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63.64
고구려의 혼을 모르는 부끄러운 후손
제(齊)나라 세워 당나라와 겨룬 이정기
지게문 사이로 달빛이 흐른다. 밤하늘에 별들도 졸고 있는 야심한 밤. 오랜만에 고국의 손님을 맞이한 학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노인네를 맞아 곤혹을 치렀지만 방원도 싫지만은 않았다. 송곳처럼 날카로웠지만 대화가 통하는 노인이었다.
"당서를 읽어보셨는지요?"
당서(唐書)는 당나라 건국에서 패망까지 290년을 기록한 역사책이다. 방원도 읽어본 기억이 있는 책이었다. 선비는 당서는 물론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기본적으로 읽는 역사책이다. 당서는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가 있다. 구당서는 중국의 정사(正史)라는 것에 이의가 없었지만 신당서(新唐書)는 송(宋)대에 고쳐 지었기 때문에 조선 선비들은 신당서의 신뢰도에 후한 점수를 주지 않은 책이었다.
"읽어 봤습니다만…."
학사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묻는지 알 수 없어 말끝을 흐렸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이정기(李正己)가 제(齊)나라를 세워 당나라와 당당히 겨뤘다고 '구당서. '이정기 열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힘이 달려 4대 55년 만에 망하고 말았지만 중국 땅에서 독립국을 유지했던 고구려 유민 이정기를 고국에서 몰라주니 안타깝습니다."
중국 땅에 독립국을 세운 이정기를 아시나요?
놀라운 발견이었다. 칠웅(七雄)이 할거하던 춘추 전국시대의 제(濟)나라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우리나라 사람 이정기가 당나라와 당당히 겨뤄 중국 땅에 제(齊)나라를 세웠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다.
유학을 공부했고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선비라고 자부하던 자신이 이정기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이정기가 산둥성과 허난성에 세운 제나라는 신라보다 더 독립적인 국가를 건설했습니다. 국호와 연호를 스스로 정해 독립국임을 천명했으니까요.
신라는 철령 이북의 땅을 당나라에 내주었지만 제나라는 통일신라보다 더 넓은 땅을 차지하며 당나라와 당당히 겨뤘습니다."
노인네의 목소리는 힘이 있었다. 학사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가고 있었다. 그 때 신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당나라에 내주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명나라가 철령 이북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이정기 장군이 고구려 장졸출신과 유민들로 구성된 정예군 2만 명을 이끌고 산동성에 상륙했을 때 이곳 고구려 유민들은 열광했습니다.
북방 지린성에 근거지를 마련한 대조영보다도 당나라의 수도를 공략하려는 장군에게 고구려의 영광이 재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가 컸지요.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이 풀릴 것이라는 희망이 넘쳐났습니다. 금가락지 은비녀 다 팔아서 군자금을 마련해 주었지요."
"유민들의 성원을 한 몸에 받은 이정기 장군은 이곳 유민들을 규합하여 대 부대를 편성했습니다. 저희 윗대 할아버지도 자발적으로 군사가 되었지요. 그 당시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이정기 장군의 휘하에 들어갔지요."
"장안으로 가는 길목 조주와 서주 등 15개주를 평정했습니다. 하북과 안휘성도 물론이구요. 15개주라면 조선반도 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큰 땅덩어리이지요. 고구려를 패망시킨 당나라를 궤멸시키기 위하여 당나라 목줄인 대운하 영제거를 손아귀에 넣고 낙양과 장안을 공략하다 49세의 나이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안타까운 고구려의 영웅이지요."
중원을 호령하다 49세에 죽은 고구려의 영웅
고구려의 영웅이라는 노인의 말에 가슴이 뛰었다. 목울대에서 더운 김이 솟구쳐 올라왔다.
형언할 수없는 감동의 파도가 밀려왔다. 중원을 호령하던 이정기 장군의 환상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말발굽 소리와 피워 오르는 흙먼지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문틈사이로 흘러들어온 바람에 호롱불이 살랑거린다. 꺼질 듯이 꺼질듯이 흔들리지만 꺼지지 않았다. 꺼져버리고 사라져 버린 줄만 알았던 고구려의 혼이 여기 이곳에 살아있다니 경이로웠다.
잊혀진 제국 고구려가 이곳에서 숨을 쉬고 있다니 놀라웠다. 밤공기를 가르는 바람이 시원하다.
"고선지는 당나라 휘하의 장수가 되었지만 제나라를 세운 이정기는 독립국을 경영했습니다. 나으리와 내가 앉아 있는 이 땅에 나라를 세워 당나라와 당당히 겨뤘던 이정기를 모른다면 후손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랬다. 통일신라와 고려 그리고 조선의 선비들은 사대국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하여 당서에 기록된 고구려 유민들을 애써 외면했다. 당서만이 아니다. 자치통감(資治通鑑)과 책부원구(冊府元龜) 그리고 문헌통고(文獻通考)에도 기록되어있다.
