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남이섬에 있는 남이장군묘는 진짜가 아니다.
예전부터 남이장군 무덤이라는 불리는 묘가 한기 있었는데, 정확한 사실이 확인된 것은 아니고 다만 그가 이섬에 묻혔다는 전설이 담긴 돌무더기가 전하여왔고 그 돌을 함부로 가져가면 집안에 우환이 생긴다는 이야기가 인근 주민들사이에는 입으로 전한다고 한다. 그러나 남이장군의 무덤은 화성군 비봉면 남전2리에 버젓이 자리잡고 있다.
화성군 비봉면 남전리에는 조선 세조 때의 무신 남이장군(1441~1468)의 묘소가 있습니다. 강원도 춘천에도 남이섬이 있지만 그곳은 남이장군이 잠시 귀향살이를 했던 곳이고 실제 남이장군은 이곳 화성땅에 부인과 함께 나란히 잠들어 계시다.
남 이(南 怡) 1443 ∼ 1468 - 의산위공파(의령관)
태종조 부마(太宗朝 駙馬) 의산위(宜山尉) 휘(暉)의 장손이고 태종의 외증손이다. 서울 연건동 126번지에서 살았으며 좌의정 권람(權擥)의 4녀와 결혼하였고 1457년(세조 3) 17세로 무과(武科)에 장원하여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여러 무직(武職)을 거치면서 용맹을 떨치고 1466년 다시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하였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키자 25세 때 길주(吉州)에 나아가 난(亂)을 평정하는데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워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가 되었다. 이어서 서북변(西北邊)의 건주위(建州衛 : 만주땅)의 여진족(女眞族)을 정벌할 때 우상대장(右廂大將)이 되어 여진족장 이만주(李滿住)를 참살하고 공을 세워 돌아와 적개공신(敵愾功臣) 의산군(宜山君)의 호를 받고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으며 이듬해 다시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1468년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하고 이어 병조판서로 발탁되었으나 한명회(韓明澮) 등 훈신들에 의해 해직되어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밀려났다. 예종(睿宗)이 즉위(卽位)한지 얼마 안되어 공이 대궐 안에서 숙직하던 어느 날 밤 혜성(彗星)이 나타난 것을 보고 말하기를 「혜성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포치(布置)하는 형상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평소 남이의 재능과 명성을 시기하던 유자광(柳子光)이 이 말을 엿듣고 남이가 반역을 꾀한다고 아뢰어 강순(康純) 등과 함께 주살(誅殺)되었고 그 때 공의 나이 28세였다. 1818년(순조 18) 관작(官爵)이 복구되었으며 충무(忠武)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고 뒤에 창녕의 구봉서원(龜峯書院), 용산의 용문사(龍門詞), 성동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다.
묘소는 화성군 비봉면 남전리 대장등(華城郡 飛鳳面 南田里 大將嶝)에 있는데 자손이 없어 돌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6대 방손 약천(藥泉) 구만(九萬) 공이 수묘(修墓)하였다. 1969년에 족후손(族後孫) 남정사(南廷四)씨, 남영우(南永祐)씨가 정성껏 치산을 하고 1971년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로 지정되어 화성군수(華城郡守)가 묘비를 세우게 되었다. 구봉서원(龜峰書院)은 없어지고 사당은 지금 소간묘(昭簡墓 의산위공 사당)에 함께 모시어 아우되는 군수 초공(郡守 公)의 자손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73년 3월 충북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忠北 陰城郡 笙極面 防築里)에서 공의 묘소로 이부(移 )하였다. 배위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좌의정(左議政) 익평공(翼平公) 람(擥)의 따님과 고성이씨(固城李氏) 서윤(庶尹) 호연(浩然)의 따님이다.
일찍이 권람(權擥)이 사위를 고르는데 공이 청혼하였다. 권람(權擥)이 점을 치니 공이 젊어 죽을 것이라 하였다. 또 자기 딸의 수명(壽命)을 보게 하였더니 수명은 매우 짧고 자식도 없으니 그 복만 누리고 화는 보지 않을 것이라 함으로 혼인을 하였다 한다. 공이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사형을 당했을 때 권람(權擥)의 딸을 공이 귀신을 쫓는 방법으로 살려 내어 혼인이 성사되었다고 전해진다.
