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으로의 외출
“엄마! 이런 여행은 처음이지?”
나보다 더 들뜬 목소리로 큰 딸이 물었다. 엘에이에서 일주일 동안 열리는 문학 캠프에 참가하기 위해 짐을 싸는 중이었다. 그 애는 소풍 가는 어린아이처럼 들썩거리는 나의 기분을 전화 통화만으로도 옆에서 들여다보듯 알아차렸다. 결혼하자마자 미국에 오고, 아이 낳아 키우면서 여기저기 많은 여행을 했다. 그러나 가족의 일이나, 사업상이 아니라 오직 나만의 일로 혼자 장거리 여행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플로리다는 미국 동부지역에서도 남으로 길게 뻗은 반도라, 우리 집에서 엘에이까지의 거리는 서부와 동부를 대각선으로 잇는 최장 거리다. 싼 비행기를 찾다 보니 중간에 한 번 갈아타야 해서 비행시간만 7시간 반이 걸린다. 엘에이와는 세 시간의 시차까지 있어 돌아올 때는 낮 1시 비행기를 타고 오는데 도착 시간은 그다음 날 새벽 1시가 된다. 이렇게 먼 곳으로 나를 혼자 보내는 것이 영 마음이 안 놓이는지 남편은 ‘내가 운전기사로라도 따라가야 하지 않나?’ 하며 자꾸 내 주변을 맴돌았다. 물론 남편이 같이 가면 여러 가지로 편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 시작하는 사업도 있고, 새 학기가 시작되어 기존의 가게도 바빠 엄두를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이번 여행은 혼자 하고 싶었다. 윤경옥(미국에 오자마자 이곳의 관습을 따라 남편 성으로 지난 30년 동안 불린 이름)이 아닌, kay yun(사업상 편리하게 사용하는 이름)이 아닌 오롯이 허경옥으로 가고 싶었다. ‘허경옥'으로 산 세월 내내 꿈꾸어 온 문학세계, 그 작가들의 모임으로 떠나는 특별한 외출이었기 때문이다.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대도시에는 크고 작은 문인들의 모임이 많이 있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곳은 한인들이 많지 않아 그런 문화생활을 누리지 못하고 살았다. 팬데믹 이후 많은 모임이 zoom으로 전환되면서 드디어 플로리다에 사는 나도 엘에이의 문학모임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연결된 고리로 올 초에 쓴 시가 <미주문학> 여름호에 신인상을 받게 되었다. 미주문인 협회는 해마다 8월 말에 문학 캠프를 열어 그 해 수상한 작가들 시상식도 하고, 한국에서 강사를 초빙해 강의를 듣는 행사를 하고 있었다. 엘에이 사막 지역에 있는 팜스프링 리조트에서 일박 이일의 캠프를 하고, 그다음에는 이박삼일로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문학여행을 함께 떠나는 여정이다. 벌써 수십 년 해오는 행사이지만 나로서는 처음 참가하는 행사다.
이것저것 사업상 벌여 놓은 일들로 마음이 분주했지만, 모든 일정을 앞으로 당기고 뒤로 미루어 나만을 위한 시간을 따로 떼어 놓았다. 나만을 위한 여행.이라고 가만히 속삭여 본다.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얼마나 오랜 세월 잊고 지냈던 단어인가? 나만을 위한 시간, 나만을 위한 여행…
분주한 걸음들이 부드러운 안내 방송의 목소리를 따라 이곳저곳으로 옮겨가는 공항을 천천히 걸어갔다. 일주일 치 옷가지가 들은 여행 가방을 끌며, 한 손엔 향 짙은 커피를 들고. 너무 일찍 나온 탓에 내 비행기 게이트는 한적했다. 대합실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저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들의 여행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까. 노트를 꺼내 이것저것 끄적였다.
엘에이에 도착하니 미주문협 직원이 '허경옥'을 크게 써서 들고 있었다. 문학 캠프장에는 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다. 대부분 엘에이에 사는 사람들이지만, 나처럼 타주에서 온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예전부터 가까이 지냈는지 서로 부둥켜안고 반갑다 외치는 사람들 무리 속에서 뻘쭘하게 서 있는데, 지난 삼여 년 매주 줌으로 만났던 반가운 얼굴 몇이 보였다. 다가가 인사하니 깜짝 놀라며 끌어안는다. 오랜 친구처럼 아는 척을 해도 컴퓨터 속에서만 보던 얼굴과 실제 모습의 차이가 금방 메워지지 않는다. 상대방도 나의 커다란 체구가 상상 밖이었는지 다시 쳐다보며 깔깔 웃는다.
다양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연령대나 직업이나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문학이라는 공통 분모는 그 낯섦을 순식간에 넘어서게 하고 오래된 친구처럼 서로를 부둥켜안게 했다. 누구라도 몇 마디 나누어 보면 낯선 이국땅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한 거친 굴곡이, 우리 자신도 채 익히지 못한 세상 속에서 자녀를 키우느라 우왕좌왕했던 시행착오들이 마치 내 것인 양 커다란 공감대를 이루며 쏟아져 나왔다.
