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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 할배가 이 세상을 버렸다 이제 누가 있어 이 고된 사람들의 삶을 이끌어나갈 것인가 도깨비 할배가 진짜 도깨비 되어 방망이를 친다 나, 채규철이 두 번 죽었으니 이제 모든 한국인이 모세가 되어야 한다고 비록 내 몸은 죽었으나 내 마음은 이 세상에 남겨 놓았으니 모든 한국인의 가슴에 다시 태어날 거라고 나, 채규철은 이제 이 세상의 햇살과 비와 바람이 되어 만인의 가슴에 환한 웃음의 씨앗을 뿌릴 거라고" -이소리, '한국의 모세-채규철 박사 영전에' 모두 '나의 삶'을 '우리의 삶'으로 바꾸어낸 채규철 선생
"영혼은 영원한 씨알이다,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덴마크의 동화작가 H. C(Hans Christian) 안데르센(1805~1875)의 무덤 비문에 적힌 글을 삶의 주춧돌로 삼아 평생을 그늘에서 일했던 채규철 선생. 서른 한 살에 뜻밖의 교통사고로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30여 차례의 수술을 견뎌내면서도 '나의 삶'을 '우리의 삶'으로 바꾸어낸 한국의 모세. '도깨비', 'ET 할아버지', '한국의 모세'로 불리며 우리나라 사회복지운동과 대안교육에 평생을 바친 채규철(69, 두밀리자연학교 교장) 선생이 지난 13일(수) 밤 1시45분께 심근경색으로 숨졌다. 이때 선생의 호주머니에는 14일(목) 마산에서 열리는 시인 이선관(1942~2005) 1주기 추모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김해공항으로 가는 비행기표가 들어 있었던 상태. 평소 채규철 선생과 가까이 지내며, 지난 9월 중순께 선생의 마지막 에세이집 <소나기 30분>을 펴낸 김윤태(49, 도서출판 선 대표)는 "살아생전 채 박사는 뜻밖의 사고를 당해 형편없이 일그러진 얼굴로 엄청난 시련을 겪어내면서도 늘 남을 아끼고 사랑했던 분"이라며, "그 불편한 몸과 시력을 가지고도 전국 곳곳을 누비며 우리 사회와 사람들의 고단한 삶에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고 말했다. 1968년 10월 30일, 채규철의 운명은 바뀌었다
채 선생은 그렇게 5년 동안 농촌운동을 하다가 덴마크 외무부 산하에 있는 개발도상국가 기술협력처의 초청을 받아 국비 장학생으로 1년 동안 덴마크 하슬레브 대학을 수료한다. 이때 선생은 덴마크의 오늘이 있기까지의 뿌리가 된 국민고등학교 운동과 협동조합운동에 대해 공부한 뒤 1968년 우리나라로 돌아와 장기려 박사와 함께 우리나라 의료보험운동의 뿌리인 '청십자 의료협동조합'을 만들어 전무를 맡는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채규철 선생의 앞길에는 찬란한 희망의 빛이 비쳤다. 하지만 그해 10월 30일, 그날은 선생의 운명이 바뀐 무서운 날이었다. 그날, 선생은 김해평야에 있는 양계장을 견학하고 부산 토성동에 있는 기독교사회관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으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다니는 차도 많이 없었다. 가끔 모래를 실어 나르는 트럭과 몇 시간에 한 대씩 다니는 시내버스뿐이었다. 근데, 부산 하단으로 돌아오는 산비탈에서 갑자기 선생이 탄 봉고형 독일제 폭스바겐이 앞머리가 기우는가 싶더니 1m 언덕 아래로 구르기 시작했다. 그때 하필이면 차 안에 영아원 방바닥을 칠하기 위한 시너가 큰 통으로 두 통이나 있었다. 그렇게 차가 뒤집어지자 시너가 선생의 온몸을 적셨고, 급기야 '펑' 하고 폭팔하면서 불길이 선생의 온몸을 불태웠다. 절망을 희망으로, 패배를 승리로 바꾼 남자
그날, 채 선생은 논에서 일하던 농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살아난다. 하지만 지나는 택시가 불에 까맣게 탄 선생을 태워주지 않았다. 그렇게 30여 분이 흘렀을까. 갑자기 채 선생의 오른쪽 눈앞이 숯불처럼 빨갛게 되더니 사르르 꺼져 버렸다. 그리고 정신을 놓아버렸다. 그렇게 온몸에 45% 정도의 화상을 입은 채 선생은 병원으로 옮겨진 뒤 30여 차례에 걸쳐 수술을 받는다. 선생은 수술을 하면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지만 강한 생명에의 집착으로 다시 살아난다. 하지만 귀를 잃었고, 한 눈은 멀고, 손은 갈고리처럼 되고, 얼굴은 도깨비처럼 변했다. 게다가 선생을 지극히 보살피던 아내마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버렸다. 선생은 그때의 참상을 "어린 애들은 나를 보면 귀신 같다고 했고, 아가씨들은 무서워서 도망을 쳤다,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채규철 선생은 굳은 의지력으로 자신 앞에 놓인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낸다. 