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10일
“저기야. 맞아. 초소가 그대로네.”
길이 끝나는 곳에 군 초소가 있고 육중한 바리게이트가 설치되어 있다.
차는 더 이상 갈수도 없어서 공터에 세우고 우리 전우 4명은 내렸다.
보초군인이 그때에야 철문을 열고 나온다.
“어찌 오셨습니까,”
“아, 우리요. 옛날이지. 8.18도끼만행이 일어나던 1976년 이맘때에 여기 근무했어요.
전우 4명이 모처럼 옛 군 시절의 흔적을 찾아 왔습니다.”
전입 동기인 전우를 찾기 위해 무진 노력을 하고 결과는 4명이 작년 12월에 만났다.
전역을 하고 45년만의 재회였다.
“야. 우리 그때 시절로 돌아가 보자.”
부대가 있던 내산리 쪽으론 오줌도 안 눌 것이란 악담은 옛말이다.
그래도 그리운 군 시절이라 모두가 약속하고 당시 최대의 고비였던 8.18을 회상하며
8월 중순으로 날을 잡았다.
하지만 아무리 지도를 훑어도. 마지막 주둔지였던 내산리 부대가 어디쯤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내산리로 들어가자. 길이 끝나는 곳에 있었으니.”
포병운전병은 한직이라 작전 아니면 할 일이 없다.
그래서 부대내의 사역이나 대공화기 등의 경계병으로 잘 나간다.
그러다 말년이 되면 사실 많이 편한 대대위병소 근무를 서는데.
3포인 차리 포대는 마침 정문 옆에 있어서 정문근무는 차리포대 수송부가 도맡아 섰다.
우리 4명은 1977년 초부터 전역하기까지 근무를 함께 섰다.
운전병은 그래도 밖에 나올 일이 많다.
작전이 아니라도 보급품수령이나 기타 등등. 그래서 남보다 길이 익을 터인데도
도무지 모를 시골길이다.
연천서 그냥 쭉 오다보니 부대까지 왔다.
우리가 근무하던 20사단은 지금 형체도 없이 사라졌고
열쇠부대로 불리는 5사단이 들어섰다는 소식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여기 보세요. 여기 4명 있지요? 우린데. 이 건물. 이게 바로 그때의 정문과 같잖아요.”
한 전우가 폰에서 사진을 찾아 내밀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초병이 묻는다.
“언제 적입니까?”
“1977년이라니. 45년 전 사진이에요.”
그때는 정문을 지금처럼 봉쇄하지 않았었다.
2명이 일개조로 한시간식 집총자세로 근무를 섰다.
군기를 중요시하는 대대장의 뜻에 따라 위병표식을 주렁주렁 달고
헌병보다도 더 엄격하게 정문근무를 섰었다.
사진 속에는 우리 4명과 위병조장이 집총을 하고 환하게 웃고 있다.
초병은 사진 속 건물과 실지 건물을 번갈아 보더니.
부동자세를 취하며 경례를 올린다.
“충성 선배님 반갑습니다.”
얼결에 우리도 ‘충성’하며 손을 올렸다.
“그때 그대로 다 있을 겁니다. 알파포대만 아래로 내려왔고요.
바로 곁이 차리포대인데 아쉽게도 보여드릴 수 없습니다.”
숲이 우거져서 안이 안 보인다.
곁을 흐르는 냇물.
빨래를 하고 몸을 씻고. 휴일이면 고기를 잡아 반합 뚜껑에 소주를 담아 마시고.
아침 점호 끝나면 정문을 지나 내산리 교회까지 구보를 하고.
겨울, 눈이 펄펄 날리는 밤의 빤스바람.
차량사고로 쬬인트 미시나오시가 되도록 걷어 채이고 작기 레버로 엉덩이에 불이 나던.
그때는 미치도록 빨리 제대하고 싶던.
그 군대를 다시와 보니, 눈물이 먼저 나옴은 나이 탓만은 아니길 빈다.
마을은 통째로 없어졌다. 칠면조 집으로 불린 구멍가게도,
휴가철이면 젊은 여대생들이 잔뜩 몰려오던 교회도,
구정물 가져간다고 겨울이면 언제나 살찐 돼지를 몰고 오던 마음 좋은 아저씨집도 모조리 사라졌다.
대신엔 펜션이니 교육원이니 휴양지에 흔한 건물이 주를 이뤘다.
“이 길이지? 80번 비상도로던가.”
연천으로 가고 신망리 대광리로 가는 3거리가 나온다.
신망리쪽의 길은 워낙 험해서 평소엔 이용 안했다.
그런데 판문점 미루나무 도끼만행이 있던 그 이튿날 8월19일.
(아니 역사를 뒤져보니 8월21일이다.)
데프콘2가 발령되고 부대가 전장으로 이동하며 이 고개를 넘었다.
105미리 최대사거리는 11킬로미터다.
적진지에 가까운 보병부대 뒤까지 가야하기에 철책으로 들어갔다.
대대18문의 야포가 여길 넘었는데 길은 옛길 그대로이고 달라진 건 포장뿐.
