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추위가 찾아온 11월 2일 어느 조간신문에 게재된 로이터 통신의 전송사진 한 장이 눈길을 끌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조지 H. W. 부시 전 미국대통령, 헬무트 콜 전 서독 총리 세 사람이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기념하는 식장에 나란히 참석한 모습이었다.
세 지도자는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와 이어 소련 해체와 냉전 종식으로 이어진 숨가쁜 역사의 순간을 주도한 인물들이다. 1천8백 명이 참석한 기념식에서 세 사람은 일제히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초래한 평화혁명을 이끈 보통사람들의 용기와 희생을 추모했다.
1982년부터 98년까지 서독 총리를 지낸 콜(79)은 “우리 독일이 역사적으로 크게 자랑할 건 없지만 독일 통일은 자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89년부터 93년까지 미국 대통령을 역임한 부시(85)는 장벽이 붕괴되기 몇 달 전 처벌을 무릅쓰고 동독의 개혁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감행한 동독시민들의 용기를 치하했다. 베를린 장벽이 서 있던 장소 맞은 편 극장에서 개최된 기념식에서 부시는 고르바초프와 콜의 어깨를 두드리며 역사를 만든 순간의 동지들과 재회하니 한없이 기쁘다고 말했다.
2시간 동안 진행된 기념식에서 부시가 유독 감회 어린 말을 했다. 이 역사적 사건을 회상하기 위한 이 모임의 의미는 본, 모스크바 혹은 워싱턴에 있는 게 아니라 너무 긴 세월 동안 천부의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가슴과 마음속에 있다고 그는 술회했다. 이들의 재회 장면은 어떤 장벽도 하나의 독일, 자유로운 독일을 염원하는 꿈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 지도자도 세월과 함께 늙었다. 콜은 휠체어를 탔고 부시도 지팡이에 의지했다. 고르바초프가 그중 가장 건강해보였다.
베를린 시를 둘로 갈라놓았던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은 1989년 무너졌다. 그로부터 11개월 후 독일은 통일되었다.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베를린 장벽을 넘으려다 사망한 사람은 136명이나 된다. 장벽 붕괴 당시 소련 대통령이었고 뒤에 노벨 평화상을 탄 고르바초프(78)는 장벽의 붕괴와 냉전의 종식은 2차대전 이후 지속된 화해노력의 결실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통일 독일을 꿈꾼 시민들이 역사의 영웅이었다며 이전 세대가 동서화해를 위해 기울인 공로를 차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는 장벽 붕괴 당시의 결정적 역할로 지금까지 독일에서 인기가 높다.
그는 또 미국 일각에서 논란이 있으나 베를린 장벽 붕괴와 관련하여 생각해보면 오바마에게 노벨 평화상을 준 건 잘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부시의 전임자 故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냉전 종식에 기여한 공로도 상기시켰다.
1989년 당시 부시는 장벽 붕과 당시 베를린으로 달려가지 않아 약간의 비판을 받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레이건은 장벽 붕괴 2년 전 1987년 서 베를린에서 역사적 연설을 했다. “고르바초프 각하, 장벽을 철거하시오” 고르바초프는 이 일을 상기하는 듯 “그(레이건)의 가장 큰 매력은 진정한 배우였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고르바초프는 당시 反蘇 혹은 反美의 인식에 사로잡혔다면 오늘의 유럽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시 역시 고르초프 찬양에 인색하지 않았다. “역사가들이 미하일의 노고를 인정하리라는데 추호의 의심도 없다. 그는 역사의 소명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방해를 무릅쓰고 개혁, 개방의 약속을 지켜낸 전대미문의 지도자”라고 극찬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마음은 착잡하다. 한반도의 베를린 장벽이라 할 휴전선은 언제 무너질지 아득하다. 잡초 우거진 DMZ를 해체할 주역들의 모습도 아직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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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03일 11:24분 19초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