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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강진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
유학자 정약용과 승려 혜장선사가 차로 만나고 인생으로 만나 노래한 땅, 강진
다산초당과 백련사 사이에는 길이 하나 나 있습니다. 조용히 걷다보면 정적이 찾아와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게 합니다. 길지 않은 길이지만 자박자박 밟히는 것이 풀이 아니라 정적이었습니다. 정적이 먼저 찾아와 있었습니다. 이 길은 유교와 불교가 만나는 길이었고,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교우가 이루어진 길이기도 했습니다. 나이 차이는 열 살이었음에도 벗이 되었고 격을 허문 통 큰 교류가 이루어지던 길입니다. 다산 정약용과 혜장선사의 만남이 이 길을 통해 이루어지고 무르익어 갔습니다. 또한 저물어갔던 길입니다.
강진에 가 정약용의 유배지인 다산초당에 들르게 되면 백련사로 넘어가는 이 길을 걸어보세요. 백련사에서는 혜장 선사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두 곳은 분위기가 다릅니다. 다산초당에는 그늘이 지고 경사가 급해 평화로움보다는 음습함과 마음의 다급함도 느껴집니다. 넉넉한 마음이지는 않습니다. 유배지에서 아늑함을 느끼기는 쉽지 않겠지요. 하지만 백련사로 가는 길을 따라 가다보면 마음 안에 도레미송이 일어나지요. '라'까지 올라가도 무방하지요. 가는 길에서 정적과 함께 주저앉아 나만의 시간을 가져도 좋습니다. 정적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거든요. 그러다 다시 걸으면 되는 게지요. 백련사에 도착하는 순간 다산초당과는 반대의 느낌이 주위를 감쌉니다. 폐쇄공간에서 개방공간으로 나온 듯합니다. 백련사의 경관은 가슴을 넉넉하게 해주고 그곳에 앉아 있으면 길도 잠시 쉬어가라고 권하는 느낌이 들거든요. 바다로 시야가 열립니다.
봄에 동백이 유명한 절이지만 7월부터 피어나는 배롱나무는 한 폭의 그림 같지요. 절은 절제와 가다듬은 얼굴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 앉아 배롱나무 축제를 즐길 만합니다. 한 번 피면 100일을 간다고 해서 백일홍이라고도 하지요. 한 나무에서 꽃이 지고 피는 그 100일이 지루하지 않게 이쁘지요. 특히 백련사의 배롱나무는 운치 있고 기품이 있지요. 간지럼 나무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요. 나무를 손으로 간질이면 나무가 파르르 떤다니까요. 궁금하면 직접 해보세요.
백련사는 혜장선사가 주지로 있었고, 다산초당엔 다산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 간의 교류는 역사를 가질 만큼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능히 다산에 돌아가지 못하니 죽은 것과 같구나.
위에 적은 말은 다산이 유배지인 강진에서 풀려나 자신의 거처인 두물머리에 있을 때 한 말입니다. 유배지를 그리워하다니요. 정말 우스운 일이지요. 한 사람의 생애 중에서 고난이 한 사람을 크게 만드는 것일 수 있음을 보게 됩니다. 유배지는 정치적인 죽음입니다. 그러한 속내에는 다산이 강진을 그리워하게 된 것에는 혜장선사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추억이 남아서였습니다. 혜장 선사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추억이 그것입니다.
유배는 왕조시대에는 패배의 상징 같은 것입니다. 언제 죽음을 당할지도 모르는 위급한 상황인 곳이 유배지입니다. 적대적인 붕당의 무리들의 사주에 의해 사약이 언제 내려올지도 모르는 다급한 상황이 유배지입니다. 실제로 다산의 바로 손위 형은 죽임을 당했고 큰형은 흑산도로 귀양을 갔습니다. 집안은 한 마디로 풍비박산이 난 것입니다. 다산이 처음 강진에 내려갔을 때에는 강진사람들이 다산을 피했습니다. 다산을 가까이 했다가는 그 화가 자신에게 튈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다산에게 말 거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상황이라서 다산은 말 벗 하나 없이 지냈습니다. 그를 그나마 반겨준 사람은 주막집의 할머니였다고 합니다. 주막 할머니의 배려로 귀양지의 쪽방에서 살아야 했지만 다산은 외로움을 버거워하지 않았습니다. 방에 들어가면 문을 닫고 밤낮으로 외롭게 혼자 살았습니다. 누구 하나 말 걸어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산은 큰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나는 이제 겨를을 얻었구나.