야사(野史)는 신뢰도가 떨어진다 하드라도 중국의 정사(正史) 당서에 기록된 이정기를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거론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거론 자체를 스스로 금기시했다.
발해를 세운 대조영도 마찬가지다.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고려도 그랬고 5백년 조선시대 선비들도 그랬다. 공자 맹자를 재해석하여 새로운 학문을 창조한 훌륭한 학자들은 많았지만 중국 역사 속에 기록된 고구려인을 끄집어 내지 않았다. 그것은 사대하는 나라의 선비로서 사대국에 도전하는 행위이며 황제에게 불경 한다는 정서였다. 이것이 바로 사대주의의 한계다.
고구려의 혼을 모르면 부끄러운 후손
조선시대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많았지만 이정기를 담론화 한 학자는 없었다. 몰랐는지 알고도 모른척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우리 역사에서 이정기를 최초로 거론한 인물이 육당 최남선이다.
그것도 '이정기는 북 지나에서 만주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다'고 짤막하게 언급하고 넘어갔다. 조선이 패망한 이후다.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우리의 역사를 잠식하는 오늘날에도 고구려와 고려를 계승했다는 집단도 함구무언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중국 정사 속에 기록되어 있는 인물을 되살려 당당하게 주장하지 못하고 있다. 부끄러운 후손들이다.
"당나라가 제나라를 멸망시킬 때 천여 명을 학살했다고 당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씨를 말린 것이지요. 똘똘 뭉치는 고구려 유민들의 결집력을 두렵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살아남아서 이렇게 뭉쳐 살고 있습니다. 조국이 중국 속의 고구려 유민을 외면해도 우리는 고구려의 혼(魂)을 간직하며 살아가겠습니다."
학사의 잔잔한 외침이 밤공기를 갈랐다. 허공에 메아리쳤지만 울림이 있었다. 학사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절규가 흐르고 있었다. 방원은 할 말을 잃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했고 학사의 말이 방원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충격이었다. 학사가 돌아간 이후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6백 년 전. 죽음과 함께 역사에 묻힌 인물 이정기가 환생하여 주위를 맴도는 것 같았다. '반도(半島)에 갇혀 아귀다툼 하지 말고 대륙을 보아라'고 꾸짖는 것만 같았다.
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64
♧명나라 사신 성공
외교 난제를 해결하고 돌아온 이방원
하얗게 밤을 새운 방원은 고려촌에서 따뜻한 환송을 받고 갈 길을 재촉했다. 연교보와 파리보(巴里堡)를 지나 드디어 연경(燕京북경)에 입성했다.
압록강에서 2030리 39일만이다. 명나라 황제 주원장의 넷째 아들 주체가 통치하고 있는 곳이다. 방원으로서는 처음 밟아보는 연경 땅이었다.
연경에서 연왕(燕王)을 알현했다.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내왔다. 시위하는 군사도 물리치고 독대했다. 사신이지만 조선의 왕자에게 친밀감을 표시한 것이다. 방원의 눈에 비친 연왕은 첫눈에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독사눈을 닮은 눈동자에서 광채가 빛났다. 두툼한 입술에 야망을 품고 있었다.
연왕 역시 이방원이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읽었다.
지금은 나이어린 막내 동생에게 세자의 자리를 내주고 야인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선수가 선수를 알아 본 것이다. 훗날, 이방원은 동생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고 연왕은 조카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묘호도 똑같이 태종(太宗)이다.
때를 기다리는 잠룡들, 서로를 알아 보다
태종으로 등극한 이방원에게 이때의 만남이 큰 자산이 되었다. 이방원이 연왕을 황제로 처음 만났다면 과감한 대명외교를 펼치지 못했을 것이다. 관계란 첫 만남이 중요하다. 어떠한 지위에서 어떠한 사람을 만났느냐가 관건이다. 스승과 제자로 만났으면 제자가 교수가 되어도 스승은 선생님이다.
하위와 상위가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면 하위가 상위가 되어도 그 관계의 저변에는 첫 만남의 흔적이 흐르고 있다. 이렇게 좋은 첫 만남도 부정적인 면이 있다. 하위가 동등내지 상위가 되었을 때 그 위를 인정해주지 않고 첫 만남의 연속선상에서 관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관계의 모순이다.
연경에서 연왕의 융숭한 대접을 받은 사신 일행은 연경을 떠나 남행을 계속했다. 연경에서 보낸 시간을 보충하기 위하여 잰걸음으로 남행을 계속할 무렵, 한 떼의 군마 무리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길을 비키라고 고함을 질렀다. 왕의 행차이니 길을 비키라는 것이다. 연왕이 아버지 주원장의 부름을 받고 금릉으로 가는 길이었다.
중국인들은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길을 터주었다. 방원을 비롯한 사신일행도 말에서 내려 길섶에 몸을 세웠다. 지나던 연왕이 방원을 비롯한 조선사신을 알아보고 타고 가던 수레를 멈추고 휘장을 걷었다.
