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28. 주일오전예배
마 20:20-28
우리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십니다.(17절) 그가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을 세 번째로 제자들을 따로 불러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세 번째 예고하신 내용은 이전 두 번에 걸친 내용보다 더 구체적입니다. 구체적인 만큼 더 제자들이 더 강하게 반박하면서 만류하거나, 더 염려하며 근심할 법도 합니다. 이미 예루살렘에서 있을 일을 첫 번째 예고할 때는 베드로가 반박하면서 그리하지 말라고 했을 때 사탄아 물러가라 하시면서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하셨지 않습니까?(마 16장) 첫 예고 때에 아주 강하게 반박했습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일을 좌절시키고 못하게 하듯이 베드로가 한 것입니다. 두 번째 예고에서는 “제자들이 매우 근심했다.”(마 17:23) 고 했습니다. 장차 죽임을 당한다고 하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한 것입니다.
이 세 번째 예고는 앞 두 번에 걸친 예고보다 더 구체적인 것이, 실제로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때여서, 예수님이 예고하신 일이 이전 두 번보다 더 임박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다 “이방인에게 넘겨지고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힌다”고 하셨습니다. 이전에는 단순히 고난을 당한다고 했지 구체적으로 이방인에게 고난을 당한다는 말씀이 없고, 특히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는다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이번 세 번째 예루살렘에서 인자이신 예수님이 닥칠 죽음의 방식이 아주 구체적입니다. 그럼에도 이전과 달리 제자들이 반응이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그냥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고 끝입니다. 물론 이렇게 된 이유를 누가는 코멘트합니다.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성령께서 그들을 깨닫지 못하도록 감추셨습니다. 그럼에도 깨닫지 못해서 베드로가 반박한 것이고, 제자들이 매우 근심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 번째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일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 전혀 없는 점을 주시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살아난다는 이 말씀 후에 바로 그
때에 한 어머니가 와서 예수님께 절하면서 무엇을 구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으로 다음과 같은 제목과 내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1)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 때는 바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이방인에게 고난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제 3일에 살아난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때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모르는 한 여인이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 여인은 아예 나오지 않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왔다고만 기록합니다. 그러니 세베대의 아들은 야고보와 요한임이 틀림없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그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다른 성경구절을 통해서 그녀의 이름은 살로메이며, 마리아의 동생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에게는 그녀가 이모인 것입니다.(막15:30) 그만큼 예수님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여인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먼저 인맥을 이용하기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을 대우했습니다.
예수님께 나와 절하고 무엇인가를 구한 것을 볼 때, 그는 참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알고 절하고 구한 것입니다. 그가 “주의 나라”라는 표현을 쓴 것을 볼 때, 그녀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상전으로 보고 종이 상전에게 무엇인가를 구하는 형식을 취하기 위해서 절함으로서 주인에 대한 예의와 존경을 표현한 것입니다. 시편 123편 1-2절에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라고 했는데, 세베대의 부인이 이렇듯 예수님을 주인 즉 상전으로 알고 그에게 절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이 세베대는 이모부이고 그 부인은 이모인데, 예수님이 절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이모가 도리어 예수님께 절하면서 무엇인가를 구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도 마치 상전이 여종에게 은혜를 베풀 듯이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과 세베대의 아내가 조카와 이모사이가 아니라 왕과 그 수하의 종의 관계로 서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베대의 아내인 살로메는 예수님을 왕으로 인식하고 자신의 요구를 정중하게 왕앞에서 하듯이 예수님께 구한 것입니다.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동사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앉게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앉게 명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왕이 온천하에 명령을 반포하듯이 명령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위에 등극할 때 그 때 두 아들도 같이 온 천하에 명령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원을 구하는 시점을 생각해 봅시다. 이 세베대의 아내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 그러면 왕의 등극식을 위해서 오르시는 것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고 이런 소원을 구한 것입니다. 왕의 등극식을 하러 예루살렘에 오르실 것이니까 거기가서 무엇인가 청탁을 하면 다른 제자들이나 사람들이 먼저 할 수 있으니 그 전에 빨리 청탁을 해서 확답을 받아 놓자 한 모양입니다. 지금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는데,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좌편, 하나는 우편 하는 것을 보면, 이제 로마에서 벗어나 예수님이 왕이 되는, 예수님을 주군으로 섬기는 나라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르면 등장할 것이니, 그때 한 자리 빨리 내 아들이 차지하도록 명령해 달라고 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런 청탁에 같이 간 두 아들 그러니까 야고보와 요한은 무엇을 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이 그들을 따로 불러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자신의 당할 일을 말씀해 주셨는데도 그것은 마음에 두지 않고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보편적 기대에 의존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도전이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인식이나 태도가 바르다고 해서 예수님을 섬기는 목적 또한 바르다 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것은 아무리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서 정확히 가르쳐 주시고 알려주어서 그 말을 다 들은 제자들도 자기 나름대로 예수님에 대한 기대를 만들어 기도하고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인식이나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생활 태도나 예수님을 믿고 고백함에도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설교를 아무리 잘 듣고 잘 해도 그 설교를 들은 교인들은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예수님을 믿고 섬기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전한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아니 전혀 듣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고, 소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베대의 아내와 그 두 아들에게와 같이 우리에게도 보여지는 동일한 것입니다.
