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61.62
♤권력은 칼 끝에서 나온다
왕자의 저력을 높이 평가하는 명나라
개경은 송악을 주산으로 하고 용수산을 안산으로 한 아담한 도읍지다. 좌청룡 부흥산과 우백호 오공산을 감싸 안고 용수산을 바라보며 오천(烏川)과 백천(白川)을 얻었으니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장풍득수(藏風得水)형 천하의 명당이다.
장풍득수란 바람을 잘 갈무리하여 물을 얻는다는 뜻이다.
까마귀(烏川)가 알을 낳으면 검정색일까? 하얀색일까?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으니 경하해야 할 일일까? 조종을 울려야 할까?
고려를 뒤엎은 새 왕조가 웅비를 준비하고 있으니 명당일까? 흉당일까? 아무튼 또 하나의 왕조를 낳았으니 생산성은 높다.
개경의 동대문은 숭인문이다. 한양과 삼남지방으로 연결되어 일본으로 통하는 문이다. 개경의 서대문은 선의문이다. 평양과 의주를 거쳐 대륙으로 통하는 문이다. 회임한 아내와 작별하고 대궐에서 임금에게 예를 갖춘 사신 일행은 선의문에 잠시 멈추어 섰다. 대궐에서 배웅 나온 환송객을 돌려보내야 할 지점이다.
개경은 북으로 송악과 남으로 용수산을 축으로 궁성(宮城)과 황성(皇城) 그리고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겹겹이 싸인 요새다. 선의문은 외성의 성문이다. 선의문을 지나면 개경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궁성이 눈에 들어왔다. 임금이 있는 곳이다. 궁성을 바라보며 목례를 올린 방원은 고개를 들었다.
잘 있거라 송악산아 다시 보마 숭산아
송악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신령한 산이라 하여 개경인들이 숭상하는 송악산은 방원에게 고향과도 같은 산이다. 개경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자라서 혼인하고 청운의 꿈을 펼치던 곳이다. 그러한 송악산을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하지만 '꼭 다시 볼 수 있다'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또 하나 이방원을 짓누르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었으니 암살음모였다. 고려 패망에 분노한 고려의 유민들이 사신단 여정의 길목에서 방원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첩보였다. 방원은 추동에 칩거하면서도 사설 정보팀은 가동하고 있었다.
사설 정보팀에 접수된 첩보에 의하면 정몽주를 격살한 방원을 죽이려 한다는 것이다.
"돌아오면 아기가 태어나 있겠지? 사내 녀석일까? 계집아이일까?"
개경에서 금릉까지 8천리 길. 왕복 1만6천리 길. 다녀오는데 장장 6개월이 걸리는 머나먼 길이다. 항공기나 자동차와 같은 교통수단이 없던 시절. 정사(正使)와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 등 관리들은 견마잡이가 이끄는 말을 타고 가지만 마부는 걸었다. 걷는 속도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이다.
벽란도에서 나룻배를 타고 예성강을 건넌 사신일행은 평양을 거쳐 의주관에서 묵었다. 의주목사의 대접이 융숭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신단 일행에 왕의 아들이 포함되어있으니 지방 관리가 알아서 길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의주목사의 환송을 받으며 압록강을 건넜다.
6년 전. 이색(李穡)을 수행하여 서장관으로 난생처음 국경을 넘을 때와 같은 설렘은 없었다.
하지만 유유히 흐르는 압록강 푸른 물을 보며 "압록(鴨綠)빛 저 강물을 다시는 못 볼 수도 있겠지?"라는 조바심은 가시지 않았다. 압록강은 물빛이 오리의 머리 색깔을 닮았다 하여 압록(鴨綠)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명나라 방문길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긍지도 있었다. 그때는 고려가 독립국임을 포기하고 감국(監國-신탁통치)을 요청하러 가는 고려의 사신이었고 오늘날에는 신생국 조선의 사신단을 이끌고 가는 정사가 되어 명나라를 방문하는 자신이 뿌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감상도 잠시, 자신의 임무가 조공국임을 확인하여 달라는 사신으로 명나라를 방문한다는 사실을 상기했을 때 조국이 왜소해 보였고 자신이 처량해 보였다.
그것은 약소국 외교사절의 비통한 감정이었다. 머리를 조아리지만 비굴하지 않기로 굳게 다짐했다.
성문을 열고 마중 나온 요동성주, 놀라운 변화였다
요동에서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요동도사가 성문까지 마중을 나온 것이다.
너무나 뜻밖이었다. 성문을 걸어 잠그고 사신의 입국을 거절하던 요동 성주였다. 조선국 사신을 황제가 매질하여 보내던 명나라였다. 이러한 명나라의 태도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변화였다.
명나라 예부에서는 조선 사신단의 명단을 받아보고 자신들이 의도한바 대로 조선이 굴종했다고 받아들였다. 조선 국왕의 아들 이방원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신의 임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임무 그 자체는 요식행위일 수 있었다. 누가 오느냐가 관건이었다.
