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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령이씨 인자 조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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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산책 스크랩 스스로에게(자이(自貽)-이집(李集)
나그네 추천 0 조회 54 08.01.08 18: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대나무 박물관의 석양

 

자이(自貽)-이집(李集)

老來步步漸欹斜

노래보보점의사

 

行止還如狗喪家

행지환여구상가

 

床上文書將底用

상상문서장저용

 

如今抱病眼昏花

여금포병안혼화

 

늘그막에 걸음걸이는 점점 기우뚱하려하고

 

가고 머무름은 오히려 상가의 개 신세로다

 

책상 위의 문서는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

 

지금은 병들고 눈에 흐릿한 꽃이 핀 것 같다오

 

 

위 글에 나오는 상가지구 (喪家之狗)라는 말의 유래는

상갓집 개라는 뜻으로, 초라한 모습으로 떠돌아다니며 천대받는 사람을 비유한 말.

[유사어] 烏面鵠形(오면곡형)까마귀 얼굴에 따오기  같은 형상. 주려서 매우 수척한 사람.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말 공자(孔子)는 노(魯)나라 정공(定公) 때 대사구(大司寇:지금의 법무부 장관)를 맡았지만 왕족 삼환(三桓)에게 배척당해 노나라를 떠났다. 이후 공자는 수십 년 동안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어떤 군주도 그를 받아 주지 않았다. 공자가 56세에 정(鄭)나라로 갔을 때 이 말(喪家之狗)이 생겼다고 한다.

萬人의 존경(尊敬)을 한 몸에 받는 공자가 상가(喪家)의 개(狗) 같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공자는 불우(不遇)한 일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세 번째 첩(妾)의 소생에 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으며 아내는 가출했고 아들은 자기보다 먼저 죽었다.

후에 14년 동안 무려 여섯 나라를 떠돌아 다녔지만 성공은커녕 심한 고초(苦楚)만 당했다고 한다.

공자가 정(鄭)나라를 갔을 때 제자들과 길이 어쩌다가 어긋나 동문에서 제자들이 찾아오기만을 막연히 기다리고 있었다.이때 정나라 어떤 사람이 스승을 찾아다니는 자공(子貢)에게 자신이 본 공자의 모습을 말했다. "이마는 요 임금과 같고, 목은 순·우 임금 때의 명 재상 고요(皐陶)와 같으며, 어깨는 자산(子産)과 같았소이다. 그러나 허리 밑으로는 우 임금보다 세 치나 짧았고, 그 초췌한 모습은 마치 상갓집 개(喪家之狗)와 같았소이다."

자공은 스승임을 알아차리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공자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공자에게 들려주니 공자는 웃으면서 "외모는 그런 훌륭한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상갓집 개와 같다는 말은 맞다맞다."라고 말하였다.

 

<원문>

鄭人或謂子貢曰 東門有人한대“其顙似堯요 其項類皐陶요 其肩類子産이라.

정인혹위자공왈 동문유인한대“기상사요요 기항류고도요 기견류자산이라.

 

然自腰以下는 不及禹三寸이요 壘壘若喪家之拘라. ”子貢以實告孔子하니

연자요이하는 부급우삼촌이요 루루약상가지구라. ”자공이실고공자하니

 

孔子가 欣然笑曰“形狀未也라. 而似喪家之拘는 然哉로다. 然哉로다. 라고 하였다.

공자가 흔연소왈“형상미야라. 이사상가지구는 연재로다. 연재로다. 라고 하였다.

 

[출전]사기(史記)공자세가(孔子世家). 공자가어(孔子家語)곤서편(困誓篇)

 

이집(李集 1314∼1387). 고려 말기의 학자·문인. 본관은 광주(廣州). 초명은 원령(元齡). 자는 호연(浩然), 호는 둔촌(遁村). 광주 향리 당(唐)의 아들이다.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문장을 잘 짓고 지조가 굳기로 명성이 높았다.1368년(공민왕 17) 신돈(辛旽)의 미움을 사 생명의 위협을 받자, 가족과 함께 영천으로 도피하여 고생 끝에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1371년 신돈이 주살되자 개경으로 돌아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여주 천녕현(川寧縣)에서 전야(田野)에 묻혀 살면서 시를 지으며 일생을 마쳤다.그의 시에는 꾸밈과 우회보다는 직서체(直敍體)에 의한 자연스럽고 평이한 작품이 많다. 그는 당시 임심문(任深文)을 비롯한 60명에 달하는 많은 인물들과 시로써 교유하였다.특히,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과의 친분이 두터웠다.문집 부록에 실린 삼은(三隱)의 기(記)·서(序)·서(書)는 그와 삼은과의 관계를 잘 알 수 있게 하여준다.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그가 조선조에 벼슬을 지냈다고 잘못 기록되어 있는데, 1611년(광해군 3)8대손인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의 주청이 받아들여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바로잡혀지게 되었다. 광주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저서에 둔촌유고(遁村遺稿)와 시집 둔촌잡영(遁村雜詠)이 있다.

 

공자는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부여귀, 시인지소욕야. 부이기도득지, 부처야.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빈여천, 시인지소오야, 부이기도득지, 부거야.

 

‘富貴(부귀)는 누구나 원하지만 정당한 방법이 아니거든 갖지 말 것이며 貧賤(빈천)은 누구나 싫어하지만 떳떳하다면 피하지 말 것이다.라고

 

또 김시습(金時習)은 자이(自貽)라는 글에서

 

處士本閑雅 早歲好大道

처사본한아 조세호대도

 

志與時事乖 紅塵跡如掃

지여시사괴 홍진적여소

 

少小遊名山 甿俗不交好

소소유명산 맹속부교호

 

晚居瀑布傍 欲作淸溪老

만거폭포방 욕작청계노

 

世人那得知 尋常稱潦倒

세인나득지 심상칭료도

 

處士亦不猜 每被風花惱

처사역부시 매피풍화뇌

 

隱顯或無時 期往蓬萊島

은현혹무시 기왕봉래도

 

처사는 본래 한적하고 맑아어린 나이에 큰 도를 좋아했다

품은 뜻이 세상과 어긋나세상 자취는 썰어버린 듯하도다.

젊어서 명산에 조금 놀다가무지한 속인들 좋아하지 않아

늙어서는 폭포 가에 살면서맑은 개울의 늙은이 되고 싶었다.

세상 사람들 어찌 알리오.흔히들 신세 망쳤다고들 말한다.

처사도 시기하지 않고매양 바람과 꽃에 고뇌를 당한다.

때 없이 나타나고 숨어 다녀도신선 세상 봉래도로 가기를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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