2. 너희들은 구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예수님은 그녀의 요구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는 것을 보면 이 여인만 구한 것이 아니라, 두 아들도 구한 것이 분명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의 우편에 주의 좌편에 앉는 방식이 너희들이 지금 생각하는 세상의 방식이 아니다. 라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먼저 주의 나라를 세우는 방식이 힘에 의한 로마 나라의 정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시는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나라의 으뜸이 되는 나라, 세상에서 제일 힘이 센 나라 그러니까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가장 으뜸이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시는 나라는 여러 인재를 모아서 재상을 세우고 하는 그런 방식으로 세우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나라를 세우시는 방식은 하나님의 주시는 잔, 바로 내가 마시는 잔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실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봐야할 것은 예수님과 그들이 마실 잔과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은 것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마실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하니까 바로 마실 수 있습니다 한 것을 보면 이 잔은 잔치의 잔으로 여긴 듯 합니다. 왕위 등극식에는 잔치가 배설될 것이고, 그 잔치에는 음주가무가 뒤따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잔을 말씀하시니 당연히 그들은 왕위 등극식에서 베풀어지는 잔치를 연상했을 것이고, 그 잔을 마다할 아무런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잔을 너희들이 마시겠지만 그 잔은 너희들이 좌우편에 앉아서 마시는 잔치의 잔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이 잔은 분명히 잔치의 잔이 아닙니다. 이것은 진노의 잔입니다.(렘 25:15,17)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쏟으시는 진노의 잔입니다. 진노에 대해 심판하시는 죽음의 잔입니다. 사약을 담은 잔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진노의 죽음의 잔을 마실 것입니다. 나중에 제자들도 복음을 전하다가 죽을 것입니다. 이 잔은 그러므로 사약을 담은 잔, 죽음의 잔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나라를 세우시는 방식은 진노를 받으심으로 죽으시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는 먼저 죽음의 잔을 마신 다음에 사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 2위 되시는 하나님이신데 자신이 그의 나라에서 좌우편에 앉을 사람을 명령할 수 있음에도 성부 아버지께서 그것은 주시는 것이다라고 하신 것은 지금은 그분이 인자로서 즉 사람으로서 죽으시는 것이 가장 급선무이다. 바로 인자로서 고난을 받아 죽어서 제 3일에 살아나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것이 바로 자신을 보내신 바 하나님이 자신에게 예비하신 것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좌우편에 앉게 하기 위해서 여기에 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나에게 인자로서 즉 사람으로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제 3일에 살아나도록 예비하신 일을 하겠다. 나는 그것만 즉 하나님이 나에게 예비하신 것만 이루면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들도 너희 앞에 있는 사망의 잔을 마실 것이다. 하지만 너희뿐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신 그 사람이 그 좌우에 앉을 것이다. 한 것입니다. 너희들이 간구하고 청원했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 것입니다. 너희들은 좌우에 앉을 것이 예비된 것이 아니라, 나와같이 내 잔을 마시도록 예비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좌우편앉는 것이 나에게도 너에게도 예비된 우선순위가 아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진노의 잔, 사망의 잔을 마시는 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예비된 것이고, 차후에 너희들도 나와같이 사망의 잔을 마시는 것이 예비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신 후에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고, 제자들도 나중에 죽어 낙원에 있어 하나님의 처소에 함께 할 것입니다만 지금은 그것이 먼저가 아니라 사망의 잔을 마시는 것이 먼저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다른 제자들 즉 열 제자들은 그 두 형제에 대해서 화가 치밀었습니다. 분했다고 했습니다. 너희들이 먼저 좋을 자리 차지하려고 선수를 쳤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이 주인이면 그들은 다 같은 종들일 뿐인데, 종들이 누가 더 높으냐고 싸우는 식입니다. 지금 교회도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사회계급있듯이 수석이니 선임이니 뭐니 하면서 서열이 있지 않습니까? 그 최상위에 담임목사가 있어서 자신이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듯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이 왕이시고 주인이시고 다른 사람은 다 종일 뿐입니다. 종끼리 누가 크네 작네 하는 꼴입니다. 