「백두산석마도진(白頭山石磨刀盡)이오 두만강수음마무(豆滿江水飮馬無)라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이면 후세수칭대장부(後世雖稱大丈夫)랴」
라는 시(時)는 명장(名將)으로서의 웅지(雄志)를 엿보여주는 유명한 시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공이 6세 때 마당에서 놀고 있노라니 일가집 계집종들이 나와 기둥 옆에 앉아 있는 것을 기둥을 들어 치마폭에 꽂으니 종들이 가려고 하나 일어날 수 없어 괴이하게 여기니 모부인이 웃으며 아이 장난이라 하고 꾸짖고 기둥을 놓아주게 하였다 한다. 13세때에는 호남(湖南)에서 가져올 물건이 있는데 하인이 사납게도 호한(豪悍 : 사납고 거센자)들이 말을 듣지 않거늘 스스로 가보니 노비들이 바꿔치려다 그 위엄을 보고 감히 영(令)을 어기지 못하였으며 면포(綿布) 수백 필을 거두어 싣고 돌아올 때 날이 저물어 인가가 없는데서 길을 잃고 있노라니 숲 사이에서 한 아이가 나타나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으니 따라오라 하거늘 공이 6, 7리 따라갔더니 산을 돌아 골짝에 큰집이 있는데 관청과 같고 당상에는 늙은 괴수가 앉았는데 예쁜 계집이 곁에 섰고 많은 사람이 손님 접대하기를 구면(舊面)같이 하되 몹시 수상하더니 동자로 하여금 별채로 데리고 가 자려고 할 때 소녀가 나와 시중하더니 동자로 하여금 별채로 데리고 가 자려고 할 때 소녀가 나와 시중하더니 밤이 깊어짐에 계집이 귀에 대고 하는 말이 나는 양가집 딸로 이곳에 강제로 끌려왔는데 이 집주인은 큰 도적으로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지나가는 상인을 끌어들여 죽이고 재산을 빼앗는 무리로 낭군의 하인은 독주를 먹여 땅속에 가두고 짐은 다 곳간에 넣었으며 객이 잠드는 것을 기다려 목을 조르거나 술을 퍼 먹이거나 독차나 비상을 태워 쏘이게 하고 소녀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는데 낭군을 뵈오니 인걸(人傑)같아 이를 고하니 살길을 도모하라 하거늘 공이 냉수를 많이 떠오게 하고 옷을 찢어 신들미를 하고 귀와 입을 막고 물을 버리고 자는 체 하니 소녀가 나간 뒤에 연기가 스며들어 숨이 막힐 지경이나 공은 끝내 무사하였으며 밝을 무렵 한 도적이 죽었나하며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공이 발로 걷어차고 또 들어오는 자를 걷어차 연거푸 세 놈을 죽이니 적이 소리를 지름에 두목이 놀래어 일어나거늘 공이 뛰어 들어 두목을 죽이니 도적 무리가 크게 놀라 담을 뛰어 넘거늘 주먹으로 수십 명을 때려잡으니 도적무리가 꼼짝 못하였다. 이에 공이 당상에 올라가 그 무리를 다 불러놓고 못된 놈은 죽이고 나머지는 집으로 돌려보내고 곳간의 물건을 일일이 적어 관청에 바치고 자기 짐만 챙기어 돌아가니 이 일이 나라 안에 소문나 모두들 남장군이라 하였다 한다.
