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단신으로 뛴다 / 이성선 (1941~2001)
올려다보면 여름밤 하늘에
구름 깨지는 소리가 가득하다
깨진 구름 틈새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달이 건너 뛰고 있다
내려다보면 내 안에서도
흰구름 살 터지는 소리가 가득하다
거기서도 그가 화안히 열린
강물을 건너 뛰어 숨는다
달은 단신으로 뛴다
그가 누구인가
내 속의 너다
여름밤 나무 위에서 구름과 몸을 섞는
너는 나다
얼굴 / 이성선 (1941~2001)
흙길 위에 난 우차 바퀴 자국
길게 마을로 향한
두 줄기 길
그 사이 더욱 깊게 파인
발자국 소 발자국
그 속에 나의 얼굴이 소의 얼굴과
나란히 떠오르는 날이 있다
비 온 다음 날이다
가장 맑은 날이다
시멘트 포장하다 남은 길
땅바닥이 가끔 비치는
나의 얼굴과 소
벌레시인 / 이성선 (1941~2001)
해골 파먹어 들어가는 벌레처럼
산에 달이 지고 있다
하늘은 어둡고 땅은 깜깜해
산은 허깨비 같은 큰 키로 일어나
그림자로 나를 덮는다
나는 그것을 덮고 잔다
이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
나는 다시 혼자 깨어
불을 켜고 일기를 쓰다가
시를 쓰다가 멍하니 앉았다가
낙엽지는 소리에 놀라 밖으로 나가 본다
내 몸에서도 이상한 소리가 난다
달은 나를 뚫고 내려가 이미 폐를 파 먹고
산이 벌레를 숨겨 기른다
그 신음이 대지에 풀잎을 흔들고
들을 깨우고 개울을 건너
내게로 옮겨 온다
내 속에서 바람이 자란다
그때부터 내 속에서 슬픈
벌레시인이 자란다
풀잎과 앉아 / 이성선 (1941~2001)
풀잎과 마주 앉아
우주와 앉아
마음을 모은다
산이 춤추며 온다
바다가 말하러 온다
산 노래에 몸을 싣고
꽃의 눈동자 이슬에
뼈를 씻소 바라보면
다시 깨어보면
세상 속에 세상은 없다.
거기 나는 없다
시간과 공간의 이 큰
천둥번개가 모두 나의 집
나의 몸이다
풀잎과 앉아
별 속에 나비로 날아
이 우주 이 무궁
삶은 신비다
세상 전체가 향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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