제자들이 그 두 제자들에게 화를 내고 분내는 것이나 이 시대에 수석이니 선임이니, 부목사니 하면서 여러 계급을 만들어 놓은 것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더 좋은 자리, 더 좋은 위치에 앉고 싶은 종들의 아귀다툼일 뿐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분이 여기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르는 줄을 너희가 알지 않느냐” 라고 되물으셨습니다. 너희들 하는 짓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의 집권자들, 즉 권세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하는 짓이다 한 것입니다. 그들이 그 잡은 권세를 가지고 어떻게 하느냐?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이리 쓰고 저리 쓰고 마음대로 주관하지 않느냐? 그들의 권력의 힘을 가지고 떡하고 제일 좋은 위치, 가장 높은 위치에 앉아서 하는 짓이 그 권력의 힘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써서 사람을 부려먹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왜 이렇게 분을 내고 또 두 제자와 어머니까지 나서서 한 자리 요구하는 것은 그 두 사람이 선수를 쳐 좋은 자리 뺏길까봐 그러는 것이고, 그 좋은 자리에 앉아서 세상사람처럼 큰 소리치고 권력을 행사해 보려고 하는 것 아니냐? 너희들이 나를 따른 것이 사실은 세상사람의 힘있는 자를 따라서 그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그 사람 덕에 나도 한 자리해서 권력으로 세상 사람앞에서 힘자랑하고 사람을 부러먹으려고 하는 것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나라가 하는 짓을 너희들이 주님의 나라, 주의 나라라고 하면서 똑 같은 짓을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 나라에서 권세를 얻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이렇게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들은 그러면 안 된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은 그러면 안된다. 세상의 권력자들과 같으면 안 된다. 너희들이 권력을 잡는 목적, 힘을 얻고자 하는 목적, 요즘은 돈이 힘이니까 돈을 많이 버는 목적, 또는 요즘은 건강이 힘이니 건강하기 위한 목적 여러 다양한 방식에서 너희들이 요구하는 것, 너희들이 원해서 요구하는 그 무엇을 받아서 누리려고 하는 목적은 세상과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집권자들이 마음대로 하듯이 권세를 부리기 위해서 무언가를 원해서는 안된다. 여기서는 권력의 자리에 앉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무슨 목적을 위해서 그런 자리를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예비해 주셨느냐 할 때,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큰 것이 왕이 되고 어느 회의에 장이 되어 명예를 얻고 말로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상전이지만 주님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이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자가 아니라 실제로 섬겨야 하고 실제로 종처럼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의미로는 섬기는 자가 큰 자이고 지금 종으로 일하는 자가 으뜸인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왕노릇하는 것은 떡하고 위에 앉아서 이리오너라 저리 가거라 하면서 입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 종으로서 섬기는 것이 왕인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인자가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말씀함으로 명확히 입증해 주셨습니다. 여기 인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고 이방인에게 고난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제 삼일에 살아나는 그 인자와 같은 인자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인자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당하시는 모든 고난과 살아나심은 다 섬기는 일입니다. 세상의 집권자들이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부리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이 섬기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고난받는 것이 섬기는 일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진정으로 으뜸이시고 크신 분입니다. 섬기는자가 크다고 했고 종이 되어야 으뜸이 되신다고 하셨는데 그분은 종으로 섬기려고 자기 목숨까지 내 놓으신 분이니 가장 으뜸이신 분이시고 크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섬김은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신 것으로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인자 즉 다니엘이 예언한 권능의 왕국, 영원한 나라를 가져오는 왕이신대도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대신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입니다. 이점도 주의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만인 구원이지만 많은 사람은 제한적으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에게 목숨을 대신해서 죽으라고 예비하신 자들을 위해서 대속물로 자신의 목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섬기신 분은 없습니다. 제자들은 이 예수님앞에 숙연해졌을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이 드러났을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이 드러나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자신이 이방인과 같다는 생각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