이 '겨를'이 조선의 역사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세상을 밝혀줄 큰 사람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겨를이란 어떤 일을 하다가 생각을 다른 데로 잠시 돌릴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 즉 틈을 이야기 하지요. 그 틈에 혜장선사가 있었습니다. 다산은 혜장선사에게, 혜장선사는 다산에게 산이 되는 존재였습니다. 정신의 고양과 상승을 할 수 있는 만남이었습니다. 결국 다산 정약용은 위대한 일을 그 유배지인 강진에서 해냈습니다. 다산이 귀양을 가지 않았다면 참으로 귀한 다산의 정신을 우리는 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생에서 고난과 역경을 두려워하지만 그 고난과 역경이 없다면 사는 이유도 없을지 모릅니다. 인생을 편하고 안락하게만 살다가 가면 무슨 사는 재미가 있겠습니까. 성취도 없고 목적도 없는 삶이 가치가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난 자체를 즐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목표를 향해 가는데 고난이 따른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넘어야만 성취가 있으니 견뎌야지요. 하지만 고난이 겹치면 감당하기 힘이 듭니다. 다산에게는 참으로 많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 세상에서 다시 못 보게 되는 사별은 슬프지요. 다산은 생전에 여러 번의 사별을 겪습니다. 아홉 살 때에 낳아주신 어머니와의 사별을 시작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바로 손위형인 정약종이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많은 자식들과도 사별했습니다. 아홉 자녀 중에 여섯이 죽어서 2남 1녀만 살아남았으니 얼마나 기가찰 노릇입니까. 강진으로 귀양 온 다음해인 1802년에는 네 살인 막내아들 농아가 죽었고 1807년에는 흑산도에 귀양중인 형 정약전의 아들 학초가 죽었습니다.
형제가 함께 유배를 떠나는 광경을 상상해 보셨나요. 다산이 그랬습니다. 셋째 형 약종이 참수를 당하는 처참한 상황 속에서 정약용과 정약전 두 형제는 남도땅으로 유배지를 향해 갑니다. 유배길에 오른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는 나주 율정점에서 헤어지게 됩니다. 흐르는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고난의 길을 가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헤어져 각자 가는 길이 귀양지였으니 무슨 말이 필요했겠습니까. 바라보고 눈물만 흘렸습니다. 두 사내의 눈물은 진했지요. 사는 일이 이리도 허망하고 힘이 들다니. 서로 건강이나 바랬겠지요. 형을 흑산도로 보내고 다산은 다시 강진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월출산 누리령에 이르러서는 월출산을 일부러 외면했다고 합니다. 서울의 도봉산만 같아서였지요. 돌로 이루어진 산봉우리가 한양의 도봉산과 너무 닮아서였습니다.
樓犁嶺上石漸漸 누리령의 산봉우리 바위가 우뚝우뚝
長得行人淚灑沾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네
莫向月南瞻月出 월남으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峯峯都似道峯尖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아
긴 한숨이 나왔습니다. 도봉산은 한양으로 자신의 정치적인 소신을 세상에 펼치던 곳이었지요. 헌데 지금은 귀양을 가는 길입니다. 자꾸 한양의 일들이 떠오릅니다. 자신이 가던 길을 세상이 아니라며 귀양을 보냈습니다. 다산의 유배지는 강진이었으니 더 걸어야 했습니다. 셋째 형은 죽음을 당하고 둘째 형, 정약전과는 조금 전 나주에서 다른 유배지를 향하여 떠나고 자신은 강진으로 가는 마음이 어떠하였을까요.
그런 다산이 귀양지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삶이란 해석이 불가한 것이지요. 난해한 삶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는 누구도 모릅니다. 생은 내내 현장성에 기반하고 있어 잠시도 쉬거나 피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일어날 일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삶이었습니다. 배우가 무대에 올라가 있을 때의 긴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언제 불행이 닥쳐올지도 모르고 언제 행운이 벼락처럼 덮칠지도 모릅니다. 미래가 두려운 것은 예측할 수 없는 거친 변화가 기습을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유배지에서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런 상황을 견디게 해준 것 중에 하나가 한 승려와의 만남이었습니다. 그 승려가 혜장선사였지요.
