간 당신의 인도하심을 따르라고 하신다.
그러나 이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주님의 소리가 들리지 않기에, 주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에...
그러나 주님의 은총에 의지하여
주님께 더 집중하며
일상 안에서 삯꾼의 소리가 아닌
주님의 소리를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깨어 있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하게 된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홈페이지-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