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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블로그/ 이중 복수(우리들) 및 겹말(처갓집) 등 같은 뜻이 두 번 반복되는 말!
⑥ ‘상갓집’과 ‘병원에 입원했다’는 문법에 어긋난다?
우리말에는 흔히 ‘겹말’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중 표현’도 많지요. 예를 들어 ‘검정색’은 겹말이고, 광고에 등장한 ‘넓은 광대역’은 ‘이중 표현’입니다. 여기에서는 둘을 그냥 ‘이중 표현’으로 설명할게요.
‘검정색’의 ‘검정’은 “검은 빛깔이나 물감”을 뜻합니다. 따라서 ‘검정색’이라고 하면 “검은 빛깔의 색”이라는 이상한 표현이 되고 맙니다. ‘빛깔’과 ‘색’은 같은 말이니까요. ‘빨강색’ ‘파랑색’ ‘노랑색’ ‘하양색’도 마찬가지로, ‘빨강’ ‘파랑’ ‘노랑’ ‘하양’으로만 쓰거나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하얀색’으로 써야 합니다.
또 ‘광대역(廣帶域)에서 ’광(廣)은 ‘넓을 광’ 자입니다. 따라서 ‘넓은 광대역’이라고 하면 ‘넓은 주파수 대역이 넓은’이라는 아주 이상한 표현이 되죠. 또 ‘광대역’이라고 하면 충분한 표현에 불필요한 ‘넓은’을 한 번 더 썼으니 언어의 경제성 측면에서도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러한 ‘이중 표현’은 모두 잘못된 말일까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이중 표현을 완전히 배제하고는 도저히 언어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손수건’과 ‘축구공’에서 ‘손’과 ‘수(手: 손 수)’, ‘구(球: 공 구)’와 ‘공’은 의미가 겹칩니다. ‘소문(所聞)을 듣다’에서 ‘문(聞: 들을 문)’과 ‘듣다’ 역시 같은 의미입닌다. 그렇게 의미가 겹친다고 해서 ‘손수건’을 ‘수건’으로만 쓰고, ‘축구공’을 ‘축구’로만 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특히 ‘소문을 들었다’는 다른 말로 고쳐 쓸 수도 없습니다. ‘당구를 치다’도 마찬가지입니다. 당구(撞球)의 ‘撞’이 ‘칠 당’이므로, 이중 표현을 피하자면 ‘당구를 하다’라거나 ‘공을 치다’로 써야 합니다. 그러나 ‘당구를 하다’는 사람들이 전혀 쓰지 않는 말이고, ‘공을 치다’는 대개 “골프를 하다”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박수 치다’도 쓸 수 없습니다. 박수(拍手)의 ‘拍’이 ‘칠 박’이기에, 뒤에 ‘치다’가 오면 이중 표현이 되고 맙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국립국어원도 이중 표현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에 ‘피해를 입다’ 등의 사용례를 보이고, ‘상갓집’과 ‘초가집’ 등은 표제어로 올라 있거든요. 피해(被害)의 ‘被’가 ‘입을 피’이니 의미가 중복되고, ‘초갓집’과 ‘상갓집’은 ‘가(家)’와 ‘집’이 겹치지만, 국립국어원은 이를 바른 표현과 바른말로 보고 있습니다.
국립국어원이 이들 표현과 말을 인정하는 것은 한자와 순우리말을 함께 쓸 수밖에 없는 우리 말글살이의 한계 때문입니다. 사실 예전에 한자는 권력자들의 언어로, 순우리말은 그들에게 휘둘림을 당하는 사람들의 말로 쓰였겠지요. 그러다 보니 한자말에 순우리말을 덧대어 쓰는 일이 자연스러운 언어습관이 됐을 듯합니다. 한자로만 지시·명령하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해 순우리말로 의미를 보충하게 된 거죠.
따라서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병원에 입원했다’는 그냥 ‘입원했다’로만 쓰는 게 바른 표현이다” 등의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달이는 아파서 입원했다”로만 쓰면 우달이가 입원한 곳이 병원인지, 아니면 한의원인지, 그도 아니면 요양원인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또 ‘박수를 치다’는 ‘손뼉을 치다’로 고쳐 쓸 수 있기는 한데 “대통령이 국군 장병의 늠름한 모습에 손뼉을 치며 격려하고 있다”라고 하면, 어째 좀 대통령의 품위가 떨어져 보입니다.