유교의 다산 정약용과 불교의 혜장선사의 만남은 어찌 보면 영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지요. 혜장선사는 파격적인 승려였습니다. 술을 즐겼고 차에 대해 깊은 소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릇이 큰 파격의 소유자였나 봅니다.
부처의 바다와 공자의 바다가 만나 때론 격돌하고 때론 화합하며 나눈 차
강진 유배지에서는 다산에게 잠자리를 제공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 동문 밖 주막집 한 노파가 그에게 뒷방 한 칸을 주어 기거 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5년이 되는 해 1805년 봄이었지요. 바깥출입이 상당히 자유로워져서 다산은 한 노인과 함께 경치 구경을 하면서 백련사를 들르게 됩니다. 거기에는 30세의 젊은 나이에 대흥사 제12대 대강사를 지낸 34살의 혜장선사가 주지로 있었습니다. 다산보다 10살 아래인 그는 다산을 알아보지 못하고 한나절 대화를 나누었지요. 거목들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대흥사의 강사는 문중의 뛰어난 선승이 맡는 자리였습니다. 도의 정도가 높아야 가능한 자리입니다. 그리고 다산은 유학의 정수를 꿰차고 있는 득의양양한 사람이었고요. 다산은 같이 동행한 노인과 함께 한 암자에서 하룻밤을 자려고 길을 나서는데, 이상한 낌새를 느낀 혜장이 다산을 알아보았습니다. 고수는 고수의 눈빛만 보아도 안다고 하는데 몇 마디 이야기까지 나누었으니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겠지요. 혜장은 다산에게 자기 거처에서 함께 묵을 것을 권합니다. 그날 밤 다산과 혜장은 주역을 논했는데 혜장은 다산 앞에서 자기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다가 다산의 ‘곤초육수坤初六數’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고 맙니다. 다산이 선승인 혜장에게 주역을 물을 만큼 혜장은 불교뿐만이 아니라 주역에까지 깊은 학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비긴 셈이었지요. 다산은 몰라서 물었고 혜장은 답을 못했으니 그렇습니다. 그 뒤로 혜장선사는 다산 정약용을 극진히 모시면서 정성을 다합니다. 처음 사귐에 있어 10살의 연배는 적지 않은 거리였습니다. 그 해 겨울에 다산이 백련사의 암자인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혜장선사가 거처가 마땅치 않은 다산을 위해 배려한 것이었습니다. 강진읍 북산 우두봉의 고성암에 있는 보은방 생활은 3년 동안 이어집니다. 다산의 주막생활은 5년이었고요. 다산 정약용과 혜장선사는 이곳 보은산방에서 주역에 대하여 자주 논하게 되었고, 불교에 대해서 논했습니다. 시를 쓰면서 둘 사이의 정은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다산과 혜장은 역학과 주자학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기도하고 불경을 논하기도 하고 차를 마시면서 차에 대한 예찬론을 펴기도 했습니다.
두 걸출한 인물을 연결해 준 것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차였지요. 혜장은 이미 차에 대한 고수였고, 다산도 차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산은 이곳에 강진 유배생활 전부터 차에 심취해 있었다고 합니다. 20세 때 좋은 샘물에 차를 끓여 맛을 시험할 정도였고 유배 후 차가 생산되지 않는 고향 두물머리에 돌아가서도 차를 계속했습니다. 차에 관한 그의 저서로는 『동다기』『다암시첩』『다신계절목』 등이 있습니다. 차와 관련한 시도 걸명소 등 47편이나 됩니다. 호를 다산이라 한 그 마음의 결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산과 혜장선사의 차 인연은 초의선사에게까지 이어집니다. 다산의 차에 대한 높은 경지는 높았습니다. 차에 대한 인연과 높은 경지는 혜장과 다산에서 초의에게까지 이어집니다. 그것은 혜장에 의해서였습니다. 혜장은 40의 이른 나이에 죽었습니다. 혜장은 죽기 전 동승티를 갓 벗어난 준수한 젊은 스님을 데리고 나타납니다. 혜장은 어린 스님을 다산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혜장은 다산에게 "선생님, 제가 없더라도 초의를 사랑해 주십시오."라면서 초의선사를 소개합니다. 그 때 이미 혜장은 죽음을 예견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혜장은 세상을 버렸습니다. 다산의 상심은 컸습니다. 다산은 교분을 나눌 당시의 시에서 보면 그를 어떻게 보고 있었나를 알 수 있습니다.