명나라 조정은 이성계 이후의 조선을 면밀히 분석해놓고 있었다. 조선이 나이 어린 방석을 세자 책봉해놓고 있었지만 즉위까지는 머나먼 길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실력자 정도전이 부상하고 있지만 세자 방석이 무너지면 와해될 수밖에 없는 취약한 기반이라는 진단을 내려놓고 있었다.
정도전이 병권을 쥐고 있었지만 군권이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군권 없는 병권은 한낱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마오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고 처음 말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중국인들의 의식세계에서 "권력은 칼끝에서 나온다"는 믿음은 아주 오래된 전통이다.
중국의 역사가 그렇다.
지금은 수면 아래서 몸을 낮추고 있지만 혁명의 일등공신 이방원의 저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정치란 과거를 오늘에 평가하여 내일을 치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방원이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기 위하여 입국했으니 이성계 이후의 조선을 손아귀에 넣는 셈이었다.
요동도사가 마련해준 객사에서 노독을 풀었다. 지난번 사신 길에서 뒷골목 허름한 여관에서 묵었을 때와는 격이 달랐다. 요동도사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금릉을 향하여 떠나려는데 요동도사가 귀엣말로 속삭였다.
"연경에 있는 연왕께서 들려 가시라는 분부입니다."
연왕의 초대였지만 명이었다.
연왕이 누구인가. 명나라 황제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서 아버지로부터 연경(북경)을 분봉(分封)받아 통치하고 있는 왕이지 않은가. 황태자로 책봉된 큰형이 죽고 조카가 황태손에 책봉되었지만 변혁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잠룡(潛龍)이었다.
훗날 정난(靖難)의 변을 일으켜 조카 윤문(允炆-건문제)을 불태워 죽이고 황제에 오른 영락제다.
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62
♧암살 음모자들과 조우하다
사신 일행이 지나는 길목을 노려라
요동에서 황제가 있는 금릉이 직선코스라면 연경은 우회코스다. 갈 길이 바쁜 사신일행은 단 하루가 아쉬웠지만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연왕(燕王)의 초대를 무시한다는 것은 천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방원은 연왕의 부름을 명(命)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명나라의 막강한 실력자 연왕을 알현한다는 것은 하늘이 내려준 기회라 생각했다. 찬스 포착의 귀재 이방원이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명나라의 실력자 연왕의 눈도장을 받아둔다는 것은 조선을 압박하는 명나라에 우군을 심어두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요동을 떠나 심양을 지날 때 비로소 이 땅이 전쟁을 치르는 나라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백성들은 20년 이상 지속된 전쟁에 지쳐있었다. 전쟁피로가 역력했다. 수시로 발동되는 총동원령에 싫증을 내고 있는 모습이 확연했다. 전쟁은 백성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권력자를 위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대는 달랐다. 식량을 비롯한 군수물자를 가득 실은 수레와 이동하는 장졸들의 행렬이 끝이 보이지 않았다.
원나라와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는 명나라는 전력을 북방전선에 집중하고 있었다.
고려촌에서 생긴 일
사신 일행은 남행을 계속했다. 산해관(山海關)을 지나고 청룡하를 건너 풍륜성을 통과하니 낯익은 집들이 나타났다. 초가집이었다.
고려보(高麗保)라는 중국속의 고려촌(高麗村)이었다. 고구려 패망 이후 조국에서 끌려온 유민들이 망국의 한을 달래며 집단 촌락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고국에서 귀한 손님이 왔다고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중국인들과 달리 흰옷에 벼농사 지으며 우리네 풍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촌락의 고려인들이 쌀밥과 김치를 내왔다. 막걸리도 곁들였다.
오랜만에 쌀밥과 된장국을 먹었다. 조국의 향수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같은 민족을 만난다는 것이 너무나 반가웠고 그들로부터 우리의 음식을 대접받는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저녁 무렵, 손님이 찾아왔다. 정사 방원을 만나보고 싶다는 것이다. 고려촌의 학사(學士)라고 했다. 체격이 우람한 젊은이를 대동하고 찾아왔다.
젊은이가 포함되어 있어 수행원들은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고국에서 출발하기 전 암살 음모 첩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인네가 선물 꾸러미를 풀었다. 떡이었다.
"이곳에 수수는 찰지지 않아 떡을 해도 맛이 없지요. 그래서 고국에서 종자를 들여와 수수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도 우리네 수수떡 맛을 보면 좋아한답니다."
팥으로 모양을 낸 경단이었다. 한입 맛을 보았다. 찰진 맛이 예전 함흥에서 먹어보았던 고향의 맛이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국의 지체 높으신 분을 뵙게 되어 광영입니다."
"이르다 말씀입니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정중한 예의에 방원도 중후한 범절로 답했다. 그렇지만 지체 높으신 분이라 하니 몸 둘 바를 몰랐다. 임금의 아들이라 하지만 아무런 직책을 갖지 못하고 추동 사저에서 칩거하고 있지 않은가. 사신이라 하지만 잘못한 것도 없이 황제에게 용서를 빌러 가는 신세가 아닌가.
"이곳에서 아이들에게 우리말과 한문을 가르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하, 훈장 선생님이시군요."