노환의 불편한 몸으로도 마지막이 될지 몰라 참석했다는 시인도 있었다. 지팡이를 의지해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는 모든 일정을 따라 했다. 싱어롱 시간에는 해맑은 소녀의 얼굴로 70년대의 대중가요를 따라 불렀다. 둘러보니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문학 소년 소녀로 돌아가 있었다. 우물안에 깊이 넣어 두었던 꿈을 길어 올리고 있었다. 두 눈에 아련히 젖어 드는 어린 시절의 꿈. 고된 삶의 흔적이 겹겹이 주름으로 앉은 얼굴에서도 두 눈동자는 퍼 올린 꿈으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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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성을 따서 30년 동안이나 불리던 윤경옥으로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사업상 편리하게 사용하던 kay yun으로 참석한 모임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지어주시고 출생신고가 되어있고, 호적에 올라 있는 이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학적부에 실려있었고 졸업장에도 적혀 있던 본래의 내 이름 허경옥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참석하였습니다. 진짜 이름 허경옥이라는 이름으로 꿈길에서나 가꾸던 모임에 수필가로, 그리고 시인으로 참석한 설레는 외출이었습니다. 더 이상의 설명은 군소리입니다. 축하합니다.
따지고 보면 아무리 레이디훠스트를 웨쳐도 제 성을 남편 성으로 바꾸게 하는 서양은 여성을 진실로 존중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비록 시집가면 시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고 해도 본래의 제 성을 그대로 가지고 살게 하는 한국이 훨씬 여성의 존재와 인격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혈연을 존중하는 의식의 결과일 것입니다.
겨우 일년 남짓한 사이에 허경옥처럼 크게 성취한 사람은 우리 <물푸레숲>에서 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도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게 도와준 남편의 힘이 제일 큽니다. 이번에도 혼자 보내기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내가 운전기사로라도 따라가야 하지 않나?’ 하며 자꾸 허경옥의 주변을 맴돌던 남편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간섭하려고 따라가겠다고 하지 않고 보호하려고 따라가고 싶어 했습니다. 좋은 남편입니다. 허경옥은 결혼을 참 잘했습니다. 돈이 많고 지위가 높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좋은 남편은 아니라는 것은 물론 잘 알겠지요?
그리고 이제는 성인이 되어 엄마의 애환을 제 것인 양 알고 있는 자식들의 사랑도 매우 큽니다. “엄마! 이런 여행은 처음이지?” 어쩌면 이렇게 설레는 제 마음을 압축해서 표현할 줄 알까요? 허경옥의 글에 딸의 모습이 가끔 등장할 때마다 나는 놀라곤 합니다. 결혼하여 아이 기르면서 제 살기에도 바쁠 텐데 어쩌면 부모의 살림살이를 제 일보다 앞세워 걱정하고 팔 걷고 나서는지, 읽을 때마다 감동하곤 합니다.
한국에서도 문학 행사를 계획하고 추진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닌데 언어권이 다른 타국에서 한국문학을 지키는 사람들이 몇십 년씩 문학 행사를 꾸준히 지키오고 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1987년인가 LA에서 열리는 문학대회에서 주제 발표를 했었고 한인 방송국에서 시 낭송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의 모임이 그대로 계속되었는지 체제가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그대로 이어졌더라도 크게 발전하였을 것입니다.
바닷가 모래밭 차일을 치고 점심을 먹었는데 배추겉절이가 한국에서 먹던 것보다도 더 맛이 있었던 생각이 납니다. 그때 활동했던 한인 작가들이 지금은 많이 작고하셨을 것입니다. 아마 김호길 시인이 제일 연장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김호길 시인은 LA에 살면서 멕시코에서 농장을 경영하는데 이번 대회에 대한 글을 페이스북에 간단히 올렸더군요. 그는 거의 해마다 한국에 오는데 올해에도 9월에 다니러 온다고 합니다.
미국은 땅이 넓어서 시차가 3시간씩이나 난다니 넓은 땅의 규모가 구체적으로 증명이 되는군요. 모처럼 설레는 마음을 발표한 허경옥의 글을 읽으면서 나도 내내 흥분이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점점 많아지겠지요. 사업도 번창하여 2호점을 내고 지금까지 억눌려 움츠러들었던 꿈을 마음껏 펴고 결실의 기쁨도 누리는 삶. 그리 흔치 않은 일입니다. 부디 건강하기만 바랍니다.
글은 비슷한 내용을 중복한 부분이 있습니다. 과감하게 줄이면 훨씬 표현에 탄력이 붙을 것입니다. 참고로 밑줄을 그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독자로서의 냉정한 말입니다.
그대로 두어도 괜찮습니다. 거듭거듭 말하지만 지금보다 몇 배의 기쁨을 누려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