15세 때에는 길에서 노닐다가 한 게집이 이고 가는 박물짐 위에 분을 바른 여귀(女鬼)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괴상히 여겨 따라가 본즉 한 대가집으로 들어가더니 별안간 곡성(哭聲)이 나매 사연을 물어본즉 작은따님이 죽었다하거늘 내 들어가 보면 살릴 수 있으리라 하고 들어가 보니 분귀(紛鬼)가 낭자(娘子) 가슴을 타고 있다가 공(公)을 보고 달아나 낭자가 살아나고 공이 나옴에 낭자가 다시 죽고 공이 다시 들어가면 또 살아나는지라 공이 그 박물짐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홍시(紅枾)인데 낭자가 먼저 먹고 숨이 막혀 죽었다하니 공이 사기(邪氣)를 다스리고 약을 주어 구하니 이는 좌의정(左議政) 권람(權覽)의 4녀다. 권공이 그 일을 기이하게 여겨 정혼(定婚)코자 이를 점치니 이 사람이 반드시 죄사(罪死)하리라 하고 그 딸의 명을 점치니 복자(卜者) 말하되 그 명은 극히 짧고 또 아들이 없겠으나 복은 누리되 화는 보지 않겠으니 사위를 삼음이 옳다하여 이에 따랐는데 과연 공보다 수년 먼저 돌아가셨다. 권공이 타고 다니는 말이 있는데 다른 사람은 걷어 채이고 타지 못하나 공은 이 말을 타고 박연(朴淵)에 갔다 반나절에 돌아왔는데 말의 땀이 장(奬) 흐르듯 하였으며, 공이 권공에게 말하기를 이 말은 옹(翁)은 타되 약하여 전쟁에는 쓰지 못하겠다 하며 후에 양성(陽城)길에서 소금장사를 만나 마른 적마(赤馬)를 비싼 값에 사들이니 환란(患難)이 있을 때마다 그 완급(緩急)에 따라 한번 울고 두 번 울고 세 번 울어 깨닫게 하였다 한다. 17세에 등과(登科)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는데 그 때 호랑이가 성안에 뛰어들어 사람을 해치나 도리가 없는지라 상(上)이 걱정하여 이를 잡을자가 누구냐 하니 남이(南怡)가 심여 세에 큰 도적을 죽였으며 날래고 활을 잘 쏘니 이 사람이면 가하리다 하니 상께서 허락하시고 공에게 명하시니 공이 적마(赤馬)를 타고 종남(終南) 밖 기슭에 숨어 있는 호랑이에게 달려들어 한 대 쏘니 뒤넓적다리에 맞았으나 소리만 지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또 한 대 허리를 맞추니 호랑이의 울음은 골을 진동하며 움직이지 않는 것을 또 한 대 허리를 맞추니 호랑이의 울음은 골을 진동하며 곧 바로 공에게 대드는 것을 말을 달려 피하며 돌아서서 한 대를 쏘니 화살은 호랑이 입으로 들어가 꼬리로 꿰뚫으니 호랑이는 더욱 노하여 크게 울부짖는 것을 공이 다시 긴 창으로 찔러 죽이니 삼군(三軍)이 넋을 잃고 보는 자 놀라 물러났으며 상은 크게 기특하게 여겨 특명으로 초탁(超擢 : 남을 뛰어 넘어 뽑아 씀)하였다 한다.
길주(吉州)의 어떤 파보(坡堡)를 지나는데 둑 서쪽 돌벼랑이 수십 길인데 그 속에 요마(妖魔)가 있어 사람을 해쳐 백성들이 크게 두려워한다 하거늘 장군이 철추(鐵推)로 쳐부수니 다시는 요마가 그쳤다 하여 이 파보를 장군파(將軍坡)라고 한다고 한다. 유자광(柳子光)이 장군을 시기하여 모반(謀叛)한다 하고 백두산시(白頭山詩) 몇 자를 고쳐 그 증거라 하여 국문(鞠問)을 받게 됨에 공이 말하기를 「신이 어려서부터 활과 말로 일삼더니 졸지에 변경에 일이 급하여 몸으로써 나라에 바치니 신의 본래의 뜻이오. 신에게 두 마음이 있었다면 군사를 거느리고 밖에 있었지 돌아와 오늘을 기다렸겠나이까」하고 5일을 매맞고 담금질해 몸에 살이 없고 뼈가 부러졌으나 꿇어앉아 몸을 허트리지 않았다. 누구하고 했느냐 함에 강순(康純)을 부릅떠 보며 「강순과 같이 했나이다」하니 강순이 영상(領相)으로 상을 모시고 옆에 있다가 끌려 내려와 고문을 당하매 순이 돌아보고 「군(君)과는 아무 원구(怨溝)가 없는데 나를 끌어넣느냐」고 하니 장군이 웃으며 「공이 수상이 되어 나의 무죄를 구하지 못하니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하니 강순이 묵묵하였다. 강순의 나이 80이라 매를 못 이겨 이(怡)의 말 대로라 하고 장군과 같이 죽음을 당하였다.