고려촌의 아이들에게 한문과 우리말을 가르치는 훈장이었다. 환갑을 넘긴 듯한 나이에 하얀 턱수염이 풍채를 갖추고 있었다. 훈장 냄새가 물씬 풍겼다.
"선생님이라 할 것 까지는 없고 이 늙은이가 어렸을 때 어르신들에게 우리말을 배웠기에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잊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읍지요."
"훌륭한 일을 하십니다."
"나으리로부터 과찬의 말씀을 들으니 송구스러워 민망할 따름입니다."
노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 무슨 말인가 할 듯 말듯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방원도 노인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이른 아침 연경을 향하여 출발하려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찾아온 손님을 강제로 내보낼 수 없었다.
"황공한 말씀이오나 이렇게 뵙게 되었으니 다 말씀 드리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시오? 어서 말씀해보시구려"
답답했다. 성격이 급한 방원이 방방 뛸 일이었다. 이러한 방원의 조급함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꾸물대던 노인네가 우물쭈물하더니만 입을 열었다.
"얘, 칠복아 어서 나으리께 절을 올려라."
노인네를 따라왔던 젊은이가 방원 앞에 넙죽 엎드렸다. 절하는 품새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것 같았다. 기골이 장대한 무골풍의 젊은이였다. 방원은 뜻밖의 절을 받느라 당황스러웠다.
"실은 사신 일행이 우리 고려촌에서 묵고 연경으로 가는 길목 파리보(巴里堡) 다리위에서 나으리를 도모하자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한사람이 이 젊은이지요."
노인네가 조금 전 방원 앞에 절을 올린 젊은이를 가리켰다. 젊은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이 없었다. 방원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하마터면 파리(巴里)에서 파리 목숨이 될 뻔 하지 않았는가. 동포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으니 경계가 느슨해질 지점이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그러한 젊은이들을 이 늙은이가 말렸습니다. '너희들이 방원이를 죽인다고 선죽교에서 죽은 정몽주가 살아오지 않지 않느냐'고 설득했지요. 그리고 또 하나 이국땅에서 우리끼리 죽고 죽이는 일은 민족의 추태라고 생각했습니다."
휴우, 방원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고국에서 출발하기 전, 암살음모가 있다는 사설정보팀의 보고를 받았을 때 설마 했었다. 운명은 제천이라 생각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명나라 땅을 밟으면 정면 돌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한 음모세력과 이렇게 부딪칠 것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이렇게 고백의 말씀을 올리고 나니 후련합니다. 잠시라도 흉측한 생각을 했던 무지랭이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다만 그러한 생각을 했던 마음을 용서해 주시라는 말씀이고 우리가 나으리를 용서해드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뜻을 거두어 주십시오."
노인네가 젊은이 손을 잡고 방원 앞에 엎드렸다. 목에 힘을 주고 절을 받아야 할 신분 차이지만 가벼운 맞절로 화답했다. 갈수록 태산이다. 누가 누구를 용서해준단 말인가. 이곳이 중국 땅이 아니고 조선 땅이라면 당장 목을 날릴 망발이었지만 여기는 중국 땅이지 않은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수수떡을 담았던 함지박이 나가고 찻잔이 들어왔다. 중국본토의 홍차가 아니라 고국의 녹차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마셔보는 녹차였다. 은은한 다향(茶香)에 잠시 취했다. 차를 마시는 동안 격앙되었던 서로의 감정이 평온을 되찾았다. 지게문 밖에서 별빛이 졸고 있다. 밤은 깊어갔다.
정몽주가 살아 있었다면 정도전의 독주를 견제했을 것이다
"포은의 덕망은 계속 이어졌어야 했는데 나으리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조국의 정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내용이었다.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방원의 정곡을 찔렀다. 답변하기 껄끄러운 질문이었다. 이국땅에서 청문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완곡한 표현이었지만 정몽주를 왜 죽였느냐고 힐난하는 물음이었다.
이것이 바로 역린(逆鱗)이다. 군주는 자신의 과오를 자기 스스로에게는 인정하면서도 신하가 추궁하면 용의 비늘이 거꾸로 서는 것이다. 하지만 방원이 군주가 아니었기에 비늘이 거꾸로 서지는 않았다.
질문하는 노인네 역시 방원에게 거꾸로 설 비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무엄한 질문을 하는 것이다.
방원은 뜨끔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이곳이 치외 법권 이국땅이 아니고 조선이라면 괘씸죄를 걸어 즉시 하옥할 발칙한 망동이었다. 그렇지만 여기는 조선의 법률이 통하지 않는 중국 땅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물러설 방원이 아니었다.
"인간사,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혀 사는 게 인간입니다. 고고하게 사시려고 먼 길 떠나신 게지요."
역시 방원다운 여유로운 답변이었다. 하여가(何如歌)로 회유하자 단심가(丹心歌)로 응수하던 그 때를 생각하며 잠시 회상에 잠겼다. 환갑을 넘긴 노인을 상대하면서 27세 청년이 이러한 답변을 한다는 것이 방원 자신도 놀라웠다.
"하하하, 역시 나으리다운 답변이십니다. 제가 쓸데없는 말씀을 드려 심기에 불편을 드렸다면 용서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