굳은 의지에 어질고 호탕한 사람
이따금 표연히 산속을 나간다네.
눈 녹은 비탈길 미끄러운데
모랫가의 들집은 깊이 잠겼네.
얼굴에는 산중의 즐거움이 가득하고
변하는 세월에도 몸은 편하다네.
말세의 인심 대부분 비루하고 야박한데
요즘에도 그런 진솔한 사람 있다네.
다산이 지은 ‘혜장이 찾아오다’라는 시지요. 다산과 혜장의 교분기간은 6년하고 1개월이었습니다. 유교와 불교의 만남, 깊고 넓은 학문을 논하고 서로 다른 세계를 이해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다름을 받아들이는 자리였으며 학문으로 논하느라 밤이 새고 차가 식는 줄도 모르기도 했습니다. 혜장은 다산을 만난 후 주역과 논어와 성리학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고, 불경은 수능엄경과 대승신기론을 좋아하게 됩니다. 염불이나 기도를 하지 않아 다른 승려들의 미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굽히지 않는 성격의 혜장이었습니다. 한번은 다산이 혜장에게 ‘그대는 너무 고집이 세니 어린아이처럼 유순할 수 없겠나.’ 라고 충고하자 혜장은 스스로를 아암兒菴라고 불러 다산의 뜻을 따를 정도로 서로 주고받는 바가 컸습니다.
불법에는 의욕을 잃고 시나 쓰고 주역, 논어를 논하다가 술에 잔뜩 취하여 세월을 보낸 아암 혜장 선사가 1811년 가을 병이 들어 죽고 맙니다. 다산은 아암 혜장 선사를 잃은 슬픔이 하도 커서 입적한 날, 이렇게 만시輓詩를 쓰고 있습니다.
이름은 중僧, 행동은 선비라 세상이 모두 놀라거니
슬프다, 화엄의 옛 맹주여.
논어 책 자주 읽었고
구가의 주역 상세히 연구했네.
찢긴 가사 처량히 바람에 날려가고
남은 재, 비에 씻겨 흩어져 버리네.
장막 아래 몇몇 사미승
선생이라 부르며 통곡하네.
푸른 산 붉은 나무 싸늘한 가을
희미한 낙조 곁에 까마귀 몇 마리
가련타 떡갈나무 숯 오골을 녹였는데
종이돈 몇 닢으로 저승길 편히 가겠는가.
관어각 위에 책이 천권이요
말 기르는 상방에는 술이 백병이네
지기知己는 일생에 오직 두 늙은이
다시는 우화도 그릴 사람 없겠네.
여기서 오골傲骨이란 오만방자한 병통이 있다는 뜻입니다. 혜장의 특별함을 이렇게 표현한 게지요. 그리고 다산이 얼마나 혜장을 바라보는 눈이 각별했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관어각 위에 책이 천권이요 / 말 기르는 상방에는 술이 백병이네 / 지기知己는 일생에 오직 두 늙은이 / 다시는 우화도 그릴 사람 없겠네.>라고 읊고 있습니다. 두 늙은이가 다산 자신과 혜장선사를 빗댄 말이지요. 나이는 10살이 어려도 동격으로 받아들이고 친구처럼 스승처럼 서로를 생각하고 대했음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름은 중이나 행동은 선비'였던 혜장은 갔습니다. 이 만시의 표현대로 혜장 선사를 잃은 다산의 슬픔은 매우 컸습니다. 혜장을 잃은 슬픔을 둘째 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도 적고 있습니다.
대둔사에 어떤 승려가 있었는데 나이 마흔에 죽었습니다. 이름은 혜장 호는 연파, 별호는 아암, 자는 무진이라 하는 데 본래 해남의 미천한 집안의 사람이었습니다. … 그는 불법을 독실하게 믿으면서도 주역의 원리를 들을 때부터는 몸을 그르쳤음을 스스로 후회하여 실의한 듯 즐거워하지 않다가 6, 7년 만에 술병으로 배가 불러 죽었습니다.