세상에 전하기를 장군(將軍)을 처음 잡았을 때 유자광(柳子光)이 그 힘을 염려하여 쇠사슬로 얽어매고 나무로 울타리 하여 갔는데 다 가서 장군이 몸을 떨쳐 일어나니 쇠사슬이 도막이 나고 곧 일어나 지붕에 올라가 소리 높여 「나의 구부림을 하늘이 보고 계시다. 내 형(刑)을 받지 아니하면 누구를 어찌하랴. 내 이렇게 하는 것은 젊은이로 하여금 나의 힘이 죽지 않을 수 있음을 알게 함이라. 군명(君命)으로 죽는 것이나 한스러운 것은 대장부가 유자광과 같은 조무래기에게 죽는 것이다」하니 그 자리에 있던 유자광이 머리를 움츠리고 손가락을 깨물며 떨었다 한다. 공이 내려와 국문(鞠問)을 받음에 눈을 감고 혀를 깨물며 떨었다 한다. 공이 내려와 국문(鞠問)을 받음에 눈을 감고 혀를 깨물며 매를 맞기를 큰 나무로 만든 사람같이 하여 통성(痛聲)을 내지 않았다 한다.
세조 3년(1457), 17세의 어린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남이장군은 무예에 뛰어나고 성격 또한 강직하여 세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이시애의 난(1467)을 평정하고 여진족 정벌에도 앞장섰던 남이장군은 27세란 나이로 병조판서의 자리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남이장군을 시기 질투하던 세력들이 세조가 죽고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를 모함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468년, 남이를 시기했던 유자광의 무고한 모함으로 역모를 도모했다는 누명을 쓰고 예종원년에 주살되어 역사속에 영원히 지워질수 없는 아까운 희생자로 기록되었다.
유자광의 시기심으로 인해 어이없이 쓰러져간 남이장군은 순조 18년(1818)에 이르러서야 관직이 복직되고 충무라는 시호도 받게 되었습니다.
장군이라는 호칭과 명성에 걸맞지 않게 묘소는 초라한 편입니다. 묘역은 사성으로 둘러쌓여 있고 봉분을 중심으로 앞에는 상석이, 왼편에는 묘비가 있고 좌우에는 망주석 한쌍이 세워져 있습니다. 남이장군이 처음부터 무관으로 벼슬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장군석이 아닌 문인석으로 석인상을 마련한 점이 특이합니다.
아이는 자라면서 남달리 영민하고 비범했습니다. 17세에 무과에 장원급제를 했으며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여진족을 토벌하면서 세조의 1등공신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남이장군입니다. 그는 26세 때에 병조판서까지 지냈지만 한명회와 신숙주 등에 의해 밀려났습니다. 28세 때에는 유자광의 모함으로 역모의 주모자로 몰렸습니다. 남이장군을 모함한 유자광은 그가 여진족 토벌 때에 지었던 시를 고쳐서 예종에게 증거물로 제시했습니다.
白頭山石磨刀盡 |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豆滿江水飮馬無 | 두만강의 물은 말먹이 물로 다 없앴네. 男兒二十未平國 | 사내 나이 이십에 나라를 평안케 하지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 | 훗날 그 누가 사내대장부라고 일컬으리오.