안병욱(숭실대 명예교수, 철학박사) 교수는 "그는 그러한 몸으로도 전국 곳곳을 다니며 삶을 주제로 한 강연을 했고, 마침내 두밀리 자연학교까지 만들었다"며, "그는 패배를 승리로, 최악의 운명을 최대의 영광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하나의 놀라운 기적이자 정신력의 위대한 승리"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나를 '100원짜리 인생'이라 하지만... "나 채규철은 상당히 유명한 사람이다. 농담 같지만, 대한민국에서 나를 모르면 간첩(?)으로 오해받을 지도 모른다. 학자로 이름이 나서 유명한 것도 아니고 돈을 엄청 벌어서 유명한 것도 아니다. 그럼 어떻게 유명한가? 나는 좀 별나게 유명하다. 우선 내가 '10원짜리 인생'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화폐 가치가 절하되어 '100원짜리 인생'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채규철, 마지막 책 <소나기 30분> 23쪽. 채규철 선생은 갔다. 하지만 선생은 죽어서도 그가 남긴 마지막 책으로 말한다. "내가 다방이나 음식점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즉시 마담이나 종업원들이 다가와 숨돌릴 틈도 없이 잽싸게 100원 짜리 동전 한 닢을 주고는 제발 나가달라며 내 몸을 마구 밀어낸다"고. 그 이유는 채 선생의 흉측한 얼굴을 본 마담이 선생을 손님이 아니라 구걸하러 온 거지로 착각하기 때문. 하지만 선생은 그런 자신을 특권층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그들이 준 100원짜리를 의외의 부수입으로 여기면서 1000원짜리 커피를 마시고 나올 때 900원만 내기 때문. 게다가 어떤 다빙이나 음식점에 들어가면 아예 돈을 받지 않는 곳도 있다. 물론 다음에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라는 단서를 붙히지만. 그러나 선생은 말한다. 남들은 나를 '100원짜리 인생'으로 보지만 나는 '100원짜리'가 아니라 '꽤 비싼 사나이'라고. 왜? 비록 자신의 몰골은 ET처럼 흉측하게 변했지만 지금 있는 자신의 몸에 들어간 돈은 최소한 6000만 원 정도는 들어갔기 때문이다. 선생은 마지막으로 펴낸 수기집 <소나기 30분>에서 물질만능주의에 물든 사람들을 꼬집는다. 한 사람이 사회를 위해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단지 얼굴이 어떻게 생겼느냐에 따라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아주 잘못된 짓거리라고. 채규철 박사, 그는 갔지만 '한국의 모세'로 영원히 살아 있다
이어 그는 1975년에 '사랑의 장기기증본부'를 만들어, 숨을 놓은 지난 13일까지도 그 단체의 이사를 맡고 있었으며, 1986년에는 대안학교 '두밀리 자연학교'를 만들어 교장을 맡았다. 그리고 2001년에는 공동체 평화운동단체인 '철들지 않는 사람들'을 만들어 상임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다. 게다가 죽는 그날까지도 채 박사의 호주머니에는 새마을 연수원 등 전국 곳곳의 수많은 교육현장에서 삶을 주제로 한 강의일정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ET 할아버지' 채규철 박사. 그는 비록 이승을 떠나갔지만 그의 이름 석 자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한국의 모세'로 영원히 살아 있다. 채규철 박사, 그가 살아생전 펴낸 책으로는 수기집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소나기 30분>을 비롯해 수필집 <사람은 두 번 죽지 않는다>, 마틴루터 킹의 설교집 <사랑의 힘>, 마틴루터 킹의 연설집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등이 있다. 고 채규철 박사의 가족으로는 아내 유정희(56)와 아들 진석(인천대 컴퓨터공학과 교수),·광석(국민대 성곡도서관 사서), 딸 송화(대구보건대 겸임 교수)가 있다. 고인의 유해는 16일 아침 8시, 서울 아산병원에서 30분 동안 추모예배를 마치고, 8시 30분 병원을 나서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화장을 한 뒤 성공회 납골당에 모셔진다. |
첫댓글 나도 유선과 신문 지상에서 듣고 봤는데, 인사동이나 낙원동 일대에서 가끔씩 뵙고 맥주도 더러 같이 마셨지요. 선생님의 저서도 받곤 했는데 요즘 젊은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했지요. 삼가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