혜장은 자신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술을 가까이 해 망가진 몸으로 세상을 더 살 수 없음에 한탄에 가까운 글을 다산에게 보냅니다. <광폭한 노래들이 근심 속에서만 불려지니 / 술만 취하면 맑은 눈물이 흐르네> 안타깝지만 천재는 그렇게 갔습니다. 불교와 유학을 한 손에 거머쥐려 한 혜장은 그렇게 갔습니다. 혜장은 죽을 무렵에 여러 번 혼잣말로 무단히, 무단히, 라고 했답니다. 무단히는 방언으로 ‘부질없이’란 뜻입니다. 삶이 부질없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자조적인 발언이었을 것입니다. 학문이 깊어도 허무는 찾아오고, 깨달음으로 들어간 길이 열려도 부질없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릅니다. 다산은 궁벽함을 글을 쓰는 재미로 살아가고, 혜장은 부질없음을 술로 살아갔지만 그 둘은 통하는 바가 컸습니다. 부처의 바다와 공자의 바다가 만나 때론 격돌하고 때론 화합하며 나눈 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처와 공자가 만난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잇는 산길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두 사람은 갔어도 세상은 여전합니다. 사람은 왔다가고 세월은 흐르기만 하지만 강산은 늘 새로우나 같은 모습으로 거기에 있습니다. 한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다산이 18년 동안 강진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6년의 만남. 다산의 인생에 향기였고 산이기도 했습니다. 유학자의 눈에 술을 마시는 중을 만나 욕을 할 것이 뻔 한 이치임에도 다산은 혜장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빛나던 스님
아침에 피고는 저녁에 시들었네.
훨훨 날던 금시조
앉자마자 날아가 버렸네.
슬프다. 이 분의 아담하고 깨끗함이여,
글로는 표현해서 전해 줄 길이 없어라.
그대와 함께 연구해 나간다면
오묘한 진리, 깊은 이치도 열어젖힐 수 있었으리.
고요한 밤에 낚싯대를 거두어 들면
달빛만 뱃전에 가득해라.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세월에서 그대 입 다무니
산속 숲마저도 적막하기만 하다오.
이름까지 나이 먹은 어린애인데
하늘이 수명만은 인색했네.
이름은 중이지만 행실은 유학자이니
그래서 군자들이 더욱 애달파하네.
<그대와 함께 연구해 나간다면 오묘한 진리, 깊은 이치도 열어젖힐 수 있었으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세월에서 그대 입 다무니 산속 숲마저도 적막하기만 하다오.>라고 말입니다. 다산이 혜장을 얼마나 흠모했고, 그리워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글입니다.
혜장선사는 추사 김정희의 스승인 옹방강이 ‘해동의 두보’ 라고 칭송할 만큼 뛰어난 스님이었고, 불가의 학승이면서도 유교의 경전에 관심이 깊었던 사람입니다. 그림에도 능해 지금까지도 그 맥이 이어지고 있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다산은 혜장이 소개해준 초의선사에게 이런 평을 받았습니다. "이제까지 현인군자를 두루 찾아보았으나 모두 비린내 풍기는 어물전에 불과했다. 다산은 하늘이 나를 맹자 어머니 곁에 있게 했다"고. 무려 500여 권이라는 책을 저술한 다산, 하도 오래 앉아있어 엉덩이가 짓무르고 제자들이 대주는 한지가 부족해 글을 못 쓸 때도 있었다는 위대한 스승. 다산과 함께 세상을 논하고 아파했던 두 사람의 교류는 이처럼 높고 꿈결 같기만 했습니다. 그 길에서는 눈물이 날만큼 안타까움도 있고 고담준론을 열어가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이 길은 적막을 옆에 두고 한참 앉았다 가시면 더욱 좋습니다.
글, 신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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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전히 바람과 함께 손을 잡고 좋은 사유를 펼치고 계시네요~~ 근방으로 지나시면 연락 주세요 그날 처럼 매운탕에 쇠주 한 잔으로 지나온 세월 버텨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