고개를 넘자 신망리가 나오고 바로 대광리다.
그날의 대광리 도로는 역사 이래 제일 많은 군인이 모였고 길가로 주민들이 나왔었다.
신망리쪽의 보병부대와 기갑부대가 합류하며
철책으로 들어가는 대광리역 4거리는 엄청난 혼잡이 이뤄졌었다.
주민 일부는 이동 중인 차량에 금방 캔 고구마를 던지며
‘ 군인아저씨. 수고하세요.’ 손을 흔들었다.
몇몇 길가에 부대가 보이는데 그때완 거리가 멀다.
사단 보병부대인 61연대가 여기쯤 있었지 싶은데 20사단은 해체되어 흔적이 없어졌고.
군대편제도 많이 달라져서 짐작도 하지 못한다.
20사단은 불운의 부대였다.
올빼미부대라 불리던. 사단마크는 광주에 투입되며 불행의 마크가 되어버렸다.
5사단과 주둔지교체가 된 사건은 좀 창피스럽다.
나는 77년 10월 초에 전역을 하였다.
그해 10월말. 일선부대 대대장이 무전병과 월북을 하였다.
사건의 개요는 대략 이렇다.
전방순시를 하던 대대장이 운전병과 무전병을 데리고 월북을 시도했다.
운전병은 죽어도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대대장은 운전병의 다리에 권총을 발사하고 무전병과 같이 철책을 넘었다.
대광리에서 점심을 들고 우리는 대대장이 월북한 지피.
지금은 열쇠전망대로 불리는 철책으로 들어갔다.
처음 전입 와서는 지오피 근무를 했다.
철책 바로 산하나 넘어서니 전방이나 다름없었다.
대광리서 5초소라 불리던 초소에서 신원확인과 조사를 받고
출입 깃발과 표지판을 받으며 친구가 말한다.
“여기서 근무했어요. 이 사진요. 저리가면 있을 터인데.
75년이니깐 47년 전이네요. 근무지 돌아보려 왔습니다.”
누렇게 변질된 흑백사진이지만.
영상은 그래도 뚜렷하며 지금의 전우들 개개인이 확실히 보인다.
누런 포대메리야스를 입고 통일화를 신은.
위장 풀 뜯으러 나오며 찍은 사진이다.
빛나는 일등병 때. 근무자가 턱, 바로 서더니 경례를 올려붙인다.
“충성. 선배님 반갑습니다.”
그 기상에 놀라 우리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손을 올리며 답례를 했다.
“충성.”
군인정신이 그래도 남아있는지 환한 기운이 가슴을 작렬한다. 기분이 아주 좋다는 뜻이다.
“이쪽으로 조금만 가면 선배님이 근무하던 부대가 나옵니다.
하지만 민간인은 갈수가 없습니다. 이해 바랍니다.”
저 길로 18문의 야포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철책으로 나아갔다.
기억에 의하면 지피는 고유번호가 있다. 우리부대의 담당은 144지피였다.
거기 관측진지가 있고 우리 부대에서 관측팀이 파견을 나갔고 포탄을 날릴 좌표를 불러준다.
그렇게 산 밑까지 들어가서 진지를 차렸다.
산 하나를 두고 반대편엔 적이, 이쪽엔 아군이,
데프콘 하나가 떨어지면 진격을 위해 진지구축에 한창이었다.
포반원은 포탄을 까서 신관을 장착하고 포구에 집어넣고,
관측소에서 무전으론 날아오는 좌표를 입력하기 바빴다.
이제 발사 지시만 떨어지면 방아 끈이 당겨지고 포탄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날아간다.
운전병은 포반에서 떨어져 차량주위에서 사주경계에 들어갔다.
우리 전우 넷은 그때도 같이 모여서 실탄을 장전하고 몰려올 적군을 상상하며 밤을 맞았다.
어둠이 몰려오자 산허리에 깔린 보병의 철모에 붙인
아군의 표식인 하얀 야광판이 수없이 번쩍거렸다.
그때에 입이 바삭바삭 타들어가는 긴장 속에 포반장의 음성이 나직하게 깔렸다.
“전달한다. 전달한다. 이 시간부로 데프콘 쓰리로 돌아간다.”
팔월의 이슬이 머리에 옷에 하얗게 내려앉고 있었다.
지금은 민간인이어서 그때의 전적지로 가지 못한다.
지시한 경로를 따라 열쇠전망대로 나아갔다. 전망대 주차장에 들어서니 군인 한명이 마중을 나온다.
“충성. 선배님들 환영합니다.”
초소에서 연락을 받았단다. 특별한 배려라며 시원한 캔 커피를 들고 나와 하나씩 준다.
“우와. 대한민국 국군은 살아있네. 충성. 충성. 고마워요.”
그래도 선배라며 환대해주니 너무 고맙다.
“선배님. 이 자리 말고는 사진 찍으면 안 됩니다. 제가 네 분 선배님 사진 찍어 드릴게요.”
마주보이는 북한 땅, 마을 주민들과 공회당에 나부끼는 인공기.