물론 ‘이중 표현’을 바람직한 언어 사용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습관처럼 사용하는 ‘결연을 맺다’ 같은 표현이 우리말의 다양한 쓰임을 가로막기 때문이죠. ‘결연(結緣)’의 결(結)은 ‘맺을 결’입니다. 따라서 ‘결연을 맺다’라고 하면 “인연 맺기를 맺었다”는 이상한 말 꼴이 됩니다. ‘결연을 맺다’가 이상한 표현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결연을 하다’ ‘인연을 만들다’ ‘인연을 맺다’ 등 더욱 다양한 표현을 쓰려는 마음이 들게 될 겁니다. 표현력이 좋아지는 거죠.
게다가 모든 국어사전이 여전히 ‘늘상’(‘늘’은 순우리말이고, ‘상(常)’은 “늘”을 뜻하는 한자말임)을 “‘늘’의 잘못”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역전 앞’ 역시 국립국어원은 ‘역 앞’으로 쓰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 ‘앙케트’이면 ‘앙케트’이고 ‘조사’면 ‘조사’이지 ‘앙케트 조사’는 좀 우스꽝스럽습니다. ‘이벤트 행사’도 마찬가지고요. 마치 ‘밀크 우유 좋아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이중 표현을 두고 이랬다 저랬다 하니까 좀 헷갈리시죠? 미안한데, 우리말이 원래 그렇습니다. 두부 자르듯이 쉽게 둘로 나눌 수 없는 겁니다. 이 때문에 국어학계에서도 ‘이중 표현’을 두고 ‘쓸 수밖에 없는 말’이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적극 권장할 우리말이라고는 절대 얘기하지 않습니다. 바르게 고쳐 쓰면 백번 좋다고들 하지요.
이런 이중 표현은 정말 많습니다. ‘간단히 요약하다’ ‘결론을 맺다’ ‘과반수를 넘다’ ‘제가 보는 견지에서’ ‘돈을 송금하다’ ‘떨어지는 낙엽’ ‘보는 관점에 따라’ ‘만족감을 느끼다’ ‘말로 형언할 수 없다’ ‘맡은 바 소임’ ‘방치해 두다’ ‘서로 상통하다’ ‘신속하고 빠르게’ ‘쓰이는 용도에 따라’ ‘아는 지인’ ‘이득을 얻고’ ‘지난해 연말’ ‘하얀 백사장’ 등등 헤아리기 힘들 정도입니다.
이들 표현을 찬찬히 살펴보면 한자말 중 하나가 앞뒤의 순우리말과 똑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즉 이러한 이중 표현을 쓰지 않으려면 순우리말과 뜻이 같은 한자를 쓰지 않거나 순우리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만족감(滿足感)을 느끼다’는 ‘감(感)’과 ‘느끼다’가 겹치는 말이니까 ‘만족(함)을 느끼다’나 ‘만족감을 얻다(나타내다)/누리다)’ 따위로 쓰면 되는 거죠. 또 ‘떨어지는 낙엽(落葉)’은 ‘떨어지는 잎사귀’ ‘가지에서 내려온 가을잎’ ‘뒹구는 낙엽’ 등 바꿔 쓸 말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들 예에서 보듯이 이중 표현을 쓰지 않으면 불편한 것이 아니라 표현력이 훨씬 좋아집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중 표현이 훨씬 편하면 그냥 써도 됩니다. < ‘당신은 우리말을 모른다 – 어휘 편(엄민용, EBS BOOKS, 2023. 8.31.)’에서 옮겨 적음. (2024. 1. 1. 화룡이) >
첫댓글 ‘초갓집’과 ‘상갓집’은 ‘가(家)’와 ‘집’이
겹치지만, 국립국어원은
이를 바른 표현과 바른말로 보고 있습니다.
또 공부했습니다..
'겹말'과 '이중 표현',
다른 말로 바꿔 쓸 수 있는지
늘 찾아봐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