조선 사신 방원을 알아본 연왕이 중국말로 말했다. "급한 일이 있어 금릉에 가는 길이니 천천히 뒤 따라 오라"는 것이었다.
요하(遼河)를 건넜다. 요하는 요수 또는 대요수라고 부르기도 하거니와 구려하(句麗河)라고도 불린다. 고구려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름이다. 요하를 기준으로 동쪽을 요동, 서쪽을 요서지방이라 부른다. 요하를 건너면 진정한 의미의 중국 땅에 들어가고 장성(長城)권역에 들어가는 것이다.
요하를 지나 발착수(渤錯水)를 지날 때는 당태종 이세민의 통곡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고구려를 정벌하려다 국력을 소모하여 패망의 길로 들어선 수나라를 멸하고 대륙을 평정하던 당태종은 고구려를 주머니 속의 작은 물건으로 생각했다.
당태종은 17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계절을 잘못 선택했다. 요동벌판의 혹독한 추위는 당나라군에게 크나큰 재앙이었다. 포차와 당차를 동원하여 안시성을 공략했지만 양만춘에게 패하여 눈을 잃고 패주하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당나라군이 퇴각한 경로는 요하 하구 쪽이었다. 겨울에 꽁꽁 얼었던 진흙땅이 해동과 함께 늪지대로 변하는 지역이다. 군사는 물론 군마와 군수물자를 가득 실은 수레도 삼켜버리는 무서운 지역이다.
"조상님이여, 나 이세민을 가엽게 봐주소서. 내가 조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말을 타고 진흙구덩이에 빠지니 만민을 통치하는 조정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말을 아무리 때려도 진흙구덩이에 빠져 나갈 수 없으니 내 황제인 것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내 너무나 상심하여 두 눈에 눈물이 흐르니 나 당나라 왕 이세민을 구해주소서!" -
<설인귀과해정동백포기(薛仁貴跨海征東白袍記)>
이 험난한 길을 택하여 퇴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나라 황제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완전한 패배를 당하여 도망갈 길 조차도 선택하기가 어려웠음을 의미한다. 연개소문에게 패배한 이세민은 몰락하여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 측천무후의 등장을 초래하게 되었다.
대륙의 황제 이세민으로 하여금 피눈물이 나게 했던 연개소문이 한없이 자랑스럽고 위대해보였다. 그러한 기상을 이어받은 후예가 명나라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러 가는 자신이 참담했다.
융숭한 대접으로 조선 사신을 어리둥절하게 한 명나라 조정
금릉에 도착하여 황제를 알현하니 흡족한 마음으로 따듯이 맞이해 주었다. 조정의 대신들도 조선의 왕자가 왔다고 융숭히 대접해 주었다. 황제 주원장은 이방원을 여러 차례 만나 주었다. 외교 관례상 보기 드문 이례적인 대우였다.
명나라가 아들을 보낸 이성계를 신뢰하고 이방원을 신임한다는 메시지였다.
이방원의 명나라 방문은 대 성공이었다. 요동정벌론을 주장하는 조선에 대한 명나라의 의구심을 풀어주었다. 1년 3사 외교도 복원하였다.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외교 난제를 해결한 것이다.
이방원은 방문 목적을 성공리에 마쳤다. 방원을 비롯한 사신 일행도 놀란 예상 밖의 결과였다.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은 방원의 외교능력이 탁월해서 라기 보다도 분위기가 성공을 이끌어 내었다.
"배를 타고 빠른 길로 귀국하시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뱃길을 이용하여 이 기쁜 소식을 고국에 빨리 알리자고 수행원들이 성화를 냈다. 좋은 소식은 빨리 전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방원은 뱃길이 두려웠다. 지난번 사신 길에 뱃길을 이용하다 배가 뒤집혀 죽을 고비를 넘겼기 때문이다.
"뱃길은 아니 될 말이오."
왔던 길을 되짚어 귀국길에 올랐다. 방문 성과를 임금에게 알리는 사신을 지름길을 통하여 먼저 귀국시키고 느긋한 마음으로 귀국했다. 심양과 요동을 거쳐 압록강을 건넜다. 의주목사가 환한 모습으로 영접했다. 압록강을 건너갈 때의 노파심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찾아 볼 수 없었다.
평양을 거쳐 예성강에서 나룻배를 타고 개경에 도착하니 송악산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보마" 하고 다짐했던 송악산을 다시 본 것이다. 개경을 떠난 지 5개월 12일만이다. 감개가 무량했다. 눈에 보이는 산이 신령스러운 산 송악이라는 것을 확인하니 살아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추동 사저에 도착하니 부인 민씨가 아들을 낳아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복자가 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아이다. 방원은 기뻤다.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이 뿌듯했다. 이 아이가 훗날 애증이 교차했던 양녕대군 이제(李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