철책 안으로 태고의 숨결을 간직하고 유유히 흐르는 작은 내. 사진에 담지 못함이 못내 아쉽다.
“신탄리에 철마는 달리고 싶다. 그리 가자.”
경원선은 신탄리에서 철길이 잘렸다.
홍보용으로 동란 때 쓰던 기관차를 신탄리역에 세워놓고 커다란 표지판을 놓아두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수송부는 자주 부대 밖을 나온다.
수없이 그래서 보아온 철마가 신탄리에 안보인다. 왜지?
어정거리며 달리다보니 백마고지역이 나온다.
무심결에 철원까지 온 것이다. 거기서 신탄리역에 철마가 없는 이유를 알았다.
끊어졌던 경원선철도는 백마고지역까지 이어졌다.
당연히 철마는 달리고 싶다. 신탄리에선 추방되었다.
기차는 다니지 않고 버스가 기차를 대신하여 운행한다.
어쨌든, 백마고지역이 분단지역의 마지막 역이라면
신탄리에 있던 ‘철마는 달리고 싶다. 조형물이 있어야하는데.
나처럼의 생각을 요즘의 공무원들은 하지 않는가보다.
1박2일의 여행.
이제는 모두 늙은이가 되어버린, 그래도 혈기왕성한 군인정신은 살아있어서
백마고지 전적지를 찾으며 우린 모처럼의 군가를 합창했다.
“아름다운 이 강산을 지키는 우리.”
생각나는 구절은 이뿐이다.
그런데 같이 부르노라니 다음구절도 바로 따라 나온다. 모처럼의 가슴이 탁. 트이는.
“아프지 말고 잘 지내.”
진주로. 김제로. 여주로. 서울 전우가 바래주며 부둥켜안고 한 말이다.
눈이 시큰거려 고개를 돌리는데 흘겨보니 모두의 눈시울에 눈물이 곱혔다.
“그래. 건강 잘 챙겨서 또 보자.”
팔월의 하늘은 그때처럼 푸르고 아름다웠다.
멸공의 횃불
아름다운 이 강산을 지키는 우리. 사나이 기백으로 오늘을 산다.
포탄의 불바다를 무릅쓰면서 고향 땅 부모 형제 평화를 위해.
전우여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멸공의 횃불 아래 목숨을 건다.
조국의 푸른 바다 지키는 우리. 젊음의 정열바쳐 오늘을 산다.
함포의 벼락불을 쏘아부치며. 겨례의 생명선에 내일을 걸고.
전우여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멸공의 횃불 아래 목숨을 건다.
첫댓글 편한 친구분들과 추억여행하고 오셨네요
긴글이지만 잼있게 읽었어요 글 올라오자마자
댓글은 늦게 붙혔지만^^
세월무상이지요.
자꾸 흘러가요.ㅎㅎ
참 오랜만에 읽으면서 불러봅니다.
'멸공의 햇불'
제대후 20년쯤 지난후
아들과 옛부대 신수리를 찾았지요.
그때 선배왔다고 당직병이
"백골"하며 음료와 아들에게
콘을 사주더군요.
새삼스럽습니다.
부산으로 가면 다시 오기 힘든다고
노동청사로 와수리로 해서
구경시켜준다고
델고 다닌 기억이..
기억들 환기시켜 주었네요.
감사합니다. ^^
아하! 백골부대 출신이네요.
거기 신철원에서 숙박을 했습니다.
고석정을 둘러보고 요즘 인기가 좋은 한탄강 잔도길도 걸었습니다..
기찻길옆님
소설책 한권
제미있게. 읽고.
갑니다.
쓸데없는 긴 글에 부담을 줄줄 알았는데.
흔쾌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옛 추억은 좋은 겁니다.....
다시 가 봐도 그때 그 생각이 새삼 떠 오르고......
옛 추억을 찾아 다니는 것도 좋타고 생각 합니다...
특히 옛 전우 들과 함께 라면 재미 잇을 것 같습니다...
좋은 추억 여행 하고 오셨네요......^^
어렵게 모인 전우입니다. 또 어렵게 한 여행이고요.
자꾸 나잇살이 올라가고 몸도 성치 않고 그래요.ㅎㅎㅎ
전 진부령 12사65포 브라보 FDC 근무했지요
18일이 생일이라 생일잔치 준비하다가 비상걸려 출동준비 했더랬지요...
1974. 6. 25일 군입대 1977. 4. 19일 제대 도끼만행때 워커신고 대기를 했죠 유사시 전쟁터에 투입이 된다고 비상 대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기억이 새롭습니다 군제대후 공무원 생활을 할때에 도끼만행 장소인 판문점에 견학을 갔습니다 그곳을 보니 미루나무가 베어져 없어졌고 적의 초소도 없어진 상태 였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고있는 사람으로서 감회가 새롭습니다 비록 같이 하진 않았어도 그시대에서는 매우 긴장 상태였죠 지금 생각하면 추억이지만요 좋은 글귀 읽고 갑니다
울 남편도 1년에 한번씩 군대동기들 모임한다고 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