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 평전
이동민
내가 마광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80년 대에 현대문학지에서 마광수의 글을 읽고서 이다. 수필란에 그의 글이 실려 있었다. 그때는 수필이라면 서정성이 짙었고, 일상에서 소재를 가져온 가벼운 글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마광수의 글은 달랐다. 지적 무게가 느껴졌다. 나의 취향에 자극을 주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우리나라는 군사정권이 오래 통치하면서 보수 이념이 지배했다. 북쪽의 사회주의 정부가 성의 자유(?)를 내세운다고 하여, 우리는 성에 대해서는 더 엄격한 보수성향을 지켰다. 마광수가 ‘즐거운 사라’를 발표하여 단단한 보수의 울타리에 불을 질렀다. 여대생 사라의 자유분방한 성적 방종은 한국사회가 경련을 일으키도록 했다. 1992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세계 사조는 성의 개방이 홍수를 이루면서 성인은 성인용 생활을 향유할 권리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선데이 서울같은 시시한 주간지와 미국의 플레이 보이 잡지도 우리나라에서 넘쳐나고 있었다.
그런데도 입을 가진 모든 지식인들이 마광수를 성 도착증 환자로 몰아붙였고, ‘메시껍다’라는 표현까지 하면서 그를 왕따 시켰다. 정부는 강의실에서 그에게 수갑을 채워 데려가서 구금했다. 그러나 책은 날개가 돋힌 듯이 팔려나갔다. 시대상을 보여준 것이 아니었을까. 다른 나라에서는, 특히 일본에서는 이 보다 더 선정적인 책도 제한 없이 출간되고 있었다. 성의 개방은 막을 수 없는 시대상의 흐름이었고, 우리 사회도 이미 그 물길 속에 잠겨 있었다. 그래도 한 줄기의 빛이라면 연세대 국문과 생들이 ‘마광수는 옳다’ 란 책을 발간하여 그를 옹호한 것이었다.
마광수 자신은 한국 문학의 지나친 경건주의와 엄숙주의에 반기를 든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 나는 수필을 쓰면서 수필의 평에 ‘글은 사람이다.’를 인용하여 도덕적인 글을 써야 인격자로 대우하던 풍조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마광수가 말한 경건주의, 엄숙주의란 말에 동조하였으므로 마광수를 좀 더 알아 보고 싶었다. 그는 28세 나이로 대학사회(홍익대)에 진입하였다. 한국의 주류사회에 편입함으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얼마든지 누릴 수 있었는데도 스스로 고난의 길을 선택한 것이 나의 흥미를 끌었다.
또 다시 세월이 흘러 2000년 대가 되었다. 구금에서 풀려나서 대학에도 복직했지만, 교양강좌만 맡기면서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세상도 마광수를 잊어갔다. 마광수가 성 이야기의 소설을 써서 세상이 알아 준 것이 아니고, 그런 소설을 썻다고 구속하였으므로 마광수의 이름을 불러주었던 것이다. 예술계에서는 좌파들이 득세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마광수보다 더 한 표현을 했다. 진보세력이라는 힘 앞에서는 지식인들은 침묵했다. 이념이 아닌 순수한 예술인으로서의 마광수를 진보세력도 기억해줄 리 없다.
나는 마광수를 좀 더 알아보고 싶었다.
그는 춘천에서 태어나서(1951) 겨우 돌의 나이쯤일 때 아버지가 종군기자로 전선에 나가 전사했다. 어머니는 서울로 이사와서 마광수를 키웠다. 홑어머니 밑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는 병약하여 학교에서 심한 따돌림을 받았다. 나는 유년시절의 경험이 주류 사회에 대하여 저항의식을 키웠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고 있었으므로 마광수가 쓴 글의 내용보다는 왜 그가 주류 사회에 저항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 성장하였을까 하는 면에서 ‘마광수 읽기’라는 글을 써서 발표했다. 내 글은 마광수 문학 읽기가 아니고, 마광수 읽기인 셈이었다. 내 글을 읽는 사람은 극소소일 것이고, 마광수도 읽지 않으리라 싶어서 그에게 내 글을 직접 보냈다. 그러자 그는 직접 사인을 한 자기 책 ‘’나는 헤픈 여자가 좋다(2007)‘을 보내면서, 내가 자기를 가장 정확하게 보았다고 말을 했다.