이것은 남이장군이 여진족을 토벌한 후 두만강 변에서 읊은 시입니다. 사내대장부로서의 기개를 읊은 시인데, 유자광은 ‘未平國’을 ‘未得國’으로 고쳐서 남이장군이 역모를 꾸몄다고 주장했습니다. ‘나라를 평안케 하지 못하면’이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둔갑하면서 남이장군은 급기야 한강변 새남터에서 처형을 당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참으로 원통하게 죽은 남이장군입니다. 따라서 그에 얽힌 전설들이 사람들 사이에 수없이 생겨났습니다. 그를 신이나 용장으로 추모하는 전설이 있는가 하면 그를 요괴로 모함하는 전설도 많습니다. 이번에 소개한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에 있는 백족산 지네 전설은 남이장군을 태생적으로 모함하는 전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산이 아름답고 신비하여 비령산(秘靈山)이라고도 부른다. 산아래는 무성한 잣나무로 뒤덮여 있고, 봉우리는 뾰족하다. 비탈진 산허리마다 여기 저기 인가가 보이고 안개마저 자욱하다.한마디로 여기가 무릉도원(武陵桃園)인가 의심이 갈 정도로 한유하여 이곳이 신령한 마을 비령이라는 사실이 실감나게 느껴진다.
이곳이 신령하여 산천이 영험하다는 소문이 나자 전국에서 많은 이들이 모여들기도 하였으며, 조선조 7대 임금인 세조(世祖)는 어린 단종(端宗)을 밀어내고 왕위에 올랐으나 못된 병에 걸려 가진 고생을 다하다가 이곳에 내려와 산천에 치성을 드린 후 병이 나았다는 사랑 방 이야기도 전한다. 세조가 어느해 겨울에 이곳으로 돼지 사냥을 나섰는데, 산돼지들이 나타났다가 언덕을 넘어 도망쳤는데, 산돼지들이 숨어 버린 곳을 은저막(隱猪幕)이라 부른다고 한다. 현재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경기도 향토사 자료 가운데서 가평군편 전설자료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신비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상면 비령리(秘靈里) 부락과 남면 비러터(秘靈垈 금대리) 주민들은 무슨 이유인지 분명치는 않으나 그 부락민이 타향에 이사가서 살면 걸식(乞食)을 하게 되고, 타향에서 이 부락으로 이사해 오면 반드시 부자가 된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이곳으로 이사해 와서 사는 이들이 많아졌음은 물론이요, 모두 부자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축령산! 고려말 이성계가 등극하기전 사냥하러 갔다가 한 마리의 짐승도 잡지 못하고 돌아오자 몰이꾼들이 산제를 올려야 한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원이름은 비령산이었다고 한다. "빌"축자를 새김으로 읽게 되어 있는 이두였는데 이를 모르고 일제시대부터 축령산으로 써왔다고 한다. 정상 동북쪽과 동쪽에는 비령이라는 지명이 남아있기도 한다고 한다.
암릉산행의 아슬아슬한 기분을 만끽하면서 정상으로 가면, 경기 중북부의 거의 모든 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장관을 느낄 수가 있다. 정상부가 바위로 되어 있는 축령산을 등산하면 만나게 되는 유명한 바위들이 있다.
예부터 골이 깊고 산세가 험해 특히 독수리가 많은 산의 특성 때문인지, 독수리 머리를 닮았다는 수리바위!
조선 세조때 최고의 명장이었음에도 역모로 인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남이장군이 지형지물을 익히고 국사를 걱정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자주 찾았다는 이유로 붙여진 남이바위!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남아 스무살에 나를 평정치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랴" 남아의 큰 뜻을 품은 남이장군의 시를 되내여 보면, 축령산의 기세와,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보고 나온 시답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산이름 중에도 축령산처럼 원이름과 틀리게 이미 굳어져 버린 이름이 있고, 남이장군처럼 최고의 명장이였음에도 역모를 통해 억울한 죽음으로 기개를 펴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안타까운 역사적 사실도 있다.
남이바위를 보면서, 혹시나, 조선시대 역모로 형장의 이슬이 된 남이장군의 이야기는 축령산의 일제시대에 "산"이름이 원이름과 틀리게 불려져서 굳어져 버릴 것에 대한 예견이 아니었나 하는 상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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