그가 보낸 에세이집은 책의 제목처럼 야한 내용이 아니었고, 그의 문학적 주장이 많이 담긴 책이었다. 이 책은 거의 팔리지 않는다고 했다. 100만 부 이상이나 팔렸다는 ’즐거운 사라‘가 나온 지 15년의 시간이 흘렀다. 마광수는 팔리지 않는 책으로 곤궁하게 살아야 했다. 이제는 마광수라는 이름은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대중 뿐만이 아니고, 마광수의 주장에 시비를 거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헤픈 여자가 좋다‘라는 말은 ’사랑이 헤픈‘이라고 설명했다. 책의 내용은 제목만큼 야한 기대를 채워주지 않았다. 성의 솔직한 표현을 주장하는 정도의 에세이집이라고 하겠다. 노골적으로 야한 책이 아니라서 팔리지 않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여러 기록을 뒤적여보니, 마광수는 무시당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서 복직했던 대학에서도 사표를 던졌다. 그 후로 경제적 어려움으로 아주 힘들었다는 말을 들으니, 대학에 그냥 남아 있지, 뛰쳐나오기는 왜 나와, 하는 마음이다. 이것은 세상을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의식구조일 것이다. 속물적이겠지만, 나는 정상적인 인간이 갖는 의식구조라고 생각한다.
춘원 이광수 평전을 쓸 때는 그는 어쩌면 속물적인 삶을 살았다 싶었지만, 나도 그렇게 산다 싶어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마광수를 보면 나는 그처럼 살 용기가 나지 않는다. 홑어머니 밑에서 힘든 유년을 보낸 그의 삶과, 친척 집을 떠돌아다니면서 살았던 춘원의 삶이 달라서 라고 생각해 본다. 이광수는 육체적으로 편안한 삶을 선택하였다면, 마광수의 육체적 삶은 고통스러웠지만 왕따를 시킨 사회에 대한 복수라 싶어서 정신적으로는 즐겼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나도 춘원처럼 고통스러운 정신적 삶을 선택하기보다는 육체적인 편안함을 선택하였으리라.
야한 글을 쓰게 된 이유를 마광수의 글로 직접 살펴보자.
“우리는 속으로는 자유로운 사랑과 섹스를 동경하면서도 겉으로는 그것을 방종이라고 매도한다. 자유로운 쾌락문화를 바라면서도 그것의 실현을 은근히 두려워 한다. 무의식과 의식의 이러한 괴리현상은 결국 우리를 불행으로 이끈다.”
“명실상부한 표현의 자유와 정직한 쾌락추구의 자유가 한시바삐 이루어져야 한다. 자유를 외치면서도 자유를 억압하는 지성계의 기득권자들은 엎드려 반성하고 스스로 벌거벗은 알몸을 드러내야 한다.”
<나는 헤픈 여자가 좋다의 머리말에서>
그가 쓴 위의 글에서 ’자유를 억압하는 기득권자들은 반성하고‘ 라고 썼다. 우리나라 지식인의 이중적인 행태를 비난한 것이다. 그가 ’즐거운 사라‘를 쓸 때도, 그리고 이때도 일관되게 주장하는 기득권자들의 이중성이다. 의식과 무의식을 분리시켜 우리 문학을 경건주의와 엄숙주의로 내몰았다고 보았다. 그는 일찍부터 우리 문학이 경건주의와 엄숙주의를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가 대구에서 문학강연 모임에 참여하면서 일종의 이단아일 수도 있는 마광수를 초청하여 문학강연을 듣고 싶었다. 내 생각에 대구 문단은 너무 보수적이어서 그의 일탈된 주장을 들어보고 싶었다.
내가 전화를 드렸다. 문학강연의 강사로 초빙하고 싶다고 전했다. 그는 고맙게도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말씀은 고맙지만, 내가 지금 병원을 여섯 군데나 다니고 있습니다. 건강상 도저히 응할 수가 없습니다.‘가 그의 대답이었다. 건강이 회북되면 저의 청을 수락해주시기 바란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는 비보를 들었다(2017). 생활고와 우울증으로 고통받고 있었다고 했다. 병원을 여섯 군데나 다닌다는 그의 말에는 우울증도 있었었나 보다.
이 글을 쓴다고 하여 내가 마광수를 인간적으로 잘 아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팔리지 않는다고 말한 ’헤픈 여자가 좋다‘는 나의 서가에 꽂혀 있다. 한 번씩 꺼내서 읽기도 한다.
2022.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